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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9일 00시 37분 등록

에이미 추아에 대해서

 

에이미 추아 교수는 중국계 미국인 2세다. 아버지는 필리핀에서 태어나 MIT에서 유학한 뒤, UC 버클리대 교수로 재직했다.저자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맥아더 장군의 승리로 해방을 맞은 두 부모님을 두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해방시켜준 미국 그리고 명문MIT를 입학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온 가족들은 이민자 그것도 중국인 이라는 편견과 고독을 이겨내야 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함께 국외자로 출발해서 미국을 발견해 나가며 차츰 미국인이 되어갔다.

아버지는 31세의 나이에 UC버클리대학교의 교수가 된 성공한 이민자 즉 아메리칸드림을 달성하여
비주류에서 주류계열에 입성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들은 미국에서의 성공 속에서도 중국인이라는 전통과 혈통의 그들 나름
자민족중심주의를 지켜오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다문화, 다인종 사회속에서 그들 나름의 존재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
하나의 방법 이기도 하였다.

그런 집안 문화 속에서도 저자 자신은 유대계 미국인과 결혼함으로써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한 오랜 관습을 벗어버리고 그 자신이 보다 미국적인 사고와 가치 즉 자유와 가능성에 대한 희망적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개인사가 증명하듯이 이민족의 비애와 더불어 성공할 수 있는 토양이 된 미국이라는 문화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미국의 존재성과 가치를 재확인하고 국제적인 문제와 해결점을 찾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2003년에 출간한 불타는 세계는 저자 자신이 체험한 이민자로서의 경험과 성공한 미국인으로서 미국의 세계화 정책에 대한 문제점을 진단하고 있다. 나라별 갈등과 지역 또는 인종별 갈등의 문제점을 꼼꼼히 지적하고 있다.

 

제국의 미래는 이민자 신분의 자신과 성공한 미국인으로서의 자신을 되돌아보고, 초강대국인 미국이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으며 어떤 해결을 통해 강해질 수 있는 지 시사하고 있다.

 

추아 교수는 『제국의 미래』 후기에서내 가족이 번영하고 우리 방식대로 변화하면서 미국인이 될 수 있게 해준 미국의 관용에 이 책을 바친다고 했다.

그것은 미국 안에서 길을 찾았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시민으로서 미국에 대한 가능성과 위험을 미리 경고하되 미국이라는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저자의 의지가 느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저자라면

 

제국의 미래는 이민족의 아픔을 딛고 성장한 미국이라는 나라의 자유와 가능성에 대한 저자

자신의 애국심을 바탕으로 당면한 미국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모색해 보는 관점에서 논지가 시작된다.

 

2001 9.11이후 초강대국인 미국이 다자주의에 직면한 위상과 역할에 대한 위협을 해결하는 데 있어 과거 초 강대국들의 성장과 몰락 과정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들을 통해

미국이 새롭게 변모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관점이 주된 논지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종,종교,민족,언어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회에 참여하고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일컫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관용은 존중이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한다.

 

또한 저자의 말처럼 세계적인 패권을 다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회가 절대적인,

영원불변의 기준으로 볼 때 관용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경쟁자들과 비교해서 더 관용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중국, 유럽연합 , 인도등 새로운 강대국들과의 패권타툼에서

누가 더 관용적이냐 하는 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초강대국의 필수조건이며

이것이 현 미국을 새롭게 변모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임을 제시한다.

 

저자는 역사속의 초 강대국들 페르시아>로마>>몽골을 통해 고대제국의 관용의 의미

즉 권력을 위한 전략적 관용의 법칙을 확인하였으며, 스페인>네델란드>영국의 예를 통해 과거의 군주들의 특권이 아닌 인권의 기본요소로 활용된 관용의 의미를 확인하고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어떠한 관용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논지를 펼치고 있다

 

각각의 초강대국을 시대순으로 나열하면서 관용을 통해 성장을 얘기하고

불관용으로 인해 쇠퇴하는 역사를 증명해 내면서 저자는 접착제라는 화두를 지속적으로

던지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을 읽어나가는 데 있어 결국 미국의 당면한 해결책을 염두해 두고

오랜 역사를 통해 해결방안을 독자와 함께 모색해 보자 하는 의미를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치 미국의 지속적 성장과 안정에 동참하자는 저자의 의지를 증명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과거에 번영을 누렸던 초강대국들은 하나같이 해당 지역 지도층의 협조를 구하고 그들을 등용하는 등 이들 지도층에게 초강대국의 성공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초강대국에 속해 있다는 귀속감을 제공했다

 이런 접착제가 바로 초강대국의 강성과 장수의 비결이었다라고 말하면서

미국이 접착제적인 요소를 갖추는 데 있어서 저자의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현재를 인정하고 다른 나라와의 연대감, 즉 결속감과 공동의 목표의식을 창조함으로써 미국이 이 세계에서 존재감을 갖고 성장할 수 있는 방법임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성장의 토양이 된 그 사회를 지키고자 하며 미국적 관용의 혜택에 대한 가치를 높게 보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의 혼돈을 초래한 미국만이 그 혼돈을 되돌릴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포용하면서 그 질서의 힘이 결국 미국에 있음을 역설적으로 알리고 있다.

 

여기서 나는 관용이라는 단어의 모호함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동양적인 사고에서는 관용이 덕에 가깝고 서양에서의 관용=TOLERANTIA의미로 해석되어 진다는 것이다. 저자의 태생이 중국인이고, 미국적인 교육을 받았기에 또한 관용의 의미를 다각적으로 해석하기에

관용이 동양적인 정서에서 이해되는 측면에서 서양의 관용을 해석하는 관점으로

보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론 대단히 이해하기 쉬운 관용이었다는 것이다.

 

수수께끼처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저자의 의도인지 옮긴이가 관용에 특별한 의미를 두기 위해

다의적인 해석을 유도하도록 한 장치인지는 원서를 보지 못해 유추할 수 밖에 없으나

관용이라는 사전적 의미에 토를 달아주었다면 모호함 없이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었던

아쉬움이 남아있다.

 

관용(TOLERANTIA) : 자기와 다른 종교,종파,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과 권리를 용인하는 일.

아시아 지역에서는 이종교가 공존하는 일이 많아 관용이 통례로 되고 있다.

이에 비해 중세 가톨릭교에서는 유일한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단과 이교도의 비관용이

잇달았다. 이단심문,마녀재판,화형등이 그 예이다.

