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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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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8일 23시 43분 등록

ㅁ 저자 소개

에이미 추아, 그녀는 어쩌면 [제국의 미래]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알려졌다시피 미국은 이민자에 대한 관용을 통해 세계 초강국으로 성장한 나라이다. 에이미 추아 교수가 책에서도 밝힌 바 있듯이 미국의 지위가 이렇게 상승한 것은 끊임없이 다양한 집단들의 활력과 재능을 유인하고, 보상하고, 흡인해 왔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민을 받아들이고 경쟁국과 개도국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제발전과 기술혁신을 창출했고, 이것을 토대로 최고의 부와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했다.

에이미 추아 교수의 가족은 이러한 미국의 이민정책의 ‘성공 아이콘’으로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만큼 미국 주류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했다. 추아교수의 부모는 필리핀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화교 집단의 일원으로 있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 레온 추아는 1961년 MIT로 유학을 오게 되는데 중국인 특유의 근면함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71년에는 버클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성공한 과학자로 ‘Chua's circuit'을 세상에 소개했을 뿐 만 아니라 회로이론 방면에서 대가로서 활동했다.

에이미 추아는 1962년 일리노이주의 Champaign에서 태어났으며,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1984년 졸업 후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 87년에 학위를 취득한다. 2001년 예일대학에서 교편을 잡기 전 약 4년간 Wall street에서 대형 법률회사에서 일하며 멕시코의 시장민영화를 도왔고, 1998년 아시아 경제위기 동안 세계은행에서 일했다.

그녀는 첫 번째 저서인 <불타는 세계>(2003)에서 자유시장과 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산이야말로 비서방 국가들에서 집단적 증오심과 민족적 폭력을 더욱 심화 시키는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세계화의 두 개의 기둥인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는 실제로 국외자 소수 집단들이 다수의 가난한 토착민들을 경제적으로 완전히 지배하는 나라들에서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즉,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소수의 이민자들에게 부가 집중된 반면, 인구의 대부분을차지하는 토착세력은 경제적으로 극심한 상실감에 빠진 상태에서 민주주의는 이들 다수 집단의 정치적 세력을 증가시킨다. 궁극적으로 자유시장과 민주주의의 동시적인 추구는 민족국가주의의 재앙의 불씨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2004년 1월[The Myth of Globalization] 인터뷰에서 필리핀에서 살던 그녀의 고모가 잠을 자다가 괴한으로부터 살해된 이야기를 꺼낸다. 당시 필리핀 사람이었던 경찰집단이 그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음에 분노하였고, 이내 곧 그것이 필리핀 내에서 부와 경제력을 거머쥔 중국계 화교에 대한 필리핀 토착민의 일반적인 정서라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사건 경위서에 적히 이 범행의 동기 역시도 ‘절도’가 아닌 ‘복수(Revenge)' 였다고 한다.

필리핀 내에 살고 있는 1%의 중국인들이 필리핀 경제력의 6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정치와 경제의 따로 놀기’가 심각한 인종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녀는 이와 같이 [불타는 제국]에서는 해당 국가의 특수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유시장과 민주주의가 만병통치약인 양 전 세계적으로 급격하게 확산시키려는 미국의 시도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두 번째 책 [제국의 미래]에서는 그간 미국의 불관용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현재 미국이 자신의 성공비결 ‘관용’을 지금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그녀는 필리핀에서도 미국에서도 인종적 아웃사이더였지만 오히려 그녀의 출생때문에 국제법 및 인종갈등, 세계화, 문화차이 등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를 해 이 분야의 대가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추아교수의 여동생들도 각각 예일대, 하버드대 출신의 의사와 변호사이며, 그녀의 남편인 Jed Rubenfeld 예일대 법대 교수 역시 유대계 미국인으로 성공적으로 미국사회에 편입한 이민자들이다.

그녀가 ‘관용’을 중시한 이유는 그녀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추아 교수 자신과 그녀의 가족이 당당히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미국이 세계를 제패하는 제국으로 성장했던 이유 ‘관용’이 10여년간의 부시정부의 자국민 우선정책 및 세계에 대한 ‘비관용’으로 인해 자칫 퇴색될까 우려를 표한다. 그래서 새로운 오바마 정부에 미국의 정신 ‘관용’을 되살리기를 주장하고 있다.

