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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5일 05시 25분 등록


한시미학산책, 정민,   휴머니스트

정 민

저자는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로 한문학의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살아 있는 유용한 정보로 바꾸는 작업을 해왔다. 그에게 고전은 '오래된 미래'이다. 치열한 탐구와 엄격성을 통해 죽어있는 고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의 처녀작이자 대표작은 <한시미학산책>인데 1996년 초판 발행 이후 대중을 위한 탁월한 한시 입문서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을 통해 한시와 미학이라는 두 어려운 주제를 자유로운 소통의 글쓰기를 통해 한자를 모르고 시에 무심한 현 세대와 공감하는 데 성공했다. 한시는 언어의 함축미와 세련미가 어떤 양식보다 우수하고 그 속에 담긴 조상의 숨결은 소중히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이다. 지금은 생기를 읽고 역사의 뒤편에 방치되어 있던 한시를 다시 돌아볼 좋은 텍스트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현대 시인들이 그의 작품을 읽으며 시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번 느끼고 저자에게 자신의 시집을 보내온다고 하니 책 한 권의 영향이 크다 하겠다.
그는 어딜 가든 한문 원전을 4분의1 크기로 줄인 종이를 들고 다니며 번역을 한다고 한다. 그의 사명감 넘치는 의욕과 열정이 존경스럽다. 처음에는 교수이니까 이러한 작업이 본업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적이고 맛깔스러운 그의 글에 대해 보수적인 학계에서는 크게 평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꿈은 아이러니하게도 연구 외적인 업무가 너무 많아서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은 것이라고 한다. 그가 책을 왕성하게 쓰는 것은 교수이어서 시간이 많아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자신의 꿈을 좇아서 나름대로 강의하고 연구하는 시간을 쪼개서 짬짬이 자신의 연구를 대중과의 소통으로 연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자신의 연구실에 이중으로 책꽂이를 만들고 수년에 걸쳐 꼼꼼히 자료를 모으며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고전에서 길러 올린 글들을 생생하게 오늘의 이야기로 전해주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차기작으로 우리나라 지도를 호랑이 형상으로 비유한 이유를 찾아서 자료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벌써 18년째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있다고 하니 그의 끈질김이 놀랍다.
인문학 서적은 5,000권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라고 하는데 그의 책 중 '미쳐야 미친다'는 20만 권이 팔렸다고 한다. 그의 성공의 비결은 겸손하게도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물론 시대의 흐름을 잘 탄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의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듯한 친절한 글쓰기가 가장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그가 집중하는 분야도 한시에서 시작해서 정약용과 박지원 등 문장가로 넓혀 나가고 있다.
그는 제대로 된 우물을 하나 찾았고 깊이 파고 있다. 그 우물은 마르지 않는 우물이라 앞으로도 많은 조상의 지혜를 그만의 문학적인 언어로 우리에게 들려줄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한국일보 인터뷰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3/h2007030719030284210.htm
중앙일보 인터뷰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47417
TV 책을말하다    http://www.kbs.co.kr/1tv/sisa/book/vod/1316990_16507.html
지은이 인터뷰 http://blog.daum.net/zangsoo43/6042543
정민 교수의 행복한 시읽기 http://blog.daum.net/76bs/62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책 소개 http://blog.naver.com/libra_ej/60009188595

약력
1961년 충북 영동출생.
1983년 한양대 국문학과 졸업.
1991년~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중
2001년 한국18세기학회 부회장

저서
한시 관련 서적 [한시 미학 산책],  [초월의 상상],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꽃들의 웃음판]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서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미쳐야 미친다]
연암 박지원 관련 서적 [비슷한 것은 가짜다],  [고전 문장론과 연암 박지원]
청언소품(淸言小品) 관련[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돌 위에 새긴 생각], [다산어록청상], [성대중 처세어록], [죽비소리]
옛 글 속 선인들의 내면을 그린 수필집 [책 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글귀

1. 허공 속으로 난 길 - 한시의 언어 미학

사물의 심장부에 곧장 들어가 핵심을 찌르려면 죽은 정신, 몽롱한 시선으로는 안 된다. 18

시는 언어의 사원이다.  시인은 그 사원의 제사장이다. 시는 촌설살인의 미학이다. 18

흥취 또한 이와 같다. 시인의 정신은 저만치 허공에 떠 있고, 언어를 통해 수면 위에 그 정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다. 한 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에게 느껴서 알게 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들지 않는다. 22

어젯밤 송당에 비 내렸는지
베갯머리 서편에선 시냇물 소리.
새벽녘 뜨락의 나무를 보니
자던 새 둥지를 뜨지 않았네.
23

사람들이 자신의 이명에는 쉽게 도취되면서, 자기의 코 고는 습관만은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32
#객관화란 어렵다. 자신의 시에 도취되어서는 좋은 시가 나오지 않는다.

