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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9일 02시 37분 등록

 책:  <제국의 미래>  에이미 추아 . 이순희 역. 비아북. 2008.
      원제; <Day of Empire >  Amy Cua . Doubleday.  2007

 


*** 저자에 관하여

에이미 추아는 1962년 일리노이주 Champaign에서 태어났다.
중국명은 蔡美兒 이다.

부모님은 필리핀에서 자라난 중국인으로서 1961년 보스턴으로 왔다.
아버지 레온 추아는  MIT에서 채 2년이 되기도 전에 박사학위를 땄고 31세에 종신교수로 임용되었다. 1971년 UC 버클리로 초빙 받아  그곳으로 이주했다.

에이미 추아와 그녀의 세 여동생은 미국 중서부에서 자라면서 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살았고 집에서는 항상 중국말을 사용해야 했으며 매일 오후에 수학과 피아노를 공부했고 모두 뛰어난 학업적 성취를 이루며 차츰 미국인으로 동화되어갔다.

성공한 중국인 이민자의 2세로서 미국사회에 잘 적응하고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지만 漢족으로서  혈통의 순수성과 정체성을 잃지 말 것을  엄격하게 요구받으면서 자라나서 내면에 “이방의 야만족 잡종”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유대계 미국인 제드 러벤펠드( Jed Rubenfeld, 예일대 교수, 미국 헌법사와 형법에 정통한 법학자. 2006년 소설  ‘살인의 해석’을 발표해 초판부수 18만 5천을 찍고 32개국에 판권을 팔았다.)와 결혼하여 소피아와 루이자 두 딸을 두고 있다.

1980년 El Cerrito high School을 졸업했고
1984년 Harvard College에서 Economics를 전공
1987 Harvard Law School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초에 월 스트리트의 법률회사에서 일하며 멕시코의 시장민영화를 도왔고
1998년 아시아의 IMF 동안 세계은행에서 일했다.
국제 경영과 인종갈등 국제관계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이며,
정계 경제계 학술단체를 대상으로 세계화의 영향에 관한 주제로 강연을 해오고 있다.

듀크 ,컬럼비아, 스탠포드, 뉴욕대를 거쳐 2001년-2005 예일대 법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 이후로 예일대 John M. Duff Professor of Law로 일하고 있다.

2003년에 <불타는 세계, World on fire>를 출간했고 ,이 책은 그해 ‘에코노미스트’ 가 선정한 그해의 책이 되었으며 2007년 <제국의 미래, Day of Empire>를 출간하였다.

에이미 추아는 이 책을 미국의 관용에 바치는 책이라고 하였다.
그녀의 부모님을 이끌어 온 나라, 그녀의 가족이 번영하고 그들의 방식대로 변화하면서 미국인이 될 수 있게 해준 것을 감사하고 있다.

책의 본문 108-110쪽에, 1999년 집안의 조상의 흔적을 찾아서 푸젠 성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기록했고, 475-476쪽에도 93세의 외할아버지가 미국 시민권을 받았을 때의 일을 회상하고 있다.


***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서문
세계 제패의 비결

4. 세계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단순한 초강국에 불과했고,미국에게는 쉽게 증오심을 터뜨릴 수 있는 전제주의 경쟁국이 있었다. 이라크전과 허리케인 ‘카트리나‘라는 재난이 휩쓸고 간 지금 사람들은 미국의 쇠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6. 이 책은 초강대국을 다루고 있다. 단순한 대국이나 초강국이 아니라 초강대국에 관한 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초강대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을 축적하여 세계를 지배했던 극소수의 사회들을 이르는 것이다.

7. 이 책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초강대국들은 서로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 적어도 해당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절대적인 우위에 오르기까지는 하나같이 대단히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나라들이었다. 제국의 쇠퇴는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의 경우 관용은 결국에는 극적인 변화지점을 건드려서 반목과 폭력을 유발했다.

8.제국의 조건
#그 나라의 권력은 동시대 경쟁국들이 장악한 권력을 분명히 능가해야 한다.
#그 나라는 지구상의 그 어느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경제력, 혹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나라는 단순히 특정한 한 지방 혹은 지역에서의 우위라는 테두리를 넘어서서 지구상의 방대한 인구에 대해서 권력을 행사해야한다.

9. 이 책의 대부분은 초강대국이라는 조건에 부합하는 사회들을 고찰하고 각각의 나라들이 세게적인 패권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관용이 어떻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밝히는데 할애될 것이다.
관용이 중요한 이유는 한사회가 세계적인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군사적 경제적면에서 세계의 최첨단에 서 있어야만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능력과 지혜를 갖춘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야만 한다.

10. 내가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권과 관련된 현대적 의미의 관용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의미한다. 아주 이질적인 사람들이 특정한 사회에서 생활하고 일을 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종, 종교, 민족, 언어 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회에 참여하고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일컫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관용에는 존중이 포함되지 않는다. 이 책의 핵심적인 개념은 ‘상대적인’관용이다. 즉 경쟁자들과 비교해서 더 관용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11. 관용이 세계제패에 이르는 충분조건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리, 인구, 천연자원, 그리고 지도력 등의 추가적인 요소들이 반드시 합쳐져야만 세계적인 패권국가라는 희귀한 존재가 출현한다. 물론 운도 작용한다.
12. 그러나 관용이 세계제패의 필수조건이라는 것, 그리고 역으로 불관용은 초강대국의 쇠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15. 2001년 9월 11일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 후 한 달이 채 못 되어 초강대국은 전쟁에 돌립했다. 일 년 후 미국은 “미국 군사력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고 선제행동을 할 권리를 표명하고 미국단독의 군사적 우월성을 유지하는 데 전념할 것을 천명하는 내용의 국가안보전략을 발표했다.

21.나는 선택적 편견의 영역을 최대한 넓혀서 세계적인 패권국가의 위상에 부합하는 역사속의 사회들을 모두 고찰하는 방식으로 선택적 편견을 피해가려고 노력했다.

22. 1부는 근대이전의 초강대국들에 대해 서술했다.
    2부는 계몽화된 관용에 관한 내용이다.
    3부는 대영제국의 몰락에서 눈을 돌려 현대를 살펴볼 것이다.

1부 고대제국의 관용

1장 최초의 패권국가, 페르시아-아케메네스

34. 아케메네스 왕조는 기원전 559년 키루스 대제가 세우고 20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현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다양한 문화와 개방적인 종교를 갖추고 잇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은 로마제국은 물론이고 고대의 그 어떤 제국보다 큰 영토를 다스렸던 역사상 최초의 패권국가였다. 페르시아 제국은 정복과 병합을 통해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이집트의 위대한 왕조들를 복속시켰으며 전성기에는 세계인구의 3/1에 가까운 4200만 명을 거느렸다.

36. 페르시아 왕국은 수많은 부족과 씨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아케메네스도 그중 하나였다.

39. 아케메네스 왕조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키루스 대제로부터 시작된다.
기원전 550년 키루스는 아스티아게스를 무찔러 메디아 왕국을 차지했고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카파도키아에 대한 권리를 넘겨 받았으며, 기원전 539년에는 리디아 왕국과 강력한 신 바빌로니아 왕국을 정복했다.
키루스가 썼던 전략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참수’전략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도자의 머리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지도력을 잘라내는 전략을 썼다.

43. 키루스는 해당지역의 신(바빌로니아의 마르두크,유대의 여호와)을 포용함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고 해당지역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함으로써 피 정복민의 저항과 반란 가능성을 줄였다.

45. 아케메네스 왕조는 다리우스 대제 치세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다리우스는 약 40년(BC522-486)동안 통치하면서 페르시이의 영토를 인도까지 넓히고 그리스에 발판을 강화했으며 동유럽까지 손길을 뻗었다.

46. 다리우스는 누가 보아도 뛰어난 행정가였다. 그는 고대 건축의 경이로 꼽히는 페르세폴리스를 세웠을 뿐 아니라 새로운 수도시설의 건설을 감독했고 표준 화폐를 도입했으며 완벽한 도로망. 왕실 우편제도. 급행배달. 화재경보 등 통신체계를 확대했다.

56. 기원전 338년경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왕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통일했고, 그가 죽은지 6년만에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한때 무적의 제국이었던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다.

64. 알렉산드로스는 제국의 전역에서 병사들을 모집하여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군대를 만들었다. 젊은 페르시아 병사 3만명이 체력과 품위를 기준으로 선발되어 그리스 언어와 마케도니아의 전투 기술을 훈련받고 군대에 편입되었다. 기병대는 페르시아인뿐 아니라 박트리아,소그디아나,아라코시아,아레이아, 파르티아 출신의 병사들도 있었다. 해군 역시 다양한 민족 출신의 병사들로 이루어졌다. 그는 2000척에 가까운 전함으로 이루어진 대함대를 이용한 12만명의 병력을 인더스강에 상륙시켰다. 전함의 지휘관들은 대부분 그리스와 페르시아출신이었고 선원들은 페니키아, 키프로스, 이집트 출신이었다.

65.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덕분에 그리스의 언어 문학 미술 건축 철학은 지중해를 건너 여러대륙, 여러나라로 퍼져나갔다. 이집트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했던 여러 도시국가에서는 ‘야만인’의 사상이 그리스어로 옮겨져 제국에 흡수되었고, 이를 통해 혼성문화가 탄생했다. 헬레니즘이라고 알려진 이 문화는 이후 기독교와 서구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66. 서른 두 살의 알렉산드로스는 다음 목표인 아라비아, 지중해서안, 유럽 정복을 앞두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으로 쓰러졌다.

2장 팍스 로마나, 세계인의 탄생-로마

68. 로마 제국은 하나의 관념이었다. 로마제국의 외떨어진 변방에 사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로마인’이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도 그들은 로마인이 되었다.

69. 로마인들은 의식적으로 “세계 제패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기원전 75년 로마 공화국은 로마의 세계 제패를 상징하는 “홀, 구, 화환, 방향타” 가 새겨진 동전을 주조했다.
로마는 엄청난 규모의 군사력뿐만 아니라 서구 문명의 새로운 정점을 상징했다. 로마는 과학

70.로물루스가 전설적인 도시국가 로마를 건국했던 기원전 753년부터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튀르크에 함락된 서기 1453년 까지, 2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로마의 영광‘은 지속되었다.

73.“로마인들이 자국의 힘을 전 세계로 확장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주민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윌슨은 로마가 전략적으로 채택했던 관용이야말로 “ 제국을 확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74. 시민권을 인정받은 사람의 수는 전체인구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78. 역사학자들은 대략 트리야누스부터 시작되는 네 황제의 재위 기간이 전성기에 포함된다는데에 는 대부분 합의하고 있다.
트리야누스는 서기 98년부터 117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했고 후대의 로마사람들에게 ‘옵티무스 프린켑트’, 즉 최고의 군주로 알려졌던 황제다.

79. 하드리아누스는 트리야누스의 후계자로 117년부터 138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했다. 그는 그리스 문화에 열광하는 코스모폴리탄이자 로마 역사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행정가였다.
하드리아누스는 공세적인 전쟁을 중단하고, 제국의 강화, 방어, 미화에 관심을 쏟았다.

80.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인 안토니우스 피우스(138-161년)의 치세에 이르러, 팍스로마나의 안정과 번영은 절정기에 다달았다.

81. 161년부터 180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햇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른 어느 황제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현인 왕이었다.