ㅁ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이 책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초강대국들은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적어도 해당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절대적인 우위에 오르기까지는 하나같이 대단히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나라들이었다. 모든 초강대국에게 관용은 패권을 장악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7)
 
내가 이야기하는 관용은 정치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의미한다. 내가 앞으로 사용하게 될 관용이라는 단어는 수단적인 의미에서의 관용이든, 전략적인 의미에서의 관용이든, 아주 이질적인 사람들이 특정한 사회에서 생활하고 일을 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좀더 명확하게 이야기한다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종, 종교, 민족, 언어 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회에 참여하고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일컫는 것이다.(11)

 
미국은 처음부터 종교적인 자유에 대한 대단히 혁명적인 공약과 다양한 국적을 가진 온갖 계층의 개인들에 대한 유난히 개방적인 시장 제도를 통해서, 수천만에 이르는 이민자들과 활력과 재능을 유인하고 보상하고 활용했다.(12)
어느 평론가에 따르면, 미국의 “21세기형 제 왕권은 자유시장과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꾸밈음을 내세우고, 이것들을 세계에 존재해온 군사력 가운데 가장 무서운 군사력을 동원해서 집행하는 권력이다.”(18)


역사를 돌이켜보면, 초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외국 주민들의 충성,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묵인이라도 확보할 방법을 찾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군사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20)
 

미국이 담당하고 있는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서의 역할과 스스로 공언하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횃불이라는 역할이 서로 충돌하면서 광범위한 반미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현재 미국은 전 세계의 수십억 인구를 마주보고 있다.(21)

세계적인 패권 국가를 선택할 때 의도적으로 포함의 영역을 줄이는 대신 넓히려 했다. 이런 시도는 세계적인 패권에 대단히 근접했던 제국들 역시 관용에 의지 할 때에는 권력이 성장하고, 불관용에 의지할 때에는 권력이 쇠퇴하는 패턴을 따른다는 나의 논지를 뒷받침하고 있다.(22)

 

 제 1장 최초의 패권 국가, 페르시아 - 아케메네스


키루스가 썼던 전략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참수’전략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도자의 머리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지도력을 잘라내는 전략을 썼다. 키루스는 새로운 왕국을 정복하면, 그곳의 통치자를 내쫓되 그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장해주고 그 대산 주 혹은 군을 다스리는 총독인 사트라프을 세웠다. (39)


키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바빌로니아에 입성하자마자, 그곳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마르두크 신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그는 자신이 바빌로니아 백성들이 신 마르두크의 선택과 도움을 받는 해방자인 것처럼 처신했다.(41)

 
키루스가 사용했던 관용 정책은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전략과 편법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루스는 해당 지역의 신을 포용함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고, 해당 지역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함으로써 피정복민의 저항과 반란 가능성을 줄였다.(43)

 
다리우스는 왕위에 있는 동안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의 관용이 아케메네스 왕국의 전통을 존속시키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다리우스는 자신의 제국이 특별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제국의 다언어 문화를 존중했다.(47)


다리우스가 이런 관용적인 정책으로 얻은 이득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피정복민들을 죽이거나 ‘페르시아화’하는데 자원을 낭비하지 않았고, 그들이 가진 다양한 기술과 재능, 자원을 이용했다. 그것이 다리우스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화려한 제국의 수도들을 건설 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48)

 
아케메네스 왕조가 200년 동안 전례 없는 공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관용정책덕분이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해당 지역의 법률과 전통을 포용하고 해당 지역의 언어, 종교, 예식을 용인하고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피정복민의 반항과 반란을 최소화 했다. (52)

키리우스가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관용이 후일에 싹틀 불관용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는 점이다. 세계 최초의 패권 국가였던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젝국은 그후 세계를 제패했던 강대국들이 직면했던 것과 똑 같은 문제에 직면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58)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덕분에 그리스의 언어, 문학, 미술, 건축, 철학은 지중해를 건너 여러 대륙, 여러 나라로 펴져 나갔다. 이집트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알레산드로스가 건설했던 여러 도시국가에서는 ‘야만인’의 사상이 그리스어로 옮겨져 제국에 흡수 되었고, 이를 통해 혼성 문화가 탄생했다. 헬레니즘이라고 알려진 이 문화는 이후 기독교와 서구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알렉산드로슨 엄청난 군사적 위협을 이루었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페르시아 왕들은 결코 이룩하지 못했던, 대륙을 가로질러 형성된 고도의 문화적 통일체였다.(66)

 

2장 팍스로마나, 세계인의 탄생 ? 로마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전쟁조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로마제국은 하나의 관념이었다.  로마제국의 외떨어진 변방에 사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로마인’이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도 그들은 로마인이 되었다. (68)


로마제국은 관용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냈다. 1790년 미국 헌법의 기초자중 한 사람인 대법원 판사 제임스 윌슨에 따라면, “로마인들이 자국의 힘을 전 세계로 확장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시민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윌슨은 로마가 전략적으로 채택했던 관용이야말로 “제국을 확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보았다.(73)

 

로마는 정복한 적들의 도시를 파괴하거나 약탈하는 대신 평화조약을 제시했으며, 그 조약이 거부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런 평화조약의 기본적인 틀은 단순했다. 정복된 도시는 자체가 법률에 따라 자체 지도자에 의한 통치를 지속할 수 있었으나, 두 가지 조건만은 감수해야 했다. 첫째, 각 도시는 로마와는 자유롭게 교역을 할 수 있으나, 상호간에는 자유롭게 교역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소규모 도시국가들의 로마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이 급격히 심화되었다. 둘째, 각 도시는 로마에 병력을 공급해야 했다.(76)

