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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2일 11시 28분 등록

33

 

 

시 제목’ (시인, 작품집, 출간년도)

 

 

1. ‘동화-파랑새’ (성미정, 대머리와의 사랑, 1997)

 

처음부터 파랑새는 아니었어 당신도 저런 새를 갖고 싶다면 좋은 방법을 알려주지 위험을 무릅쓰고 추억의 나라나 밤의 나라 따위를 헤맬 필요는 없어 우선 새를 잡아와 흔해빠진 참새라도 새를 잡을 정도로 민첩하지 않다고 그렇다면 새를 사오라고 그리고 남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새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때리란 말이야 시퍼렇게 멍들 때까지 얼룩지지 않도록 골고루 때리는 게 중요해 잘못 건드려서 숨지더라도 신경 쓰지 마 하늘은 넓고 새는 널려 있으니 오히려 몇 마리 죽이고 나면 더 완벽한 파랑새를 얻을 수 있지 그리고 가족들 앞에서 말하라고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왔다고 모두들 기뻐하겠지 물론 밤마다 새를 때리다 보면 둔해빠진 가족이라도 비밀을 눈치채겠지 걱정 마 그 정도는 눈감아줄 거야 맞아서 파랗든 원래 파랗든 파랑새라는 게 중요한 거야 그리고 비밀 없는 행복은 하늘 아래 존재하지 않는 거야 뼛속 깊이 퍼렇게 골병 든 행복 맞으면 맞을수록 강해지는 행복 처음부터 파랑새는 아니었어

 

Ü 성미정 (1967~),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강원도에 산다. 1994 <현대 시학>가둔다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처음부터 파격적인 시를 소개한다. 내 삶을 다시 살게 하는 첫 번째 열쇠로 이 시를 택한 이유는 멀리 나아가기 위한 자기검열을 우선함이다. 시인의 내적 자아에 대한 엄격함은 김수영에 버금간다. 삶이 환상적이지 않음을 징그러우리만큼 환상적으로 보여준다. 환상을 깨기 위해 자기를 객관화시키기 위한 첫 걸음은 금기의 구조를 건드리는 것인데 시인에게 그 금기는 가족이다. 사회의 수직적 억압구조가 처음 시작되는 지점, 아무도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그 Trigger Point를 시인은 짚어내고 격발한다.

 

 

2. 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1953)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 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 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 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 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聖人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Ü 김수영 (1921~1968),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에서 동경 상대 전문부를 다니다가 광복 후 귀국해 연희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후반기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참여 시인의 다른 이름.

 

김수영의 존재는 우리가 지고 있는 시적 사회부채의 총량이다. 그의 시는 자기를 냉철하게 돌아보고 서슬퍼렇게 꾸짖으며 호통친다. 팽이를 응시하며 언젠가 멈출 것을 알아차리고 지금 돌고 있는 상황을 슬퍼한다. 이 상황은 자신에게 전이되어 멈추기 전에 자신을 채찍질하고 영원히 고쳐가야 할 운명을 부여한다. 자기검열을 팽이처럼, 거대한 뿌리처럼.

 

 

3. 반성 608 (김영승, 반성, 1987)

 

어릴적의 어느 여름날

우연히 잡은 풍뎅이의 껍질엔

못으로 긁힌 듯한

깊은 상처의 아문 자국이 있었다.

 

징그러워서

나는 풍뎅이를 놓아 주었다.

 

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인간

 

그리하여 주

나를 놓아 주신다.

 

Ü 김영승 (1959~), 인천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986년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 호에 반성. 3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인의 20대는 한국의 80년대다. 야만의 시대였다. 시인은 그 시대를 대단히 혐오했던 것 같다. 시대에 순응하지 못하는 자신은 늘 부적응자의 패배의 기록을 숱하게 엮는다. 그 패배로 인하여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풍뎅이의 날개에 투영하고 있는데 가 그를 놓아 줄 때는 이미 전장에서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겪고 난 뒤다. 반성과 자기검열은 이와 같이 가 놓아 줄 때까지 하는 것인가.

 

 

4. 푸른 밤 (나희덕, 그곳은 멀지 않았다. 1997)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 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Ü 나희덕 (1966~), 논산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1989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에서 시인이 의도한 는 알 수 없다. 의도를 알아차리는 일이 우리 몫이라 생각한다면 는 사랑하는 이로 그리고 진리로 바꾸어 불러도 좋겠다. 그러나, 나는 이성의 사랑으로 오롯이 보고 싶어진다. 시인의 언어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시를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던들, 아니다 이 아름다운 시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네 보자. 남은 인생 펴겠다.

 

 

5. ‘연애에 대하여’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1980)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넘어간다 손이 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싼다 숨막혀 죽겠어! 이불 위에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생각 하는 길을 껴안는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屍身 밝히는 촛불들
愛人,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Ü 이성복 (1952~)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1977 <문학과지성>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면서 시단에 등장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情詩의 백미다. 시를 전부 지우고 마지막 연만을 살려놓아도 손색없는 걸작이다. 이 시를 알게 된 지는 꽤 오래되어서 10년 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시의 마지막 연을 슬쩍 빌려 표현하기도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언제 보아도 내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데 봄이 오려는지 지금 유난히 더하다.

