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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8일 22시 07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저자에 대한 기록 및 개인적 평가)

저자: 에이미 추아

중국계 미국인인 저자는 1962년생으로, 1987년 하버드 대학에서 국제법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대학이 서기 전, Cleary, Gottlieb, Steen & Hamilton이라는 컨설팅 회사에서 컨설턴트로 활동하다 듀크, 스탠퍼드, 뉴욕 대학교를 거쳐 현재는 예일대 법학 교수로 있다.

 

그녀의 전문 분야는 국제교역, 국제법, 개발, 민족 갈등 및 세계화로서, 국제 관계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녀의 또 다른 저서 <불타는 저서> 역시 <이코노미스트> 선정 올해의 책이 될 정도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약간 의외이기는 하다. 책 제목 <제국의 미래>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어쩐지 저자가 역사학에 관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을 불러 일으키기에 말이다. 그녀의 프로필을 조금 더 파헤쳐 들어가보면, 저자는 1990년 초반에는 멕시코 시장민영화 컨설팅 업무를 거쳐 1998년 아시아 경제위기 동안에는 세계 은행에서 일하는 등, 확실히 국제관계에서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확실히 이 책은 기존의 역사책들과는 달리 역사적 사실들을 어떤 사관 혹은 관점에서 해석하느냐 보다는, 서로서로의 역학 관계를 풀어내는 능력이 탁월했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점쳐볼 수 있겠다. 전통적 의미의 역사학자가 아닌 국제관계의 전문가인 저자는 과거 제국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그것을 현재 미국과 어떻게 연관 지어 풀어가고 있는지를 따라가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흥미로운 길이 아닐까 싶다.

 

역자 이 순희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역자는 자신의 역자 후기에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세계적인 역사와 문화, 인종 따위에 대한 내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새삼 깨달았다라고 이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부족함을 당당히 (?) 밝히고 있다.

 

물론 우리의 고유 문화인 겸손일 수 있다. 그래서 역자의 다른 책들을 살펴보았다. 역서 중 이 책과 관련이 있을 듯한 책으로는 <나쁜 사마리안인들> 정도이다. 약간 불안하다.

 

역자의 프로필이나 역서에서 독자들에게 강한 신뢰감을 줄 수 없다면, 차라리 전문 번역가의 긍지를 갖고 겸손하기보다는 이 책을 번역하기 위해 어떠어떠한 책들을 읽었다든지,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다든지 하는 신뢰할 수 있는 당당함이 아쉽다.

2: 마음에 무찔러드는 글귀들 (인용문)

 

서문: 세계 제패의 비결

?  이 책은 초강대국을 다루고 있다. 분명히 밝히면, 단순한 대국이나 초강국이 아니라, 초강대국에 관한 책이다 (6).

?  여기서 말하는 초강대국은 극소수의 사회들을 이르는 것이다 (7).

?  내가 이 책의 취지에 맞추어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취급할 나라 혹은 제국은 다음 세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n  그 나라의 권력은 동시대의 경쟁국들이 장악한 권력을 분명히 능가해야 한다.

n  또한 그 나라는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경제력, 혹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n  또한 그 나라는 단순히 특정한 한 지방 혹은 지역에서의 우위라는 테두리를 넘어서서 지구상의 방대한 구역과 방대한 인구에 대해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8).

?  이 책의 대부분은 초강대국이라는 조건에 부합하는 사회들을 고찰하고 각각의 나라들이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관용이 어떻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밝히는 데 할애될 것이다 (9).

?  한 사회가 한 지방이나 지역이 아닌, 전 세계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군사적, 경제적 면에서 세계의 최첨단에 서 있어야만 한다 (9).

?  내가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권과 관련된 현대적 의미의 관용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관용은 정치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의미한다 (10).

?  좀 더 명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종, 종교, 민족, 언어 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회에 참여하고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일컫는 것이다 (10).

?  요컨대 이 책의 핵심적인 개념은 상대적인 관용이다. 세계적인 패권을 다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회가 절대적인, 영원불변의 기준으로 볼 때 관용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경쟁자들과 비교해서 더 관용적이냐 아니냐하는 것이다 (11).

?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관용이 세계 제패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 그리고 역으로 말하면, 불관용은 초강대국의 쇠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12).

?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것은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한 것과도 관계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이 급격히 성장하는 컴퓨터 시대에 기술적, 경제적 측면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과도 관계가 있다 (13).

?  미국은 보편선거권을 인정하는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서는 최초의 초강대국이고, 인권과 모든 민족의 자결권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시대에 등장한 최초의 초강대국이다. 또한 미국은 대량 파괴무기를 휘두를지 모를 테러리스트 조직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최초의 초강대국이다 (13~14).

?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요인들 때문에 미국이 세계에서 맡아야 할 적절한 역할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미국인들이 많다 (14).

?  새뮤얼 헌팅턴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민, 특히 멕시코같이 스페인어 사용 지역에서의 이민은 미국의 핵심을 이루는 앵글로-개신교개인주의, 직업윤리, 법치주의라는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위협요소라고 주장한다 (18).

?  그렇지만 나는 미국 사회가 무수한 이질적 하위 공동체들을 결합시킬 접착제를 가지고 있는 가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헌팅턴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18).

?  미국의 정체성을 하나의 고유한 인종 집단 혹은 종교 집단에 묶어 놓으려는 시도는 미국의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헌팅턴은 어떤 인종 혹은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도 WASP의 가치관을 채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의 참된 정체성을 WASP 문화와 WASP의 시민적 가치관이라고 규정하는 헌팅턴의 태도야말로 미국의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언행이다 (19).

?  국경 밖에서 보면,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 전역의 수십억 인구를 미국에 단단히 묶어놓을 수 있는 접착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19).

 

1. 고대제국의 관용

1-1.     최초의 패권 국가, 페르시아 ? 아케메네스

?  아케메네스 왕조는 대략 기원전 559년부터 330년까지 강력한 페르시아제국을 통치했다 (33).

?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만을 고대 국가로 간주한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로마제국은 물론이고 고대의 그 어떤 제국보다 큰 영토를 다스렸던 역사상 최초의 패권 국가였다 (34).

?  전성기에는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4,200만 명을 거느렸다 (34).

?  아케메네스 왕조가 200년 동안 전례 없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관용 정책 덕분이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해당 지역의 법률과 전통을 포용하고 해당 지역의 언어, 종교, 예식을 용인하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피정복민의 반항과 반란을 최소화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인종이나 종교에는 개의치않고 제국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장인들, 사상가들, 노동자들, 전사들을 활용하여 문화적 다양성과 통합력을 국력의 원천으로 변화시켰다 (52).

?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상 최초로 세계를 재패했던 강국이었다. 키루스와 다리우스는  전략적 관용이라는 전략에 정통했으며, 덕분에 당시에 알려져 있던 세계 전체와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대규모의 영토를 아우르는, 아프리카의 불타는 사막으로부터 얼음으로 뒤덮인 중국의 국경까지 뻗어나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54).

?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은 키루스와 다리우스가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관용이 후일에 싹틀 불관용의 씨앗을 뿌려놓았다는 점이다 (57).

?  페르시아 제국은 군사적으로는 통합되었지만 현대 국가들과 같은 지배적인 정치적 정체성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급속히 뻗어나가는 제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의 종요나 언어, 또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58).

?  아케메네스 제국의 피정복민들은 대부분 제국에 대해 특별한 충성심을 느끼거나 제국에 소속된 것에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반면에 서기 4세기에 로마제국의 피정복민들은 제국에 대한 특별한 충성심과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에는 다양한 민족들의 마음을 움직여 공동의 규범을 옹호하게 할 만한 특성이 없었다 (58).

?  요컨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중심에는 강력한 분열의 힘이 자리 잡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 덕분에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 강화해왔던 각각의 민족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반감을 쌓아가다가 결국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이질적인 민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관념 체계 ideology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중되어 있던 권력은 결국 지배력을 잃게 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 후기에는 분리주의를 지향하는 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제국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군사력뿐이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각 지역의 엘리트에게 그들의 지위와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자, 아케메네스의 피정복민들은 대군주를 단숨에 갈아 치웠다 (58~59).

?  최근에 출판된 알렉산드로스 전기에서 역사학자인 가이 맥린 로저스는 현대 이전의 인물에 대해서는 현대적인 개념을 적용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60).

?  알렉산드로스이 정복 덕분에 그리스의 언어, 문학, 미술, 건축, 철학은 지중해를 건너 여러 대륙,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이집트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했던 여러 도시국가에서는 야만인의 사상이 그리스어로 옮겨져 제국에 흡수되었고, 이를 통해 혼성문화가 탄생했다. 헬레니즘이라고 알려진 이 문화는 이후 기독교와 서구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엄청난 군사적 위업을 이루었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페르시아 왕들은 결코 이룩하지 못했던 대륙을 가로질러 형성된 고도의 문화적 통일체였다 (65~66). 

1-2.     팍스로마나, 세계인의 탄생 ? 로마

?  <로마만이> 유일하게 여왕이 아니라 어머니이 가슴을 열고 피정복민을 받아 안았으며 공통의 이름을 가진 인류를 애지중지했다. 로마는 정복한 사람들을 넓고도 경건한 품에 안고 시민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모든 갈등을 가라앉히는 로마의 관습이 베푼 은덕이다. () 우리는 모두 똑 같은 국민이다 ? 클라우디우스, 4세기의 시인 (67).

?  서구를 상징하는 제국을 하나 꼽는다면 로마제국을 들 수 있다. 로마제국은 영토 면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 밖의 거의 모든 면에서 그 이전의 초강대국을 능가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전쟁 조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로마는 하나의 관념idea이었다 (68).

?  로마는 엄청난 규모의 군사력뿐만 아니라 서구 문명의 새로운 정점을 상징했다. 로마는 과학, 문학, 예술의 절정을 이루었으며, 1,000년이 넘도록 이 분야에서 로마를 앞지르는 나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69).

?  여기서는 로마제국의 역사를 개관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대신에 2세기 로마의 전성기에 초점을 맞추고 로마가 세기의 경쟁자들을 뿌리치고 당대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던 관용 정책을 파헤치고, 로마 제국의 남다른 응집력을 뒷받침한 여러 요인들을 조명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20년 가까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대목이다 (70~71).

?  통일된 로마 제국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이 그랬듯이,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여 로마제국의 속주로 삼았다 (71).

?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이나 다른 고대의 제국들과는 달리, 로마제국에는 각 지역의 지배층이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상한성이 없었다 (71).

?  로마에서는 제국의 각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심지어는 황제가 되기도 했다 (71).

?  영원한 도시 로마에는 온갖 피부색과 배경, 그리고 온갖 문화적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았다 (72).

?  로마제국은 관용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냈다. 1790년 미국 헌법의 기초자 중 한 사람인 대법원 판사 제임스 윌슨에 따르면, 로마인들이 자국의 힘을 전 세계로 확장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주민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윌슨은 로마가 전략적으로 채택했던 관용이야말로 제국을 확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73).

?  대제국 로마는 현대의 시카고 학파가 우쭐대면서 떠벌리고 있는 전지구적 차원의 경제와 자유무역, 시장 개방을 일찌감치 실현한 본보기였다 (82).

?  또한 로마는 특별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런 면에서는 아주 외떨어진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83).

?  로마에는 현대적인 의미의 인종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83).

?  로마제국의 가장 흥미로운 면모는 사람들이 로마제국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86).

?  로마에 속한 다양한 민족들에게 로마는 코무니스 파트리아, 즉 공동의 조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87).

?  로마인들은 또한 유용하다는 판단이 서기만 하면  서슴없이 다른 민족들의 전통과 지식, 관습을 받아들였다 (87).

?  주목해야 할 점은, 로마는 그리스 로마 문화를 성공적으로 수출하면서도 각 지역의 언어나 전통을 말살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88).

?  피부색은 물론 계층을 구분하지 않고 시민권을 부여하는 정책은 로마의 문화와 가치관을 확산시키는데 효과적이었다 (91).

?  로마가 다른 민족들을 자국 내로 편입시키는 전략을 쓰면서 추구했던 목적은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여 다양성을 고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민족들을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로마의 관습, 생활양식, 풍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인종적인 혈통에 관계없이 어떤 집단이든 완전히 제국에 통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로마는 너그러운 나라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야만적인 관습을 보존하거나 존중하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91).

?  요컨대 로마 사람들은 다른 문화권의 전통을 존중하는 문화 상대론자들이 아니었다. 로마의 관리들은 정복한 민족의 지도 계층에게 로마의 규격화된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고, 이에 순응할 경우에는 이를 보상해주는 정치, 경제 제도를 만들어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출신 민족과 인종은 로마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국으로 흘러드는 새로운 민족들의 끝없는 대열을 통합시키고 동화시키는 로마의 적극성과 능력, 이것이야말로 로마가 위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93).

