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 난다
  • 조회 수 6124
  • 댓글 수 13
  • 추천 수 0
2012년 3월 12일 11시 47분 등록

                          시가 고른 나의 시절들

 

제 1 부 불타는 청춘

 

봄날 불지르다   -유영금-

봄날 피고진 꽃에 대한 기억   -신동호-

꽃상여 타고   -양성우-

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   -양성우-

연탄 한 장   -안도현-

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호승-

10월의 교정   -최영미-

 

제 2 부 길

 

새벽길   -정철훈-

그와 눈이 마주쳤다   -김기택-

길   -박성우-

아직 오지 않은 말들   -송경동-

춘분   -정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마음의 오지   -이문재-

어두워진다는 것   -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제 3 부 남과 여

 

강  - 황인숙 -

벌거벗은 두 사람의 대화   -유희경-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이면우-

기다림  - 이성복-

그림자  - 신병구-

이제는 없다   -심호택-

별이 지는 날  -박남준-

누가 울고 간다   -문태준-

그립다는 것   -안도현-

 

제 4 부 외롭고 높고 쓸쓸한

 

봄 가지를 꺾다   -박성우-

그 여름의 끝   -이성복-

이탈한 자가 문득   -김중식-

수선화에게   -정호승-

얼굴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이병률-

나는 젖은 나무   -박노해-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문정희-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박라연-

 

 

제 1 부 불타는 청춘

 

 

봄날 불지르다                     -유영금-

 

 

머리칼에

신나를 바르고

성냥을 그어댄다

지글지글타는 두개골

냄새의 찌꺼기가

봄날을 쾅 닫는다

 

누가 나를 맛있게 먹어다오

 

                   『봄날 불지르다 』- 유영금

 

 

봄날 피고진 꽃에 대한 기억                -신동호-

 

오월은 길다 비는 내리고

스무 살의 밤길

마주 닿은 어깨 위로 비는 내리고

젖은 꽃잎을 밟으며 사랑은

미처 꿈꾸지 못했다

오월 때문이었다 비는 내리고

마음의 모든 벽이 무너지고

주춧돌처럼 남은 사랑만

십여 년 동안 내내 낡아왔다

오월만 되면

마음속 허물어진 파편을 줍지만

오월은 목련 같다

빈터에는 옛 사랑만

꽃잎처럼 널브러져 있고

주춧돌 한 귀퉁이는 깨져 있고

아직도 기둥을 세우려들지

않았다 비내리는 오월은

영영. 그 모습 그 풍경

바꾸지 않았다.

 

                                 『저물 무렵』- 신동호

 

 

 

꽃상여 타고                               - 양성우-

 

꽃상여 타고 그대

잘 가라.

세상에 궂은 꿈만

꾸다 가는 그대.

이 여름 불타는 버드나무

숲 사이로

그대 잘 가라 꽃상여 타고.

그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이어이 큰 눈물을

땅 위에 뿌리며,

그대 잘 가라

꽃상여 타고.

 

            『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 -양성우-

 

 

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                        -양성우-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 -양성우-

 

 

연탄 한 장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안도현

 

 

 

 

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가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랑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내가 사랑하는 사람』-정호승

 

 

 

10월의 교정                                      -최영미-

 

최루탄 연기를 쓸어버린 뒤에 더욱 붉어진 단풍잎.

 

우리를 뛰게 했던 많은 말들과 힘께 퇴색한 이름들.

 

 

순수한 열정의 불씨를 간직하고,

 

자유와 정의가 황금빛 신용카드보다 소중했던

시절은 갔다.

 

                       『도착하지 않은 삶』 - 최영미

 

 

 

 

 

제 2 부       길

 

 

 

새벽길                           -정철훈-

 

첫차를 타는 사람들은 안다

새벽의 발걸음이 어떻게

총총거리며 오는지

날이 어떻게 밝아오는지

가까이 가면 그들은 모두

손을 잡고 나아가고 있지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한방울 한방울 이슬처럼

맺혀 있지 그들의 눈은 졸음을

이기려 핏발을 세우고 있지만

그들은 지하철에 몸을 싣고도

고향 어귀 능수버들을 본다

그들은 하루를 이미 살아버린

버들가지처럼 첫차를 타며

자유롭게 자유롭게 흔들리고 있다

동을 틔운 맨 처음의 햇살이 언제나

그들의 차가운 등을 비추었으므로

 

                    『살고 싶은 아침』- 정철훈

 

 

 

 

 

그와 눈이 마주쳤다                   -김기택-

 

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지만

누구인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낯선 낯익음에 당황하여

나는 한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내가 누구인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었다

그는 고양이 가죽 안에 들어가 있었다.