87. 로마에 속한 다양한 민족들에게 로마는 ‘코무니스 파트리아’, 즉 공동의 조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로마는 또한 유용하다는 판단이 서기만하면 서슴없이 다른 민족들의 전통과 지식, 관습을 받아들였다.
그리스 문명을 본보기로 삼았던 로마제국은 도시, 즉 폴리스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88.로마는 그리스 로마 문화를 성공적으로 수출하면서도 각 지역의 언어나 전통을 말살시키려 하지 않았다.
91. 그들의 목적은 다른 민족들을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로마의 관습, 생활양식, 풍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인종적인 혈통에 관계없이 어떤 집단이든 완전히 제국에 통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로마는 너그러운 나라였다.

93. 제국으로 흘러드는 새로운 민족들의 끝없는 대열을 통합시키고 동화시키는 로마의 적극성과 능력, 이것이야말로 로마가 위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94. 로마사람들은 페르시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신론자들이었으며, 민족이 다르면 숭배하는 신도 다르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로마식 세계관에 따르면 , 거의 모든 만물에는 신이 존재한다.

99. 관용은 로마가 세계적인 대국으로  발전하고 팍스로마나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땅에 뿌려진 궁극적인 붕괴의 씨앗이었다.
초기의 위대한 황제들은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였고, 그들의 관용정책은 전성기에는 로마에 이롭게 작용했다.

100.전성기가 지난 로마에서 종교적 박해와 인종적 불관용이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불관용은 로마가 쇠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제국의 분영을 재촉하는 원인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105.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그 자리에는 현재 유럽 국가들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호전적인 ‘야만인’왕국들이 들어섰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앗던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1000년 이상 존속했다.

106. 로마의 붕괴는 로마가 도저히 동화시킬 수 없는 민족들, 혹은 로마가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문화의 습관을 가지고 있는 민족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동화시키는 데 실패하면서 시작되었다. 종교적인 불관용과 인종적인 불관용이 결합하면서 로마는 전쟁과 내란에 휩싸였고, 전쟁에서도 내란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3장 중국의 황금기-당

110. 나는 중국의 서예, 과학, 시, 경극, 철학, 자연주의, 유교에 매력을 느끼는데, 그 까닭은 그 모든 것이 어릴 적 내가 겪었던, 제 3세계라는 절망적인 중국의 현실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당 왕조는 중국이 유례없는 번영을 이루며 정치적 패권을 휘둘렀던 시대이자 문학과 예술의 전성기로서 이후 왕조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본보기였다.

111. 진시황제는 기원전 221년에 처음으로 중국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다.

112. 시황제의 통치 기간은 짧았지만, 그가 세운 강력한 원칙은 중국사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등장하게 된다. 그 원칙은 바로 중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다양성에 대한 가혹한 억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13. 만리장성은 중국의 통일성, 영토적 통합, 배타성, 그리고 '야만인들'로부터 중국의 우월한 문명을 격리시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흔들림 없는 필요성을 상징한다.

114. 618년에 한족과 돌궐족의 피가 섞인 북부 벌족 출신의 이연이 수나라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후 군사를 이끌고 수도 장안(지금의 시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장 왕조를 열었다. 당 왕조는 그 후 300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게 된다.

115. 불교는 중국의 특유한 요소들을 흡수하고 수용하여 중국에 맞게 변형되어 있었다.
116. 당의 두 번째 황제인 태종.


117. 태종 이세민은 고조의 여러 아들 중 하나였다.
그는 아버지를 황제의 자리에서 내몰고 황제로 등극하여 20년 이상(626-649)통치했다.

118. 태종은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다. 그의 치세에 방대한 땅이 당 왕조에 편입되었다.

119. 태종 이후의 황제들은 당의 지배권을 더욱 확장하여, 만주, 한반도의 대부분, 베트남  중부, 그리고 현재의 이란 일부까지 손에 넣었다.
태종은 국고를 털어 실크로드를 재정비했다.

120. 당의 지배권과 보호가 강화된 덕분에 실크로드가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해지자, 이방인들, 이방의 물건들, 그리고 관습들이 아시아 서부와 남부에서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지인 장안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었다가 다시 중국 전역으로 흘러들어갔다. 멀리 비잔틴제국과 사산제국에서도 사절단이 찾아왔다.
당 왕조는 300개가 넘는 나라 및 지역들과 공식적으로 교류했다.

121. 중국의 부유한 가정은 외국인 노예에게 집안일을 시켰고, 외국의 군주들이 선물로 보낸 외국인 음악가, 무용수, 난쟁이, 창부가 당 왕실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당률에 따르면, 외국인들의 거주지는 대개 장안, 뤼앙, 광둥, 그리고 양저우의 교역 중심지와 육상 교역로로 제한되었고, 중국인들과 거래 관계가 없는 외국인은 중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으며, 외국인들과 결혼한 중국인은 2,000리(약 600킬로미터)밖으로 추방되어야 했다.

122. 예컨대 태종은 7만 명의 신라인들을 중국에 받아들이고, 중국에 정착한 신라의 귀족과 관리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645년경 중국의 유명한 불교 승려인 현장은 16년 동안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순례한 뒤 650개가 넘는 인도의 불경과 150개의 불교 물품을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죽기 존에 불교가 중국의 종교들보다 우월하다고 선언했다.

123. 태종의 치세는 중국 역사상 종교 다원주의가 매우 융성했던 시대로 손꼽힌다.
태종의 치세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이 종교들은 모두 실크로드를 지나가던 여행객들에 의해서 중국에 도입되었다)가 주로 외국인 신도들에 의해서 자유롭게 신봉되었다.

124. 새로운 계보도는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태종의 고위 대신들의 가문을 중국 최강의 벌복보다 높은 지위로 끌어올렸다는데, 이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의미했다. 첫째, 학자 출신의 관리들이 단순한 귀족 혈통보다 우위에 놓이게 되었으며, 둘째, 과거제도를 통해서 행정부에 진출한 지도 계층이 출현하게 되었다.

125. 태종의 다른 아들이 고종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고종은 허약하고 게을러서, 오랜 치세(649-683)중 대부분의 기간 동안 측천무후의 뜻에 따라 통치를 했다.
무조(측천무후의 이름)는 빼어난 용모와 비상한 지혜를 가진 여성으로, 비정하기 짝이 없는 정치적 기회주의자였다.
652년에 아들을 낳았으며, 655년에는 황후의 지위에 올랐다.
고종이 죽은 지 7년째 되던 해인 690년 무조는 공식적으로 최초 권력의 자리에 올라 측천제라는 황제의 직함을 달고 새로운 주 왕조를 열었다. 중국 역사에서 여성이 천명을 손에 넣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26. 측천제는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약삭빠르게 불교를 이용했다. 그녀는 694년에 정분을 나누던 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미래의 극락을 다스릴 구세주인 미륵보살의 현신이라고 공표했다.
측천제는 더 나아가 중국의 전통적인 사회구조를 변화시켰다.
측천제는 또한 과거제도를 체계화하고 확대하여, 혈통이 아니라 경쟁에 의해서 관리를 선발했다.

127. 705년 측천제는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씨 가문은 7년 동안 죽고 죽이는 싸움 끝에 황제의 옥좌를 되찾아, 712년 당 왕조가 복원되었다. 새로운 황제는 현명한 군주라는 뜻으로 명황이라고 불렸는데, 그의 치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의 개화기였다.
거의 반백 년(712-756)에 가까운 그의 치세는 당의 황제들 가운데 가장 길다.
황도 장안은 방대한 당 제국의 중심이었다. 장안은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128. 장안은 다양한 분위기가 뒤섞인 화려한 도시일 뿐 아니라,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이백, 왕유, 두보 등의 시인들은 모두 이 시대 사람들이었다.
명황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에게 관대하고 문화적, 종교적 차이에 관대했다.

131. 당의 황제들은 중국의 다른 왕조의 황제들과는 달리 동시대의 제국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외국 도시들의 일상생활을 파악하려고 애를 섰다. 당 황실의 기록 중에는 비잔틴제국에 관한 놀라우리만큼 상세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133. 1,000년 후 중국을 다스렸던 청 황제들(1644-1912)의 기록들과 비교하면 바깥세상에 대해 훨씬 많은 지식을 과시하고 있다. 통신과 교통이 세계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청 황제들은 부상하는 유럽의 대국들에 대해서 굉장히(거의 의도적이라고 할 만큼)무지했고,유럽의 대국들은 "공물을 바치는 야만인들"이라고 싸잡아 취급하길 좋아했다.

134. 실제로 일부 역사학자들은 중국이 유럽의 지배에 저항할 수 없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청 황제들의 서구에 대한 무지를 꼽는다.

136. 문제는, 당 제국이 '야만인들'과 중국인들을 한데 묶어줄 공통된 정치적, 언어적, 문화적 '접착제'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명황은 제국 전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외국의 병사들, 특히 돌궐족 병사들에 대한 의존도를 점차 높여나갔다.

137. 당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755년에 일어난 안녹산의 난이었다.
750년에 그는 장군이 되었고, 조정의 총아로서 어릿광대 같은 익살로 양귀비의 마음을 사로잡고 황제를 기쁘게 했다.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 그는 북부의 중요 세 지역(지금의 베이징, 산시, 산둥)에 대한 독점적인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고 20만 명의 병사와 3만 필의 말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안녹산의 난은 8년 뒤인 763년에야 완전히 진압되었고 당의 혈통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다.

140. 제국 안에서 균열이 나타나 위구르족, 티베트족 등 비중국 민족이 점차 위협을 가하자, 중국인들의 타고난 불관용이 급격하게 끓어올랐다.

141.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국 고유의 가치와 고대 중국의 문화를 지키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와국인들의 영향력과 사상이 사악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길들이 완전히 폐쇄되었다.
첫 번째 과녁은 위구르족이 많이 신봉하는 마니교였다.
당조 말기에 불교계는 크게 타락했고, 조정은 재정적으로 쪼들리고 있는데도 절은 괘씸할 만큼 풍족했다.
 
142. 무종은 남녀 승려 26만 명을 강제 환속시켰는데, 4000곳이 넘는 절과 4만 곳이 넘는 작은 암자들이 폐쇄되었다.
당 왕조가 멸망한 해는 주전층이 당 황실의 마지막 소년 황제인 애종을 상해한 907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4장 유럽을 삼킨 초원의 지배자-몽골

145. 750년 전에는 웅장한 천막 도시 카라코룸이 있었다.
그들은 바그다드, 베오그라, 부하라, 키예프, 모스크바, 다마스쿠스, 사마르칸트 등 당대의 거대한 도시들을 포함해서 당시 알려져 있던 세상의 절반을 다스렸다.
1162년, 거친 초원 지대의 황량한 구릉에서 테무친이라는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146. 칭기즈칸은 뛰어난 군사 책략가였다. 또한 몽골족은 전투에서는 아주 잔인하게 행동했다.
칭기즈칸은 만인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공표했다.
몽골족이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고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잔혹함이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관용에 있었다.

148. 장성한 뒤에 테무친은 혈통에 기초한 초원 지대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완전한 혈족 체제 대신 공적과 충성도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체제를 도입했다.

150. 그는 패배한 부족의 지도자와 대부분의 남자 '귀족'들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가 아니라 동등한 성원으로 자신의 수하에 편입시켰다.
151. 대대 열 개를 모아 '투멘'을 만들었다. 1만 명의 병사가 소속된 투멘의 지휘관은 테무친이 직접 임명했다.
테무친은 재능과 충성도를 기준으로 부관과 자문관을 선발했다.
테무친이 혈연관계보다는 공로를 강조한 덕분에 낙타몰이꾼과 소몰이꾼들이 장군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대담함뿐 아니라 교활함과 참을성도 높이 샀다.