?  대부분의 경우 로마의 종교는 제국에 편입된 새로운 지역의 토착 종교와 공존했다 (95).

?  로마 사람들은 각 지역의 신들을 제국의 종교제도 안에 통합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유일신 종교로서 로마의 우상숭배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대교와 기독교의 반격은 매우 격렬했다 (95).

?  처음에 로마제국 안의 유대인들은 로마의 전략적인 관용 정책 덕분에 번영을 누렸다 (96).

?  역사학자들 가운데에는 로마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을 대부분 정치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종교적, 문화적 요인이 크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어찌 되었든, 세월이 갈수록 유대인들의 운명은 권력을 잡은 황제의 소신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97~98).

?  기독교는 로마의 관용 정책에 특이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98).

?  기번에 따르면, 어떤 군주들은 무관심했고 또 어떤 군주들은 관대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비록 법적인 관용은 아니지만, 종교와 관련해서 실질적이고 공개적인 관용의 혜택을 누렸다 (98).

?  로마제국의 쇠퇴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쇠퇴의 원인으로는 제국의 지나친 팽창, 경제 위기, 야만인들의 침입, 군사력 약화 등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 모든 원인들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99).

?  그러나 로마 붕괴의 총체적인 원인을 밝히는 것은 이 장의 주제를 벗어나는 일이다. 여기서는 이 책의 주제를 구체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분명한 사실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겠다 (99~105).

n  첫째, 관용은 로마가 세계적인 대국으로 발전하고 팍스로마나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땅에 뿌려진 궁극적인 붕괴의 씨앗이었다.

u  아케메네스 왕조 당시에는 대부분의 민족들이 페르시아에 동화되지 않았지만, 로마의 경우에는 엄청나게 많은 피정복민들이 로마에 동화되었다.

u  그뿐이 아니었다. 로마제국은 동쪽으로는 그리스인들, 북쪽으로는 야만인들 가운데 로마의 전통이나 문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가지각색의 전통과 문화를 가진데다 반항적이기까지 하던 여러 민족들을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u  동쪽과 북쪽의 민족들은 로마의 관용정책 덕분에 예전의 사회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자율성을 누리면서 상대적으로 로마에 동화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차츰 제국의 통치에 반발하여 독립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u  역사학자인 안토니 파그덴에 따르면, 제국이 성장하고 제국에 속하는 민족이 갈수록 다양해지면서, 제국 내의 심각한 이질성을 해결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u  4세기에 들어서자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쪽 지역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쪽 지역 사이의 불화는 갈수록 깊어졌고, 395년에 제국은 완전히 두 개로 갈라졌다. 제국에는 서서히, 그러나 확연하게 내부적인 공백이 생기기 시작했고,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피지배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한 때 충성하던 백성들이 독립 국가를 세울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n  그러나 지나친 다양성은 로마 쇠퇴의 부분적인 원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고약한 문제는 전성기가 지난 로마에서 종교적 박해와 인종적 불관용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불관용은 로마 쇠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제국의 분열을 재촉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u  기독교는 새롭게 시작된 불관용 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기독교는 처음에는 불관용 정책의 표적이었고 나중에는 불관용 정책의 주요한 원천이었다.

u  뜻밖에도 거대한 로마와 애송이에 불과한 기독교 교회 사이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교회였다.

u  기독교가 로마의 몰락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수백 년에 걸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기번은 기독교가 로마 몰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 아니 유일한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기번의 견해에 따르면 내세, 순종, 소심함이 로마인들이 전통적으로 지녀왔던 용감하고 호전적이며 세속적인 가치관을 치명적으로 더럽혔다는 것이다.

u  나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로마 몰락의 원인은 로마가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치명적인 불관용 정책을 펼침으로써 제국의 다양한 주민들을 성공적으로 통합시켜왔던 동화 및 통합 전략을 훼손시킨 데 있다.

u  당시는 우상숭배가 너무나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쉽게 금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u  처음으로 유럽에 국교가 세워진 것이다. 이로써 중세의 폐쇄적인 기독교 사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u  콘스탄티누스와 그 이후의 황제들은 종교적인 통합이 제국을 소생시키고, 급증하는 야만인의 공격에 맞서서 제국의 힘을 강화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n  엎친데 덮친 격으로, 서기 4세기 말부터 심각한 인종 갈등이 전염병처럼 로마를 휩쓸었다. 이 즈음 훈족을 피해서 수십만 명의 야만인들이 로마의 영토로 이주했는데, 이들 중 대다수가 게르만족이었다.

u  게르만 난민들이 로마제국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불안정했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무너지고 있는 제국의 국경선을 뚫고 다뉴브 강을 건너온 침입자들이라는 점에서 언제든 무서운 적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심하게 고갈된 로마 군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병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맹 세력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u  처음에 로마는 다양한 게르만 부족들에 대해서도 전통적으로 구사해온 관용과 동화 전략을 계속 사용할 것처럼 보였다.

u  그러나 게르만 난민들의 동화는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늘 분란이 일어났다.

u  결국 로마가 전통적으로 구사해왔던 관용 정책은 넘어설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u  4세기말 로마는 처음으로 피지배민족들에 대한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u  반목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로마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붕괴했다. 증오와 멸시에 시달리던 게르만 민족들은 한 때 함께 영광을 나눌 것으로 믿었던 사람들을 증오하며 보복을 자행했다.

?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그 자리에는 현재 유럽 국가들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호전적인 야만인 왕국들이 들어섰다 (105~106).

?  티노플을 수도로 삼았던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1,000 년 이상 존속했다. 그러나 이 비잔틴 제국은 비국교도를 가혹하게 박해하면서 교회 조직의 내분에 시달렸고, 페르시아와 슬라브, 그리고 후일에는 이슬람교도의 공격에 쉴 새 없이 시달렸으며, 고대 로마가 성취했던 위대한 업적을 따라잡지 못했다 (106).

?  다양한 인종, 다양한 종교, 다양한 배경을 가진 민족들을 끌어 모으고, 동화시키고, 보상하고,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때 로마는 번영했다.

?  로마의 붕괴는 로마가 도저히 동화시킬 수 없는 민족들, 혹은 로마가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문화와 습관을 가지고 있는 민족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동화시키는 데 실패하면서 시작되었다 (106).

1-3.     중국의 황금기 ?

?  서구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중국 왕조를 꼽는다면 백자와 청자로 유명한 명 왕조를 꼽아야 할 것이다 (110).

?  그러나 세계 전역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은 중국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나라를 꼽으라면 당 왕조를 꼽을 것이다. 당 왕조는 중국이 유례없는 번영을 이루며 정치적 패권을 휘둘렀던 시대이자 문학과 예술의 전성기로서 이후 왕조들이 도달하고자 했던보기였다 (110).

?  618년에 한족과 돌궐족의 피가 섞인 북부 벌족 출신의 이연이 수나라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후 군사를 이끌고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당 왕조를 열었다 (그가 바로 고조이다). 당 왕조는 그 후 300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게 된다 (114).

?  고조의 약삭빠른 외교술은 7세기에 중국이 맞았던 새로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115).

?  위협 속에서 통일된 중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만리장성 말고도 수많은 야만인 집단들과의 동맹이 필요했다 (115).

?  결국 중국 북부에서는 중국인들과 야만인들 사이의 구분이 흐려졌다 (116).

?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합쳐지면서 이방의 문화와 종교, 그리고 영향력에 대해 중국 역사상 가장 관용적인 왕조가 탄생했다 (116).

?  태종의 꿈은 중국의 황제이자 돌궐족의 칸으로서 중국인과 야만인을 동시에 다스리면서 중국인과 야만인이 동등한 자격을 가지는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118).

?  태종은 돌궐의 병력과 중국의 병력을 결합함으로써 중앙아시아 전역과 파미르고원 너머 현재의 아프카니스탄 지역에까지 당의 지배권을 확장했다 (119).

?  태종은 재위 초기부터 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제국이 긴 전쟁을 치른 뒤 국력을 회복하고 있을 때, 태종은 국고를 털어 실크로드를 재정비했다 (119).

?  당왕조는 300개가 넘는 나라 및 지역들과 공식적으로 교류했다. 외교와 통상은 깊이 맞물려서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120).

?  대외 교류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외래 문물이 널리 유행했다 (120).

?  그러나 외래 문물에 대한 애호와 외국인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은 별개의 것이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외래 문물을 좋아하면서도 외국인들을 늘 미워하고 의심했다 (121).

?  태종은 외국의 종교에 대해서도 대단히 개방적이었다. 645년경 중국의 유명한 불교 승려인 현장은 16년 동안 중앙 아시아와 인도를 순례한 뒤 650개가 넘는 인도의 불경과 150개의 불교 물품을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122).

?  태종의 치세는 중국 역사상 종교 다원주의가 매우 융성했던 시대로 손꼽힌다 (123).

?  명황은 태종과 더불어 당 왕조의 위대한 황제로 손꼽힌다 (127).

?  명화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군사적 정복 사업과 활발한 외교 정책을 병행했다 (127).

?  황도 장안은 방대한 당 제국의 중심이었다. 장안은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127~128).

?  장안은 다양한 분위기가 뒤섞인 화려한 도시일 뿐 아니라,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명황의 치세에 문학과 예술, 역사 이론과 미학 이론, 그리고 특히 시가 그 어느 때보다 융성했다 (128).

?  어느 역사학자의 말을 빌리면 장안은 대제국의 훌륭한 수도를 넘어서는 공간이었다. 장안은 다양한 인종이 모여있는 세계적인 도시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장안은 동아시아 전역으로 문명을 전파시키는 중추적인 도시였다 (128).

?  명황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에게 관대하고 문화적, 종교적 차이에 관대했다 (128).

?  당 왕조야말로 중국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가장 활발하고 가장 다양한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대였을 것이다 (131).

?  고대 로마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경우도 그랬지만, 관용은 당 제국의 엄청난 영토 확장과 영향력 강화에 필수적인 요소였던 동시에 제국 쇠퇴의 씨앗이었다 (135).

?  당이 채택했던 전략적인 관용 정책은 당이 중국인이 아닌 피지배민에게 한족의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당 제국은 그 덕분에 크게 뻗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당 제국이 야만인들과 중국인들을 한데 묶어줄 공통된 정치적, 언어적, 문화적 접착제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136).

?  안녹산의 난은 당의 쇠퇴를 알리는 전환점이었다 (138).

?  8세기 후반에 이르자 타민족과 외래 사조에 대한 당의 관용은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할, 불안정, 그리고 폭력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138~139).

?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당의 군사적 실패는 심화되었고 당의 국경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티베트의 병력이 중국 서쪽 지역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당은 많은 이익을 올려주던 실크로드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다 (139).

?  8세기 후반에 이르러 불관용이라는 병이 당에 침투하여 암처럼 퍼져나갔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가릴 것 없이 모든 중국인들이 모든 문제를 외국인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139).

?  결국 세계적인 제국을 세우려던 태종의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은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수백 년 묵은 야만인에 대한 경멸과 공포를 극복할 수 없었다. 중국은 로마와는 달리, 중국 민족과 비중국 민족에게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고, 똑같이 매력을 끌 수 있는 공민권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중국을 통합시켰던 지배적인 정치적, 사회적 정체성은 중국인 고유의 것으로 야만인들은 배제되어 있었다. 제국 안에서 균열이 나타나고 위구르족, 티베트족 등 비중국 민족이 점차 위협을 가하자, 중국인들의 타고난 불관용이 급격하게 끓어올랐다 (140).

?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다양한 인종을 감싸 안던 당의 세계주의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140).

?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국 고유의 가치와 고대 중국의 문화를 지키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141).

?  역사적으로 여러 번 되풀이되었던 일이지만, 중국은 스스로를 갉아먹을 만큼 폐쇄적인 태도를 취했고, 순수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외국의 요소들을 걷어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141).

?  9세기에 이르자 당의 불관용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141).

?  더욱 놀라운 사건은 열렬한 도교 신도였던 무종 치세에 시작된 종교 박해였다 (141).

?  중국화한 불교는 중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당조 말기에 불교계는 크게 타락했고, 조정은 재정적으로 쪼들리고 있는데도 절은 괘씸할 만큼 풍족했다 (141).

?  당의 권세와 패권은 9세기를 지나면서 크게 기울었다. 각 지역의 군 지도자들이 스스로 왕국을 세우자 중앙정부는 세입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렸다. 875년에서 884년 사이에 여러 차례의 반란이 일어나 제국을 뒤흔들었다. 당 왕조의 피비린내 나는 종말은 오랜 시간을 끌었다 (142).