2. 그림과 시 - 사의전신론

달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달만 남겨둔 채 그 나머지 부분을 채색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그리는 방법이다. 41

'성동격서'란 말처럼 소리는 이쪽에서 지르면서 정작은 저편을 치는 수법이다. 나타내려는 본질을 감춰두거나 비워둠으로써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41

"말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구름 위에 솟은 봉우리의 끝뿐이지만,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니다. 시인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구름 아래 감춰져 있다. 43

돌아가던 개미가 구멍 찾기 어렵겠고
돌아오던 새들이 둥지 찾기 쉽겠구나.
복도에 가득해도 스님네는 싫다 않고
하나로도 속객은 많다고 싫어하네.

당나라 시인 정곡이 낙엽을 노래한 시이다. 44

시인이 다 말해버려서 독자가 더는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은 시가 아니다. 46

기왕의 집에서 늘상 보더니
최구의 집 앞에서 몇 번 들었나.
강남 땅 풍경이 정히 좋은데
꽂 지는 시절에 그댈 만났네.

두보의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 46

4구의 '낙화시절'은 그 뜻이 참으로 심장하다. 이는 두 사람이 만난 계절이 '낙화시절'이라는 의미이고, 이는 좋은 시절을 다 보내고 난 두 삶의 '낙화시절'이기도 하다. 동시에 성세의 번화를 뒤로 보낸 당나라의 '낙화시절'이기도 한 것이다. 한 층 한 층 의미가 확장되면서 울리는 여운이 길고 가녀린 파장을 남긴다. 47

호리의 차이가 천 리의 현격한 거리를 낳는다. 이 이야기는 기교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 속에 예리한 관찰과 예술가의 정신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교훈을 전달한다. 56

시인의 진실한 느낌이 없는 시는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해도 독자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66

3. 언어의 감옥 - 입상진의론

사물과의 순간적이 만남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생취를 설명적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는 얼마나 허망한가. 그러고 보면 언어는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도구에 불과하다. 74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글이다. 글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말에는 귀히 여기는 것이 있다. 말이 귀히 여기는 바는 뜻이다. 뜻에는 따르는 바가 있다.  뜻이 따르는 바는 말로는 전할 수가 없다."  76
#장자의 언어의 불완전성을 말하는 말

"고향을 지나거든 수레를 내리거라, 알겠느냐?"
"높은 나무 아래를 지나거든 종종걸음으로 가거라. 알겠느냐?"
"내 혀가 있느냐?"
"내 이가 있느냐?"
"천하의 일을 다 말했느니라."
이것이 입상진의이다. 81

자신의 본바탕을 잊지 말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이기라는 것이었다. 어지 보면 당연하고 싱겁기 짝이 없는 주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비유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니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되어 생동하는 깨달음이 되었다. 81
# 말하고자 하는 내용 뿐 아니라 전달하는 방법이야말로 중요하다.

큰 가르침은 사람마다 일깨워 가르칠 수 없다. 본래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말해도 알아듣고, 모를 사람에게는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해 준댔자 더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다. 81
# 그렇다. 큰 깨달음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내가 깨달았다고 떠벌릴 필요도 없고 남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도 없다.

시란 이와 같은 '진공묘유'의 세계와 닿아 있다. 무언가 꼬집어 말하려 하면 사라져 버리는 느낌.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노래한다. 효용가치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저편에서 울려오는 떨림, 그 떨림의 미묘함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인간에게는 단지 입상을 통해서만 진의할 수 있는 묘오의 세계가 있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90

막상 시인이 말하고자 한 것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놓고 보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몇 줄의 교훈이거나,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느 미묘하고 추상적인 느낌의 단편뿐이다.

