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 명석
  • 조회 수 6899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2년 5월 30일 20시 36분 등록
 

김형경, 만 가지 행동, 사람풍경, 2012


성장기에 접한 어른들의 행태 중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면 무엇인가에 대한 경비를 서로 지불하려고 드는 장면 같은 것.  ‘으아대기’를 치며 거의 싸우다시피 하는 사람들을 보며, ‘뭐 저럴 것까지 있나? 아무나 내면 되지’ 했는데, 살아보니 그럴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긴 했다.


다른 것 한 가지는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이런 화법 같은 것이다. 더러 주변이나 드라마에서 이 문장에 접하면 참으로 생소했다.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해 주었기에 저런 소리를 하나 싶고, 내가 그런 말을 할 일은 없겠다 싶었으며,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결핍감이 있는 상태에서 행하는 이타 행위에는 보상을 기대하는 무의식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행위 뒤에 좌절과 분노를 만나게 되기 십상이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수없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좀처럼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군가 반경 2미터 안으로 들어오면 일단 불편해서 말이 꼬이고 마음이 흐트러진다. 나이들면서 점점 편안한 사람이 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구체적인 장면에서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일은 드물다. 내 아이들도 나와 비슷한 측면이 있어서 외부와 연결되는 지점이 협소한 것을 보며, 뭐가 단단히 잘못 된 것은 아닐까 싶던 차에 이 책에서 다른 관점을 보기도 했다.


김형경의 자전적 소설 ‘세월’을 통해 잘 알려져 있듯이, 저자는 부모의 이혼으로 열 두살 이후로 하숙집을 전전하며 성장했다. 이런 환경과 인생의 비밀에 대해 탐구하는 문학적 기질이 맞물려 저자는 오랜 세월 심리학과 종교에 심취하며 정신분석을 받기도 했다. 직간접의 경험이 통합되는 중년에 이르러 저자의 식견이 책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저자는 심리분석 전문작가로 단단한 입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자꾸 이 쪽 책을 펴내기도 불편했을 꺼고, 본업인 소설에 집중하고 싶기도 했을 텐데, 심리분석에 대한 강의나 집필 요구는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각별하게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어느날 저자가 TV에서 오디션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때였다. “두성을 쓰라”는 심사위원의 말에 참가자 한 명이 “저도 답답했어요. 선생님은 자꾸만 ‘두성을 쓰란 말이야’ 하시지만, 그걸 쓸 줄 알았으면 벌써 썼지요.” 한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자는 그동안 자신이 ‘통찰’을 강조했을 뿐, 정신분석을 이행하는 작업인 ‘훈습’에 대해서는 소홀했음을 깨닫게 된다. ‘훈습’은 불교에서 따온 용어로 ‘지각과 의식이 깊이 스며드는 철저작업’을 의미한다. 심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통찰보다 훈습이 일곱 배쯤 무거웠는데, 그것이 너무 개인적 경험이라고 생각해서 글로 쓸 엄두를 못 내다가 작은 계기로 해서 경계가 허물어진 것이다. 이리하여 ‘심리훈습에세이’가 탄생했고 우리는 좀 더 내밀한  자기심리 분석서 한 권을 갖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로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매달리거나 심지어 우정이 ‘어떻게 서로 병적으로 의존하고 침범하는 방식인지 제대로 보게 되었을 때는 놀라워서 한동안 어떤 친구도 만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친절이나 분노로써 상대를 조종하는 관계, 일방적으로 대상을 사용하는 관계들을 정리’ 하는 과정에서 해명조차 하지 않으며 묵묵히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면에서 힘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 거절당할 까봐 두려워하는 유아적 의존성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부분에서 나와 내 아이들이 적어도 외부에 병적으로 의존하려는 기미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사회성 부족이라고만 여겼던 데 대한 새로운 관점이었다. 그렇다면 ‘의존’이 아닌 건강한 어울림에 대한 연구가 이어져야 했다. 널리 인용되는 ‘공자를 만나면 공자를 죽이고, 석가를 만나면 석가를 죽이라’는 대목하고도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공연히 마음만 바쁜 시기가 아니라면 천천히 묵상하며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인데 인상깊은 대목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넘어가야 할까 보다.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 가족으로부터 심리적 분리를 이루어야 하며, 내면에 만들어 가진 부모 이미지도 해체해야 한다. 세계 모든 영웅 신화가, 그 주인공이 자신의 공동체를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도 그것이라 한다.


저자는 지극히 일상적인 언행으로부터 포괄적인 인생설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만 가지 행동’에 대한 훈습경험을 털어놓음으로써 진솔한 지침이 되어 준다. 전자의 예를 하나만 들자면, ‘충탐해판’의 습관 같은 것.