서유럽 근대국에서 관용(신앙의 자유)사상이 정착된 것은 J로크 등의 주장을 돌파구로

한 계몽주의 시대(18세기) 이후의 일이다.-두산백과사전

 

 

내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문 > 세계 제패의 비결

많은 저술가들이 고대의 제국과 현대의 제국, 전제적인 제국과 관대한 제국 등 제국에 관한 여러 글들을 썼다. 그들은 그리스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제국이 성장과 쇠퇴에 관해 설명해왔다. 투기디데스는 민주주의야말로 아테네가 몰락한 원인이라는 의미심장한 주장을 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기독교를 로마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최근 폴 케네디는 주요한 강국들의 몰락 원인을 제국주의적 팽창으로까지 넓혔고,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붕괴라는 책에서 환경파괴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9.11공격,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침공 이후에는 기대조 혹은 비난조로 쓰인 제국과 제국주의에 관한 책들이 거의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6]

그러나 초강대국이라는 매우 희귀한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책은 아직까지는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초강대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막강한 힘을 축적하여 세계를 지배했던 극소수의 사회들을 이르는 것이다.[6]

 

이것은 요즘 시대와 관련이 깊을 뿐 아니라, 어떤 역학에 의해 움직였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특별한 범주이다. 한 사회는 어떤 경로를 거쳐서 단순한 대국이 아니라 세계적인 패권을 휘두르는 강국이 되는 걸까? 한 사회가 그런 패권을 손에 넣었다면, 무엇이 그 패권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과거 초강대국들의 성장과 몰락 과정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들이 들어 있다. 이 교훈들은 미국과 과거의 초강대국들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21세기에도 커다란 함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7]

 

이 책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초강대국들은 서로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적어도 해당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절대적인 우위에 오르기까지는 하나같이 대단히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나라들이었다. 모든 초강대국들에게 관용은 패권을 장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여기서 놓치질 말아야 할 것은 쇠퇴의 씨앗을 뿌린 것 역시 관용이었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의 경우 관용은 결국에는 극적인 변화 지점을 건드려서 반목과 폭력을 유발했다.[7]

 

한 사회가 한 지방이나 지역이 아닌, 전 세계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기술적,군사적,경제적인 면에서 세계의 최첨단에 서 있어야만 한다. 어떤 역사적 상황이라고 해도, 세계유수의 인적 자본이라는 것은 어느 한 장소나 어느 한 인종 혹은 어느 한 종교집단 안에서 발견 될 수 없는 것이다. 한 사회가 세계적인 차원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인종, 종교,배경을 따지지 않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능력과 지혜를 갖춘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야만 한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의지해 온 것이 바로 관용이었다.

내가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권과 관련된 현대적인 의미의 관용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관용은 정치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의미한다. 내가 앞으로 사용하게 될 관용이라는 단어는 수단적인 의미에서의 관용이든, 전략적인 의미에서의 관용이든, 아주 이질적인 사람들이 특정한 사회에서 생활하고 일을 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종,종교,민족,언어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회에 참여하고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일컫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관용은 존중이 포함되지 않는다.[10]

 

요컨대 이 책의 핵심적인 개념은 상대적인관용이다.세계적인 패권을 다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회가 절대적인, 영원불변의 기준으로 볼 때 관용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경쟁자들과 비교해서 더 관용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11]

 

미국은 관용을 통해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성장한 전형적인 사례일 것이다.

이들 이민자들의 노동력과 재능은 서부 개척에서부터 산업의 급성장,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이어지는 미국이 성장과 성공을 추진한 원동력이었다.[12]

 

인류역사상 가장 큰 폭발을 일으킨 촉매가 되었던 실리콘밸리는 놀랍게도 어느 이민자의 독창적인 발명품이었다.[13]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에는 전 세계적으로 거의 황홀감에 가까운 낙관주의가 퍼져나갔고, 당시에는 앞서 말한 불확실한 기류는 존재하지 않았다. 공산주의는 실패했고, 권위주의는 신망을 잃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끝이라고 선언했다.[14]

 

자유민주주의는 다수에게 주어진 유일한 게임이었고, 전 세계의 세계화,시장화,민주화를 주도하는 지도자의 역할은 당연히 미국이 맡았다.[14]

 

이 시기에 가장 큰 특징은, 미국은 전쟁을 유발하는 산업이나 군사적 강압에 참여하지 않을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는 점이다.[14]

 

그러나 2001년9월11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 후 한달이 채 못되어 초강대국은 전쟁에 돌입했다. 일 년 후 미국은 미국 군사력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고 선제 행동을 할 권리를 표명하고 미국단독의 군사적 우월성을 유지한는 데 전념할 것을 천명하는 내용의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을 발표했다.[15]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경쟁 상대가 없는,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독일과 일본을 점령하고 재건했다. 미국이 그때에도 그런 성공을 거두었다면, 예상조차 어려운 테러리즘의 위협에 직면해 있는 9.11이후의 세계에서도 똑 같은 일을 하지 못하란 법이 어디 있는가?

이후 이런 주장은 엄청나게 많은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았다.[16]

 

뉴욕타임즈의 컬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이야말로 가장 두드러진 사례이다. 프리드먼은 이라크에 대량 살상무기가 은닉되어 있다는 부시 행정부의 주장을 믿지 않았고, 미국 석유 관계자들의 입김이 대 이라크 외고에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른 사담 후세인을 내쫓고” “이라크 국민과 파트너가 되어” “ 자유가 보장되고 여성에게 공민권을 부여하며 현대적인 교육이 실현되는 안정된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이라크 전쟁이 필요하다고 옹호했다.[17]

 

그러나 제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든 민주주의국가건설이라는 말을 사용했든 이들 저술가들이 하나같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역사이다. 지금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비록 새로운 형태이기는 하지만, ‘제국의 연륜만큼이나 오랜 연륜을 가진 문제, 즉 과거의 세계적인 패권국가들 대부분을 무너뜨린 근본적인 문제이다. 나는 더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 문제를 접착제라고 부를 것이다.[17]

 

새뮤얼 헌팅턴은 미국은 한때 미합중국이었던 영토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빼고는 공통점이 거의 혹은 전혀 없는인종적,민족적,문화적,정치적 집단들의 느슨한 연합으로 진화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18]

 

나는 미국사회가 무수한 이질적 하위 공동체들을 결합시킬 접착제를 가지고 있는가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헌팅턴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18]

 

그러나 헌팅턴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있다.