?  당이 멸망한 뒤, 중국의 외국인 혐오증은 점점 심해졌다. 어마어마한 수의 중국인들이 야만인들의 위협이 심한 북쪽을 떠나 남쪽으로 이주해오면서, 남쪽은 거대한 중국 인구의 대다수가 거주하는 근거지가 된다. 그러나 바로 이 야만인들이 수백 년 후에 중국인들을 너그럽게 대우하고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강대국을 세웠으니 참으로 모순이라 할 만하다 (143).

1-4.     유럽을 삼킨 초원의 지배자 ? 몽골

?  신은 손가락을 저마다 다르게 만든 것처럼 사람도 다 다르게 만들었다 ? 몽케칸, 1250년경 (144).

?  그들은 (몽골인들은 바그다드, 베오그라, 부하라, 키예프, 모스크바, 다마스쿠스, 사마르칸트 등 당대의 거대한 도시들을 포함해서 당시 알려져 있던 세상의 반을 다스렸다 (145).

?  칭키즈칸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거나, 당대의 통치자들과 비교해보아도 대단히 관용적인 정책을 취했다 (146).

?  두 세대가 지난 후, 칭기즈칸의 손자인 몽케, 훌라구,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이 썼던 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몽골족이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고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잔혹함이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관용에 있었다 (147).

?  테무친은 승리를 거둘 때마다 늘 똑 같은 기본 전략을 사용했다. 그는 패배한 부족의 지도자와 대부분의 남자 귀족들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가 아니라 동등한 성원으로 자신의 수하에 편입시켰다 (150).

?  전통적으로 초원 지대의 지도자들은 늘 가까운 친척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테무친은 재능과 충성도를 기준으로 부관과 자문관을 선발했다 (151).

?  칭기즈칸은 싸움이 끊이지 않던 초원 지대의 수많은 부족들, 씨족들, 그리고 가문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민족을 만들었다 (155).

?  주목해야 할 점은 칭기즈칸이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정령신앙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절대적인 자유를 선포했다는 사실이다 (155).

?  1206년경 테무친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이 인물은 마흔네살에 모든 초원 지대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여전히 유목민들의 왕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앞에는 문명화된 세계에 도전장을 던지는 과업이 남아 있었다 (156).

?  칭기즈칸은 몽골족이 지니지 못한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열심히 끌어 모았다 (159).

?  칭기즈칸은 목표를 달성하자 병사들을 이끌고 몽골의 초원지대로 돌아갔다. 그는 위구르, 탕구트, 거란의 왕국들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속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고 계속 공물을 바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여진인들에게 대폭적인 자율권을 허용했다. 사실 몽골인들은 정복지의 토착 문화를 통제하는 데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럴만한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60).

?  칭기즈칸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으면서도, 여러 민족 출신의 학자들을 등용했다. 특히 여러 나라말에 능통했던 야율초재는 거란 왕족 출신으로 끝까지 칭기즈칸을 섬기며 충실하고 지혜로운 충언을 했다 (161).

?  칭기즈칸의 종교적인 관용 정책은 계속 유지되어 제국 건설의 강력한 수단으로 기능했다 (161).

?  (칭기즈칸)는 아들들에게 마음 속에 목표를 새겨두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생은 물론이고 자기 인생도 제대로 경영할 수 없다고 말했다 (167).

?  무시무시한 궁정의 음모를 뚫고 승리를 거둔 손자들은 모두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 툴루이의 혈통이었다. 이들 새로운 칸들은 몽골의 3차 원정군을 이끌고 지구를 휩쓸었다 (172).

?  가장 나이가 많은 몽케가 1251년 대 칸에 즉위했다. 그는 즉위 직후 동생 훌라구에게 중동 정벌의 지휘권을, 동생 쿠빌라이에게 중국 남부 정벌의 지휘권을 맡겼다 (172).

?  야만적인 몽골인들은 다른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점에서 몹시 세계주의적이었다 (177).

?  쿠빌라이는 황실 전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중국 남부를 정복하고 중화 왕국을 재통일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여러 면에서 볼 때 쿠빌라이의 송나라 정복은 군사적인 정복이라기보다는 중국인들의 마음을 정복한 것이었다 (180).

?  몽골제국은 분열되어 있지만 칭기즈칸의 자손들은 문명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다스렸다 (181).

?  쿠빌라이의 통치 원칙은 불관용이 아니라 세계주의였다 (183).

?  어찌 되었던 쿠빌라이의 이런 정책 덕분에 다양한 문화, 다양한 민족, 다양한 종교가 멋지게 통합되었다 (183).

?  어떤 사람들은 몽골이 세계를 지배했던 세기를 최초로 세계화가 고조된 시기로 본다. 몽골의 치세에 교역로와 얌이라는 역참 제도에 의하여 유럽과 극동 지역이 처음으로 연결되었다 (185).

?  웨더퍼드에 따르면 몽골인들은 비할 데 없는 문명의 전달자였다. 그들은 중국에는 교회를, 러시아에는 이슬람 학교를, 페르시아에는 불탑을 세웠다. 그들은 피지배민들에게 억지로 떠안길 만한 고유의 제도가 없었으므로, 각지의 제도들을 거리낌없이 채용하고 결합했다 (186).

?  (쿠빌라이)는 피지배민족들의 지식과 재능, 그리고 문화적 업적을 거리낌없이 칭찬하고 현명하게 이용했다. 그는 모든 종교 교의들이 융성할 수 있게 했고, 중국 문명을 보석으로 대접했을 뿐 아니라, 중국 문명에 인도와 이슬람 지역에서 비롯한 지식과 기술을 주입하기까지 했다 (186~187).

?  쿠빌라이의 할아버지는 마음 속으로는 늘 초원의 유목민이었지만, 쿠빌라이는 단일한 세계를 추구하며 세계화를 추진했다 (187).

?  그는 국제무역, 종교적인 공존, 자유로운 왕래, 그리고 문화교류를 환영했다 (187).

?  모든 제국이 다 그렇듯이, 대몽골제국의 몰락은 지도층의 무능함과 부패, 반란, 퇴폐, 파벌 싸움, 암살, 외국의 공격, 그리고 불운을 비롯한 여러 요인에 의해서 촉진되었다 (187).

?  그러나 제국이 쇠퇴하면서 몽골이 지배하던 지역 어디에서나 일관된 특징이 드러났다. 그것은 바로 공식적으로는 물론 몽골의 평범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불관용, 특히 종교적 불관용이 전면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188).

?  몽골 초원에서 다툼을 벌이던 부족들은 칭기즈칸의 비상한 재주덕분에 단일한 민족으로 통합되었다 (190).

?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인들은 그렇지 못했지만, 칭기즈칸은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 (대몽골 민족 혹은 펠트 천막에 사는 민족)을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정체성은 초원의 유목 민족들만을 포용할 뿐 비몽골 민족들과 국가들을 포용할 수는 없었다. 몽골의 정복자들을 야만인 가운데에서도 가장 거친 자들로 여겼던 비몽골 민족들 역시 그런 정체성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0~191).

?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페르시아, 중국, 인도, 러시아, 동유럽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을 합병해가고 있을 때, 그 지역에 거주하던 민족들은 결코 스스로를 몽골인이나 펠트 천막에 사는 민족 혹은 대몽골 제국의 자랑스러운 피지배인이라고 여긴 적이 없었다. 반대로 뜻밖의 일이 전개되었다 (191).

?  몽골의 통치자들은 광대한 제국에 몽골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대신 문명화된 피지배민들의 문화를 점점 대폭적으로 받아들였다 (191).

?  날이 갈수록 뿔뿔이 갈라지는 이들 왕국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접착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제국은 단기간에 네 개의 커다란 덩어리로 갈라졌고, 각 덩어리는 갈수록 편협해지고 종교적 광신에 사로잡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몽골제국은 붕괴되고 말았다 (191).

 

2. 계몽화된 관용

2-5.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 ? 스페인

?  물론 스페인의 관용을 21세기의 관용이 뜻하는 이질성에 대한 존중으로 과대평가하거나 혼동해서는 안 된다 (196).

?  그러나 다시 한 번 짚어두지만, 중요한 것은 상대적인 관용이었다. 끔찍한 폭력 사태가 벌어지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14세기와 15세기의 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스페인은 서유럽의 비기독교들이 거주하면서 번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었고, 때로는 유일한 곳이었다 (197).

?  스페인의 유대 교도들은 대단히 광범위한 영역에서 경제활동에 참여했다 (198).

?  상대적인 관용 덕분에 스페인이 거둔 수확은 영토 팽창과 제국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페인은 비기독교도 주민들 덕분에 문화적, 지적인 영역에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노동력과 돈이라는 중요한 이득도 손에 넣었다 (199).

?  스페인 왕들은 이슬람 교도들이 장악하고 있던 영토를 탈환한 직후에는 페르시아 제국과 로마제국이 추구했던 것과 똑 같은 전략을 따라갔다. 즉 그들은 이들 공동체들이 고유의 관습을 유지하고 고유의 종교를 신봉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스페인의 인구는 크게 늘어났다 (199).

?  중세의 스페인은 마지못한 것이기는 했지만 유대 교도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덕분에 엄청난 재정적 수익을 거두었다 (199).

?  1478년 교황의 교서에 따라 스페인에 이단 심문소가 설치되면서 상대적인 관용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200).

?  스페인 왕실은 공식적으로 불관용 정책으로 선회했는데 이것은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성장할 꿈을 품고 있던 제국으로서는 대단히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201).

?  콘베르소스들과 유대교도들의 대거 탈출은 스페인의 막대한 재정적 공백을 초래했다 (201).

?  유대교도들과 콘베르소스들이 금융을 주도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유리했다. 유대 교도들은 강력한 스페인을 유지하는 데 깊은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스페인의 신변 보호를 받아야 할 처지였다.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어진 이런 공생 관계는 스페인 왕들에게 이로운 것이었다. 1400년대가 끝날 무렵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통치 아래 통일된 스페인 왕국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나라였고,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202).

?  그러나 스페인은 유대교도들과 콘베르소스들을 공격함으로써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그리고 혐오하던 제노바 사람들을 비롯한 외국의 금융업자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자가 치솟았다 (202).

?  몇 십년 사이에, 제노바의 금융업자들은 스페인 함대에 대한 물품 공급권을 장악했고, 외국의 금융업자들이 왕국의 재정을 관리했다. 공격적으로 제국주의적 팽창을 하고 있던 스페인으로서는 외국 금융업자에게 의존하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었다 (202).

?  1557년과 1575년에 스페인 왕실은 파산하고 말았다. 스페인 왕실은 유대교도 금융업자들이 얼마나 쓸모가 있었던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203).

?  1590년에 활동을 멈추었던 이단 심문소는 다시 활동을 개시했다 (203).

?  불관용의 강도에는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지만, 스페인은 17세기 내내 광신적이며 자멸적인 불관용 정책을 지속했다 (204).

?  16세기에 스페인이 쇠퇴한 이유는 역사학자들이 자주 거론하는 화젯거리이다. 기술적 후진성, 견고한 봉건적 전통, 엄청난 외채, 중요한 산업 부문의 결여, 인구 감소, 국가 기구의 허약성 그리고 만성적인 예산 위기 등이 스페인의 쇠퇴를 야기한 이유로 가장 자주 인용된다. 사실 이런 요인들 가운데 대다수는 스페인 왕실이 1480년대부터 종교적인 숙청과 화형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에서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비롯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5).

?  이단 심문소, 추방, 순수한 혈통을 옹호하는 법령 등이 빚어낸 불관용은 스페인에 파멸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 (205).

?  이단 심문소의 무수한 재판과 고문은 엄청난 비용을 소모했지만 증오와 편집증만 빚어냈을 뿐 지식이나 부는 일체 창출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격렬한 광신주의가 고개를 들 때마다 스페인은 인적 자본, 금융 자본, 그리고 사회자본이라는 가장 귀중한 자원들을 파괴하거나 몰아냈다 (205). 

?  어찌 되었든, 1640년 스페인은 유럽의 강국이라는 자격을 박탈당하고 붕괴 위기에 놓였다. 그 뒤 스페인은 계속 쇠퇴하여 세계무대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말았다 (206).

2-6. 자본주의 경제를 제패한 최초의 제국 ? 네덜란드

?  네덜란드 사람들이 한때 영국보다 앞서 세계를 주름잡던 해상 무역 제국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09).

?  1625년경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패권을 장악한 강국,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재패했던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218).

?  작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쫓겨난 진취적인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덕분에 17세기에 이르러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 되었다 (218).

?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엄청난 경제 성장에 있었다. 여기에다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의 특별한 종교적 관용 정책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219).

?  네덜란드 사람들의 관용에는 예리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공화국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던 정치인들 가운데 대다수는 경제적인 이익을 기대하여 공개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옹호했다 (221).

