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 이은주
  • 조회 수 4248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10년 2월 15일 00시 00분 등록

신화와  인생 -조지프 캠벨

다이앤 K 오스본  엮음

박중서 옮김 

저자에  대하여  

조지프 캠벨은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나 화와이 (호놀룰루) 자택에서 83세 일기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 최고의 신화학자라고 불리던 그가 삶을 마감하는 날 뉴욕 맨허튼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이렇게 위대한  그에게도 젊은 시절 방황과 시련의  시절이 있었다. 캠벨은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계획이었지만, 경제 사정 때문에 1년 뒤에 귀국했다. 미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주가의 폭락과 뒤이은 대공항이었다. 캠벨은 이력서를 수십 통이나 썼지만, 그를 불러주는 직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자 그는 재즈 밴드에서 색스폰을 불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식비를 조달했다. 그런 생활을 하다 그는 낡은 자동차를 타고 미국 횡단을 한 후, 은자와 같은 생활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뉴욕 우드스톡에 있는 작은 집을 빌려 독서와 사색으로 1929-1934년까지 5년을 보냈다. 이러한 5년 동안의 몰입의 시간은 향후 본격적인 신화 연구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는 그의 말을 증명해 보인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힌두교의 사상을 많이 따랐고, 요가, 명상에 관심을 두고 우파니샤드와 스리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요가의 가장 중요한 3대 경전인 빠단잘리의 요가 수트라와 바가바드기타에서 따온 인용문들을 읽으며 그의 인도 힌두사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글을 보면 일상생활에서 명상을 통하여 내면을 향한 끝없는 여행을 한 것이 느껴진다.  

그의 저서로는  ‘세계 영웅의 신화’ ‘신화의 세계’  ‘신화와 인생’ ‘ 신의 가면 시리즈’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와  함께하는 삶’ ‘남자 바라보기’ ‘우리안의  남신들’ ‘우리안의 여신들’ 등 많은  책들이 있지만, 죠셉캠벨이라는 이름을 대중에 각인시킨 책은 신화를 통해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던 ‘신화의 힘’ 이였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 환상, 심지어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이토록 우리를 끌게 한 힘은 그의 지혜이다. 그는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박식한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나를 끌게 했던 힘은 그의 인품이었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신화학자인 캠벨이 아니라 지금부터 내게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인생의 모델로 멘토로 따뜻하게 다가왔다. 

캠벨이 여느  신학자들과 다른 것은 그의 순수한  학문성과 이면에서 인류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현재와 미래에 관한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화는 인류의  삶의 뿌리이며, 그 뿌리에서 자란 것이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에 신화와 그  체계를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언어가 철저하게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적 상상력을 넘어서는  시적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캠벨은 말하고  있다. 

1987년 10월 30일  그는 갔지만 많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남아 신화를 통해 우리에게 영혼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는  말  

자기 자신을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을 구별하는  것 - 가령 “어, 아니야, ‘우리’ 는 달라”  하고 말하는 것 -은 스스로를 전체성에  대립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 폭을  좁히고 우리 자신이 들어갈 감옥의  벽을 만든다. 자신의 사고와 삶에서  이완성(duality) 을 만드는 것은, 곧 대립을  만드는 행위이다. (7) 

우리 스스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진리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의 희열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캠벨에 따르면 여기에 희열이란 우리의  가장 높은 (종교적) 열광을 의미한다.(9) 

조지프는 상징  그 너머를 , 즉 그것이 표상하고 있는  풍부함을 바라보는 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상징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은 “기껏  식당까지 찾아가서 메뉴판만 먹어치우고,”  정작 메뉴판에 나온 진짜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는 이처럼 메뉴판만 먹어치우는 경우가 너무나도 허다하고, 그 결과 공호감과 영혼의 곤궁이 비롯되는 것이다. (10) 

환히 속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건강이었다. (11) 

“인생의 의미란  무엇일까요?” -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죠.” 카를 융과 마찬가지로 조지프는  노년기를 인생의 감소기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개의 시기로 보았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컵을 가득 채우고, 태워 버릴 것은 다 태워 버렸다면  노년의 고요는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 했다면  우리는 노년의 문턱에 도달해서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욕구 때문에 눈길을 자꾸  뒤로 돌리게 될 것이다. 융의 말마따나  “인생에 대해 작별을 고하지 못  하는 노인은 인생을 포용할 수 없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병약해  보인다. (12) 

도입의  단계 

여러분의 지금  모습 그대로,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평생 누릴 특권이다. (19) 

*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 인생의 의미란 무엇이든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진정한 의미란 살아 있음 바로 그것이다.(20) 

*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것을 선택할 수는  있다 *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21) 

* 우리는 스스로가  계획해 두었던 삶을 기꺼이 내 팽개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를 기다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 예전 것에  집착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어떤  형상에 매달리게 되면 우리는 썩을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

* 지옥이란  말라붙은 삶이다.

* 욕심꾸러기, 뭔가를  고수하려 하고 붙들어 놓으려고만 하는  우리 안의 그 욕심꾸러기를 반드시  없애 버려야만 한다. (22) 

* 현재의 형상에만  매달리면, 우리는 다음의 형상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서  오믈렛을 만들 수 있겠는가.(23) 

*우리의 삶에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삶을 경험하는 것. 고통과 기쁨 모두를  경험하는 것이다.(25) 

*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26) 

* 여러분 자신의  길을 따라 삶을 계속해 나아가는  동안에는 혹시 새똥이 떨어진다 해도  그걸 닦느라 신경 쓰진 마라.