첫째,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초강대국들의 핵심 집단이 불관용으로 돌아서서 자신의 참된정체성을 다시금 옹호하면서 토착문화보호주의나 호전적인 배외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이방인들은 물론 분열과 붕괴의 먹이가 되고 만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정체성을 하나의 고유한 인종집단 혹은 종교집단에 묶어놓으려는 시도는 미국의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헌팅턴은 어떤 인종 혹은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도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즉 앵들로색슨계와 백인 개신교도)의 가치관을 채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의 참된 정체성을 WASP 문화와 시민적 가치관이라고 규정하는 헌팅턴의 태도야말로 미국의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언행이다.

특별히 주목해야할 사실은, 헌팅턴은 미국이 안고 있는 접착제의 문제는 국내가 아니라 국외에 존재한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경내에서만 따져보면, 미국은 인종적,종교적 측면에서 중립을 지키는 강력하고도 관대한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온갖 인종, 종교, 배경을 가진 개인들을 미국인으로 통합시키는 데 훌륭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미국은 미국인들에게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19]

 

경쟁상대가 없는 군사력과 엄청난 경제력,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다국적기업들, 소비재브랜드들, 드리고 문화를 통해서, 미국의 패권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감지된다. 그리고 문화를 통해서, 미국의 패권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감지된다. 국경 밖에서 보면,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 전력의 수십억 인구를 미국에 단단히 묶어놓을 수 있는 접착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19]

 

역사를 돌이켜보면, 초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외국 국민들의 충성, 그것까지는 아니라도 하다못해 묵인하더다도 확보할 방법을 찾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군사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20]

 

로마제국은 군사력만을 동원했을 경우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피정복민들을 로마의 생활 궤도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로마는 고대의 제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멀리 떨어져 있고 몹시 이질적인 민족들에게 엄청난 흡입력을 발산하는 정치적 동맹과 문화상품을 제공했다.[20]

 

현재 미국 정부는 중동에 민주주의를 세우겠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라크 사람들이나 시리아 사람들에게 차기 미국 대통령 선거권을 줄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미국이 담당하고 있는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서의 역할과 스스로 공언하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횃불이라는 역할이 서로 충돌하면서 광범위한 반미주의가 나타나고 있다.[21]

 

현재 미국은 전세계의 수십억 인구를 마주보고 있다. 대부분 가난한 그들은 미국인이 되고는 싶지만 미국의 지배를 받기는 싫어한다. 그들은 귀로는 미국의 자유를 상징한다는 말을 무수히 듣지만, 현실에서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만 추구하는 모습을 볼 뿐이다.[21]

 

현대의 미국은 안타깝게도 미국의 지배를 받는 세계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로마보다는 야만적인몽골제국에 훨씬 가깝다.[21]

 

사회과학 전문 용어 가운데 선택적 편견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논지에 부합되는 사례들은 선택하고 그렇지 못한 사례들은 무시하여 자신의 논지를 증명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나는 선택의 영역을 최대한 넓혀서 세계적인 패권국가의 위상에 부합하는 역사 속의 사회들을 모두 고찰하는 방식으로 선택적 편견을 피해가려고 노력했다.[21]

고대와 현대 사이에는 기독교 왕국과 이슬람 왕국이라는 거대한 종교 제국들이 부상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참된 신앙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기도교와 이슬람교는 고대의 종교들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불관용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경전의 승인이 있는 없든 종교적반목, 유혈사태, 전쟁이 1.000년 동안 이어졌다.[22]

 

서양에서 종교전쟁의 시대는 서서히 계몽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관용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도적적인 덕목, 심지어는 의무라고까지 보았다. 종교 박해는 위험한 전략일 뿐 아니라, 양심의 자유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현대적인 관용의 개념이었다. 관용은 더 이상 타산적인 군주들의 특권이 아니라, ‘인권의 기본적인 요소로 여겨지게 되었다.[23]

 

새로운 관용덕분에 유럽에서는 1.000년만에 처음으로 초강대국들이 출현했다. 한편, 평등권,기본권,개인의 자유라는 원칙을 가진 계몽주의는 미래의 모든 제국들에게 심각한 골칫거리를안겨주었다.[23]

 

계몽주의 이전의 대표적인 유럽 국가인 중세의 스페인은 종교적 다양성 면에서 특이한 나라로, 인구 가운데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가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다.

스페인은 종교적 학살, 추방, 종교재판을 통한 박해는 스페인 사회를 파괴하고, 스페인의 번영을 약화시켰다.스페인은 중세의 거대한 유럽 국가들이 기독교의 불관용 때문에 세계적인 패권을 장악하지 못하게 된 과정을 생생하게 입증하는 사례이다.[23]

 

네델란드 연방공화국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종교적 광신에 휩쓸려 있던 1579년 건국 헌장에 종교의 자유를 포함시켰다. 네델란드 연방공화국은 그 덕분에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고, 당시로서는 가장 앞서가는 이동성을 확보함으로써 생산,상업,금융에서의 우위와 세계적인 패권이라는 희귀한 조건을 장악했다.[25]

 

영국인들을 스스로 계몽적이라고 여겼지만 식민지에 대한 인종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고, 이 인종주의는 제국 전역에 걸쳐서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했다.[24]

 

2,500년간, 역사상의 모든 초강대국은 하나같이 똑 같은 두가지 도전에 직면해왔다.

그 한가지는 자국의 성장에 연료를 공급했던 관용을 유지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자국의 지배를 받는 민족들에게서 충성심, 아니면 하다못해 묵인이라도 확보할 수 있는 공통의 결속력을 형성하는 문제이다.[25]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것뿐이다.[25]

 

1장 최초의 패권 국가, 페르시아-아케메네스

 

아케메데스 왕조의 군대 역시 메디아 출신의 지휘관, 페니키아 출신의 해벼으 리비아 출신의 전차병, 시시아 출신의 기병, 에티오피아,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그리고 제국의 전역에서 모여든 수십만 명의 보병들로 이루어져 세계 최강이었다.[34]

 

키루스가 썼던 전략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참수전략이었다. 그러다 그는 지도자의 머리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지도력을 잘라내는 전략을 썼다. 키루스는 새로운 왕국을 정복하면, 그곳의 통치자를 내쫓되 그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장해주고, 그 대신 주 혹은 군을 다스리는 총독인 사트라프를 세웠다. 사트라프는 대부분 페르시아 귀족이었다. 하지만 키루스는 사트라프 치하의 백성들에게는 거의 간섭하지 않고 그들이 고유의 신들과다양한 문화를 누릴 수 잇게 했다.[39]

 

가장 놀라운 것은 키루스의 종교적 관용일 것이다. 그는 피정복민의 사원,종교의식, 그리고 신들을 놀라우리만큼 존중했다.[39]

 

키루스는 군대를이끌고 바빌로니아에 입성하자마자, 그곳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마르두크 신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40]

 

오늘날의 일부 예찬가들은 그를 인권의 창시자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그러나 키루스의 정벌은 일부의 고대 자료들이 밝히는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휠씬 가혹한 싸움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의 역사학자들 대부분은 키루스가 사용했던 관용 정책은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전략과 편법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43]

 

키루스는 해당지역의 신을 포용함으로서 정당성을 획득하고, 해당 지역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함으써 피 정복민의 저항과 반란 가능성을 줄였다.