 

 

6. ‘앞날’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1980)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어져 가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잡을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 안절부절입니다 한껏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팔도 다리도 없으니 내가 당신을 붙잡지요나는 당신이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Ü 같은 시집의 다른 시 한편을 더 소개한다. 앞날은 수평적 관계에서 사랑을 해야 하는 주위에서 볼 수있는 숫한 연인들의 고민이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만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때 연인들은 불행에 빠진다. 그 때 우리는 딜레마를 느낀다. 나로부터 당신을 보내주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나는 치명적인 대가를 고스란히 떠 안아야 한다. 그 대가는 당신을 보냄으로써 겪을 슬픔, 또는 당신을 보냄으로써 더 이상 당신으로 인한 나의 기쁨을 느낄 수 없음이다. ~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보내야만 하는가. 아프다.

 

 

7. ‘사랑의 시 1’ (파블로 네루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1924, 김현균 역)

 

여자의 육체, 하얀 구릉, 눈부신 허벅지,
몸을 내맡기는 그대의 자태는 세상을 닮았구나
.
내 우악스런 농부의 몸뚱이가 그대를 파헤쳐

땅 속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튀어나오게 한다.

 

터널처럼 나는 홀로였다. 새들이 내게서 달아났고
밤은 내 가슴으로 거세게 파고들었다.
난 살아남기 위해 그대를 벼렸다, 무기처럼
,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멩이처럼.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은 오고, 난 그대를 사랑한다.
가죽과, 이끼와, 단단하고 목마른 젖의 몸뚱이여
.
아 젖가슴의 잔이여! 아 넋 잃은 눈망울이여
!
아 불두덩의 장미여! 아 슬프고 느릿한 그대의 목소리여!

 

내 여인의 육체여, 나 언제까지나 그대의 아름다움 속에 머물러 있으리.
나의 목마름, 끝없는 갈망, 막연한 나의 길이여
!
영원한 갈증이 흐르고, 피로가 뒤따르고
,
고통이 한없이 계속되는 어두운 강 바닥이여
.

Ü 파블로 네루다 (1904~1973), 칠레 국적의 시인이자 철학자이자 정치가. 칠레 산티아고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파블로 네루다로 인해 나는 그의 조국에까지 연민을 가지게 되었다. 희대의 역적 피노체트에게 정권이 짓밟히는 장면을 목도하며 살바도르 아옌데 1973년 당시 대통령 살해당하고 12일 후에 파블로 네루다는 생을 마감한다. 한국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래서 아프다. 피노체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사람이 한국의 박정희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시가, 그의 신념이 인류에게 선사한 풍요로움을 더 이상 볼 수 없음이 아프다. 그의 두 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 실린 사랑의 시1’로 그 아픔을 달래본다.

 

 

8. 신성한 숲 (황인숙,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1988)

 

이 숲.

들벚나무와 사시나무

뿌리 사나운 아카시아와 싸리나무, 소나무

뜻밖에 만난 놀란, 한 그루의 향나무와

밟은 적도 긁힌 적도 무수한

덩굴나무와 가시나무.

본 적은 있으나 이름 모를 나무들과

보지 못한 나무들

보지 못할 나무들

이 숲.

꿈틀거리는 나무 사이로

두려움 없이 내가

지나갈 수 있을까?

나는 새처럼 가볍지도 않은데

이들은 내게 적의의 새를 날리지 않을까?

이 숲.

나무의 무리 가득한

안개로

깊어지고.

 

Ü 황인숙 (1958~), 서울에서 태어나 문예창작을 전공하였다. 1984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노래를 부르고 시를 노래할 때는 우리는 언제나 나무와 새들을 살아있음으로 간주하고 얼마나 많은 정념을 그들에게 투사하였나.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산을 가든 산책을 할 때 보이던 그 나무들은 우리에게 안중에나 있었을까. 시인은 그들에게 살아있음을 거룩하게 환기시키고 있다. 꿈틀거리는 나무 사이로 걸어 갈 수 있을지를 물어가며 그 태초의 생명들에 대한 경배를 담고 있다. 오랜 무시와 가혹의 대가로 그들이 에게 적의를 품고 있으며 날아오는 새들조차 그들의 계획하에 나에게 날리는 적의라고 표현한다. 내 느낌이 맞는다면 말이다. 아무튼 이 시인의 언어는 아름답다.

 

 

9. (황인숙,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1988)

 

온종일 비는 쟁여논 말씀을 풀고

나무들의 귀는 물이 오른다

나무들은 전신이 귀가 되어

채 발음되지 않은

자음의 잔뿌리도 놓치지 않는다

발가락 사이에서 졸졸거리며 작은 개울은

이파리 끝에서 떨어질 이응을 기다리고

각질들은 세례수를 부풀어

기쁘게 흘러 넘친다

그리고 나무로부터 한 발 물러나

고막이 터질 듯한 고요함 속에서

작은 거품들이 눈을 트는 것을 본다

 

첫 뻐꾸기 젖은 몸을 털고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Ü 시인의 같은 시집에 있는 시 한편을 더 소개한다. 이 시는 순전히 아름다운 시어로 나를 반하게 했다. “채 발음되지 않은 자음의 잔뿌리도 놓치지 않는다.” “이파리 끝에서 떨어질 이응을 기다리고는 기절할 만한 표현이다. 봄의 모습을 시인이 온 몸으로 받아내고 다시 언어로 치환할 때 시인은 국어의 질량을 마음껏 저울질 했을 것이다. 특히 이파리 끝에서 떨어질 이응을 기다리고라는 표현은 이파리 끝의 물방울의 둥근 꼴의 모습과 그 둥근 꼴이 떨어질 때의 소리의 낭랑함을 그대로 이응에 견주는 재기는 절세의 문장이다. 다음의 시들을 위해 나는 다행히 기절은 하지 않았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내 마음은 많은 노력이 필요했던 시다.