*여러분이 현재  처한 상황을 희극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여러분은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된다. 결국 유머 감각이 여러분을 구원하리라.(27) 

*신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다. (28) 

* 스리라마크리슈나는  말했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36) 

*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소년이 입문제의를 행할 때  이런 조언을 얻었다. “삶의 길을 가다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  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37) 

현세에서의  삶 (의식의 첫 번째 단계) 

남자와 여자, 삶과 죽음, 선과 악. 이런 것이 대립자의  문제들이다. 이로부터 시작된 문제가 이원성의  발견이었다. 그것은 바로 타락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이원성에 대한 진정한 인식조차  없었다. (41) 

결혼이란 자웅동체를  재건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오로지 사랑  때문에 결혼한다면 그 결혼은 오래  가지 못 할 것이다. 여러분은 또한  다른 층위에서도 결혼하여 자웅동체를  재건하고, 완벽한 전제를 만드는 남자와  여자가 되어야 한다. (45) 

남녀 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런 것이  있음은 나도 느끼지만, 그렇다고 오로지  운명만은 믿지 않는다.( 47) 

사랑에 빠지는  것은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성에게  자기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시작이다. (50) 

사랑은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눈은 마음의  정찰병으로서 마음이 즐거이 가지고자  하는 것을 찾아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눈과 마음이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 이 둘이 하나의 결의로 단단하게  뭉칠 때, 그때 눈으로 들어와 마음으로부터  환영받는 것에서 완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이렇게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 태어나거나  시작되지 않으면 사랑은 다른 방법으로는  태어 날 수도 시작 될 수도 없다.(51) 

사랑이 멀리  있으면 삶도 멀리 있다. 사랑은 정확히  삶만큼 강력하다.(53) 

여러분이 견대  내는 재난은 그 무엇이건 간에 여러분의  성격. 여러분의 됨됨이. 여러분의 삶을 향상시킨다. 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이야말로 여러분  자신의 본성을 자발적으로 샘솟게 할  기회다.(55) 

인생의 전반기에  우리는 사회에 봉사한다. 이것은 종속이다. 인생의 후반기에 우리는 내면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해방이다.(58) 

성공적인 결혼은  혁신적인 삶을 함께 이끄는 것이며  열려 있는 것이며, 계획표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낙하다.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날 때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다. 바다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처럼, 여러분은 이리저리 떠다니겠지만  지혜와 연민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고결한 마음을  위해서는, 결혼은 우선 반드시 영적이어야  하며, 물리적 완성은 그다음이어야 한다.(67) 

‘고결한 마음’  이란 것은 사랑이 무엇이냐에 대한  일종의 단서가 아닐까 싶다. 고결한  마음이란 발상은 그 사람에 대한  책임감과 관련되어 있다. 만약 책임감이  없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뭔가를 하는  것이다. (68) 

양쪽 모두  정신적 길잡이가 없는 한, 결혼이란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자아가 무너져야만  두 사람은 합쳐질 수 있다.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영혼은 발효되고, 융합되고, 분해되고, 부패되어야 한다. (73) 

결혼이란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그 관계됨에 희생시키는 것이다. (73) 

무조건적인  사랑은 만물에까지 미치며, 그것은 영적인  삶에서도 획기적인 단계다. 하지만 그것을  여러분의 바깥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그것을 찾아야 할 유일한 장소는  여러분의 내부다. 만약 내부에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다면, 바깥에는 무엇이 있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75) 

신화는 우리  안에 있는 힘들을 합쳐 줄 수  있는 실마리다. (79)

신화는 우리의  깨어나는 의식과 우주의 신비 사이를  연결시켜 준다. 신화는 우주의 지도  또는 그림을 우리에게 선사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자연에 대한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79) 

신화는 특정한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지지하며 정당화한다.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십계명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신화는 우리가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는 삶의 여러 단계를  통과하고 감당할 수 있게 해 준다.(80) 

자신이 행복해하는  것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항상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돈이 있건 없건  간에. 돈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돈을 잃을뿐더러,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83) 

여러분이 하나의  문턱에서 또 다른 문턱으로 움직일  때에는 차라리 점프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더 아래로 내려갈  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점점  더 많은 것이 피어날 것이다. 여러분의  중심으로부터의 잠재력은 다음 모험에  필요한 미래 예측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84) 

여러분에게는  에너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를  흘려보낼 경로의 모델을 제공하는 사고력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여러분의 삶은 진정으로  꽃을 피울 수 있다 (85) 

여러분이 단순히  열등감을 상쇄하기 위해 학위과정을  밟고 있다면, 그런 열등감은 벗어던져라. 왜냐하면 열등감이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86)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강요할 갖가지  계획을 갖고 있다. 여러분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길 원하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들은 여러분이  여행을 떠나길 원하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나도 그랬다. 나는 숲 속으로 들어가서 5년 동안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88) 

자기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면 만사가 여러분에게  자연스럽게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길이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앞서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도 없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밖이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90)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 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뭘  해야지’ 하고 미리 생각해 둔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아무런  책임질 일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 여러분은 다음 두 가지를 결코 걱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굶는 것이며,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99)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에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런 느낌이 없을 경우, 여러분은 그저 삶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살아가는 셈이다. 여러분이  의례적으로 마땅히 어떻게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바와 정반대되는 행동이 바로  공감이다. 성배를 발견하는 사람은 그  장소에 온 사람인 동시에 공감의  삶을 사는 사람을 상징한다. 공감의  역동성을 자신의 동기로 삼는 사람만이  성배를 발견한 것이다. 이는 나와 너의  동일성에관한 자연스러운 인식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성배 중심이다. (105) 

