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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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4일 11시 45분 등록

Book Race 1: 그리스인 이야기

2013. 1.31

 

1.  저자 만나기 

어렵다. 지난 여름, 같은 저자의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를 읽고, 작가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와 나의 짧은 관찰을 섞은 리뷰를 할 때는 이리 힘들지 않았는데. 오병곤 사부의 내 인생의 첫 책 쓰기 강좌에서 한번 들여다 본 저자였다. 그런데 불과 수개월 만에 다시 만나는 저자가 이리 힘든 대상이 되다니, 더 알아야 할 것 같은데 더 모르겠다. ‘마흔 세살…’을 쓸 때의 그와 지금의 그는 또 다른 사람인 듯 책도 많이 다르다. 일단 기억해보고, 상상해보자. 내 기억에 의한 구본형은 이렇다.

2011 10 29, 저자를 강연회에서 처음 만났다. (일년에 한번 내 생일도 늘 잊고 넘어가는 엉성한 정신이건만, 놀랍게도 날짜가 사인 받은 책에 써 있었다!) 크고 작은 기업 임원들이 모인 저녁을 겸한 강연회에서, 그는 ‘The Boss’라는 저서를 기반으로 간단한 강연을 했다. 강연은 좋았다. 마침 내가 고민하던 부분도 건드려주었다. 그런데 이분의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기업체 대상 강연에서 만나는 에너지 과잉의 지나치게 친절한 연자들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일단 그리 안 친절했다. 말도 많지 않았다. 사인도 딱 내 이름과 본인 이름만 써줬다. 격려의 말 한 마디 없이!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이 강렬한 포스와 은근히 전해오는 묵직한 내공…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다. 강연을 듣고 돌아온 후, 나는 자의로 읽는 일이 거의 없는 처세술 류의 저서 중 정말 드물게 거의 끝까지 그 책을 읽었다. 읽고 나서는 마침 고민스러웠던 상사와의 관계에 대해 나름 유용한 시각도 갖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도 책에 저자의 서명을 받으며 교환한 명함 덕분에,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의 다양한 편지들을 매일 아침 이메일을 열 때마다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기억 저편에 숨어있던 나의 버킷 리스트를 꺼내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되기를 조심스레 얹어두었다. 당시로선 실현가능성이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 리스트였건만. 여하간 이것이 저자와 나의 유일한 대면에 대한 기억이고 나 혼자 키워온 인연의 시작이다.

짧은 기억 속에 고정된 그와 달리, 책을 통해 만난 그는 변하고 있다. 아직 저자의 책을 많이 접하지는 못하였기에, 그것이 정확히 어느 시점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선가 구본형 선생의 저자 소개는 좀 달라졌다. 처음 만난 그의 책에서 소개한 구본형은 조직을 기반으로 하는 변화경영전문가로서, IBM에서의 화려한 경력을 중심으로 직장인의 멘토 또는 경영사상가로 매끈하게 포장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훨씬 더 근본적인 개인의 변화, 자기 혁신을 중심으로 점점 더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탐구자이자 조언자이면서 실천가로서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 스스로의 정리를 위해 비유하자면, 구본형은 잘 나가는 강남의 스타 강사에서 전쟁보다 치열한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는 제다이들의 유일무이한 스승 요다로 변해가는 중인 듯 하다.

조직의 변화를 관리하는 직장인에서, 변화 경영의 道를 설파하는 1인 기업가로, 삶에 있어 변화를 통한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는 사람들을 위한 스승으로, 자기 혁명의 실천가로 더 깊어지고 뾰족해지는 저자의 프로필을 보며 나는 자신의 화두인 변화를 몸소 살아내고 있는 구본형을 만났다. 이것이 내가 책 속에서 발견한 구본형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자기혁명가 구본형이 두렵다. 이렇게 치열하게 엄격하게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을 진짜로 만나는 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줄 지 생각하면 설레기 전에 긴장된다. 얼마 전에 읽었던 생활 속의 심리학 이야기에서 던져준 가르침을 떠올리게 하는 모델이라 뜨끔하고, 모락 모락 질투가 난다. ‘나를 완전히 긍정한 후, 엄격하게 자신을 대하는 그 길로 가야 한다는 한마디를 자꾸 곱씹게 만드는 구본형 선생. 그러니까 나는, 그를 쿨하게 부러워할 수도 없고 무심할 수도 없어 버겁다. 그래서 나는 이 짧은 저자와의 만남을 정리하며 부끄럽게도 또, 평정심을 잃고 지치고 말았다. 온갖 감정이 파도를 치게 만드는 이 얄미운 저자, 에잇 내 칼, 아니 내 마우스를 받아랏

나는 매우 내향적이며 직관적 기질에 가깝다.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느끼는 것이 우선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판단보다는 인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의미와 내적인 조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많다….(중략) 그러나 세계를 함께 할 사람을 고는 데 까다롭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보일 수 있다… (마흔세살에 다시 시작하기, p304)

그가 마흔 세살…’에서 고백한 자아상을 보면 분명히 그는 INFP. 나도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인지, 나와 비슷한 기질과 고민을 공유했을 것 같은 그의 글과 행적들을 무심히 들여다 보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나는 구본형을 좀 더 연구해야겠다. 나를 알고 나답게 행복해지고 나답게 잘 살기 위해 할 일들의 우선 리스트에 그의 충고를 올려 놓을 것이다. 아직 나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발명하고 한참 앞서 간 그가 진정으로 부럽고 존경스러우면서도, 그를 닮고자 하고 그 같은 성공을 꿈꾸는 일이 몹시 어색하다. 공개적인 따라쟁이가 된다는 것이 쑥스럽고 쪽팔리기도 하다. 그래서 그간 내게는 멘토도 없었나 보다.

굳이 따지자면 사부의 사부쯤 될 구본형 선생을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더 유심히 관찰하고 이것 저것 질문도 많이 하리라. 그리고 진정으로, 행복한 팬으로서 따라쟁이로서 그가 발견한 기쁨들을 내 것으로 만들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3000년이 지나 우리는 가지 가지의 문명들이 혼합된 글로벌 시대에 와 있다. 우리의 의식 세계는 문명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아직도 문명에 의해 순치되지 않은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 그것이 자기 경영의 본질이다.그래서 신호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내명의 어둠으로 내려가는 사다리며 통로가 되는 것이다.

나의 신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나의 세계가 없는 평범한 삶에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세계 하나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자주적 삶의 방식도 없고 정신적 독립성도 없는 대중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삶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마침내 세상의 자신의 작은 왕국 하나를 건설해나가는 이야기다. 성공과 실패가 하나의 물결처럼 서로를 교환하는 것,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모멸이 온 몸을 휩싸는 일에 뛰어드는 것, 모든 신화는 이 무수한 모험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신화 일기를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그런 류의 책들은 너무도 많다. 이 책은 모험의 선동을 위해 쓰였다. 모험에의 초대,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다.(P18-P19)

아비를 쫓아낸 제우스가 다시 그 자손에 의해 쫓겨나리라는 것은 영원한 무의식의 강박으로 남게 되었다. 이것은 아버지의 세대는 언젠가 반드시 지나가고 자식의 시대가 오며, 그 자식은 또 그 자식에게 세상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상징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것이 시간의 비극이며 또한 축복이다. (p29, )

자식이 부모를 넘어서 저 혼자 나아갈 때, 또는 영원히 그 그늘에서 기를 펴지 못할 때 느끼는 부모의 이중적인 감정을 뭐라 표현할지. 아비와 자식이 그토록 경쟁적이고 치명적인 관계일 수 있음을 목격하고 체험하는 것은 내가 마흔에 이르렀기 때문인가. 모든 것은 지나가고 이 또한 지나간다는 말에서 비극보다는 안도를 느끼는 것은 역시 마흔을 넘긴 탓이려나.