152. 장군은 허기와 갈증에 대해 생각하면서 부하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부하들과 동물들의 힘을 아껴 쓸 줄 알아야 한다.

153. 그 뒤 테무친과 함께 있던 부관들은 지휘관인 테무친과 끝까지 신의를 지킬 것을 맹세했다. 뜻밖에도 스무 명밖에 되지 않았던 이들은 아홉 부족 출신이었고, 그 가운데에는 테무친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푸른 하늘과 부르칸 칼둔의 신산을 숭배하는 정령신앙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불교도, 기독교도. 이슬람교도도 있었다, 출신 부족도 가지가지, 종교도 가지가지이면서 형제의 맹세를 한 이들은 테무친이 칭기즈칸이 되어 얼마 후 건설하게 될 새로운 사회를 상징했다.

154. 1206년 테무친은 자신의 패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초원 지대 모든 지역의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쿠릴타이'라는 대회의를 열었다.
테무친은 수만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모든 부족의 지도자인 칭기즈칸의 자리에 올랐다.

156. 새로 창안된 위구르-몽골 문자는 위구르문자와 거의 같았지만, 중국어처럼 위에서 아래로 세로로 쓰는 문자였다.

159. 몽골 군대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포로들을 꼼꼼히 조사하여 기술을 가진 사람을 찾아냈고, 자진해서 투항한 기술자들에게는 후한 보상을 내렸다. 칭기즈칸은 이런 방법으로 수많은 중국인 기술자들을 확보하여 성벽을 두른 난공불락의 도시들을 함락하는 데 필요한 강력한 공성 장비(이동식 공성탑, 화살이나 불덩어리를 난사하는 투사기 따위)를 만들 수 있었다.

160. 1215년 중국 북부가 완전히 정복되자 몽골족은 엄청난 전리품을 챙겼다.

161. 그러나 더중요한 전리품은 바로 인적 자원이었다.
칭기즈칸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으면서도(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르지만), 여러 민족 출신의 학자들을 등용했다. 특히 여러 나라말에 능통했던 야율초재는 거란 왕족 출신으로 끝까지 칭기즈칸을 섬기며 충실하고 지혜로운 충언을 했다.

163. 수만 명의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을 칭기즈칸 군대의 중앙아시아 횡단은 오늘날까지도 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단한 군사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165. 그러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칭기즈칸의 보호를 받았고, 유리 제조공, 도공, 목공, 가구장이, 요리사, 이발사, 보석, 세공사, 가죽 세공사, 종이 제조공, 염색공, 의사, 상인, 낙타몰이꾼에 이르기까지, 어떤 기술이라도 가진 주민은 적극적으로 채용되었다.

166. 1227년 그는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끝까지 그에게 충성했던 장군들에게 둘러싸인 채 숨을 거두었다.

167. 노년이 되자 그는 "세계를 통일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들들에게 "마음속에 목표를 세워두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생은 물론이고 자기 인생도 제대로 경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수도는 '검은 돌' 혹은 '검은 성벽'을 뜻하는 카라코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69. 그러나 수보타이가 이끌던 유럽 정벌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170. 러시아와 동유럽이 가장 먼저 무너졌다.
다음으로 몽골 군대는 독일, 폴란드, 그리고 헝가리로 몰려갔다. 유럽 기사제도의 '정수'를 쓰러뜨린 몽골 군대의 승리는 유럽 봉건제도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71. 하고 많은사람들 가운데 유럽 내부에 있는 유대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요크와 로마를 비롯한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분노한 기독교들이 이웃해 살던 유대인들을 박해하며 집을 불태우고 숱한 사람들을 살해했다.

173. 중세 유럽은 위대한 이슬람 문명과 중국 문명에 비할 바 없이 야만적이고 미개하고 빈곤했다.

175. 몽골 군대는 잔인하기는 했지만 종교적인 원한이나 열광은 품고 있지 않았다. 카라코룸의 몽골 조정이 종교를 대하는 태도나 학구열이 높은 대학들이 종교를 대하는 태도와 비슷했다.
뭉케 대칸은 토론자들이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는 진지한 종교 토론회를 주재하고, 토론자들의 공통된 입장을 찾아가도록 권장했다.

178. 몽케칸이 사망하고 20년 후에야 송은 완전히 정벌되었다. 송이 멸망한 결정적인 원인은 쓰촨성에서 발생한 이질 혹은 콜레라 때문이다.

179. 쿠빌라이는 그들과는 딴판으로 초원 지대보다 궁성과 도시를 더 좋아했다. 안락함과 향연을 즐기는 그는 몹시 살이 쪄서 젊어서부터 통풍을 앓았다.
1264년 아리크부카는 쿠빌라이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우리는 과거이고, 너희는 현재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패배를 표현했다.

쿠빌라이는 청두를 몽골의 새 수도로 선택했다.
180. 송 정복은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쿠빌라이는 그 사이에 갖은 선전 활동과 명민한 공공 정책을 통해서 중국인들에게 자신이야말로 '무관심하고 퇴폐적인 송의 지도자들 이상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미덕을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납득시키려 했다.
쿠빌라의 치세(1260-1294)는 길고 비교적 평온했다.

181. 쿠빌라이는 거의 전 생애를 중국에서 보내면서, 중국의 세련된 문화와 중국의 아름다운 건축, 그리고 질서 잡힌 중국 사회를 거리낌 없이 칭송했다.
뿐만 아니라 쿠빌라이는 최고의 인종적 관용을 베풀었다.

182. 그는 고대중국의 수도를 본보기로 하여 중국식 수도를 건축하고 중국식 황실 의식을 따랐으며, '근원' 혹은 '위대한 시작'을 뜻하는 '원'이라는 이름의 중국 왕조를 창시했다.
재능있는 위구르인, 거란인, 페르시아인, 중앙아시아인, 그리고 유럽인들을 중국의 지방관과 재상으로 삼았다.

183. 요컨대 쿠빌라이의 통치 원칙은 불관용이 아니라 세계주의였다.

184. 그러나 몽골인들은 907년 당의 멸망 이후로 찾아볼 수 없었던 평화와 정치적인 통일을 중국에 선사했다. 중국의 항구도시들은 수출과 수입의 중심지가 되었다.
몽골인들은 항저우에서 지금의 베이징까지. 1,770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운하를 건설하여 중국 북부와 남부를 연결했다.
'팍스몽골리카Pax Mongolica' 시대에는 다양한 종교를 선봉하는 다양한 민족 출신의 상인들이 큰 재산을 모았다.
186. 몽골의 마지막 위대한 황제인 쿠빌라이는 즉위 34년 만인 1294년 평온하게 숨을 거뒀다.

188. 14세기 몽골의 통치자들은 내부의 강력한 종교적 분파에 합세헸다.

189.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몽골인이라는 신분을 강조하고, 중국의 말과 문화를 거부했다.

191. 날이 갈수록 뿔뿔이 갈라지는 이들 왕국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접착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5장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 - 스페인

195. 역사적인 날인 1469년 10월 19일 17세인 아라곤의 왕위 후계자와 18세인 카스티야의 왕위 후계자가 음모와 비밀에 휩싸인 은밀한 예식에서 혼약을 맺었다. 만난지 나흘만에 이뤄진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결합으로, 통일된 스페인은 번영의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196. 강제개종은 이른바 개종한 유대교도를 뜻하는 콘베르소스라는 계층을 탄생시켰다.
197. 1391년 6월 세비야에서 유대교도 학살이 일어났다. 이 학살은 코르도바, 톨레도, 발렌시아, 바르셀로나로 빠르게 확산돼 수많은 유대교도들의 목이 베이고 수천명이 개종하게 됐다.
199. 상대적인 관용 덕분에 스페인이 거둔 수확은 영토팽창과 제국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페인은 비기독교도 주민들 덕분에 문화적, 지적인 영역에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노동력과 돈이라는 중요한 이득도 손에 넣었다...중세의 스페인은 마지못한 것이기는 했지만 유대교도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덕분에 엄청난 재정적 수익을 거뒀다.

200. 1478년 교황의 교서에 따라 스페인에 이단심문소가 설치되면서 상대적인 관용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이단 심문소는 이교도들이 사는 나라를 정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201. 1492년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유대교도들에게 가톨릭교로 개종을 하거나, 4개월안에 스페인을 떠나라는 칙령을 발표했다...1494년부터 1530년까지 약 1,000명의 콘베르소스들이 유대교를 믿은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203. 1557년과 1575년에 스페인왕실은 파산하고 말았다.

204. 스페인은 17세기 내내 광신적이며 자멸적인 불관용 정책을 지속했다....이단 심문소는 모두 3만2천명에 이르는 이교도들을 화형에 처했다.

205. 그러나 이단심문소, 추방, 순수한 혈통을 옹호하는 법령 등이 빚어낸 불관용은 스페인에 파멸적인 결과를 안겨줬다.

206. 관용은 세계제패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6장 자본주의 경제를 제패한 최초의 제국-네덜란드

209. 사향고양이는 고양이가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일종의 뭉구스이다.

210.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17세기 대부분의 시기동안 어마어마한 이윤을 남기는 유럽의 사치품무역을 주도했고, 사향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214. 16세기 대부분의 시기동안 저지국은 합스부르크 왕국의 일부였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국은 오스트리아에서 스페인까지 뻗어 있었다....1519년경 여러 왕가의 혈통을 물려받은
카를은 부르고뉴의 통치자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 네덜란드의 군주가 됐다. 같은 해에 그
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왕관까지 썼다.

215. 카를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네덜란드와 스페인에 대한 권리를 넘겨줬다...펠리페는
로마카톨릭 교회에 절대적으로 충성할 것을 요구하면서 네덜란드의 말을 쓰지 않는 가톨릭
교도들을 네덜란드 전역의 총독으로 임명했다...펠리페는 알바공작이 이끄는 1만여명의 병력
을 보내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처리하게 했다.

216. 1576년 재정적으로 쪼들리던 펠리페2세가 봉급을 주지 않자 굶주리던 스페인 병사들은 반항이 심한 북부를 떠나 번창하는 남부로 이동했다...스페인의 분노는 켄트조약을 탄생시켰고, 네덜란드 북부와 남부의 주들이 스페인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단합했다...2년뒤 그들은 충성포기선언을 공표했다.

218. 작은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유럽의 여러지역에서 쫓겨난 진취적인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덕분에 17세기에 이르러 세게적인 경제강국이 됐다.

219.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엄청난 경제성장에 있었다. 여기에다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특별한 종교적 관용 정책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220. 1675년에는 암스테르담에 화려한 세파르디 유대교 회당이 건설됐다.

221. “관용은 네덜란드 여러도시의 경제를 성장시키고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 긴급히 요구되는 이주정책을 촉진하는데 필수적인 것이었다”....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네덜란드 남부의 개신교도, 프랑스의 위그노교도, 독일의 루터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세파르디 유대교도, 유럽동부의 아슈케나지 유대교도, 그리고 영국의 퀘이커교도와 필그림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으로부터 종교적인 망명객들을 줄지어 끌어들이는 자석이었다.

223. 유대교도들은 오래전부터 대부업을 하면서 담보물로 나오는 보석류를 감정하고 세공하고 판매하는 전문적인 기술을 터득하게 됐다....1492년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교도들 가운데 많은 수가 리스본에 정착했고, 후일에는 앤트워프에 정착했다....두 도시는 급속히 발전해 국제적인 무역과 금융의 중추가 됐다...앤트워프는 합스부르크 왕국 전체의 담보물 교환소이자, 유럽 최고의 금융시장이 됐다.