여러분도 거기  도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또 이미 거기 도달  했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거기서 내쳐지기가  쉽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여러분이  뭔가를 하도록 원하는 바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러분에게  내적 만족을 제공함으로써 여러분을 성서에 내쫓기지 않게 만들어 주는 행동의 분야를 발견하는 것이다. (110) 

부름은 곧  어떤 사회적 지위로부터 떠나라는, 즉  여러분 자신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  보석을 찾으라는, 즉 여러분이 사회적으로  속박 되어 있을 때에는 찾기가 불가능한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중심을  잃은 상태가 되며, 스스로가 그렇게  중심을 잃은 상태라고 느낄 경우, 여러분은  떠날 때를 맞이한 것이다. 영웅이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걸 찾으러 갈  때, 그게 바로 출발인 것이다.(111) 

여러분의 모험은  여러분 자신의 내부에서 곧바로 솟아나야만  한다. 여러분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전까지의 문이라곤 없었던 곳에서, 그리고  다른 누구도 겪어 보지 못했던 곳에서  여러분을 위한 문이 여릴 것이다. 여러분은  반드시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모험을 향한 부름이며, 다시 말해서  이제부터는 아무런 안전도, 아무런 규칙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113) 

여러분이 영원히  휴식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삶을  알고, 사랑하고, 베푸는 것이다. 그 휴식의  순간은 그 모든 것 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비록 여러분이 이 세계의  밖에서 활동하고 있더라도, 여러 분의  내부에는 완전한 마음의 평정과 휴식의  순간이 있다. 그런 것이 없다면, 여러분은  고통에 빠지게 된다.(118) 

융은 일생의  곡선이 딱 반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그 중 절반은 관계의 시간이며, 나머지  후반은 자기 안의 삶의 감각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또는 힌두인 들이 말하듯  “ ‘마르가’ 따라가서” -여기서‘마르가’란  길, 즉 여러분이 겪은 인간 경험의  발자취를 말한다. -여러분 자신의 내부를  향한 삶으로 가는 시기이다. 그러고  나서 완전한 해방이 찾아온다. 분노도  없이,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121)

여러분은 노래하며  자신의 죽음으로 가는 것이다. (121) 

전형적으로  중년은 달성의 기간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간이며, 또한 성취의 기간이 되어야  마땅하다.(122) 

변화하는 사람은  거의누구든지 예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여러분이 뱀처럼  허물을 벗는데, 하필이면 그 중 일부를  꽁무니에 그대로 남겨 놓고 싶다고  치자. 이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뒤에 매달린 것이 바로  근심이다, 여러분은 그걸 떼어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건 마치 털은 건드리지도 않고 반창고만 벗겨 내듯이 점진적으로 조금씩 벗겨져 나가는 옛 허물일 뿐이다.(123) 

의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여러분에게  알려준다. 식사 전에 먹게 될 음식이  한때 살아 있었던 것임을 여러분에게  일깨워 준다. (129)

여러분이 취하는  동물의 생명을 돌려주는 방법은, 지금  여러분이 무엇을 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129) 

삶의 상황을  수습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는 결국  의식의 제약으로 나타나는 수밖에 없다. 싸움이나 짜증은 무식한 자들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후회는 때늦은 각성일  뿐이다.(137) 

여러분이 영원이란  것에 대해 편안함 마음을 느낀다면, 우주가 폭발해 버리는 것조차 얼마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마치  여러분 자신의 죽음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유기적 과정에 부합되는 일이다. 만물은 오고…….

또 가는  것이다. (140)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죽는 것은  반드시 태어난다.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 모든 사람의  육체 안에 사는 절대자아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은 무기로도 베지  못한다. 그것은 불로도 태우지 못한다. 그것은  물로도 적시지 못한다. 그것은 바람으로도  말리지 못 한다.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자아는 영원히 한결같다. 모든  육체 안게 사는 절대자아는 죽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떤 피조물을 위해  슬퍼하지 말라.”(142) 

삶에는 죽음이  뒤따르게 말녀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해서 받아들이게 되는지는 개인적인  문제다. 이 세상에는 죽음의 경험 앞에, 죽음의 포용 앞에 익숙해지게 하는  여러 가지 명상 훈련이 있다. 이것은  입문에 있어 절대 보편적인 주제이다. 거기에는 항상 죽음의, 그리고 그 이후의  탄생의 측면이 존재한다. (144) 

내가 보기에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생각은 나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여기, 즉 여러분이 살아  있는 유일무이한 순간을 음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49)

모든 순간들은  그야말로 유일하며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삶은 특유의  통렬함을 지니는 것이며, 여러분은 지금  경험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모든 사람이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개념이  그런 사실을 빛바래게 만드는 것  같다. (149)

영원한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지금, 여러분 아네, 여기  있기 때문이다. (149) 

죽음에 대한  저항은 여러분이 죽고 나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150) 

‘요가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는 것이다’(155) 

깨달음 직전에  도달하면 예전 방식이 오히려 더  유혹적이어서 여러분을 뒤로 잡아끌게  마련이다. (162)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놓인 최후의 장벽은 여러분이  신이 되는 것을 막는 장벽이다. 유리판은 [이 두 가지 단계를] 갈라놓는 요소를  말한다. 유리를 제거하는 갓은 곧 여러분이  신을 아는 것을 막는 무지의 차단막을  소멸시킴을 의미한다.(163)

나는 ‘옴(om)' 을 듣는다. 나는 신이 도처에 있음을  안다. 성스러운 에너지는 여전히 내  주위에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163) 

