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 장성우
  • 조회 수 4215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09년 3월 8일 23시 31분 등록
<<5기 연구원 2차 레이스 4회차 북 리뷰 제출물입니다.>>

 

“제국의 미래” - 에이미 추아 지음 / 이순희 옮김 / 비아북

 

 

저자에 대하여

 

 

에이미 추아(Amy Chua, 蔡美?)는 듀크, 스탠퍼드, 뉴욕 대학을 거쳐 2001년부터 현재까지 예일대 법대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필리핀 출신의 중국계 부모의 미국 유학 시절 1962년 일리노이의 샴페인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 경제학과를 1984년 졸업했으며 1987년 역시 하버드에서 국제법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년간 지방 법원의 서기로 근무했으며, 월스트리트의 법률회사 Cleary, Gottlieb, Steen & Hamilton 사에서 기업법 관련 실무를 경험했다. 현재 국제 비즈니스 거래와 법, 개발, 인종 갈등, 국제화와 법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그녀는 두 권의 베스트셀러를 썼다. 한 권이 ‘불타는 세계(World on Fire, 2003)’ 이고, 다른 한 권이 ‘제국의 미래(Day of Empire, 2007)’ 이다. 또한, 그녀는 국제법 관련하여 상당한 학술 논문을 작성했다. 사실 그녀의 연구 경력을 보면 불타는 세계가 다년간의 그녀의 현장 경험과 학문적 연구 경력의 결정판이라고 보여진다. 이 책에서 추아 교수는 자유시장과 민주주의의 확산이 민족주의와 결부되어 발생하는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시장과 민주주의의 확산이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필수 불가결하다는 오늘날의 교의에 대한 가장 극적인 반론”(뉴욕 타임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에서 추아 교수는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강요하는 무책임한 미국식 세계화는 태생적으로 민족주의 갈등의 촉발이라고 하는 폭탄을 잉태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분석하는 제국의 미래는 아마도 전작의 연장선 상에서 미국이 미국식 세계화를 계속 강제하여 새로운 갈등을 만드는 상황을 직시하고 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한 방안으로서 미국이 관용에 기반 한 전략을 계속 유지해야 할 당위성을 찾기 위해서 관용의 관점에서 과거 제국을 연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타는 세계의 서문에 보면 1994 9월 필리핀에서 잔인하게 피살 당한 아버지의 쌍둥이 남매인 고모의 이야기가 나온다. 고모는 소수의 중국인들이 경제적 부를 쥐고 있는 필리핀에서 성공한 중국인 사업가였는데, 필리인핀 운전수에 의해 살해되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경험이 불타는 세계의 저술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이민자로서 나름 성공한 자신의 과거에 대한 고찰이 제국의 미래의 저술 동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러한 그녀의 논조를 미국 외교의 현실과 정확히 접목해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련 붕괴로 인한 냉전 종식과 911 테러 이후 이루어지고 있는 미국 외교의 정책적 흐름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미국의 외교 트렌드를 잘 설명한 책으로는 월스트리스 저널 기자 출신으로 ‘Congressional Quarterly’의 편집장인 로버트 메리(Robert W. Merry)가 저술한 모래의 제국(Sands of Empire)’을 들 수 있다. 이 책에서 로버트 메리는 역사의 진보순환적 역사론에 기반 한 두 가지의 정책 기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역사를 둘러싼 진보론과 순환론은 미국의 외교정책을 이해하는 문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저서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자유민주주의는 인류사에서 최고의 정치체제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를 수용할 경우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후쿠야마가 제시한 보편체제라는 관념은 냉전 이후 미국 외교정책의 이념적 배경이 되고 있다. 후쿠야마의 주장의 뒷면에는 역사의 진보라는 관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인류가 단계별로 발전해 왔으며 앞으로도 진보를 거듭할 것이라는 개념이다. 이 관념은 냉전 종식 후 미국 대외정책을 좌우하는 관념적 엔진이 되어 미국을 재앙쪽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앞서 언급한 진보의 관념에 대응하는 관념으로서 역사의 순환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각기 다른 문화나 문명이 각각 시작되어 흥하고 성숙단계를 거쳐 쇠퇴한다는 것이다. 순환론적 역사관의 바탕에는 몇 가지 관점이 있는데, 첫째, 모든 문화와 문명은 서로 다른 존재로서 보편적인 문화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둘째, 한 문화가 생산한 생각이나 가치체계를 다른 문화에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명의 쇠퇴는 불멸의 법칙으로서, 서구 문명을 비롯한 모든 문명은 쇠퇴의 법칙의 적용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순환론은 진보의 관념을 거부한다. 특히 이 관념이 모든 인류에 적용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개념이 서 있다. 헌팅턴은 21세기의 질서는 문화의 힘에 의해 결정될 것인데, 문화적 본능, 문화적 정체성, 문화적 스타일, 문화적 증오 같은 힘이 21세기를 규정할 것이며, 문화적 힘은 지정학적인 맥락에서 인류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을 설파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종말개념이나 세계화의 논지를 거부했다. 당연히 역사 진보론도 부정했다. 그러면서 역사 순환론의 몇몇 핵심 논지를 수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서구의 쇠퇴인데 그는 서구의 쇠퇴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분석했다. 또한 역사 상에서 사라진 많은 문명을 예로 들며 보편적 문화라는 개념 또한 거부했다.

- 로버트 메리, “모래의 제국”, 16-18p 요약

 

로버트 메리가 언급한 역사 진보론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토머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등과 같은 몇몇 미국 언론인들이 펼치는 장밋빛 세계화의 우위 및 당위성의 핵심 근거를 이루고 있다. 세계화를 통해 결국 전세계적으로 시장경제체제가 확산될 것이며, 이를 통해 그 사회에 이성과 합리성이 증진되고 종국에는 서방의 자유민주주의로 뿌리내리게 된다고 이들은 주장하는데, 이러한 논지가 미국 네오콘의 강경한 외교 전략, , 미국의 군사력을 공격적으로 활용하여 권위주의적인 불량 정부들을 전복하고 그 자리에 민주 정권을 세우자는 전략의 사상적 토대가 되고 있다.

 

이러한 강경한 외교 정책을 반대하는 입장은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현재 미국이 세계의 평화를 위한 처방으로 내세우고 있는 민주주의나 자유의 확산 같은 정책이 오히려 불안정과 유혈충돌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예견한 주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로버트 메리와 에이미 추아 역시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로버트 메리는 모래의 제국에서 냉전 종식 후 미국의 대외정책을 이끌고 있는 보편주의자들의 세계관과 그 의미를 살피면서, 진보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의 허구를 설명하고 있고, 에이미 추아는 과거 제국의 연구를 통해 자유주의의 강제가 아닌 전략적 관용에 기반 한 자유주의의 전향적 발전 노력이 중요함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911 사태를 기반으로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이 강경 노선으로 선회하였다. 2002 9월 발표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은 군사적인 수단들을 동원해서라도 탄압적인 독재자를 몰아내고 자유 시장과 민주적 제도들을 그 자리에 바로 세운다는 미 정부의 공약이었다. 그 전략에는 우리는 세계 구석구석에 민주주의, 발전, 자유시장, 자유 무역의 희망적인 미래를 뿌리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이다.”라는 의지가 명시되어 있다. 국가안보전략은 단극화된 세계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미국의 결심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다.

 

로버트 메리와 에이미 추아는 공히 제국을 추종하는 강경한 외교 기조와 이를 지지하는 여론에 대해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먼저, 로버트 메리는 역사적으로 선의적 패권국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패권국이 갖게 되는 패권적 야망은 필히 위협적이고, 잔인하며, 야만적일 수 밖에 없어서 패권국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해외에서 유혈 사태를 피할 수 없음을 경고했다. 또한 제국적 충동은 아무리 민주주의라는 가치로 포장한다고 해도 자신의 민주주의 제도를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녀는 민주주의란 본질적으로 무너지기 쉬운 제도이므로 만일 미국이 계속해서 제국적 야망을 추구한다면 공화정을 수호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며, 건국의 아버지들이 남긴 약하지만 신성한 제도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호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선택임을 주장하고 있다.

 

다음으로, 에이미 추아는 미국이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정적으로 역사를 놓치고 있는데, 초강대국의 의미는 정복에서 교역으로, 침략으로부터 이주로, 전제정치로부터 민주정치로 변모했으며, 모두 공히 접착제라고 불리우는 근본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감안할 때 미국 제국을 건설하는 것, 즉 다른 나라들의 정권을 변화시키고 미국식 제도를 강제하는 일에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쓰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이렇게 전 세계를 자신과 똑 같은 모습으로 개조하려는 무의미한 일을 자청하기 보다는 자국의 역사와 원칙에 더욱 충실한 채 세계를 위한 본보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현명한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접착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미국이 자국의 주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세계의 사람들과 공통의 목적의식, 혹은 공통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이 책을 통해 미국의 여론에 호소하고 있다. 로버트 메리는 보편론자들에 의한 미국의 외교정책에 이렇다 한 반발을 보이지 않고 있는 미국 국민들의 무관심 풍토가 변하기를 바라면서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에이미 추아도 마지막 장에서 미국민들이 관용의 힘을 이해하기를 바란다고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이 다른 나라를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는 다자주의를 채택했을 때 이 새로운 다자주의를 미국민들이 굴복이 아니라 미국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임을 인식하기를 바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소련의 붕괴로 냉전 체제의 종식 이후 경쟁자가 없는 초강대국이 된 미국의 향후 진로 및 외교 정책과 관련된 많은 논의가 있었다.

(2)    하나의 흐름은 미국이 현재의 패권을 계속 유지해야 하며, 시장 경제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기반으로 다른 나라들의 문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의견들이다. ‘거대한 체스판에서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패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향후 잠재적 경쟁자로 부상할 나라들이 위치한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의 체스판으로 보면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게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에서, 토마스 프리드먼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통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자유민주주의는 인류사에서 최고의 정치체제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를 수용할 경우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으므로 미국은 지속적으로 이를 전파하는 외교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3)    이에 반대하는 흐름으로는 이러한 개입은 문명의 충돌을 더욱 격화 시킬 뿐이라는 의견으로서 새뮤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21세기의 질서는 문명의 힘에 의해 결정될 것인데, 현재 미국이 세계의 평화를 위한 처방으로 내세우고 있는 민주주의나 자유의 확산 같은 정책이 오히려 다른 문명의 반발을 불러 불안정과 유혈충돌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동일힌 가정을 기반으로 에이미 추아 교수는 불타는 세계에서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강요하는 무책임한 미국식 세계화는 태생적으로 폭탄을 잉태함을 강조하고 있다.

(4)    하지만 911 사태를 기반으로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이 강경 노선으로 선회하였다. 2002 9월 발표된 미국의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을 통해 군사적인 수단들을 동원해서라도 탄압적인 독재자를 몰아내고 자유 시장과 민주적 제도들을 그 자리에 바로 세우겠다고 미국 정부는 공약했다.

(5)    로버트 메리는 모래의 제국에서 선의를 가진 패권국은 존재할 수 없으며 패권국의 추구는 외부적으로 유혈 충돌을 촉발하고 내부적으로 미국의 핵심 가치인 공화정 민주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으므로 패권국에의 추구를 포기하고 미국의 공화정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한 전략임을 강조하고 있다. 에이미 추아는 다시 제국의 미래를 통해 전략적 관용이 영향력 유지의 핵심임을 강조하고, 외교 전략을 수정하여 건국 초기에 확립된 관용 기반의 고전적 가치를 확립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 두 가지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하나는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경제 위기이다. 이 두 커다란 변수가 조합되어 어떤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갈지, 그리고 에이미 추아는 이런 흐름에 맞추어 어떤 차기작을 준비할지 궁금해 진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문>

 

세계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단순한 초강국에 불과했고, 미국에게는 쉽게 증오심을 터뜨릴 수 있는 전제주의 경쟁국이 있었다. 10년 만에 미국은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세계적인 초강대국이 되었고, 미국의 세계적인 패권은 한계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미국의 쇠퇴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4p]

 

미국은 “모든 부문에서 우월, 혹은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즉, 미국은 경제적, 군사적, 기술적 측면에서의 우위는 물론이고 “태도와 개념, 언어와 생활양식에서의 우위”까지 손에 넣었다. [5p]

 

미국의 자신감은 흔들리고 명성은 짓밟히고 국고는 비어가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여러 신흥 강국들이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5p]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느냐 못하느냐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5p]

 

여기서 말하는 초강대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막강한 힘을 축적하여 세계를 지배했던 극소수의 사회들을 이르는 것이다. [6p]

 

과거 초강대국들의 성장과 몰락 과정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들이 들어 있다.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초강대국들은 하나같이 대단히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나라들이었다. 모든 초강대국들에게 관용은 패권을 장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제국의 쇠퇴는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쇠퇴의 씨앗을 뿌린 것 역시 관용이었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의 경우 관용은 결국 극적인 변화 지점을 건드려서 반목과 폭력을 유발했다. [7p]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취급할 나라 혹은 제국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 나라의 권력은 동시대의 경쟁국들이 장악한 권력을 분명히 능가해야 한다. 또한 그 나라는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경제력, 혹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그 나라는 지구상의 방대한 구역과 방대한 인구에 대해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8p]

 

한 사회가 한 지방이나 지역이 아닌 전 세계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기술적/군사적/경제적 면에서 세계의 최첨단에 서 있어야만 한다. 어떤 역사적 상황이라고 해도 세계 유수의 인적자본이라는 것은 어느 한 장소나 어느 한 인종 혹은 어느 한 종교 집단 안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한 사회가 세계적인 차원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인종, 종교, 배경을 따지지 않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능력과 지혜를 갖춘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야만 한다. 이는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초강대국들이 해온 일들이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의지해 온 것이 바로 관용이다. [9p]