충고는 자기 생에서 실천해야 하는 덕목들을 남에게 투사하는 것

탐색은 상대에게 존재할지도 모르는 위험 요소를 경계하는 일

해석은 자기 생각과 가치관을 타인에게 덧씌우는 일

판단은 제멋대로 남들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행위


지금은 제법 나아졌지만 누구보다 깊이 빠져 있던 습관이다. 어느 정도 이 습관에서 자유로워진 다음에 튜터가 되어서 다행이다.  단지 하나, 저자는 ‘충탐해판’을 하는 배경이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불안감이라고 쓰고 있는데, 거기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불안감보다는 본능적인 자기본위? 뭐 그 정도가 아닐까 싶다.


페르소나는 가면이라는 의미로 외부적 인격, 사회적 자기 등을 뜻. 생애 초기에는 그것을 만들어 가져야 하고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 인생 전반의 목표라 여긴다. 그러나 페르소나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니며 그것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면 위험하고 미성숙한 사람이 된다. 군인처럼 강인함만 지나치게 드러내려 하거나, 선생님처럼 자신의 옳음만 보여 주려 애쓰게 되는 것이다.


같은 연배여서 그런가 훈습경험을 중년의 시각으로 확장하는 대목이 크게 마음에 와 닿는다. 나는 놀랍게도 이제껏 한 번도 페르소나를 쓰기 위해 노력한 적이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게 된 상황을 이해할 수는 있다. 인생 중반에 이르러 주된 페르소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 것을 보며 그녀의 해법도 소개한다.

 

융은 페르소나 밑에 묻어 둔 감정 무더기를 피라미드 형태로 구조화하고 콤플렉스,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원형, 자기 등 여섯 층위로 설명.  피라미드 가장 아래에 자기를 배치, 그는 자기를 대문자로 특별하게 표기. 페르소나 밑에 구성되어 있는 콤플렉스, 그림자... 모든 측면을 통과하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통합할 때 이루어지는 인격을 자기라고 부르고, 자기에 도달한 상태를 자기실현이라 명명. 그 지점에 도달하면 다양한 관점이 수용되고 모든 갈등이 사라진 고요한 상태가 항상 유지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은밀한 내적 경험까지 들춰가며 우리에게 보여 준 많은 이상심리들을 보며, ‘모두 해탈하면 무슨 재민겨? 극단적이지만 않다면 살짝살짝 이상심리들을 가지고 얽혀 사는 게 인생이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양한 관점이 수용되는 것까지는 몰라도, 모든 갈등이 사라지면 무슨 재미로 살랴?


그러나 자신의 삶을 재료로 하여 저술로 재창조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각의 씨앗을 던져주는 김형경의 사례는 ‘내 인생의 첫 책’을 지향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귀감이 된다. 더욱 내 삶에 침잠하라, 나를 구원하는 것이 독자를 구원하리니, 그것은 내 안에 있는 보편성 덕분이다. 그녀를 통해 ‘영적 건강’이 바짝 다가온 것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해탈이 아닌 천진! 그것도 마음에 든다.

 


온 힘을 다해 너의 천진을 보호하라 -노자

IP *.108.71.13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북리뷰 안보이시는 분들 일단 파일첨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4] 관리자 2009.03.09 84611
678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시리도록 하얀 동양의 서정성 수희향 2012.09.06 4505
677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너무 순수해서 동화될 수 ... 수희향 2012.08.25 4761
676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 일본의 셰익스피어 수희향 2012.08.25 4721
675 [오에 겐자부로에서 시작하는 일본문학] 수희향 2012.08.25 4479
674 나도 그처럼 - 오에 겐자부로, '나'라는 소설가 만들기 명석 2012.07.31 4306
673 니케의 미소를 보았는가/김성렬 [2] 써니 2012.07.26 4428
672 쓸쓸한 생의 찬미-류시화,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3] 명석 2012.05.30 5980
671 한 범생이법학자의 글로 푸는 욕망-김두식, 욕망해도 괜찮아 명석 2012.05.30 4354
670 이경희, 에미는 괜찮다 명석 2012.05.30 4244
» 성찰보다 중요한 것 훈습-김형경, 만 가지 행동 명석 2012.05.30 6899
668 [그림책] 우리도 가끔은 하느님이예요 file 한정화 2012.05.16 4254
667 [그림책] 적 - 누가 적인가? file 한정화 2012.05.11 4972
666 나누고 싶은 時 그리고 詩 라비나비 2012.04.09 4329
665 일곱 편의 외운시 [7] 부지깽이 2012.03.15 5184
664 [8기 지적레이스 4주차/ 정나라] 음악이 깃든 시- 부록: ... [11] 터닝포인트 2012.03.12 12983
663 [8기 지적레이스 4주차/ 정나라] 음악이 깃든 시- 부록: ... 터닝포인트 2012.03.12 5019
662 [8기 지적레이스 4주차/ 정나라] 음악이 깃든 시, 33 file [10] 터닝포인트 2012.03.12 4337
661 8기 예비연구원(허정화) 내 인생의 시33편 file [13] 난다 2012.03.12 6123
660 [예비8기 4주차_권윤정] 내 인생의 시 33편 file [10] 권윤정 2012.03.12 4992
659 [8기 예비 연구원] 서른 세편의 詩 -장재용- [7] 장재용 2012.03.12 5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