아케메데스 왕조에서의 관용은 그저 효과적인 전략이었을 뿐이다.[44]

 

다리우스는 왕위에 있는 동안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의 과뇽이라는 아케메데스 왕조의 전통을 존속시키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스스로에게모든 민족을 아우르는 여러 나라의 왕혹은 온갖 혈통을 지닌 민족들의 왕이라는 직함을 붙였다[47]

 

피정복민의 지배층은 대부분 페르시아 왕을 이방의 통치자나 압제자로 보지 않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 그리고 사회질서를 지켜줄 인물로 보았다.[48]

 

제국을 이루는 다양한 민족으로부터 최고의 인력을 동원하는 것은 다리우스만이 아닌 아케메네스 왕조의 모든 제왕들이 보여준 특징적인 전략이었다. 아케메데스 궁정은 이집트 출신의 의사들, 그리고 출신의 과학자들, 그리고 바빌로니아 출신의 천문학자들을 환영했다.[49]

 

아케메네스 왕조는 해당 지역의 법률과 전통을 포용하고 해당 지역의 언어, 종교, 예식을 용인하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피정복민의 반항과 반란을 최소화했다. 아케메데스 왕조는 인종이나 종교에는 개의치 않고 제국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장인들, 사상가들, 노동자들, 전사들을 활용하여 문화적 다양성을 통합력과 국력의 원천으로 변화시켰다.[52]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그세스는 선대의 왕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페르시아의 신 아후라 마즈다를 다른 모든 신들 위로 격상시켰다.[55]

 

아케메데스 제국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후기로 접어들면서 아케메네스 왕들의 잔혹성과 억압이 강화된 것이 피정복민의 반란과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지지를 유발했다고 설명한다.[57]

 

그라나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은, 키루스와 다리우스가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관용이 후일에 싹틀 불관용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는 점이다. 세계 최초의 패권 국가였던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은 그 후 세계를 제패했던 강대국들이 직면했던 것과 또 같은 문제에 직면했고,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58]

 

애초에 이들 피정복민족들 가운데 일부는 문화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언어학적으로 페르시아인과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페르시아는 쉽게 그들을 흡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이 팽창함에 따라 병합되는 민족과 문화의 수는 크게 늘었지만, 이들 민족과 문화는 페르시아의 대군주 밑에서 여전히 별개의 공동체를 유지했다[58]

 

아케메네스 왕조에는 다양한 민족들의 마음을 움직여 공동의 규범을 옹호하게 할 만한 특성이 없었다.[58]

 

제국의 이질적인 민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관념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중되어 있는 권력은 결국 지배력을 잃게 되었다.[59]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에 입성했을 때 이방의 정복자로 처신하지 않고, 상해당한(과거에는 적이었던) 다리우스의 원수를 갚은 복수자이자 아케메네스 왕조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처신했다.[61]

 

알랙산드로스는 그리스 병사들과 함께 앉았고, 그 옆에는 페르시아 병사들이 앉았으며, 그 옆에는 다른 민족 출신의 병사들이 앉았는데, 그 순서가 뒤섞이는 일은 전혀 없었다.[65]

 

2장 팍스로마나, 세계인의 탄생 ? 로마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전쟁 조직에 지나지 않았다.로마제국은 하나의 관념이었다.[68]

 

로마제국의 외떨어진 변방에 사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로마인이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도 그들은 로마인이 되었다.[68]

 

로마가 세기의 경쟁자들을 뿌리치고 당대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던 광용 정책을 파헤치고, 로마제국의 남다른 응집력을 뒷받침한 여러 요인들을 조명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20년 가까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대목이다.[71]

 

트라야누스는 속주 출신으로 로마황제가 된 최초의 인물인데, 그의 즉위는 제국의 고위직이 인종과 국적을 따지지 않고, 교양을 갖춘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72]

 

야만인이나 미개한 민족출신도 정치 과정에 참여하고 제국의 권력과 명성에 한몫할 수 있었던 독특한 문화를 갖추고 있었다.[72]

 

로마인들이 자국의 힘을 전 세계로 확장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주민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73]

 

웅변가 키케로는 기원전 5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로마제국의 건설과 로마 시민들의 명성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사실 있다. 그것은 바로 로마의 창건자인 로물루스가 사비니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적들을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려서라도 나라를 키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는 점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로물루수의 선례를 따라 이방 민족에게 계속 시민권을 내주었다.”[75]

 

후일 퀸투스 롤리우스 우르비쿠스로 알려지게 된 이 소년은 아프리카 북부를 떠나 아시아,유대,다뉴브강 유역,라인강 하구 지역을 전전하면서 꾸분히 신분 상승을 거듭했다. 결국 그는 브리튼의 총독이 되었으며, 황제의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에 입성하여 제국의 경계를 넓혔다. 그는 말년에 로마의 총독이 되었다.[83]

 

로마에 속한 다양한 민족들에게 로마는 코무니스 파트리아즉 공동의 조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87]

 

로마인들은 또한 유용하다는 판단이 서기만 하면 서슴없이 다른 민족들의 전통과 지식, 관습을 받아들였다.[87]

 

로마문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로마 시민권이라는 유혹이었다.[88]

 

지역 사회의 로마화는 귀족 계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공직자들은 대개 인종이나 민족에 관계없이 당연히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이런 식의 시민권 부여 정책을 통해 각지의 지도 계층은 서서히 로마의 체계에 동화되었고 로마 법률에 동조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이익이 제국의 존속에 결부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90]

 

로마 시민권은 상류 계층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하류 계층 가운데에도 군복무를 통해서 시민의 신분으로 편입되는 사람들이 많았다.[90]

 

그보다 훨씬 더 흔한 방법은 비전투 부대에 참여해서 로마 시민이 되는 것이었다. 25년간 비 전투 부대에 복무하면서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90]

 