 

 

10. 모닥불 (백석, 사슴, 1936)

 

새끼오리*도 헌신짝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작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새끼오리 : 새끼줄 오라기

*갓신창 : 부서진 갓에서 나온, 말총으로 된 끈

*재당 : 육촌형제

*갓사둔 : 새사돈

 

Ü 백석 (1912~1995),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1935 <조선일보>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36년에 첫 시집 <사슴>을 펴냈다.

 

백석은 미당과 소월 같은 시의 천재들처럼 10대에 이미 그의 존재는 우뚝하다. 그의 서북방언은 시적 허용이라는 특권 아래 풍요로운 방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시에서 민족시인의 전형을 찾고 그 결기를 읽어내는 일은 과도하지 않은가. 민족이라는 단어를 조금 잊어버리면 안되겠는가. 이 시에서는 백석의 순수한 언어의 세계를 감탄할 일이다.

 

 

11. 통영 (백석)

 

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아직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Ü 백석의 시 한편 더 읽어보자. 백석은 20대에 이미 세 명의 아내를 두었던 사람이다. 부모의 강권으로 그리 되었으나 백석은 그네들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했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자야라는 여인이었는데 그 중 이라는 여인이 잠시 살았던 통영을 직접 방문하여 쓴 시가 통영이라는 시다.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해 혼자 통영에 내려갔다고 전해진다. 사실 란이라는 여인은 친구의 애인이었다. 그가 느꼈을 심적 고통이 통영이라는 시로 절절히 다가온다.

 

 

12.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탸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Ü 아름다운 시어만큼이나 멋진 그의 생애를 한번 더 응시한다. 란이라는 여인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일단락 되고 난 뒤 백석은 1936년 그의 나이 스물 다섯에 함흥에서 조선권번 출신의 기생 자야를 만난다. 그는 자야라는 여인과 3년을 동거한다. 여담으로 훗날 자야라는 여인은 자신이 운영하던 요정을 길상사로 바꾸어 법정 스님에게 기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백석이 자야라는 여인을 통해 란에게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지 않았나 싶은데 이 사랑 또한 이루어지지 못한다. 백석은 자신을 누이처럼 품어주었던 자야에게 나타샤라는 여성으로 응결되면서 위의 시는 탄생한다.

 

 

13. 오랑캐 꽃 (이용악, 오랑캐 꽃, 1947)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리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흐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게

울보처럼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Ü 이용악 (1914~1971),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止智 대학에서 수학했다. 1935 <신인문학> 3월호에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일제 하에서도 민중시라는 것이 있었다면 그 월계관은 이용악의 것이다. 이용악은 좌익 선전활동 혐의로 서울에서 검거되어 1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던 중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풀려나와 북으로 갔다. 모진 세월이지만 그의 시는 조선의 민중을 어루만졌다. 이용악의 오랑캐꽃은 정민의 한시미학산책에서 소개되었던 이릉의 예화에서 나오는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시인은 불편부당한 낙인에 연민을 느끼는 것 같다. 아름다운 꽃이지만 오랑캐꽃으로 명명되어 힘겨워하고는 있지 않은지 하는 연민 말이다. 어쨌든 이용악은 백석과 함께 북의 언어 풍경을 더 풍요롭게한 시인으로 손색이 없다.

 

 

14. 진달래 山川 (신동엽)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어요.

 

잔디밭엔 장총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맡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 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울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섭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진달래 밭엔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Ü 신동엽 (1930~1969),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사학과 국문학을 전공했다. 1959년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민족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 시인이다. 김수영과 더불어 참여시인으로써도 명성을 얻었는데 김수영이 떠나고 1년 뒤 자신도 생을 마감한다. 어린시절 4.19라는 격동을 거치며 세상을 보는 시각이 더해졌다. 그러나 그가 창작한 시의 아름다움과 국어 사용의 절묘함을 생각했을 때 서른 아홉 해의 생보다 그 이후의 생이 더 아까운 시인이다. 그의 많은 시 중에 이 시를 택한 이유는 시인이 그린 전쟁의 모습 중 나에게 가장 아리고 슬프게 다가왔다.

 

 

15. 온 몸을 감도는 붉은 핏줄 (김영랑, 영랑시집, 1935)

 

온몸을 감도는 붉은 핏줄이

꼭 감긴 눈 속에 뭉치어 있네

날랜 소리 한마디 날랜 칼 하나

그 핏줄 딱 끊어버릴 수 없나

 

Ü 김영랑 (1903~1950),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다. 휘문의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공부했다. 일본 유학 시절 만난 박용철과 함께 1930 <시문학>을 발간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영랑은 리듬의 시인이다. 이북의 시인들이 오랜 세월 이남의 사람들에게 존재를 잊히게 되는 시기에 맞추어 영랑은 우뚝 솟는다. 시대를 잘 타고난 건 사실이지만 그의 시가 폄하될 만큼의 시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선율과 운율이 시의 모태임을 자각할 때 영랑의 시는 가장 그 어프로치에 근접하다. 한국어의 속살을 가장 잘 어루만진 시인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위의 시는 영랑의 시 중 선율에 기반한 소리보다는 이미지가 뛰어난 시 중 으뜸이다.