227. 풍부한 은과 성능좋은 선박, 그리고 발트해 연안과 유럽 북부에 형성된 어느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무역 네트워크 덕분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의 상인이자, 무역의 중개인, 유럽의 중개인”이 되었다...아예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제쳐놓고 동인도제도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직접 자신들의 선박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228. 1602년 네덜란드의 상인들, 시민들, 대신들은 힘을 합쳐서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이는 공동자본으로 설립하고 주권권력으로 무장한 무역독점체였다.
238.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종교적 관용과 높은 임금은 독일,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심지어는 터키와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유럽 전역으로부터 숙련된 기술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239. 황금기의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17세기의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비할데 없는 문화적, 예술적, 지적 독창성을 분출했다...17세기 사상계의 위대한 3인방인 데카르트, 바루흐, 스피노자, 존 로크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243. 1688년 대규모의 네덜란드 함대가 영국을 기습하고 네덜란드 보병대가 런던을 점령했다. 네덜란드 총독인 오라네 공 빌렘 3세는 영국왕이 되어 아내인 메리와 함께 통치했다.

244. 네덜란드와 영국의 힘이 합쳐지면서 영국의 막대한 이득을 얻게되는 참으로 모순이라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7장 불관용의 덫-오스만, 명, 무굴

247. 오스만제국의 으뜸 황제 슐레이만

248. 위대한 이슬람 제국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나라가 바로 오스만제국이었다. 오스만튀르크족에 의해서 세워진 오스만제국은 대략 1300년경부터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지속됐다.
 
249. 오스만제국의 패권과 영화는 1520년부터 1566년까지 통치했던 슐레이만의 치세에서 절정에 달했다.
 
253. 고귀한 품성이란 선천적인 것, 혹은 후천적인 것이 아니라, 신의 은총인 동시에 적절한 훈련과 대단한 근면성, 그리고 열정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254. 예니체리의 신병들은 나라의 종이었으므로 독신으로 살면서 종신복무를 해야했다.

257. 1500년대 후반 이후 오스만제국을 약화시킨 요소들은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 술래이만의 눈부신 관용정책을 유지하지 못한 후계자들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59. 오스만제국은 1922년 완전히 붕괴하기 직전까지 격심한 인종적, 종교적 편협성, 분파주의, 폭력에 시달렸다.

260. 월등한 기술력을 보유한 명왕조...15세기 초반 명나라는 이슬람교도인 환관 정화에게 2만8천명이 넘는 인원을 실은 300척의 거대한 보물선을 맡기고 일곱차례에 걸쳐 인도양을 누비는 웅장한 항해를 하게했다....명대의 중국은 인쇄술, 화약, 나침반을 발명하는 등 기술적인 면에서 후진적인 유럽을 훨씬 앞서 있었다....명의 함대는 거대한 돛대가 아홉 개나 세워져 있는 보물선 뿐 아니라 1천350척의 초함, 400척의 전함, 그리고 곡물, 식수, 군마를 실은 400척의 화물선을 비롯해서 도합 4천척이 넘는 배로 이루어져 있었다.

261. 그러나 명왕조는 세계제패의 꿈을 품지 않았다. 1424년 이후 명의 황제들은 해군을 해체하고 외국과의 무역과 외국의 사상을 거부하면서 병적이라고 할만큼 폐쇄적인 태도를 취했다....주원장은 중국 왕조의 창건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262. 1403년 주원장의 아들인 영락제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263. 정화의 보물선들은 용적톤수가 2천500톤에 이르는 등 ....관리 868명, 병사 2만6천800명, 사령관 93명, 부사령관 2명, 천부장 140명, 백부장 403명, 호조판서 한명, 점술가 한 명, 군사교관 한 명, 군사재판관 두 명, 의료요원 및 조수 180명, 연락병 두 명 고참 환관대사 일곱 명, 하급환관 열 명 그리고 환관 시종 53명....정화가 거느렸던 선원들은 곡식과 신선한 물, 소금, 간장, 차, 술, 기름, 초, 장작, 석탄을 풍족하게 갖추고 있었다...그들은 오히려 각지역의 통치자들에게 상징적인 선물들(염색한 비단, 우산, 책이나 달력)을 주고 용의 침, 앵무새, 공작, 백단향, 금, 은, 엄청나게 큰 모정석, 루비를 비롯한 귀중한 보석들, 커다란 산호, 호박, 장미유 뿐 아니라 낙타새, 기린, 코뿔소, 금얼룩이 박힌 표범, 얼룩말, 사자 등 신기하고 상서로운 동물들을 받아왔다.

264. 조정은 1433년 마지못해서 정화에게 마지막 원정을 허락했고....어이없게도 정화의 원정대가 남긴 공식적인 기록까지 폐기되고 말았다....1449년 몽골 군대는 베이징 인근의 토목보에서 명의 군대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몽골군대는 명황제를 붙잡아 몽골로 데려갔다가 이듬해에 돌려보냈다. 그러나 토목보에서의 패배이후 명의 외교정책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265. 그러나 15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경쟁을 피했던 명왕조는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렸다...명 왕조는 또한 거대했던 해군을 방치해 고사시키고 해외진출정책을 폐기함으로써 유럽인들에게 여러 대양에 대한 패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266. 인도의 막강한 제국, 무굴...아요디아는 인도북부에 있는 작은 도시다...영국에 앞서 인도를 통치하던 무굴제국은 칭기스칸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다. 무굴제국의 창건자인 바부르가 피비린내 나는 광신의 물결을 타고 권력을 잡은 것은 사실이다.

267. 그러나 바부르는 겨우 4년을 통치하고 사망했다.

270. 악바르는 여러종교의 교리를 비교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1575년 그는 거대한 강당을 지어 종교토론회를 열었다....이런 관용적인 분위기를 타고, 펀다브 지역에서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여러종교를 혼합한 시크교가 출현했다.

272. 그 후 두 명의 무굴 황제는 악바르의 종교적 관용 정책을 대부분 계승했다.

273. 자항기르의 후계자인 샤자한은 아름다운 타지마할을 건축한 것으로 유명하다...샤자한의 치세에 무굴이라는 단어는 문화적 웅대함을 상징하게 되었다.

274. 1658년 무굴제국은 샤자한의 셋째 아들인 아우랑제브 알람기르에게 넘어갔다.

275. 아우랑제브는 날이 갈수록 독단적으로 변해가는 칙령들을 집행하기 위해 제국 전역에서 무흐타시브 즉 도덕 검열관을 두었다...아우랑제브는이전에 시행되던 종교적인 관용 정책들을 뒤집고 제국 전역에 샤리아를 강요했다...아우랑제브의 불관용은 제국에 재앙을 몰고 왔다...게다가 아우랑제브의 이슬람교에 대한 광신은 무굴제국의 허약한 종교적, 정치적 통일성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8장 세계최대의 해상국가-영국

278. 불관용은 자신의 대의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 1921년

280. 빌렘과 메리가 즉위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1689년 영국 의회는 권리장전과 관용법을 통과시켰다...영국의 부상은 이 책의 논제를 생생하게 입증하는 사례다. 1689년에 영국이 채택한 특별한 관용정책 덕분에, 유대교도, 위그노교도,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스코틀랜드인, 이 세 개 집단이 그 어느때보다 자유롭게 영국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들은 금융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영국은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비상했다.

282. 빌렘은 오랫동안 네덜란드의 세파르디 유대교도들과 밀접하고도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많은 네덜란드 출신의 유대교도들이 빌렘을 따라 잉글랜드로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마차도와 페레이라 가문 사람들이 있었다.

285. 메디나, 기드온, 골드스미드 같은 유대교도들과 몬터규 가문, 스턴 가문 그리고 유명한 로스차일드 가문은 주식거래를 도입하고 새로운 자본시장을 발전시키고 엄청난 양의 공채와 사채를 인수함으로써 런던을 세계적인 금융중심지로 바꿔놓는데 일조했다.

286. 1860년이 되자, 유대교도들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하고, 공직에 취임하고, 심지어는 의회선거에도 출마할 자격을 인정받았다.

289. 패터슨은 1695년 다리엔 계획을 구상했다. 패터슨은 스코틀랜드 의회를 설득하여 파나마의 다리엔 지협에 스코틀랜드 식민지를 건설했다.

291. 다리엔의 참극은 스코틀랜드를 파산으로 몰아넣었다...1707년 기가 꺾이고 기근에 시달리던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의 합병조약에 서명하면서, 대영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293. 18세기 중반에는 영국 군대의 연대장 직위 중 약 4분의 1가량을 스코틀랜드인이 차지했다.

294. 스코틀랜드인들은 대영제국에 인력을 공급했을 뿐 아니라, 18세기와 19세기 영국의 주도적인 사상가, 저술가, 발명가로도 활동했다.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과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이다....스코틀랜드 인들은 교육과 교양을 매우 중시했다.

295. 영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경쟁상대가 없는 해군력과 상업력, 그리고 금융력에 이었다.

299. 한편 영국은 1830년대에 대단한 수익을 남기던 노예무역을 폐지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대영제국은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은 바로 그 시기에 수백만 파운드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도덕적인’ 나라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300. 영국 역사에서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는 오랫동안 심각하게 반목해왔다.

301. 18세기에는 글래스고, 버밍엄, 배스를 비롯한 영국 전역에서

303. 1840년대에 파괴적인 감자곰팡이가 아일랜드를 강타했다. 결국 100만명의 아일랜드인들이 굶어죽었다. 영국이 전쟁에 몰두하고 있던 1916년 부활절에 더블린에서 가톨릭교도들이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건물들을 장악하고 아일랜드의 독립을 선언했다. 반란은 진압되었고, 1920년대에 영국은 아일랜드자유국의 창설에 동의했다. 1949년 이 나라는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304.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는 언어적, 문화적, 민족적, 정치적 차이가 늘 자리잡고 있었다.

305. 영국인들은 점차 스스로를 식민지 주민들과는 달리 백인이며 문명화된 민족이라고 규정하게 되었다. 민족적 인종적 오만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영토에서 영국의 관용에 한계를 지웠다.

306. 빅토리아 여왕이 발표한 완전한 평등은 딱하게도 공허한 것이었다.

307. 이와 같은 계산된 관용의 원칙이 인도 내 동인도회사의 상업적, 정치적 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애초부터 동인도회사는 사업 경험이 있는 원주민 집단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308.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통치했던 시기에 영국남성과 인도여성간의 결합은 흔한 일이었다.

309. 더욱 운명적인 사건은 1829년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사티 금지법이 통과된 일이다. 사티는 죽은 남편을 화장할 때 그 아내도 함께 화장하는 전통적인 힌두교 관습이었다.

310. 인도 병사들은 잇따라서 새로운 엔필드 소총을 거부했다.

311. 성난 병사들은 민간인 폭도들과 합세한 후 델리로 몰려가서 가옥에 불을 지르고 유럽 남자들과 여자들, 어린아이들을 눈에 띄는 대로 살해했다.

312. 폭동이 일어나자 영국에서는 비난과 자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1876년 갖은 허세속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황제로 선포되었다.

316. 한편으로 영국은 인도의 교육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 1887년 당시 30만명에 가까운 인도인들이 영어를 공부하고 있었고, 1907년에 그 수는 50만명으로 늘어났다. 인도 민족주의의 원로인 나오로지는 1871년 영국의 인도통치를 통렬히 비난하는 책을 펴내면서도 독립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317. 인도를 통치했던 90년동안 영국의 식민지 정책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끊임없이 흔들렸다...1883년 자유주의적 총독이 인도인 판사가 백인 피고인들을 재판할 수 있게 하는 일버트법을 통과시키자 인도 전역에서 영국 출신의 이주민들이 항거했다.