로마가 다른 민족들을 자국 내로 편입시키는 전략을 쓰면서 추구했던 목적은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여 다양성을 고취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민족들을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로마의 관습, 생활양식, 풍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인종적인 혈통에 관계없이 어떤 집단이든 완전히 제국에 통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로마는 너그러운 나라였다.[91]

 

로마는 모든 민족을 하나의 파트리아, 즉 하나의 조국에 속하게 하는 것이다.[92]

 

그것은 일종의 예속이었지만 그와 같은 경험이 없었던 브리튼 사람들은 그것을 후마니타스즉 문명이라고 불렀다.[93]

 

요컨대 로마 사람들은 다른 문화권의전통을 존중하는 문화 상대론자들이 아니었다. 로마의 관리들은 정복한 민족의 지도 계층에게 로마의 규격화된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고, 이에 순응할 경우에는 이를 보상해주는 정치,경제 제도를 만들어 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출신 민족과 인종은 로마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국으로 흘러드는 새로운 민족들의 끝없는 대열을 통합시키고 동화시키는 로마의 적극성과 능력, 이것이야말로 로마가 위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93]

 

로마 사람들은 각 지역의 신들을 제국의 종교 제도 안에 통합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유일신 종교로서 로마의 우상숭배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대교와 기독교의 반격은 매우 격렬했다.[95]

 

로마의 관용정책은 전성기에는 로마에 이롭게 작용했다. 그러나 동쪽과 북쪽의 민족들은 로마의 관용정책 덕분에 예전의 사회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나율성을 누리면서 상대적으로 로마에 동화되지 않은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99]

 

그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는 전성기가 지난 로마에서 종교적 박해와 인종적 불관용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불관용은 로마쇠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제국의 분열을 재촉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100]

 

로마가 기독교로 기울어짐에 따라 불관용의 강도가 점점 높아졌다.[102]

 

이로써 중세의 폐쇄적인 기독교 사회가 출현하게 되었다.[102]

 

4세기말 로마는 처음으로 피지배민족들에 대한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했다.[104]

 

100년전 인종이론이 한창 유행할 때에는 피정복민족들의 혈통이 순수한로마의 혈통을 오염시키고 희석시켰기 때문에 로마가 몰락했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다.[106]

 

로마는 종교적인 불관용과 인종적인 불관용이 결합하면서 로마는 전쟁과 내란에 휩싸였고, 전쟁에 서도 내란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제국은 로마의 혈통,문화,종교의 순수성을 유지한느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다시 말해 로마는 클라우디우스와 기번이 고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실책이라고 꼽았던 행동을 되풀이했다. 바로 그 시점부터 로마는 분열과 망각의 소용돌이로 빨려들기 싲가했다.[106]

 

3장 중국의 황금기 ?

 

태종 이세민의 꿈은 중국의 황제이자 돌궐족의 칸으로서 중국인과 야만인을 동시에 다스리면서, 중국인과 야만인이 동등한 자격을 가지는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118]

태종의 치세는 중국 역사상 종교 다원주의가 매우 융성했던 시대로 꼽힌다.[123]

 

4장 유럽을 삼킨 초원의 지배자 ? 몽골

 

칭기스칸은 뛰어나 군사 책략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칭기스칸은 지금이 기준으로 보거나, 당대의 통치자들과 비교해보아도 대단히 관용적인 정책을 취했다. 유럽인들이 이 교도들을 말뚝에 묶어 불에 태우고 있을 때, 칭기즈칸은 만인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공표했다.[147]

 

테무친은 혈통에 기초한 초원지대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완전한 혈족 체제 대신 공적과 충성도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체제를 도입했다.[149]

 

테무친은 패배한 부족의 지도자와 대부분의 남자 귀족들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가 아니라 동등한 성원으로 자신의 수하에 편입시켰다.[150]

 

테무친은 초원지대를 분열시켜왔던 전통적인 씨족별,혈통별 분할 제도를 타파하기 위해서 몽골 군대를 재조직했다. 그는 여러 민족 출신의 병사들을 섞어 열 명으로 이루어진 분대를 만든 다음, 그들에게 출신 부족에 관계없이 형제가 되어 함께 살고 서로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그는 분대 열 개를 모아 중대를 만들고, 중대 열 개를 모아 대대를 만들고, 대대 열 개를 모아 투멘을 만들었다. 1만 병의 병사가 소속된 투멘의 지휘관은 테무친이 직접 임명했다. 부족을 초월한 십진제는 군대뿐 아니라 몽골의 모든 사회조직의 구성 원칙이 되었다,[151]

 

테무친은 재능과 충성도를 기준으로 부관과 자문관을 선발했다.[151]

 

테무친이 혈연관계보다는 공로를 강조한 덕분에 낙타몰이꾼과 소몰이꾼들이 장군이 될 수 있었다.[151]

 

장군 선벌에 대한 테쿠친의 판단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을 뿐 아니라 기가 막힐 정도로 정교했다. 그는 대담함뿐 아니라 교활함과 참을성도 높이 샀다.[151]

 

예수타이는 어느 누구보다 용감하고 어느 누구보다 귀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오랜 행군을 해도 지치지 않고 허기와 갈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거느리는 장교들과 병사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급 지휘관을 맡을 만한 적임자가 아니다. 장군은 허기와 갈증에 대해 생각하면서 부하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부하들과 동물들의 힘을 아껴 쓸 줄 알아야 한다.[152]

 

테무친과 함께 있던 부관들은 지취관인 테무친과 끝까지 신의를 지킬 것을 맹세했다. 뜻밖에도 스무 명밖에 되지 않았던 이들은 아홉 부족 출신이었고, 그 가운데에는 테무친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푸른하늘과 부르칸 칼둔의 신산을 숭배하는 정령신앙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불교도, 기독교도, 이슬람교도도 있었다.[153]

 

마침내 칭기즈칸은 속임수와 심리전, 그리고 여진족 주민들과 각종 기술을 잔인하게 잉요하는 방법으로 여진의 군대를 무찔렀다.[159]

 

포로를 인간 방패로 사용했으며, 이 인간 방패들이 쓰러지면 그 시체로 해자를 메웠다.[159]

 

몽골 군대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포로들을 꼼꼼히 조사하여 기술을 가진 사람을 찾아냈고, 자진해서 투항한 기술자들에게는 후한 보상을 내렸다.[159]

 

칭기즈칸은 유럽에서는 신의저주라고 불렸지만, 티베트에서 아랄해에 이르는 동양에서는, 중세 페르시아의 역사가 주바이니의 표현을 빌리면 주가 베푸신 자비이며 주가 내리신 은총이자 종교의 옹호자로 알려지게 되었다.[162]