 
로마는 이런 군사 활동을 펼치는 동안에도 피정복민의 지도자들에게 시민권을 주었으며, 로마 법률에 저항하는 나라는 가혹하게 응징했다. 로마는 건국 후 6세기 만에 작은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연안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하여 지중해의 이름을 ‘로마의 호수’로 바꾸어 놓았다.(78)
 
로마는 또한 아주 외떨어진 제국이 변두리에서 뛰어난 기술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냈다.(82)

 

 

로마사람들은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들 다양한 ‘야만인들’을 모조리 제국을 끌어들였다. 그들은 야만인들의 재능을 활용하고 그들이 로마 내에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게 했으며 대부분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했다.(86)


로마는 정복된 민족이 지도 계층을 멸시하거나 억압하는 대신 로마문화를 권력의 특권이 수단으로 받아들이도록 유혹했다. 정복된 민족들은 로마의 도시와 원형경기장 건설하는 일에 종사했으며, 대개는 두 세대도 지나기 전에 로마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받아들였다. 각 지역의 지도 계층은 자식들을 로마에 있는 학교에 보냈고, 이 아이들은 자라서 로마 시민이라는 공동체의 충실한 성원이 되었다. (87)

 
교육을 받은 로마인들은 누구나 라틴어와 그리스를 유창하게 했고, 그리스 로마의 위대한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으며 자랐다.(88)

 
주목해야 할 점은 로마는 그리스 로마 문화를 성공적으로 수출하면서도 각 지역의 언어나 전통을 말살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로마는 언어학적인 면에서나 문화적인 면에서 볼 때 대단한 다양성을 아우르고 있었다.(88)


지역 사회의 로마화는 귀족 계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공직자들은 대개 인종이나 민족에 관계없이 당연히 로마 시민권을 부여 받았다.(89)
 

로마가 다른 민족들을 자국 내로 편입시키는 전략을 쓰면서 추구했던 목적은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여 다양성을 고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민족들을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로마의 관습, 생활양식, 풍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인종적인 혈통에 관계없이 어떤 집단이든 완전히 제국에 통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로마는 너그러운 나라였다.(91)
 
로마의 붕괴는 로마가 도저히 동화 시킬 수 없는 민족들, 혹은 로마가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문화와 습관을 가지고 있는 민족들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동화시키는 데 실패하면서 시작되었다. 종교적인 불관용과 인종적인 불관용이 결합하면서 로마는 전쟁과 내란에 휩싸였고, 전쟁에 서도 내란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제국은 로마의 혈통, 문화, 종교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이에 심혈을 기울였다.(106)

 

3장 중국의 황금기 - 당

시황제이 통치 기간을 짧았지만 그가 세운 강력한 원칙은 중국사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등장하게 된다. 그 원칙은 바로 중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다양성에 대한 가혹한 억압이 필요하다 것이었다. 그 후 2000년 이상 중국은 불관용은 인종 및 종교에 대한 산발적인 억압, 그리고 문화적인 ‘숙청’ 외국인과 외국의 사상에 대한 거부,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중화사상과 중국 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단언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112)
 

이방 문화와 종교 그리고 영향력에 대해 중국 역사상 가장 관용적인 왕조가 탄생했다. 이런 관용적인 태도를 인격적으로 구현했던 인물이 바로 당의 두 번째 황제인 태종이었다. 태종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중국의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현명하고 영웅적인 인물로 존경 받고 있고 일부 역사학자들로부터 당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로 대접받기도 한다.(116)


태종의 처세는 중국 역사상 종교 다원주의가 매우 융성했던 시대로 손꼽힌다. 태종은 불교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먼 서역에서 외국인들이 가져온 생소한 종교들까지 기꺼이 받아들였다. 태종의 치세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주로 외국인 신도들에 의해서 자유롭게 신봉되었다.(123)

 명황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군사적 정복 사업과 활발한 외교정책을 병행했다. 외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그의 치세에 최고 절정에 달해서, 카슈미르에서 한반도, 이란에서 베트남에 이르는 비 중국인 민족들이 당의 패권에 포섭되었다. 황도 장안은 방대한 당 제국의 중심이었다. 장안은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드는 곳이었다.(127)

 
장안은 다양한 분위기가 뒤섞인 화려한 도시일 뿐 아니라 학문고 예술이 중심지였다. 명황의 치세에 문학과 예술, 역사, 이론과 미학이론, 그리고 특히 시가 그 어느 때보다 융성했다.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이백, 황유, 두보 등의 시인들은 모두 이 시대 사람이었다.(128)

 
당은 당에 맞서려는 왕국들에 대해서 피비린내 나는 정복을 감행하기보다는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위협으로 외교술을 펼쳐 굴복시키는 전략을 많이 구사했다. 이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당을 매우 취약하게 만들었고, 당의 패권이 외국의 왕들과 백성들의 충성심에 좌우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중국인들에게 자주 멸시당하던 외국 왕들과 백상들은 이런 치욕감을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으로 되갚았다.(134)