 

 

16. 유리에게 (김기택, 태아의 잠, 1991)

 

네가 약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작은 충격에도 쉬이 깨질 것 같아 불안하다
쨍그랑 큰 울음 한번 울고 나면
박살 난 네 몸 하나하나는
끝이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

 
큰 충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네가 바위라면
유리가 되기 전까지 수만 년
깊은 땅속에서 잠자던 거대한 바위라면
내 마음 얼마나 든든하겠느냐
 

깨진다 한들 변함없이 바위요
바스러진다 해도 여전히 모래인 것을
그 모래 오랜 세월 썩고 또 썩으면
지층 한 무늬를 그리며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시 바위가 되는 것을

 
누가 침을 뱉건 말건 심심하다고 차건 말건
아무렇게나 뒹굴어다닐 돌이라도 되었다면
내 마음 얼마나 편하겠느냐
 

너는 투명하지만 반들반들 빛이 나지만
그건 날카로운 끝을 가리는 보호색일 뿐
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  

 

Ü 김기택 (1957~),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영문학을 전공했고 1989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인은 언어의 조각가다. 그의 시는 매우 잘 깎이어진 하나의 미끈한 조각을 보는 듯하다. 시인이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라고 말할 때 약함의 시원(始原)이 결국 강함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일러주며 정제된 언어의 조각에서 우리는 그의 동상을 본다. 한편 더 읽어보자. 

 

 

17. 딸꾹질 (김기택, 태아의 잠, 1991)

 

아기는 신기하기만 하다

목구멍에서 솟아나오는

이상한 새소리

발구르며 날개짓하며 소리쳐 웃는다

깔깔깔깔 딸꾹, 깔깔깔깔 딸꾹

경쾌하게 튕겨져 나오는

딸꾹질, 그 희한한 구슬

 

아기는 무섭기만 하다

한참을 지나도 그치지 않는다

갑자기 웃음이 그치고 조용해지자

느닷없이 팽팽해지는 식도 속의 진공 상태

, 목구멍이 터질 때마다

놀라 동그래지는 두 알의 큰 눈

소리쳐도 없어지지 않는다

급기야 터져나오는 울음

아랑곳없이 규칙적으로

울음을 토, 딸꾹, 막토막 잘, 딸꾹, 라내는 소리

 

Ü 둘째 연의 마지막 문장은 선율과 리듬의 시인 영랑에 버금가는 재간이다. 딸꾹질을 이리도 심도 있게 그리고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이 있겠는가. 시인은 아기의 딸꾹질을 매우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기가 딸꾹질할 때의 표정과 입술의 모습, 소리 날 때의 몸이 들썩거리는 변화 등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한 편의 시가 되었다. 무릎을 칠 표현들이다. 우리는 이런 시각적이고 이미지적 표현의 윗자리에 있는 시 몇 편을 알고 있다. 한시미학산책에서 소개되었던 유사한 심상의 시를 소개한다.

 

 

□ 박목월 <불국사>

 

흰 달빛

자하문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소리.

 

마법에 걸린 듯 시가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한다. 몽환적이다. (P. 640~641)

 

□ 원나라 마치원 <가을 생각>

 

마른 등나무, 늙은 나무, 저녁 까마귀

작은 다리, 흐르는 물, 사람 사는 집.

옛길, 서풍, 비쩍 마른 말

석양은 내려오고

애끊는 이 하늘가에

 

 

18. 앵무새의 혀 (김명수)

 

앵무새 부리 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 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Ü 김명수, 1977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월식으로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 시는 김현이 엮어낸 시집의 제목과 같다. 나는 시인과 이 시의 매력보다는 김현이라는 한 문학 평론가를 추억하기 위해서 그가 엮어낸 시집에 있는 이 시를 소개하고 싶다. 이 시의 온도는 매우 뜨겁다.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열망의 온도는 분홍빛온도며 작은 혀의 온도다. 새에게 앵무새에게 혀가 있다는 사실은 시인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 작은 혀가 상상이 되어 오는데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눈물겨울 수가 없다.

 

 

19.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김장호)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그 외로운 봉우리와 하늘로 가야겠다.

묵직한 등산화 한 켤레와 피켈과 바람의 노래와 흔들리는

질긴 자일만 있으면 그만이다.

산허리에 깔리는 장밋빛 노을과 동트는 잿빛 아침만 있으면 그만이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혹은 거칠게혹은 맑게, 내가 싫다고는 말 못할

그런 목소리로 저 바람 소리가 나를 부른다.

흰 구름 떠도는 바람 부는 날이면 된다.

그리고 눈보라 속에 오히려 따스한 천막 한 동과 발에 맞는 아이젠,

담배 한 가치만 있으면 그만이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칼날 같은 바람이 부는 곳,

들새가 가는 길, 표범이 가는 길로 나도 가야겠다.