판도라는 모든 선물이라는 뜻이다. 판도라는 신으로부터 모든 것, 즉 강점과 약점, 저주와 축복 모두를 받은 여자가 되었다. 제우스는 한 사람 안에 너무도 많은 대립적 요소를 넣어두면 그것들이 서로 부딪치고 갈등해서 하루도 고통과 번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모순, 갈등, 패러독스, 딜레마가 태초의 인간의 조건이 되었다.(p30)

그러므로 나는 정상적인 인간이다. 매일 헷갈리고 고민하고 번복하는 나의 기복은 이러한 자연스런 인간적 특성의 발로일 뿐이다. 에너지 소모가 극심한 것만 좀 줄일 수 있다면

시인 뿐이 아니다. 작곡가든 미술가든 조각가든 가수든 무용수든 칭하여 예술가라 불리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무사이 여신들이 문득 천둥처럼 찾아와 가슴을 뒤흔들고 내 속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되어 단 한번의 손짓으로 심혼을 흔드는 불멸의 대작을 만들어내기를 염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렇기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도 어느 한 부분은 여전히 한 인류로서 중세인이며, 고대인이며, 그리스인이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인류의 모든 과거가 살아 숨쉬고 있다가 어떤 야생의 순간에 원시의 순수한 힘으로 우주적 교감을 이루게 될 때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정신적 시선은 의식의 혁명을 겪게 된다.(p33)

보고 읽고 받아들이고 감탄하는 것은 잘 할 수 있는데. 나를 던져 쓰고 나누고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고 비교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서 승부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고통스런 일일지, 고민하다 나는 늘 좀 더 안전한 제 2의 길을 택했다. 그럼에도 내 안을 속속들이 들춰내어 누군가에게 가 닿을 수 있는 나의 것을 만들어내는 그 날을 소원하는 것은 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학자들은 제우스의 바람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지배신이 이미 있는 도시에 그리스인이 들어가 영향력이 커지면 제우스 숭배도 함께 퍼지게 되면서 원래의 토속신과 하나로 융화되게 된다. 그러면 그 토속신의 아내 역시 제우스에게 양도된다. 이 과정이 바로 제우스의 끝없는 외도 행각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p65)

여자는 이 시대에 양도되고 증여되는 재산으로 여겨지는 당시의 인식을 보여주기도 하고, 토속신과 새로운 지배신의 융화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해석이 된다.

삶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The way it is)

네가 따르는 한 가닥 실이 있지

변화하는 것들 사이를 지나가는 실

그러나 그 실만은 변치 않아

사람들은 네가 무엇을 따라가는지 궁금해하지.

너는 그 실에 대해 설명해야 해.

그렇지만 그 실은 다른 사람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

그 실을 꼭 잡고 있는 한, 너는 절대 길을 잃지 않아.

살다 보면 슬픈 일도 일어나고,

사람들은 상처를 입거나 죽기도 하지.

네가 무얼 해도 시간이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어.

그래도 그 실을 꼭 잡고 놓으면 안돼.

-       윌리엄 스태퍼드(William Stafford, p92-93)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의 미로를 밝혀준 여인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미궁 속에 길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삶이라는 슬픈 미궁을 미워하지도 저주하지도 않는다. 운명이 주어지면 그것을 따른다.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한다. 그녀는 인생이라는 미로를 사랑했기에, 그 속에 길이 있기에 그 길이 고통스러워도 버리고 파괴하지 않는다.

니체가 디오니소스의 입을 통해 아리아드네에게 전하고 싶은 말 한 마디는 사랑한 것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배신하고 떠나는 사랑을 어찌 미워하지 않으리. 그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니 인간은 복잡하고 이율배반적이며, 패러독스이고 스스로에게 딜레마인 것이다. 나는 너의 미로인 것이다. 아리아드네야말로 미로 탐험 전문가가 아닌가! 아리아드네야말로 사랑이 미로이며, 삶이 미궁이며, 스스로가 미궁임을 잘 알고 있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p97)

삶이 알 수 없는 미궁이며 그래도 사랑하라는 말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가 독백처럼 털어놓은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그리웠던 곳으로 돌아왔는데, 그녀를 만났는데, 한 순간에 그냥 그녀를 잃어버렸어. 그것도 영영. 모든 것을 잃었는데그랬는데, 난 뭘 해야 할 지 알았어. 그냥 계속 숨쉬는 거야. 살아가는 거야. 내일을 또 어떤 조류를 만나 돛이 펴질 지 모르잖아.” 톰 행크스가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 간신히 재회한 사랑, 그 모진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였던 목숨 같은 연인을 만나고도 결국 영영 이별하고 마는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나는 주인공이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 장면을 보다가 눈물이 고였다. 아리아드네와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 삶의 가차 없음을 받아들이고서야 살아갈 수 있었던 그들.

스티브 잡스가 죽었다. 그 역시 시장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냈다. 마치 판도라가 금단의 상자를 열어 모든 죄악을 이 세상에 뿌리듯이 그도 스마트폰을 만들어 세상에 뿌림으로써 생각 없음을 인류에게 선물했다. 사람들은 이것과 함께 일어나고 이것과 함께 잠이 든다. 지하철에서 책보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스마트폰이 차지했다. 생각이 사라지고 정보가 주가 되면서 오락과 채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람들과의 연결은 혁명적으로 증진되었으나 앞에 마주 앉은 사람을 버려두고 수시로 스마트폰을 보면서 서로를 모독한다. 사람들은 몰입을 잊어버렸다.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하지 않는 죄가 전염병처럼 범람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 아이히만은 수많은 유대인을 죽였으나 특별한 악인도 악마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이웃집 아저씨였을 뿐이다. 악의 평범성’, 그 원천은 바로 생각하지 않는 죄에서 온다. 시키는 일을 그저 따르는 자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갖지 않음으로써 주도적 삶도 사라진다.(p103-104)

악의 평범성, 생각하지 않을 때 의식도 하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죄악에 대해, 그래서 죄책감조차 없이 남지 않는 악행에 대해서라면,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예는 있다. 모른다는 것을 면죄부로 삼는 그들.

     모든 이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또한 잔인한 사냥꾼이기도 한 디오니소스는 고통을 체험한 유일한 신이다. 그는 포도나무처럼 매년 가지치기를 당하고 추운 겨울 갈래갈래 껍질이 찢어진 죽은 나무둥치처럼 매년 갈기갈기 찢겨 죽는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매년 부활한다. 기쁨에 가득 차서 다시 살아나며, 죽어야 할 자들에게 죽음이 희망이라는 믿음을 준다. 그는 불멸의 신인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테베의 왕녀 세멜레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간의 여인이 낳은 유일한 신이다. 여인에게 더할 수 없는 영광이나 세멜레는 제우스의 많은 여인 중에서도 가장 불행한 여인이었다. (p113-114)

디오니소스에게 많은 장이 할애되지 않은 것은 좀 아쉽다. 그러나 이 책은 모험을 선동하는 목적에 충실하니, 아마도 디오니소스의 부활과 기독교의 예수와 여러 기타 종교와 신화 속 부활의 모티프에 대해 더 파고드는 것은 여타 신화 읽기 서적에서 파고들면 될 일인 것 같기도 하다. 빵의 역사를 읽고 난 후 죽음과 부활과 종교와 곡식의 연관성에 대해 자꾸 끌린다.