318. 1898년 총독이 된 귀족적인 커즌 경은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인도인 법률가 및 공무원 집단과 정면으로 맞붙었다.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이들 지도층은 1885년에 이미 캘커타를 근거지로 삼아 인도 국민 회의당이라는 정당을 창립했다.

319.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도 인도의 지도자들 가운데에는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

320. 영국식 교육은 양날의 칼이었다. 멀리 떨어진 본국 정부가 진보적인 인도 개혁 정책을 입안하고 있을 때 인도의 영국인 정부는 억압적인 롤래트 법을 제정했고, 원주민들에게 통행금지령을 내렸으며, 시위의 권리를 박탈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3년 동안 계엄령을 유지했다.

321. 펀자브의 실책은 인도의 충성파들을 무너지게 만드는 최후의 일격이었다. 1919년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경은 학살에 항의하는 뜻에서 기사작위를 반납했다...1920년 간디는 영국정부에 대해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펼치자는 혁명적 제안을 내놓았다.
323. 1946년 인도의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시크교도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인도는 영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1947년 영국 정부는 인도 아대륙의 분할을 공표했다. 이렇게 해서 인도와 파키스탄, 두 개의 독립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326. (영국이) 쇠퇴하게 된 요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소요된 막대한 비용, 정부의 복지예산의 급증, 엄청난 외채부담, 파운드화의 평가절하, 산업의 상대적인 정체, 그리고 멀리 떨어진 식민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비용의 증가,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에 대한 적의, 민족주의자들의 반란, 그리고 인종 혹은 종교와 관련된 폭동 때문에 빚어지는 비용의 증가 등을 꼽는 데에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한다.

327. 그러나 영국은 세계를 제패하는 제국으로부터 평범한 국가로 전락했고, 과거 유색인 식민지 주민들은 제3세계로 전락했다.

3부 세계제패의 미래

9장 최첨단 과학기술의 개척자- 미국

331. 지금 미국이 다스리는 땅은 지구 표면적의 6.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은 초강대국이다.

332. 현재 미국 인구의 95퍼센트 이상이 바다를 건너온 이민자들의 후손이다...미국은 1789년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으며, 더나아가 국교를 두지 않음을 헌법상의 원칙으로 공표하는 대단히 혁명적인 행동을 했다...인디언, 흑인, 그 밖의 각종 유색인에 대한 불관용이다.

333. 청교도들은 검소하고 부지런했다. 그들은 교육에 큰 가치를 두었다.

335. 영국의 식민지 건설이 완료된 1732년 당시 85퍼센트의 미국인들이 공인된 교파가 있는 마을이나 주에 살았다.
340. 한마디로 미국은 애초부터 종교적 관용이라는 계몽주의적 원칙 위에 건설되었다.

343. 토머스 재퍼슨은 1774년에 “만인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제공되지 않는 나라를 떠나서 새로운 주거지를 찾아갈 천부의 권리가 있다”고 단언했다...독립을 달성한 미국에는 노동력이 부족했고, 경제성장에 결정적인 최신기술을 소유한 숙련된 노동자들과 기술공들은 더구나 부족했다...미국인들은 기술적인 전문성을 가진 유럽인들을 끌어오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썼다...유럽에서는 외국의 인력모집을 막기 위해 가혹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344. 영국 정부는 영국과 아일랜드 기술공들의 미국 이주를 금지하는 법률을 갈수록 강화했다...18세기에 유럽 국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민 방지법을 통과시켰다.

345. 19세기 초반에 250만 명의 불법이주민들이 구세계에서 미국으로 들어갔다.

346. 미국의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로는 미국 산업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새뮤얼 슬레이터를 꼽을 수 있다...슬레이터는 기억을 되살려서 세계 최고 수준의 영국 직조기술을 미국으로 이전시켰다.

347. 프랑스 출신의 이민자인 이레네 듀폰은 화약 기술을 미국에 소개했다...미국은 종교적 다원주의, 사회적 유동성, 언어적 다원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인들의 온갖 경험에서 비롯한 재능과 진취적인 동기에 대해 대단히 개방적이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미국에서는 기회가 하늘 끝까지 열려 있었다.

350. 유럽에서 들어오는 이주민의 행렬은 1920년까지 거의 막힘없이 계속되었다. 820년부터 1914년 사이에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수는 3천만 명으로 이는 세계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353. 19세기가 끝날 무렵 서구에서 중국계 이주민들은 불관용과 차별, 신체적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354. 1917년 미국이 세계대전에 개입하면서 저울추는 연합국에 유리한 쪽으로 기울었고, 미국은 “세계 모든 나라들에게 자유를 얻을 방법”을 제시하는 역할을 떠안게 되었다...미국은 외부로 힘을 쏟는 대신에 고립주의 적인 방향으로 선회했다. 비슷한 시기에 세계전쟁으로 격화된 민족주의는 외국인 혐오증과 토착민 보호주의를 부채질했다. 미국 국회는 1917년, 1921년, 1924년에 미국의 정책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여러 가지 이민법령을 통과시켰다.

355. 대공황은 국수적인 정치인들에게는 “미국에 들어오려고 늘어서 있는”, “유럽의 가난뱅이들”, “잡종들”, “문맹들”, “위험한 급진주의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 1931년부터 1935까지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순이민자 수가 감소했다.

356. 1900년부터 1914년까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불운한” 사람들이 해마다 100만명씩 대거 유입되면서 미국내에는 엄청난 사회적 긴장감이 형성되었다...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의 막강한 강국들을 크게 쇠퇴시켰다고 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그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안겼다.

357. 대공황에서 벗어난 미국 산업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급격히 성장해 미국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팽창했다...마셜플랜에 따라서 미국은 유럽에 130억 달러를 제공하여, 황폐해진 서독과 이탈리아, 프랑스의 자력갱생을 도왔다...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은 약 1천250만명이라는 엄청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358. 유대인 과학자들이 돌연히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미국은 “순수 과학 불야에서 세계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359. 주목해야 할 것은, 냉전이 시작되면서 두 개의 초강국 중 어느 쪽이 더 관용적이냐를 명확히 따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360. 볼셰비키는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러시아의 소수 인종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평등”과 “진정한 의미의 민족자결권”을 약속했다...미국은 인종주의 때문에 국제적으로 상당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362.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에 암살되었다. 그가 죽고 일 년 뒤에 국회는 1964년 시민권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은 광범위한 선거개혁을 실시하고 고용주들에게 평등한 고용의 기회를 제공할 것을 의무화하고 숙박업소, 식당, 극장 같은 공공장소에서의 인종차별을 불법화했다.

363. 1960년대에 아이비리그에 입학을 허가받은 흑인들과 그 밖의 소수집단 학생들의 수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364. 1965년의 이민법은 1920년대에 제정된 대단히 인종차별적인 국적별 할당 제도를 폐지했다...1990년부터 2000년 사이에 미국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약 900만 명이었는데 이는 10년 동안의 이민자수로는 사상 최고다. 1965년 이후로는 아시아와 남미 출신 이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365. 1991년 걸프전이 시작됐다. 역사상 최초로 스텔스 기에서 발사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고성능 폭탄과 미사일들이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항법시스템에 의해 유도돼 각종 공격목표를 차례차례 파괴했다.

366. 1990년대에 이르러 미국경제는 세계 모든 나라들을 경이적으로 앞질렀다...미국은 세계화를 통해 가장 큰 이득을 얻은 나라이다...조지 소로스의 말을 빌리면 “세계화란 곧 잉여자본이 주변국가에서 중심국가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중심은 바로 미국이다”...미국이 세계적인 패권국으로 상승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이 소련의 붕괴였다.

367. 정보기술전쟁은 지난 25년 동안 세계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미국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누렸던 경제호황에 직접 연료를 공급한 것은 바로 두 가지 혁명적인 발전이었다. 하나는 마이크로칩의 발견이라는 기술 분야의 혁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벤처자본주의라는 금융 분야의 혁명이었다...유진 클라이너는 18세 때인 1941년 나치 점령 직전에 빈을 떠나 미국에 도착했다.

368. 결국 클라이너와 그의 동료들은 페어차일드 반도체 회사를 차리고 그 회사의 임원이 되었다. 쇼클리는 1956년에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공으로 노벨상을 탔다.

369. 클라이너가 공동출자한 자금은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투자를 하고, 투자자들에게는 새로운 회사에 대한 상당량의 지분을 보유하게 하는 전략을 채택했다..이 회사의 도움으로 출발한 회사들 가운데에는 AOL, 지넨테크, 컴팩, 로터스 사, 네트스케이프, 퀀텀, 선 마이크로시스템스, 아마존닷컴, 구글이 포함된다...2003년에 사망한 클라이너는 ‘실리콘밸리를 건설’하고 ‘벤처자금을 사실상 발명’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370.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앤드루 그로브는 버클리에서 유진 클라이너가 공동출자한 페어차일드 반도체 회사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그로브는 열정과 명석함, 그리고 섬세함으로 모든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371.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인텔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노이스도 무어도 아닌 앤드루 그로브였다는 점이다...그로브는 1979년 인텔의 사장이 되었고 1987년에는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타임은 1997년 그로브를 올해의 인물로 지명하고 그를 마이크로칩 개발과 그후의 디지털 혁명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인물 이라고 설명했다.

372. 마이크로칩은 인쇄기와 증기엔진이 각 시대의 핵심적인 발명품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컴퓨터 시대의 핵심적인 발명품이었다.

373.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실리콘밸리에 출현한 수천개의 공학 및 기술회사들 가운데 무려 52.4퍼센트가 이민자들이 핵심적인 창립자의 일원으로 참가한 회사들이었다...2000년에는 상위 400명의 부자 가운데 3문의 2라는 압도적인 다수가 맨손으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었다...미국의 기술적, 경제적 패권은 군사적 우위로 직접 연결되고 있다.

374. 오늘날 미국은 니미츠 급의 원자력 항공모함 열대를 보유하고 있는데 각 항공모함은 70대 이상의 전투기를 운반할 수 있다...미국은 현재 스마트 폭탄, 크루즈 미사일, 무인정찰기, 위성감시 시스템, 나이트 비전과 레이저 거리 측정기를 갖춘 장갑차, 원자력 잠수함 등으로 이뤄진 최대의 최첨단 병기고를 보유하고 있다.

10장 주축국의 야욕-독일, 일본

377. 나치는 프랑스의 항복을 받기 전에 이미 오스트리아,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를 장악하고 영국을 침공할 태세를 작추고 있었다.

380. 집시들, 폴란드인들, 동성애자들, 장애인들, 병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집단들이 제거대상으로 추려져서 강제수용, 강제노역, 임의적인 처형의 희생자가 되었다.

381. 나치는 이 금 조각들을 녹여서 다른 노획품과 함께 제국은행에 있는 막스 하이리거 라는 비밀 가명계좌에 넣었다...그들은 거대한 관료조직을 만들어서 유대인들을 찾아낸 다음 그 수를 세고, 세밀한 혈액 비율 분류법에 따라서 나눠야 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인종청소의 필요성과 긴급한 전쟁상의 필요성이 충돌하는 일이 많아졌다.

383. 나치는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주민들을 거의 일소하고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500만명 가까이 학샐했다...레벤스라움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384. 생활공간은 주로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에 있다고 봤다.

385. 소련은 2천만명 넘는 인명을 잃고서도 싸움을 계속했다.