껄껄대는 산 사나이들의 신나는 얘기와 그리고

기나긴 눈벼랑 길이 다하고 난 뒤의

깊은 잠과 달콤한 꿈만 있으면 그만이다

 

Ü 김장호 (1929~1999), 시인이자 알피니스트다. 아홉 권의 시집을 냈고 한 권의 에세이집을 발간했다. 인류가 목적 없이 산을 찾기 시작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지금, 그는 이유 없는 오름짓의 행복을 알아차리고 그 행복의 언어들을 잘 갈무리하였다. 알피니스트 시인이었거나 시인 알피니스트이었거나 그의 생은 분명 행복으로 넘쳐났을 터다. 그 처지를 마냥 부러워 만하고 있는 내가 있으니. 다시 한번 더 그에게 부러움을 보낸다. 아래 시를 마저 느끼자.

 

북한산 (김장호)

 

어버이를 여의고 나는

내게 지붕이 없어졌다고 느꼈다

 

분가를 하고서는 더구나

내가 외톨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며 돌아보며

됨됨이를 탓하면서

 

골목마다 책 갈피 마다

, 신열로 달아오르던 나날,

 

문득 머리 위로 덮여오는

지붕,

 

눈이라도 퍼부을 것 같은 동짓달 산그늘을

시나브로 흔들리는 우듬지의 바람으로

녹슨 숲을 헤치고 손톱밑을 헤집고

 

하냥 기어오른 마루턱

어쩌자고 벼랑가에 잠드는

나를 만났다

 

도시 어디를 헤매다가 이제 오느냐고

그제사 눈을 비비는 나를 끌어안고

소리치는 산이 있었다

 

 

20. 자동판매기 (최승호, 고슴도치의 마을, 1985)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 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賣春婦 불러도 되겠다
黃金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權能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賣淫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十字架 세운 자동판매기는
오렌지 주스를 줄 것인가

 

Ü 최승호 (1954~),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교대에서 수학.

 

지폐에서 종이 이상의 것을 본다는 점에서, 어쩌면 우리는 자본을 신으로 받드는 신도가 아닐까?’ 나무 십자가를 나무 이상으로 보는 것처럼, 목주를 팔찌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인은 흔히 볼 수 있는 자판기에게서 매음굴의 추함과 종교의 사악함을 포갠다. 사랑과 믿음도 자본화되는 곳 말이다. 그곳뿐이겠는가. ‘부러움을 동력으로 부끄러움을 그 바퀴로 굴리어지는 이 세상 모든 배금(拜金)의 공간에 포갤 수 있다. 시인의 시각은 날카롭다.

 

 

21. 밥과 자본주의 - 우리 시대 산상수훈 (고정희,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1992)

 

내 뒤를 따르고 싶거든

남의 발을 씻겨주라

씻겨주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자기 자랑 시대,

남의 발 씻기는 이 따로 있으니

그대를 세상은 몸종이라 부르네

 

내 십자가를 지고 싶거든

원수를 사랑하라

사랑하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남북분단 시대,

그대를 세상은 빨갱이라 부르네

 

내 기적을 알고 싶거든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내밀고

오 리를 가라 하면 십 리까지 따라가라

따라가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먹이 사슬의 시대,

몸을 달라하면 쓸개까지 주는 이 따로 있으니

그대를 세상은 창녀라 부르네

 

내 평화를 누리고 싶거든

땅 위에서 가난하라, 땅 위에

재물을 쌓지 마라, 주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자본독점 시대,

오직 가난한 이 여기 있으니

그대를 세상은 거지라 부르네

 

아아 주님 당신은 위대한 허풍쟁이

대책 없는 허풍쟁이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구하면 주실 것이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말씀하셨지만

구하고 두드리는 이 반동이라고 부르네

아니오 하는 이 반체제라 부르네

 

Ü 고정희 (1948~1991),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1975 <현대시학>에서 등단했다.

 

1991 6 9일 지리산 뱀사골의 불어난 물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시인은 시마와 같은 계곡물에 안긴다. 이 아까운 시인을 옥황상제는 다 지은 자신의 집 상량문을 쓰려고 데려갔던가. 그녀가 남긴 시는 하나같이 상량문에 비기는 수작이다. 이 시는 앞서 소개한 최승호의 자동판매기와 견주어 보아도 좋을 듯하다. 시인 또한 예수 즉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 그 믿음이 배반되는 현실을 가혹하게 비판한다. 가짜 사랑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녀는 진짜 사랑과 진짜 밥 그리고 진짜 돈을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이 시인, 정말 아깝다.

 

 

22. 유방 (문정희)

 

웃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지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겊 속에
꼭꼭 싸매 놓은 유방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깊이 숨겨왔던 유방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입에 넣어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랜 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지금 웃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

 

Ü 문정희 (1947~),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현대문학을 전공했다. 1969 <월간 문학>에서 불면으로 시 부문에서 당선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부터 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앞서 소개된 고정희 시인과 동년배로 우리나라에서 여성해방을 주제로 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이 시는 시인의 여성적 감수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때 사랑하는 남자에게 내어주었고 그리고 아이에게 내어주었으나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 온 순간 쓸모 없이 축 늘어져 있는 슬픈 유방의 모습에서 지금의 여성성을 보게 된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시인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에게 다시 생기를 찾아줘야 하는 사명감이 생긴다. 차가운 기계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어머니, 아내, 누나, 동생, 이모, 고모 들에게.