?  유대교도들은 네덜란드의 경제 번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사실 다른 집단과 비교하면 머릿수도 극히 적은데다 기여한 바도 미미했다. 16세기 말 막스 베버가 말했던 자본주의 정신을 네덜란드에 들여오는 데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대거 유입된 개신교 상인들과 숙련 노동자들, 그리고 생산업자들이었다 (225).

?  얼마 안 있어 네덜란드는 한자동맹 (유럽 북부의 상인동맹)과 영국인들, 그리고 초기에는 베네치아인들이 주도했던 유럽의 사치품 무역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226~227).

?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투자 자본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의 유력한 상인들은 자신들의 부에 위협을 느끼자, 아예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제쳐놓고 동인도제도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직접 자신들의 선박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연합 동인도회사와 후일의 서인도회사였다. 이 두 회사가 세워지면서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은 세계적인 식민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227).

?  네덜란드의 제국주의에 연료를 공급한 것은 칼뱅주의가 아니라 이윤추구였다 (229).

?  1600년대 초에는 네덜란드의 상업주의와 식민주의가 폭발적으로 팽창하여 전 세계를 휩쓸었다 (230).

?  17세기에 황금기를 맞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유럽 전역에 기회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알려져 있었다 (234).

?  황금기의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17세기의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은 비할 데 없는 문화적, 예술적, 지적 독창성을 분출했다 (239).

?  주목해야 할 사실은, 중세 초기의 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끼고 있던 네덜란드는 영토의 팽창이 아니라 상업의 팽창을 꿈꾸었다는 점이다 (241).

?  17세기에 해군력은 세계 제패를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이었고,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바다를 장악했다 (241).

?  200년 후에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네덜란드는 관용 정책을 통해 유럽에서 박해를 받아 추방된, 재능 있는 사람들을 유인했다. 이런 관용 정책은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활동적인 집단 가운데 일부 (그리고 귀중한 무역 네트워크, 최첨단의 산업 기술, 엄청난 양의 자본)를 좁은 네덜란드로 끌어들여,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어내고, 부의 측면에서 대륙의 경쟁자들을 크게 앞지르게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이 부를 이용해서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242).

?  세계 지배와 관련된 새로운 현대적 전략은 군사력에 의한 영토 정복이 아니라 군사력을 토대로 한 자본주의였다 (243).

?  네덜란드는 전함을 동원하여 교역로에 독점권을 행사하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던 이 회사들을 보호했다 (243).

?  네덜란드의 관용정책은 사실상 국내 정책이었다. 네덜란드가 국경 내에서 펼쳤던 주목할 만한 종교적 관용 정책은 해외 식민지에서의 인종적 혹은 민족적 관용으로 변형되지 못했다 (245).

?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나 실론 사람들을 위대한 네덜란드 제국의 충실한 백성으로 변화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애초에 그런 제국을 만들겠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 일에 성공한 것은 바로 영국이었다 (245).

2-7. 불관용의 덫 ? 오스만, , 무굴

?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통의 굴레에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주장이나 이유를 따져보지도 않고, 자신의 아버지와 선조들, 친척들과 친지들을 따라가고, 자신이 타고난, 또는 교육받은 종교를 따릅니다. 이것은 인간 지성의 가장 숭고한 목적인 진리 탐구로부터 스스로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악바르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보낸 편지, 1582년 중에서 (246).

?  오스만 제국

n  위대한 이슬람 제국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나라가 바로 오스만 제국이었다 (248).

n  오스만 튀르크족에 의해서 세워진 오스만 제국은 대략 1300년경부터 제 1차 세계대전 때까지 지속되었다 (248).

n  오스만 제국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종교적 관용이었다 (248).

n  오스만 제국의 패권과 영화는 1520년부터 1566년까지 통치했던 술래이만의 치세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 시기는 오스만 역사에서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249).

n  오스만 사람들은 전략적인 관용 정책 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u  첫째, 그들은 전략적 관용 덕분에 트란실바니아에서 예멘과 이란 고원에 이르는 피정복미니족들로부터 협조 아니면 하다못해 묵인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255).

u  피부색을 따지지 않고 개종자들을 포용하는 오스만 제국의 관용 정책 덕분에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협조적인 피지배민들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농사를 짓거나 군대에서 복무할 인구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재능 있는 개인들로 구성된 핵심 세력이 형성되었다 (255).

n  1500년대 후반 이후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킨 요소들은 여러 가지였지만, 그 중 술래이만의 눈부신 관용 정책을 유지하지 못한 후계자들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57).

n  가장 주목해야 할 사실은, 술래이만이 죽은 후 오스만 제국은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종교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7세기부터 현재까지 광신적인 유혈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257).

n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황금기에 오스만 제국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이민족들과 비이슬람교도들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 역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258).

n  내란의 확산과 민족주의의 고조가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스만 제국의 최후에는 험악한 불관용적 형태가 발작적으로 벌어졌다. 오스만 제국은 1922년 완전히 붕괴하기 직전까지 격심한 인종적, 종교적 편협성, 분파주의, 폭력에 시달렸다 (259).

?  월등한 기술을 보유한 명 왕조

n  당시 (15세기 초반) 명 왕조는 유럽의 그 어느 나라보다 세계를 제패하는 데 유리한 상황이었다 (260).

n  그러나 명 왕조는 세계 제패의 꿈을 품지 않았다. 1424년 이후 명의 황제들은 해군을 해체하고 외국과의 무역과 외국의 사상을 거부하면서 병적이라고 할 만큼 폐쇄적인 태도를 취했다. 중국은 1600년 무렵에는 기술적, 군사적, 상업적으로 유럽에 크게 뒤쳐지게 되었다 (261).

n  명이 쇄국으로 돌아서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락제가 죽은 뒤, 몽골이 다시 군대를 모아 중국을 침입한 데 있었다 (264).

n  그 후 명의 황제들은 갈수록 외국에 대한 혐오가 깊어졌고, 유일한 문명사회인 중국은 내놓을 만한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위험한 야만족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낡은 생각이 부활했다 (265).

n  15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경쟁을 피했던 명 왕조는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265).

?  인도의 막강한 제국, 무굴

n  영국에 앞서 인도를 통치하던 무굴제국은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이다 (266).

n  무굴제국의 황제들은 같은 시기에 통치했던 오스만 제국의 술판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였다 (266).

n  무굴제국의 황금기를 이끌던 악바르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이 근대 이전의 역사에서 종교적으로나 인종적으로 관용 정책을 펼쳤던 통치자로 손꼽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관용 정책으로 선회하지 않았다면, 무굴제국은 그처럼 오랫동안 지속될 수도 없었고 눈부신 문화 발전을 이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무굴제국이 쇠퇴했던 시기에는 인도 역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잔혹한 인종적, 종교적 박해가 만연했다 (268).

n  악바르가 선택한 해결책은 한편으로는 외교정책을 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문화의 결합 정책을 쓰는 것이었다 (268).

n  아우랑제브의 불관용은 제국에 재앙을 몰고 왔다. 결정적인 사건은 힌두교도들에 대한 박해로 상업이 위축된 것이었다 (275).

n  게다가 아우랑제브의 이슬람교에 대한 광신은 무굴제국의 허약한 종교적, 정치적 통일성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275).

n  인도는 아우랑제브가 뿌려놓은 증오심과 갈등 때문에 영국의 분열정복 전략의 희생양이 되었고, 아대륙을 차지했던 이슬람교 제국의 위치에서 유럽 제국의 왕관에 박힌 한 알의 보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독실한 아우랑제브는 아마 자신이 무엇을 유산으로 남겼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임종에 즈음하여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홀로 왔다가 이제 이방인으로 떠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끔찍한 죄를 저질러온 내게 어떤 징벌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렵다 (277).

2-8. 세계 최대의 해상 국가 ? 영국

?  불관용은 자신의 대의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 1921 (278).

?  16세기와 17세기 대부분의 시기 동안 영국은 맹렬한 종교 간, 민족 간 전쟁이 벌어지던 각축장이었다 (279).

?  빌렘과 메리가 즉위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1689년 영국 의회는 권리장전관용법 Act of Toleration을 통과시켰다. 이 혁명적인 법령들은 커다란 한계 (관용법은 비국교도들 가운데 개신교도들만 보호하고 가톨릭 교도들은 보호하지 않았다)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불관용과 박대는 계속되었지만, 영국은 그 후 200년이 넘도록 지구상에서 가장 관대한 나라라는 명성을 날리게 된다 (280).

?  그러나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은 영국은 극심한 자기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영국이 국내적으로 다원주의와 관용이라는 가치를 훌륭하게 포용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인도, 로디지아, 자메이카를 비롯한 모든 해외 지배령에서는 영국인 총독이 서양의 폭군으로서 통치권을 휘둘렀다 (280).

?  영국의 역사는 중요한 의문을 제기한다. 세계의 패권 국가가 현대의 계몽주의적인 의미에서 참된 관용을 베푸는 것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오늘의 세계적인 초강대국, 그것도 과거에 몸소 식민지의 처지를 경험했던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합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일이다 (281).

?  1815년 이후, 암스테르담은 부수적인 역할에 머물렀고, 세계적인 금융 시스템은 런던에서 형성되었다 (285).

?  1688년 이후 영국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대교도들에게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286).

?  위그노교도들은 영국에서 번영하면서 차츰 영국 사회에 동화, 흡수되었다 (287).

?  유대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위그노 교도들이 영국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은 금융과 관련된 것이었다 (288).

?  이들의 (유대교와 위그노 교도들) 공헌을 무색하게 할 만한 또 다른 소수집단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영국에 엄청난 경제적, 지적 활력을 공급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었다 (288).

?  1707년 기가 꺽이고 기근에 시달리던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의 합병 조약에 서명하면서 대영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291).

?  합병에 격렬히 반대했던 수많은 스코틀랜드인들에게 합병 조약은 완전한 굴복이자 악마의 협상이었으며, 고국의 소멸이었다 (291).

?  합병조약 이후 영국인들은 스코틀랜드인들을  안아 일으킬 것인지, 아니면 찍어 누를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을 통합시켜 충성심을 이끌어낼 것인지, 아니면 북부의 많은 사람들이 겁내는 것처럼 그들을 억압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영국인들은 전자를 선택했고, 그 덕분에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292).

?  스코틀랜드인들은 대영제국에 인력을 공급했을 뿐 아니라, 18세기와 19세기 영국의 주도적인 사상가, 저술가, 발명가로도 활동했다 (294).

?  주목해야 할 사실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추진한 원동력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295).

?  20세기가 시작될 즈음 대영제국은 3,100만 평방킬로미터가 넘는, 전 세계 지표면의 25퍼센트라는 어마어마한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영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던 대양까지 합치면, 그 면적은 지구의 70퍼센트에 육박했다.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영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경쟁 상대가 없는 해군력과 상업력, 그리고 금융력에 있었다 (295~296).

?  1689년 이후 관용은 영국이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성장하는 데 얼마나 도움을 주었을까? 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특별히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인구 구성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영국에서 손꼽히는 금융가, 상인, 거부, 장군, 총독 가운데 대다수가 잉글랜드인이었다는 점이다 (296).

?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도들과 위그노교도들, 그리고 스코틀랜드인들의 공헌은 압도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중추적인 수준이었다 (296).

?  잉글랜드 은행을 입안한 것은 스코틀랜드인이었고, 그 은행의 창립 자금을 댄 것은 위그노교도들이었으며, 그 은행의 대부금을 중개한 것은 유대교도들이었다 (297).

?  19세기 대영제국의 관용은 단순한 전략적인 계산을 넘어선 것이었다. 영국은 매우 놀라운 수준으로 계몽주의적인 관용의 개념을 채택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298).

?  뿐만 아니라, 브리튼Britain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민족적, 인종적 경계를 뛰어넘는 개념이 되었다 (298).

?  한편 영국은 1830년대에 대단한 수익을 남기던 노예무역을 폐지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299).

?  이처럼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침으로써 영국은 주요 경쟁국인 프랑스뿐 아니라, 과거 식민지였던 미국에 대해서까지 도덕적인 우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 (299).

?  영국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적인 종교적 특성은 불관용의 씨앗을 키웠고, 영국은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300).

?  아일랜드 사람들은 대영제국에서 스코틀랜드나 웨일스 사람들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300).

?  영국 역사에서 가톨릭 교도와 개신교도는 오랫동안 심각하게 반목해왔다 (300).

?  1920년대 영국은 아일랜드 자유국의 창설에 동의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북부는 여전히 연합왕국의 일부이다). 1949년 이 나라는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304).

?  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아일랜드의 상실은 당황스러운 정치적 사건이었다 (304).

?  아일랜드에 대한 태도는 비극적일 정도로 융통성이 없었다. 한 마디로 영국이 아일랜드를 상실한 것은 관용 정책의 실패 때문이었다 (305).