메데이아는 바곳이라는 독초로 독약을 제조했다. 이 독초는 저승의 문을 지키는, 저리가 셋달린 개 케르베로스의 침으로부터 자라나는 풀이었다. 헤라클레스가 열두 과업의 하나로 이 개를 잡아올때 목을 감아 잡았기 때문에 머리를 흔들며 몸부림을 치는 동안 개의 입에서 나온 침이 바위를 적셨는데, 그 바위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풀이 있었다. 단단한 바위 위에서만 자란다고 하여 바위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곳은 지독한 독초였다. (p125) 

바곳, Monk’s hood, 일명 수도사의 두건, 학명 아카로이드 아코니친, 우리나라에서는 투구꽃으로 불리고, 한약재상에서는 부자라고 불리는 독초. 바곳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나를 시대추리물에 입문시킨 앨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수사 시리즈에서였는데, 케르베로스의 침에서 기원을 설명한 것을 보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이것의 용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이거 참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참 전통 있는 독극물이었구만흐흠. 설명 그럴 듯하고, 이거 재미있다!

 

시인은 노래한다.

 

미궁에서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버리고 떠나야 하네.

사랑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내, 만인이 환호하는 영융이 되었으나

한 사람도 사랑할 수 없는 불임의 영웅

 

아비를 배신하고 사랑을 선택한 여인,

잡아야 할 손은 자신의 손 밖에 없는

그 손을 남몰래 놓아버리고

검은 돛을 단 채 제 아비를 죽이고 말았구나.

한번 사랑한 것은 먼저 미워할 수 없으니 네 운명을 사랑하라.(p127)

테세우스가 그토록 많은 공적을 세운 그리스의 영웅이건만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이토록 비극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진정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을 함께 성공적으로 꾸려나가기는 힘들기 때문일까.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개인적 삶이 비극으로 가득 찬 예는 참 많다. 그러니까 둘 다 성공한 사람들을 참아내기가 더 힘든 것인지?

테세우스는 현명하고 공정한 왕이 되었다. 그는 백성 위에 군림하기를 원치 않았다. 각 마을에 있던 공회당이나 행정청들을 없애고 아크로폴리스에 공동의 공회당을 지었다. 그리고 도시의 이름을 아테네로 정하고 공동의 제사를 지냈다. 시민들이 투표할 수 있는 의회를 짓고 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는 도시를 확장하기 위해 평등을 조건으로 외지에서 적극적으로 인구를 유입시켰다. “모든 민족이여, 이 땅으로 오라.” 이것이 그의 기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민주정치를 펴기 위해 왕의 자리를 내던진 인물이 바로 테세우스였다다른 도시국가들이 한 사람의 절대군주 밑에 머리를 조아리는 체제를 구축해갈 때 아테네는 모든 나라와 도시 중에서 가장 자유롭고 번영하는 도시가 되었다. 테세우스는 국민들이 스스로 통치하는 위대한 나라의 초석을 놓았다.(p128)

오홋, 이것은 테세우스가 실존인물이라는 것? 몰랐다, 역시 멋지다!!! 그의 모험담은 후세가 아테네 최초의 영웅을 신격화하기 위한 각색인 것인가? 신화와 역사가 만나는 접점에 있는 인물들은 역시 흥미롭다!   

나의 분노는 나의 결심보다 강하다네” –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p138)

들라크루아가 그린 격노한 메데이아의 얼굴은 가장 풍부한 표정을 담은 눈 밑까지 검은 그림자로 덮여있다. 아마도 감히 자식을 죽이기 직전 메데이아의 심정을 담은 눈을 그려낼 엄두를 내지 못한 까닭일까?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히려 보이지 않는 그 눈빛에서 더 많은 감정을 끌어내게 하는 묘사라는 생각도 든다.

이 대사에 꼭 맞는 그림이 바로 들라크루아의 그림이다. 두 아이를 죽이기 위해 비수를 손에 든 여인. 자신의 생을 지옥으로 몰아넣게 될 행위를 하기 직전의 여인. 사랑하는 것들을 죽여야 하는 그녀의 얼굴은 분노 너머의 절망과 허무를 담고 있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게 될 내 사랑들.” 아이를 보호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어미의 모습. 그녀가 고개를 돌려 뒤를 보는 것은 처음 잘못된 사랑을 시작한 자신의 젊은 과거를 뒤돌아보고 있는 것이리라. 왕이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한 불운한 남자를 사랑한 여인.

메데이아가 더불어 사랑한 것은 그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의 빛나는 시선을 마주할 때는 마음이 뒤집어지곤 했었다. 품에 안고 있을 때도, 심지어 그 아이들을 죽일 때도 못 견디게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분노와 복수심이 사랑을 삼켜버렸다. 분노는 의지보다 강해 스스로 삭힐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이 뻗쳐 나갔다. 우리는 그 악마적 힘에 대항할 수 없으며, 그 힘이 우리를 철저하게 파괴한다. 메데이아가 복수에 성공하는 순간, 바로 그 승리의 순간에 그녀는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린다. 악마가 영혼을 쥐고 흔든다. 상황은 끝났다.(P138-139)  

이 불쌍한 여자. 어찌 이리 지독한 사랑을 하여 이 지경까지 갔단 말이냐. 그러고도 또 살아갈 것이면서, 아이들을...

나는 메데이아가 아이들을 죽이는 순간, 복수에 성공하는 순간, 철저히 파괴되는 순간 괴테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승리의 기쁨에 충만한 순간 외치는 멈추어라 시간아, 너 참 아름답구나는 여기서도 등장한다. 바로 이때 악마는 우리의 영혼을 넘겨받게 되어 있다. 악마에게 영혼이 넘어가는 순간 신은 영혼을 악마의 손에서 구원한다. 그레첸 역시 그랬다. 파우스트에게 버림받고 미쳐서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이고는 가장 비참한 나락에 떨어졌을 때 신은 그녀를 구원해주었다. 신은 인간의 바닥에 존재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달콤한 죄악 오 펠릭스 쿨파 O felix culpa”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의 동물적 존재가 죽고 영적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의 시선으로 보면 옛 아담이 새 아담으로 바뀌는 것이다. 바로 원죄다. 인간은 영원한 기쁨의 에델동산에서 쫓겨나 타락한다. 그러나 그 타락이 없었다면 구세주도 없었을 것이다. 이때 이 승화는 그냥 낙원에 머물 때의 의식보다 더 높은 의식의 수준에 도달하게 한다. 그 타락이 없었다면 더 높은 영혼으로의 승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죄악이 얼마나 달콤한 죄악인가! 죄악, 바로 육체의 죽음 없이는 정신적 존재로의 재생도 없다. 선불교의 스승 육조 혜능은 그리하여 기가 마긴 명언 하나를 남겨두었다.  