 

 

23. 푸른 하늘을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리지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Ü 김수영 (1921~1968),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에서 동경 상대 전문부를 다니다가 광복 후 귀국해 연희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후반기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참여 시인의 다른 이름.

 

앞서 소개한 시인의 <달나라의 장난> 외에 한 편 더 소개해야겠다. 그는 시인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알고 보니 혁명의 옷을 입고 있는 것도 그에게 참 어울린다 생각했다. 여기 혁명을 노래하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하여 소개한다. 본인이 느껴보지 못했다면 이야기할 수 없을 혁명의 이야기다. 

 

 

24. 스텐카라친 (김정환)

 

그것은 먼 나라보다 가까운 젊은 날의

방황, 다만 속절없이 거대하게

출렁거리는 무엇이 거대하게

무너지고 그곳에 우리의 길이

세상보다 더 거대하게 열리는가

앞으로 우리들의 생애가

창백하고 친근한 동안 그것은

뒤돌아보지 않은 수천만 명이

피를 흘리던 시간의, 젊은 날의 영화

다만 거대하게

탕진되는 무엇이 거대하게 무너지고

그곳에 끔찍하지 않은 세상이

둥지를 틀고 잠을 잘 것인가 보라

역사를 강물로 비유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세월도

보라 옳은 것은, 사실 옳았던 것이다.

 

남은 것은 역사 속에

남은 자의 몫일 뿐이다

남은 자의 기억은 옳지 않았다

피비린 기억보다는 더 많은 것이 이룩되었다.

 

Ü 김정환 (1954~), 서울에서 마포에서 태어나 영문학을 전공했다. 1980 <창작과비평>마포,강변동네에서 5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멘토, 김수영이 떠난 뒤 신동엽은 이렇게 말했다. “한반도 위에 그 긴 다리를 버티고 우뚝 서서 외로이 주문을 외고 있던 천재 시인 김수영, 그의 육성이 왕성하게 울려 퍼지면 1950년부터 1968년 근 20년간, 아시아의 한반도는 오직 그의 목소리에 의해 쓸쓸함을 면할 수 있었다.” 1년 뒤 신동엽도 떠나간다. 김수영에서 신동엽으로 그 짐을 다시 짊어질 수 있는 시인은 누구인가. 여기 김수영의 영혼 중 일부를 호흡했다.”는 시인이 있다. 그가 김정환이다. 시에서 시인은 말한다. ‘남은 자의 기억은 옳지 않았다 / 피비린 기억보다는 더 많은 것이 이룩되었다역사에서 승자들은 자유을 위한 인간들의 투쟁이 실패했다는 것을 각인시키려 하지만 시인은 남은 것은 역사 속에 / 남은 자의 몫일 뿐이고 웅변한다. 결국 저항하고 극복하라는 얘기겠다.

 

 

 

25. 원정 (김종삼)

 

평과()나무 소독이 있어
모기새끼가 드물다는 몇 날 후인

어느 날이 되었다
.

며칠 만에 한 번만이라도 어진

말솜씨였던 그인데

오늘은 몇 번째나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된다는 길을 기어이 가리켜주고야 마는 것이다
.

아직 이쪽에는 열리지 않은 과수밭

사이인

수무나무 가시 울타리

길줄기를 벗어나

그이가 말한 대로 얼만가를 더 갔다
.

구름 덩어리 얕은 언저리

식물이 풍기어오는

유리 온실이 있는

언덕 쪽을 향하여 갔다
.

안쪽과 주위(
周圍)라면 아무런
기척이 없고 무변(
無邊)하였다.
안쪽 흙바닥에는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언저리와 뿌롱드 빛깔의 과실들이

평탄하게 가득 차 있었다
.

몇 개째를 집어보아도 놓였던 자리가

썩어 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
.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갔다
.

거기를 지킨다는 사람이 들어와

내가 하려던 말을 빼앗듯이 말했다
.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Ü 김종삼 (1921~1984),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1953 <신세계>원정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의 시보다는 그의 생이 흥미로워 소개한다. 말년의 시인은 연고 없는 행려병자의 신분으로 서울 시립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열흘이 넘게 사경을 헤매다 다시 살아난다. 이후 가족을 다시 만나지만 그가 좋아하는 술과 인연을 끊으며 병원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지낸다. 그는 특히 클래식을 좋아했던 것으로 유명하기도 한데 어쨌든 죽음의 문턱에서 까지 시와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그의 등단 시 원정을 노래한다.

 

 

 

26. 사랑니 (정양, 8기 연구원 권윤정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시)


환갑 진갑 다 지나서
어쩌자고 사랑니가 난다

새로 나는 게 아니고

숨어 있는 게 드러나는갑다고

치과의사는 잠시 어이없고

나는 뭘 들킨 것처럼

욱신거리는 것도 계면쩍다


사랑니는 죽어서도 난다지만

이 늙발에 어쩌자고 드러나는가

눈물은 슬픔은 가슴에 묻어 두면

별이 되어 밤마다 글썽거릴 테지만

숨기고 감추고 묻어 두어도

사랑은 이렇게 욱신거리며 드러나는 건가

어차피 드러나도 이제는 괜찮은 건가


남이야 늙발에 욱신거리든 계면쩍든

야속하든 허망하든 말든

사랑니 그거 아무 쓸모없는 거라며

가끔씩 말썽만 피우는 거라 마침내는

뽑아 버려야 한다며

덤덤히 처방전을 뽑는 젊은 의사는

이 세상에 드러날 게 전혀 없나 보다

 