마치 멀리서 본 산이 아름답지만, 막상 올라서서 보면 바윗돌 몇 개, 나무 몇 그루뿐인 것과 같다. 그렇다고 멀리서 바라보는 산의 아름다움을 거짓이라고 거부할 일은 아니다. 91

4. 보여주는 시, 말하는 시 - 당시와 송시

당시의 묘사적이고 서정적인 경향과 송시의 사변적이고 설리적인 경향을 갈라 대비한 내용이다. 101

당시의 특징으로 거론한 '영묘'란 글자 그대로 그림자를 묘사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다. 실체가 아닌 것을 어떻게 묘사해낸다는 말인가. 대상과 마주하여 일어나는 시인의 감정은 실로 그림자와 같아서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시는 그 무어라고 고집어 말할 수 없는 느낌을 언어로 옮겨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101

반면 '포진'이라 함은 있는 그래로 펼쳐 진술한다는 의미이다. 시인이 의론을 세워 자신의 주의 주장을 전달하려 할 때 흔히 이 방법을 사용한다. 101

당시가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취향이라며, 송시는 고전적이고 이성적인 취향이다. 감성의 욕구는 자칫 무절제로 흐르기 쉽고, 이성의 욕구는 논리의 함정에 쉬 빠진다. 101

젊은 시절 격동하는 감정의 분출과 화려한 비유로 독자를 사로잡던 시인도 만년에는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담한 언어에 담아 노래하는 것을 흔히 본다. 101
# 나는 아직 감성적이고 보여주는 당시가 좋다. 좀더 깊은 통찰을 가진후에 이성적이고 말해주는 송시를 더 좋아할것 같다.


저물어 외로운 객점에 드니
산 깊어 사립도 닫지를 않네.

닭 울어 앞길을 물으려는데
누런 잎 날 향해 날려 오누나. 106

#종일 걷기에 지친 나그네가 주막에 들었는데 깊은 밤까지 도둑걱정없이 문을 열어둔 평온함을 두려워 한다. 먼동이 트기도 전 길을 재촉하는데 길을 묻는 나그네에게 오는건 가을의 시든 낙엽뿐이다. 낙엽은 길은 어디에도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당시는 가슴으로 전해오는 정감의 세계를 노래한다. 때로 들뜬 어감으로, 간혹 슬픔에 젖어 노래하지만 감정의 노예가 도는 법은 좀체 없다. 이런 까닭에 당시풍의 시는 이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보다는 감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즐겨 불린다. 108

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당시와 송시의 구분이나 참여니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좋고 싫음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115

시는 결코 관념의 퇴적장이어서는 안 된다. 또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몽환적 어휘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혹세무민의 연금술사에 지나지 않는다. 시는 결코 독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이거나 암호문일 수가 없다. 115
# 시는 암호문도 설교도 아니다. 생취를 여운이 있는 시적언어로 담아내는 예술이다.

5. 버들을 꺾는 뜻은 - 한시의 정운미

'남포'란 말은 시인들에게 으레 '이별'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정운이 담긴 말이 되었다. 121

버들가지가 이별의 신표가 된 사정은 이러하다. 버드나무는 꺾꽂이가 가능하다. 신표로 받은 버들가지를 가져다 심어두면 뿌리를 내려 새 잎을 돋운다. 125

우리의 우정도 사랑도 그와 같이 시들지 말자는 다짐의 의미도 담겼다. 126

'류柳'의 중국음은 머무른다는 의미의 '류留'와 똑같다. 그러니 버들가지에는 가지 말고 머물러달라는 의미도 있다. 126

내 낀 버들 어느새 금실을 너울대니
이별의 징표로 꺾이어짐 얼마던고.
숲 아래 저 매미도 이별 한을 안다는 듯
석양의 가지 위로 소리 끌며 오르누나. 126

버드나무가 봄날의 서정을 촉진시키는 환기물인 동시에 '이별과 재회에의 염원'을 상징하고 있다. 129
# 우리나라 한시에 자주 나오는 초목 1위는 버드나무이다.

'가을 부채(추선,秋扇)'는 한시에서 으레 '버림받은 여인'을 상징한다. 131
# 여름에 소중하던 부채는 가을이 오면 잊힌다.

옛사람은 풀이 썩어서 반딧불이가 된다고 믿었다. 반딧불이는 황폐한 풀덤불에서 날아다니는 곤충이다.  그 반딧불이가 그녀의 창가를 난다고 하여 지금 그녀의 거처가 얼마나 황폐하고 황량한지를 말했다. 131

누각의 난간은 높은 곳에 있어, 그곳에서 보면 먼 곳에서 오는 사람을 잘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난간에는 왜 기대는가? 기다림에 지친 까닭이다. 그래서 누각에 오르거나 난간에 기댄다는 뜻의 '등루登樓', '의루倚樓', '의란倚欄' 혹은 '빙란憑欄'등의 표현 속에는 '그리움'의 의미가 담긴다. 135

저물녘의 피리 소리는 가버린 시절이나 세상을 떠난 벗을 향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다. 140