오랫동안 직립이 몸에 배었는지

네발로 걷는 것이 좀 어색해 보였다.

그는 쓰레기 뒤지는 일을 방해한 나에게 항의라도 하듯

야오옹, 하고 감정을 실어 울더니

뜻밖에 아기 울음소리가 터지는 제 목소리가

이상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른 고양이들처럼 서둘러 달아나지 않았다.

슬픈 동작을 들킨 모습에 화가 난 듯

고개를 숙이더니

굽은 등으로 천천히 돌아서서 한참 동안 멀어져갔다.

 

                                             『껌』 - 김기택

 

 

 

 

길                                     -박성우-

 

이파리 무성한 등나무 아래로

초록 애벌레가 떨어지네

사각사각사각,

제가 걸어야 할 길까지 갉아먹어서

초록길을 뱃속에 넣고 걸어가네

 

초록 애벌레가 맨땅을 걷는 동안

뱃속으로 들어간 초록길이 출렁출렁.

길을 따라가네

먹힌 길이 길을 헤매네

등나무로 오르는 길은 멀기만 하네

 

길을 버린 사내가 길 위에 앉아 있네

 

                                 『거미』- 박성우

 

 

 

아직 오지 않은 말들         -송경동-

 

언제부터인가

있는 말보다

없는 말을 꿈꾼다

 

금세 가족이 되어 동화되는 말들은

그 말들이 아니다 그의 말들은

닮기 위해 오지 않고

설명하기 위해 오지 않는다

 

나는 이 말들의 음역이

좀체 떠오르지 않아

많은 날을 벙어리처럼 침묵해야 했다

때론 벽을 쿵쿵 울려보기도 했다

 

나는 오늘도 이 말들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아귀처럼

어느 길목에서 그 말들이

내 몸을 삼킬 수도 있다

 

나는 전혀 다른 목숨으로 그 말들을

토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말들은 뼈를 토해놓고

이것이 말이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춘분                       -정양-

 

 

출근하면서 연구실 문을 잠근다

누가 문들 두드려도 시늉도 하지 않으리라

마침 강의도 없다 밖에 안 나가려고

쉬야도 세면대에 하고 점심 저녁 쫄쫄 굶고

앉았다 일어났다 눈 감았다 떴다 어둡도록

불도 안 켜고 무슨 쭘뻥인지 나도 모르겠다

나를 위해서든 누굴 위해서든

아무 짓도 하지 말아야 세월이 올골질 것 같다

봄날이 오든 가버리든 밤낮이 길든 짧든

내러려둬라 내비둬라 냅둬라 낯익은 말투로

시간이 나를 포기할 때까지 나도

세월을 포기하면서 뒨전거린다

퇴근은 해야지 싶어 하루 종일

아무도 두드린 일 없는 문을 멋쩍게 열고 밖에 나선다

갈 데가 집뿐인가 집뿐인가 주억거리는 주차장 불빛에

산수유꽃 몇 그루 빈 주차장보다 더 적막하게 피어 있다

 

                            『철들무렵』 -정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든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빚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긍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는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는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마음의 오지             -이문재-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이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마음의 오지』 - 이문재-

 

 

 

어두워진다는 것              -나희덕-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 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마,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어두워진다는 것』 - 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제 3 부 남과 여

 

 

 

강                                - 황인숙 -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텐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자명한 산책』 - 황인숙-

 

 

 

벌거벗은 두 사람의 대화               -유희경-

 

그는 그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날의 하늘, 그러니까 파랗다가 보랏빛으로 변해간

그날에 대해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읽다만

책처럼 조금 낯설어 보였다. 그가 입을 다물었을 때,

나는 날아오르는 한 무리 새 떼를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나는 어둠에 대해 그 어둠을 뚫고 달려가는

속도의 굉음에 대해, 더 녹지 않는 늙은 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을 펼쳐 읽고 싶다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충격과 충동에 대해, 언어와 억울에 대해 우리는 침묵을

선언한 사람들처럼 동시에 다른 곳을 보았다.

그는 사람은,이라고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나는 들은 것

같고 나를 감싸고 어디론가 데려갈 듯한 바람이

불어왔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나였는지 그였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렇듯 마주 앉아 있었고 서로를 보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그저, 막막하게 귀를 기울인 것은

나임이 분명하다.