안녹산의 난은 당의 쇠퇴를 알리는 전환점이었다. 이전 까지 당의 황제들은 중국인과 비중국인 간의 구분을 없애기 위해 혈통과문화를 혼합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오랜 세월 이 정책은 놀라우리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국은 영토를 점점 넓혀가면서도 외국인들이 중국 사회에 모든 영역을 참여할 수 있게 함으로써 정치,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생명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안녹산의 난 이후 완전히 뒤바뀌었다. 8세기 후반에 이르자 타 민족과 외래사조에 대한 당의 관용은 권력의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할, 불안정, 그리고 폭력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138)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등불처럼 번지면서 다양한 인종을 감싸 안던 당의 세계주의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과거제도를 통해서 입신한 동남부 출신의 중국인 선비와 관리들은 야만인의 피가 섞인 타락한 북부 출신 귀족들 때문에 중국의 도덕과 문화가 오염되고 있다는 생각을 퍼트렸다. 141)

 

4장 유럽을 삼킨 초원의 지배자 - 몽골

유럽인들이 이교도들을 말뚝에 묶어 불에 태우고 있을 때, 칭기즈칸은 만인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공표했다.  그는 또한 다양한 인종들을 포용하고, 초원지대 사람들을 갈라놓던 부족 간 장벽을 용의주도하게 허물고, 피정복민들 가운데 유능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골라 공직에 임용했다.  몽골족이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고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잔혹함이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관용에 있었다. (146)
 

칭기즈칸은 만인에 대한 종교적 자유를 공표했다. 또한 다양한 인종들을 포용하고 초원지대 사람들을 갈라놓던 부족 간 장벽을 용의주도하에 허물고 피정복민들 가운데 유능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골라 공직에 임용했다.  몽골족이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고 유지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잔혹함이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관용이 있었다.(147)

 
여러 세대에 걸쳐서 초원지대 사람들은 부계혈통주의에 묶여 있었다. 그들은 두 남자의 촌수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서로에게 더 충실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테무친은 초원 지대를 분열시켜왔던 전통적인 씨족별, 혈통별 분할 제도를 타파하기 위해서 몽골 군대를 재조직했다.(150)

 
칭기즈칸은 민족간의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른 부족의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배치하고 자신의 자식들을 피정복 부족장의 자식과 결혼시켰다. 그는 또한 다른 부족의 재능 있는 자들을 데려다가 몽골족이 지니고 있지 못한 재능과 기술을 전파하게 했다. 몽골족이 문자를 가지게 된 것도 이런 경로를 통해서였다.(155)

 

칭기즈칸은 몽골족이 지니지 못한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열심히 끌어 모았다. 몽골 군대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포로들을 꼼꼼히 조사하여 기술을 가진 사람을 찾아냈고, 자신해서 투항한 기술자들에게는 후한 보상을 내렸다. 칭기즈칸은 이런 방법으로 수많은 중국인 기술자들을 확보하여 성벽을 두른 난공불락의 도시들을 함락하는데 필요한 강력한 공성장비를 만들 수 있었다. (159)

 

칭기즈칸은 목표를 당성하자 병사들을 이끌고 몽골의 초원 지대로 돌아갔다. 그는 위구르, 탕구트, 거란의 왕국들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속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고 계속 곡물을 바칠 것을 전제로 하여 여진인들에게 대폭적인 자율권을 허용했다.(160)

 
칭기즈칸은 유럽에서는 ‘신의 저주’라고 불렸지만, 티베트에서 아랄해에 이르는 동양에서는, 중세 페르시아의 역사가 주바이니의 표현을 빌리면 “주가 베푸신 자비이며 주가 내리신 은총”이자 종교의 옹호자로 알려지게 되었다.(161)

그의 초기 정복 활동은 주로 약탈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지만, 노년이 되자 그는 ‘세계를 통일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들들에게 “마음속에 목표를 새겨두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생은 물론이고 자기 인생도 제대로 경영할 수 없다”고 말했다.(167)


쿠빌라이의 예외적인 정책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그러나 반 중국적인 몽골 지상주의자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 도 있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쿠빌라이는 거의 전 생애를 중국에서 보내면서 중국의 세련된 문화와 중국의 아름다운 건축, 그리고 질서 잡힌 중국 사회를 거리낌없이 칭송했다.(181)

주목해야 할 것은 쿠빌라이는 중국인들을 행정부의 고위직에서 추방한 뒤 이 직위들을 몽골인들로 채우지 않고 다른 외국인들로 채웠다는 사실이다.(182)

요컨대 쿠빌라이의 통치 원칙은 불관용이 아니라 세계주의였다.  쿠빌라이의 이런 정책 덕분에 다양한 문화, 다양한 민족, 다양한 종교가 멋지게 통합되었다. (183)

