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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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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일 05시 08분 등록

 

< 의 황금 시대>

 

1. 저자에 대하여

 

저자인 오경웅은 1899 3월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어머니가 둘이었는데, 그는 은행가인 부친이 소실로 들인 둘째 부인의 소생이었다. 4살 때 친어머니와 여의었다. 9살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유학자인 가정교사와 큰어머니에게 논어와 시경 등을 공부했다.

1916년 오경웅은 아버지가 정해 준 배우자와 결혼 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며느리감으로 배운 여자 보다는 순박하게 못 배운 여자가 낫다는 생각으로 글을 깨치지 못한 배우자를 짝으로 맺어 주었다. 오경웅이 1937년 데레사 성녀 전기를 읽고 카톨릭으로 개종하기 전까지 그는 교육받지 못한 부인과의 결혼생활을 후회 하고 이혼할 것을 결심하기도 했다.

1917년 상해에 있는 동오법과학원에 입학 할때 오경웅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웹스터 사전을 보고 이라는 이름을 따서 존 우라는 이름으로 등록 했고, 서양에는 이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겨울 [그리스도교의 신관과 세계]라는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아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920년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 법과대학 대학원과정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그리스도가 불타(佛陀)요 불타(佛陀)가 그리스도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1921년 미국에서 다시 파리로 가서 파리대학교에서 법학을 연구, 이어 1923년에는 미국의 하버드대학 연구생으로 법학을 연구했고, 1924년 귀국하여 상해에서 <중국법학잡지>를 창간하는 한편 1927년 판사로, 1929년에는 부장판사로 임명되어 판사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29년 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1년간 법학을 강의한 후 1930년 다시 귀국하여 변호사를 개업하고 1935년 월간 법학지 <천하>(天下)를 창간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문필생활과 유흥으로 세월을 보낸다. 그는 당시의 자신을 이렇게 서술하기도 했다.

내 세대의 중국인 노릇이란 심신이 극도의 혼란에 빠진 인간이 되는 일이다. 나는 들어가려는 안식의 항구마다 혼비백산 당했다.”

 

1974년에 12월에 발행된 경향잡지에는 오경웅이 1936년에 쓴 그의 일기가 실려있다.

신은 인생의 모든 쾌락을 포함하여 그 의의를 높이신다. 신은 사람의 마음을 그 자신이 알기보다는 더 잘 아시는 이상적인 친구이시다. 신은 일체 서적의 의의요, 고조된 음악이요, 그리고 일체의 과학과 철학이 바로 그 주체의 질료시다. 신의 명성을 인애의 그릇으로 변화시키고, 계집들을 그대의 어미와 자매로 정화시키고, 아동과 동물에게서 배우는 법을 가르치신다. 신은 세계의 정원화를 그대에게 격려하시고 그대의 도덕적 및 지성적 섬유를 튼튼히 하사 자아의 꼬치를 탈피하도록 인도하신다

이 잡지에서는 그러나 이시기에 그가 사실상의 심정의 변화나 영혼의 평가가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실재로 1년 뒤 1937년 오경웅은 과거의 자신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물질적, 지적, 사회적, 정치적으로는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극단적으로 비관론자였다. 내 안에 천주께서만 채워주실 수 있는 허무의 심연이 크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나는 천주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추께서 하늘로부터 땅 위로 걸쳐 주신 유일한 초자연적 교량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비켜난 까닭이었다

 

1937 12 18일 그는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성총이면 그만이다. 성부께서 당겨주지 않고는 아무도 그리스도께로 갈 수 없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성부께 갈수 없고, 성총의 정규적 통로인 성교회의 성사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성화될 수 없다

 

1941년 중일전행 이후 1947년 로마주재 중국대사로 임명되기 전까지 신약번역, 성영번역 등을 한다. 1949년 사법원장으로 입각하기 직전 내각의 붕괴로 중국을 떠나 1949년 부터 1964년까지 하와이 대학과 시튼홀 대학에서 동양철학 전반에 걸친 광범한 저작 이외에 여러저술과 연구와 강의에 몰두 했다.