우리의 순수한 정신은 타락한 정신 속에 있다.” (p143)

메데이아의 극한에 다다른 사랑과 증오와 죄악이 완전한 파멸로 종결되지 않고, 또 다른 왕의 아내로서 다시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더욱 놀랍다. 그런 극한의 상황을 겪고 다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악착스러워지는 그녀의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인간은 참 알 수 없는 존재다. 그녀의 지독한 열정보다 더 악착같은 삶에의 의지를 뭐라 표현할 수 있을 지. 가장 큰 죄악을 지은 후에야 오는 정신적 재생에 대한 부분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그레첸이 그랬을 지는 몰라도 메데이아가 그랬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녀가 정말로 생존 본능, 삶의 의지가 강한 여자라는 생각은 드나, 그것을 넘어 더 높은 정신으로의 승화를 이뤄냈는지는 모르겠다. 메데이아를 더 자세히 탐구하면 공감할 수 있으려나?

아 나의 영혼이여, 불멸의 삶을 갈구하지 마라. 그 대신 너에게 주어진 운명에 지치도록 탐닉하라. 어찌하여 불가능한 일을 탐하는가? 발 앞에 일을 직시하라. 발 앞에 놓인 인간의 운명, 죽어야 할 우리의 조건을 잊지 마라.” – 핀다로스 pindaros (p149)

 

사랑을 하면 배신을 하지 말고

비밀을 보았거든 입을 덮어 바위가 되라.

비밀이 자라 곧 피처럼 붉은 불행이 되리니

그 비밀에서 멀리 도망쳐라.

숨겨둔 어두운 곳은 언젠가 밝은 곳이 되는 법.

 

결코 불행은 전하는 전령이 되지 말지니

사랑할수록 미움도 크고

복수가 지나칠수록 후회도 크니

언젠가 분노 속에서 저지른 일을 뉘우칠 때

그 일을 전한 자를 가장 미워하리라

(p152)

완전 공감! 입조심하자.

 

아쉽구나, 신의 분노 속에서 태어나고

다시 신의 분노로 운명을 다하는구나.

현실을 나는 자들은 신이 그에게 허락한 것을 즐길 줄 알고,

그 천직의 즐거움이 삶임을 믿는다.

일 외에 다른 두 큰 즐거움이 없을 때

일은 놀이가 되나니.

운명을 따르라. 투덜거리지 마라.

그러나 높은 하늘을 지나는 바람은 수시로 행로를 바꾸니

무엇이 운명인 줄 어찌 알겠는가.

다만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릴 뿐.

 

시인은 마음을 다 털어내지 못하여 다시 노래한다.

 

자신의 일을 하다 죽기 바라네.

태어난 운명대로 길을 가고

그 길 위에서 늙으리니.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천직이니

천직을 다한 사람은 죽어서 별이 되나니.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그만두고,

평생 가야 할 길로 들어선 자는

황금의 시기를 맞이하리니

그들에게 퇴직은 없다.

죽음이 바로 퇴직이므로.

(p154-155)

 

죽음이 곧 퇴직, . 나는 지금 아무래도 인생의 직업, 직장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는 것 같다

철학은 너무 늦게 도착한다. 철학은 세계의 사싱인 이성(절대정신)이 그 형성과정을 끝내고 난 뒤에 비로소 철학의 시간 속에 나타난다…. 철학이 회색에 다시 회색을 덧칠할 때 삶은 이미 늙어버린 모습이 되어있다. 잿빛에 잿빛을 덧칠하면 그 삶의 모습은 젊음의 모습을 찾지 못하고 단지 인식될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서야 그 첫 날개를 편다. – 헤겔의 법철학 서문(p164)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헤겔에게 철학은 앞날을 예측하게 하는 새벽의 학문이 아니다.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조건 아래서 비로소 그 뜻이 분명해지는 저녁의 학문이다. 자유는 모든 것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며, 진리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사물을 파악하는 사유다. 국가의 권위나 종교적 도그마에 얽매인 사유로는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귲ㅇ된 사유는 자유로운 사유가 아니므로 진리가 아니다. 진리란 무지와 몽매와 왜곡과 편견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는 우리를 묶어두는 역사적 조건이 사라진 다음에야 찾아온다. 철학은 이미 일어난 일을 해석하여 지혜를 얻는 것이므로 발걸음이 늦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헤겔은 오독의 철학자다. 그래서 영어에서 ‘sound like Hegel’이라고 말하면 , 또 뭔 소리를 하는겨?’라는 뜻이 된다.     

이야기가 내친 김에 조금 더 가보자. 미네르바의 부엉이에 맞서는 개념이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갈리아의 수탉이다…. ‘갈리아의 수탉은 마르크스가 헤겔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낸 맞불 개념인데, 수탉은 아침에 울어 세상을 깨운다. 철학은 새벽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에 앞서 그것들을 선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늘 현실이 다 지나간 다음에야 따라오는 늙은이의 지혜가 아니라 실천과 행동에 의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유명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속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석만 해왔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철학자의 사명은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것이다. 혁명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역시 갈리아의 수탉이 등장하는 전후 문맥으로 살펴보자.

종교적 비참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며, 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철학이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그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듯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철학 속에서 그 정신적 무기를 발견한다…. 모든 내적 조건이 충족된다면 독일 부활의 날은 갈리아의 수탉의 울음소리에 의해 고지될 것이다. - 칼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의 테제 (p164-166)

심정적으로는 갈리아의 수탉론에 동조하나, 머리 속으로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에 끄덕이고 있는 나 자신. 이것은 40대가 된 나의 변화인가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갖는 영원한 보수-진보의 대립인가

오이디푸스는 미약한 존재로서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우주가 전하는 부름을 받고 가장 불운한 삶의 길을 견뎌갔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거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이 불행에 협력하여,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고국에서 추방당함으로써 그 불행의 정점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불행의 절대적 의미를 완성했던 것이다. 더 이상 그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게 되자 그를 그렇게 몰아세웠던 운명의 수레바퀴는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그 너머로 들어선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신을 느끼게 되면서 비로소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체는 아테네와 그리스 전체를 수호하는 성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라. 이제 한 인간이 기나긴 고난을 지나온 후 자신의 지독한 운명을 용서하고 화해하게 되었다. (p179)

행복한 세월이 흐르고 헬레네와 메넬라오스 사이에 헤르미오네Hermione라는 딸도 생겨났다.(p209)

해리 포터의 영원한 조력자 헤르미온느가 여기서 따온 이름이군! 왜 하필 헬레네와 메넬라오스의 딸인가. 롤링은 왜 이 이름을 택했을까?    

그리스로 돌아온 오래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의 왕국을 계승했다. 그리고 아르고스와 라케다이몬을 합병했다. 그는 라케다이몬 왕이었던 삼촌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딸인 헤르미오네와 결혼했으나 뱀에 물려 죽고 말았다. 고전 인문학자이며, 현대 인류학의 대가인 제임스 프레이저James G. Fraser가 자신의 저서 황금가지 Golden Bough에서 주장하는 일설에 의하면 오레스테스는 네미의 사제직을 계승한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p298)

다시 등장하는 헤르미오네. 네미의 사제직을 계승했다는 오레스테스흠 오묘하게 연결되어 있으나 의미는 영 모르겠다.