몽골인들은 “비할 데 없는 문명의 전달자”였다.  그들은 중국에는 교회를, 러시아에는 이슬람 학교를, 페르시아에는 불탑을 세웠다.  “그들은 피지배민들에게 억지로 떠안길 만한 고유의 제도가 없었으므로, 각지의 제도들을 거리낌 없이 채용하고 결합했다.” (185)


그는 피지배민족들의 지식과 재능, 그리고 문화적 업적을 거리낌없이 칭찬하고 현명하게 이용했다. 그는 모든 종교 교의들이 융성할 수 있게 했고 중국뿐만 아니라 중국 문명에 인도와 이스람 지역에서 비롯한 지식과 기술을 주입하기까지 했다.(187)

 

제국이 쇠퇴하면서 몽골이 지배하던 지역 어디에서나 일관된 특징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공식적으로는 물론 몽골의 평범한 주민들 사이에도 불관용, 특히 종교적 불관용이 전면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188)

 

5장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 - 스페인

중요한 것은 상대적 관용이었다. 끔찍한 폭력사태가 벌어지느니 경우가 있긴 했지만, 14세기와 15세기의 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스페인은 서유럽의 비기독교도들이 거주하면서 번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었고, 때로는 유일한 곳이었다. 스(197)

 
상대적인 관용 덕분에 스페인이 거둔 수학은 영토확장과 제국이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페인은 비기독교도 주민들 덕분에 문화적, 지적인 영역에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력과 돈이라는 중요한 이득을 손에 넣었다.(199)

1478년 교황의 교서에 따라 스페인에 이단 심문소가 설치되면서 상대적인 관용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200)


 
나의 논지를 되풀이해서 말한다면, 관용은 세계 제패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렇지만 스페인 왕국의 불관용이 번영을 가로 막고 스페인이 깊은 쇠락을 재촉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206)

 

6장 자본주의 경제를 제패한 최초의 제국 - 네덜란드

네덜란드 사람들은 사치품들을 유럽 전역에 전해 주거나 원료를 네덜란드로 가져가 호화로운 태피스트리, 무늬를 넣어 짠 비단, 섬세한 리넨, 그리고 정교하게 깎은 보석 등으로 가공해서 엄청난 이윤을 붙인 다음 다시 수출했다.  세계적인 규모의 사치품 무역이 엄청난 이윤을 올리자, 영국, 프랑스, 독일, 베네치아, 그리고 스페인 사람들은 사치품 무역 일체를, 혹은 일부를 장악할 욕심으로 달려들었다. (210)


네덜란드의 국경과 정치적 구성은 세월에 따라서 크게 변해왔기 때문에 명칭에 관련한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중세에는 지금의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북서부, 그리고 네덜란드를 망라하는 영토를 ‘저지국’이라고 알려져 있었다.(211)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펠리페는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네덜란드 말을 전혀 쓰지 않았고 저지국을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그는 또한 매우 열정적인 카톨릭교도였다. 펠리페는 종교개혁을 막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신성한 사명이라고 여기고 ‘유럽의 근대 초기 역사에서 손꼽힐 만큼 극적이고, 잔인하고, 혼란스러운 사건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216)

1625년경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패권을 장악한 강국”,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재패했던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작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쫓겨난 진취적인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덕분에 17세기에 이르러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 되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엄청난 경제성장에 있었다. 여기에다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의 특별한 종교적 관용 정책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218)

 
네덜란드의 경제성장에 기름을 부은 것은 대부분 합스부르크 왕조의 스페인에서 박해를 피해 빠져 나온 유대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에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을 세계적인 무역, 산업, 금융의 중심지로 만들었다.(222)


네덜란드의 제국주의에 연료를 공급한 것은 칼뱅주의가 아이라 이윤 추구였다. 17세기 초 아프리카 서부의 부족민들은 네덜란드의 무역업자들에게 “금이 당신의 신이군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229)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설립자들은 동인도회사의 설립자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상대적인 종교적 관용 때문에 네덜란드연방공화국으로 이주한 부유한 개신교도들이었다. 따라서 서인도회사는 동인도회사에 비해서 호전적인 칼뱅주의적 경향이 훨씬 짙었다. (232)


네덜란드공화국에서는 부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제한이 없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종교적 관용과 높은 임금은 독일, 프랑스, 잉글랜, 스코틀랜드, 심지어는 터키와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유럽 전역으로부터 숙련된 기술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였다.(238)

중세초기의 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끼고 있던 네덜란드는 영토의 팽창이 아니라 상업의 팽창을 꿈꾸었다는 점이다.(241)

 


7장 불관용의 덫 - 오스만, 명, 무굴

종파 사이에는 호의적인 관계가 맺어졌고 다른 종교를 가진 가문들이 정치적, 상업적으로 동맹을 맺는 일은 흔했다. 이슬람교도들과 비이슬람교도들은 종종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250)