제7 차크라는  사하스라라, 즉 머리의정수리에 위치한  ‘천 개의 꽃잎이 달린“ 연꽃이다. 이 차크라에 도달한 사람은 결코  신을 의식하지 않는다. 이곳엔 오로지  분화되지 않은 의식, 즉 침묵이 있을  뿐이다. 제7 차크라에 도달하면 여러분은  무감각 상태가 된다. 이른바 긴장성  의식불명이라는 일컫는 것이며, 여러분은  단순히 하나의 사물로 환원된다.(164) 

“가장 좋은  것은 말 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말의 범위 너머에 놓여  있는 것에 관해서는 차마 무엇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167) 

여러분도 아움  소리를 듣고 싶으면 그냥 양손으로  귀를 막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듣는 소리는 모세관  속의 피 흐르는 소리이지만, 그것도  아움이다. ‘아’는 깨어나는 의식이다. ‘우’  는 꿈의 의식이다. ‘음’ 은 깊고도  꿈조차 없는 잠의 영역이다. 아움은  하나님의 광휘의 소리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신비롭고 중요한 것이며, 일단  한번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매우  간단하다. (174)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 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 (176) 

침묵은 이러한  깨달음에 대한 적절한 어휘다.(177)

핵심은 침묵  속에서 들리는 이 아움이 모든 것을  알려 준다는 점이다. 만물은 그것의  현시이다. 이제 여러분은 내부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여러분이 세상 석에서  움직이면서 영적 삶을 지니는 비결은  언제든지 모든 것에 들어 있는 아움  소리를 듣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모든 것이 변화될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의 성취와 달성을, 그리고 여러분이 찾던 보물을 찾기  위해 더 이상 어디로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여기 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있다. (177) 

절대 진리의  관념 즉 사고하려는 인간정신의 상대성의  범위 너머에 이른바 절대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을 나는 ‘진리  발견의 오류’ 라고 부른다. (190) 

여러분의 삶에  있어 크나큰 중요성을 지니게 될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 첫 만남에서부터 

행동하는 인간은  완벽을 표상 할 수 없다. 여러분은  항상 이원성 그 자체로는 완벽인  에서도 유독 한 측면만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행동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다른 방식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스꽝스럽다. 이들은 스스로에 대해 나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191) 

다도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축소된 우주를 명상하고, 불사의 존재와 자신들 간의 숨은  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위대한 다도의  달인은 천상적 경이를 체험된 순간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이어서 이 경험은  다실에서 가정으로 확산되고, 가정에서는  국가로 스며들었다. (195) 

두려움과 욕망에  의해 위협을 당할 때에는 자아를  놓아 버려라. (205) 

우리의 실제적이고  궁극적인 뿌리는 우리의 인간성 속에  있는 것이지 우리의 족보에 있는  것이 아니다 (208) 

삶의 목표는  여러분의 심장의 박동을 우주의 박동에  맞추는 것이며, 여러분의 본성을 자연에  맞추는 것이다. (211) 

기쁨이 있는  장소를 찾으라. 그러면 기쁨이 고통을  태워 버릴 것이다.(216) 

어떤 사람은  매력이 없고, 그로 인해 자기가 불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톨릭 국가에서  개신교 신자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개신교 국가에서 카톨릭 신자로 살아가죠. 당신이 오로지 흑인이라는 사실만 갖고서 당신의 삶에 있어서 부정적인 것들을 계속 들먹이며 비난한다면, 당신은 인간이 됨으로써 얻은 다른 특권들을 깡그리 부정하는 셈입니다.(217) 

그는 이제껏  자기만의 지옥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한계라고 스스로 설정한  것 너머를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218) 

다른 사람이  하는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악의? 무지? 오만? 사랑? 영웅의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이다. 즉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이다. (219)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노력해야 할 일은  바로 의식을 확장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지식과 사랑이 보다 더 크고 더  큰 지평을 얻게 하는 것이다. 쿤달리니가  나타날 때 벌어지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즉 그 몸이 점점 더 광휘와 의식으로  채워지는 것이다.(222)

여정의 목표는  여러분 자신을 의식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222) 

조이스 [율리시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다섯 개의 손가락을  통과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대문 (大門) 이고, 그렇지 않으면 문 (門) 이다.”

우리가 접하는  어려움 역시 닫힌 문이 아니라, 오히려  활짝 열린 대문으로의 변화 가능성이라고  간주되어야 하리라.(223)

여러분이 자신의  어린 시절로부터 차단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어떤 구체화된 상징에 있다고  여겨질 경우, 명상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체계적인 훈련이 된다. 이상적인  명상의 기능은 구체화된 답변을 초월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223)

여러분을 가로막는  상징을 발견하고 나면, 이번에는 그  상징이 여러분에게 의미하는 바의 중요성에  부합되는 사고와 경험의 양태를 찾아내도록  하라. 그 상징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를  알아내지 못하는 한, 여러분은 그 상징을  제거 할 수 없다. (223) 

상징이 구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것으로  해석될 때, 그것들은 계시를 낳게 된다.(225) 

여러분이 자신의  삶에 권위자가 되었을 때, 여러분은  비로소 성숙하게 된다. (230) 

부족에게 신들은  힘을 의인화한 것이었다. 나중에 가서는, 그것들이 힘의 원천이 되었다.