 

 

            『오늘 아침 단어』 - 유희경-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이면우-

 

깊은 밤 남자 우는 소리를 들었다 현관, 복도, 계단에 서서 에이 울음소리 아니잖아 그렇게 가다 서다 놀이터까지 같다 거기, 한 사내 모래바닥에 머리 처박고 엄니, 엄니, 가로등 없는 데서 제 속에 성냥불 켜내듯 깜빡깜빡 운다 한참 묵묵히 섰다 돌아와 뒤척대다 잠들었다.

 

 

아침 상머리 아이도 엄마도 웬 울음소리냐는 거다 말꺼낸 나마저 문득 그게 그럼 꿈이었나 했다 그러나 손내밀까 말까 망설이며 끝내 깍지 못 푼 팔뚝에 오소소 돋던 소름 안 지워져 아침길에 슬쩍 보니 바로 거기, 한 사내 머리로 땅을 뚫고 나가려던 흔적, 동그마니 패었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 이면우-

 

 

 

 

기다림                       -이성복-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봅니다

나는 팔도 다리도 없어 당신에게 가지 못하고

당신에게 드릴 말씀 전해줄 친구도 없으니

오다가다 당신은 나를 잊으셨겠지요

당신을 보고 싶어도 나는 갈 수 없지만

당신이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오셔요

당신이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셔요

나는 팔도 다리도 없으니 당신을 잡을 수 없고

잡을 힘도 마음도 내겐 없답니다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보니

첩첩 가로누운 산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집니다

 

                               『그 여름의 끝』-이성복

 

 

 

 

그림자                         -신병구-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 사람 몰래

그의 그림자 한 움큼씩 떼어

……삼키듯 내 안에 숨겨두었다

 

세월이 가면

그는 누군가에게

전부를 내줄 터이고

나는 다만

삼켜둔 그 사람의 그림자로

저물도록 목이 멜 것이다

 

 

[출처] 문예연구 2006년 가을호

 

 

 

이제는 없다                     - 심호택 -

 

잔인한 세월

 

통나무걸상이 있던

그 술집

드나들었다

 

 

곰팡내

풀꽃냄새 같은 것

다정하던 곳

 

 

울면서 나가는 너를

붙들지 않은 곳

 

때로

그리우나

이제는 없다.

 

 

                          『최대의 풍경』- 심호택

 

 

 

 

별이 지는 날  - 박남준 -

 

어디 마음 둘 곳 없습니다

그가 떠나서만이 아니고요

산다는 것이 서러웠습니다

 

빨래를 널듯 내 그리움을 펼쳐

겨울 나뭇가지에 드리웠습니다

이제 해 지면

깃발처럼 나부끼던 안타까움도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을까요

 

어디 마음 둘 곳 없습니다

별이 뜨고 별 하나 지는 밤

언제인가 오랜 내 기다림도

눈 감을 테지요

 

                『풀여치의 노래』- 박남준

 

 

 

누가 울고 간다               -문태준-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처럼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 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가재미』 -문태준

 

 

 

그립다는 것    -안도현-

 

 

그립다는 것은

가슴에 이미

상처가 깊어졌다는 뜻입니다

나날이 살이 썩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안도현

 

 

 

 

 

 

제 4 부 외롭고 높고 쓸쓸한

 

 

봄 가지를 꺾다            -박성우-             

                               

 

상처가 뿌리를 내린다

 

화단에 꺾꽂이를 한다

눈시울 적시는 아픔

이 악물고 견뎌내야

넉넉하게 세상 바라보는

수천개의 눈을 뜰 수 있다

 

봄이 나를 꺾꽂이한다

그런 이유로 올봄엔

꽃을 피울 수 없다 하여도 내가

햇살을 간지러워하는 건

상처가 아물어가기 때문이다

 

막무가내로 꺾이는 상처,

없는 사람은 꽃눈을 가질 수 없다

 

상처가 꽃을 피운다

 

                     『가뜬한 잠』 - 박성우-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대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그 여름의 끝』- 이성복

 

 

 

 

 

 

이탈한 자가 문득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의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것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황금빛 모서리』- 김중식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라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정호승 

                                                                                                                                    

                                                 

 

 

얼굴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이병률-

 

세상 끝에 편의점이 있다니

무엇을 팔까

장화를 팔까

얼음 가는 기계를 팔까

이 여름 냄새를 팔까

여즉 문을 닫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야겠으니

생각나는 한 사람 얼굴을 그려달라고 해야겠으니

도화지가 있느냐 물어야겠다

사람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 하니

주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얼굴 그림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그 그림이 나의 얼굴이거나