387. 20세기 초반 일본의 저술가들은 서구의 인종이론과 유가철학, 그리고 도덕적, 영적 순수성이라는 신도의 개념을 결합하여 일본인 특유의 독특한 세계관을 만들었다...일본의 국수주의 사상가들은 일본의 열등한 지위를 뒤집기 위해 신에서 비롯한 황실의 혈통, 일본 사람들의 순수성과 미덕을 강조하는 정교한 신화적 역사를 고안해냈다.

389. 일본의 신문 논설위원이자 국회의원인 아라카와 고로는 1906년 한국인들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일본인은 순결하고 깨끗한데 한국인은 불겨하고 더러웠다.

390. 그들은 계산을 정확히 하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거짓말을 잘하고 도박, 사기, 덜도 , 강간을 저지르기 쉽다는 점이었다. 한편 한국인은 선천적으로 게으리기는 하지만 터무니없을 정도로 참을성이 많아서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 적합했다.

393. 일본은 노골적이며 극단적인 불관용 정책으로 일관하여 인도네시아인들의 마음에 새로운 지배자에 대한 심한 반감을 심어놓았다.

397. 일본이 유지시켰던 포르모사의 주요 제도 가운데에는 중국의 지방통치제도인 보갑제가 있었다. 이것은 약 100호의 가구들을 모아서 그 구성원들이 저지른 비행에 대해 집단적인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였다. 일본은 보갑제를 이용하여 포르모사의 유력한 가문들이 지도적인 위치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그들 지도계층의 충성심을 손에 넣었다...일본은 점령 초기에 1만2천명에 이르는 포르모사의 저항자들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11장 21세기 새로운 도전자들 - 중국, 유럽연합, 인도

402. 1978년 중국의 일인당 소득은 230달러로 세계최저였고, 소득의 증가는 정체돼 있었다...2003년에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외국인 직접투자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투자지가 되었다.

403. 미국은 갈수록 심해지는 세계적인 반감과 싸우느라 고전하고 있지만 중국은 채무탕감과 대외원조를 활용해 국제적인 이미지를 제고하고 차입자본을 증가시켜가면서 선진국과 개도국을 막론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은 이런 방식으로 칠레의 구리, 오스트레일리아의 석탄, 브라질의 철 등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경제조직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수십억 톤의 원자재들에 대한 장기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서양이 불량국가들과 상대하지 않으려는 점을 이용해 특별한 이들을 올리고 있다.

404. 중국 인구의 92퍼센트는 인종적으로 동일한 혈통이며, 94퍼센트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고, 순이민율은 마이너스라고 하는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중국은 다원적인 이민자 사회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405.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으로 이질적인 배경을 가진 수많은 개인들을 단일한 정치적 정체성 안에 소속시키고 통합시켜온 것이다. 중국 문명 자체가 다양한 문화의 거대한 융합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해온 것이다.
406. 중국인구의 92퍼센트 이상이 자신의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을 중국 민족, 즉 한족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407. 중국은 세계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13억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충성심과 민족적 정체성을 장악하고 있다.

408. 중국의 교육제도는 창의적인 사고보다 단순암기를 중시해 속도와 이해할 수 업슨 사실의 암기에 지나치게 치우쳐서, 배운 지식을 현대 경제의 급변하는 상황 속에 적용할 수 잇는 학생들을 배출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2005년 중국 교육부의 어느 공무원은 학생들은 주입식을 외워댄다. 기억은 하고 있었도 이해는 하지 못한다고 불평했다...오늘날 중국의 학생들 가운데 25퍼센트가 토론과 과학적인 탐구 그리고 유연한 사고를 장려하기 위해 세워진 실험적인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 진학하고 있다.

409. 1986년부터 1998년까지 미국의 대학교를 졸업한 중국학생 가운데 85퍼센트가 미국에 남을 계획이라고 밝혔다...중국이 세계초강대국이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이들에게 자부심과 동기를 제공하는데, 이것 역시 중화민족 우월주의라고 할 수 있다...그로나 중국에서는 여전히 부패가 만연하고 연줄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414. 중국은 92퍼센트의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다민족구가이며, 이들 한족과 소수민족이 모두 중국 국민이라는 공식적인 입장을 채택하고 있다.

415. 현재 160개국 이상에서 살고 있는 중국계 혈통은 대략 5천500만명에 이른다...그들의 재산을 모두 합치면 대략 2조달러에 이른다. 또한 그들은 연간 약 6천억 달러의 생산량을 창출하는데, 이는 호주의 국내총생산과 엇비슷한 규모다.

416. 중국정부는 1978년 개방초기부터 이 보물창고를 겨냥해 중국 혈통의 외국인투자자들에게 특별한 투자유인책과 세제혜택을 제공했다...1980년대와 1990년대에 해외중국인들은 중국에 1천900억달러가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야우싱퉁은 최근 중국정부와 홍콩의 부동산재벌과 협력하여 세계일류의 중국인 과학자들을 양성하는데 힘쓰고 있다.

417. 중국에서 사업의 성패는 누가 오래된 친구들을 가지고 있고, 누가 지방공무원들에게 가장 큰 선물과 가장 사치스러운 향응을 제공할 수 있느냐, 즉 인맥에 달려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418. 우리는 아직도 왜 거기에 구멍을 뚫어야 하는지 모른다...그러나 중국의 앞길에는 엄청난 환경오염, 부패, 지역간 경제격차, 지나친 대량소비를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내부적인 도전들이 늘어서 있다...중국은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기간시설, 연구및개발, 그리고 교육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다...지금은 세계일류의 인재들을 끌어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의해 세계를 제패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더구나 중국의 공식적인 외교정책은 비간섭이니 중국으로서는 단순한 강국이 되는 것이 어울릴지 모른다.
 
421. 현재 유럽연합의 회원국은 27개국이 되었고 5억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공통의 법률구조를 공유하게 되었다...유럽연합의 영토확장은 군사적 정복에 의지하지 않고 자격부여와 동의라는 수단에 의지한다.

422. 경제적인 측면에서 당근을 흔들어댐으로써 영토를 확장하는 탈제국주의 강국이다...유럽연합은 반제국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세계가 움직이는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다.

424. 유럽연합의 관용은 원칙적으로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한 관용이다. 유럽의 관용은 유럽을 통합시키는 전략일 뿐이지 제3세계의 이민자들을 유럽으로 끌어들이거나 유럽국가를 미구고가 같은 다민족 이민자 사회로 변화시키려는 전략이 아니다.

426. 2006년 말 독일에서는 공학기술과 관련된 일자리 2만2천개가 공석으로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그 전해에 비해 30퍼센트나 늘어난 수치였다.

427. 이는 개신교와 유대교를 포함하는 비가톨릭 집단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수치다.

428. 6천800만명의 터키 국민이 독실한 이슬람교도라는 점도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덴마크는 20세기 말 인구의 약 3퍼센트를 차지하는 이슬람 공동체 때문에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429. 이민제도 개혁에 맞추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되는 덴마크의 복지제도를 이방인들이 이용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동화에 저항하고 폭력에 수긍하는 이슬람교 극단주의자들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유럽의 경우 이슬람공동체의 고립화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유럽의 이슬람교도들은 고립된 지역에 거주하면서 유럽의 다른 주민들과 물리적, 문화적, 심리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다...2005년 마드리드 열차 폭파사건, 이슬람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네덜란드 영화제작자 테오 반 고흐의 살해사건, 2005년 프랑스의 인종폭동, 덴마크에서 시작되어 유럽전역과 중동으로 빠르게 퍼져나간 만화성전 52명의 사망자를 낸 런던 지하철 폭파사건, 2006년 영국계 파키스탄 이슬람교도들이 대서양을 비행하던 여러 대의 항공기에서 액체폭탄을 터뜨리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험악한 기사들이 신문을 장식하고 있다.

433. 2004년의 경우 유럽출신으로 과학기술 부문의 학위를 가지고 미국에 취업한 사람들의 수는 약 40만 명이었지만 미국 출신으로 유럽에 취업한 사람들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했다...다극적인 세계질서를 복원하는 것이 유럽연합의 목적가운데 하나라면 앞서 말한 한계들은 그 목적의 달성을 가로막을지 모른다.

434. 인도는 과학기술분야에서 연간 40만 명의 학위보유자들을 배출하고 있고 영어를 사용하는 다수의 전문가들을 확보하고 있으며 최근 4년 동안 평균 7퍼센트의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등 많은 학자, 정치인, 투자자로부터 21세기에 주목되는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인도경제의 별은 1990년대 초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435. 인도경제는 5년이 채 되기 전에 이전 40년간의 성장을 뛰어넘는 성장을 이루었다...부시대통령은 2006년 연두교서에서 새로운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는 인도와 중국에 대해 언급했고 2006년 3월에는 미국대통령으로는 다섯 번째로 인도를 공식 방문했다.

436. 2006년 7월 세계에서 다섯 번째 부자인 인도의 라크스미 미탈은 유럽의 거대철강 기업 아르셀로를 인수했다.

437. 인도에는 16개의 공식 언어가 있고, 100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가 22개가 넘으며 방언은 1천개가 넘는다.

438. 2002년 인도는 북부의 구자라트 주에서 2천명이 넘는 이슬람교도들이 참혹하게 학살당했다. 이 폭동의 도화선이 된 것은 호전적인 이슬람교도들이 아요디아에서 돌아오던 힌두교 순례자들이 탄 열차를 습격하여 58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었다.

440. 중국의 성장 동력은 주로 제조업부문인데 비해서 인도에서는 소프트웨어, 정보기술, 미디어, 광고, 그리고 볼리우드 영화산업 등 개인의 독창성과 재능에 크게 의존하는 부문이 크게 번창하고 있다.
 
12장 제국의 미래

446. “미국은 필요한 경우에는 앞질러서 행동할 것이다. 불량국가들과 그들의 테러 의뢰인들이 미국과 우리의 동맹국들을 향해서 대량 파괴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위협하거나 실제로 사용할 수 잇는 능력을 갖추기 전에 그들을 막을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의 힘은 강해져야 한다.

449. 그것은 바로 역사이다. 우리는 과거 초강대국들의 성장과 몰락에서 미국과 미국이전의 패권국들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반영하고 있는 여러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다...21세기 미국의 권력에 대해 전망할 수 있는 열쇠는 이런 옛 것과 새 것의 결합속에 놓여있다.

451. 정복을 통한 통치는 비용이 많이 들지만, 교역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452. 고대 사람들에게 관용은 피정복민의 관습과 언어를 그대로 용인하고 그곳의 지도계층을 흡수하고 재능이 뛰어난 그곳의 장인들과 전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반면에 네덜란드의 관용은 네덜란드라는 땅 덩어리를 피정복민들이 아닌, 유럽전역의 박해받는 소수종교 집단들을 끌어들이는 자석으로 바꾸어놓았다...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이들 이민자들의 기여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세계적인 교역과 산업,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대영제국은 로마의 문명화와 팽창주의의 사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네덜란드와 달랐다.

453. 미국이 성공을 거둔 결정적인 비결은 재능있고 의지가 강한 진취적인 개인들을 배경에 관계없이 흡수하여 그들에게 합당한 보수를 제공한데 있었다...인적자본은 미국의 부와 혁신을 급성장시킨 연료였고, 미국이 확보한 우수한 인적자본은 산업시대와 원자력 시대, 컴퓨터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454. 영어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우세한 언어가 된 것은 미국 스텔스 폭격기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미국 달러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부를 창조하는 가장 큰 동력은 약탈과 몰수가 아니라 교역과 혁신이라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455. 결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미국의 민주주의는 국력과 자유의 원친일 뿐 아니라 국외자들을 끌어당기는 엄청난 매력의 원천이다.