오스만제국에서는 어떤 인종, 어떤 사회계층도 이슬람교도가 될 수 있었고 따라서 아스케리가 될 수 있는 길이 모두에게 열려있었다. 개종한 이슬람도 역시 ‘타고난’ 이슬람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출세에 거의 제한이 없었다.(253)

이슬람사람들은 전략적인 관용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첫째, 그들은 전략적 관용 덕분에 트란실바니아에서 예멘과 이란고원에 이르는 피정복민족들로부터 협조, 아니면 하다 못해 묵인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피부색 따지지 않고’ 개종자들을 포용하는 오스만제국이 관용 정책 덕분에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협조적인 피비배민들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농사를 짓거나 군대에서 복무할 인구가 늘어 났을 뿐 아니라, 재능 있는 개인들로 구성된 핵심 세력이 형성되었다.(255)
 

15세기 초반 명나라는 이슬람교도인 환관 정화에게 2만8000명이 넘는 이원을 실은 300척의 거대한 보물성을 맡기도 일곱 차례에 걸쳐서 인도양을 누비는 웅장한 항해를 하게 했다. 당시 명 왕조는 유럽의 그 어느 나라보다 세계를 제패하는 데 유리한 상황이었다.(260)

 

영락제는 또한 국경을 넘어서 중국황실의 권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는 몽골이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북쪽으로 군대를 보내고, 지금의 베트남을 정복하기 위해 남쪽으로도 군대를 보냈다. 수군 제독 정화에게 여러 대양을 탐험하면서 공물을 거두어 들이고, 어느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명왕조의 권력과 위업을 세계에 알리는 특별한 임무를 맡긴 것도 바로 영락제였다.(262)


악바르가 선택한 해결책은 한편으로는 외교정책을 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문화의 결합 정책을 쓰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그랬듯이 알바르는 정적의 가분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268)

악바르 자신이 글을 읽고 쓰 줄 몰랐지만 자신의 조정을 학식과 재주가 넘치는 사람들로 채우려고 애를 썼다.(269)

 
8장 세계 최대의 해상국가 - 영국

1689년에 영국이 채택한 특별한 관용정책 덕분에 유대교도, 위그노교도,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스코틀랜드인, 이 세 개 집단이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영국 사회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들은 금융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영국은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비상했다.(280)

 
1984년 영국 의회는 네덜란드 인들이 개척한 개인적인 투자를 통한 현재적인 공채 제도를 기반으로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했다. 영국의 새로운 유대교도 공동체는 여기서도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284)


위그노교도인 시계 제조공들 덕분에 런던은 세계적인 시계 제조 중심지로 변모했고 코드베크라는 프랑스 마을에서 빠져 나와 모자 제조공들 덕분에 영국은 섬세하고 방수성이 강한 펠트 천을 만드는 비법을 개발하여 직접 코트베크 모자를 생산하기 시작했다.(287)


스코틀랜드 인들은 영국이 산업혁명을 추진한 원동력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1830년대에 스코틀랜드는 철강 사업분야에서 세계를 주도했고 스코틀랜드의 조선 기술은 영국 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295)

영국은 1830년 대에 수익을 남기건 노예무역을 폐지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처럼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침으로써 영국은 중요 경쟁국인 프랑스뿐 아니라 과거 식민지였던 미국에 대해서까지 도덕적 우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299)

 
인도를 통치했던 90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 정책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끊임없이 흔들렸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그 어느 쪽도 오랫동안 우세를 장악하지 못했다. 우선 두 개념을 표방한 두 정당은 런던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흔들어댔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이 우세한 경우에도 영국 출신인도 이주민 사회에 대한 그들의 자유주의적 정책이 훼손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317)

 
과거의 패권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요인은 파괴적인 인종적, 종교적 난투로부터 강력한 개방과 관용의 정책으로서의 극적인 전환, 바로 그것이었다. 영국이 경쟁 상대도 없이 세계 최고의 지위를 누리던 시기가, 우대교도들, 위그노교도들, 스코틀랜드 인들이 국회의원, 수상 등 영국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참여했던 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특히 유대교도들과 스코틀랜드 인들은 영국이 해외식민지를 정복하고 관리하는 일을 도와 주었을 뿐 아니라 영국 산업, 금융, 그리고 해상력에서 우위를 달성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325)

 

9장 최첨단 과학 기술의 개척자 - 미국

미국은 1789년 종교와 자유를 인정했으며 더 나아가 국교를 두지 않음을 헌법상의 원칙으로 공표하는 대단한 혁명적인 행동을 했다. 그러나 미국은 대체로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펼치면서도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 동안 특정한 인종 혹은 민족 집단에 대해서 극단적인 불관용의 태도를 보였다.(332)

 
미국은 애초부터 종교적 관용이라는 계몽주의적 원칙 위에 건설되었다. 종교적 관용은 미국 사람들이 네덜란드와 영국에게서 물려받은 후 계속 확장시켜온 정책이었다. 18세기 말 종교적인 관용의 측면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340)

 