 

내가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권과 관련된 현대적인 의미의 관용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 하는 관용은 정치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의미한다. 이는 아주 이질적인 사람들이 특정한 사회에서 생활하고 일을 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명확하게 이야기 하면 인종, 종교, 민족, 언어 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회에 참여하고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말한다. [10p]

 

이 책의 핵심적인 개념은 ‘상대적인 관용’이다. 세계적인 패권을 다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회가 절대적인, 영원불변의 기준으로 볼 때 관용적이야 아니냐가 아니라, 경쟁자들과 비교해서 더 관용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11p]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관용이 세계 제패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 그리고 역으로 말하면, 불관용은 초강대국의 쇠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12p]

 

세계적인 패권을 획득하고 유지할 목적이라면, 강압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이고, 박해는 그 대가가 지나치게 비싸며, 인종적 혹은 종교적 균질성은 근친교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생산성이 떨어진다. [12p]

 

헌팅턴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있다. 첫째, 초강대국들의 핵심 집단이 불관용으로 돌아서서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다시금 옹호하면서 토착 문화 보호주의나 호전적인 배외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이방인들’은 물론 ‘동화시킬 수 없는’ 집단들까지 내쫓거나 배제할 때 그 초강대국은 분열과 붕괴의 먹이가 되고 만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정체성을 하나의 고유한 인종 집단 혹은 종교 집단에 묶어놓으려는 시도는 미국의 사회 구조를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또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헌팅턴은 미국이 안고 있는 접착제의 문제는 국내가 아니라 국외에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경 밖에서 보면,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 전역의 수십억 인구를 미국에 단단히 묶어놓을 수 있는 접착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19p]

 

역사를 돌이켜 보면, 초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외국 주민들의 충성, 그것까지는 아니라도 하다못해 묵인이라도 확보할 방법을 찾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군사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p]

 

로마는 고대의 제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멀리 떨어져 있고 몹시 이질적인 민족들에게 엄청난 흡입력을 발산하는 정치적 동맹과 문화 상품을 제공했다. 그러나 고대의 로마 제국에게는 한 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 로마는 자신에게 정복되어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로마 제국의 일부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로마가 아니다. 미국은 성숙한 민주국가로서는 최초의 초대강국이므로, 외국의 주민들을 국민으로 삼는 것을 원하지도 않고 그런 시도도 하지 않는다. [20p]

 

미국이 담당하고 있는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서의 역할과 스스로 공언하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횃불이라는 역할이 서로 충돌하면서 광범위한 반미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21p]

 

현대의 미국은 안타깝게도 미국의 지배를 받는 세계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로마보다는 ‘야만적인’ 몽골 제국에 훨씬 가깝다. [21p]

 

‘선택적 편견’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논지에 부합되는 사례들은 선택하고 그렇지 못한 사례들은 무시하여 자신의 논지를 ‘증명’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21p]

 

참으로 모순된 이야기 같지만,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것 뿐이다. [25p]

 

 

<< 1부 : 고대 제국의 관용 >>

 

<1장 최초의 패권 국가, 페르시아 ? 아케메네스>

 

파라다이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전체의 현황을 드러내는 생생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기원전 559년경 키루스 대제가 세우고 20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현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다양한 문화와 개방적인 종교를 갖추고 있었다. [34p]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로마제국은 물론이고 고대의 그 어떤 제국보다 큰 영토를 다스렸던 역사상 최초의 패권 국가였다. 전성기에는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4,200만 명을 거느렸다. [34p]

 

‘아리아’라는 말은(후일 나치에 의해 왜곡되었지만) 본래 동쪽으로는 인도-유럽어와 방언을 사용하던 사람들과 러시아 남부와 중앙 아시아에서 인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란 고원으로 이주해 온 다양한 민족들을 이르는 언어학적 명칭이었다. [36p]

 

‘이란’이란 이름은 ‘아리아의 왕국’이라는 뜻의 페르시아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케메네스 왕국은 현재의 이란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36p]

 

우선 아케메네스 왕국의 통치자들은 역사적인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음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왕들의 승리와 행적을 주로 구전을 통해서 후세에 기록했다. [36p]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인의 적일 때도 있었고, 속민일 때도 있었고, 정복민일 때도 있었다. 그러니 그리스 출신의 작가들이 늘 페르시아 역사에 대한 공정한 서술자 역할을 담당했으리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37p]

 

키루스가 썼던 전략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참수’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도자의 머리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지도력을 잘라내는 전략을 썼다. 키루는 새로운 왕국을 정복하면 그곳의 통치자를 내쫓되 그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장해 주고, 그 대신 주 혹은 군을 다스리는 총독인 사트라프를 세웠다. 하지만, 사트라프 치하의 백성들에게는 거의 간섭하지 않고 그들이 고유의 신들과 다양한 문화를 누릴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키루스의 종교적 관용일 것이다. 그는 피정복민의 사원, 종교의식, 그리고 신들을 놀라우리만큼 존중했다. [39p]

 

키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바빌로니아에 입성하자마자, 그곳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마르두크 신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그는 자신이 바빌로니아 백성들의 신 마르두크의 선택과 도움을 받는 해방자인 것처럼 처신했다. [40p]

 

키루스가 사용했던 관용 정책은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전략과 편법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키루스는 해당 지역의 신을 포용함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고, 해당 지역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함으로써 피정복민의 저항과 반란 가능성을 줄였다. 따라서, 아케메네스 왕조에서 관용은 그저 효과적인 전략이었을 뿐이다. [44p]

 

아케메네스 왕조가 권력을 확실하게 과시하기 위해서 썼던 전략은 피정복민을 균질화하고 ‘페르시아화’하는 전략이 아니라, 민족과 문화적인 측면에서 제국이 가진 막대한 다양성을 보존하고 통합하고 개발하는 전략이었다. [54p]

 

키루스와 다리우스는 전략적 관용이라는 전략에 정통했으며,덕분에 “당시에 알려져 있던 세계 전체와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대규모의 영토”를 아우르는, “아프리카의 불타는 사막으로부터 얼음으로 뒤덮인 중국의 국경까지” 뻗어나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54p]

 

아케메네스 왕조 후기가 불관용, 불안, 폭력의 증대라는 특징을 보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 책의 기본 논제와 일치하는 것이다. 페르시아 통치자들의 불관용성이 강해짐에 따라, 방대한 영토 내의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거나 여러 피정복 민족들의 장점을 활용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57p]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관용이 후일에 싹틀 불관용의 씨앗을 뿌려놓았다는 점이다. [57p]

 

페르시아인들은 전례 없이 많은 수의 민족들을 자국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는 피정복민을 페르시아화 하거나 각 지역의 종교, 언어, 사회구조, 열망을 억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군사적으로는 통합되었지만, 현대 국가들과 같은 지배적인 정치적 정체성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급속히 뻗어 나가는 제국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통의 종교나 언어, 또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58p]

 

아케메네스 제국의 피정복민들은 대부분 제국에 대해 충성심을 느끼거나 제국에 소속된 것에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반면에 서기 4세기에 로마제국의 피정복민들은 제국에 대한 특별한 충성심과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에는 다양한 민족들의 마음을 움직여 공동의 규범을 옹호하게 할 만한 특성이 없었다. [58p]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 덕분에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 강화해 왔던 각각의 민족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반감을 쌓아가다가 결국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이질적인 민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관념 체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중되어 있던 권력은 결국 지배력을 잃게 되었다. [59p]

 

알렉산드로스는 권력이 커짐에 따라 차츰 위대한 페르시아 제왕들의 선례를 따랐으며, 피정복 민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전략적인 관용을 베풀고 인종에 상관없이 재능 있는 전사들과 지도자들을 군대와 행정부로 끌어 들였다. [61p]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에 입성했을 때 이방의 정복자로 처신하지 않고, 살해당한 다리우스의 원수를 갚은 복수자이자 아케메네스 왕조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처신했다. 또 그는 키루스에게 경의를 표하고 자신에게 맞서서 싸웠던 수 많은 아케메네스의 사트라프들을 복권시켰다. 또한 그는 페르시아여인과 혼인을 하고 다른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페르시아 여인과 혼인할 것을 권장했다. 이런 정책들은 수 많은 그리스 사람들을 혼란과 실망으로 몰아 넣었지만, 페르시아 귀족은 물론 각 지역 주민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는 주효했다. [61p]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왕관을 쓰고 페르시아 고유의 흰 옷에 흰 띠를 두르고 자신이 탄 말에도 페르시아 마구를 씌웠다. 하지만 이는 전략적 관용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전략은 알렉산드로스가 수사에서 거행한 집단 결혼식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63p]

 

알렉산드로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전역에서 병사들을 모집하여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군대를 만들었다. [64p]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뜨거운 야망’은 전쟁과 정복이었다. 그가 ‘인류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 유럽 대륙 전역을 약탈하고 피와 폭력의 바다를 헤치고 나아가는 꿈을 꾸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평생을 바쳤고, 전설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쌓아올린 업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관용이었다. [65p]

 

알렉산드로서의 정복 덕분에 그리스의 언어, 문학, 미술, 건축, 철학은 지중해를 건너 여러 대륙,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이집트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했던 여러 도시 국가에서는 ‘야만인’의 사상이 그리스어로 옮겨져 제국에 흡수되었고, 이를 통해 혼성 문화가 탄생했다. 핼레니즘이라고 알려진 이 문화는 이후 기독교와 서구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엄청난 군사적 위업을 이루었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페르시아 왕들은 결코 이룩하지 못했던, 대륙을 가로질러 형성된 고도의 문화적 통일체였다. [66p]

 

<2장 팍스로마나, 세계인의 탄생 ? 로마>

 

서구를 상징하는 제국을 하나 꼽는다면, 로마 제국을 들 수 있다. 로마 제국은 영토 면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 밖에 거의 모든 면에서 그 이전의 초강대국을 능가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전쟁 조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로마 제국은 하나의 관념이었다. 로마 제국의 외떨어진 변방에 사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로마인’이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도 그들은 로마인이 되었다. 전성기에 로마 제국 안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6,000만 명에 달했다. 로마인들이 “로마의 영토는 세계의 경계에까지 뻗어 있다”고 믿을 정도로 로마의 영토는 방대했고, “경계의 신인 테르미누스는 로마가 탄생할 때 자리를 비웠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68p]

 

로마는 엄청난 규모의 군사력뿐만 아니라 서구 문명의 새로운 정점을 상징했다. 로마는 과학, 문학, 예술의 절정을 이루었으며, 1,000년이 넘도록 이 분야에서 로마를 앞지르는 나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69p]

 

로물루스가 전설적인 도시국가 로마를 건국했던 기원전 753년부터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튀르크에 함락된 서기 1453년까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로마의 영광’은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70년부터 서기 192년까지가 로마 문명의 정점기였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팍스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가 이어지고,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서 아프리카의 농경 지역에 이르는 로마의 여러 속주들 사이에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70p]

 

로마의 왕들은 각 지역 지배층들의 도움을 받아 방대한 제국을 통치했다. 하지만, 로마 제국에는 각 지역의 지배층이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상한선이 없었다. 로마에서는 제국의 각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심지어는 황제가 되기도 했다. [71p]

 

스페인 여성의 몸에서 태어난 트라야누스는 속주 출신으로 로마 황제가 된 최초의 인물인데, 그의 즉위는 제국의 고위직이 “인종과 국적을 따지지 않고, 교양을 갖춘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원한 도시’ 로마에는 온갖 피부색과 배경, 그리고 온갖 문화적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았다. [72p]

 

로마의 명사들 역시 여러 속주에서 탄생했다. 최고 절정기의 로마는 “야만인이나 미개한 민족” 출신도 정치 과정에 참여하고 제국의 권력과 명성에 한몫 할 수 있었던 톡특한 문화를 갖추고 있었다. 로마가 관용적인 입장을 택하게 된 데에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의 편협한 태도와 인종 분리 정책은 분노를 일으켰고, 이것은 대부분 전쟁으로 이어졌다. [72p]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무너진 데에는 피정복민을 이방인이라고 멸시한 것 말고는 다른 원인이 없지 않은가? [73p]

 

윌슨에 따르면 “로마인들이 자국의 힘을 전 세계로 확장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주민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윌슨은 로마가 전략적으로 채택했던 관용이야말로 “제국을 확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73p]

 

로마는 아무리 작은 액수라도 세금을 내는 지역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고유의 관습을 유지하게 했다. 브리튼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로마 제국의 신민들은 팍스로마나와 로마 법률 덕분에 혜택을 입었고, 이로써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질서와 안정이 이룩되었다. [75p]

 

웅변가 키케로는 기원전 5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로마 제국의 건설과 로마 시민들의 명성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창건자인 로물루스가 사비니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적들을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여서라도 나라를 키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는 점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로물루스의 선례를 따라 이방 민족에게 계속 시민권을 내 주었다.” [75p]

 

정복된 도시는 자체의 법률에 따라 자체의 지도자에 의한 통치를 지속할 수 있었으나, 두 가지 조건만은 감수해야 했다. 첫째, 각 도시는 로마와는 자유롭게 교역을 할 수 있으나, 상호 간에는 자유롭게 교역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소규모 도시 국가들의 로마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이 급격히 심화되었다. 둘째, 각 도시는 로마에 병력을 공급해야 했다. 이런 평화 조약 덕분에 로마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크게 성장했다. [76p]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전략적인 관용 정책이 거둔 개가였다. 한니발의 전투 전략은 카르타고가 몇 번 승리를 거두면 로마의 이탈리아 연합군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니발의 예상과는 달리 로마의 동맹국들은 수없이 이어지는 고된 전투 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고, 결국 로마는 승리를 거두었다. [76p]