이 세계의  모든 신들은 힘이 아니라 은유다. (232) 

하나님은 환영이  아니라, 그 자신의 너머에 있는 것을, 즉 하나 됨[속죄]의 신비에 대한  자각을 지시하는 상징이다. (233)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상사의 존재의 이미지에 투사된  것은 사실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는  사실상 그때그때 인간이 처한 조건이  반영된 거울 속 이미지라는 것이다. (237) 

새로운 삶으로의  여정, 즉 우리 모두가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여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과거를 놓아 버려야만 한다.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진실은  우리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247) 

일상적인 갊의  맥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무엇이든지 성스러운 공간이 될 수  있다. 세속적인 맥락에서 우리는 대립자 - 원인과 결과, 득과 실 등등- 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공간은 가령 돈이나 명성을 얻는  방식의 기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258)

여러분의 성스러운  공간은 여러분이 자신의 모습을 거듭거듭  찾을 수 있는 장소다. (258)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 하나는 어떤 결론을 내려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매사가 그 순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259)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260)

여로분이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가? 여러분이 배운 일은  무엇인가? 융은 덩치 크고 힘이 센  사람이었고, 그는 돌을 주위에 늘어놓기를  좋아했으며 , 따라서 그는 그런 일을  했다.(260)

나는 여러분이  옛날을 돌이켜보면, 여러분이 지금 갖고  있는 성스러운 공간과 여러분이 어린  시절에 잇던 진정으로 특별한 장소  간에 어떤 연관을 찾을 수 있으리라  장담하는 바이다.(260) 

어른이 되고  나면, 여러분은 자기 삶을 움직이는  힘을 반드시 재발견해야 한다.

긴장, 정직의  결여, 그리고 비현실적 감각은 여러분  삶의 잘못 된 힘을 따름으로써 나타난다. (261)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으면, 나는 사소한 의례적  세부사항 -즉 메모장은 어디에 두고, 연필은  어디에 두는 등- 에 주위를 기울임으로써, 만사를 내가 기억하는 이전의 모습과  똑같이 만든다. 이 모두가 나를 해방시키는  일종의 ‘준비’ 라고 할 수 있다.(261)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때, 그때부터 일이 시작된다. (262)

성스러운 공간은  속세로부터 완전히 밀폐 봉인되어 있다. 여러분이 그런 공간 안에 들어가면, 그 밀봉된 곳으로는 아무것도 통과  할 수가 없다. 여러분은 날짜나 시간이  주는 자극의 영향으로부터 보호받는  영원의 장소에 있게 되는 것이다. 명상을  할 때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즉 여러분 스스로를  봉인하는 것이다. 명상의 자세는 봉인하는  자세이며, 규칙적인 호흡은 여러분의 내무로  향한 탐험을 더욱 북돋운다. (262) 

여러분은 언제든지  필요할 때마다 그런 봉인 프로그램을  가져야만 한다. 가령 일주일에 한 번, 하루에 한 번, 또는 한 시간에 한  번씩ㅇ이라도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여러분이 장차  내적 삶을 지니려 한다면 그것은  절대 필수인 셈이다. 그것이 제공하는  바는 여러분 안에 있는 영원한 것이  시간의 장으로부터 해방되는 여유 공간이다. (263) 

성스러운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상징적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영적 삶이 가능하고, 여러분  주위의 만사가 영의 고양을 이야기하는  곳 말이다. (264) 

여러분은 [필요할  때면] 어느 장소든지 간에 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성스러운  공간이 어디에나 있다고 말할 정도가  되려면,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우선 - 명상  훈련이라든지 성스러운 공간의 경험을  통해서 성스러움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성스러움이란 주위의 대상과의 은유적  관련성이다. (265)

성스러운 공간에서는  무슨 일을 하건 간에 그 주위는  은유가 된다. (265) 

성스러운 공간은  초월에 대해 투명한 공간이며, 그러한  공간 안에 있는 만물은 명상을 위한  기반을 제공한다. 내 생각에는 특히  커다란 벽이 둘러쳐 있는 인도의  사원 같은 경우가 그렇지 않나 싶다. 여러분이 그 사원의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그 공간 내에 있는 만물은  상징적이며, 온 세계가 신화화된다. (266) 

명상을 할  때에는 여러분 자신의 신들에 대해  명상하라. 삶의 목표란 뭔가 더 높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탈 것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눈을 저 높이에, 즉  대립자의 쌍들 사이에 고정시키고 이  세상 속에서 여러분의 ‘놀이’ 를  바라보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파도와 함께 흔들리는 법을 배우라. 조이스의 말마따나, 세상의 쓰레기 속에서도  ‘광휘를 발하는“ 채로 남아 있으라. (272) 

붓다는 이러한  ‘죽음’ 의 심리학적 측면을 유난히  강조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여러분은  행동 상으로는 여전히 살아 있을  수 있지만, 자기 행동을 향한 욕망으로부터, 행동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또한 행동의  결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여러분의  삶의 사건들로부터 비롯되는 이런 열정으로부터의  심리학적 해방이 곧 ‘니르바나’ 아다. (278) 

[바가바드 기타] 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거기  들어가서 네 할 일을 하라. 그 결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슬픔의  본질이라고 인식하라. 시간이 있는 곳에는  슬픔도 있게 마련이니,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없앨 수는 없지만,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선택을 할 수는 있다.(279) 

계속 명상하십시오. 즉각적인 깨달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정신은 천천히 깨달음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의 방법에만 집착하지 마십시오. 명상을 하는 중에 여러분의 의식이 확장되고 변화되면, 그때 가서 여러분은 모든 길들이 타당한 길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283) 

합리적인 정신은  대립자들을 강조한다. 동정과 사랑은 대립자의  쌍들을 넘어선다. (284) 