오경웅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동서의 피안> 1949년 하와이 대학 재직 시절 2년 동안 집필한 것이다. 다음 내용은 <동서의 피안>에서 본문에 있는 글이다.

 

그리스도 교는 동서와 신구(新舊)를 초월한다.

그리스도교는 구보다 더 오랜 것이며

()보다 더 새로운 것이다.

내가 자라난 환경인 유교, 도교, 불교보다

그리스도교가 내게는 더 민족적이다.

이 종교들은 나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교사가 되어 주었으니 나는 그들에게 감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생황의 통일을 이루어주시는 본질이시다.

 

많은 해설서 들은 저자 오경웅이 동서를 초월한 피안의 세계가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임을 제시하고 있다라고 설명해 놓고 있다.

1949년 초반 2년간 쓴 것이 '동서의 피안' 이고 64년까지 동양철학 저술과 연구, 강의를 한 뒤  1967년 쓴 것이 '선禪 의 황금시대' .

서양에 선을 최초로 소개한 것은 스즈끼 다이세쯔라는 일본인이었는데, 오경웅이 선불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스즈키 다이세츠 박사를 만나면서부터였다.

' 의 황금시대' 뒷부분에는 저자가 자신의 제자를 통해 스즈키를 만났으며 그에 대한 첫 인상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

스즈끼를 처음 만나는 순간 나는 그가 단순히 철학을 가르치는 학자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제로 철학이 무르녹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걸 대번에 느꼈다.”

 

스즈끼가 쓴 선의 숨결로 살다라는 책에 매료된 오경웅은 이 후 선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고, 서양에 중국의 선을 소개할 목적으로 ' 의 황금시대'를 쓰게 된다. 그의 책 ' 의 황금시대'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선을 서양에 소개한 체계적이고 충실한 안내서로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2. 내가 저자라면

 

2-1. 이 책의 전체 적인 뼈대

이 책은 저자가 스즈끼 다이세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듯이 당나라 시대의 대선사들의 깨달음의 과정과 스승들과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생소한 선의 깨달음을 쉽게 해설해준 해설서라고 할 수 있다.

 

책 첫머리에 당나라 시대(618 ~ 906)의 선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계보를 도식화해 놓았다.  1장에는 선禪 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와 현대에서 선禪이 가지는 가치를 정리했다.

2장부터 13장 까지는 14페이지에 있는 계보를 기준으로 선禪이 당나라 시대 대선사들에게 어떻게 전파되고 가르침이 이어졌는지를 일화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 하고 있다.

14장은 저자가 말머리에 밝혔듯이 책의 마지막 간추린 에필로그로 당대 이후의 문헌에서 선의 체험과 일화 등을 발췌해 엮은 글이다.

 

책의 마지막에는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이 드러나는 스즈끼 다이세츠를 만나게 된 경험과 책이 발간 되기 까지 저자가 스즈끼 다이세츠와 주고받은 경험을 적고 있다.

책 첫머리 <지은이의 말>에 저자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읽으라고 권한 이 책에 바쳐진 토마스 머튼의 글이 있다. 저자는 토마스 머튼 신부의 글이 이 책의 심오한 통찰에 대한 해설판 일 수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2장부터 13장까지의 각 장은 14페이지에 기재된 계보를 기준으로 자연스럽게 선禪이 이어지는 흐름에 따라 전개 되고 있다. 스승에게 깨달음을 얻은 제자가 다시 스승이 되어 제자에게 깨달음을 주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일화들이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당나라 시대의 300년 선의 황금기를 따라가게 된다.