 

카르타고 정복을 기점으로 로마의 정책은 크게 선회하였고, 이후 로마제국의 진로는 완전히 달라졌다. 로마는 초기의 팽창기에는 직접적인 병합 방식을 거의 채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기 1세기경에 로마는 전략을 바꾸었다. 아우구스투스와 트라야누스를 비롯한 황제들은 이미 정복한 영토들을 병합하기 위해 군사 행동에 나섰다. 로마의 경계는 대부분 거대한 수로를 따라 확정되었다. 또한 도로망을 크게 확장했다. 로마 황제들은 직접 통치를 하면서도, 급격한 경제적, 사회적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주민들의 생활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77p]

 

기원전 150년부터 서기 70년까지 로마는 놀라운 속도로 팽창하여 유럽 중부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그리고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로마는 이런 군사 활동을 펼치는 동안에도 피정복민의 지도자들에게 시민권을 주었으며, 로마 법률에 저항하는 나라는 가혹하게 응징했다. 로마는 건국 후 6세기 만에 작은 도시 국가에서 지중해 연안 전체를 아루르는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하여, 지중해의 이름을 “로마의 호수”로 바꾸어 놓았다. [78p]

 

대제국 로마는 현대의 시카고 학파가 우쭐대면서 떠벌리고 있는 전지구적인 차원의 경제와 자유무역, 시장 개방을 일찌감치 실현한 본보기였다. 로마의 패권이 강화됨에 따라, 초기에 부과되었던 도시 국가들 사이의 교역 제한과 수입세는 사라졌다. 제국의 경계가 확정되면서, 로마는 대규모 자유 무역지대가 되었다. 이렇게 상업이 유례없이 번창한 것은 유럽 각지의 강들과 지중해의 뱃길, 그리고 로마의 도로로 이루어진 특별한 운송망 덕분이었다. [82p]

 

로마 사람들은 이런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들 다양한 ‘야만인들’을 모조리 제국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야만인들의 재능을 활용하고 그들이 로마 내에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게 했으며 대부분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했다. 로마 제국의 가장 흥미로운 면모는 사람들이 로마 제국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86p]

 

또한 로마인들은 유용하다는 판단이 서기만 하면 서슴없이 다른 민족들의 전통과 지식, 관습을 받아들였다. [87p]

 

주목해야 할 점은 로마는 그리스 로마 문화를 성공적으로 수출하면서도 각 지역의 언어나 전통을 말살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88p]

 

로마가 다른 민족들을 자국 내로 편입시키는 전략을 쓰면서 추구했던 목적은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여 다양성을 고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민족들을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로마의 고나습, 생활양식, 풍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인종적인 혈통에 관계없이 어떤 집단이든 완전히 제국에 통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로마는 너그러운 나라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야만적인’ 관습을 보존하거나 존중하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91p]

 

로마의 관리들은 정복한 민족의 지도 계층에게 로마의 규격화된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고, 이에 순응할 경우에는 이를 보상해 주는 정치, 경제 제도를 만들어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출신 민족과 인종은 로마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국으로 흘러 드는 새로운 민족들의 끝없는 대열을 통합시키고 동화시키는 적극성과 능력, 이것이야말로 로마가 위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93p]

 

전성기 로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종교에 대한 코스모폴리탄적인 관점이었다. 로마 사람들은 페르시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신론자들이었으며, 민족이 다르면 숭배하는 신도 다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로마는 이방의 신들을 “손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전염병이나 적의 침입과 같은 국가 비상 시에는 도움을 받기 위해서 명성이 있는 이방의 신을 로마로 불러들였다. 대부분의 경우 로마의 종교는 제국에 편입된 새로운 지역의 토착 종교와 공존했다. [94p]

 

그러나 로마의 종교 정책에도 역시 제한선이 있었다. “로마에 동화되지 않았거나” 도덕적인 면에서 혐오감을 준다고 여겨지는 신앙이나 관습은 금지되었다. [95p]

 

로마 사람들은 각 지역의 신들을 제국의 종교 제도 안에 통합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유일신 종교로서 로마의 우상 숭배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대교와 기독교의 반격은 매우 격렬했다. [95p]

 

유대인들은 로마의 주요 도시들 안에 유대교 회당과 자체 법정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유대 구역을 만들고, 히브리어 대신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쓰라는 요구에 저항했다. 유대인들은 독자적인 공동체를 꾸리려고 했기 때문에 많은 로마인들에게서 “내부의 야만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96p]

 

기독교는 로마의 관용 정책에 특이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신들을 부인하고 황제에 대한 순종의 맹세를 거부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마 군단에 처음 정복되었을 때 “예로부터 내려오는 종교”라는 자격을 인정 받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이런 의무를 면제 받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제국 전역에서 신봉자가 늘어가고 있는 “새로운 종교”였으므로, 유대교와 동일한 자격을 인정 받을 수 없었고, 로마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도전하지 않는 종교는 묵인해 준다는 로마의 암묵적인 조건을 위배해 가면서까지 보호 받을 권리도 없었다. [98p]

 

관용은 로마가 세계적인 대국으로 발전하고 팍스로마나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땅에 뿌려진 궁극적인 붕괴의 씨앗이었다. 초기의 위대한 황제들은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였고, 그들의 관용 정책은 전성기에는 로마에 이롭게 작용했다. 그러나 동쪽과 북쪽의 민족들은 로마의 관용 정책 덕분에 예전의 사회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자율성을 누리면서 상대적으로 ‘로마에 동화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차츰 제국의 통치에 반발하여 독립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제국이 성장하고 제국에 속하는 민족이 갈수록 다양해지면서, 제국 내의 심각한 이질성을 해결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4세기에 들어서자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쪽 지역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쪽 지역 사이의 불화는 갈수록 깊어졌고, 395년에 제국은 완전히 두 개로 갈라졌다. [99,100p]

 

그러나 ‘지나친 다양성’은 로마 쇠퇴의 부분적인 원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고약한 문제는 전성기가 지난 로마에서 종교적 박해와 인종적 불관용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불관용은 로마 쇠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제국의 분열을 재촉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100p]

 

기독교는 새롭게 시작된 불관용 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기독교는 처음에는 불관용 정책의 표적이었고, 나중에는 불관용 정책의 주요한 원천이었다. 서기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이른바 ‘기독교에 대한 대박해’를 시작했다. 이 황제는 대제국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열망 속에서 ‘로마에 동화되지 않은’ 기독교인들을 절멸시키려는 결심을 굳혔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가 대제국의 영광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썼던 방법은 전성기의 로마의 가치관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었다. 10여 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조직적인 박해에 시달렸다. 하지만 뜻밖에도 거대한 로마와 애송이에 불과한 기독교 교회 사이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교회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짧지만 격렬한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서 제위에 올랐고, 서기 312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의 개종과 함께 수백만 명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끝이 나고 기독교인이 아닌 주민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100,101p]

 

로마 몰락의 원인은 로마가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치명적인 불관용 정책을 펼침으로써 제국의 다양한 주민들을 성공적으로 통합시켜왔던 동화 및 통합 전략을 훼손시킨 데 있다. [101p]

 

콘스탄티누스와 그 이후의 황제들은 종교적인 통합이 제국을 소생시키고, 급증하는 야만인의 공격에 맞서서 제국의 힘을 강화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우상 숭배와 이단에 대한 공격은 자멸적인 결과를 낳았고, 야만인들의 침입을 촉진했다. [102p]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고대 로마인들은 모든 종교를 용인하여 제국을 강화했는데, 그들의 후계자들은 지배적인 종파를 제외한 모든 종파들을 차례로 제거하여 제국을 약화시켰다.” [102p]

 

처음에 로마는 다양한 게르만 부족들에 대해서도 전통적으로 구사해온 고나용과 동화 전략을 계속 사용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게르만 난민들의 동화는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늘 분란이 일어났다. 초기부터 게르만족들은 이따금 로마인들의 학대와 모욕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으로는 땅을 받았어도 농사짓는 법을 몰라 늘 굶주리던 게르만족이 부유한 로마인들을 공격하고 약탈하는 일도 흔히 벌어졌다. 이렇게 해서 로마인들과 게르만족 사이의 불신과 적대감은 나날이 쌓여갔다. 4세기말 로마는 처음으로 피지배민족들에 대한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로마는 종족 간의 결혼을 금지했고, 로마 사람들이 바지를 비롯한 야만인의 옷을 입는 것을 금지했으며, 야만적인 형식의 기독교를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반목은 나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로마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붕괴했다. “증오와 멸시에 시달리던” 게르만족들은 “한때 함께 영광을 나눌 것으로 믿었던 사람들을 증오하면 보복들 자행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그 자리에는 현재 유럽 국가들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호전적인 ‘야만인’ 왕국들이 들어섰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았던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1,000년 이상 존속했다. [104,105 요약p]

 

다양한 인종, 다양한 종교, 다양한 배경을 가진 민족들을 끌어 모으고, 동화시키고, 보상하고,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때 로마는 번영했다. 로마의 붕괴는 로마가 도저히 동화시킬 수 없는 민족들, 혹은 로마가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문화와 습관을 가지고 있는 민족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동화시키는 데 실패하면서 시작되었다. 종교적인 불관용과 인종적인 불관용이 결합되면서 로마는 전쟁과 내란에 휩싸였고, 전쟁에서도 내란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는 ‘순수성’을 유지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바로 그 시점부터 로마는 분열과 망각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기 시작했다. [106p]

 

 

<3장 중국의 황금기 ? 당>

 

세계 전역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은 중국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나라를 꼽으라면 당 왕조를 꼽는다. 당 왕조는 중국이 유례없는 번영을 이루면 정치적 패권을 휘둘렀던 시대이자 문학과 예술의 전성기로서 이후 왕조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본보기였다. 당 왕조는 당대의 그 어떤 제국보다 중국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개방적이고 세계주의적인 나라, 인종적,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나라였다. [112p]

 

시황제의 통치 기간은 짧았지만 그가 세운 강력한 원칙은 중국사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등장하게 된다. 그 원칙은 바로 중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다양성에 대한 가혹한 억압이 필요하다 것이었다. 그 후 2000년 이상 중국의 불관용은 인종 및 종교에 대한 산발적인 억압, 그리고 문화적인 ‘숙청’ 외국인과 외국의 사상에 대한 거부,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중화사상과 중국 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단언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112p]

 

중국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당 왕조는 야만인의 피가 섞인 조상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에 의해 창건되었으면서도, 세계주의,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외 개방이라는 두드러진 특징을 보였다. [114p]

 

한 왕조의 몰락 이후로 중국의 관점은 완전히 바뀌었다. 당 황제들이 통치권을 장악한 618년까지만 해도 불교는 중국의 유력한 종교였으며, 토착 종교인 도교보다 많은 신도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불교는 중국의 특유한 요소들을 흡수하고 수용하고 중국에 맞게 변형되어 있었다.[115p]

 

이방 문화와 종교 그리고 영향력에 대해 중국 역사상 가장 관용적인 왕조가 탄생했다. 이런 관용적인 태도를 인격적으로 구현했던 인물이 바로 당의 두 번째 황제인 태종이었다. 태종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중국의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현명하고 영웅적인 인물로 존경 받고 있고, 일부 역사학자들로부터 당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로 대접 받기도 한다.[116p]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합쳐지면서, 이방의 문화와 종교, 그리고 영향력에 대해 중국 역사상 가장 관용적인 왕조가 탄생했다. 이런 관용적이 태도를 인격적으로 구현했던 인물은 바로 당의 두 번째 황제인 태종이었다. [117p]

 

태종의 꿈은 중국의 황제이자 돌궐족의 칸으로서 중국인과 야만인을 동시에 다스리면서, 중국인과 야만인이 동등한 자격을 가지는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118p]

 

태종의 처세는 중국 역사상 종교 다원주의가 매우 융성했던 시대로 손꼽힌다. 태종은 불교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먼 서역에서 외국인들이 가져온 생소한 종교들까지 기꺼이 받아들였다. 태종의 치세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주로 외국인 신도들에 의해서 자유롭게 신봉되었다. [123p]

 

명황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군사적 정복 사업과 활발한 외교정책을 병행했다. 외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그의 치세에 최고 절정에 달해서, 카슈미르에서 한반도, 이란에서 베트남에 이르는 비 중국인 민족들이 당의 패권에 포섭되었다. 황도 장안은 방대한 당 제국의 중심이었다. 장안은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127p]

 

명황은 “모든 나라의 궁중 예법이 똑같을 수는 없다”면서 필요한 절차를 생략하라고 명령하는 놀라운 자제력을 발휘했다. [129p]

 

실제로 일부 역사학자들은 중국이 유럽의 지배에 저항할 수 없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청 황제들의 서구에 대한 무지를 꼽는다. [134p]

 

고대 로마제국과 페르시아제국의 경우도 그랬지만, 관용은 당 제국의 엄청난 영토 확장과 영향력 강화에 필수적인 요소였던 동시에 제국쇠퇴의 씨앗이었다. 참으로 모순 된 일이지만, 당의 몰락은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부여 받은 한 외국인의 반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35p]

 

당 제국이 쇠퇴의 길에 접어드는 순간부터 불관용이 시작되었다. 한가지 문제는, 당 제국이 ‘야만인들’과 중국인들을 한데 묶어줄 공통된 정치적, 언어적, 문화적 ‘접착제’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136p]