유럽의 무수한 ‘두뇌 유출’덕분에 19세기의 미국은 기술의 벽지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산업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미국은 기회의 땅으로 만든 주요한 요인은 상대적인 개방성과 다원주의였다. (347)

미국은 유럽 출신의 다양한 대중들은 환영했지만, 아메리카의 토착 원주민들은 학살하고 차단하고 내 쫓았다. 전략적인 관용의 혜택에서 배제 당한 사람들은 원주민들만이 아니었다. 여성들은 투표할 수 없었고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배제 되어 있었다.(353)


관용은 여러 측면에서 미국이 초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갖추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0년 이전이 개방적인 이민정책 덕분에 미국은 인력 면에서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357)

유대인 과학자들이 돌연히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미국은 “순수 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933년 나치에게 전 재산을 몰수당한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정치적인 자유와 관용, 법 앞에서의 평등이 지켜지는 땅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358)

미국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훨씬 많은 자유를 제공했지만,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미국의 공약은 1950년대에 마녀 사냥을 주도한 매카시 때문에 훼손되고 말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련은 종교의 자유와 이데올로기의 자유를 존중하지는 않았지만, 인종적, 문화적 보편성을 자랑스레 내세우고 있었다. (359)

 

10장 추축국의 야욕 - 독일, 일본

나치 정권의 본질을 ‘불관용’ 이라고만 규정지을 수는 없다. 나치의 모든 정책에는 인종적 증오가 깊이 스며 있었다. 나치의 주용 공약은 게르만 민족주의를 본질로 했으며 경제 정책은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380)


그러나 나치 정권은 ‘열등한’ 민족들을 제거하는 데 총력을 기울임으로써 당장 치명적인 부담을 안게 되었다. 우선 ‘새로운 질서’ 안에 편입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처형을 집행하려면 막대한 자원과 시간, 그리고 인력이 필요했다.(381)

 
일본 사람들은 “지배자 민족”으로서 대동아공영권 안에서 지도력을 행사할 도덕적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사람들은 ‘아시아’를 매우 넓게 정의했다. 일본의 전시 지도 제작자들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아시아 대륙의 일부로 그렸고 일본관리들은 미국을 아시아의 ‘동쪽 날개’라고 일컬었다.(386)


일본은 국수주의 사상가들은 일본의 열등한 지위를 뒤집기 위해 신에게 비롯한 황실의 혈통, 일본 사람의 ‘순수성’과 미덕을 강조하는 정교한 신화적 역사를 고안해냈다.(387)

 
불관용이 영향력은 매우 강력하다. 이슬람교의선정주의 같은 종교적인 근본주의를 제외한다면, 인종주의적 국수주의만큼 강력한 (398)

 

11장 21세기 새로운 도전자들 - 중국, 유럽연합, 인도
 

중국이 차기에 세계 최대강국으로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전략적인 관용의 측면에서 미국을 앞질러야만 한다. 하지만 중국은 전제주의적일 뿐 아니라 불량국가들에 대해서 우호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404)

중국은 3000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오늘날 유럽 연합이 목표로 삼고 있는 성과를 이루어왔다. 다시 말하면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으로 이질적인 배경을 가진 수많은 개인들을 단일한 정치적 정체성안에 소속시키고 통합시켜온 것이다. 중국문명 자체가 다양한 문화의 거대한 융합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해온 것이다.(405)

지금 유럽 연합은 4억 5000만 명의 사람들을 통합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중국은 세계 인구의 5분의 1인 13억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충성심과 민족적 정체성을 장악하고 있다.
(407)

나의 논지를 따른다면 중국은 초강대국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세계일류의 인재들을 끌어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이해 세계를 제패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그러나 중국은 민족을 토대로 한 전형적인 비이민자 국가라는 점이 그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418)

 
유럽연합의 진정한 목적은 미국과 경쟁할 수 있을 만큼 힘을 만들어내는데 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유럽연합이 채택한 관용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미국의 관용 전략과 경쟁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424)

 
유럽연합의 관용은 원칙적으로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한 관용이다. 유럽의 과용은 유럽을 통합시키는 전략일 뿐이지 제3세계의 이민자들을 유럽으로 끌어들이거나 유럽 국가를 미국과 같은 다민족 이민자 사회로 변화시키려는 전략이 아니다.(424)

 
인도가 세계경제포럼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인도가 잠재적인 세계강국이라는 주장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인도는 과학 기술 분야에서 연간 40만 명의 학위 보유자들을 배출하고 있고 영어를 사용하는 다수의 전문가들을 확보하고 있으며 최근 4년 동안 평균7퍼센트의 경제성장을 당성하고 있는 등 많은 학자, 정치인, 투자자로부터 21세기의 주목되는 나라로 평가 받고 있다.(434)
 

인도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사항은 바로 인도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이다. 인도는 미국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민족적, 종교적으로 다양한 나라이다.(437)

 
인도도 엄청난 진보를 이루고 있다. 인도는 독립 이후 100년의 역사를 가진 카스트제도를 서서히 폐지하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다원주의 국가를 유지하는 등 역사상 유례없는 성과를 이루고 있다.(441)