Ü 정양 (1942~),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1968 <대한일보> 신춘문예에서 천정을 보며로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는 특별하다. 8기 예비 연구원 권윤정님이 얼마 전 나의 고통이었을 사랑니 발치에 대한 연민으로 선물로 주신 시다. 내가 시를 선물 받기는 아내 외에는 처음이며 근 10년 간 처음이다. 이 시가 그리 좋을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사랑니를 뽑으며 느끼는 다른 감정을 선사했거니와 시의 아름다운 언어도 좋아서 한 참을 읽고 응시했다. 지면을 빌어 권윤정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27. 동천冬天 (서정주, )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무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빗기어가네

 

Ü 서정주 (1915~2000),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중앙고보와 중앙불교학원에서 수학했으며 1936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으로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인은 한국어를 가장 잘 더듬는 시인이다. 그의 재능의 탁월함 때문인가. 정치적으로 그의 행적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엄중한 삶과 역사에서는 그가 그리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는 시시한 삶을 살면서도 결코 시시하지 않은 문학을 이뤄냈다. 소개하는 시는 한시미학산책에서도 잠깐 소개되었던 시로써 그 아름다운 한국어를 한번 더 느껴보기 위함이다.

 

 

28. 모기친구 (정진규, 도둑이 다녀가셨다, 2000)

 

진종일 뛰어 놀고서도 씻지 않으려 하기에 얼굴엔 온통 암괭이를 그리고서도 말을 듣지 않기에 지난 밤 모기에 물린 자리가 발갛게 부어 올랐기에 모기는 깨끗한 것보다는 더러운 걸 더 맛있어한다고 겁을 주었더니, 그럼 모기에겐 깨끗한 것이 더러운 거고 더러운 것이 깨끗한 거네, 모기가 목욕을 해주었잖아! 더러운 걸 먹어버렸잖아! 난 모기 친구가 될 거야 그러곤 여섯 살짜리 내 상욱이는 깔깔깔 달아나버렸다.

 

Ü 정진규 (1939~),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수학했다. 1960나팔서정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소개하는 시는 정민의 한시미학산책에서 선시(禪詩) chapter에 소개되었는데 그 감흥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아 33편의 시에까지 담기게 되었다. 대가가 될 수 있는 기본적 소양이 아이의 시선을 지닌 상식과 교양을 지닌 사람이었을 때 시인은 대가가 조건에 한 층 다가선 느낌이다. 그가 본 아이와 아이가 본 모기, 다시 그의 생각 golden triangle이 그려내는 치열한 삶의 관조.

 

 

29. 금시琴詩 (소동파, )

 

만약에 거문고에 소리가 있다 하면

갑 속에 두었을 젠 어이 해 안 우는가

그 소리가 손가락에 있다고 한다면

그대의 손끝에선 어째서 안 들리나

 

Ü 소동파 (1036~1101), 1036 12 19일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메이산(眉山)에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순(蘇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본명이 식()이고 호가 동파인데 본명보다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스물두 살 되던 해인 1057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여 스물여섯 살 되던 해인 1061년에는 제과(制科)에 합격했다. 그러나 신법파의 모함으로 그의 관직생활은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유배생활과 각지의 지방관 생활로 보내다가 1101 7 28일 딴쪼우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얻은 병으로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예순여섯 살이었다.

그는 사상의 폭이 매우 넓어서 유가사상을 근간으로 했지만 도가사상(
道家思想)과 불가사상(佛家思想)에도 심취해 있었다. 유가사상은 그로 하여금 끝까지 관직을 지키며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도가사상과 불가사상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쓰러지지 않도록 그를 붙잡아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폭넓은 사상은 다양한 작풍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는데 이 시는 그의 사상이 함축되어 있는 선시(禪詩)라 생각된다.

 

 

30. 오월 (유재영)

 

상추꽃 핀

아침

 

자벌레가

기어가는

지구 안쪽이

자꾸만

간지럽다

 

Ü 유재영 (1948~), 충남 천원 태어났다. 1973 <시조문학>에서 그후의 일기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이 시 또한 정민의 한시미학산책에서 소개받아 싣는다. 자벌레와 지구의 관계는 과연 무엇인가. 생명의 연원과 우리의 눈물 겨운 삶은 어디에서 비롯 되었는가. 우주가 만들어지고 없어지기를 세 번 반복하는 동안 나는 그 안에서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 것 인가. 몇 줄 되지 않는 시구에서 우주의 scale을 읽어내려는 시인의 그릇이 궁금하다.

 

 

31. 흐린 날 (이시영, 바람 속으로, 1986)

 

철근이 자라는

아스팔트 위 저 나무는

밤새도록 팔을 벌려

하늘의 눈송이들을 맞고 있다

허공중을 시속 수백킬로로 달려온 눈송이들은

독한 배기 가스를 피해

그래도 그 앙상한 팔에 안겨

, 처음으로 꿈꾸어보는 지상에서의 불안한

눈송이의 작은 꿈

 

Ü 이시영 (1949~),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였다. 1969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로 당선되며 등단했다.