 

결국 ‘세계적인 제국’을 세우려던 태종의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40p]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등불처럼 번지면서 다양한 인종을 감싸 안던 당의 세계주의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과거제도를 통해서 입신한 동남부 출신의 중국인 선비와 관리들은 야만인의 피가 섞인 타락한 북부 출신 귀족들 때문에 중국의 도덕과 문화가 오염되고 있다는 생각을 퍼트렸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국 고유의 가치와 고대 중국의 문화를 지키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141p]

 

<4장 유럽을 삼킨 초원의 지배자 ? 몽골>

 

지금 몽골 초원의 고지대에는 야생의 풀들과 목동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750년 전에는 웅장한 천막 도시 카라코룸이 있었다. 야크 펠트로 만든 유르트(몽골 사람들이 게르라고 부르는 흰색의 둥근 천막집)에 살던 몽골의 칸들을 글을 일고 쓸 줄 모르면서도, 로마제국보다 훨씬 넓은 제국을 다스렸다.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 사람들에게는 과학도, 공학 기술도, 고유한 문자도 없었다. 그들을 농사를 짓지 않았고 빵을 구울 줄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바그다드, 베오그라, 부하라, 키예프, 모스크바, 다마스쿠스, 사마르칸트 등 당대의 거대한 도시들을 포함해서 당시 알려져 있던 세상의 절반을 다스렸다. [145p]

 

칭키즈칸은 뛰어난 군사 책략가였다. 또한 몽골족은 전투에서는 아주 잔인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칭기즈칸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거나 당대의 통치자들과 비교해 보아도 대단히 관용적인 정책을 취했다. 유럽인들이 이교도들을 말뚝에 묶어 불에 태우고 있을 때, 칭기즈칸은 만인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공표했다. 그는 또한 다양한 인종들을 포용하고, 피정복민들 가운데 유능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골라 공직에 임용했다. 몽골족이 세계의 패권을 손에 놓고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잔혹함이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관용에 있었다. [147p]

 

테무친이 열 여섯 살이던 1178년에는 몽골 제국이나 수도는 물론이고, 몽골이라는 민족도 존재하지 않았다. 초원 지대에는 희미한 혈연 관계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싸움을 벌이는 수십 개의 보족과 씨족이 살고 있었다. [148p]

 

장성한 뒤에 테무친은 혈통에 기초한 초원 지대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완전한 혈족 체제 대신 공적과 충성도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체제를 도입했다. [148p]

 

테무친은 승리를 거둘 때마다 늘 똑 같은 기본 전략을 사용했다. 그는 패배한 부족의 지도자와 대부분의 남자 ‘귀족’들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가 아니라 동등한 성원으로 자신의 수하에 편입시켰다. [150p]

 

테무친은 오랫동안 초원 지대를 갈라놓았던, 전통적인 부족의 결속을 깨뜨리고, 부족 간 결혼을 장려했으며, 그 자신도 타타르족 여성 두 명을 소실로 맞았다. [150p]

 

1203년 테무친은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초원지대를 분열시켜왔던 전통적인 씨족별, 혈통별 분할 제도를 타파하기 위해서 몽골 군대를 재조직했다. 그는 여러 민족 출신의 병사들을 섞어 열 명으로 이루어진 분대를 만든 다음, 그들에게 출신 부족에 관계없이 형제가 되어 함께 살고 서로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그는 분대 열 개를 모아 중대를 만들고, 중대 열 개를 모아 대대를 만들고, 대대 열 개를 모아 ‘투멘’을 만들었다. 1만 명의 병사가 소속된 투멘의 지휘관은 테무친이 직접 임명했다. 부족을 초월한 십진제는 군대뿐 아니라 몽골의 모든 사회 조직의 구성 원칙이 되었다. [151p]

 

전통적으로 초원 지대의 지도자들은 늘 가까운 친척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지만, 테무친은 재능과 충성도를 기준으로 부관과 자문관을 선발했다. 테무친의 가까운 측근들과 고위 장군들 가운데에는 테무친과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뿐만 아니라 테무친은 측근 가운데 믿음이 가지 않는 ‘혈연’은 주저 없이 몰아냈다. 장군 선발에 대한 테무친의 판단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가 막힐 정도로 정교했다. 그는 대담함 뿐 아니라 교활함과 참을성도 높이 샀다. 대담하긴 하나 무모한 사람에게는 지휘권을 주지 않고, 군수물자를 보호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151p]

 

“예수타이는 어느 누구보다 용감하고 어느 누구보다 귀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오랜 행군을 해도 지치지 않고 허기와 갈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거느리는 장교들과 병사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급 지휘권을 맡을 만한 적임자가 아니다. 장군은 허기와 갈증에 대해 생각하면서 부하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부하들과 동물들의 힘을 아껴 쓸 줄 알아야 한다.” [152p]

 

테무친은 여느 때와 같이 완 칸의 추종자들 가운데 배신 전력이 없는 사람들만 골라서 받아들였다. [154p]

 

권력을 잡은 칭기즈칸은 새로운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급진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예로부터 초원 지대를 분쟁으로 몰아넣었던 동물 절도와 여성 납치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자에게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주목해야 할 점은 칭기즈칸이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정령 신앙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절대적인 자유를 선포했다는 사실이다.  [155p]

 

칭기즈칸은 어느 누가 보아도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몽골 군대는 전통적인 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몽골 군대는 기병이 없고 전원이 기마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기동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기습 공격을 감행할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칭기즈칸의 병사들은 용감하고 규율이 잡혀 있었으며 꾀가 발랐다. 그들은 불을 피우지 않고 말린 고기와 마린 우유를 물에 섞어 먹으면서 열흘을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158p]

 

칭기즈칸은 몽골족이 지니지 못한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열심히 끌어 모았다. 몽골 군대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포로들을 꼼꼼히 조사하여 기술을 가진 사람을 찾아냈고, 자진해서 투항한 기술자들에게는 후한 보상을 내렸다. 칭기즈칸은 이런 방법으로 수많은 중국인 기술자들을 확보하여 성벽을 두른 난공불락의 도시들을 함락하는 데 필요한 강력한 공성 장비를 만들 수 있었다. 승리를 거듭할 때마다 몽골의 무기는 점점 정교해지고 치명적인 위력을 갖추게 되었다. [159p]

 

칭기즈칸은 속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고 계속 공물을 바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여진인들에게 대폭적인 자율권을 허용했다. 사실 몽골인들은 정복지의 토착 문화를 통제하는 데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럴 만한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60p]

 

칭기즈칸의 종교적인 관용 정책은 계속 유지되어, 제국 건설의 강력한 수단으로 기능 했다. [161p]

 

13세기의 이슬람 교도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영토를 차지한 채 여러 면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명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 이슬람권 주민의 문자 해독률은 그 어느 사회보다 높았고, 수학, 언어학, 농학, 천문학, 문학, 그리고 법률학의 전통 역시 그 어느 사회보다 우수했다. 이때, 1219년 칭기즈칸은 이슬람 국가인 호라즘 제국의 술탄인 무하마드 2세에게 평화 관계를 맺자고 제안했는데, 호라즘의 술탄이 칭기즈칸의 강화 제의를 표면적으로만 받아 들이고, 일 년 뒤에 호라즘의 영토를 지나던 몽골 대상 450명을 학살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칭기즈칸은 술탄에게 사신단을 보내어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술탄은 사신을 죽이고 수행원들의 얼굴을 짓이겨서 칭기즈칸에게 돌려 보냈다. 이것은 술탄이 자신의 제국과 목숨을 내던지고 “전 세계를 황폐하게 만든” 큰 실수였다. [162,163p]

 

호라즘의 술탄은 여진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몽골 군대가 심각한 위협이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호라즘의 주요한 도시들은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몽골의 초원 지대와 호라즘의 국경 사이에는 그 어떤 군대도 지나간 적이 없는 위험한 산과 사막 지대가 3,200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163p]

 

칭기즈칸은 상식을 깨고 그 지역을 횡단하기 위해서 겨울까지 기다렸다. 그는 여름에 불타는 듯한 메마른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 겨울에 뼈를 에는 듯한 바람과 눈, 그리고 얼음 골짜기와 씨름 하는 것 보다 훨씬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만 명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을 칭기즈칸 군대의 중앙아시아 횡단은 오늘날까지도 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단한 군사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163p]

 

칭기즈칸의 군대가 강인하고 용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만일 중국인 기술자들이 현장에서 설계하고 건축한 훌륭한 공성 장비들이 없었다면 칭기즈칸의 군대는 호라즘의 강력한 성채를 정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무거운 장비 대신 필요한 공격 장비가 있으면 당장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외국인 기술자 부대를 데리고 다녔다. [163p]

 

몽골 군대의 만행에 대한 소문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칭기즈칸 역시 심리전의 일환으로 이런 소문을 유포했음에 틀림없다. [165p]

 

포위전을 펼 때 칭기즈칸은 늘 똑 같은 기본 전략을 구사했다. 그는 먼저 방어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성 주변 농촌 마을을 공격하고 불을 지른 후 포로를 잡아들이고 수많은 주민을 학살했다. 그리하여 공포에 질린 피난민들이 물밀듯이 도시로 몰려들어 혼란, 기아, 그리고 두려운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는 포위된 도시의 주민들에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투항한 주민들은 관대한 처분을 받고, 투항을 거부한 주민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당연히 무수히 많은 도시의 주민들이 몽골 군대에게 성문을 열고 무릎을 꿇었다. 귀족들과 행정관들, 그리고 저항하는 병사들은 대부분 처형되었다. 그러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칭기즈칸의 보호를 받았고, 어떤 기술이라도 가진 주민을 적극적으로 채용되었다.  [165p]

 

1223년 칭기즈칸의 호라즘 정벌이 완료되었다. 칭기즈칸은 3,200킬로미터에 이르는 빙하와 사막을 건너고, 난공불락의 요새들을 무너뜨리고,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군대를 쳐부숨으로써 지구상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위대하고 부유하고 화려한 문명을 야크 고기를 먹으며 게르에서 잠을 자는 한 남자의 무릎 아래로 옮겨 놓는,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을 이루어냈다. [166p]

 

칭기즈칸은 60대 중반에 세계 최대의 제국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어 몽골의 초원 지대로 돌아갔다. 1227년 그는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끝까지 그에게 충성했던 장군들에게 둘러싸인 채 숨을 거두었다. 에드워드 기번의 표현을 빌리면, 칭기즈칸은 “천수와 영광을 맘껏 누리다가 임종을 맞아 아들들에게 중국을 정복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166p]

 

그러나 칭기즈칸의 아들들은 그런 위업을 이룰 만한 그릇들이 아니었고, 칭기즈칸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말년에 칭기즈칸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제국을 보전할 수 있을지 노심초사했다. [166p]

 

그는 아들들에게 “마음 속에 목표를 새겨두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생은 물론이고 자기 인생도 제대로 경영할 수 없다”고 말했다. [167p]

 

1235년이 되자 오고타이의 낭비 때문에 칭기즈칸이 모아두었던 엄청난 부는 그의 바닥이 나고 말았다. 몽골인들 앞에 놓인 대안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여 약탈을 하는 것 뿐이었다. [168p]

 

오고타이는 쿠릴타이 내부의 의견 대립을 해결할 재간이 없었기 때문에 칭기즈칸이 살아 있었다면 기겁했을 결정을 내렸다. 몽골 군대를 둘로 나눠서 유럽과 중국을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던 것이다. 송에 대한 정벌은 실패로 돌아가서, 몽골의 중국 정복은 다음 세대가 될 때까지 미뤄지게 된다. 그러나 수보타이가 이끌던 유럽 정벌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169p]

 

몽골의 공격을 받자, 기독교권인 유럽에서는 극심한 불관용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유럽의 성직자들은 하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럽 내부에 있는 유대교도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요크와 로마를 비롯한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분노한 기독교도들이 이웃해 살던 유대인들을 박해하며 집을 불태우고 숱한 사람들을 살해했다. 신의 이름을 내세웠을 뿐 몽골 군대의 만행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13세기에 기독교권인 유럽은 십자군 전쟁, 종파 대립, 반유대주의로 산산조각 난 채 이교도 박해에 열중하고 있었다. 유럽의 분열과 불관용은 몽골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몽골족은 전투에서 잔인하게 행동하기는 했지만, 종교적 열정이나 편협함 때문에 곤란을 겪은 일은 없었다. [171p]

 

칭기즈칸의 손자들은 아들들보다 훨씬 유능했다. 이들 새로운 손자 칸들은 몽골의 3차 원정군을 이끌고 지구를 휩쓸었다. [172p]

 

바그다드는 아바스 왕조가 수도로 정한 곳이었다. 아바스 왕조는 이슬람의 수니파를 따르는 신정 국가였다. 13세기 중엽 아바스의 영토에는 불만을 품은 시아파, 유대교도, 그리고 기독교도들이 많았고, 이들은 수니파으 지배가 무너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몽골 군대는 이런 종교 간, 분파 간 분열을 기민하게 이용했다. 1258년 2월 몽골 군대는 바그다드를 함락 시켰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단순한 유목민 무리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 “중국, 중앙아시아, 러시아, 카프카스, 그리고 이란의 통합된 인적, 재정적 , 물질적, 기술적 자원”에 굴복한 것이다. [174p]

 

몽골 군대는 기독교의 십자군들이 200년 이상 이루지 못했던 칼리프 타도를 단 2년 만에 이루어냈다. [175p]

 

‘야만적인’ 몽골인들은 다른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점에서 몹시 세계주의적이었다. [177p]