 

칭기즈칸의 군대가 강인하고 용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만일 중국인 기술자들이 현장에서 설계하고 건축한 훌륭한 공성 장비들이 없었다면 칭기즈칸의 군대는 호라즘의 강력한 성채를 정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163]

 

더구나 몽골의 기마대는 전통적인 군대와는 달리 이동을 지체시키는 무거운 장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대신 필요한 공격장비가 있으면 당장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외국인 기술자 부대를 데리고 다녔다.[163]

 

마음속에 목표를 세워두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생은 물론이고 자기 인생도 제대로 경영할 수 없다.[167]

 

대 몽골제국의 몰락은 지도층의 무능함과 부패 ,발란,파벌싸움,암살,외국의공격 그리고 불운을 비롯한 여러 요인에서 촉진되었다.[187]

 

몽골의 통치자들은 광대한 제국에 몽골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대신 문명화된 피지배민들의 문화를 점점 대폭적으로 받아들였다. 중국에서 쿠빌라이 칸은 중국식 호칭을 만들고, 중국 왕조를 세웠으며, 중국의 미술,음악,경극에 묻혀 살았다. 중앙아시아에 자리잡은 몽골의 칸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페르시아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했다. 날이 갈수록 뿔뿔이 갈라지는 이들 왕국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접착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191]

 

5장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 ? 스페인

 

스페인은 추방에 능숙하기는 했지만, 종교적 광신 때문에 국력을 탕진한 국가이다. 국력을 탕진한 국가가 유럽에는 또 있었다. 계몽주의 이전의 유럽에서, 종교 박해와 종교전쟁은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 통상적인 일이었다. 예를 들어 1524년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으로 힘을 얻은 농민들이 로마카톨릭교도 수십 명을 살해했고, 로마카톨릭교도들은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더 지독한 만행을 저질러 농민전쟁을 촉발했다. 이 과정에서 10만명이 사망했다.

1569년 이탈리아에서는 교황 피우스5세가 교황령에 거주하던 유대교도들을 모조리 추방했다. 1572년 프랑스에서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위그노교도 1만명이 학살당했다. 풀란드에서는 1648년부터 1654년 사이에 5만명이 넘는 유대교도들이 학살되었다.

백성들에게 단일한 종교를 강요했던 것은 비단 스페인 왕실만이 아니었다. 독일의 여러 나라에서는 군주들이 앞을 다투어 자신의 영토에 절대적인 칼뱅주의, 혹은 절대적인 루터주의를 강요했다. 스웨덴에는 단일한 국교가 정해져서, 이를 믿지 않는 자들은 감금을 당했고 종교교육이 의무적으로 실시되었다.[207]

 

6장 자본주의 경제를 제패한 최초의 제국 ? 네델란드

 

네델란드의 유대인들은 노란색 헝겊을 표식으로 달고 다녀야 했다.[213]

 

1579년 북부의 주들은 이에 맞서서 자치권과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2년 뒤 그들은 충성포기선언을 공표했다. 이 독립선언은 200년 뒤 미국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 후 일곱 개 주는 네덜란드 주연합이 되었고, 남부의 열개주는 스페인의 통치 아래 남아있게 되었다.[217]

 

작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쫓겨난 진취적인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덕분에 17세기에 이르러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 되었다.[218]

 

네덜란드 주연합에는 국교가 없었다.[219]

 

네덜란드 사람들의 관용에는 예리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공화국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던 정치인들 가운데 대다수는 경제적인 이익을 기대하여 공개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옹호했다.[221]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네덜란드 남부의 개신교도, 프랑스의 위그노교도, 독일의 루터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세파르디 유대교도, 유럽 동부의 아슈케나지 유대교도, 그리고 영국의 퀘이커교도아 필그림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으로부터 종교적인 망명객들을 줄이어 끌어들이는 자석이었다.[221]

 

어느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무역 네트워크 덕분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 의 상인이자, 무역의 중개인, 유럽의 중개인이 되었다.[227]

 

1602년 네덜란드의 상인들, 시민들, 대신들은 힘을 합쳐서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이는 공동자본으로 설립하고, 주권 권력으로 무장한 무역 독점체였다. 동인도회사는 외교를 집행하고, 조약에 서명하고, 동맹을 체결하고, 군대를 유지하고, 총독을 임명하고, 전쟁을 할 수있었다.[228]

 

네덜란드는 오래전부터 검약한 민족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처럼 교육을 많이 하면서도 그처럼 소비를 조금밖에 하지 않는 나라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233]

 

빌렘은 영국 왕이되자, 세파르디 금융업자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여, 영국의 해군과 육군을 포함한 자신의 군대에 계속 군수품을 보급했다. 이들 금융업자의 뒤를 네덜란드의 수많은 직물 기술자들, 과학자들, 초상화가들, 화가들, 조각가들이 따르게 된다.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연방공화국에서 영국으로 막대한 인적자본과 금융자본이 유출되기 시작했다.[244]

 

네덜란드 국내에서의 관용정책과 해외 식민지에 대한 관용정책 사이에는 모순이 있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나 실론 사람들을 위대한 네덜란드 제국의 충실한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애초에 그런 제국을 만들겠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일에 성공한 것은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계몽주의 원칙과 유럽의 자민족 중심주의 , 그리고 로마식 전략을 결합함으로써 피지배민들은 대영제국의 군대를 채우고, 대영제국의 영토를 관리하고, 대영제국의 예법을 따르고, 대영제국 왕실의 재산을 증식하는 데 기여했다.[245]

 

8장 세계최대의 해상국가 ? 영국

 

영국의 부상은 이 책의 논제를 생생하게 입증하는 사례이다. 1689년에 영국이 채택한 특별한 관용 정책 덕분에, 유대교도,위그노교도,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스코틀랜드인, 시 세 개 집단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영국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들은 금융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영국은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비상했다,[280]

 

그러나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은 영국은 계몽주의라는 복병을 만났고, 대영제국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세계적인 패권국가와는 달리. 자유,평등,민주라는 되돌아나갈 수 없는 근대성의 문턱을 넘어서고 나서야 세계적인 권력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280]

 

현대 세계에서 관용의 의미는 계속 달라지고 있다. 고대 제국들은 훌륭한 말이나 노새를 부리는 것처럼 우수한 집단들과 인재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순전히 수단적인 의미의 관용을 베풀었다. 이런 관용으로는 자유,평등,자치라는 현대적인 개념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영국의 역사는 중요한 의문을 제기한다. 세계의 패권국가가 현대의 계몽주의적인의미에서 참된 관용을 베푸는 것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오늘의 세계적인 초강대국, 그것도 과거에 몸소 식민지의 처지를 경험했던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합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일이다.[281]