 

세계의 날씨는 흐린 날씨며, 세계는 철근이 자라는 아스팔트, 앙상한 팔을 벌리고 있는 나무, 독한 배기 가스로 이뤄져 있다. 그 나무 위에 앉아 지상에서의 불안한 눈송이가 꾸는 작은 꿈이 바로 삶이다. 그래도 눈송이는 꿈을 꾸는 것이다. 덧없는 인생의 꿈, 그것이 바로 조신의 꿈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불교적 인생관에 침윤되어 있다. 이 세계는 덧없다. 그러나 꿈은 꿔야 한다.

 

 

32.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었다. 2008)

 

 배고픈 고양이 한 마리가 관절에 힘을 쓰며 정지동작으로 서있었고 새벽 출근길 나는 속이 울렁거렸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전진 아니면 후퇴다. 지난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와 종일 굶었을 고양이는 쓰레기통 앞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둘 다 절실해서 슬펐다.

 

 "형 좀 추한 거 아시죠."

 얼굴도장 찍으러 간 게 잘못이었다. 나의 자세에는 간밤에 들은 단어가 남아 있었고 고양이의 자세에는 오래 전 사바나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녀석이 한쪽 발을 살며시 들었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고. 나는 골목을 포기했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선 나직이 쓰레기봉투 찢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와 나는 평범했다.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Ü 허연 (1966~), 매일경제 문학 담당 기자로 활동 중이다.

 

사바나의 기억을 잃어버린 고양이와 자유를 잃어버린 자신의 추함을 동병상련한다. 따지고 보면 추하지 않은 사람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시인은 자신을 추하다고 사실대로 고백한다. 우리보다 먼저 십자가를 지고 가려는 걸까. 시인의 마음 자리가 추하지 않다.

 

33. 자작시

 

日積過十年   하루가 멀다하고 만난 세월 10년이 지났으니

義心法金剛   강산이 변한 만큼 그대 맘 변할만도 하나

信如石柱   그 믿음 석주같이 곱게 자라 억겁을 같이 하리

 

Ü 결혼하기 전이니 벌써 6년이 지났다. 쥐뿔도 없는 사람을 오랜 세월 곁에서 지켜봐 주었고 결혼까지 하게 되어 황송할 따름이었다. 내 아닌 하나의 우주가 나의 우주와 찰싹 달라붙어 영원의 시간을 같이 하리라는 노래다. 운율에 어긋나고 문법도 맞지 않고 한자의 쓰임이 올바른지도 검증되지 않은 채 청첩장 귀퉁이 올렸었다. 우매하고 무식하지 않았으면 엄두 내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그 마음만을 알아 주마하고 넘어가 주어서 고마웠던 순간이다. 매년 결혼기념일 즈음하여 생각나는 시다. 바람에 날려갈 인생이 영원을 이야기하여 매번 낯이 뜨거운 시가 되었다.

 

 

■ 외운 시 7

1. 흐린 날 (이시영)

2. 앵무새의 혀 (김명수)

3.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김장호)

4. 푸른 하늘을 (김수영)

5. 사랑니 (정양)

6. 반성 (김영승)

7. 통영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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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2 15:39:03 *.114.49.161

장재용님의 붉은 글씨는 언제나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시인에 대한 소개까지 있군요. 성실하신 재용님^^

사연을 읽고 시를 천천히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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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2 16:35:27 *.51.145.193

허접하기로 제일 가는 것 같습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8기분들 모두 멋진 디지털 시집을 만드셨는데 나는 뭐했나 싶네요. 그러나, 권윤정님께 특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서른 세 편의 시 중 권윤정님께서 주신 '사랑니'로 마감에 쫒겨 데드라인을 넘길 뻔한 사태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시를 외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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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2 21:31:49 *.47.75.74

제가 만든 디지털 시집보다 시를 음미하게 붉은 글씨로 정성껏 써 주신

글들이 더 감동입니다. 장재용님의 모든 과제들을 보고 있으면 보는 사람들의

배려가 넘쳐납니다. 그 부분을 항상 닮고 싶습니다.

좋은 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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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3 11:48:54 *.51.145.193

제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배려'입니다. 감추려고 한 것이 더욱 부풀려 진 것 같습니다.

사진에 밝은 웃음이 인상적입니다.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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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3 16:59:33 *.41.190.211

장재용 님이 소개해 놓으신 시를 읽다가 문득, 발견 한 것 있네요. .....26. 사랑니 (정양, 8기 연구원 권윤정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시)..... 권윤정 님이 선물로 주신 26번 시는 고등학교 은사님이 쓰신 "시" 입니다. 은사님께서 시인 이셨서... 훨출한 키에 시원스러운 느낌을 주시는 외모를 가지신 분인데 님의 시에서 은사님의 시를 접하니 기분이 좋아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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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3 22:07:35 *.123.71.120

와우~ 정양쌤이 은사님이시라구요?  우석대 국문과를 유명하게 하신 분이시지요,,,전주에서 많은 후배 시인들을 만드셨기도 하구요.^^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시들 완전 좋아합니다...이번 제 시모음에 '수선화에게', '우리가 어느 별에서' 올렸는데요... 사실 '토막말'이라는 시도 올릴려고 했는데, 그럼 세편이나 올라가게 되어 뺐거든요...정양쌤의 시는 정말 유머와 위트가 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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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3 18:08:39 *.51.145.193

굉장한 인연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엮여져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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