 

1260년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가 상도와 카라코룸에서 각각 쿠릴타이를 소집하고 스스로 대칸임을 선포했다. 이로서 몽골 제국은 두 사람의 갈등으로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결국은 쿠빌라이가 아리크부카를 꺾었다. 하지만 몽골 제국이 분열되어 있는 것은 현실이었다. 아이크부카가 대칸이 되기를 바랐던 몽골 왕실의 파벌들은 쿠빌라이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179p]

 

쿠빌라이는 황실 전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중국 남부를 정복하고 중화 왕국을 재통일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여러 면에서 볼 때, 쿠빌라이의 송나라 정복은 군사적인 정복이라기 보다는 중국인들의 마음을 정복한 것이었다. [180p]

 

몽골 제국은 분열되어 있었지만, 칭기즈칸의 자손들은 문명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다스렸다. 쿠빌라이는 거의 전 생애를 중국에서 보내면서, 중국의 세련된 문화와 중국의 아름다운 건축, 그리고 질서 잡힌 중국 사회를 거리낌 없이 칭송했다. 그는 최고의 인종적 관용을 베풀었다. 요컨데 쿠빌라이의 통치 원칙은 불관용이 아니라 세계주의였다. 쿠빌라이의 이런 정책 덕분에 다양한 문화, 다양한 민족, 다양한 종교가 멋지게 통합되었다. [183p]

 

유럽의 통치자들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을 고문대에 눕히거나 육중한 바퀴로 짓뭉갤 때, 쿠빌라이는 고문을 금지하고 사형을 줄였다. 그의 치세에는 사형이 급격하게 감소했으니, 인구 대비 사형률을 따지면 오늘날의 중국과 미국 보다 훨씬 낮을 것이다. [185p]

 

어떤 사람들은 몽골이 세계를 지배했던 세기를 최초로 세계화가 고조된 시기로 본다. 웨더포드에 따르면, 몽골인들은 “비할 데 없는 문명의 전달자”였다. 그들은 중국에는 교회를, 러시아에는 이슬람 학교를, 페르시아에는 불탑을 세웠다. “그들은 피지배민들에게 억지로 떠안길 만한 고유의 제도가 없었으므로, 각지의 제도들을 거리낌 없이 채용하고 결합했다.” 몽골인들은 “뭐든지 효과가 가장 좋은 것들을 찾아 다녔고, 그런 것을 찾으면 당장 다른 지역으로 퍼뜨렸다.” [185,186p]

 

몽골의 마지막 위대한 황제인 쿠빌라이는 즉위 34년 만인 1294년 평온하게 숨을 거뒀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칭기즈칸과 달랐다. 그는 할아버지와 딴판으로 뛰어난 기략과 군사적 추진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훨씬 자비로웠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맹목적인 민족적, 종교적 배외주의의 족쇄에 묶여있지 않았다. 그는 피지배 민족들의 지식과 재능, 그리고 문화적 업적을 거리낌 없이 칭찬하고 현명하게 이용했다. 쿠빌라이의 할아버지는 마음 속으로는 늘 초원의 유목민이었지만, 쿠빌라이는 단일한 세계를 추구하며 세계화를 추진했다. [187p]

 

그러나 몽골 제국이 쇠퇴하면서 몽골이 지배했던 지역 어디에서나 일관된 특징이 드러났다. 그것은 불관용, 특히 종교적 불관용이 전면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14세기 몽골의 통치자들은 내부의 강력한 종교적 분파에 합세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선페스트의 만연을 들 수 있다. 이 전염병 때문에 7,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국제 교역은 중단되었으며, 사한국 사이의 교류도 차단되었다. 몽골의 통치자들은 칭기즈칸이 확립한 종교의 자유를 저버리고, 광신적인 행위와 속죄양 찾기, 심지어는 대량 학살을 자행하기까지 했다. [188p]

 

몽골의 통치자들은 광대한 제국에 몽골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대신 ‘문명화 된’ 피지배민들의 문화를 점점 대폭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뿔뿔이 갈라지는 이들 왕국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접착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 때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 제국은 단기간에 네 개의 커다란 덩어리로 갈라졌고, 각 덩어리는 갈수록 편협해지고 종교적 광신에 사로잡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몽골 제국은 붕괴되고 말았다. [191p]

 

 

<< 2부 계몽화 된 관용>>

 

<5장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 ? 스페인>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스페인의 극심한 불관용 정책은 성장해 가던 스페인의 힘을 갉아먹고 세계 제패의 기회를 삼켜 버렸다. [195p]

 

1478년 교황의 교서에 따라 스페인에 이단 심문소가 설치되면서 상대적인 관용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200p]

 

스페인 왕실은 공식적으로 불관용 정책으로 선회했는데, 이것은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성장할 꿈을 품고 있던 제국으로서는 대단히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201p]

 

콘베르소스들과 유대교도들의 대거 탈출은 스페인의 막대한 재정적 공백을 초래했다. [201p]

 

불관용의 강도에는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지만, 스페인은 17세기 내내 광신적이며 자멸적인 불관용 정책을 지속했다. [204p]

 

사실 이런 요인들 가운데 대다수는 스페인 왕실이 1480년대부터 종교적인 숙청과 화형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에서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비롯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단 심문소, 추방, ‘순수한 혈통’을 옹호하는 법령 등이 빚어낸 불관용은 스페인에 파멸적인 결과를 안겨 주었다. 당사자들에게 끔찍한 죽음과 고통을 준 것은 차치하고라도 스페인의 종교 박해는 엄청난 자원 낭비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205p]

 

1640년 스페인은 유럽의 강국이라는 자격을 박탈당하고 붕괴 위기에 놓였다. 그 뒤 스페인은 계속 쇠퇴하여 세계 무대의 주변부로 밀려 나고 말았다. 여기서 스페인 왕국의 불관용이 번영을 가로막고 스페인의 깊은 쇠락을 재촉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206p]

 

<6장 자본주의 경제를 제패한 최초의 제국 ?네덜란드>

 

네덜란드 사람들이 한 때 영국보다 앞서 세계를 주름답던 해상무역 제국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네덜란드가 한 때 세계 최대의 사향 생산국이었다는 사실 역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09p]

 

사향은 오랜 옛날부터 값 비싼 향수의 재료로 사용되어왔다. 중세 사람들은 사향이 들어간 방향제가 질병을 막아준다고 생각했다. 온스당 가격으로 따지면 고급 사향을 따라잡을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17세기에는 사향고양이의 국제 무역이 번창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1620년대 들어서는 네덜란드가 사향 무역을 독점했다.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17세기 대부분의 시기 동안 어마어마한 이윤을 남기는 유럽의 ‘사치품 무역’을 주도했고, 사향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209p]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엄청난 경제 성장에 있었다. 여기에다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의 특별한 종교적 관용 정책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17세기에 유럽 전역에 종교적인 분쟁과 박해, 그리고 광신적인 행위가 퍼져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의 관용적인 정책은 특히나 놀라운 것이다. 네덜란드 주연합에는 국교가 없었다. [219p]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유럽 전역으로부터 종교적인 망명객들을 줄지어 끌어들이는 자석이었다. 5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경제 각 분야에서 패권을 장악하는 데에는 이 이주민들이 엔진 역할을 했다. 네덜란드의 경제 성장에 기름을 부은 것은 대부분 합스부르크 왕조의 스페인에서 박해를 피해 빠져 나온 유대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에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세계적인 무역, 산업, 금융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226p]

 

네덜란드 사람들은 사치품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1598년 스페인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식민지의 생산품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네덜란드 선박의 입항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러자 네덜란드의 유력 상인들은 아예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제쳐놓고 동인도 제도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직접 자신들의 선박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연합 동인도회사와 후일의 서인도회사였다. 이 두 회사가 세워지면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세계적인 식민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227p]

 

1602년 네덜란드의 상인들, 시민들, 대신들은 힘을 합쳐서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다. 이는 공동자본으로 설립하고, 주권 권력으로 무장한 무역 독점체였다. 동인도 회사는 외교를 집행하고, 조약에 서명하고, 동맹을 체결하고, 군대를 유지하고, 총독을 임명하고, 전쟁을 할 수 있었다. [228p]

 

1607년 스페인의 세력권에 있던 지브롤터 만에서 네덜란드의 전함들이 스페인 전함을 무찔렀다. 그 후, 네덜란드의 소득은 전례 없이 치솟았고, 발트해와 지중해 연안, 그리고 유럽 북부의 무역에 대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의 주도권은 절정에 달했다. [231p]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지적인 면에서 지나치게 개방적이라는 소문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외국인 여행객들은 하인이 주인을 멸시하고, 아내가 남편을 멸시하고, 평민이 귀족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237p]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의 종교적 관용과 높은 임금은 독일,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심지어는 터키와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유럽 전역으로부터 숙련된 기술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238p]

 

17세기에 해군력은 세계 제패를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이었고,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바다를 장악했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17세기 중엽 전 세계 2만 척의 무역선 가운데 1만 5,000~6,000척이 네덜란드 선박이었다. 전성기의 네덜란드 해군은 프랑스와 영국의 해군을 합친 것과 엇비슷한 규모였다. [241p]

 

세계 지배와 관련된 새로운 현대적 전략은 군사력에 의한 영토 정복이 아니라 군사력을 토대로 한 자본주의였다. [243p]

 

1688년 대규모의 네덜란드 함대가 영국을 기습하고, 네덜란드 보병대가 런던을 점령했다. 네덜란드 총독인 오라네 공 빌렘 3세는 영국왕이 되어, 아내인 메리와 함께 통치했다. 이것이 유명한 명예혁명, 즉 ‘무혈혁명’이다. 네덜란드의 패권은 정점에 이르렀으며 네덜란드의 상업적, 군사적 팽창은 그 누구도 저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실 빌렘이 영국 왕에 취임한 사건은 세계의 패권이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넘어갔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빌렘이 영국 왕이 되자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에서 영국으로 막대한 인적 자본과 금융 자본이 유출되기 시작했다. [243p]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관용 정책과 진취적인 금융업자들과 현대적인 ‘사업 방식’을 영국에 수출했고, 이로써 영국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대신하여 다양한 이주민들과 종교 교파들에게 자유와 기회를 제공하는 특별한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얼마 후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세계 최고의 해상 국가로서의 지위까지 넘겨받아, 사상 최고 규모로 세계의 상업과 식민 정책을 주무르는 제국으로 탈바꿈했다. [244p]

 

네덜란드는 애초에 제국을 만들겠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 일에 성공한 것은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계몽주의 원칙과 유럽의 자민족 중심주의, 그리고 로마식 전략을 결합함으로써 피지배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245p]

 

<7장 불관용의 덫 ? 오스만, 명,무굴>

 

오스만튀르크족에 의해서 세워진 오스만 제국은 대략 1300년경부터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존속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종교적 관용이었다. [248p]

 

흥미롭게도 오스만의 통치자들은 상대적인 관용 정책으로 당시 불관용에 치우쳐 있던 기독교 경쟁자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249p]

 

오스만의 관용 정책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슬람교 개종자들에 대한 포용 정책이었다. 진취적인 이슬람교 개종자들이 거의 무제한으로까지 출세할 수 있는 오스만제국의 상황은 기독교 국가인 스페인의 상황과는 몹시 대조적이었다. 이 사실을 입증하는 사례로는 왕실 친위대인 예니체리를 모집하고 훈련하는 특이한 오스만 제국의 제도를 들 수 있다. [253p]

 

오스만 사람들은 전략적인 관용 정책 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먼저, 그들은 이 덕분에 트란실바니아에서 예멘과 이란 고원에 이르는 피정복민들로부터 협조 아니면 하다못해 묵인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수많은 기독교도들이 정복당한 직후에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피부색을 따지지 않고’ 개종자들을 포용하는 오스만 제국의 관용 정책 덕분에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협조적인 피지배민들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농사를 짓거나 군대에서 복무할 인구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재능 있는 개인들로 구성된 핵심 세력이 형성되었다. [255p]

 

1500년대 후반 이후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킨 요소들은 여러 가지였지만, 그 중 술래이만의 눈부신 관용 정책을 유지하지 못한 후계자들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57p]

 

내란의 확산과 민족주의의 고조가 오스만제국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59p]

 

명 왕조는 세계 제패의 꿈을 꾸지 않았다.  1424년 이후 명의 황제들은 해군을 해체하고 외국과의 무역과 외국의 사상을 거부하면서 병적이라고 할 만큼 폐쇄적인 태도를 취했다. 중국은 1600년 무렵에는 기술적,군사적, 상업적으로 유럽에 크게 뒤 처지게 되었다. [261p]

 

명이 ‘쇄국’으로 돌아서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락제가 죽은 뒤, 몽골이 다시 군대를 모아 중국을 침입한 데 있었다. [265p]

 

관용정책으로 선회하지 않았다면, 무굴제국은 그처럼 오랫동안 지속될 수도 없었고 눈부신 문화발전도 이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무굴제국이 쇠퇴했던 시기에는 인도역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잔혹한 인종적, 종교적 박해가 만연했다. [268p]

 

아우랑제브의 불관용은 제국에 재앙을 몰고 왔다. 결정적인 사건은 힌두교도들에 대한 박해로 상업이 위축된 것이다. [275p]

 

인도는 아우랑제브가 뿌려놓은 증오심과 갈등 때문에 영국의 분열정복 전략의 희생양이 되었고, 아대륙을 차지했던 이슬람교 제국의 위치에서 유럽 제국의 왕관에 박힌 한 알의 보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독실한 아우랑제브는 아마 자신이 무엇을 유산으로 남겼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임종에 즈음하여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홀로 왔다가 이제 이방인으로 떠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끔찍한 죄를 저질러온 내게 어떤 징벌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렵다.”  [277p]