457. 그러나 미국의 민주적인 패권은 반미주의의 만연과 폭발이라는 기이한 결과를 낳았다.

461. 미국의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범한 커다란 실수는, 자유시장과 민주주의, 미국의 상품과 상표, 소비자 문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 공통의 가치관과 미국의 지도력에 대한 갈망을 만들어내면서 다른 민족들을 미국화 할 것이라고 추측한 데 있다...자유시장과 민주주의를 포함한 서구적인 관용정책을 수출하려는 미국의 최근 시도들은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이자 자신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실체로 여기는 수백만명의 사람들로부터 원망과 분노를 사고 있다.

462. 미국은 불법적인 통상금지와 좋게 보면 어릿광대 놀음이고 나쁘게 보면 범죄라고 할 수 있는 식민지 침략전쟁 때문에 사망한 100만명이 넘는 이라크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이라크를 떠나야한다.
463. 그런 정치적 연합을 이룰 의사가 있다면 미국은 국가적 정체성과 주권, 또한 초강대국이라는 지위까지 버려야 한다.

464. 민주정체를 지닌 초강대국은 세계만민에게는 지구라는 사회에 참여하고 번영할 권리가 있음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465. 미국제국이라는 실체가 미국국민들의 민주적인 검열을 통과할 수 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국이 식민지로서 펼쳤던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만큼, 제국주의자, 계몽된 제국주의자를 자처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466. 2003년 6월 이라크 주둔 미군정의 최고 행정관인 L.폴 브레머 3세는 일방적으로 이라크 총선을 취소했다.

467. 자국의 역사와 원칙에 더욱 충실한 채 세계를 위한 본보기, 즉 언덕위의 도시가 되려고 노력하는 편이 훨씬 낫다.

469. 멕시코 출신 이민자들의 급증은 미국의 화합을 위태롭게 할 뿐 아니라, 앵글로 색슨과 개신교의 가치관에 뿌리를 둔 신앙심이 독실하고, 대부분이 기독교도인 국가라는 미국의 핵심적인 정체성을 위태롭게 한다고 주장한다...멕시코 출신의 떼를 이룬 침입자들이 미국의 일자리를 빼앗고 미국을 타락으로 물들이고 미국 남서부를 다시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경고했다...그렇지만 공포감을 조장하면서 미국 국경을 폐쇄하는 지나친 대응은 세가지 측면에서 잘못된 것이다.

471. 오늘의 미국은 그 어느때보다 높은 숙련도와 훈련도, 그리고 노하우를 갖춘 이민자들을 찾아내고 끌어들이기 위한 적극적인 유인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474. 이 책의 논지에 따르면 미국은 제국을 건설하는 자멸적인 모험을 피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러나라의 협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세계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저자후기

478. 1961년 부모님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보스턴에 도착했다.
 
479. 우리는 함께 국외자로 출발해서 함께 미국을 발견해가며 차츰 미국인이 되어갔다.

480. 1882년 미국 의회는 중국인 추방 법을 통과시켰다...그러나 1960년대의 법률개정으로 아버지는 채 2년이 되기도 전에 박사학위를 따셨고, 31세의 나이에 종신교수로 임용되셨고...하지만 우리 곁에는 늘 모순이 있었다...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존재가 될 것인지가 모두 모순이었다.

481. 어려서 내가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중국인, 즉 한족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었다...사실 순수한 한족을 규정짓는 순수한 한족의 혈통이 있다는 생각은 그럴듯한 신화, 그것도 최근에 만들어진 신화일 뿐이다.

483. 이 책은 그 무엇보다도 미국의 관용에 바치는 책이다...이 책은 어떤 사회들이 손에 넣은 거대한 권력과 그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조건, 또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던 조건에 관해 연구한 것이다...마지막으로 이 책은 경고문이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어떤 사회들이 손에 넣은 거대한 권력과 그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조건, 또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던 조건에 관한 연구이다.

저자는 중국계 이민 2세로서 먼저 그의 부모님이 1961년 미국으로 들어와서 가족을 번창하고 한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그들의 방식대로 변화하면서 살게 해 준 미국의 관용에 이 책을 바친다고 하였다.

미국은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하자 경쟁자도 대항자도 없는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은 전환점에 섰다. 저자는 역사에서 그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즉 과거의 초강대국들의 성장과 몰락에서 미국과 미국이전의 패전국들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반영하고 있는 여러 가지 교훈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초강대국의 의미는 수백 년에 걸쳐서 서서히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가장 단순한 관점에서 보자면  정복에서 교역으로, 침략으로부터 이주로, 전제정치로부터 민주주의로 변모가 이루어져왔다.
미국의 세계 제패는 초강대국들의 역사에서 기나긴 진화가 이루어지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옛날에는 군사력과 경제력이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부에 이르는 열쇠가 군사력이었고 군사력에 이르는 열쇠는 전략적 관용이었다. 현대 이전의 초강대국들은 피정복민 수십만 명을 병적에 올리고, 어떤 경력을 가졌든 따지지 않고 재능이 뛰어난 전사들과 지휘관들을 군대에 충원하는 등, 관용을 통해서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관련된 변수들이 달라져서 해군력이 중요해졌다.
네델란드와 대영제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부와 세계 제패에 이르는 열쇠는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세계 각지의 수역들에 대한 통제권으로 옮겨갔다.

더 나아가 세계적인 부를 형성할 수 있는 방편이 땅에서 바다로 , 정복에서 교역으로 옮겨지면서 군사력과 경제력의 연관관계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침략 점령 병합에서 정복을 통한 통치는 비용이 많이 들지만  교역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은 달랐다.

고대 사람들에게 관용은 피정복민의 관습과 언어를 그대로 용인하고 그곳의 지도계층을 흡수하고 재능이 뛰어난 그곳의 장인들과 전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반면 네델란드의 관용은 유럽전역의 박해받는 소수 종교집단을 끌어들이는 자석이었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은 플랑드르 사람, 왈론 사람, 게르만 사람, 포르투갈 사람, 게르만의 유대교, 프랑스의 위그노교도 할 것 없이 진정한 의미의 네델란드인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네델란드 연방공화국은 이들 이민자들의 기여가 직접 원인이 되어 세계적인 교역과 산업,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영제국은 네델란드와 마찬가지로 국내적인 관용에 의해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웃국가에서 도망쳐 나온 이민자들을 끌어 들였다. 영국은 로마의 문명화와 팽창주의의 사명을 이어받아 방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통치하려했다. 영국은 또한 인도를 비롯한 피정복 출신의 병사 수십만 명으로 거대한 군대를 만드는 전략적 관용을 채택함으로써 제국팽창의 고대적 공식을 복원했다.

  미국은 네델란드가 그려놓은 해로를 따라온 이민자들의 나라였다. 미국이 성공을 거둔 결정적인 비결은 재능 있고 의지가 강한 진취적인 개인들을 배경에 관계없이 흡수하여 그들에게 합당한 보수를 제공한 데 있었다. 이  인적자본은 미국의 부와 혁신을 급성장시킨 연료였고, 미국이 확보한 우수한 인적 자본은 산업시대와 원자력시대, 컴퓨터시대를 거치는 동안 에도 변함없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영어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우세한 언어가 된 것은 미국 스텔스 폭격기의 위협 때문이 아니라 미국 달러화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냉전의 시기인 1980년대에 미국은 소비에트의 영향력에 대응해서 세계 여러 지역에 민주주의 운동을 지원했다. 이때 전략적으로 민주주의 제도와 함께 경제적 자유주의도 따라갔다.
그러나 90년대 소련이 붕괴하자 그 체재에 대한 확실한 대안이었던 미국은 기이하게도 ‘미국의 민주적인 패권’이 반미주의의 만연과 폭발이라는 상황에 처해있다.

미국의 달러는 세계를 지배하는 통화이고 ,영어는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이며 미국 기업들은 강력하고 두드러지며 미국의 상표는 가장 침투성이 강하고 가장 큰 선망의 대상이다.
미국은 또한 군사력이나 미국의 ‘꼭두각시’노릇을 하는 국제 통화기금과 세계은행, 혹은 가공할 경제적 권력을 통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문제는 미국과 같이 민주정체를 가진 초강대국이 자신이 지배하는 전 세계 사람들과 정치적 연합을 이룰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정치적 연합을 이룰 의사가 있다면 미국은 국가적 정체성과 주권, 또는 초강대국이라는 지위까지 버려야 한다.

결국 미국은 제국을 건설하는 자멸적인 모험을 피해야하지만  한편으로는 여러나라의 협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세계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과거 2500년간 역사상의 모든 초강대국은 모두 똑같이 두가지 도전에 직면해왔다. 하나는 자국의 성장에 동력을 제공했던 관용을 유지하는 문제와 다른 하나는 자국의 지배를 받는 민족들에게 충성심, 아니면 공통의 결속력을 형성하는 문제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해외에서 세계적인 패권을 확인하려는 미국의 노력은 이 두 가지 문제를 더욱 격화시키고 있다. 모순이지만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중단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미국의 관용에 바치면서 동시에 미국의 미래에 경고를 하고 있는 것
이다.

#책의 구성
 서문 / 세계 제패의 비결

1부 고대제국의 관용
 1장 최초의 패권국가, 페르시아-아케메네스
 2장 팍스 로마나, 세계인의 탄생-로마
 3장 중국의 황금기-당
 4장 유럽을 삼킨 초원의 지배자-몽골

2부 계몽화된 관용
 5장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스페인
 6장 자본주의 경제를 제패한 최초의 제국-네델란드
 7장 불관용의 덫-오스만. 명. 무굴.
 8장 세계최대의 해상국가-영국

3부 세계 제패의 미래
 9장 최첨단 과학기술의 개척자-미국
 10장 추축국의 야욕-독일. 일본
 11장 21세기 새로운 도전자들-중국. 유럽연합. 인도
 12장 제국의 미래

#기억에 남는 문장

32. 오네시크리토스, 내가 죽은 뒤에 잠시 동안만이라도 다시 살아나서 사람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알렉산드로스 대제

144. 신은 손가락을 저마다 다르게 만든 것처럼 사람도 다 다르게 만들었다.l-몽케칸

278. 불관용은 자신의 대의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간디

390. 일본인은 규율이 바르고 현대적인데, 한국인은 야만적이고 난폭했다. 대부분의 야만인들이 그렇듯이 그들은 계산을 정확히 하지 못한다.

443. 그리고 우리의 모든 탐험의 목적은 처음 출발했던 그곳에 도착해서 그곳을 처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 T.S.Eliot

#보완점

먼저 이 책의 장점을 논해보면

-우선, 방대한 역사적 자료와 관용으로 일관한 논제를 풀어가는 과정의 집중력이 참 놀라운 책이다. 매 챕터가 마치 그 제국의 정통 역사책인 것처럼  그 나라의 기원과 발전과 흥망성쇠를 매우 자세하게 안내해 주고 있다. 표현이 섬세하고 포커스를 잃지 않고 계속 관용에 집중하고 있는 점이 훌륭하다.

-두 번째 장점은 서문에 씌여진 매우 간결하고 뚜렷한 핵심 메시지 요약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문만 읽어도 저자의 의도를 다 알 수 있을 만큼 논리가 정연하다. 물론 곳에 실렸던 논문을 다시 다듬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메시지 전달력이 훌륭하다.
책을 쓰는 이유와 관용의 정의, 제한점을 분명하게 설정하고 있다.
 