 

2-2. 아쉬운 점

자연스러운 책의 흐름에 저자가 인용한 서양의 종교 혹은 철학과 선禪 의 비유는 자꾸 방해가 되었다.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는 느낌 보다는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기독교에 대한 역사적 학문적 지식이 깊지 않은 독자인 탓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루이스브뢰크(Ruysbroeck), 십자가의 성 요한(St.John the Cross),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와 같은 서양의 신비주의자의 통찰도 선가나 도가의 통찰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p133)

위와 같은 글은 일화를 바탕으로 자연스러운 설명과 흐름을 이어가던 내용과는 다르게 어떤 점이 비슷한지 모호한 탓에 본문과 조화되어 하나의 내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작가 오경웅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서점에서 대략 읽어 본 <동서의 피안>은 저자가 1949에부터 2년간 쓴 것이라고 하는데, 1967년에 발표한 <의 황금시대>와는 책의 느낌과 문체가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완전히 달라서 좀 당황스러웠다.

카톨릭과 기독교영역에서는 그가 동서의 종교와 철학의 궁극적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 하다고 인용하고 있으며, 불교나 다른 쪽에서는 그가 진정한 선을 실천한 참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저자 오경웅은 20세기를 통틀어 동서양을 완전하게 이해한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인물 이라고 한다. 이런 평가를 내릴 깊이 있는 지식이 없는 내게는 동서양을 완전하게 이해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문득 궁금해 졌다.

 

2-3. 감상 및 마음에 드는 장절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 현암사에서 나온 도덕경을 읽으면서 어렵게 느껴졌던 도()에 대해 약간은 쉽게 다가 갈수 있었다. 저자는 선禪 이 도가 사상이 최고로 활짝 피어난 모습이며, 도가 사상이 선의 어머니와 같다고 했는데, 도 와 선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것은 아직 모르겠다.

책에서 연속해서 나오는 참본성은 마치 나에게 너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라고 응원해 주는 응원가 같이 느껴졌다. 이것은 나를 비롯한 현대인들이 느끼는 몰개성에 대한 따뜻하지만 따끔한 충고가 아닐까? 선인들의 깨우침이나 알쏭달쏭한 선문답을 읽고 이게 무슨 소리일까?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차분하고 위안이 되는 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아직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조자 모르는 상태에 있는 사람한테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다 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p36)

이 글귀는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된다고 뇌에 각인을 하면 그대로 된다는 요즈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진정 알고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져 주는 심오한 글이었다.

 

자기 자신이 곧 행복 그 자체요 참사람(眞人)임을 깨닫지 못하고 대신 바깥에 행복이 있다고 믿어 그 쪽으로만 안달하며 찾아 헤매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 사실상 그는 환상의 그림자만 좇고 있는 것이다” (p130)

 

황벽의 이 말은 이 책에서 가장 내게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이다.

내 자신이 행복 그 자체라는 깊은 깨달음을 이제 난 시작 하고 있다.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우리의 심장은 숨 쉴 더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p32)

 

언어와 소리와 색깔 가지고는 도저히 실체에 못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동양의 정신은 언어와 소리와 색깔을 넘어선 곳에서 그 고향을 찾는다. (p33)

 

서양인들은 자기네들 문명의 결함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으며, 동시에 동양이 보다 깊은 저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역설적이긴 하지만 서양 과학 문명을 따라잡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동양의 지식인들 보다는 서양인들한테 선이 더 큰 영향을 주고있다. (p35)

 

인위적이고 굳어져 있으며 정신적으로 공허한 기계화된 세상에서 본래의 자연성과 정신을 회복하려는 서양인들의 필사적인 욕구를 말해 준다. (p36)

 

아직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조차 모르는 상태에 있는 사람한테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다 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p36)

 

그들은 부귀 변천에 몸을 맡기면서도 한편으론 탐낼 것도 즐길 것도 없는 현상계의 텅 빔을 항상 의식한다. (p45)

 

최상의 지혜를 얻으려면 직관을 갖고 곧바로 자신의 참 본성을 꿰뚫어야만 한다. (p58)

 

도를 닦는다는 사람이 신참내기라고 너무 업신여기는 게 아니오 낮은 사람에게도 최상의 지혜가 있고 높은 사람에게도 얼빠진 지혜가 있는 법이오. 남을 업신여기는 것만큼 큰 죄가 없다는 걸 아시오” (p59)

 

본마음을 알고 제 본 성품 보면 이것이 곧 대장부요,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요, 바로 부처이니라. (p61)

 

뜻있는 곳에 씨가 내리어

인연 닿는 곳에 열매를 맺네.