 

<8장 세계 최대의 해상 국가 ? 영국>

 

16세기와 17세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영국은 맹렬한 종교 간, 민족 간 전쟁이 벌어지던 각축장이었다. 개신교도는 가톨릭교도를 학살하고, 가톨릭 교도는 개신교도의 목을 베고, 영국국교도는 비국교도를 박해하고, 잉글랜드 사람은 아일랜드 사람, 스코틀랜드 사람, 웨일즈 사람을 살해하고, 그렇게 당한 자들은 다시 똑 같은 앙갚음을 했다. 이 시기는 칭기즈칸이 등장하기 전의 몽골족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보복을 되풀이 하면서, 유혈 참사와 상호 파멸이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혀 있었다. [279p]

 

빌렘과 메리가 즉위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1689년 영국 의회는 ‘권리장전’과 ‘관용법’을 통과시켰다. 이 혁명적인 법력들은 커다란 한계에도 불구호가,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영국은 그 후 200년이 넘도록 지구상에서 가장 관대한 나라라는 명성을 날리게 된다. [280p]

 

이 관용 정책 덕분에 유대교도, 위그노교도,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스코틀랜드인, 이 세 개 집단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영국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들은 금융 혁명과 산업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영국을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비상했다. [280p]

 

대영제국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패권 국가와는 달리 자유, 평등, 민주라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근대성의 문턱을 넘어서고 나서야 세계적인 권력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전성기인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칭기즈칸이나 17세기 네덜란드 시민들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너그럽고, 가장 도덕적인 나라를 자처하면서도 어떻게 피정복 식민지를 다스리는 제국이 될 수 있었을까? [281p]

 

따라서 영국의 역사는 중요한 의문을 제기한다. 세계의 패권 국가가 현대의 ‘계몽주의적인’ 의미에서 참된 관용을 베푸는 것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오늘의 세계적인 초강대국, 그것도 과거에 몸소 식민지의 처지를 경험했던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합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일이다. [281p]

 

유대교도들이 빌렘과 함께 영국에 정착한 이후 공급한 것은 군수품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담당했던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은 영국이 18세기 최대의 적인 프랑스와 전쟁을 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급한 것이었다. [282p]

 

한 마디로, 영국은 프랑스 보다 훨씬 더 쉽게 돈을 구할 수 있었다. 17세기 내내, 유럽의 군주들은 급증하는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원들을 쉴 새 없이 긁어 모았다. 그러는 사이에 유럽 여러 나라의 국고는 대부분 고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돌연히 긔고 과감하게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빠른 시간 안에 많은 돈을 긁어 모아 은밀하게 운반할 수 있어야 했다.” 유대교도들은 이런 일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국제적인 친족 연락망에 의지하여 전 세계로부터 엄청난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 자금 덕분에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스페인 사이에 결성된 반 프랑스 동맹이 루이 14세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283p]

 

영국은 잉글랜드 은행과 런던 주식거래소를 통해 얻은 돈을 통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1815년 이후 “암스테르담은 부수적인 역할에 머물렀고, 세계적인 금융 시스템은 런던에서 형성되었다.” [285p]

 

프랑스의 개신교도인 위그노 교도들에 대한 박해로 인한 집단 탈출 이후 프랑스 경제는 후퇴기로 접어들었다. [287p]

 

영국에서 유대교도들과 위그노교도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영국의 성장을 촉진한 일종의 ‘효모’ 역할을 했다. 더구나 이들의 공헌을 무색하게 할 만한 또 다른 소수 집단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영국에 엄청난 경제적, 지적 활력을 공급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었다. [288p]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했던 스코틀랜드인 패터슨은 동인도회사를 앞지르기 위해 1695년 다리엔 계획을 구상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손꼽히는 비극적인 사건을 초래했다. 이 계획에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유통되던 전체 화폐의 절반에 가까운 40만 파운드가 모였다. 하지만 다리엔에 식민지를 만들려던 계획은 완전 실패로 돌아갔다. 다리엔의 참극은 스코틀랜드를 파산으로 몰아넣었다. 1707년 기가 꺾이고 기근에 시달리던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의 합병 조약에 서명하면서, 대영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합병에 격렬히 반대했던 스코틀랜드인들에게 합병 조약은 “완전한 굴복”이자 “악마의 협상”이었으며, 고국의 소멸이었다. [291p]

 

합병 조약 이후 영국인들은 스코틀랜드인들을 안아 일으킬 것인지 아니면 찍어 누를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결국 영국인들은 전자를 선택했고, 그 덕분에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대영제국은 전례 없는 영토의 팽창을 거듭했는데, 이의 관리를 위해서는 엄청난 인력이 필요했다. 잉글랜드의 정치인들은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식민지 관련 업무를 맡기자는 전략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후, 스코틀랜드인들은 노예 신세가 될 거라는 불길한 예상과는 달리, “전례 없는 인신의 자유와 이동의 자유”를 누렸으며, 식민지 개척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293p]

 

주목해야 할 사실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추진한 원동력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295p]

 

20세기가 시작할 즈음의 대영제국의 지배 면적은 지구의 70퍼센트에 육박했다. 영국의 패권의 결정적인 요인은 경쟁 상대가 없는 해군력과 상업력, 그리고 금융력에 있었다. [295p]

 

유대교도들과 위그노교도들, 그리고 스코틀랜드인들의 공헌은 압도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중추적인 수준이었다. 영국이 프랑스를 앞지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은 한 잉글랜드 은행을 입안한 것은 스코틀랜드인들이었고, 그 은행의 창립 자금을 댄 것은 위그노교도들이었으며, 그 은행의 대부금을 중계한 것은 유대교도들이었다. 유대교도들은 또한 런던 주식거래소를 설립하고, 영국에서 다이아몬드, 금, 은이 거래되게 했으며, 런던을 암스테르담에 맞설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 만들었다. 요컨데 스코틀랜드인, 유대교도, 위그노교도와 같은 비잉글랜드인 집단의 재능과 자본을 이용하여 대영제국이 손에 넣은 이득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297p]

 

영국은 1830년대에 대단한 수익을 남기던 노예 무역을 폐지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로서 영국은 주요 경쟁국인 프랑스 뿐 아니라, 과거 식민지였던 미국에 대해서까지 도덕적인 우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은 영국의 우위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지주 가운데 하나였다.그 운동은 영국의 국력이 축적된 군비와 자본이 아니라 종교, 자유, 그리고 도덕적 우수성을 토대로 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기 어려운 증거를 제공했다.” [299p]

 

그러나 방해물은 남아 있었다. 초기 영국의 정체성은 개신교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영국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적인 종교적 특성은 불관용의 씨앗을 키웠고, 영국은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즉, 가톨릭교를 신봉하는 아일랜드와의 문제였다. [300p]

 

영국 역사에서 가톨릭 교도와 개신교도는 오랫동안 심각하게 반목해 왔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종교 전쟁은 적의와 원한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300p]

 

아일랜드의 가톨릭 교도들이 처한 현실은 여전히 포악한 억압과 멸시로 가득 차 있었다. 17, 18세기의 형법은 가톨릭 교도에 대해서 공직 취임을 금지했고, 교육을 제한했으며, 투표권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재산 압수까지 규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가톨릭 교도들은 영국이 19세기에 새로 확립한 ‘관용’ 정책에 전혀 감동하지 않았다. [303p]

 

한마디로 영국이 인도를 상실하게 된 것은, 아일랜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관용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 영국은 수십 년간 피지배민들 내부에 축적되어온 선의를 완전히 날려버리고 말았다. [319p]

 

 

<<3부 세계 제패의 미래>>

 

<9장 최첨단 과학 기술의 개척자 ? 미국>

 

그러나 과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이 그랬듯이 미국이 강한 국력을 유지하고 있는 참된 비결은 인적 자원에 있다. [331p]

 

미국은 이민자들에게 매력적인 나라일 뿐 아니라, 이민자들의 나라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민자이거나 이민자의 아들, 혹은 손자였다. 현재 미국 인구의 95퍼센트 이상이 바다를 건너온 이민자들의 후손이다. [332p]

 

미국은 온갖 종교에 대해서 동시대의 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미국은 1789년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으며, 더 나아가 국교를 두지 않음을 헌법상의 원칙으로 공표하는 대단히 혁명적인 행동을 했다. [332p]

 

미국의 지위가 이렇게 상승하게 된 것은 미국이 끊임없이 다양한 집단들의 활력과 재능을 유인하고, 보상하고, 흡입해 왔기 때문이다. 미국은 다른 나라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후일에는 경쟁국과 개발도상국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 발전과 기술 혁신을 창출했고, 이것을 토대로 유례없는 최고의 부와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했다. [333p]

 

상업은 종교적 관용을 촉진하는 강력한 기폭제였다. 유력한 상인들을 배척하는 풍조는 사업에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 종교의 자유를 옹호했다. [335p]

 

개인의 종교적 선택을 중시했던 순회 설교자들은 뜻밖의 후계자를 두게 되었는데, 그들은 바로 ‘건국의 아버지들’이었다. 미국 독립전쟁의 주역들은 하나같이 계몽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성서보다 이성을 존중했으며, 정교 신봉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338p]

 

미국 독립전쟁의 주역들은 독립이 되기 전에 이미 관용이 가져오는 구체적인 혜택을 경험했다. 미국인들은 영국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교를 가진 병사들을 모을 수 밖에 없었다. [338p]

 

건국의 아버지들은 종교와 관련된 자유로운 선택이야말로 다원주의 사회에서 분파 간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비종교적인 헌법을 지켰다. [339p]

 

한마디로 미국은 애초부터 종교적 관용이라는 계몽주의적 원칙 위에 건설되었다. 종교적 관용은 미국 사람들이 네덜란드와 영국에게서 물려받은 후 계속 확장 시켜온 정책이었다. 18세기 말 종교적인 관용의 측면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340p]

 

19세기 초반에 250만 명의 ‘불법 이주민’들이 구세계에서 미국으로 들어갔다. 이주민 대부분이 유럽의 공장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습득한 경험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9세기의 미국 산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이런 모든 측면에서 미국의 관용은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346p]

 

유럽에서의 수백만 명의 이민자들이 흘러 들어오지 않았다면, 미국의 영토 확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이주민의 꾸준한 유입이 없었다면 미국은 19세기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농업 및 산업 국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349p]

 

1820년부터 1914년 사이에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수는 3,000만 명으로 이는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350p]

 

미국 서부 개척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핍박의 역사이기도 하다. 미국은 원주민들에게 기대지 않고도 영토를 확장하고 정복을 진행할 힘을 확보할 수 있는 특이한 위치에 있었다. 미국인들에게는 뛰어난 솜씨로 숫돌에 간 화살촉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선택적인 전략적 관용의 냉혹한 본성이다. [352p]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미국 사회는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나라로서 세 가지 중요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미국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매우 자유분방하며 이주민들은 원하는 종교를 믿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교의 불씨를 피워낼 수도 있었다. 둘째, 민주적인 정부 제도는 부패하기는 했어도 새로운 이주민들의 손에 현실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심어 주었다. 셋째, 활발한 자유 시장은 노동력을 흡수하고 기술에 보상을 해 주었으며 기업심이 왕성한 사람들에게 예상 밖의 기회를 제공했다. [353p]

 

1차 세계대전이 유럽의 막강한 강국들을 크게 쇠퇴 시켰다고 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그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안겼다. 1945년에 등장한 세계는 더 이상 유럽 중심의 세계가 아니었다. [356p]

 

전쟁은 여러 면에서 미국의 유례없는 경제 발전에 엄청난 연료를 공급했다. 대공황에서 벗어난 미국 산업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급격히 성장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팽창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은 세계 최대의 상품 수출국이 되었고, 세계의 총제조업 생산고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게 되었다. [357p]

 

관용은 여러 측면에서 미국이 초강국으로서의 지위를 갖추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0년 이전의 개방적인 이민 정책 덕분에 미국은 인력 면에서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이민자들이 이루었던 혁명적인 기술적 약진이었다. 이것은 미국을 군사적으로 월등한 지위로 끌어올렸다. 재능 있는 이민자들의 유입이 세상을 바꾸어놓을 만한 과학적 발전과 군사력의 우위로 변형된 사례는 세계 역사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359p]

 

미국은 세계화를 통해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나라이다. 달러는 세계의 지배적인 화폐였고, 영어는 지배적인 언어였으며, 미국의 문화는 가장 많이 모방되는 문화였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러시아는 대혼란에 빠져 들었고, 유럽은 침체되었으며, 일본은 후퇴의 늪에서 허우적거렸으므로, 미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심지어는 문화적으로 경쟁할 상대가 없었다. 세계에는 새로운 초강대국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366p]

 

<10장 추축국의 야욕 ? 독일, 일본>

 

20세기 중반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 대단히 편협했던 이 두 정권은 엄청난 권력을 손에 넣고 세계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추축국들의 급속한 부상은 극단적 불관용이 무서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런 불관용을 토대로 한 사회는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376p]

 

히틀러 정권은 패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불관용을 새롭게 변모시켰다. 나치는 “인명과 인간 영혼의 학살을 계획적으로 자행했으며, 정복한 민족들에 대한 공포정치는 과거에 자행된 그 어떤 야만적인 압제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잔혹한 불관용은 나치 지배의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나치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곤경 속에서 국민들의 힘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호전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적 배타주의, 종교적 증오심이 효과적으로 혼합되어 있는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굴욕을 당했던 독일 국민들로부터 충성과 희생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378p]

