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 나리
  • 조회 수 633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9년 6월 6일 21시 52분 등록
 

하프타임 


 

5월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4월 마감을 끝내자 그동안 쌓여 있던 피로와 무기력감이 와르르 쏟아지듯 나를 덮쳤던 것이다.  꼬박 2주 동안을 열병 환자처럼 그저 누워만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달력은 어느새 5월 중순을 가리키고 있다.  현기증이 핑 돌았다. 

햇빛은 유난히 찬란하고 바람은 어느덧 싱그럽다.  그러나 약속된 상담과 계약까지 다음 주로 미뤄야 할 만큼 나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매주 적어도 책 한 권씩을 읽던 내가, 한 달 내내 단 한 장의 책장도 넘기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 심각성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는 그만큼 지쳐 있었다.  육체적인 피로나 무기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더욱더 절망감에 휩싸였다.


오늘은, 책이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의 ‘진짜’ 이야기를, 진짜를 말하고 싶다.  사람이 무언가 ‘진짜’를 말하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 내어 말하기.  즉 ‘고백’이라는 것은 독백을 넘어 일종의 ‘약속’에 가깝다.  오늘 나는 괜한 짓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칫, 고백을 통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덜컥 해버리는 건 아닌지 두렵고 심란하다.  그러나 오늘은, 나의 진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타이밍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다가도 벌떡, 상담 중에도 불현듯, 괴로웠다.  감히 ‘행복하지 않아서’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실망이었다.  나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나의 성급함을 인정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부끄럽고 민망한 감정.  후회와 분노.  이런 심리적 엔트로피 상태가 지속되었다.  1년의 시간이 그렇듯 흐르고, 이 모든 것을 더 이상은 숨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작전타임.  나는 이 시간을 이렇게 부르려고 한다.  경기가 시작되었고 선수는 열심히 뛰고 있지만 점수가 나지 않는다.  감독은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다 드디어 작전타임을 외친다.


밥 버포드는 우리 모두를, 인생이라는 경기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이라 말했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역량을 발휘해 골을 넣어야 한다.  이것은 태어남과 동시에 예외 없이 진행되는 경기이다.  경기가 시작된 이상 뛰어야 하고, 한정된 시간 후에는 자연스럽게 경기장의 불은 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엔 관중들의 박수 혹은 야유가, 공정한 승패만이 남게 된다. 

하프 타임, 곧 경기에서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의 휴식시간을 말한다.  우리의 인생을 일종의 ‘경기’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밥 버포드는 전반전과 후반전의 인생 사이의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인생 전반전이 전략을 짜고 열정적으로 뛰어 골을 넣는, ‘성공’의 시간이라면, 후반전은 성공을 넘어 ‘의미’를 찾아가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뛰어난 성찰 앞에 뇌가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할 당시,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블 방송국의 사장이며 리더십 네트워크의 창립자인 그는 너무나 멋지게 인생의 전반전을 끝낸 상태였고, 그의 말대로 다음 후반전을 더욱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하프타임을 갖는 도중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보다 신뢰가 가고 보다 현실적일 수 있었다.  실제로 치열하게 뛰어 성공을 맛보지 않은 선수라면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생각했다.  전반전인가 후반전인가 아니면 하프타임인가.  냉철하게 말한다면 나는 아직 후반전이나 하프타임을 말할 자격이 없다.

숨 가쁘고 격렬하게 달렸지만 골을 넣지 못했고 이내 나는 지쳤다.  어서 빨리 작전타임(하프타임이 아니다)을 불러 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나는 남의 경기장에서 애꿎게 땀만 뺀 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나에게는 지금 ‘작전타임’이 필요했다.  내가 뛰어야 할 포지션과 공수비 작전, 적절한 완급조절을 다시금 조율해야 하는 시간 말이다.   호흡을 고르고, 뭉친 근육을 풀고, 휴식을 취하자.  실수를 인정하고 성급함을 돌이키자.  다른 선수들보다 조금 더 오래 휴식해도 괜찮다.

경기의 승패는 전반전이 아니라 후반전에서 판가름이 난다.  전반전에서 몇 가지 실책을 범할 수 있지만 만회할 시간은 아직 있다.  그러나 후반전에서 만회하기란 전반전보다 더 힘들다.  사람들 가운데는 후반전을 뛰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후반전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잠깐 작전타임을 외치는 것은 남은 경기를 위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나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 이 책은 인생의 모든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읽어야 할 책이다.’ 라고 말한 피터 드러커의 서문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들이 어느 시점에 서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와 같은 20대라면 이제 막 게임이 시작되었고 앞으로 스릴넘치는 전반전이 펼쳐질 것이다.   때때로 잠깐의 휴식과 작전타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이미 후반전을 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시점에 있든지 모든 선수에게는 작전 타임이 필요하다.  호흡을 고르고,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등,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  전반전의 실수를 인정하고 과감히 후반전을 계획할 때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남은 경기는 박수와 환호로 넘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한 달 만에 다시 잡은 책이었다.  그동안 나는 많이 지쳐 있었고 고통스러웠다.  내 성급함과 경솔함의 결과를 마주 대하기가 두려워서 미루고 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나는 다시 실수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워 진다. 


‘내 의무와 사명은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익숙하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적 정직성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 작전타임은 나를 한층 더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잠깐의 휴식을 취하든, 파이팅을 외치고 씩씩하게 경기장으로 다시 뛰어 나가든 선수는 교체되지 않으니 떨 필요가 없다.  다만 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오래지 않음을 알고, 더욱 더 간절해져야 한다. 

지금 나와 당신에겐 간절한 작전타임이 필요한 때이다.  적어도 이미 경기를 끝내고 경기장 밖으로 퇴장한 선수들이 아닌 이상, 그것은 선수들의 필요충분한 의무이며 책임이다.     




IP *.78.105.123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