스리 라미크리슈나는  칼리 여신에게 귀의했다. 칼리라는 단어는  ‘검다’는 듯과 ‘시간’ 이라는 뜻  모두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만물이 산출되고 또 돌아가는 수수께끼의  검은 심연이기 때문이다.(288) 

여러분은 과연  시체에 입히는 수의를 입을 준비가  되었는가? 정말 그런가? 그러면 배에 올라타라. (290)

스리 라마크리슈나는  말했다.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290) 

우리는 다음에  ‘기쁨이 곧 요가다’ 라고 듣는다.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삶이 곧  여러분의 요가다. 라마크리슈나의 말마따나  “당신이 사랑하는 꼬마 조카가 바로  당신의 하나님인 것” 이다. 이 놀라운  원칙은 역설적으로 여러분 -삶에 염증을  느낀 - 이 단지 똑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기쁨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294)

붓다는 완전한  의식에 대해 눈이 열린 사람을 말한다. (294) 

하늘나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깨달음 속에 있다. 우리 이웃 속에, 적들  소게, 자신 속에 편재하는 시들의 현존에  관한 개달음 속에. (296) 

삶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을 경험하고 도 영과 의사소통한다.

삶을 동해서만  우리는 영속에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영을 완전히  추구하는 사람은 삶의 목표가 곧  죽음임을 안다. (297) 

“내가 보기에는  자네의 문제는 집사람이 거기 도착하기를  바란다는 것, 그리하여 자네가 속해  있지 않은 어떤 상황을 열망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명심하게. 줄곧 현실과는  다른 일을 생각함으로써 자네는 거기서  진을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었던  다른 경험들을 망치고 있는 셈임을  말이야.” (298) 

이것은 두려움과  욕망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으리라. 나는 상황이 내 계획대로 되기를  욕망하고, 그런 욕망은 나로 하여금  다른 경험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게 바로 그것이다! 이게 바로 삶이다! 바라보라! 기운이 넘치지 않는가?” 하지만  이제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좋아할  수 있게 되었고, 아내를 기다리는 것도  더 이상은 지루하지 않다. 심리학적 변화란 이처럼 이전까지만 해도 애써 견뎌 내야 했던 것을 이제는 알고, 사랑하고,[그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299)

두려움과 욕망의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여러분은  불멸로부터 스스로를 배제시키는 것이다.(299) 

모든 종교  훈련의 목표는 심리학적 변화다. 여러분은  각자의 자녀를 돌보고, 취객을 진찰하고, 책을 쓰는 등의 일을 하는 와중에도  신들을 알고, 사랑하고, 거기 봉사하는 것에  근거하여 각자의 명상과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300)

만물이 곧  브라흐만 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한, 여러분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명상이 될 수 있다. (300) 

사자들이 어린  양과 함께 누워 있다는 이야기가  그토록 어리석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읽어 보면, 이른바  사자들이 어린 양과 함께 누워 있는  유일한 때는 그 사자가 어린 양을  포식하고 누워 있을 때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며, “샨티”  “샨티” [평화] 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숭고의 관점, 다시 말해  자아에 관한 의식과 그 관계 모두를  소멸시킨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킬 필요  없이 단지 관점을 바꿈으로써 슬픔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304)

삶이란 항상  슬픔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304)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태도는  바꿀 수 있다. (304) 

여러분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 낮은 체계에 헌신하도록 한다.(305)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침을 뱉을 대에는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조심하지 않을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침이[나한테 되돌아오지  않고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 다른 누군가의  눈에 맞는다면 , 여러분은 붓다가 될  수 있다. (306)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자아의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아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자아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개인적 가치평가라는 것도 없다 (307)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 전혀 없는 동양인은 깨달음을  찾기 위해 이처럼 가족을 떠나 스승을  찾아가고, 자신의 자아라는 작은 공  또는 조개껍질을 가져가서는 스승에게  그걸 깨뜨려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307) 

지혜와 어리석음은  사실상 똑같다. 두 가지 모두 세상의  견해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310) 

남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 여러분은 분리를 겪는다.

여성의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둘이 아닌, 포용하는  특성이 존재한다. (334) 

그 모두가  사랑일 때, 세상 모두는 반드시 사랑이어야만  한다. 무엇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342) 

책을 한  권 쓰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우선  자신의 영감과 직관에서 출발한 다음, 곧이어 어려운 과정을, 즉 여러분이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역을 맞닥뜨리게 되고, 바로 거기서 멈춰 버리게 된다. 바로  그때가 여러분이 규칙을 끌어내야 할  때이다.(373) 

창의적 행동은  뭔가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창의적인 움직임을 산출하는 것이다.

(374) 

춤이란 생명  그 자체가 지고한 상징이다. (376) 

예술은 우리를  스스로의 얽힘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한 사의 날개이다. (377) 

춤이라는 것을  더 이상 공연이나 전시와 같은 방식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마치 새의 울음소리처럼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도 오로지  신체가 그런 범위까지만 춤을 추는  것이 좋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  변화로부터 삶이 도출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의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이 필요로  하고 기뻐하는 행동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며, 나아가 그런 변화는 여러분이  하고 있는 다른 일들 속으로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전체가 그 춤에  합류하는 것이다.(378)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춤추는 것이다. (378) 

직업을 선택할  대에는 두 가지 접근 방식이 잇다. 하나는 앞으로 10년 동안 이런저런 분야에서  가능하게 될 직업의 수에 관한 통계를  연구한 다음, 그걸 기반으로 삼아 여러분의  삶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은 수레바퀴의  테두리를 따라가는 행위나 다름없다. 또  다른 방법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나는 도대체 눨 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질문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 여러분을 궁지에  빠뜨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나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 거야” 라고 말하고, 그 신념을  고수 한다면, 뭔가가 일어날 것이다. 여러분은  혹시 직업을 얻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삶을 얻기는 할 것이며, 그것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380)