 

1 차 대전으로 독일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패배의 쓰라린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은 1919년에 조인된 베르사유 조약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에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가혹한 조건을 부과한 것은 현명한 조치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영국 대표단의 자문이었던 케인즈는 그 조약에는 다음 번 전쟁을 불러올 씨앗이 들어 있다는 불길한 예언을 했다. 치욕과 고통, 억제된 분노가 한데 섞인 도가니에서 출현한 것이 바로 아돌프 히트러와 나치였다. [379p]

 

히틀러가 국내 개혁과 관련해서 내세운 비전은 유대인들, 온갖 형태의 다양성, 불만들을 독일 사회에서 일소하는 것, 인종에 근거한 권위주의를 세우는 것, 그리고 전쟁에 동원할 수 있도록 국민을 준비시키는 것 뿐이었다. 그는 그것 말고는 아무런 비전도 내세우지 않았다. [380p]

 

나치가 내세우는 핵심적인 주장은 아리아인은 우월하며 “지배자 민족”으로서 세계의 통치자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확신이었다. [380p]

 

나치는 수백만 명의 사람을 살해함으로써 수 많은 인력을 놓쳐 버렸다. 특히, 수 많은 훌륭한 과학자들을 잃어버렸다. 이들 중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개발에 일익을 담당했으며, 미국은 바로 그 원자폭탄을 이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했다. 독일이 잃어버린 위대한 인물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382p]

 

칭기즈칸은 피정복민 가운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받아들이려고 애썼지만, 히틀러는 그런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로마제국 사람들은 피정복민을 통합하려고 애썼지만, 히틀러는 영토를 병합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피정복민을 통합하는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나치 외교정책의 핵심은 ‘레벤스라움’을 확보하기 우한 싸움이었다. [383p]

 

독일을 위한 더 많은 생활 공간의 확보라는 목표 아래 나치 점령자들이 추진했던 잔혹한 인종 말살 정책은 소비에트 주민들을 반 나치 투쟁으로 돌려 세웠다. 히트러가 동부 점령지역에서 재빠르게 관용과 동화 전략을 추구했다면, 나치 제국이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었을지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나치는 서유럽에서도 협력 세력을 구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탐욕에서 비롯한 불관용과 잔인성 때문에 이 가능성을 날려 버렸다. [385p]

 

1945년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거창한 계획은 일본이라는 나라와 함께 시커먼 연기를 뿜는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불관용은 일본이 세계 제패라는 꿈을 키울 수 있었던 토대인 동시에, 제국주의 일본의 파멸을 불러온 촉매제였다. [387p]

 

나치의 동맹국들이 그랬듯이, 인종적, 도덕적, 정신적 정화라는 주제는 전시 일본의 확고한 화두가 되어, 종교와 대중 문화, 그리고 일상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표현되었다. [390p]

 

일본은 나치와 마찬가지로, 피정복민들의 환심을 사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목적은 해당 지역의 자원들을 뽑아가고, 원주민들을 가장 위험하고 천한 일에 동원하고, 정복한 영토를 인구가 과밀한 일본의 생활공간으로 사용하는 데 있었다. [392p]

 

점령지에서 이루어진 이런 만행은 일본인에 대한 강렬한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 증오심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아시아의 많은 지역에서는 당시에 형성된 증오심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396p]

 

일본이 불관용이 아니라 전략적인 관용 정책을 펼쳤던 점령지가 딱 한 곳이 있다. 바로 지금의 대만인 포르모사이다. [396p]

 

지금까지도 많은 대만인들이 일본 문화에 우호적이다. 만일 일본인들이 ‘대동아공영권’의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정책을 추구했다면, 제국주의적인 패권을 장악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훨씬 큰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398p]

 

불관용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하다. 인종주의적 국수주의만큼 강력한 생명력을 제공하고, 정체성을 창조하고, 전쟁을 부채질하는 힘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데올로기들이 이처럼 난폭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든 요소는 곧 그 영향력을 제한하는 요소로도 작용한다.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398p]

 

독일은 열광적인 지지자와 병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러시아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등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활용하지 못했다. 대만에서 전략적 관용의 강력한 효과를 확인했던 일본인들 역시 다른 지역의 피정복민들을 잔인하게 다루고 살해하면서 정복자에 대한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쪽을 택했다.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에게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힘을 안겨준 이데올로기가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세계 제패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추구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398p]

 

사람들의 충성심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관용뿐이다. [399p]

 

<11장 21세기 새로운 도전자들 ? 중국, 유럽연합,인도>

 

최근 미국의 도전자로 자주 언급되고 있는 중국과 유럽연합, 그리고 인도는 하나같이 독특한 방식의 전략적인 관용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관용의 방식은 미국의 것과 크게 다르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방식의 관용이야말로 이 나라들의 두드러진 성공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401p]

 

중국이 차기에 세계 최강대국으로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전략적인 관용의 측면에서 미국을 앞질러야만 한다. 하지만 중국은 전제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불량 국가들에 대해서 우호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과연 전략적인 관용의 측면에서 미국을 앞지를 수 있을까? [404p]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보기에는 오늘날의 중국 국민들은 인종적 구성이 다양하지 않다. 그러나 서양인들과 중국인들이 하나같이 깨닫지 못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인’이란는 개념 자체가 전략적인 관용의 성공 결과라는 점이다. 사실 중국은 3,000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오늘날 유럽 연합이 목표로 삼고 있는 성과를 이루어 왔다. 오늘날 중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는 “언어적으로 심한 차이”를 보이며, 복식, 관습, 의식, 종교 면에서 심한 이질성을 가진 “복수의 집단들이 오랫동안 거주해 온 땅”이다. [405p]

 

중국은 이미 패권 경쟁에 필요한 인적 자본을 모두 확보하는 있는 것은 아닐까? 가능성 있는 일이지만 그렇지 못할 확률이 높다. [407p]

 

중국 경제는 상당히 개방 되었지만, 근면하게 능력을 발휘해도 그에 합당한 보수를 돌려 받지 못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부패가 만연하고 연줄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한 중국의 일류 두뇌들은 중국 내에 남아 있으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409p]

 

어떤 사회가 지역이 아닌, 세계를 제패하려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중요한 인적 자본을 유인하고 그들의 충성심과 동기를 불러 일으켜야만 한다. 과연 중국은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410p]

 

중국인들의 이와 같이 불확실한 태도와 혼란은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둘러싸고 진행되어온 투쟁을 반영한다. 그 투쟁은 21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격렬해졌다. [413p]

 

중국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이민자 사회와는 거리가 먼 사회이다. [414p]

 

지금 중국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외국인들이 상주하고 있지만, 정부는 그들을 중국 사회에 통합하려 하거나, 그들에게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여기라고 권장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을 고려하면, 중국은 서양을 비롯한 모든 곳으로부터 최고의 과학자들, 기술자들, 사상가들, 그리고 혁신가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이 될 수 없다. 물론 중국의 지도자들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중국은 이민자 사회로 변신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 [415p]

 

중국이 초강국이 된다면 미국은 계속해서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원칙적으로는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초강국 중국의 존재는 양극화된 세계 질서로의 복귀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419p]

 

유럽 연합의 영토 확장은 군사적 정복에 의지하지 않고 자격 부여와 동의라는 수단에 의지한다. 이는 매우 새로운 형태의 전략적 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연합은 새로운 유형의 각종 자유와 경제적 유인책을 동원하여 ‘나라들’을 유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유럽 연합은 로마 제국과 비슷하다. 유럽연합은 “다른 나라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하는 대신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당근을 흔들어댐으로써 영토를 확장하는 “탈제국주의 강국”이다. [422p]

 

이들은 유럽의 특징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유연한 접근법과 사형제의 거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20세기의 전제주의 정권들과 유대인 대학살의 기억에서 비롯한 도덕적 민감성을 꼽았다. [423p]

 

유럽연합의 진정한 목적은 미국과 경쟁할 수 있을 만한 힘을 만들어 내는데 있다. 유럽연합은 힘을 규합하기 위하여 본질적으로 전략적인 관용을 채택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유럽연합이 채택한 관용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미국의 관용 전략과 경쟁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424p]

 

유럽연합의 관용은 원칙적으로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한 관용이다. 유럽의 관용은 유럽을 통합시키는 전략일 뿐이지, 제 3 세계의 이민자들을 유럽으로 끌어들이거나 유럽 국가를 미국과 같은 다민족 이민자 사회로 변화시키려는 전략이 아니다. 따라서, 유럽연합의 인기는 전통적인 “이민자 국가”인 호주, 캐나다, 미국의 인기에 여전히 미치지 못하고 있다. [425p]

 

세계적으로 유능하고 똑똑한 인재들을 확보하는 경쟁에서 ‘나라들’을 유인하는 유럽연합의 전략은 ‘개인들’을 유인하는 미국의 전략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유럽연합 전역에 걸쳐서 이민자에 대해 적대적인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다. [426p]

 

이슬람교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현재 유럽의 이민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26p]

 

서유럽의 사람들은 이슬람교를 현대 유럽의 계몽주의적 정체성에 잠재적인 위협 요소로 여기고 있다. [427p]

 

터키의 유럽 연합 가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기에는 6,800만 명의 터키 국민이 독실한 이슬람교도라는 점도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 유럽의 관용은 이슬람교라는 잠재적인 장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428p]

 

유럽연합이 이슬람교를 쉽게 용인하지 못하는 것은 동화에 정항하고 폭력에 수긍하는 이슬람교 극단주의자들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의 경우 이슬람 공동체들의 ‘고립화’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이들은 고립된 지역에 거주하면서 유럽의 다른 주민들과 물리적, 문화적, 심리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다. 유럽이 이민자 공동체들, 특히 이슬람 공동체들과 관련해서 겪고 있는 어려움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429p]

 

유럽연합의 확장과 관련한 현실적인 한계와 이민자 반대 운동은 외관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입장에 몰리는 요인인데, 가장 귀중한 인적 자본을 세계 전역에서 유인하여 활용할 방법을 찾지 못하게 하고 있다. [430p]

 

유럽 국가들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다민족 이민자 사회로 변신하려는 뜻을 밝힌 적이 없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아마 유럽연합의 확장 속도가 느려지기를 희망할 것이다. [433p]

 

인도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도 민주주의 국가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관용의 승리를 의미한다. 인도 건국의 주역들은 20세기에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관용을 주창했다. [437p]

 

인도 내에서 종교 폭동이라는 요괴를 끌고 다니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갈등은 계속 부글거리며 끓고 있다. [439p]

 

간디와 네루가 옹호했던 포용주의에도 불구하고, 인도가 현재 세계에서 손꼽히는 관용적인 사회인지, 만일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런 사회로 남아 있을지는 단언할 수 없다. [440p]

 

중국의 성장 동력은 주로 제조업 부문인데 비해서, 인도에서는 소프트웨어, 정보 기술, 미디어, 광고, 그리고 볼리우드 영화 산업 등 개인의 독창성과 재능에 크게 의존하는 부문이 번창하고 있다. [440p]

 

인도의 ‘상향식’ 발전 모형은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하향식’ 전략보다 우세할 것이다. 이처럼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나라로 손꼽히는 인도는 세계화 된 경제 시스템 안에서 미국의 파트너가 되는 쪽에 훨씬 관심이 많을 것 같다. [441p]

 

<12장 제국의 미래>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해외에서 미국의 신용은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이다. [445p]

 

911 공격이 일어나고 일 년 뒤인 2002년 9월 백악관은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단극화 된 세계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미국의 결심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다. [446p]

 

문제는 미국이 해외에서 군사력을 사용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 군사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447p]

 

미국이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이다. 초강대국의 의미는 수백 년에 걸쳐서 서서히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정복에서 교역으로, 침략으로부터 이주로, 전제정치로부터 민주정치로 변모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변모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강대국들은 반드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 즉 내가 ‘접착제’라고 표현했던 문제들에 직면한다. [449p]

 

옛날에는 군사력과 경제력은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어떤 사회가 정복하는 대상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경제는 점점 부유해졌다. 당시 부에 이르는 열쇠는 군사력이었고, 군사력에 이르는 열쇠는 전략적 관용이었다. 현대 이전의 초강대국들은 관용을 통해서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다. [450p]

 

현대에 들어서도 경제적인 패권은 여전히 군사적인 패권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관련된 변수들은 달라지기 시작했고, 해군력이 갈수록 중요해졌다. 부와 세계 제패에 이르는 열쇠는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세계 각지의 수역들에 대한 통제권으로 옮겨갔다. [450p]

 

세계적인 부를 형성할 수 있는 방편이 땅에서 바다로, 정복에서 교역으로 옮겨지면서 군사력과 경제력의 연관 관계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초강대국이 멀리 떨어져 있는 부를 손에 넣기 위해서 침략,점령,병합이라는 본질적인 필요조건을 갖추어야 할 필요는 없어졌다. 정복을 통한 통치는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교역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451p]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경우 교역과 정복 사이에서 흔들리던 저울추는 교역쪽으로 확실하게 기울어졌다. 네덜란드 제국의 ‘영토’는 단순히 교역을 위한 전초기지로 이루어져 있었고, 토착민들과 내륙 도시들에 대한 통치는 대부분 해당 지역 고유의 통치 조직에게 맡겨졌다. 네덜란드의 막강한 해군은 이런 전초 기지들을 보호하고 다른 유럽 국가의 상인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공화국이 독점권을 손에 쥐고 엄청난 수익을 올리게 해 주었다. [451p]

 