비르비우스(테세우스의 아들, 히폴리투스)두 번 산 자라는 뜻이다. 비르비우스는 로마 인근의 네미 호숫가에 있는 아리키아 숲의 신이 되었으며, 여기서 아르테미스와 함께 신봉되었다. 로마인들은 네미 호수를 디아나 여신의 거울이라고 불렀다.… 네미의 숲에는 신성한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아무도 꺾어서는 안 된다. 오직 도망 온 노예만이 황금 가지를 꺾을 수 있고, 그 가지를 꺾은 자만이 숲의 왕인 사제와 결투가 허용된다. 도망쳐온 노예가 사제를 이기면 새로운 사제, 숲의 왕이 된다. 이 기이한 사제 계승의 법칙을 제도화한 것은 오레스테스로 알려졌다. 이 방식은 산 인물을 제물로 바쳤던 야만적인 타우리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숲의 왕이 목숨을 걸고 지키는 이 성스러운 나무는 여신 아르테미스가 현현한 것이다. ‘나무와 결혼한다라는 말은 이렇게 생겨났다.

프레지어는 <황금가지>에서 이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그 옛날 이 아름다운 숲은 불가사의한 비극이 되풀이되는 무대였다. 호수의 북쪽에는 오늘날까지 네미의 마을이 남아있는데, 깍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디아나 네모렌시스Diana Nemoransis, 숲의 디아나라고 불리는 거룩한 숲과 성소가 있었다. 이 성스러운 숲 속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그 주위를 어떤 무시무시한 인물이 밤낮으로 서성거리고 있다. 그는 손에 칼을 든 채 언제 있을지 모르는 적의 습격에 대비해 쉬지 않고 사방을 경계했다. 그는 바로 사제인 동시에 살인자다. 그리고 머지않아 누군가가 그를 죽이고 대신 사제직을 탈취할 것이다. 그것이 이 성소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사제가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지금의 사제를 죽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제가 된 후 자기보다 더 강하고 교활한 자에 의해 살해될 때까지 사제직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p300-301)

페넬로페이아는 오디세우스아의사이에서 텔레마코스라는 외아들을 낳았다. 아버지는 트로이로 떠나면서 자신의 늙은 벗인 멘토르Mentor에게 아들의 교육을 맡겼다. (p309)

멘토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하는구나. 잠깐 네이버 지식 사전 참조! 오디세우스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여년동안 멘토는 왕자의 친구, 선생, 상담자,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 그를 잘 돌보아 주었다. 이후로 멘토라는 그의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 멘토는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의 의미이다. 멘토의 상대자를 맨티(mantee) 또는 멘토리(mentoree), 프로테제(Protege)라 한다. 나도 갖고 싶다. 되고 싶다.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이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네 생각이 고결하고

네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할지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않고

네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네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화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 향수를, 주모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 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이미 너는 풍요로워졌느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기를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아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       콘스탄틴 카바피 Constantin Cavafy, <이타카>(p312-313)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더 풍요롭게 해주기를 기대하지 마라. 이 말을 잘 기억하리라.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든,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되든.

호메로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했지만 신들이 보기에는 입이 싸고 교활하며 신들을 우습게 여기는 심히 마뜩잖은 인간이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형벌을 받은 것이다. ‘무익하고 희망 없는 일의 반복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신들의 생각은 일리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시인은 노래한다.

조심하라, 신은 영리한 인간을 좋아하지 않아.

경솔하구나, 신인듯 부귀과 권세를 누리는 자들.

모든 것을 용서하는 신들도 불경은 기필코 응징하나니

물이 출렁거려도 마실 수 없고 과일이 주렁거려도 딸 수 없으리.

가장 많이 가진 것 때문에 괴로워하게 되리니, 신의 것을 훔치지 마라.

 

날마다 같은 일을 땀 흘려 반복하는 것은

아직도 직장인들이 매일 하는 바로 그 일.

수없이 기를 써 올리지만 수없이 다시 굴러떨어지는 저 놈의 바위.

언제는 일이 그친 것을 보았느냐.

세월이 얼굴이 깊은 고랑을 파고, 무의미를 반복하다 쓰러지는구나, 우리는.

(p339-340)

이만한 저주도 없을 것이다. 직장인들공감되어서 더 끔찍한 이 시

 

시인은 노래한다.

젊음의 10년은 전쟁터에서 살았고

10년은 불운의 풍랑을 헤치며 살아왔다.

마지막 가장 위험한 고향에서 맨손으로 일어서니

비로소 한 사내는 홀로 설 수 있게 되었다.

머리와 어깨는 위엄과 젊음으로 오히려 10년 전보다 더욱 빛나니.

 

우리도 그렇게 젊은 날들은 공을 세우기 위해 전쟁처럼 바삐 살고,

또 그만큼은 칼립소에게 억류되어 날마다 바다를 보고,

한숨을 쉬듯 매너리즘에 젖어 산다.

그러나 인생은 모험, 날마다 새로운 파도와 겨뤄야 하니

알게 되리라, 삶은 이타카를 향하는 도중(途中)에 있음을

(p356)

오디세우스의 모험에서 성년의 인생에 대한 배움을 얻는다. 사회에서 나의 설 자리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20, 내 무대를 확장하고 지키기 위해 싸우는 30, 내 안에서 나를 세우기 위해 싸우는 40.

일성에 의하면 헤르메스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의 헤르마herm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헤르마는 도로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석을 말한다…. 아테나의 아이기스, 제우스의 벼락, 포세이돈의 삼지창, 하데스의 투구, 아프로디테의 벨트처럼 헤르메스도 자신을 상징하는 선물을 세 개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날개 달린 모자로 페타소스라고 불린다. 또 하나는 날개 달린 샌들로 탈라리아라고 불린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날개 달린 지팡이다. 그리스어로는 케리케이온, kerykeion, 라틴어로는 카두케우스Caduceus라고 불린다.

특이한 것은 이 신물들에 모두 날개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석에서 확장된 헤르메스는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라는 상징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신들 사이에 제우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령이며, 영혼의 인도자다. 그러니 이승과 저승, 천상과 지상 어디가 되었든 아주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전령의 상징이 된 헤르메스의 지팡이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숨어 있다. 지팡이는 우주의 축을 의미하며 헤르메스는 이 축을 타고 하늘과 땅을 왕래한다. 손잡이 부분에 날개가 달려 있는 이 지팡이를 두 마리의 뱀이 휘감고 있다. 두 마리의 뱀은 궁극적으로 통합되는 이원적 대립물을 상징한다. 뱀 한 마리는 독을 뜻하고 또 한 마리를 치료를 의미한다. 따라서 두 마리의 뱀은 질병과 건강을 상징한다. 이것은 유사 요법, 자연은 자연으로 물리친다는 고대의 사유체계를 반영한 것이다우주에 작용하여 대립하는 두 가지 힘의 상호 보완적 성격을 보여준다. 두 마리의 뱀은 결합과 해체, 선과 악, 불과 물, 상승과 하강, 남성과 여성 등 대립적 요소를 상징한다. 그러니 헤르메스는 공간을 넘나들 뿐 아니라 대극적 가치의 쌍방을 넘나들어 조화를 이루게 하는 신이기도 한 셈이다. 특히 제우스의 의도를 담고 여기저기를 전령으로 다니면서 여러 갈등을 중재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칼립소를 설득해 오디세우스를 놓아주게 했고,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의 마법을 방어할 수 있도록 약초를 주기도 했다.