?  주목할만한 사실은 유색인들이 거주하는 영국의 식민지에서도 똑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305).

?  가톨릭교에 대한 적대적인 편견이 아일랜드에서 영국의 관용에 한계를 지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적, 인종적 오만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영토에서 영국의 관용에 한계를 지웠다.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이 제국의 보석인 인도였다 (305).

?  영국인들은 인도뿐만 아니라 유색인들이 사는 모든 영토에서 스스로 공언했던 계몽적인 관용에 따라 행동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영국인들은 전략적 관용의 측면에서는 능란한 솜씨를 발휘하여, 다양한 인종적, 종교적 배경을 가진 개인들을 채용하고, 보상하고, 이용했다 (306).

?  역사학자인 T.A.히스코트의 말에 따르면, 동인도회사는 무굴 사람들을 계승하여 두 번째 인도 제국이 되었다 (307).

?  초정통파인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와는 달리 동인도회사는 인도의 옛 법률, 관습, 종교에 간섭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웰링턴의 원칙에 따라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307).

?  이와 같은 계산된 관용의 원칙이 인도 내 동인도회사의 상업적, 정치적 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307).

?  1870년대 당시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빠져나오는 대신, 제국주의를 채택하기로 했다. 동인도 회사는 폐지되었고, 인도는 영국 국왕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312).

?  그렇지만 대체 어떤 제국을 만들자는 말인가? 영국의 두 개 주요 정당은 각기 다른 의견을 내놓았고, 그나마도 양쪽 모두 모순투성이였다 (312~313).

?  폭동이 끝난 직후에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의견이 딱 한 번 일치한 적이 있었다. 영국의 가장 큰 실수는 종교에 간섭한 것사람들의 습관과 희망에 어울리지 않는 제도를 도입한 것이었다 (314).

?  이들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인재들은 후일 인도의 새로운 민족주의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대영제국에 매우 헌신적이었다 (316).

?  인도를 통치했던 90년 동안 (1857~1947) 영국의 식민지 정책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끊임없이 흔들렸다 (317).

?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도 인도의 지도자들 가운데에는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 (319).

?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인도가 받은 보상은 자치권이 아니라 가혹한 탄압과 지독한 억압이었다 (320).

?  1920년 간디는 영국  정부에 대해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펼치자는 혁명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321).

?  1946년 인도의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시크교도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인도는 영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1947년 영국 정부는 인도 아대륙의 분할을 공표했다. 이렇게 해서 인도와 파키스탄, 두 개의 독립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 후 수십년에 걸쳐서 영국의 기업, 자본, 인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323).

?  1931년 영국이 인도와 대등한 파트너 관계를 맺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사실 영국은 과거 식민지였던 백인 거주 지역들과 대등한 파트너 관계를 맺었고,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아일랜드, 오스트레일리아가 하나같이 어느 누구도 종속되지 않는 대등한 자격으로 인정받는 영국 연방을 형성했다 (327).

?  영국은 세계를 제패하는 제국으로부터 평범한 국가로 전락했고, 과거 유색인 식민지 주민들은 제 3 세계로 전락했다. 그 사이에 한편에서는 또 하나의 나라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 나라는 이민자들의 나라로서 처음부터 종교적 관용의 원칙에서 건설되었고, 필요에 의해서 다원주의가 인정되었던 곳이다 (327).

3. 세계 제패의 미래

3-9. 최첨단 과학 기술의 개척자 ? 미국

?  대영제국은 황금기에 지구 표면적의 4분의 1, 세계 인구의 약 4분의 1을 통치했다. 하지만 영토로 따지면,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통치했던 영토가 훨씬 넓다. 지금 미국이 다스리는 땅은 지구 표면적의 6.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은 초강대국이다 (331).

?  미국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남다른 성공을 거둔 까닭은 무엇일까? (331).

?  과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이 그랬듯이 미국이 강한 국력을 유지하고 있는 참된 비결은 인적 자원에 있다 (331).

?  상대적인 관용 정책이 세계 제패의 열쇠라고 가정한다면, 미국은 늘 유럽 국가들에 비해 대단히 유리한 지점에 서 있었다. 미국은 이민자들에게 매력적인 나라일 뿐 아니라, 이민자들의 나라이다 (332).

?  미국은 온갖 종교에 대해서 동시대의 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332).

?  그러나 미국은 대체로 개방적인 이민 정책을 펼치면서도,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 동안 특정한 인종 혹은 민족 집단에 대해서 극단적인 불관용의 태도를 보였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인디언, 흑인, 그 밖의 각종 유색인에 대한 불관용이다 (332).

?  미국이 인종적 차원과 민족적 차원에서 역사상 손꼽히는 관용적인 사회가 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333).

?  미국의 지위가 이렇게 상승하게 된 것은 미국이 끊임없이 다양한 집단들의 활력과 재능을 유인하고, 보상하고, 흡입해왔기 때문이다 (333).

?  상업은 종교적 관용을 촉진하는 강력한 기폭제였다. 유력한 상인들을 배척하는 풍조는 사업에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 종교의 자유를 옹호했다 (335).

?  미국 독립전쟁의 주역들은 하나같이 계몽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338).

?  미국인들은 영국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교를 가진 병사들을 모을 수 밖에 없었다 (338).

?  건국의 아버지들이 1789년에 채택한 헌법은 대단히 급진적이었다. 열세 명의 이주민 대표들은 영국의 관용법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헌법을 종교적인 문서로 만들지 않고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삼지 않으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338).

?  한마디로 미국은 애초부터 종교적 관용이라는 계몽주의적 원칙 위에 건설되었다. 종교적 관용은 미국 사람들이 네덜란드와 영국에게서 물려받은 후 계속 확장시키고 확대시켜온 정책이었다. 18세기 말 종교적인 관용의 측면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340).

?  그러나 종교적 관용을 인종적 관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340).

?  계몽된 미국 헌법 아래에서도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과 노예들에게는 애초부터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341).

?  독립을 달성한 미국에는 노동력이 부족했고,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최신 기술을 소유한 숙련된 노동자들과 기술공들은 더구나 부족했다 (343).

?  미국인들은 기술적인 전문성을 가진 유럽인들을 끌어오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썼다 (343).

?  이주민 대부분이 유럽의 공장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습득한 경험과 기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19세기의 미국 산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346).

?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만든 주요한 요인은 상대적인 개방성과 다원주의였다 (347).

?  19세기 (그리고 20세기 대부분의 기간)에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종교적 반감, 문화적 배타주의, 사회적 경직성, 언어의 차이를 비롯한 여러 장벽들 때문에 가난하지만 진취적인 유럽인들은 조국을 떠나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이와는 달리 미국은 종교적 다원주의, 사회적 유동성, 언어적 다원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인들의 온갖 경험에서 비롯한 재능과 진취적인 동기에 대해 대단히 개방적이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에서는 기회가 하늘 끝까지 열려 있었다 (347).

?  이주민의 꾸준한 유입이 없었다면, 미국은 19세기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농업 및 산업 국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349).

?  미국 서부 개척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핍박의 역사이기도 하다 (352).

?  바로 이것이 선택적인 전략적 관용의 냉혹한 본성이다. 미국은 유럽 출신의 다양한 대중들은 환영했지만, 아메리카의 토착 원주민들은 학살하고, 차단하고, 내쫓았다 (353).

?  전략적인 관용의 혜택에서 배제당한 사람들은 원주민들만이 아니었다. 여성들은 투표를 할 수 없었고,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물론 당시 여성들은 어느 곳에서든 배척받고 있었으니, 미국이 특별히 비난받을 상황은 아니었다 353).

?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미국 사회는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나라로서 세 가지 중요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353).

n  첫째, 미국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매우 자유분방하여 이주민들은 원하는 종교를 믿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종교의 불씨를 피워낼 수도 있었다.

n  둘째, 민주적인 정부 제도는 부패하기는 했어도 (그리고 부패했기 때문에) 새로운 이주민들의 손에 현실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쥐어주었다.

n  셋째, 활발한 자유 시장은 노동력을 흡수하고 기술에 보상을 해주었으며 기업심이 왕성한 사람들에게 예상 밖의 기회를 제공했다.

n  19세기의 다른 나라들은 이 세가지 장점들 가운데 일부 혹은 극히 일부만을 지니고 있었고, 이 세 가지 장점을 미국과 똑 같은 수준으로 제공할 수 없었다.

?  이렇게 해서 미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이민지가 되었다. 1871년부터 1911년까지 미국에는 2,000만 명의 이주민이 정착했다 (353).

?  미국은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영토확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를 앞둔 시점에도 여전히 지역의 강국에 지나지 않았다 (354).

?  그러나 수십 년 만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1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세계의 강국으로서 첫 번째 경험을 했다 (354).

?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많은 미국인들이 보였던 최초의 반응은 미국에 전쟁의 손길이나 외국인의 손길이 닿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355).

?  1차 세계대전이 유럽의 막강한 강국들을 크게 쇠퇴시켰다고 한다면, 2차 세계대전은 그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안겼다. 1945년에 등장한 세계는 더 이상 유럽 중심의 세계가 아니었다. 시체와 파편이 치워진 후 뿔뿔이 흩어진 유럽의 국가들은 미국의 무력과 부에 의존하게 되었고, 미국은 세계의 초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356~357).

?  전쟁은 여러 면에서 미국의 유례없는 경제 발전에 엄청난 연료를 공급했다. 대공황에서 벗어난 미국 산업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급격히 성장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팽창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은 세계 최대의 상품 수출국이 되었고, 세계의 총제조업 생산고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게 되었다 (357).

?  이와 동시에 미국은 서양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게 되었다 (357).

?  관용은 여러 측면에서 미국이 초강국으로서의 지위를 갖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0년 이전의 개방적인 이민정책 덕분에 미국은 인력 면에서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357).

?  1930년대의 유럽은 나치의 불관용 정책 때문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과학 인재들을 잃어버렸다 (358).

?  유대인 과학자들이 돌연히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미국은 순수 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358).

?  그러나 몇 년 후 미국은 세계 유일의 원자력 국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유럽의 동쪽에서 또 다른 거인, 소비에트 연방이 일어났다. 소련은 미국과 경쟁하면서 이후 수십 년 동안 유력한 지정학적 실체가 된다 (359).

?  1980년대 미국은 기존의 생산력에 유럽 최대의 경제 강국인 서독의 전체 생산력을 앞지르는 생산력을 추가했다 (365).

?  1990년과 1991년에 비교적 가벼운 침체기를 겪은 미국 경제는 다시 급등세로 돌아서서, 마이크로프로세서 혁명을 통해 엄청난 소득을 올렸고, 세계 역사상 최대의 부를 창조하는 시기에 이르렀다 (366).

?  21세기가 시작되자,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현재 가치로 따져서 세계 총생산고의 3분의 1, 일본과 중국 경제를 합친 규모의 두 배, 제국주의 전성기 당시 영국이 세계 총생산고에서 차지했던 비율의 세 배를 넘어섰다 (366).

?  미국은 세계화를 통해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나라이다. 이민자 출신으로, 미국에서 맨손으로 시작하여 수십억 달러의 재산을 모은 조지 소로스의 말을 빌리면, 세계화란 곧 잉여자본이 주변 국가에서 중심 국가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중심은 바로 미국이다 (366).

?  1990년대에 월마트, 나이키, 맥도널드, 엑슨모빌, 코카콜라, 디즈니 등의 미국 기업들은 반미 정서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세계 경제를 지배했다. 달러는 세계의 지배적인 화폐였고, 영어는 지배적인 언어였으며, 미국의 문화는 가장 많이 모방되는 문화였다 (366).

?  미국이 세계적인 패권국으로 상승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이 소련의 붕괴였다. 소련이 자멸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양극화된 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다 (366).

?  미국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누렸던 경제 호황에 직접 연료를 공급한 것은 바로 두 가지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하나는 마이크로칩의 발견이라는 기술 분야의 혁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벤처 자본주의라는 금융 분야의 혁명이었다. 전자는 컴퓨터 시대를 낳았고, 후자는 실리콘벨리를 낳았으며, 이 둘은 다시 새로운 정보 기술이 눈부신 속도로 활용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다 (367).

?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미국의 벤처 자본주의가 이런 비상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배경을 가졌든, 가난하든 부자든, 백인이든 소수 집단이든, 본토박이든 이민자이든 가리지 않고, 젊은 과학자들과 발명가들, 그리고 기업가들에게 품은 뜻을 펼칠 수 있도록 엄청난 유인을 제공했던 관용 정책 덕분이다 (369~370).

?  미국의 기술적, 경제적 패권은 군사적 우위로 직접 연결되고 있다 (373).