그 뒤를 이어 세계 무대에 등장한 초강대국인 대영제국은 네덜란드의 계승자로서의 면모와 로마의 계승자로서의 면모를 함께 보였다. [452p]

 

미국이 성공을 거둔 결정적인 비결은 재능 있고 의지가 강한 진취적인 개인들을 배경에 관계없이 흡수하여 그들에게 합당한 보수를 제공한 데 있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로는 처음으로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정복이 아니라 교역을 통해서 패권을 장악했다. [453p]

 

부를 창조하는 가장 큰 동력은 약탈과 몰수가 아니라 교역과 혁신이라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또한 한 사회가 세계적으로 우수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정복이 아니라 이민으로 대체되면서, 전략적인 관용의 양상 역시 변하고 있다. [454p]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로 초강대국이 된 최초의 사례일 뿐 아니라, 보편 선거권을 인정하는 성숙한 민주주의 구가로 초강대국이 된 최초의 사례이다. [455p]

 

미국의 민주적인 패권은 반미주의의 만연과 폭발이라는 기이한 결과를 낳았다. [457p]

 

그러나 미국은 미국인들에 대해서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그늘 아래에서 살고 있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과 미국을 단단히 묶어줄 정치적인 접착제는 미국의 국경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458p]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초강대국들 가운데, 멀리 떨어진 피지배민들의 충성심을 끌어낼 수 있는 공통의 정체성을 만드는 과업에 가장 성공했던 제국은 바로 로마였다. [460p]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를 포함한 서구적인 관용 정책을 수출하려는 미국의 최근 시도들은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이자 자신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실체로 여기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로부터 원망과 분노를 사고 있다. [461p]

 

미국과 같이 민주정체를 가진 초강대국이 자신이 지배하는 전 세계 사람들과 정치적 연합을 이룰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볼 때, 그 방법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정치적 연합을 이룰 의사가 있다면, 미국은 국가적 정체성과 주권, 또한 초강대국이라는 지위까지 버려야 한다. [463p]

 

역사상의 다른 모든 초강대국들은 중앙 권력과 피지배민들을 결합시켜주는 공통의 정치적 정체성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이런 접착제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미국 역시 과거의 초강대국들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던 적의 어린 분열을 극복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466p]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정당성과 동의에 기초하고 있다. ‘계몽된’ 혹은 ‘자유주의저인’ 제국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제국은 민주주의 이념과는 어우리지 않는 강압이라는 요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466p]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미국이 평화주의 혹은 고립주의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미국 제국을 건설하는 것, 즉 다른 나라의 정권을 변화시키고 미국식 제도를 강제하는 일에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쓰는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세계의 패권을 지키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니는 것 또한 다른 나라 사이에서 미국의 입지를 위태롭게 한다. [467p]

 

미국으로서는 전 세계를 자신과 똑 같은 모습으로 개조하려는 무의미한 일을 자청하기 보다는, 자국의 역사와 원칙에 더욱 충실한 채 세계를 위한 본보기, 즉 ‘언덕 위의 도시’가 되려고 노력하는 편이 훨씬 낫다. [467p]

 

오늘의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숙련도와 훈련도, 그리고 노하우를 갖춘 이민자들을 찾아내고 끌어들이기 위한 적극적인 유인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471p]

 

따라서, 미국은 제국을 건설하는 자멸적인 모험을 피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나라의 협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세계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474p]

 

미국은 이런 모든 분야에서 다른 나라들과 조화를 이룬 다각적인 활동을 육성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미국인들은 이러한 새로운 다자주의를 굴복이 아니라 기회로 여겨야 한다. 만일 미국이 세계적인 문제들에 원인을 제공했음을 인정하고, 그 문제들이 해결될 경우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고, 국제적으로 주도적인 입장에서 그 문제들에 대처한다면, 미국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적인 초강대국의 존립에 반드시 필요한 다른 나라들과의 연대감, 즉 결속감과 공동의 목적의식까지 창조할 수 있다. [475p]

 

미국의 경쟁국들은 수많은 자체 문제에 직면하고 있지만 점점 강해지고 있으므로, 미국은 가까운 미래에 패권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단순한 강국의 신분으로 복귀하는 것이 꼭 나쁜 일이라고만 할 수 없다. 결국 초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역사의 이변이고, 이득과 함께 희생까지 떠안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476p]

 

만일 미국이 건국 이후 성공에 성공을 거듭할 수 있었던 비결을 재발견하고 제국을 건설하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다면, 몇 십 년이 지난 후에도 세계의 초강대국, 그것도 강압과 군사력에 의지하는 초강대국이 아니라 기회, 역동성, 도덕성을 갖춘 초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다. [477p]

 

 

 

내가 저자라면

 

책의 주제와 내용

 

에이미 추아 교수는 본 저서에서 “초강대국이라는 조건에 부합되는 사회들을 고찰하고 각각의 나라들이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관용이 어떻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밝히고자”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녀는 아주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가정에서 출발하는데 “한 사회가 전 세계에서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기술적, 군사적, 경제적인 면에서 세계의 최첨단에 서 있어야 하며, 이는 전 세계 유수의 인적 자원을 끌어들이고 활용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전세계의 우수한 ‘사람에게서 구할’ 수 있어야만 하는데, ‘한 민족이나 지역에서만 우수한 인재가 날 수 없으므로 인종, 종교, 배경을 따지지 않고 그들을 포용하는 전략적 관용만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는 아주 명쾌한 논지를 펴고 있다.

 

그녀는 역사적으로 제국의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핵심 요소를 ‘전략적 관용’에서 찾았는데, 이러한 역사적 근거를 중심으로 대내적으로는 관용과는 먼 WASP 중심의 정체성으로의 회귀 시도와 대외적으로는 주변국에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우월한 군사력을 강제적으로 동원하여 심으려는 무의미한 노력을 중지하고, 기존의 미국이 200년 이상 유지해온 미국의 핵심 가치, 즉 이민자 중심의 민주주의 공화정을 내부적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미국의 전략을 유지해야 한다는 전략적 조언 혹은 경고를 보내고 있다. 이것이 본 서의 핵심 메시지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공감’의 심상이 동시에 떠올랐다. 중국계 이민자로서 어릴 때 느꼈던 이질감, 하지만 성장하면서 미국 시민권자로서 미국 내에서의 성공을 통해 새로이 찾은 자신의 가치관과 자긍심, 그것에서 출발된 자신의 새로운 조국에 대한 ‘사랑’과 ‘걱정’,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자신의 인종적 모국에 대한 ‘향수’와 ‘관심’. 이러한 복잡한 마음들이 어우러지면서 세계적인 안정과 발전을 위해 ‘초강대국 미국의 패권의 전략적 활용 방안’이 지극히 중요함을 이해하고 이에 ‘건설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받은 긍정적 영향

 

제국의 변화를 예를 통해 적절히 보여준 것이 좋았다. 특히 네덜란드 사례는 알지도 못했고 제국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었는데 제국의 역사에 있어 정복에서 교역으로, 육군에서 해군으로의 제국의 힘의 본질적 변화를 촉발한 사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17세기 네덜란드의 힘은 ‘부’에 있었다. 그리고 부를 창조하는 가장 큰 동력은 정복과 약탈이 아니라 교역과 혁신임이 증명되었다. 한 사회가 세계적으로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이는 방법은 정복이 아니라 관용이었다. 억압은 사람을 떠나가게 하지만, 관용은 사람을 제국의 가치에 스스로 귀화하게 만드는 접착제 구실을 한다. (구본형, ‘The Boss-쿨한 동행’, 266p)”는 점을 다시금 명확히 알게 되었다.

 

또한, 인적 자원의 중요성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기존의 역사 서적들은 돈, 부존 자원 및 군사력을 중심으로 과거 국가의 힘을 서술하고는 했는데, 추아 교수는 더 나아가 그러한 자원을 누가 제공했는지(특히, 錢主로서 유대인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되고 그 역할이 중요했었는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리고 핵심적인 군사들은 어떤 인력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 인력(민족) 이동의 측면에서 과거 역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좋은 통찰을 제공해 주었다.

 

책의 특장점 및 시사점

 

이 책은 엄청난 참고 문헌을 참조하고 있다. 약 400여 개의 참고 문헌 목록을 첨부하고 있는데, 여기에 실리지 않은, 즉, 본 저서의 주장과 연관성은 있지만 인용되지 않은 또 다른 엄청난 양의 논문들을 역시 리뷰 했을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작업은 혼자의 힘으로 수행하기 힘들다. 뒤에 감사의 글에 보면 모두 22명의 연구 보조원들과 50여 명의 대학원 제자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이 책은 에이미 추아 교수의 승리이자 정확히는 에이미 추아 교수 연구팀의 승리이다.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의 외교 전략적 정책에 대해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이런 내용을 기획하고, 과거의 사료를 통해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수집하고, 다수의 연구원을 리딩하여 저술하고, 양질의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저력에 감탄한다.

 

이러한 부분은 변경연의 미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하나의 좋은 참조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정치 분야는 아니겠지만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제공할 수 있는 인문 사상적 서적을 변경연 팀의 힘으로 저술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변경연에서도 이와 비슷한 승리를 기원한다. 나는 다가오는 10년이 몹시 힘든 고난의 시기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세계의 경제 위기의 해결 과정에서 기존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체제가 새로이 정비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기존에 우리가 익숙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정치 경제적 시스템이 자리를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세계적인 새로운 변곡의 시기에 인성의 본심으로 돌아가 인문학적인 기본이 경제학적 발전과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새로운 통찰과 지침을 우리의 힘으로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목민심서’, ‘경세유표’가 변경연의 힘으로 만들어져 이 땅의 민초들을 위해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 역시 이를 위해 기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책의 보완점

 

먼저 앞서 언급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부분은 일반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저술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서 혹은 학술 논문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어 가독성을 위한 시각적 도구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물론 일반 교양 역사서가 아니고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밝히기 위한 목적의 저술임을 감안하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 독자를 위한 기본적인 시각적 도구들의 제시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그 당시의 지도나 지정학적인 정보, 역사 기록물 등의 사진을 적절히 가미해 주었으면 훨씬 더 당시 상황이나 저자의 주장에 대한 이해가 수월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각 장의 말미에 해당 장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의 요지를 다시 한 번 명확히 정리해 주고, 그 시대에서 중요했던 사건 혹은 인물의 연표를 제시했으면 보다 user-friendly한 구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목적과 구성의 불균형 부분이다. 본 책에서 저자는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우연스럽게 혹은 자연스럽게 전략적 관용이 제국의 성패를 좌우라는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는 발견적 접근 보다는 사전에 전략적 중용의 중요성을 설정하고 그것의 근거를 찾기 위해 과거의 초강대국들에 대해 많은 연구원들과 팀을 이루어 연구하고 작업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랬다면 이는 전략적 관용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역사적 근거의 제시에만 치우치기 보다는 실제로 전략적 관용이 간과되는 현실적 상황의 문제점과 미래 예측, 더 나아가 대안 부분을 보다 심도 있게 분석해서 각각 별도의 장으로 구성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IP *.176.68.156

프로필 이미지
이승호
2009.03.08 23:54:46 *.168.109.134
1.저자의 이력이나 관련자료를 찾고자 했던 장성우 선생님의 대단한 내공이 느껴집니다.
2.시각적인 자료의 보강과 관용의 과학적인 필요성 등은 저도 공감이 느껴지는 내용 입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북리뷰 안보이시는 분들 일단 파일첨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4] 관리자 2009.03.09 84270
738 북리뷰 2. <서양철학사> - 저자에 대하여 & 내가 저자라... [2] 이선형 2010.02.21 4225
737 5-3리뷰 역사속의 영웅들 윌듀런트 [1] 윤인희 2010.05.16 4225
736 <북리뷰>아파트 신화의 덫에 걸린 사람들 -『하우스푸어』 구름을벗어난달 2011.02.01 4225
735 <10기 레이스 3주차 북리뷰>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 이동... file [3] 희동이 2014.02.24 4225
734 어떤 물건을 구입하는 것보다 어떤 경험을 하는 것이 더 ... [2] 승완 2009.11.23 4226
733 10-2리뷰 블루오션(김위찬과 르네 마보안 지음) 인희 2010.10.11 4226
732 [8기 지적레이스 4주차/ 정나라] 선배님들! SOS칩니다. 조... [17] 터닝포인트 2012.03.06 4227
731 선의 황금시대 심신애 2009.03.02 4228
730 단순하고 실용적인 의사결정 도구, 10-10-10 승완 2009.09.21 4228
729 [북] 왜 일하는가? 대답할 수 있는가? 하모니리더십 2010.11.24 4228
728 리뷰3주차- 마흔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이은주 2010.02.28 4229
727 새로운 롤 모델, 마이클 더다 이희석 2010.10.26 4229
726 9기 레이스 2차 - 법의 정신 - 강종희 file [4] 종종걸음 2013.02.12 4229
725 The Boss-쿨한동행 심신애 2009.02.16 4230
724 한명석님의 '늦지 않았다'를 읽고 [1] 정은실 2010.01.03 4230
723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 이만성 2010.01.21 4230
722 현실과 허구, 환타지를 잘 버무려준 김려령의 "너를 봤어" 한 명석 2013.08.04 4230
721 <10기 레이스 1주차 북리뷰> 열하일기 - 이동희 file [1] 희동이 2014.02.10 4232
720 생각의 탄생-2차 2회 [1] 정철 2009.02.23 4233
719 [7기도전리뷰] <신화의 힘> 조셉캠벨&빌모이어스_내마음을무... 양경수 2011.02.19 4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