뱀 지팡이는 헤르메스 외에도 여러 신들이 들고 다닌다. 이집트의 신 아누비스Anubis와 여신 이시스, 페니키아의 신 바아, 바빌로니아의 여신 이슈타르Istar도 뱀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이러한 유사성에 로마 시대의 혼합주의적 영향이 더해져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에서 지혜의 신 토트Thoth를 받아들여 헤르메스와 동일시하면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Hermes Trismegistos, 세번 위대한 헤르메스라는 신비한 인물을 만들어냈다. ‘세번 위대하다라는 말은 우주의 지혜 중에서 연금술, 점성술, 신성마법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는 특히 화학 지식의 신으로 여겨졌는데, 고대 이집트인들이 화학자로서 명성을 떨쳤기 때문이다. 옛날에 화학은 헤르메스의 기술 Hermetic art’이라고 불렸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마법과 연금술로 이어지게 되었다. 헤르케스 트리스메기토스는 서양 밀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헤르메스주의의 문헌을 남겼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가의 지원을 받아 플라톤 아카데미를 이끌던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는 플라톤 전집과 더불어 이 이교도의 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방에 소개함으로써 기독교적인 상징체계를 이해하는 데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p361-363)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으면서 어디에든 속할 수 있는 경계의 신. 아니 탈 경계의 신이라 해야 하나? 헤르메스의 불가해함과 자유로움, 초월성,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양면성, 대립적 요소의 상호보완성과 통합의 상징을 다시금 들여다본다. 생각해보니 어릴 적부터 내가 젤 멋지다고 생각한 신은 아테니와 헤르메스. 왠지 모르게 부러웠던 신이 헤르메스였다.

 

인간은 이 운명에서 저 운명으로 부름을 받는 것,

부름이 끝나 한곳에 머무는 순간

삶은 저녁처럼 저문다.

그러니 풍랑과 폭우를 두려워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떨림의 기쁨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니.

 

풍랑이 내던져놓은 새로운 운명의 해변에서

폭우가 지나간 하늘은 다시 푸르게 살게 하나니.

모든 죽음은 영원한 평화, 그러니

살면서 아무 일 없는 무풍의 권태를 참지 마라.

떠나지 못한 모험은 삶에 대한 쓰라린 모독이니.

(P390-391)

떠나지 못한 모험은 삶에 대한 쓰라린 모독이라는 부분에서 심호흡을 한번 해본다

시빌라는 아폴론의 신탁을 전하는 여사제들이다. 여러 명의 시빌라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시빌라가 바로 쿠마의 시발라다. 그녀는 동굴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나자마자 급속히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다. 종려나무에 시처럼 운문으로 신탁을 받아써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아폴론은 그녀를 사랑하여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손으로 모래를 한 웅큼 쥐고 그만큼의 햇수를 살게 해달라고 말했다. 아폴론은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1000년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젊음을 함께 원하는 것을 잊었기에 해마다 그녀는 늙어갔고 조금씩 쪼그라들었다. 나중에는 작은 새장에 들어가 살 만큼 작아졌다. 아이들이 시발라, 무엇을 원하세요라고 물으면 그녀는 삶에 지칠대로 지쳐 죽고 싶어라고 대답하곤 했다. (p401) 

아이네이아스의 모험을 그 일부나마 접한 것은 어슐라 르귄의 신작 <라비니아>를 통해서다. 라비니움의 공주로서, 신탁을 접하고 결국은 신탁의 전달자에서 새의 모습을 빈 신탁 그 자체로, 목소리로 남아 베르길리우스와 공명하는 라비니아의 모델은 아이네이아스와 저승을 다녀오는 시빌라와 상당 부분 겹쳐진다.

헤카테는 신비로운 존재로 남아 있다. 헤시오도스에 의하면 헤카테는 올림푸스 신들 이전인 티탄족의 계보에 속하지만 제우스는 그녀의 권력을 강화시켜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호의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가축을 살찌우게 하고 그물이 고기로 가득 차게 하는 물질적 부는 물론, 정치적 영향력, 스포츠에서의 승리 등 무엇이 되었든 사람들은 그녀에게 온갖 청을 빌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마법과 마술을 관장하는 모든 여신들의 어머니 신이 되었으며, 죽음의 세계와도 연관되게 되었다. 그녀는 양손에 횃불을 하나씩 들고 암말, 암캐, 늑대 등 갖가지 동물의 모습으로 마법사와 마녀들에게 현시한다. 오디세우스를 사랑으로 억류했던 마녀 키르케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이아손의 아내로 그를 파멸시킨 마녀 메데이아의 할머니로 여겨지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헤카테가 가장 좋아하는 마법의 장소는 십자로로 그녀는 그곳을 지배했다. 사람들은 십자로에 이르러 그녀를 찾곤 했다. 사람들은 세 개의 몸이나 세 개의 얼굴을 가진 여인의 모습으로 그녀를 십자로에 세워두고 봉헌물을 바치곤 했다. 그녀는 왜 교차로의 여신이 되었을까? 후대에 오면서 그녀는 세 가지의 개념이 합쳐진 여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원래 어두운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었다. 즉 올림포스 신들의 시대 이전, 거인족이었던 티탄족의 달의 여신 셀레네였다. 올림포스 신들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지상의 숲 속에서 쏜살같이 달리는 모든 짐승들의 여신 아르테미스였다. 그리고 지하세계에서는 달의 어둠, 즉 달이 나타나지 않는 어두운 밤의 여신 헤카테였다. 헤카테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와 관련이 있었고, 사악한 마법이 이루어지는 모든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세 가지 모습이 모두 들어 있는 이 여신은 그래서 세 갈래 길이 교차하는 교차로에 산다. 그녀는 모든 강한 것을 파괴할 만큼 강하고, 그녀의 사냥개는 온 도시가 울려대도록 짖어댄다. 선과 악 사이의 불분명한 지점, 그 교차로에 그녀는 웅크리고 있다.(p403)

악마와의 계약 설로 유명한 블루스 기타리스트 로버트 존슨이 십자로에서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고 하는데, 호러드라마에서 종종 등장하는 악마와 교환한 행운의 기간이 끝나고 지옥으로 끌려갈 때 나타나는 지옥의 사냥개(hell hound)도 그렇고 결국 헤카테의 신화에서 기원한 것들인 모양이다. 재미있어라셀레네였고 아르테미스였고 헤카테인 여신. 모든 어둠 속에 행해지는 음모와 마법 뒤에 웅크린 여신.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 난 길을 멋 모르고 달리듯이 걷다 보면

문득 길이 끊기고 어두운 숲,

거미줄이 얼굴에 걸릴 때쯤 알게 되리

인생은 달리는 속도가 아니라 가야 할 방향이라는 것을.

살면서 가장 큰 모험은

죽음을 미리 겪어보는 것.

황금가지를 꺾어 손에 들고 700년을 산 시빌라의 안내를 받아

지난 삶을 건너 새로운 포구에 이르면

살아야 할 새 삶이 나타나는 법.