뜻 없이는 씨도 없으니

성품이 없으면 생()도 없어라. (p61)

 

부족할 때는 스승이 제자를 건네 주어야 하지만 깨달은 뒤엔 제자가 스스로 건너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p62)

 

교외별전. 직접 물을 마셔 보고야 찬지 더운지를 알 듯 진리의 깨달음이란 순전히 개인적인 깨달음이다. (p78)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라 해도 자신의 깨달음을 남의 마음 속에 그대로 들이 부어넣을 순 없다. 고작해야 임산부의 해산을 옆에서 도와 주는 산파 역할 밖에 할 수 없다. (p78)

 

내 그대에게 말한 것은 결코 비밀이 아니오. 그대가 스스로를 들여다 본다면 비밀은 그대 마음 속에 있을 것이오” (p79)

 

머리의 지성 하나만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는 일반 기술 지식과는 달리 정신의 지혜는 우리의 온 존재, 즉 마음과 머리, 육체와 정신이 한 덩어리가 되어 경험되고 터득되어야 한다. (p79)

 

학문에 있어서 만일 그 근본을 안다면 모든 경전은 다만 마음 속 진리에 대한 갖가지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p80)

 

불립문자. 이 귀절 전체의 의미는 경전속의 말에 집착해서도 안되며 또한 남이 우리의 말에 의지하여 깨닫기를 기대해서도 안된다는 뜻이다. (p81)

 

무릇 공에 집착하는 사람만이 경전을 비웃고 쓸모가 없다고 말한다. 만일 정말로 말이나 문자를 버렸다면 불립문자란 말도 버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말이기 때문이다.” (p81)

 

<불립문자>란 결국 말이나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말이나 문자가 진리를 가르치는 수단으로 완전히 부적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참본성을 본 사람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그때그때 잘 꿰뚫어 본다. 왜냐하면 그는 둘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며 그 어느 쪽에도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p82)

 

마음이야 말로 선의 열쇠다 (p82)

 

혜능이 말하는 무념’(?念)은 단순히 어떤 기존 관념이나 판단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마음을 어떤 것에도 고정시켜 놓지 않고 자유롭게, 걸림없이 쓰는 것을 뜻한다. 무념을 아무 생각도 안한다거나 모든 사상을 끊어 버려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선 절대 안된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라는 말의 덫에 덜커덕 걸리고 만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나 말과 문자에만 집착하는 마음은 세상 만가지 일을 순식간에 수갑과 밧줄로 둔갑시킨다. (p85)

 

마음에 머물러 침묵을 바라보는 것은 일종의 병이지 선이 아니다. 마냥 앉아 눕지 않는 것도 육체를 학대하는 짓일 뿐 마음에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p86)

 

인생의 최대 비극은 수단에 집착하여 목적을 잊어먹는 일이다. (p86)

 

바깥 세상에 집착하면 바다에 파도가 일 듯 생과 사의 현상이 일어난다. 바깥 세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잔잔히 흐르는 강물처럼 생과 사의 굴레가 벗어난다.” (p87)

 

헤능 [단경]

그대가 이미 모든 집착에서 자유롭고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깍아지른 듯한 허공에 떨어지지 않도록, 죽음과 같은 고요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는 모름지기 학문을 닦고 견문을 넓혀라. 그래야 비로소 자신의 참 본성을 깨닫고 모든 깨우친 사람의 도리를 터득할 수 있다.” (p87)

 

그렇게 묻고 있는 바로 네가 보배다. 그 보배 안에 일체가 부족함이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네 맘껏 그 보배를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여 바깥에서 찾아 헤맬 필요가 어디 있는가?” (p108)

 

참으로 깨친 사람은 인과의 법칙에 지배되는 현상계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초월계의 영원성을 꿰뚫어 보지만 동시에 현상계의 변화도 잘 알고 있다. 도는 이 양자를 초월하며 동시에 둘 다를 포함한다. (p127)

 

장자의 말

옳은 것을 따른다 하여 그른 것을 아주 없애며

질서를 따른다 하여 혼란을 죄다 물리칠 수 있을까?