혹은 한 사람의 옆얼굴이어도

얼은 영혼이란 뜻이라니

굴이라는 말이 길이라는 뜻이라니

세상 모든 나머지를 파는 편의점에 가서

조금만 틈을 맞추고 와야겠다

세상 끝을 마주하다가 낯을 씻고

아주 조금만 인사를 하고 와야겠다

 

                       『찬란』- 이병률

 

 

 

나는 젖은 나무                -박노해-

 

난 왜 이리 재능이 없을까

난 왜 이리 더디고 안 될까

날마다 안간힘을 써도

잘 타오르지 않고 연기만 나는

나는 젖은 나무

젖은 나무는

늦게 불붙었지만

오래오래 끝까지 타서 귀한 숯을 남겨준다고 했지

그래 사랑에 무슨 경쟁이 있냐고

진실에 무슨 빠르고 더딘 게 있냐고

앞서자고 잘 나가는 이를

부러워 말라 했지

젖은 나무는 센 불길로 태워야 하듯

오로지 마음을 하나로 모아

용맹스레 정진할 뿐

젖은 나무인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긴 호흡으로 치열하게 타오를 뿐

 

                         『겨울이 꽃 핀다』 - 박노해-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문정희-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그때 나는 별을 바라본다

별은 그저 멀리서 꿈틀거리는 벌레이거나

아무 의도도 없어 나를 가로막는 돌처럼

나의 운명과는 상관도 없지만

별! 을 나는 좋아한다

별이라고 말하며 흔들린다 아무래도

나는 사물보다 말을 더 좋아하는가 보다

혼자 차를 마시면서도

차를 마시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고

여행보다 여행 떠나고 싶다는 말을

정작 연애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어쩌면 별도 사막일지 몰라

결국 지상에는 없는 불타는 지점

하지만 나는 별을 좋아한다

나의 조국은 별 같은 말들이 모여서 세운

시의 나라

나를 키운 고향은 책인지도 몰라

 

               『오라, 거짓 사랑아』- 문정희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박라연-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

그 건너편에 물론 강물이 흐르네.

그 강물 속 깊고 깊은 곳에 내 말 한마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 처음… 사랑할… 때… 처럼… 그렇게……

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

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

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

나,

그 한마디 말이 되어보겠네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박라연-

IP *.123.71.120

프로필 이미지
2012.03.12 15:32:09 *.114.49.161

우와 난다님의 시는 출력해서 읽어보고 싶습니다.

죄다 평소 보지 못하던(제가 아는 것은 거의 애국가 수준의 시인거지요 ^^;;;) 것입니다.

친구들이 공수해준 시를 몇 날 며칠 읽으셨을 난다님 덕분에 좋은 시를 만나보게 되네요.

촌놈 부페에 온 느낌입니다. 하하

프로필 이미지
2012.03.13 12:03:31 *.123.71.120
고맙습니다...자판이나 두드릴줄 알지, 사진붙이고, 노래올리고 이런 거 잘 못해서 모양새가 없습니다 ㅠㅠ
프로필 이미지
2012.03.12 16:39:56 *.51.145.193

'시가 고른 나의 시절'. 뿅가는 제목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2.03.13 12:05:13 *.123.71.120
감사합니다^^ 식상하지 않나 했는데...
프로필 이미지
2012.03.12 17:31:37 *.118.21.146

봄날 불지르다..도 멋진 시 제목이네요 ..ㅎㅎ

우리 함께 봄날 불지르러 가 볼까요?

 

프로필 이미지
2012.03.13 12:06:27 *.123.71.120
네.... 불타는 청춘...^____^
프로필 이미지
2012.03.13 17:13:30 *.41.190.211

수선화에게, 정호승 시인의 외로우니까...사람이다 ... 저도 좋아하는 시 인데요. 얼마전 정호승 시인의 강좌에 참석해 본적이 잇는데, 어느분께서 "아프니까 청춘이지.."라는 책을 페르디 한 것 아니냐라고 물었는데... 정 선생님 왈... 오히려 아프니까 청춘이지가 페르디를 했데요. 왜냐하면 "외로우니까 사람이지"가 발표된 것이 훨씬 이전이기 때문이지요. 좋은시 잘 감상하게 해 주셔서 감사 했어요.^^

프로필 이미지
2012.03.13 19:31:13 *.123.71.120

긍게요...수선화에게는 2000년 12월에 출판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집에 수록된 거니깐요...아프니깐 청춘이다는 작년인가, 재작년 출판된 책 아닌가요?^^ 저는 이 시를 이지상의 노래 때문에 처음 알게 되었어요...제가 노래 링크시키는 기능을 알면 여기에 올릴텐데요...이지상씨 싸이트 들어가면 곡 들을 수 있어요..혹시 아니나요? 이 노래? 