 (p410)

 

그리스 신화에는 에레보스라는 암흑의 공간이 있다. 이 암흑의 공간에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다섯개의 강이 흐른다. 그 첫 번째 강이 아케론이다. 슬픔의 강이다. 여기서 뱃사공 카론은 뱃삯으로 동전 한 닢을 받는다. 부귀 귀천에 관계없이 오직 한 개의 동전을 받고 배를 태워준다. 두 번째 강은 코키토스다. 비탄과 통곡의 강이다. 첫 번째 강에서 슬픔을 버리고 두 번째 강에서 비탄과 통곡을 버린다. 그리고 세 번째 강에 이르게 되는데, 그 강의 이름이 플레게톤이라는 불길의 강이다. 죽은 자들이 불로 자신을 정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네 번째 강이 유명한 스틱스 강이다. 증오의 강이다. 스틱스는 원래 여신의 이름인데, 제우스를 대장으로 하는 올림포스의 신들이 티탄족과 권력을 두고 전쟁을 할 때 제우스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신들이 맹세를 할 때는 이 스틱스 강물을 떠다가 그 앞에서 서약을 하게 했다. 다섯 번째 강이 바로 레테로서 망각의 강이다. 이 물을 마시면 전생의 모든 기억과 번뇌를 잊고 새로운 영혼으로 태어나게 된다. 이 다섯개의 강을 다 건너면 두 개의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 길은 엘리시온으로 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타르타로스라 불리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에 이르러 암흑인 에레보스는 끝나게 된다.

(p405)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여섯 단계쯤 되려나. 슬픔을 버리고 비탄과 통곡을 버리고 이런 감정들을 정화한 후 증오를 버리고 모든 것을 잊는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은 이탈리아의 티베리스 강 하구에 정박하게 되었다. 힘든 항해는 끝났다. 바다도 저승도 아이네이아스의 모험을 막지 못했다. 그들은 바다에 지친 몸을 풀밭에 눕히고 쉬었다. 대지의 단단함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바다의 요동과 멀미를 가라앉혀 주었다…. 풀밭 위에서 그들은 간단한 음식을 먹었다. 모처럼 그날은 딱딱한 빵 위에 숲 속에서 따온 먹음직한 열매들을 얹었다. 모처럼 그날은 딱딱한 빵 위에 숲 속에서 따온 먹음직한 열매들을 얹었다. 그리고 먼저 열매들을 먹은 뒤 빵조각을 마저 먹고 식사를 마쳤다. 이때 아이네이아스의 아들인 이울루스가 농담을 했다.

, 우리는 마침내 식탁까지 먹어 치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아이네이아스는 문득 하르피아들이 그들을 저주하여 했던 말, “기아에 몰려 식탁까지도 먹어 치우게 될 때에야 비로소 새 땅을 찾게 될 것이라던 말을 기억해냈다. 아이네이아스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만세, 만세, 여기가 바로 약속의 땅이다. 우리의 땅, 우리의 새 나라에 드디어 도착했다. 예언이 이루어졌다. 저주가 풀려 축복이 되었다.” (p411)

여행은 끝났지만 모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방랑의 저주가 풀렸지만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간신히 상륙한 땅 위에서 제 자리를 찾기 위한 가장 쓰라린 전쟁이 남아있었다. 오디세우스도 그렇고 아이네이아스까지. 약속의 땅에 도착한다고 모든 것이 모험을 마친 주인공을 환영해주는 것은 아니다. 거기서 모험의 대미를 장식할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한다. 사는 게 뭔지

작가가 된 다음에야 나는 역사학자가 나에게 잘 맞지 않는다는 알게 되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내가 오적 사건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역사학은 사실에 기초한 해석이다. 그런데 나는 사실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그 일이 생겼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 일이 내게 어떤 감흥과 충격을 주었느냐는 것이다. 외적 사건보다는 그 사건이 마음에 만들어낸 파장, 즉 내적 사건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나는 사실과 허구를 버무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작가는 될 수 있지만 사실을 집요하게 추적해야 하는 역사학자로는 실격이었다. 사실을 떠날 수 없는 역사적 상상력보다 아무 제한없는 시적 상상력이 내게는 훨씬 재미있었다. 우연히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책을 읽으면서 몇 년 전부터 신화라는 이야기와 상징체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화야말로 자기 경영의 요체를 담고 있는 거대한 상징 체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화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가 어느 날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역할과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자각하고는 시련과 고난을 이기고 주어진 과업을 완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내적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법을 수련하여 드디어 평범한 사람은 결코 해낼 수 없는 과업을 성취하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된 힘을 가지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그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게 되는 이야기다. 신화란 그 이야기 속에 자기 혁명의 진수와 핵심을 뼈와 살로 품고 있는 비서임을 알게 된 것이다….

신화에 대하여 몇 년간에 걸친 책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나는 어떻게 영웅이 자기를 구현해가는 과정을 밟아갔는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도구와 모델을 찾고 싶었다. 그것은 변화경영사상가이며 작가인 내게 꼭 맞는 임무였다. 이 일은 즐거움이고 기쁨이었다.

시인은 말한다.

 

꿈 속 미풍에 실려 온 홀씨 하나

땅에 묻히더니 이내 종려나무 싹이 되었네.

우듬지가 쑥쑥 하늘을 향해 커가더니

어느새 머리가 별에 닿았네.

머리카락에 별을 잔뜩 달고 내려다보네.

 

문득 내 속에 울리는 <파우스트> 속 외침,

저 문을 열어 젖히라, 사람마다 통과하기 주저하는 저 문을.”

푸른 바다를 향한 열망이 나를 이미 선원으로 키웠으니

나는 독에 메어둔 배에 올라 묶어둔 줄을 풀고

두려움과 기쁨으로 가득 차 바다로 나서네, 나의 세상을 찾아서.

 (p449-452)

키가 자라 머리에 별이 닿았네라니. 451페이지에 걸쳐 등장한 모든 문장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문구다. 소중히 담아둔 홀씨 같은 꿈을 키워 한 그루의 나무로 키워낼 수 있기를, 그렇게 살 수 있기를.

 

3.  내가 저자라면

 

이름없는 사람들,

자신의 세상을 갖지 못한사람들,

아직 긴 모험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신화란 자신을 찾아 떠나는 위험함 모험을 선동하는 북과 나팔이다

그러므로 이 위험한 대화를 기억하다,

 

너는 왜 아버지의 집을 떠나왔느냐?”

불행을 찾아서지요.”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중에서

 

책을 열어 처음 만난 이 문장을 책을 덮고 나서야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시작과 끝에 이 책의 나아갈 바를 정리한 선언문과 친절한 설명문이 있었음에도 나는 한번에 이 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기 저기 줄 쳐 놓고 포스트잇으로 표시해둔 글들을 되새김질하듯 주욱 옮겨 적은 후에야, 간신히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린 시절 각인된 할머니의 이야기 보따리 같던 신화를 성년의 모험과 자기 혁명의 서사로 고쳐 읽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서인지 책을 보는 내내 꽤나 헤멨다.     