이것은 천지의 이치와 만물의 실정을 모르는 소치이다.

이는 마치 하늘을 본받는다 하여 땅을 무시하며

음을 따른다 하여 양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서로 꽉 묶여져 있어서

하나를 들어올리면 다른 하나가 따라 나온다.

하나를 버리면 둘 다를 버리게 된다.

부정 없이 긍정에만 매달릴 수 있을까?

무엇에 짝하여 그 긍정이 성립된단 말인가?

그런데도 굳이 고집한다면

그는 바보요 미치광이일 뿐이다. (p127)

 

한번은 중 하나가 백장에게 물었다.

부처는 누구입니까?”

백장이 되물었다.

너는 누구나?” (p129)

 

자기 자신이 곧 행복 그 자체요 참사람임을 깨닫지 못하고 대신 바깥에 행복이 있다고 믿어 그 쪽으로만 안달하며 찾아 헤매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 사실상 그는 환상의 그림자만 좇고 있는 것이다. (p130)

 

황벽 그의 말에 따르면 선한 업을 쌓건 악한 업을 쌓건 똑같이 현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 (p131)

 

깨달은 사람일지라도 정서적인 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조주의 행동은 아마 이런 뜻이었으리라. “스승님! 화를 푸시고 푹 쉬십시요.” (p149)

 

장자나 선사들은 창자의 활동이 두뇌의 기능보다 결코 못한 게 아니라 단순한 대뇌 운동, 즉 사고가 갖지 못하는 우주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p156)

 

그대들 스스로가 바로 주인공이다. 바깥에서 다른이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p157)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최상의 지혜요.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 가장 큰 병이다. (p160)

 

빈손으로 왔다면서 자신의 무지를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벌써 마음이 에고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준다. (p166)

 

선의 근본 이치를 들려달라고 한 중이 조주를 졸랐다. 그러자 조주는 이런 변명으로 대답을 피했다. “난 지금 오줌이 급해. 생각해 보게나. 이런 사소한 일조차도 내 자신이 직접 하는데..” (p168)

 

어떤 사람이 정말 깨달아서 그 근본을 얻었다면, 그리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알고 있다면, 그런 경우에는 사실상 수행을 한다 안한다는 극단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느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초심자가 인연이 닿아 그 자리서 돈오했다 해도 그에게는 아직도 단번에 청산할 수 없는 태초 이래로 빚어온 타성의 찌꺼기가 남아 있게 된다. (p193)

 

그대들 각자는 내 말을 기억하려 하지 말고 내 말을 통해 스스로 자기 안을 들여다 보라. (p201)

 

도덕적인 면에서도 누구나 처음엔 사회의 기존 관습에 젖어 그것이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나 적용되는 신성하고 보편타당한 법칙이라고 생각하지만, 경험이 차츰 쌓이다 보면 친숙한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며 친숙하지 않은 것이 반드시 그릇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도덕 기준의 혼란으로 처음 얼마간을 갈피를 잡지 못하지만 결국 그는 본래의 나로 돌아와 이성과 양심의 지시에 따르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점차로 자신이 주인이지 노예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p215)

 

현상계에 숨어 있는 본체

달이 뜨기 전인 야반 삼경

서로 만나 알아보지 못해도 이상할 리 없건만

그대는 옛 의심을 품고 슬며시 그에게

다가가고 있구나. (p214)

 

도의 수행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로 외부의 다른 것, 다른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건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빨리 그에게서 떠나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그가 부모일지라도 죽이고, 친척권속이라해도 죽여라. (p239)

 

첫 단계의 사람은 자신의 주관적인 희망이나 공포, 또는 선입견 때문에 대상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

둘째 단계의 사람은 산을 산으로 보고 강을 강으로 볼만큼 정상적인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소박하게 대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에는 우리의 주관이 섞여 있다는 것을 마저 깨달아야 한다.