?  다시 말해서 미국이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부상한 데에는 첨단 기술 경쟁에서의 승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01 9 11일 과학 기술은 미국에게 등을 돌렸다 (374).

3-10. 주축국의 야욕 ? 독일, 일본

?  20세기 중반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 대단히 편협했던 이 두 정권은 엄청난 권력을 손에 넣고 세계를 집어 삼키려고 했다 (376).

?  독일: 아리아인의 세계 제패의 꿈

n  1940 6 21일 오후 3 15,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최고 사령관들은 프랑스의 항복을 받기 위해서 파리에서 북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콩피에뉴 숲에 도착했다 (376~377).

n  콩피에뉴에서 이처럼 프랑스와 독일의 운명이 뒤바뀌었던 때는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전성기였다 (377).

n  그러나 5년 후에 나치 독일은 무너졌다. 히틀러는 죽고 독일은 폐허가 되었다 (378).

n  잔혹한 불관용은 나치 지배의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나치가 제 1차 세계대전 직후의 곤경 속에서 국민들의 힘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378).

n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378).

n  치욕과 고통, 억제된 분노가 한데 섞인 도가니에서 출현한 것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였다 (379).

n  나치는 수백만 명의 피정복민과 수십만 명의 독일 국민을 살해함으로써 수많은 인력을 놓쳐버렸다 (382).

n  칭기즈칸은 피정복민 가운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받아들이려고 애썻지만, 히틀러는 그런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383).

n  역사학자 클라우스 피셔는 나치가 처했던 진퇴양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아무리 많은 기술과 재주가 동원된다고 해도 피정복민을 무자비하게 예속시키고 인종적으로 열등한 종족을 물리적으로 근절하고자 했던 히틀러의 만행은 세계를 일깨워 확고한 반대의 입장에 서게 했다 (386).

?  일본: 가장 덕이 높은 자의 정복

n  세계 제패를 꿈꾸었던 추축국은 독일만이 아니었다. 1940 8 1일 일본 외무성 대신 마쓰오카 요스케가 일본의 영토 확장 계획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386).

n  1945년 이 거창한 계획은 일본이라는 나라와 함께 시커먼 연기를 뿜는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불관용은 일본이 세계 제패라는 꿈을 키울 수 있었던 토대인 동시에, 제국주의 일본의 파멸을 불러온 촉매제였다 (387).

n  20세기 초반 일본의 저술가들은 서구의 인종 이론과 유가 철학, 그리고 도덕적, 영적 순수성이라는 신도의 개념을 결합하여 일본인 특유의 독특한 세계관을 만들었다 (387).

n  일본의 억지스러운 신화는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선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가장 순수하고 피부가 하얀 민족으로 묘사했다 (388).

n  일본은 중국인 및 한국인과 관련해서는 더 복잡한 이론을 만들어 내야 했다. 중국인과 한국인 가운데에는 일본인과 거의 구별이 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고, 세 나라는 문화적인 전통에서도 공통점이 많았다 (389).

n  일본이 가장 큰 전략적 실패를 겪은 곳은 싱가포르였다 (394).

n  일본의 점령으로 싱가포르의 번창과 영국의 지배는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싱가포르를 일본이 지배하는 동남아시아의 경제 중심지로 만들려던 일본의 계획은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394).

n  점령지에서 이루어진 이런 만행은 일본인에 대한 강렬한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 증오심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아시아의 많은 지역에서는 당시에 형성된 증오심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396).

n  사람들의 충성심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관용뿐이다 (399).

3-11. 21세기 새로운 도전자들 ? 중국, 유럽연합, 인도

?  국제적인 여론조사 결과가 정확한 것이라면, 대다수의 세계 시민들은 미국의 세계 제패가 끝나고 세계의 권력이 더 균형적인 방향으로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401).

?  중국: 최저 소득국에서 외국인 투자 1위 국으로

n  언론인 마이클 엘리엇은 2007 1 22일자 <타임>에 실린 <차기의 세계 강대국>이라는 특집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번 세기에 미국의 힘은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중국의 힘은 상승할 것이다. 케이크는 벌써 오래 전에 구워졌다 (401~402).

n  일부 전문가에 따르면 2030년이 되면 중국 경제는 미국 경제의 세 배 규모가 될 것이라고 한다 (402~403).

n  주목해야 할 사실은 중국은 이미 국제무역 전쟁에서 현재의 초강대국 미국과 격렬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403).

n  중국은 과연 전략적 관용의 측면에서 미국을 앞지를 수 있을까? (404).

n  언뜻 보기에는 그럴 것 같지 않다. 이따금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중국은 오랫동안 외국인 혐오와 자민족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404).

n  그러나 현실의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훨씬 더 복잡하다. 오늘날 중국이 발휘하고 있는 엄청난 잠재력은 중국이 전략적 관용의 측면에서 놀라우리만큼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입증한다 (404).

n  서양인들과 중국인들이 하나같이 깨닫지 못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략적인 관용의 성공적인 결과라는 사실이다. 사실 중국은 3,000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오늘날 유럽연합이 목표로 삼고 있는 성과를 이루어왔다. 다시 말하면,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으로 이질적인 배경을 가진 수많은 개인들을 단일한 정치적 정체성 안에 소속시키고 통합시켜온 것이다. 중국 문명 자체가 다양한 문화의 거대한 융합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해온 것이다 (405).

n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중국 인구의 92퍼센트 이상이 자신의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을 중국 민족, 즉 한족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406).

n  지금 유럽 연합은 4 5,000만명의 사람들을 통합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중국은 세계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13억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충성심과 민족적 정체성을 장악하고 있다 (407).

n  또 한가지 잊어서는 안될  것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중국 교포 사회는 사업 수단이 뛰어나기로 유명할 뿐 아니라, 동남 아시아 전역에서 다수의 토착민들을 앞지르고, 심지어는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이미 패권 경쟁에 필요한 인적 자본을 모두 확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407).

n  가능성 있는 일이지만, 그렇지 못할 확률이 높다. 중국이 가진 인적 자본의 저장고는 교육 수준이 대단히 낮다 (407).

n  그들 (해귀: 해외에서 귀국할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가 해외에 남아서 학위를 따는 쪽을 선택했다. 예를 들면, 1986년부터 1998년까지 미국의 대학교를 졸업한 중국 학생 가운데 85퍼센트가 미국에 남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409).

n  중국은 거대한 인구가 지닌 에너지와 재능을 이용하는 데 커다란 진전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 덕분에 인간 재능의 미개척 분야에서 최첨단의 지위를 차지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n  중국이 초강국의 지위까지 상승하리라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앞길에는 엄청난 환경오염, 부패, 지역간 경제 격차, 지나친 대량 소비를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내부적인 도전들이 늘어서 있다 (418).

n  나의 논지를 따른다면, 중국은 초강대국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은 세계 일류의 인재들을 끌어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의해 세계를 재패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418).

n  중국이 초강국이 된다면, 미국은 계속해서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원칙적으로는 가능한 일이다. 계속 세계 최고의 인재들 (중국 최고의 인재들을 포함해서)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미국은 경쟁국들을 제치고 기술적, 군사적, 경제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강국 중국의 존재는 양극화된 세계 질서로의 복귀를 초래할 가능성인 높다 (419).

?  유럽연합: 다양성 속의 통일

n  2004 5 1일 시계가 자정을 알리고 샴페인 잔들이 서로 부딪히는 가운데 유럽연합은 신입 회원국들의 가입을 공식적으로 환영했다. 이로써 유럽연합의 회원국은 15개국에서 25개국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419).

n  유럽연합은 선진세계 최대의 단일 시장으로 알려져 있고, 13조에 달러에 이르는 국내총생산은 미국의 국내총생산과 엇비슷하다. 유럽 연합의 인구는 미국 인구보다 1 5천 만 명이나 많다 (421).

n  유럽 연합의 영토 확장은 군사적 정복에 의지하지 않고 자격 부여와 동의라는 수단에 의지한다 (421).

n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럽 연합은 로마와 비슷하다. 황금기의 로마 역시 민족들을 통째로 제국 안으로 끌어들였다 (422).

n  영국의 저술가인 마크 레너드에 따르면, 유럽연합은 다른 나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하는 대신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당근을 흔들어댐으로써 영토를 확장하는 탈제국주의 강국이다 (422).

n  레너드에 따르면, 유럽 연합은 반제국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세계가 움직이는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다 (422).

n  유럽연합은 미국의 패권에 맞선 반제국주의적 도전의 일환으로써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계몽주의적 가치를 옹호하는 참된 횃불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고 노력한다 (422).

n  그러나 유럽연합의 진정한 목적은 미국과 경쟁할 수 있을만한 힘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유럽연합은 힘을 규합하기 위하여 본질적으로 전략적인 관용을 채택하고 있다 (424).

n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에 걸쳐서 미국은 전 세계로부터 우수한 두뇌 집단을 끌어들였고, 현재 컴퓨터 혁명의 최전선에 서 있다. 유럽은 이를 따라잡기 어려운 형편이다 (424).

n  유럽 연합의 관용은 원칙적으로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한 관용이다. 유럽의 관용은 유럽을 통합시키는 전략일 뿐이지, 3세계의 이민자들을 유럽으로 끌어들이거나 유럽 국가를 미국과 같은 다민족 이민자 사회로 변화시키려는 전략이 아니다 (424~425).

n  오히려 유럽 연합 전역에 걸쳐서 이민자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 연합은 평등, 인권, 비차별의 계몽주의적 가치들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있는데,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426).

n  유럽의 이민자 공동체들, 특히 이슬람 공동체들과 관련해서 겪고있는 어려움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429).

n  유럽연합의 확장과 관련한 현실적인 한계와 유럽연합의 여러 회원 국가에 만연해 있는 이민자 반대운동은 유럽을 미국보다 훨씬 불리한 입장으로 몰아넣고 있다. 유럽 연합은 외관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가장 귀중한 인적 자본을 세게 전역에서 유인하여 활용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430~431).

n  세계의 귀중한 인적 자본이 향하는 목적지라는 미국의 위상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유럽 연합은 앞으로도 미국을 초강대국의 자리에 서게 해준 기술적, 경제적 우위를 용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433).

?  인도: 급격한 경제 성장, 어디에나 인도

n  2006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러에서 인도산업연합회는 어디에나 인도라는 표어를 선택했다 (434).

n  <뉴스위크>는 다보스포럼과 관련해서 2006년에는 인도만큼 회담의 상상력을 휘어잡고 대화를 좌우했던 나라가 없었다고 보도했다 (434).

n  인도는 갈수록 많은 선진국들로부터 자본과 일자리를 빼앗아가면서 미국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435).

n  최근의 경제적인 급성장은 인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이 아니다. 인도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몫은 아주 작다 (436).

n  인도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해야 할 사항은 바로 인도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이다. 인도는 미국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민족적, 종교적으로 다양한 나라이다 (437).

n  인도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도 민주주의 국가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관용의 승리를 의미한다. 현대 인도 건국의 주역인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는 20세기에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관용을 주창했다 (437).

n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은 인도가 여러 세기에 걸쳐서 성공한 비결은 유별난 이질성개방성에 있다고 주장했다. 센은 인도의 가장 훌륭한 통치자로 아소카 황제와 악바르 황제를 꼽았다. 아소카 황제는 불교도이고 악바를 황제는 이슬람교도였지만, 이 두 황제는 모두 현세적인 관용을 옹호했다 (438).

n  그렇지만 오늘날 인도의 관용 수준은 이런 역사가 제시하는 것만큼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다 (438).

n  인도는 분파 간 갈등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 세계 각국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가장 진취적인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의 역할을 한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440).

n  그러나 인도는 미래를 낙관할 만한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440).

n  유럽연합의 주민들은 노령화되고 있지만, 인도 주민은 절반 이상이 25세 이하이다. 중국의 성장 동력은 주로 제조업 부문인데 비해서, 인도에서는 소프트웨어, 정보기술, 미디어, 광고 그리고 블리우드 영화 산업 등 개인의 독창성과 재능에 크게 의존하는 부문이 번창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인도에는 20~3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계층 상승의 기회가 널려 있다 (440).

n  다시 말하면, 인도는 엄청난 진보를 이루고 있다. 인도는 독립 이후 100년의 역사를 가진 카스트 제도를 서서히 폐지하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다원주의 국가를 유지하는 등 역사상 유례없는 성과를 이루고 있다 (441).

n  그렇지만 인도가 초강대국은커녕 초강국이라고 주장하기에도 아직 너무 이른 감이 있다. 사실 인도 자신은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세계의 패권을 빼앗거나 분쇄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441).

n  초강대국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미국의 패권 역시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다. 미국의 패권이 아직 정점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전제한다면, 단 한가지 궁금한 문제는 미국의 패권이 얼마나 지속될 것이냐 하는 점이다 (442).

n  그렇지만 미국이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얼마나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경우에만 성립하는 것이다 (442).