프로필 이미지
2012.03.13 23:01:58 *.229.239.39

네,얼마전 정호승 시인이 쓴 시를 노래로 만든 곡을 어느분이 CD 로 모아 선물을 받아,들어 봤습니다...나중에 뵙게 되면 한번 들어 볼 수 있겠죠...

프로필 이미지
2012.03.15 18:29:46 *.123.71.120

흑흑...이제 바로 뵙기는 힘들듯 합니다...

일년 뒤에나...^__________^

프로필 이미지
2012.03.14 15:42:58 *.114.49.161

난다님의 시를 프린트하렸더니 때마침 우리 교실 프린트 달린 컴이 고장이라 프린터도 쓸 수가 없네요.

컴 고치는 이가 오는 2일 동안 짬짬이 저 보기 편하자고 한 페이지씩 나눴어요.

뭔지 모르면서도 제 눈이 휘둥그레 해요. 

문구사와 팬시점에 들어가서 눈 반짝이며 둘러보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정성을 가지고 고르셨는지 다시 느낄 수 있었어요. 천천히 잘 읽을께요.

난다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른 장에서 다시 만나길 기약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2.03.15 18:37:04 *.123.71.120

흑흑...프린트하게 한 페이지씩 배치를 했어야 하는데요...저는 아이폰에서 보기 좋게만 배치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ㅠㅠ

주로 아이폰으로 읽었거든요...ㅠㅠ

저의 노고를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고맙게도 읽어주시니 또한 감사하구요.

저의 20대부터의 지금까지 모습을 담은 시들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2.03.22 10:14:21 *.182.111.5

난다님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는 시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시에서 한참 머물렀습니다.

좋은 시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신 시집도 가슴으로 읽어보며

기억하겠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북리뷰 안보이시는 분들 일단 파일첨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4] 관리자 2009.03.09 84647
678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시리도록 하얀 동양의 서정성 수희향 2012.09.06 4505
677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너무 순수해서 동화될 수 ... 수희향 2012.08.25 4761
676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 일본의 셰익스피어 수희향 2012.08.25 4722
675 [오에 겐자부로에서 시작하는 일본문학] 수희향 2012.08.25 4480
674 나도 그처럼 - 오에 겐자부로, '나'라는 소설가 만들기 명석 2012.07.31 4308
673 니케의 미소를 보았는가/김성렬 [2] 써니 2012.07.26 4430
672 쓸쓸한 생의 찬미-류시화,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3] 명석 2012.05.30 5980
671 한 범생이법학자의 글로 푸는 욕망-김두식, 욕망해도 괜찮아 명석 2012.05.30 4355
670 이경희, 에미는 괜찮다 명석 2012.05.30 4246
669 성찰보다 중요한 것 훈습-김형경, 만 가지 행동 명석 2012.05.30 6902
668 [그림책] 우리도 가끔은 하느님이예요 file 한정화 2012.05.16 4256
667 [그림책] 적 - 누가 적인가? file 한정화 2012.05.11 4972
666 나누고 싶은 時 그리고 詩 라비나비 2012.04.09 4330
665 일곱 편의 외운시 [7] 부지깽이 2012.03.15 5184
664 [8기 지적레이스 4주차/ 정나라] 음악이 깃든 시- 부록: ... [11] 터닝포인트 2012.03.12 12985
663 [8기 지적레이스 4주차/ 정나라] 음악이 깃든 시- 부록: ... 터닝포인트 2012.03.12 5020
662 [8기 지적레이스 4주차/ 정나라] 음악이 깃든 시, 33 file [10] 터닝포인트 2012.03.12 4341
» 8기 예비연구원(허정화) 내 인생의 시33편 file [13] 난다 2012.03.12 6124
660 [예비8기 4주차_권윤정] 내 인생의 시 33편 file [10] 권윤정 2012.03.12 4992
659 [8기 예비 연구원] 서른 세편의 詩 -장재용- [7] 장재용 2012.03.12 5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