 

영국 역사에서 카톨릭교도와 개신교도는 오랫동안 심각하게 반목해왔다.[300]

 

개신교가 19세기 영국의 정체성 가운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제국이 세계적인 규모 팽창함에 따라, 영국인들은 점차 스스로를 식민지 주민들관느 달리 백인이며 문명화된 민족이라고 규정하게 되었다. 가톨릭교에 댛나 적대적인 편견이 아일랜드에서 영국의 관용에 한계를 지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적,인종적 오만은 아시아아 아프리카의 영토에서 영국의 관용에 한계를 지웠다.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이 인도였다.[305]

 

영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요인은 파괴적인 인종적, 종교적 난투로부터 강력한 개방과 관용의 정책으로의 극적인 전환, 바로 그것이다.영국이 경쟁상대도 없이 세계 최고의 지위를 누리던 시기가, 유대교도들,위그노교도들,스코틀랜드인들이 국회의원, 수상등 영국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참여하던 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325]

 

대영제국이 유색인 피지배인들을 다른 방식으로 대했다면, 모두에게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해방이 이루어졌을 것이다.[327]

 

그러나 영국은 세계를 제패하는 제국으로부터 평범한 국가로 전략했고, 과거 유색인식민지 주민들은 제 3세계로 전략했다. 그 사이에 한편에서는 또 하나의 나라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 나라는 이민자들의 나라로서 처음부터 종교적 관용의 원칙 위해서 건설되었고, 필요에 의해서 다원주의가 인정되었던 곳이다.[327]

 

9장 최첨단 과학 기술의 개척자 ? 미국-

 

미국이 경제적 혹은 군사적으로 남다른 성공을 거둔 까닭은 무엇일까? 비옥한 농경지,풍부한 자원,외국의 위협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지정학적 특징, 그리고 사유재산제, 자유시장제,민주주의,법치주의 증의 제도들이 한몫을 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이 그랬듯이 미국이 강한 국력을 유지하고 있는 참된 비결은 인적자원에 있다.[331]

 

미국은 트리폴리 조약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말투로 미합중국 정부는 기독교라는 기초위에 세워진 나라가 아니다. 우리 정부에는 이슬람교 그 자체나 그 법률에 대해 적의를 품은 사람이 없다라고 표방했다.[339]

 

건국의 아버지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비종교적인 헌법을 지켰다. 조지 워싱턴은 종교가 도덕적인 사람들을 양성한다고 믿으면서도, 다른 나라들에게 미국의 본보기를 따르라고 촉구했다. “미합중국의 국민은 인류 앞에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여러 정책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는 자신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야 한다. 이 정책들은 모방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모든 사람들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340]

 

어느 한 계층의 사람들이 이미 타고난 권리처럼 누리고 있는 것을 관용이라 부르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관용이란 한 계층의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의 은전 덕분에 누리는 혜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다행히도 미합중국 정부는 불관용을 허용하지 않으며, 박해를 거들지 않으며, 미합중국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에게 선량한 국민으로서 걸맞은 행동만을 요구할 뿐이다.”[340]

 

한마디로 미국은 애초부터 종교적 관용이라는 계몽주의적 원칙 위에 건설되었다. 종교적 관용은 미국 사람들이 네덜란드와 영국에게서 물려받은 후 계속 확장시키고 확대시켜온 정책이다.[340]

 

그러나 종교적 관용은 인종적 관용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맹목적인 인종주의의 병을 앓고 있었다.[341]

 

토머스 제퍼슨은 1774년에 만인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제공되지 않는 나라를 떠나서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갈 천부의 권리가 있다고 단언했다.제퍼슨의 천부인권 선언은 미국의 이익에 합치되는 것이었다.[343]

 

미국 서부 개척의 역사는 원주민의 핍박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원주민이 아니어도 인구를 증가시킬 방법이 있었다. 미국인들에게는 뛰어난 솜씨로 숫돌에 간 화살촉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바로 이것이 선택적인 전략적 관용의 냉혹한 본성이다.

미국은 유럽출신의 다양한 대중들은 환영했지만, 아메리카의 토착 원주민들은 학살하고, 차단하고, 내쫓았다.[354]

전략적인 관용의 혜택에서 배제당한 사람들은 원주민만이 아니었다. 여성들은 투표를 할 수 없었고,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배제되고 있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서구에서 중국계 이주민들은 불관용의 차별, 신체적 공격에 시달려야했다. 가장 주목 할 것은, 대영제국이 노예제를 폐지하고도 30년이 지난 1865년에야 미국은 노예제를 철폐했으며 전후 재건 기간이 끝난 후에도 극심한 인종차별 사회로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353]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미국 사회는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나라로서 세가지 중용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미국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매우 자유분방하여 이주민들은 원하는 종교를 믿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교의 불씨를 피워낼 수 있었다.

둘째 민주적인 정부 제도는 부패하기는 했어도 새로운 이주민들의 손에 현실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쥐어주었다.

셋째 활발한 자유 시장은 노동력을 흡수하고 기술에 보상을 해주었으며 기업심이 왕성한 사람들에게 예상 밖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손꼽히는 이민지가 되었다.[353]

 

1차 세계대전이 유럽의 막강한 강국들을 크게 쇠퇴시켰다고 한다면, 2차세계대전은 그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안겼다. 1945년에 등장한 세계는 더 이상 유럽 중심의 세계가 아니었다. 시체와 파편이 치워진 후 뿔뿔이 흩어진 유럽의 국가들은 미국의 무력과 부에 의존하게 되었고, 미국은 세계의 초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357]

 

그러나 몇 년 후 미국은 세계 유일의 원자력국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유럽의 동쪽에서 또 다른 거인, 소비에트연방이 일어났다. 소련은 미국과 경쟁하면서 이후 수십 년 동안 유력한 지정학적 실체가 된다.[359]

 

주목해야 할 것은, 냉전이 시작되면서 두 개의 초강국중 어느쪽이 더 관용적이냐를 따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359]

 

미국의 시민권혁명은 1954년 브라운 판결을 계기로 여러 방면에서 시작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암살되었다. 그가 죽고 일 년 뒤에, 국회는 1964년 시민권법을 통과시켰다.[362]

 