시인이 부른 노래가 사람들의 정서를 파고들어 깊은 공감을 일으키면, 이것이 자주 여러 시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특정 단어 위에 사전적 의미를 넘어선 정운이 얹힌다. 지금까지 살펴본 '남포'나 '절류', 그리고 '추선'과 '의루', '문적'등이 다 그런 예들이다. 140

특정 어휘가 특수한 정운을 띠게 되면 요즘 식으로 말해 사은유(dead metaphor)가 된다. 143
#국화는 한국에서 추위를 아랑곳 않는 매운 '절개'를 상징하는 꽃이나 프랑스에서는 국화는 장례식때 쓰는 '죽음'을 의미하는 꽃이다.
#무궁화는 한국에서 저녁때 졌는가 싶으면 다음 날 아침 꽃을 피우는 모습에서 무궁(끝이없음)의 의미를 읽어 나라꽃으로 기리나, 중국에서는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는 지는 꽃으로 하여 인간의 덧없는 부귀영화나 한치 앞을 내다 보지 못하는 소인배의 상징으로 폄하한다.

6. 즐거운 오독 - 모호성에 대하여

시인은 이러한 언어의 모호성을 은근히 즐기는 사람들이다. 시 속에서 이러한 의미들은 오히려 풍부와 함축이 된다. 150

오랑캐 땅 화초가 없다고 하나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엔들 화초 없을까? 胡地無花草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랴마는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네. 胡地無花草
153

서울을 떠도는 저 나그네야
구름 산 어드메가 그대 집이뇨.
엷은 안개 대숲 길에 피어나오고
보슬비 등꽃 위로 떨어집니다.
160
# 시인은 3,4구에서 자신의 고향을 묘사하고 있다.

꼼꼼한 독시의 과정 없이 무성의한 치레나 선입견에 의한 오독으로 일관하는 이런 해설은 오히려 독자의 바른 이해를 방해한다. 172

7. 사물과 자아의 접속 - 정경론

경은 시의 매개이고, 정은 시의 배아다. 이 둘이 합하여 시가 된다.  175

무심한 경물과 마주하여 마음속에 정이 일어난다. 경이 정의 매개가 되는 까닭이다. 가슴에 자욱한 정을 품고 경을 바라보면 무심한 경물이 내 마음의 빛깔로 물든다. 정은 경에 의미를 불어넣는 배아인 셈이다.  176

빗속에 누렇게 잎 시든 나무
등불 아래 하얗게 머리 센 사람 177

"정을 잘 말하는 자는 말이 깊은 듯 얕고 드러날 듯 감추어져서 그 마음의 무한함을 깨닫게 한다. 경을 잘 말하는 자는 형용함을 생략한 채 약간만 보태도 참모습이 또렷하고 생기가 넘쳐난다."  드러낼 듯 감추는 데서 정의 맛이 깊어진다. 시시콜콜한 묘사를 버리자 경이 한층 살아난다. 사실 녹아든 정과 경의 경계를 갈라 구분해내기는 쉽지가 않다. 189

봄 그늘 찌푸려도 새들은 조잘대고
늙은 나무 무정한데 바람만 서글프다. 190

허공 가득 푸른 이내 옷 위로 방울지고
초록의 연못에는 백조가 날아간다.
밤 지새운 묵은 안개 깊은 숲에 남았다가
낮 바람 불어오자 부슬부슬 비 뿌리네. 195

이진의 <산속 집에서 우연히 짓다>
# 산속에 생기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에 옷이 젖고 초록의 못물 위로 백조가 난다.
숲속 깊은 곳에서 밤을 지새운 묵은 안개는 날이 새고 바람이 불자 제 무게를 못 이겨 부슬부슬 비를 흩뿌린다. 195
쇠락하고 청신한 기운이 깃들었다. 195
#쇠락 : (기분이나, 몸이) 개운하고 깨끗함

시인이 아무리 경만 말해도 그 속에 어느새 정이 녹아든다. 시인은 눈앞의 여러 대상 중 어는 하나에 초점을 맞춘다. 렌즈야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초점을 맞추는 시인의 선택에 감정이 스민다. 시 속에서는 어떤 경물도 포착과 동시에 주관의 색채로 물들고 만다. 197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란 마음이 가는 바이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198

객은 시를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시의 법은 차가운 샘물과 같네.
바위에 부딧히면 목 메 울다가
연못에 가득 차면 고요하다네 201
김시습의 <학시>

수다스럽게 말하고 아프다고 끙끙대는 소리가 시의 내용이 되고 말았다. 심상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말라. 202