운명의 수레바퀴에서는  지혜가 한 가운데를 가리킨다. 젊음은  가장자리를 가리킨다. (380) 

여러분의 책임과  여러분의 건강 모두를 유지하면서 여러분의  창조적 측면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폐 봉인된 은신처를 마들어, 매일  몇 시간가량은 아무것도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 여러분이 성실하게  지킬 수 있는 시간만큼 - 그 시간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 하게 해야 한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몇 시가씩 더 자신에게  허락하되, 단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을 할 시간과 에너지는  반드시 남겨 두어야 한다. (382)

이는 마치  훈련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러분은  훈련에 돌입할 때 시간을 설정해  놓으며, 그것은 거룩한 시간이다. 여러분의  예술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 즉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큼을 여러분의  예술에 바치고, 그것을 시종일관 지켜야  한다. 그러면 뭔가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간에 그 시간 동안은 거기 앉아  있어야 한다. 이것은 소통과 표현, 즉  예술 작업의 두 가지 요소에 관한  명상이다. (382)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383) 

말 그대로  문을 계속 붙잡아 열어 두고 문장들이  쏟아져 나오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들이야 계속해서 나타나겠지만, 여러분아 일찍이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을 하려면 그 문을 계속 열어  두어야 한다. 여러분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비판을 미루어 두어야  한다. 글쓰기에 있어서도 문장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런 일을 해야  한다.비판을 미루어 두는 것은 이른바  ‘너는 할지니’ 라는 용을 죽이는  것이다. 그놈을 죽여 버려라. (385)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385)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 하는 생각  대문에 괴로울 수 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특정한 사람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더 이상의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 크나큰 촉진제가  된다. (385) 

흔히 말하는  작가의 슬럼프를 돌파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것은 내가 보가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우선 여러분이 말을  걸고 싶은 상대를 하나 찾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루에 두 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시간을 떼어 두라는  것이다. (386)

작가의 슬럼프는  너무 머리가 많아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여러분의 머리를 자르라. 페가수스, 곧 시는 메두사의 머리가 잘린 곳에서  태어낫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에는  무모해야만 한다. 여러분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미쳐야 한다. (386)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는 어떤 일을 비판의 두려움 없이  계속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움직일  것이다. 여러분은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387)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보내고, 아예 죽여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2년 뒤에 진작  그래야 했다며 후회하리라.(388) 

“명성이란  중요하지 않다.” 명성의 불빛은 빨리  지나가게 마련이어서, 어떤 사람은 3분 동안  그 속에 있을 수 있고, 또 30분 동안  있을 수도 잇고, 또 전혀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390) 

신들의 현시는  편재하고 잇건만, 위리의 눈이 열리지  않아 못 볼 뿐이다. (404) 

뱀과 달은  모두 옛것에 대해서 죽고, 각자의 그늘을  벗어던지고 다시 태어난다. (406) 

경외심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409)

신화의 신들은  우리 주위의 자연 속에 있는 에너지들을  의인화한 것이다. (409)

여러분 자신의  중심에서 살아가라. (409) 

신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다. (410) 

겉으로는 따로따로인  듯 보이는 사물들도 근본적으로는 하나에  불과하다. (411)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413) 

신화의 첫  번째 기능은 여러분이 있는 장소를  신성화하는 것이다. (420)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425) 
 

내가  저자라면 

책의  주제와 구조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의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아에 관한 의식과 그 관계 모두를 소멸시키라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 시킬 필요 없이 단지 과정을 바꿈으로서, 그리하여 이 세상의 슬픔을 없앨 수는 없지만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캠벨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며 용기 있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신화나 경전을 통해 비유하며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어 하루라도 빨리 후회없는 날을 살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은 마음을 적어 놓은 책 같았다. 특히, 이 책은 대중에게 ‘신화학자’ 로서의 캠벨의 모습보다는 오히려 ‘인간’ 캠벨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 주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의 학식보다는 인품이 더 짠하게 전달되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로서는 가슴 따뜻한 깨달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도입 부분을 제외한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각각은 의식의 세 가지 현세의 삶, 깨달음을 향한 길,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로 나뉘어 서술되어 있다. 그 중 두 번째인 의식단계 깨달음의 장에서 다루어지는 요가, 명상, 다도에 대한 글들은 제4 차크라인 아나하타(심장)에 전달되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깨달음이었으며, 제6 차크라 아냐 (미간) 에 위치한 천국의 차크라를 통해 가보지 않은 천국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달콤하고 은혜로운 장이였다.  

장단점 

이 책의  최고의 장점은 새로운 꺠달음의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호흡, 말소리, 우리의 생활 ,우리 마음 안에 숨은 신을 찾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밖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존재하며 모든 즐거움과 행복의 근원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 단지 머리로만 알고 있던 잠자고 있던 이론을 가슴으로 끌어 내려와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불을 댕겨주었다. 그래서 지금 사는 이 순간의 행복이 감사로 다가오게끔 도와주는 가슴이 따뜻한 책이었다.  

또 하나의  좋은 점은 책을 엮을 때 도입단계에  나오는 아포리즘의 경우인데, 짤막짤막하게  책의 본문 1-3장에 나오는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요약해 적어 놓았다는  것이다. 하나도 버릴 내용이 없기에  책을 다 들춰 보기 힘든 시간에도  한 번씩 다시 속으로 읽으면서 캠벨 사상의 정수를 만나고 느낄 수 있었다. 삶의 지표로 삼을만한 좋은 글귀들이라고 생각된다. 