1965년의 이민법은 1920년대에 제정된, 대단히 인종차별적인 국적별 할당제도를 폐지했다. 이민자는 크게 늘어나서, 할당제도가 있을 당시 연간 약 7만명이었던 이민자의 수가 1990년부터 2000년 사이에 미국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약 900만명이었는데, 10년 동안의 이민자수로는 사상 최고이다.[364]

 

걸프전이후 21세기가 시작되자,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현재 가치로 따져서 세계 총생산고의 3분의1, 일본과 중국 경제를 합친 규모의 두배, 제국주의 전성기 당시 영국이 세계 총 생산고에서 차지했던 비율의 세배를 넘어섰다.[366]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러시아는 대혼란에 빠져들었고 유럽은 침체되었으며 일본은 후최의 늪에서 허우적거렸으므로, 미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심지어는 문화적으로도 경쟁할 상대가 없었다. 세계에는 새롱누 초강대국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366]

 

제국의 미래

 

9.11사태를 겪은 미국이 군사적 우위를 이용하여 중동의 불량 국가들을 무장해제하고 민주화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미국이 그 패권을 이용하여 적국을 현대화하고 교화하고 평정했던 로마의 사례를 따라 가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448]

 

미국이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이다. 우리는 초강대국은 정복으로부터 교역으로, 침략으로부터 이주로, 전제정치로부터 민주정치로 변모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변모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강대국들은 반드시 한가지 근본적인 문제 즉 내가 접착제라고 표현했던 문제에 직면한다.

세계 제패의 본질이 변화된 오늘날에도 미국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던 접착제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21세기 미국의 권력에 대해 전망할 수 있는 열쇠는 이런 옛것과 새것이ㅡ 결합에 놓여 있다.[449]

 

고대사회의 부의 열쇠는 군사력이었고, 군사력에 이르는 열쇠는 전략적 광용이었다.[450]

 

현대에 들어서도 경제적인 패권은 여전히 군사적인 패권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관련된 변수들은 달라지기 시작했고, 해군력이 갈수록 증가해졌다.

부와 세계 제패에 이르는 열쇠는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세계각지의 수역들에 대한 통제권으로 옮겨졌다.[450]

 

네델란드연방공화국은 교역을 위한 전초기지로 이루어져 있었고, 토착민들과 내륙 도시들에 대한 통치는 대부분 해당 지역 고유의 통치조직에게 맡겼다.[451]

 

미국이 성공을 거둔 결정적인 비결은 재능 있고 의지가 강한 진취적인 개인들을 배경에 관계없이 흡수하여 그들에게 합당한 보수를 제공한 데 있었다.[453]

 

존 스틸 고든의 말을 빌리면,”예전에 세계가 로마화되었던 것처럼, 지금의 세계가 급속하게 미국화되어가고 있다면, 그 까닭ㅇ느 우리가 지닌 무기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가진 것을 원하고 그것을 가질 목적으로 자진해서 우리의 행동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다.[454]

 

영어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우세한 언어가 된 것은 미국 스텔스폭격기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미국 달러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454]

 

부를 창조하는 가장 큰 동력은 약탈과 몰수가 아니라 교역과 혁신이라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454]

 

몹시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미국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선망과 존경심, 한편으로는 깊은 증오심과 경멸감이 뒤섞인 몹시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463]

 

미국은 외국의 국민들을 미국인으로 만들 수 없고, 그렇게 할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페르시아제국,대몽골제국,당제국,그리고 역사상의 다른 모든 초강대국들은 중앙 권력과 피지배민들을 결합시켜주는 공통의 정치적 정체성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이런 접착제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미국 역시 과거의 초강대국들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던 적의 어린 분열을 극복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466]

 

이 접착제 문제는 오늘의 미국 정치에서 손에 꼽히는 몇 가지 논쟁점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결과다.

첫째, 초강대국들의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그런 대응은 외국인 혐오라는 반감을 조성할 수 있다. 미국의 성공원인을 앵글로색슨과 개신교의 가치관에서 찾으려는 시도들은 그릇된 것이고 또한 위험한 짓이다.[469]

 

둘째,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이미정책은 미국과 비미국인간에 호의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유학비자 프로그램과 같이 젊은 외국인들을 일시적으로 미국으로 유인하는 프로그램 역시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

다음 세대의 외국인 인재들을 확보할 작정이라면, 미국은 이런 기회를 결코 가벼이 넘겨서는 안된다.[470]

 

셋째, 가장 중요한 측면인데, 과거에 세계를 재패했던 모든 강국들이 그러했듯이, 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것은 세계에서 가장 값진 인적잔본을 끌어들이고 동기를 부여하는 면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앞질렀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미국 기업들이 미국 대학을 졸업하는 외국인들을 고용하지 못한다면, 외국인들이 그들을 고용할 것이다. 외국의 고학력 인재들을 고용하고 보유하지 못한다면, 미국의 과학,공학,첨단 기술 분야의 종사자들이 현재처럼 국제적인 주도권을 잡으리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471]

 

21세기 미국의 이민정책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미국은 독일이나 유럽처럼 폐쇄적인 이민정책이 아니라, 모든 계층의 이민자들에게 다다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고 선착순 혹은 추첨방식의 이민 경로를 대폭적으로 열어놓아야 한다.[472]

 

과거에 번영을 누렸던 초강대국들은 하나같이 해당 지역 지도층의 협조를 구하고 그들을 등용하는 등 이들 지도층에게 초강대국의 성공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초강대국에 속해 있다는 귀속감을 제공했다 이런 접착제가 바로 초강대국의 강성과 장수의 비결이었다.[473]

 

미국은 로마제국이나 대영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외국인들에게 존경받는 행정적,군사적 직위를 주지는 못하지만, 미국 기업내의 직위를 줌으로써 존경과 수익을 보장 받을 수 있게 한다.[473]

 

미국인들은 이러한 새로운 다자주의를 굴복이 아니라 기회로 여겨야 한다. 만일 미국이 스스로 세계적인 문제들에 원인을 제공했음을 인정하고, 그 문제들이 해결될 경우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고, 국제적으로 주도적인 입장에서 그 문제들에 대처한다면, 미국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민주적인 초강대국의 존립에 반드시 필요한 다른 나라들과의 연대감, 즉 결속감과 공동의 목적의식까지 창조할 수 있다.[475]

 

초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역사의 이변이고, 이득과 함께 희생까지 떠안아야 하는 일이다.[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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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9 09:32:09 *.255.182.40
저도 '관용'이란 단어 자체에 걸려서 한참 생각했었는데, 뜻을 명확히 찾아서 재해석해주셨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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