즉, 저자가 말하는 관용은 인격과 관련된 현대적 의미의 관용이 아니다.(10P),이 책의 핵심개념은 상대적인 관용이다.(11P),선택적 편견에 관한 개념을 규정하고 선택의 영역을 넓혔다고 설명하는 점(21P) 이 관용이라는 관점에 분명한 촛점을 맞추게 한다.
관용은 세계 제패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206P)


-세번 째는 책의 구성이 매우 탄탄하다는 것이다.
우선 책의 내용에서 관용으로 인한 세계 제패의 예를 고대 페르시아부터 오늘의 미국까지, 나아가 미래의 유럽연합 , 중국, 인도까지 그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다. 이끌어낸 사례들도 설득력이 있고 흥미진진하다.
마지막 장에서는 다시 한번 복습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관용에 관한 논의를 요약정리하고 있다. 또한 해결점을 제시하고 있고 남겨진 문제점도 제안해두고 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논문처럼 써내려가다가 “나는...”이라는 문장이 나오고 또 개인사에 관한 노출이 조금씩 보이는 것이 재미있는데....좀 생소하다.

결국 이 책은 소설 같은 논문, 논문 같은 이야기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학자가 학교 밖으로 나와서 일반인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글쓰기를 매개로  독자에게도 상대적 관용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탄탄한 구성과 표현과정의 섬세함, 충분한 정보와 달변으로 긴장감 돌게 사실을 전하는 능력에 감탄했다.
주제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중요한 현실이고   준비기간이 5년이나 되는 방대한 작품이다. 벌써부터 유사한 주제로 쏟아져 나오는 책들에 인용되는 횟수가 높다.

굳이 보완점을 말해보자면
-동아시아의 현대사에 관하여 서양사처럼 좀 더 집중적인 탐구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더구나 한자의 해독이 가능한 저자가 좀 더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었을텐데
일본의 현재에 대한 분석이 조금 약했다.

-미래의 초강대국의 가능성을 유럽연합 , 중국, 인도 에 두고 있는 것이 설득력이 조금 약한 것 같다. 저자가 이들 나라를 주로 컨설팅해서 인가? 지금 현재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외 중국인의 자금유입 사례의 결과물들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는데 조금 더 자료를 남겼으면 좋았을 것을.

-“접착제”는 ‘관용’만큼 비중이 높은 단어인데 제안만 하고 열린 의문으로 남겨두고 있다. 분명히 모순 속에 해답이 있다는 메시지는 있는데.......다음 저술을 기대해 본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만약 저자가 군사력과 경제력과 영향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힘의 관점이 아닌 문명교류의 관점으로 이 관용이라는 주제를 풀어갔으면 더욱  아름다운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초강대국의 자리에서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미국과 그 과정이 우리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이 화두로 남는다. 분명히 변화는 시작되고 있는데 그 물결을 읽어내지 못하고 무조건 반미와 반신자유주의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을 수는 없다는 각성도 일어난다.
변화와 혁신을 시도하는 주체가 우리, 아니 나 자신이 되어야 할텐데...어두움을 밝혀 빛으로 나아가야 할텐데.... 밤은 깊고 갈 길은 멀기만 하다.

 

***** 숙제를 마치며.

4주차 숙제를 끝마치며 지나간 시간을 짧게 기록해 두려한다.
숙제는 분명히 주어진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제한된 글쓰기였다.
저자의 글에서 접속사와 단어배치, 문장의 구조를 조금씩 바꾸는 작업이었다.
이제 나의 말로 나의 시간을 정리해보고 싶다.

첫 번째 책, 구본형의 THE BOSS:
 조직에 오래 몸담아 본 적이 없고 성격상 상사의 지시를 받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온 나에게는 좀 어려운 주제였다. 물론 간접체험으로 상상은 해 볼 수 있지만 잘못하면 “모르는 말씀 하지마세요” 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는 주제였다.
그러나 사람을 섬기는 구체적 방법들과 열정, 성실성, 강점을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가라는 조언은 결국 ‘기본에 충실하자’라는 메시지로 이해되었다.
워크샵으로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매우 유용한 정보였다.
책의 구성을 보는 방법은 아직 익히지 못했지만 이 책을 모델삼아 연습을 해보면 될 것 같다.

두 번째 책, 생각의 탄생:
 부부가 함께 파트를 나누어서 쓴 책이어서 조금 산만했다.
생각의 도구도 13가지로 나누어 놓은 것은 조금 인위적 인듯 했는데 우리의 생각들이 그렇게 하나하나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자의 입장이 되어 생각들을 교류하고 통합하는 것은 종합지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 같다. 사례가 된 천재들의 생각에 대한 설명이 너무 표면적이어서 아쉬웠다.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기대된다. 이미 창의력이나 뇌에 관한 연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단행본들도 많고 전기물도 많아서 조금 더 깊이 있는 책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책의 구성에 있어서는 공부하기에 좋은 주해서식의 편집으로 시험공부하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몸으로 생각하기와 감정이입에 관한 챕터가 흥미 있었다.

세 번째 책, 선의 황금시대:
수유 너머에서 5년째  정화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다. 한 달에 한번 있는 강의이지만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강의가 끝나면 책이 되어 법공양에서 출판된다. 스님이 유식 30송을 풀어쓴 <함께 사는 아름다움><금강경><반야심경><법성게>< 중론>은 스테디 셀러이고 지금은 대승기신론 마지막 교정을 보고 계신다. 마침 육조단경을 강의하고 있는데.. 정말 우주의 인연이 이렇게 닿는다. 신기했다. 이 책은 오래전부터 읽어보려 했지만 어려울 것 같아서 미루고 또 미루었는데, 드디어 외나무다리에서 만나 물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다리를 건넜다.
저자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동서의 피안>도 같이 읽었다.
Me story를 쓸 때 이 한권의 책으로 토마스 머튼의 <칠층산>을 골랐었는데....이렇게 스승이자 친구가 될 사람들이 한 곳에 모 일 줄 이 야 ! 그래서 행복했다. 몸은 비록 곤궁했으나...
책의 구성을 보면 늘 보던 책들과는 좀 다르다. 그냥 편안하게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어도 될 것처럼 부담이 없다. 그리고 번역이 좋았다. 어려운 내용이지만 그래도 장을 넘길 수 있었으니 우리 동네에 살고 있어서 가끔씩 얼굴을 보게되는 류시화시인의 덕도 크다.
토마스 머튼과 스즈끼 다이세츠의 글은 마치 인증서 같기도 했는데, 이미 존 우의 명성이 그 두 사람에 버금가는 데도 이 글을 함께 부친 것은  아마 저자의 친절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독자들이 의심 없이 읽을 수 있도록  배려했을 것이다.
선사들의 아름다운 종말을 따로 기록해 두었다. 씌일 때가 있을 것 같아서....

네 번째 책, 제국의 미래:
이 책은 모두 558 페이지. 이사도 해야 하고 제정신으로 되돌아가야할 시간인데 원자폭탄이다. 두께가 두려워서 틈날 때마다 틈새시간을 활용해서 읽었는데 재미가 쏠쏠했다.
실크로드를 한번 따라 가 보려고 자료를 찾았었는데, 어찌 그리 무식한지 페르시아부터 다시 공부했었다. 메가 티비 어딘가에 있는 특집을 통해서.
그런데 이 책에 제국의 역사가 그 방대한 자료가 달필로 씌여져 있어서 우선 역사공부부터 흥미진진했다. 스페인과 네델란드의 종교에 얽힌 관용과 불관용의 역사도 새롭게 알게 되었고 징기스칸의 무덤을 꼭꼭 숨겨둔 비밀도 알게 되었다.
 내용도 알차고 주제를 좁혀서 일관성 있게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방법도 훌륭했다. 한국계 미국인 2세가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지만 상대적 관용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명의 영락제 때 해군 제독 정화에 대해서는 정수일 교수님이 알려주셔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읽었다. 내친걸음에 교보까지 가서 개빈 맨지스의 1421년도 훝어 보고 왔다.

오래전부터 학자들이 평생을 많은 것을 희생해가며 연구한 작업들이 극소수의 동일 전공자에게만 읽힌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었다. 학자들이야 헛된 이름을 바라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니 대중 속으로 파고 들라는 부탁은 못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학자들은 자서전이나 전기나 아니면 풀어쓴 전공이야기로 소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경영학 전공자로서 법률가로서 현장경험이 많은 에이미 추아의 이러한 관용론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몇단계 높여주었다. <불타는세계>와 토머스 프리드먼의 책과 살인의 해석까지 눈 앞에 쌓아두고 감자 캐기를 하고 있다.

이 책의 구성은 매우 탄탄하다. 우선 서문에서 전체적인 개관을 매우 논리정연하게 전개하고 있고 용어의 정의와 제한점까지 그 범주를 분명히 하고 있어서 마치 쉽게 쓴 논문을 읽는 것 같았다. 제국의 역사는  종교와 경제적, 인종적 관용을 위주로 예증을 하고 마지막장에 다시한번 주제를 요약하면서 해결점과 문제점을 제안하고 있는 구성이 익숙하고 편안해서 잘 이해가 되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또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고 있으니 저자의 입장에서는 틀림없는 성공작이다.

그래서 이런 구성 방법을 좀 자세히 익히고, 우선 책을 쓰기 전에 저자후기와 서문을 쓰는 연습부터 시작해 봐야할 것 같다.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아니 백번을 고쳐 쓰는 한이 있더라도  무얼 말하고 싶은가를  써보는 것이 좋은 연습이 될 것 같다.

“소걸음으로 천리 길을”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가 보는거다.

몰입의 순간, 감기라는게 있다는 것조차 잊었던 황홀한 시간,
그러나 이런 시간을 위해서 또 많은 것을 접어야 했다.

동료들과 어깨동무 할 여유를 갖지 못해서 많이 미안했다.
격려해주는 분들께도 바로바로 인사하지 못해서 미안했다.

상처뿐인 영광과 영광뿐인 상처를 함께 노래 부를 날을 기다리며....

                            은하철도 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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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9 10:13:19 *.255.182.40
선생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저도 문명교류면이 다뤄지지 않은 부분은 많이 아쉬웠습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반드시 물리적 힘만은 아니니까요...

낼 이사시죠? 어려운 테스트 마치셨으니, 힘내서 이사도 잘하시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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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
2009.03.09 12:10:31 *.5.21.71
휴우~

수희향,

이일 저일로 신경을 분산시키니 책상앞에 앉아도 생각이 정리되지가 않는거예요.
초콜레또라도 있었으면 좀 나았을텐데...
먼저 회기에 다 먹어버려서 말이죠...

이번에 이사가는 곳은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예요.
어제 새로운 동네에서 걸어서 선유도 공원까지 가봤는데...봄을 즐기는 사람들이 무척 많더군요.

새봄을 맞아 새로운 기분으로 이사 잘 할게요.
심한 아이들하고 한강 자전거 투어라도 한번 할까요?

오기 동지 여러분
자전거 투어 제안합니다.
성우씨
숙제도 끝났는데...이젠 꿈을 좀 바꿔볼까 해요.
갑자기 자전거타고 돌아다니고 싶어져서 말이죠.
 삼거리 주모, 그만하고 자전거길 개척가가 되고 싶어요. 하하하

특히, 이승호씨 환영해요. 보조바퀴 없이도 한강을 가로지르며 달릴수 있기를....말이죠

이제부터 여기 못들어와요. 폐기물 스티카 기지러 가야지...

오늘밤 환상의 파뤼 잘하고...기운생동 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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