단점으로는  먼저 구성 상의 불균형을 들고 싶다. 제1장에서는 현세의 모든 삶을 잘 풀어내고 있고, 제2장 깨달음의 장에서는 산불처럼 몰려오는 삶의 고통도 신의 이름을 빌어 위로 받아 다시 살아 볼 용기를 주고 있다. 하지만, 제3장으로 가서는 무슨 메시지를 주려고 하는지를 알 수가 없어 두 번이나 읽어야했다. 그래도 역시 여기저기서 따온 인용문이 일관성이 없고 산만해서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장에서는 도리어 삶과 성스럽게 조우하지 못 했다. 내가 저자였다면 내 안의 신과 나의 삶이 조우하며 앞으로 다가 올 하루하루가 어제와 다르게 변화시키며 마음의 편안과 행복을 찾아 나가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이 부분을 보강해 주고 싶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중간 중간 요가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대목들이 인용되고 있는데 인도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요가나 명상 그리고 경전에 대한 설명들이 낯설고 심하면 거부감이 드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생각이 드는데 이 부분이 또 하나의 단점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아는 바로는 바가바드기타 경전은 크리쉬나의 가르침을 담은 시가(時歌)이다. 지금도 웬만큼 교육받은 힌두교 신자라면 마치 우리가 논어 한두 구절을 외우고 있듯이 이 경전의 명언들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인도의 고전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고전으로 읽혀지고 있고 진리를 사랑하는 세계인 모두의 사랑을 받는 책이다. 이와 같이 경전 자체에 대한 부연 설명이 책의 주요 부분에 자세히 나와 있었더라면 누구나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참고문헌으로서 참고하고 또한 찾아 읽으면서 그 안에서 깊은 경지를 느낄 수 있는, 자신에게 맞는 좋은 글들을 찾아내어 위로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감명  깊었던 글귀들 

“요가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는 것이다.”(155)

>> 해탈이나 자유의 길에 방해되는 것은 영혼의 불순물인데, 이 영혼의 불순물은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에서 생겨난다. 일어나는 불순물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면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을 할  때에는 여러분 자신의 신들에 관해  명상하라. 삶의 목표란 뭔가 더 높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탈것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눈을 저 높이에 즉 대립자의 쌍들 사이에 고정시키고 이 세상 속에서 여러분의 ‘놀이’ 를 바라보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파도와 함께 흔들리는 법을 배우라.”(271)

>> 명상이란 마음을 가라앉혀 신에게 빌거나 마음을 하나로 집중, 몰입 시키는 사색이다. 내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에 집중하며 명상 한다면 이루지 못 할 것이 무엇이 있나 생각하며 공감하고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다도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축소된 우주를 명상하고 , 불사의 존재와 자신들 간의 숨은  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위대한 다도의  달인은 천상적 경이를 체험된 순간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이어서 경험은  다실에서 가정으로 확산되고, 가정에서는  국가로 스며들었다.(194)

>> 내가 지향하는 ‘peace of mind’ 에 대한 글들을 대할 때 마다 저자 역시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행복한 삶을 꿈꾸며 살아간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편안하고 행복하게 늙은 그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IP *.12.160.185

프로필 이미지
이승호
2010.02.15 12:11:15 *.117.112.34
누님의 북리뷰 첫번째 도전 과제가 올라왔네요.
어떠세요. 기분이?
캠밸의 깨달음의 여운으로 계속 힘차게 달려 가는 겁니다.
쭉~
프로필 이미지
이은주
2010.02.22 23:55:58 *.83.68.7
1년  열심히 한 승호가  존경스러워
쭉~ 달려갈께. 고마와 ^^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북리뷰 안보이시는 분들 일단 파일첨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4] 관리자 2009.03.09 84477
738 [그림책] 우리도 가끔은 하느님이예요 file 한정화 2012.05.16 4236
737 행운을 창조하는 사람 현운 2009.09.01 4237
736 한명석님의 '늦지 않았다'를 읽고 [1] 정은실 2010.01.03 4237
735 첫번째, 신화와 인생 북 리뷰 윤인희 2010.02.15 4237
734 구본형의 THE BOSS 조영재 2009.02.16 4238
733 단순하고 실용적인 의사결정 도구, 10-10-10 승완 2009.09.21 4238
732 [7기연구원지원-첫주] 신화의 힘을 읽고서 file [5] 박주선 2011.02.21 4238
731 The Boss-쿨한동행 심신애 2009.02.16 4239
730 선의 황금시대 심신애 2009.03.02 4239
729 "세계는 책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 볼테르 이희석 2010.01.07 4239
728 북리뷰 2. <서양철학사> - 저자에 대하여 & 내가 저자라... [2] 이선형 2010.02.21 4239
727 [북] 왜 일하는가? 대답할 수 있는가? 하모니리더십 2010.11.24 4239
726 북리뷰6 변신이야기 [5] 신진철 2010.04.13 4240
725 생각의 탄생-2차 2회 [1] 정철 2009.02.23 4241
724 늦지 않았다 - 한명석 [2] 김나경 2009.12.13 4241
723 리뷰 3주차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윤인희 2010.03.01 4241
722 인생도처유상수 -유홍준- 나선 2011.11.29 4241
721 리뷰3주차- 마흔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이은주 2010.02.28 4242
720 [북리뷰 13] 난중일기 [6] 신진철 2010.05.31 4242
719 8기 예비연구원(허정화) 2주차 과제 -깊은 인생 file [2] 난다 2012.02.27 4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