 

구조를 들여다보고 작가의 의도에 좀 더 접근해보려면 목차를 살펴보라 했다. 일단 보자

 

    프롤로그: 고대 그리스인처럼 모험하라

       

1부 신화가 된 인간

 

1장 미케네: 모험의 시작

프로메테우스

아르고스의 페르세우스

메두사

카시오페이아와 안드로메다

티린스의 페르세우스

 

2장 크레타: 탐욕의 끝

크레타인

미노스왕

아리아드네

다이달로스

 

3장 아테네: 문명이 꽃피다

테세우스

메데이아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

아스클레피오스

 

4장 테베: 가장 장엄하고 비참한 자의 탄생

오이디푸스

이오카스테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크레온

 

2부 트로이전쟁, 겨루는 자의 함성

 

5장 아테네 트로이: 출항

헬레네

아가멤논

 

6장 트로이: 격돌

아킬레우스

파리스

헥토르와 안도르마케

 

3부 혹독한 귀환

 

7장 아테네: 운명의 굴레

클레임네스트라

엘렉트라

오레스테스

이피게네이아

 

8: 트로이 이타카: 승리한 자의 고난

트로이의 오디세우스

칼립소

나우시카

폴리페모스

키르케

그리스의 영웅들: 저승에서 다시 만나다

헬리오스의 오디세우스

페넬로페이아

 

9장 트로이 로마: 위대한 로마의 탄생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

헤카베와 폴릭세네

트로이의 유민들

여왕 디도

시빌라

라비니움의 아이네이아스

레아 실비아

 

에필로그: 키가 자라 머리가 별에 닿았네

 

이런, 그러고 보니 이 책의 주인공은 신이 아니라 신화가 된 인간들이었지! 신화의 주인공들인  신들의 소개가 오히려 Tip으로 각 장마다 서비스로 등장하는 구조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그리스인 이야기가 되어야 했구나. 책을 그토록 두서없이 읽고 나서, 목차를 옮겨 적어보니 조금씩 이 책의 얼개가 들어온다. 이제야 왜 그 어린 시절 즐겨보던 신화의 감흥을 불러오지 못 했는지 알겠다. 분명 내 취향의 소재와 눈 호강이 되는 그림으로 가득한 이 책을 그냥 맘 편하게 즐길 수 없었는지 알겠다. 그러라고 만든 책이 아니었다. 저자는 그 의도를 표지와 서문과 목차와 내용 전반에 걸쳐 다 밝혀 두었건만 나만 딴 것을 기대하며 읽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신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나의 세계가 없는 평범한 삶에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세계 하나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자주적 삶의 방식도 없고 정신적 독립성도 없는 대중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삶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마침내 세상에 자신의 작은 왕국 하나를 건설해나가는 이야기다. 성공과 실패가 하나의 물결처럼 서로를 교환하는 것,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모멸이 온 몸을 휩싸는 일에 뛰어드는 것, 모든 신화는 이 무수한 모험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신화 읽기를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그런 류의 책들은 너무도 많다. 이 책은 모험의 선동을 위해 쓰였다. 모험에의 초대,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다.(P18-P19)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모멸이 온 몸을 휩싸는 일에 뛰어드는 것이란 표현에서 나는 움찔한다. 어찌 됐든 보호막이 될 단 하나의 핑계거리도 남겨두지 않는 승부, 온 몸을 내던져 나아가야 하는 모험. 지금껏 어떻게든 피해왔던 대면을 하도록 나를 피할 수 없는 전장으로 몰고 갈 도전. 자기 혁명과 모험을 선동하는 텍스트로서의 신화 속 영웅 만나기. 이 책의 목적을 위한 프롤로그로서 완벽하다. 자꾸 를 대입시켜 곱씹게 하는 문장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이 프롤로그는 위대한 문명조차 칠흑 같은 원시를 품고 있다는 시작점에서 독자를 직접 모험에 뛰어들라며 대놓고 이야기하는 마지막 문장까지의 간극이 길고 크다. 그 덕에 처음에는 원시에서 문명으로 나아가기까지 그리스의 신화 및 역사를 훑는 책으로 기대를 하게 된 것 같다. 전반적으로 순차적인 구성이므로 그 기대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라 할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의 주안점은 그게 아니다. 그러므로 프롤로그에서는 시작부터 위에 인용한 마지막 문장까지 더 간결하고 직접적으로 독자를 안내했으면 어떨까 싶다. 그렇다고 위대한 문명조차 칠흑 같은 원시를 품고 있다는 이 함축적이고 근사한 리드 문장은 버리지 말고.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표지부터 각 장의 구분 페이지에 쓰인 패턴과 그림들이 참 흡족하다. 특히 책 초반에 자주 등장하는 에드워드 번 존스의 작품은 이야기만큼 극적인 구성이어서 감탄했다. 신화를 다룬 책들에 등장하는 신상을 멋없이 찍어낸 사진들에 비하면, 다양하게 신화를 해석한 화가들의 그림을 보는 것은 글을 떠나 또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격노한 메데이아, 에드워드 번 존스의 페르세우스를 그린 운명의 굴레, 존 워터하우스, 귀스타브 모로이들 덕분에 신화 속의 인물들을 내 앞에 있는 양 관찰하고 그 심정을 헤아려보는 기회를 한번 더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은 편집자의 안목인가? 작가의 취향인가? 무엇이 되었든 감사하다. 사실 다이어리는 많이 아쉬웠지만 그림들을 보며 그래, 책값이 이 정도는 해야겠군이라고 수긍하게 되었다. 그 대신 줄치기가 넘 힘들었다! 맘에 드는 책일 수록 형광펜과 포스트잇으로 처덕 처덕 꽃거지를 만드는 나의 심화독서법을 실천하기가 넘 황송한 고급장정이었던 것이다. 이거 참, 이렇게 멋지게 꾸며놓으면 눈이 호강이지만, 함부로 손댈 수가 없으니 책을 잘근 잘근 씹어 소화하기에 불편함이 따르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책을 찬찬히 살피면서, 이 책을 성년기의 도전과 분투, 좌절과 수용, 내적인 성장에 이르는 내용들로 카테고리화해 20, 30, 40대의 성장에 맞는 이야기로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미 그런 구성들이 다른 책에서 많이 시도되었을 지 모르겠다. 특히 아이네이아스의 기나긴 방랑과 마침내 꿈에 그리던 정착지를 찾고 난 후의 치열한 전투에서, 성년의 사춘기를 맞은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가르침들이 풍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데이아와 오디세우스의 비극에서도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에서 패대기 쳐질 때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살아가는 인간의 의지 앞에 숙연해졌다. 역시, 마흔의 사춘기에 절절하게 공감하는 이야기들이다. 어쩔 수 없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그러하니 이 모든 이야기들이 내 안의 나를 찾아 떠나야 하는 마흔의 모험을 촉구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니 나라면 그렇게 쓰겠지?

또 하나 이 책을 읽으면서 감사했던 점은 너무 친절했던 주석과 팁들이다. 워낙이 어릴 적 젤 좋아하는 동화로서 그리스신화를 접하고 그 후엔 신화 읽기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없던 터라, 주요 신들을 제외한 다른 신들의 역할과 상징 등을 살피는 재미가 쏠쏠했다. 책과 영화 등을 통해 관심 있게 보았던 교차로의 악마, 지옥의 사냥개, 황금가지 등 재미난 상징과 에피소드들이 사실은 그리스신화에서 그 기원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도 즐거웠다. 그러고 나니 반쯤 읽다 꽂아둔 황금가지와 서문에 눈도장만 찍어둔 서양철학사, 로마제국쇠망사를 다시 들여다 보고 싶어졌다. 바로 그거다! 책장을 덮자마자 다시 곁가지를 뻗듯 다른 책으로 모험을 떠날 마음을 부추기는 책이라면. 내가 쓰고 싶은 책을 정의하는 작가론에, 이것도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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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12:30:49 *.20.137.74

아무리 고쳐봐도 블로그 텍스트가 폰트와 글자체가 일그러져 올라가네요. 제 컴퓨터의 문제인지... 읽으실 분들에게 넘 어지러운 텍스트라 죄송합니다.... 첨부파일로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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