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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31일 16시 56분 등록
 

오에 겐자부로, ‘나’라는 소설가 만들기


이 책은 일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의 문학적 자서전이다. 한번도 그의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이름이 익숙한 것으로 보아 꽤 유명한 사람일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이른 나이부터 인정받아 평생동안  명예를 누렸으며, 뇌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들 때문에 참혹한 갈등을 겪었다는 작가소개가 딸려 있다.


대충 따져 보니  65세 즈음에 이 책을 쓴 것 같은데 그렇다면 40년 넘게 소설가로 살아 온 소회와 영업비밀이 무더기로 들어있을 것은 당연한 이치, 한 소설가의 문학적 생애를 고스란히 껴안고 보니 순식간에 부자가 된 듯 뿌듯하다.


어린 시절 늘상 “봐 제끼던” 감나무 잎사귀가 쉬지않고 흔들린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저 익숙하게 봐 오던 일상을 재발견하는 “낯설게 보기”에 눈뜨는 장면, 동네 아저씨가  골짜기에서 목을 매달았을 때 조용하기만 하던 산골동네 주민이 모두 모여 축제처럼 웅성거리는 장면(그 때 축 늘어진 채로 매달린 시신은 무언가를 측량하는 추 같았다), 어머니와 할머니에게서 들은 민담에 살을 붙여 애들에게 말해주는 장면(김영하도 이와 똑같은 추억이 있다)을 각별하게 회고하는 부분에서, 남들은 돌아서자마자 잊어버렸을 것을 평생 기억하며 의미를 캐는 글쟁이로서의 운명이 엿보인다.


그의 소설수업은 성장기의 영어공부와 성인이후의 시읽기에 상당부분 빚을 진만큼, 여기에 꽤 큰 비중을 할애해서 꼼꼼하게 기술된다. ‘신’이었던 천황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교단에 오른 교장이 수줍게 “헬로”를 가르친 이후 저자는 영어에 매료되어 오랫동안 독학으로 영어책을 읽어 왔다. 이런 버릇은 소설가로 성공한 이후에도 계속되어 꾸준히 원서를 읽으면서도 회화에는 도전하지 않는 소심한 모습에 싱긋 웃음이 난다.


콘사이스가 골짜기 어른들 눈에 띄었더라면 곧바로 몇 개의 우람한 팔이 뻗어 나와서 수제 담배를 만들기 위해 징발당해 버렸을 것.


처음 영어사전을 손에 넣었을 때의 소감도 인상적이고, ‘허클베리 핀’이나 ‘닐스’에 얼마나 반복해서 심취했던지 지금도 기러기를 타고 가는 소년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말에, 나도 본 듯한 그림이 떠오르며 덩달아 감회에 젖는다. 어쩌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 모두 그 정도 추억은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유명작가가 되어 자신의 경험을 격상시키는 것이 좋아 보였다. 소중한 장면들을  잊혀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언제까지나 생생하게 불러내는, 글쓰기라는 작업이 새삼 소중하다. 그의 말처럼 표현하는 것은 새롭게, 다시, 깊이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 개인의 경험에서 그치지 않고 수많은 독자의 기억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위치의 작가란 얼마나 대단한가!


소설가로서의 인생습관이 굳어진 사람에게는, 소설 이외의 사생활이란 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역시 “내가 만든 픽션이 현실로 침입해 실제로 산 과거라고 주장하기 시작, 그것을 새로운 기반으로 다음 픽션으로 만들어지는 복합구조”를 “문학적인 알츠하이머병”이라고까지 표현한다. 그에게는 앞서 간 위대한 작가와의 교감과 그것으로 인해 새로운 소설에 대한 착상을 하고 계속해서 써 나가는 과정이 인생의 전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R.S. 토머스의  시를 접하고, “이미 때가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는데...” 이 훌륭한 시인을 충분히 이해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에 탄식하는 장면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단테, 블레이크, 예이츠... 이런 식으로 한 작가에게 3년씩 할애하고 집중연구하는 모습도 아주 인상적이다. 블레이크 주석소설을 쓸 정도로 시인들에게서 소설방법을 배웠다는 술회에서 그들의 시를 읽어보고 싶어진다. 시시각각 줄어드는 시간을 절박하게 느끼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끝까지 한걸음이라도 내딛고 싶어하는 장인의 모습이 숭엄하다.


이제 초보저자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을 인용하며 마무리해야겠다.


비평가에게 의존하기보다,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 낫다.

이것은 충분히 낯설게 하기가 적용되었는가? 물어보며 다시 읽어보고 고쳐 쓰기 위해 펜을 움직일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소설가이다.



소설의 문장을 하나하나 써 나가는 가운데, 구체적으로 활주로 만드는 작업이 없이는 ‘그것’이 찾아오지 않는다. 우주, 세계, 인간사회,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침묵과 서로를 재는 말을 찾다 보면, 그 쌓여 가는 말이 글 쓰고 있는 나와 침묵에 귀기울이고 눈 크게 뜨고 있는 자신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 활주로는 오히려 다리라고 불러야 할 듯...



간간히 거론되듯이 그 역시 비평가들에게 어지간히 시달린 눈치다. 내가 글을 쓸 만한 자격이, 재능이 있는가? 하는 비평가는 제일 먼저 내 안에 있다. 일시적인 슬럼프나 댓글 하나에도 일희일비하는 새가슴으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 내 삶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 차지하는 비중이 있다면, 글로 풀어내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쓰면 된다.


오직 쓰는 행위 속에서 ‘그것’이 찾아 온다. ‘영감’이니 ‘뮤즈’니 이름붙이기에는 너무나 귀하고 정체불명의 순간이라 ‘그것’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평생을 소설쓰기로 살아온 대작가의 회상록에 눈이 번쩍 뜨일만한 오묘한 표현은 단 한 줄도 없었다. 그보다는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있고 그리고 죽어갈 것인 삶의 총체를 탐구하고 싶어 종종걸음 하는 성장주의자가 거기 있었다. 우리는 순수문학을 겨냥하지는 않지만, 소설가는 기본적으로 시행착오가 정상, 소설에 방법은 있어도 방법론은 없다는 그의 언술에서 배울 것이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에게 가능했던 방법이라면 우리에게도 가능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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