3-12. 제국의 미래

?  미국, 1990년대에 갑자기 출현한 단극 체제의 세계 안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초강국 앞에는 중대한 위협을 가할 만한 경쟁자도, 대항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444).

?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0년이 채 못 된 오늘날, 이런 낙관주의의 거품은 터져버리고 말았다.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해외에서 미국의 신용은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이다 (445).

?  9.11과 미국의 강력한 개입주의 정책이 모든 광경을 뒤바꾸어놓은 것이다 (445).

?  미국의 제국으로서의 역할에 관한 논의가 갑자기 시작되었고, 미국 안팎에서는 갈수록 찬성하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었다 (447).

?  미국의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지지하는 주장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 그 주장 가운데에는 독재를 물리치고 자유 시장과 민주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 미국의 군사력을 사용하자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447~448).

?  2003년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는 미국의 군사력을 공격적으로 사용하여 이라크 정권을 교체하고 민주국가를 세울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448).

?  한달 뒤 (2006 12) CBS 뉴스의 여론조사 결과는 미국인의 62퍼센트가 이라크에 미군을 파병한 것을 실수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48).

?  미국이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이다 (448~449).

?  초강대국의 의미는 수백 년에 걸쳐서 서서히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가장 단순한 관점에서 보면, 정복으로부터 교역으로, 침략으로부터 이주로, 전제정치로부터 민주정치로 변모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변모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강대국들은 반드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 즉 내가 접착제라고 표현했던 문제에 직면한다 (449).

?  미국의 세계 제패는 초강대국들의 역사에서 기나긴 진화가 이루어지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449).

?  당시(고대)에 부에 이르는 열쇠는 군사력이었고, 군사력에 이르는 열쇠는 전략적 관용이었다 (450).

?  현대에 들어서도 경제적인 패권은 여전히 군사적인 패권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관련된 변수들은 달라지기 시작했고, 해군력이 갈수록 중요해졌다 (450).

?  한편 세계적인 부를 형성할 수 있는 방편이 땅에서 바다로, 정복에서 교역으로 옮겨지면서 군사력과 경제력의 연관 관계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초강대국이 멀리 떨어진 땅에 있는 부를 손에 넣기 위해서 침략, 점령, 병합이라는 본질적인 필요조건을 갖추어야 할 필요는 없어졌다. 정복을 통한 통치는 비용이 많이 들지만, 교역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451).

?  바로 이것이 로마제국이 1,000년 전에 힘겹게 터득한 교훈이었다 (451).

?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의 경우 교역과 정복 사이에서 흔들리던 저울추는 교역쪽으로 확실하게 기울어졌다. 세계적인 우위를 장악하려는 네덜란드의 전략은 정복과 영토 확장이라는 번거로운 사업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다 (451).

?  그 뒤를 이어 세계무대에 등장한 초강대국인 대영제국은 네덜란드의 계승자로서의 면모와 로마의 계승자로서의 면모를 함께 보였다 (452).

?  다음에는 미국이 네덜란드가 그려놓은 해로를 따라가게 되었다 (453).

?  미국이 성공을 거둔 결정적인 비결은 재능있고 의지가 강한 진취적인 개인들을 배경에 관계없이 흡수하여 그들에게 합당한 보수를 제공한 데 있었다 (453).

?  인적 자본은 미국의 부와 혁신을 급성장시킨 연료였고, 미국이 확보한 우수한 인적 자본은 산업 시대와 원자력 시대, 컴퓨터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453).

?  존 스틸 고든의 말을 빌리면, 예전에 세계가 로마화되었던 것처럼, 지금의 세계가 급속하게 미국화되어가고 있다면, 그 까닭은 우리가 지닌 무기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가진 것을 원하고 그것을 가질 목적으로 자진해서 우리의 행동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영어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우세한 언어가 된 것은 미국 스텔 폭격기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미국 달러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무서운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의 결정적인 힘 17세기의 네덜란드 연방공화국과 마찬가지로 군사력에 있지 않고, 에 있다 (454).

?  부를 창조하는 가장 큰 동력은 약탈과 몰수가 아니라 교역과 혁신이라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454).

?  미국의 민주주의는 국력과 자유의 원천일 뿐 아니라 국외자들을 끌어당기는 엄청난 매력의 원천이다. 미국의 민주정체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성공을 안겨준,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미국의 자유 시장 제도와 더불어, 특별히 현대적인 형태의 전략적인 관용으로 특징 지워진다 (455).

?  그러나 과거의 초강대국들의 경우 관용이 그러했듯이, 민주주의 역시 미국에게 한계를 지우는 요소이다. 미국이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흔히 미국을 로마에 비유한다 (455).

?  오늘의 미국 역시 로마와 마찬가지로 문화 상품을 제공한다. 그 문화 상품의 사례로는 전 세계의 수십억, 줄잡으면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맹렬하게 유혹하고 있는 청바지와 야구, 힙합과 할리우드, 패스트푸드와 프라푸치노를 들 수 있다 (456).

?  그러나 미국의 민주적인 패권은 반미주의의 만연과 폭발이라는 기이한 결과를 낳았다 (457).

?  다시 말해,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미국이 처해 있는 곤경이다 (457).

?  미국의 그늘 아래에서 살고 있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과 미국을 단단히 묶어줄 정치적인 집착제는 미국의 국경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458).

?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초강대국들 가운데, 멀리 떨어진 피지배민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공통의 정체성을 만드는 과업에 가장 성공했던 제국은 바로 로마였다 (460).

?  1,500년 후에 대영제국 역시 이런 측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460).

?  그러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브리튼섬 안팎에서 솟구친 민주화 열기가 대영제국의 발목을 잡았다 (460).

?  기이하게도, 미국과 미국이 지배하는 민족들과의 관계는 로마제국이나 대영제국의 경우보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과 더 유사하다 (461).

?  미국의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범한 커다란 실수는 자유 시장과 민주주의, 미국의 상품과 상표, 소비자 문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 공통의 가치관과 미국의 지도력에 대한 갈망을 만들어내면서 다른 민족들을 미국화할 것일라고 추측한 데 있다 (461).

?  양키스 야구 모자를 쓰고 코카콜라를 마신다고 해서 팔레스타인 사람이 미국 사람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461).

?  세계적인 패권 국가가 미국 시민권을 외국 주민들에게까지 확장하거나 그들과의 공통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 세계의 다른 모든 나라들에게 자국의 관용의 제도를 전파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선의를 가진 수많은 미국인들이 우려하듯이, 자유 시장과 민주주의를 포함한 서구적인 관용정책을 수출하려는 미국의 최근 시도들은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이자 자신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실체로 여기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로부터 원망과 분노를 사고 있다 (461).

?  특히 몹시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미국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선망과 존경심, 한편으로는 깊은 증오심과 경멸감이 뒤섞인 몹시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463).

?  미국과 같이 민주정체를 가진 초강대국이 자신이 지배하는 전 세계 사람들과 정치적 연합을 이룰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볼 때, 그 방법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463).

?  미국은 이론적으로는 국제법과 국제기구에 의해서 통치되는 새로운 민주적 세계 정부의 건설을 위해 기꺼이 헌신할 수 있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초강대국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미국이 아니라 미국이 권력을 양도한 세계 정부일 것이다.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이런 형태의 세계 질서를 지지하고 있다 (464).

?  민주정체를 지닌 초강대국은, 세계 만민에게는 지구라는 사회에 참여하고 번영할 권리가 있음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른 모든 나라들은 미국이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464).

?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국이 식민지로 펼쳤던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만큼, 제국주의자, 계몽된 제국주의자를 자처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465).

?  더구나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정당성과 동의에 기초하고 있다. 계몽된 혹은 자유주의적인 제국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제국은 민주주의 이념과는 어울리지 않는 강압이라는 요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466).

?  내가 반대하는 것은 미국 제국을 건설하는 것, 즉 다른 나라들의 정권을 변화시키고 미국식 제도를 강제하는 일에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쓰는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세계의 패권을 지키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니는 것 또한 다른 나라 사이에서 미국의 입지를 위태롭게 할 뿐이다 (467).

?  미국은 200년 넘게 지켜왔던 공식을 따라가는 편이 훨씬 낫다 (467).

?  미국으로서는 전 세계를 자신과 똑 같은 모습으로 개조하려는 무의미한 일을 자청하기보다는, 자국의 역사와 원칙에 더욱 충실한 채 세계를 위한 본보기, , 언덕 위의 도시가 되려고 노력하는 편이 훨씬 낫다 (468).

?  접착제 문제는 오늘의 미국 정치에서 손에 꼽히는 몇 가지 논쟁점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결과다. 여기서는 다음 세 가지 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468~ 475)

n  우선 이민에 대해 살펴보자. 공포감을 조장하면서 미국 국경을 폐쇄하는 지나친 대응은 세 가지 측면에서 잘못된 것이다.

u  첫째, 초강대국들의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그런 대응은 외국인 혐오라는 반감을 조성할 수 있다.

u  둘째,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이민 정책은 미국과 비미국인 간에 호의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u  셋째는 가장 중요한 측면인데, 과거에 세계를 제패했던 모든 강국들이 그러했듯이, 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것은 세계에서 가장 값진 인적 자본을 끌어들이고 동기를 부여하는 면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앞질렀기 때문이다.

u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는 최근 미국 상원위원회에서 9.11 이후 미국의 이민정책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우수하고 똑똑한 인재들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그들을 쫓아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u  21세기 미국의 이민정책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미국의 초기 역사와 과거의 모든 강대국들의 역사를 돌아보건대, 오늘의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숙련도와 훈련도, 그리고 노하우를 갖춘 이민자들을 찾아내고 끌어들이기 위한 적극적인 유인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n  이번에는 다국적 기업과 아웃소싱에 대해서 살펴보자.

u  미국 기업은 애국심이 아니라 이윤에 의해 움직인다. 다국적 기업의 출현과 아웃소싱의 증가는 미국에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이득을 제공한다.

u  그러나 미국 기업들의 다국적인 활동은 미국에 중요한 비경제적인 이득까지도 제공할 수 있다.

u  미국에는 본토박이 주민들과 나란히 배치할 수 있는 외국인 군단이나 공무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u  그러나 미국 소유 기업에서 높은 보수의 일자리를 확보한 외국인들, 특히 관리자나 임원이 된 사람들을 고려하면, 미국의 다국적 기업은 분명히 미국의 국경 밖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번영 덕분에 이익을 보고 있다는 느낌, 미국의 계속적인 성장에 관여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미국의 기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n  이제는 일방주의와 다자주의에 대해서 살펴보자.

u  미국은 세계적인 패권 국가이기 때문에 고립주의라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u  미국인들은 이러한 새로운 다자주의를 굴복이 아니라 기회로 여겨야 한다. 만일 미국이 스스로 세계적인 문제들에 원인을 제공했음을 인정하고, 그 문제드르이 해결될 경우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고 국제적으로 주도적인 입장에서 그 문제들에 대처한다면, 미국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민주적인 초강대국의 존립에 반드시 필요한 다른 나라들과의 연대감, 즉 결속감과 공동의 목적의식까지 창조할 수 있다.

?  21세기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의 주요 경쟁국들은 수많은 자체 문제에 직면하고 있지만 (개별적으로든 연합을 통해서든) 점점 강해지고 있으므로, 미국은 가까운 미래에 패권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단순한 강국의 신분으로 복귀하는 것이 꼭 나쁜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결국 초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역사의 이변이고, 이득과 함께 희생까지 떠안아야 하는 일이다 (476).

?  한편 미국은 지금도 여전히 여러 측면에서 전략적 관용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미국이 건국 이후 성공에 성공을 거듭할 수 있었던 비결을 재발견하고 제국을 건설하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다면, 몇 십년이 지난 후에도 세계의 초강대국, 그것도 강압과 군사력에 의지하는 초강대국이 아니라, 기회, 역동성, 도덕성을 갖춘 초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다 (476~477).

 

3: 내가 저자라면 (주제 및 주제구성/ 감동적인 장절/ 보완점 평설)

3-1. 주제 및 주제구성

이 책의 주제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과연 미국은 미래에도 초강대국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유지한다면 어떻게 가능할까?이다. 그리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과거의 성공 사례들과 실패 사례들을 살펴보고, 현재 위협적인 경쟁국들의 상황을 차례로 점검한 뒤, 미국의 앞날을 예측하고 있다.

 

주제와 그 주제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기에 앞서 내가 늘 역사책을 읽으며 걸렸던 하나의 단어에 대해 잠시 논하고 싶다.

 

야만인.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확인시켜 주는 단어는 없는 것 같다.

