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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30일 20시 37분 등록
 

이경희, 에미는 괜찮다, 삶이 보이는 창, 2012


‘엄마프로젝트’ 때문에 엄마에 대한 책을 닥치는대로 읽고 있다. 어제오늘 원로 소설가 김주영의 ‘잘가요 엄마’, 국민시인 김용택의 ‘김용택의 어머니’, 그리고 40대 후반에 단편소설로 등단했다는 이경희의 ‘에미는 괜찮다’ 세 권을 읽었다. 결과는 ‘에미는 괜찮다’의 압승! 자전적 기미가 강한 소설 ‘잘가요 엄마’는 초반의 긴장을 끝까지 가져가는 데 실패했다. 재가한 어머니가 평생 ‘나’에게 쏟은 죄책감 섞인 사랑을 모른 척하는 초로의 화자에게는 마음이 움직였지만, 소설 전체를 어머니에게 할애하기에는 어머니와의 뒤엉킴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쌩뚱맞게 정태와의 우정 이야기가 너무 길었고, 후반에는 그저 그런 성장소설이 되고 말았다. ‘김용택의 어머니’는 너무 곱고 밀도가 약했다. 전문사진가가 1년이나 따라붙어 어머니의 사계를 기록한 사진은 첫눈에는 선명했지만 다시 보니 너무 기획된 티가 강했다. “꽃도 사람이 있어야 꽃이다”처럼 눈이 번쩍 뜨이는 구절은 적고, “할머니는 박물관이요 자연이다”처럼 당연한 구절이 많았다.


거기에 비하면 ‘에미는 괜찮다’는 어머니와의 통화내용을 받아 적는다는, 지극히 단순한 형식 속에 한 사람의 생애를 넘어 한 시대를 담아내고 있었다. 충남 당진 외딴집에서 혼자 농사를 짓는 팔순의 ‘최시남여사’의 삶을 통해  마지막 어머니상을 또렷이 보여주고, 사라져가는 농촌공동체의 모습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또렷한 주제를 가지고 일목요연하게 통화를 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그 때 그 때 뒤섞이는 내용을 저자가 다시 여쭤가며 재구성했을 것이다.


그러니 태반이 저자의 내공일 수도 있는데, 저자의 흔적은 아무데도 없고 오직 어머니의 육성만이 생생하다. 그만큼 모든 얘기가 군더더기라곤 없이 정곡을 찌르며, 시퍼렇게 살아 움직인다. 어머니에게 한없는 애정을 가진 딸이 어머니의 눈이 되고 마음이 되어 어머니의 삶을 바라보았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뒷날개에 소개된 책들을 보니 이 출판사의 신조가 ‘묵묵히 그저 제 할 일 하며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날것 그대로의 서사’를 펴내는 것인가 보다. 치매 걸린 어머니를 모시며 농사짓는 이야기를 비롯해서 다른 책들도 땡긴다. 비교적 신생출판사인데  고마운 마음이 우러날 정도로 출간방향이 진지하고 깔끔하다.


이 책의 목차에서도 그 깔끔한 기획력이 돋보인다.


1장 니 아배가 그립다

2장 내 새끼들이 최고여

3장 에미도 알 만큼은 안다

4장 나두 그런 시절이 있었다

5장 외롭지 않은 것이 워디 있겄냐

6장 영정사진 찍으러 간다


절도있게 나뉜 챕터에 실린  ‘물난리’, ‘용돈’, ‘누렁이’, ‘아파트’ 같은 꼭지글들은 그 제목만큼이나 심상한 내용이지만, 한 치의 과장이 없이도 가슴이 찡했으며, 한 구절도 그냥 지나칠 것이 없을 정도로 영글어 있었다. 그저 단편적인 일상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것들을 연결해 보니,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자식 곁이 아닌 땅을 지킬 때 가장 행복한 여성농민이요, 경제적으로 독립해 있으니 자존감이나 사회적 관계에서 당당하기 그지없는 여성노인의 모델이 손에 잡힌다. 더불어 최시남여사의 가족이나 이웃이 사회학적 연구의 샘플로 봐도 좋을 정도로 소상하면서도 객관적으로 그려져 있으니 귀하고 감동적인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갖은 궁리를 다 한 소설적 플롯이나 세련된 기획력이 없이도 이만한 가치와 감동을 줄 수 있다니 이것이 리얼리티의 힘이리라.


시종일관 짧고 담담하게 서술되었지만, 한 줄 한 줄이 삶이고 깨달음이었다. 오직 한 생을 바쳐서만 얻을 수 있는 압축된 깨달음에 특유의 올곧음이 섞여 나이듦에 대한 해법 하나를 얻었다. “부부라는 건 정두 아니구 자식두 아니란다. 세월이지......” 에서는 부부뿐만 아니라 관계라는 것의 비밀을 알 것 같았고, “저는 지 가정이 있구 나는 갈 길이 따로 있으니, 부모 자식두 같은 둥지서 비비구 살 때뿐인겨”에서는 결코 쉽지 않을 초연함을 보았다.


억척맞게 일만 하는 부인과 선비기질이 있는 남편이 평생 해로하고, 한 쪽을 앞서 보낸 다음에도 두고두고 그리워하는 모습도 애틋했다. 남의 집에 품앗이를 가서는 허리 필 적마다 아무리 논바닥을 둘러봐도 니 아배가 보이지 않더라는 술회에서 눈물이 불쑥 솟구쳤다. 남편이 중풍맞은 직후 겁이 나서 잠시 큰아들네로 합쳤다가,  며느리 눈치 보느라 배곯는 것을 보고(뒤처리가 문제였을 테니) 강단있게 다시 시골로 돌아가는 장면에서도 그랬다. 이렇게 심신이 건강하면 늙었다고 해도 문제보다는 깨달음이 더 많으리라. 생각하면 육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냈으며, 남편을 중풍으로 십 년 전에 먼저 보냈으며, 팔순에도 근면성실한 여성농민이 어디 한둘이랴. 그 중에 오직 최시남씨 만이 자신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첫 책쓰기를 갈망하는 우리들에게도 소중한 전범이 되어 준다. 우리 모두는이제껏 숱한 경험을 하며 살아왔다. 딸이나 엄마, 프로그래머나 공무원, 낭만파나 현실주의자, 성격 급한 사람이나 느려터진 사람의 외피를 입고 몇 십 년을 살아 왔다. 우리의 모든 경험이 컨텐츠로 거듭날 수 있다. 그저 질박한 경험만으로도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나와 다른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해의 폭을 넓혀주며, 후대에는 이 시대의 표상이 될 수 있다. 다만 하나, 나의 경험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각이 필요하다. 이 책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기되 적절한 갈래로 나누어 인상을 강하게 해 주는 아이디어 하나로 탄생했듯이, 우리의 경험을 새롭게 부각시키는 각도를 찾는 일이 급선무다. 이것을 찾으면 그대도 그대의 역사를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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