12장 제국의 미래

모든 초강대국들은 반드시 한가지 근본적인 문제 즉 내가 ‘접착제’라고 표현 했던 문제에 직면 한다. 세계 제패의 본질이 변화된 오늘날에도 미국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던 접착제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21세기 미국의 권력에 대해 전망할 수 있는 열쇠는 이런 옛 것과 새것의 결합에 놓여 있다.(449)

 
성장하는 강국이 박해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로 자극을 개방하고 관용의 제도를 세계 모든 나라에게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패권국가가 미국 시민권을 외국 주민들에게까지 확장하거나 그들과의 공통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 세계의 다른 모든 나라들에게 자국의 관용의 제도를 전파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461)

 

미국 제국을 건설하는 것, 즉 다른 나라들의 정권을 변화시키고 미국식 제도를 강제하는 일에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쓰는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고 세계의 패권을 지키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니는 것 또한 다른 사이에서 미국의 입지를 위태롭게 할 뿐이다.(467)


미국의 초기 역사와 과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의 역사를 돌아보건대, 오늘의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숙련도와 훈련도, 그리고 노하우를 갖춘 이민자들을 찾아내고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적인 유인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미국은 최첨단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이민정책의 유일한 강령으로 삼고 있는 독일을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미국은 모든 계층의 이민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고 선착순 혹은 추첨방식의 이민 경로를 대폭적으로 열어놓아야 한다.(472)

만일 미국이 건국 이후 성공에 성공을 거듭할 수 있었던 비결을 재발견하고 제국을 건설하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다면 몇 십 년이 지난 후에도 세계의 초강대국, 그것도 강압과 군사력에 의지하는 초강대국이 아니라 기회, 역동성, 도덕성을 갖춘 초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다.(476)


ㅁ 내가 저자라면

최근 전 세계의 패권이 어디로 흘러갈지에 대해 많은 관심이 모여진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지고 새로운 패권국가가 나타날 것인가? 아니면 미국이 현재의 위기를 떨치고 전환점을 돌아 성공적인 재도약을 할 것인가?

이러한 시대적인 이슈때문인지 최근 역사로부터 ‘大國’ 의 선례를 통해 최전성기의 제국의 특징과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책이 유행이다. 대표적인 책이 ‘대국굴기’와 ‘제국의 미래’일 것이다. 이 두 책은 주제는 비슷하지만 그 태생은 전혀 다르다

<대국굴기>는 총 12부작의 다큐멘터리에서 마지막편에 ‘중국’편을 넣은 그 의도처럼, 미국에 이어 새로운 초강대국을 꿈꾸는 중국인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책이고, <제국의 미래>는 이민자 출신의 미국의 지식인이 앞으로 미국이 다시 재도약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 방법론을 소개한 책이다

그래서인지 <대국굴기>의 산발적인 내용전개에 비해 <제국의 미래>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의 중요한 모티브 ‘관용’을 일관적으로 제시하며 다양한 패권국가들의 사례를 들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잘 준비한, 그리고 잘 만들어진 저자의 논설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관용과 다원주의’가 초강대국으로 가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라고 일관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제국의 패망의 원인 역시 섞이지 못할 이민족에 대한 관용으로 이로 인해 반목과 불신이 생겨나 결국 붕괴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자료수집과 일관적인 논리 전개는 이 책의 강점이나 동시에 하나의 논리를 위해 그에 맞는 자료를 수집하고 제국성공의 법칙을 일반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
추아 교수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지만 스스로의 논리를 포장하기 위해 다양한 사례를 제시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이러한 일반화의 함정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제국으로 가는 로드맵의 큰 줄기는 있으나 그 외 세부적인 줄기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동시에 현재 세계의 패권을 잡고 있는 일부 국가 또는 경제블럭에게 시사점을 줄 지언정 그 외 국가들에게는 제국으로 가는 길을 한정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추아 교수가 던지는 충고는 가슴에 새겨들을만 하다. 어느 사회에나 ‘관용’의 정신은 필요하다. 미래 국가의 모습은 지리적 제한이 큰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인적자원과 그들을 성장시킬 수 있는 사회, 정치적 제도이다.  단일민족국가라는 한국의 수식어는 수십년 후에는 없어질 수도 있다.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국제결혼과 이로 인해 태어난 혼혈 세대들은 점차 늘어날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관용과 포용의 정신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만들어야 함은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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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2009.03.08 23:58:12 *.168.109.134
1.에이미 추아 그는 어쩌면 제국의 미래의 주인공 일수도 있다.
2.저자 자신의 논리를 포장하기 위해 사례를 제시할 수도 있다는 두가지 내용에 공감이 갑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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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9 08:59:47 *.255.182.40
저도 이승호님 댓글에 공감하고요, 특히 '로드맵의 큰 줄기는 있으나 그 외 세부적인 줄기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도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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