 

야만인의 정의가 무엇일까? 덜 문명화 된 민족 혹은 인종을 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 문명이란 정의는 엄연히 승자의 입장 혹은 침략자의 입장일 뿐이다. 거기에는 피해를 입는 민족이나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 사상이나 지혜는 모두 배제한 너무도 이기적인 단어가 아닐 수 없다. 난 늘 전세계 역사학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제발 의식적으로든 습관적으로든 패자를 표현할 때 야만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이 단어가 이 책의 주제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관계상, 이쯤에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런데 비슷한 맥락에서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걸려오는 단어가 있었다. 다름아닌 관용이었다. 저자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제국이란 강압을 필요로 하는 요소인데 거기에 과연 관용이 끼어 들 틈이 있을까?

 

처음에는 혹시 번역이 잘못되었을까? 하는 마음에 아마존의 책 소개를 살펴보았는데 저자 역시 Tolerance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끝까지 읽고 나면, 그것이 결국은 상대적 관용이고 어찌 보면 효율적인 전략적 채택을 의미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지만, 이 단어에서부터 걸리는 나는 역시 주변 강대국들이 혹여라도 제국주의로 전환하지 않을까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봐야 하는 대한민국 독자이다.

 

어느 정도의 감성적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구성은 저자 자신의 주제를 풀어감에 있어서는 좋았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일단 1부에서 고대 제국들로부터 시작하여, 2부에서는 근대로 넘어가는데 그 연결이 매끄럽다. 특히 중국의 경우 한족이 다스린 명을 실패의 예로, 이방인이 다스린 당나라를 최고 전성기로 설정한 것은 참신했다.

 

그런 후 3부 현대에 와서 미국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쯤에서는 독자들이 이미 주제에 대한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현대 강국들을 각자의 시각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 만큼 나름의 흥미도 있다.

 

정리하자면, 저자의 주제. 미국은 과연 미래에도 초강대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만약 그러하다면, 어떻게?라는 물음을 찾아가는 길은 흥미로웠다. 뿐만 아니라, 세계가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면,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어디쯤 와 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만큼 지적 도발도 있는 책이었다.

 

3.2 감동적인 장/

1부   <고대의 4개 제국> 중에서 내게 가장 다가 온 제국은 몽골이었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넓은 영토를 지닌 제국. 하지만 그의 손주들이 다스린 제국들도 몽골제국이라 부를 수 있을까? 역사에선 이미 그 제국들을 무굴제국과 원나라를 포함하여 다른 이름으로 칭하고 있다. 즉 몽골제국은 칭기즈칸 한 세대를 제외하고는 역사에서 사라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왜일까? 그토록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동양민족으로서는 드물게 유럽까지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몽골제국은 어째서 허무하리만치 단숨에 역사상에서 사라졌을까?

 

학자들 간에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공통된 핵심 사항은 다름 아닌 정신 사상과 문화의 결여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여 관용이란 단어를 사용한다면, 몽골제국의 관용도 전략적 혹은 상대적 관용이었을까?

 

아니다. 몽골은 상대적 관용을 베푼 것이 아니고, 베풀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영토를 뺏을 줄을 알았지만 다스릴 줄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에겐 그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물리적 힘으로만 세워진 제국은 역으로 피지배자들의 깊은 정신 사상과 문화에 압도되어 그토록 강대한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문화에 동화되어 역사에서 사라지는 참으로 흥미로운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그에 비해 다른 제국들의 모습을 보면 로마도 그러하고 당나라도 그러하고 제국이 정점에 달할수록 문화, 예술이 전성기에 이르며 그야말로 피지배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지배국에 종속되기 희망하는 접착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앞서 읽었던 <선의 황금시대>에서 선불교가 왜 당나라 시대에 꽃을 피웠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2부 계몽화된 관용> 중에서 네덜란드 편은 제국이란 것에 대한 나의 고정 관념을 살짝 뒤흔들 수 있어 좋았다. 제국은 제국이지만 더 이상 군사력을 앞세워 영토를 지배하는 제국이 아닌, 해상력을 장악하여 교역을 통제한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 부분을 현대까지로 끌고 오면, 아마 컴퓨터 기술을 앞세운 온라인 상의 장악력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처럼 물리적 힘이 약한 나라에서는 더 깊이 연구해 볼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2 7장의 세 제국들, 오스만, , 무굴>을 읽으면서는 결국 제국의 운명도 인간의 운명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누군가의 책에서 기업도 나라도 일단 탄생한 이상 스스로 유기체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성장하고 노화하고 죽음을 맞는다는 말을 읽었던 것이 기억 나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기업이든 제국이든 그것을 구성하고 이끌고 가는 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결국 구성원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기업이나 제국 혹은 나라가 인간의 삶과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 구성원의 삶을 대변할 뿐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제국이 패망의 길을 걷는 그 모습 또한 인간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다. 풍요로운 물질에서 오는 정신적 헤이, 윤리적 타락, 사고의 경직성, 새로운 혹은 다른 문화에 대한 배척 등. 어쩌면 인류 문명이란 자체가 윤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순수한 신흥 세력이 부흥하여 그 세를 일으켜 정복하고, 정복한 후 성장하고 그리고 타락하는 이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8장 영국><3. 세계 제패의 미래>를 읽으면서는 저자의 생각을 총 정리함과 동시에 이 책을 통해 습득한 것을 토대로 다양한 질문들이 내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우선, 현대에도 과연 초강대국은 과연 필요한가? 이다.

역사적으로 초강대국이 필요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전 세계적 치안의 안정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백성들이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전쟁이 난무하는 시대보다는 지역적으로 강력한 지배세력이 있어 군사적으로 안정을 시켜주는 것이 환영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현대에도 적용가능한지는 정말 의문이다.

 

요즘처럼 정보통신이 발달한 시대에는 몇몇 초강국끼리 협정을 통해서도 전 세계 치안은 얼마든지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 , 더 이상 미국이 전지구적 경찰국이 될 필요는 없는 이 시대에도 과연 그들은 초강대국이라는 패권국에 머물러야 하느냐는 원론적 물음이 생겼다.

 

둘째, 그에 대한 답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무엇보다 미국 자체내의 초강대국 피로 증후군이 심하게 나타나고 있고, 유럽 연합이나 중국의 기세가 더 이상 미국을 단독 패권국으로 두려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 역사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유럽연합의 세 개 초강국으로 흘러갈까? 이쯤에서 저자가 이 책 내내 주장했던 접착제를 각 나라별로 대비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미국의 경우는 아무래도 전통적으로 내세울 만한 전통성이 약한지라 저자가 주장하는데로 200년 전의 젊고, 역동적인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강력한 접착제 역할을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유럽연합은 어떠할까? 이 부분은 저자의 말처럼 유럽연합내의 접착보다는 유럽 외부 세력에 대한 유럽의 태도에 더 관심이 간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그리스, 로마 사상의 근원지로서 오래된 문명을 자랑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이슬람 세력과는 뿌리 깊은 경쟁을 해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분열된 유럽이 다시 결집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 로마 사상을 배경으로 현대의 로마제국이 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현대에서만큼은 그들이 더욱 성숙된 정신 사상으로 타문화권도 포용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이번에는 이웃나라 중국. 정말 거침없이 성장하고 있는 중국이다. 우리로서는 어쩐지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중국이 과연 미래에도 하나의 중국아래 계속 뭉쳐있을까? 저자의 주장대로 92%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중국인이라 여길까? 러시아가 붕괴되었던 것과 같은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아마 중국같이 거대한 나라가 현대 역사에서 타국에 의해 무너지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제국이 그러하듯이 국력이 쇠락하는 이유는 외부에만 있지 않다. 아니 오히려 내부의 분열이 원인이 되어 외부로까지 연결되는 경우가 대다수라 하겠다. 물론 지금까지의 성장 기세를 놓고 볼 때 중국 내부의 분열을 논하는 것은 너무 이른 감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과연 저자의 주장대로 정말 중국이 계속해서 하나의 중국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끊임없이 통합과 해체의 역사를 겪고 있는 중국, 지역간의 극심한 빈부차이를 낳고 있는 중국식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민주주의로의 변환하는 과정에서 과연 중국은 휘청거리지 않고 초강대국으로 곧장 달려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말이다.

 

셋째, 이 세 초강국 세력말고는 없을까? (인도는 가까운 미래 초강국이 될 수 있기에는 아직 경제력이 미비하여 제외하였다). 인도보다는 현존하는 세력들 가운데 당장 초강국으로 떠오를 수 있는 세력이 누가 있을까? 물론 한국의 입장에서는 러시아나 일본은 늘 안심할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이 책의 주제에 맞는 전 세계적 초강국으로는 그와 같은 단일 국가보다는 다른 존재가 떠올랐다.

 

다름아닌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영연방 국가는 어떨까? 그리고 그들이 미국과 인도와 파트너십을 맺는다면? 영연방 국가는 지금까지도 서로들간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이러한 우호적 관계를 앞세워 영국이란 접착제를 이용해서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다면 어떠할까? 영국이란 전통적 접착제에 200년 전 미국의 역동성을 가미한다면? (사실 지금도 미국, 호주, 캐나다는 세계 3대 이민 선호국이다).

 

, 미국이 한 걸음 물러서 영연방 국가와 좀 더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는다면 유럽연합과 중국에 맞서 초강대국 패권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실질적으로도 영국은 유럽 국가 중에서는 가장 미국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호주 역시 최근에는 경제는 아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미국과 관계를 강화해가고 있다).

 

정리하자면, 나는 역사나 국제 관계에 그리 밝은 편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 동안 내가 알고 있던 지식과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을 그러모아 내 나름 해석하고 예상하는 지적 유희를 즐겼다. 그리고 이러한 일 자체가 내겐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가장 큰 감동이 되었던 것 같다.

3.3 보완점 평설

    일단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성 자체는 그다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없는데, 오히려 책 내

    용과는 무관한 곳에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책 표지이다. 원서의 표지도 그러하고, 역서의 표지도 그러하고, 이 책 분위기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부분이야 저자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니 여기서 길게 논할 문제는 아닌 듯 싶다.  

 

    다음으로, 내용상에 있어 지금까지 아껴두었던 인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저자는 세계 유수한 인재들이 평등한 기회를 쫓아 미국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한다.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하고, 그 기회를 취할 수 있는 곳을 선호하고 꿈꾸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서구 사상가들이 끊임없이 인도에 빨려드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인도의 가장 큰 강점으로 민주주의를 꼽았는데, 나는 이것을 저자가 인도의 사상적 면을 보지 못한 체 겉 모습만 보고 내린 판단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전 세계 사상가들의 책이나 글을 조금이라도 읽다 보면 그들이 얼마나 동양사상, 그 중에서 인도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는지를 금새 깨달을 수가 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자 인류 근원의 진리 탐구에 누구보다 깊이를 보여주고 있는 나라, 인도 (이슬람 문화 역시 그 문화의 깊이에서는 전 인류가 배울 것이 엄청 많은 것에 비해 그들 스스로 고립화되어가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다). 전 세계적으로 이제는 신자본주의를 넘어서서 더 이상 어디로 가야할지 그 방향성조차 가늠할 수 없다할만큼 물질문명이 발달한 현대는 과연 성장을 지속할 것인가?

 

       이 부분이야말로 유럽인들이 스스로를 미국과 차별화하며 자신들이 좀 더 고매한 사상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유럽의 전통적인 사상가들도 연구하는 동양 사상.

 

결국 인류 역사는 표면적으로는 물리적 힘의 경쟁인 듯 보이지만, 시간을 조금만 확대해서 들여다보면 정신문명의 경쟁임을 알 수 있다. 더 깊고, 더 풍성한 문명을 발전시킨 민족이나 세력이 그렇지 못한 세력을 언젠가는 흡수하는 형식으로 말이다. 물론 일반적인 형식의 지배, 피지배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 삶을 근본적으로 이끌어 가는 보이지 않는 힘 말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인도를 논하면서 조금만 더 깊이 있게 들어가 주었으면 이 책이 훨씬 더 격조 높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어찌보면 내가 한 작가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쯤에서 물러서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보완점은 아니고, 한국의 독자로서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다.

 

이 책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나의 조국, 대한민국. 

 

우리의 과거, 현재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우리가 가까운 미래에 초강대국이 될 여지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느 누구도 꼭 초강대국이 되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의 의문은 대한민국이 몇 십년 뒤에도 대한민국일 수 있을까?이다.

 

수십 년 뒤 우린 한국인을, 한국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 내릴까? 그 때 쯤이면 영어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우리 아이들이, 모국어로 글을 쓰는 날 이상하다 여기지는 않을까?

 

<코리아니티> 과연 그것은 어떻게 정의내려 질 것이고, 존속은 될 수 있는 건지……?

아무래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칼럼을 통해 좀 더 고심해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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