셋째 단계의 사람은 주관과 객관의 혼연일체로 사물에 대한 조화있는 눈을 갖게 되지만 그것조차 경험적인 사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상대성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단계는 자신이 참나와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유롭게 현상계로 돌아와 즐길 수 있다. (p249)


어떤 제자가 "나무가 시들어 잎이 떨어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번개같이 내뱉은 대답이었다.
"체로금풍 - 가을바람에 몸을 드러내다." (p274)
 

하루는 제자가 운문에게 물었다.

무엇이 저의 참나입니까?”

산수를 유람하며 즐기는 것이지.”

사실상 그의 가장 행복한 표현 중의 하나는 역시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 (日日是好日)이라고 한말이다. (p277)

 

법안 문제는 눈에 있다”(p286)

 

어제 무당이 푸닥거리를 했는데 자네도 그걸 보았나?”

보았습니다

어느 면에서 자네는 그들만도 못하네.”

?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은 남이 웃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데, 자네는 딴 사람이 웃는 것을 보고 겁을 내내 말일세.” (p302)

 

아예 나귀탈 생각을 버려라. 그대 자신이 곧 나귀요, 온 세상이 또한 나귀다. 그러니 새삼 나귀를 탄다고 하는 게 어디 있겠는가. 아예 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이 그대의 놀이터가 될것될 것이다” (p321)

 

봄에는 백 가지 꽃이 피고

가을엔 달이 밝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겨울엔 눈이 내린다.

이렁쿵 저러쿵

헛 걱정을 안 하면

인생살이 그대로가

호시절이다.

인생은 가히 역설적이다. 자신의 생활에 근심걱정하지 않는 사람만이 삶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으며, 근심걱정하지 않은 사람 만이 진정 남을 돌볼 수 있다.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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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09:22:33 *.255.182.40
<동서의 피안>도 읽으셨군요. 대단하세요.
그러게요. 동서양을 완전히 이해했다...그 말 자체가 많은 의문을 지니고 있을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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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현주
2009.03.04 12:33:20 *.248.234.22

아 수희향님도 그런 생각 하셨어요?
이번 남은 한주 같이 화이팅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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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 인생을 압축해놓은 책 - 메이킹머니해피 [6] 한명석 2009.03.04 4350
714 미래에 집중하라 구본형 2009.03.04 5037
713 경영의 미래 - 경영자 없이 경영하고 조직없이 운영해 갈... [2] 구본형 2009.03.06 5157
712 제국의 미래/ 에이미추아 file [2] 나리 2009.03.07 4876
711 제국의 미래 [2] 박안나 2009.03.08 4313
710 [5기2차4회] 제국의 미래 [2] 진현주 2009.03.08 4286
709 제국의 미래 이승호 2009.03.08 4244
708 제국의 미래-에이미 추아 [1] 류춘희 2009.03.08 4403
707 <제국의 미래>를 읽고 수희향 (박정현) 2009.03.08 4307
706 <제국의 미래>를 읽고 수희향 (박정현) 2009.03.08 4237
705 관리자님 죄송합니다만 도와주세요 ^^:: 수희향 (박정현) 2009.03.08 4821
704 [5기2회4차] '제국의 미래' - 북 리뷰 [1] 장성우 2009.03.08 4245
703 제국의 미래를 읽고 [2] 정세희 2009.03.08 5079
702 제국의 미래 [1] 정철 2009.03.09 4406
701 제국의 미래 Day of Empire (1) file [2] 김성렬(백산) 2009.03.09 5286
700 제국의 미래 심신애 2009.03.09 4303
699 제국의 미래 [1] 김홍영 2009.03.09 4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