8. 일자사 이야기 - 시안론

한 글자가 시를 죽이고 살린다. 205

시안이란 바로 한 편 시의 눈동자에 해당하는 자리다. 시의힘줄과 뼈대가 바로 이곳에 모여 있다. 이로 인해 전체 시는 갑자기 생동하는 활기를 띤다. 211

7언시는 제5자가 울려야 하고, 5언시는 제3자가 울려야 한다고 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5언시의 경우 세 번째 글자가, 7언시에는 다섯 번째 글자가 안자가 되는 수가 많다. 213

5언시의 경우 2/3으로 끊어 읽고, 7언시는 4/3으로 끊어 읽는다. 이때 제3자와 제5자는 이 둘의 경계에 놓인 글자다. 말하자면 두 개의 이미지를 하나로 묶는 자리다. 결합의 양상에 따라 의경이 달라진다. 이는 의미의 단위이면서 리듬의 한 매듭니다. 213

일자사의 첫 번째 미감 원리는 '의미의 중복을 피하라.'는 것이다. 221

시는 중복을 꺼린다. 한 글자도 넘치거나 부족해서는 안 된다. 이 절제된 경지를 한유는 이렇게 말했다. "풍부하되 한 글자도 남지 않고, 간략하되 한 마디도 빼먹지 않는다." 한 글자만 더하거나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글, 그런 시를 쓰라는 주문이다. 221

두번째 미감 원리는 '여운을 남기고 호응을 중시하라.'는 것이다. 여운은 추상의 여백에서 생긴다. 시는 단정적 언사를 꺼린다. 사물과 시인이 만나 빚는 의경은 카메라 렌즈처럼 또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러 초점을 흐리는 데 묘한 맛이 있다. 그래도 의경의 호흡이 흐트러지면 안된다. 223

세번째 미감 원리는 '시상의 온유돈후(溫柔敦厚)를 중시하라.'는 것이다. 감감적 직설보다는 에둘러 말하는 데서 온건한 맛이 깊어진다. 모난 말보다는 각지지 않은 표현에서 중후한 체취가 풍겨난다. 227

9. 작시, 즐거운 괴로움 - 고음론

대상을 향한 미친 듯한 몰두 없이 위대한 예술은 이룩되지 않느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쳐야 미친다. 비록 하찮은 기예라 해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가 있어야 비로소 성취를 말할 수 있다. 235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잗다란 기교쯤은 까맣게 잊어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영욕도 득실도 생사까지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237

내게는 고서 여러 권이 있어 홀로 즐기기에 족하고, 시는 비록 졸렬하지만 마음을 풀기에 족하며, 집이 비록 가난해도 또한 막걸리를 댈만하다네. 매번 술잔 잡고 시를 읊조릴 때면 유연히 스스로 얻어 장차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니, 저 이러쿵저러쿵하는 자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240
# 권필
# 이러한 태도로 살고 싶다. 삶의 의미를 내 시 속에서 찾고 싶다.

시는 고민 걷어가 때로 붓을 잡았고
술은 가슴 적셔줘 자주 잔을 들었지. 240

창작은 이같이 피를 말리는 일이다. 243

가도는 매년 그믐날이 되면 반드시 그 한 해 동안에 지은 작품을 책상 위에 모아놓고, 향을 살라 두 번 절하고는 술을 부으며 빌었다. "이것이 내가 한 해 동안 고심한 자취다." 그러고는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249
#나도 그믐날 내가 쓴 글을 모아 놓고 빈 후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싶다.

10. 미워할 수 없는 손님 - 시마론

현세가 불우한데도 시에만 몰두하는 자신을 두고 남들은 시마에 붙들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은 신선의 경지와 견주더라도 조금의 손색이 없노라며 창작의 길에서 느끼는 깊은 희열을 예찬했다. 265

길을 가면서도 시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시 생각, 심지어 꿈에서까지 시 생각뿐, 그밖에 다른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지는 증세, 예의와 염치, 체모조차 우습게 보는 태도, 눈에 띄는 사물마다 허투루 보지않고 거기에 담긴 비밀을 찾아내겠다고 달려드는 증상이 을ㄴ바 시마 증후군이다. 269

첫째, 세상에서 알아주지도 않는데 붓만 믿고 찧고 까불게 만드는 죄다. 270
둘째, 천기를 누설하면서도 당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죄다. 270
셋째, 삼라만상의 온갖 형상을 닥치는 대로 남김없이 옮겨내서 겸손할 줄 모르는 죄다.  270
넷째, 제멋대로 상 주고 벌주며, 정치를 평론하고 만물을 조롱하여, 뽐내며 거들먹거리는 죄다. 271
다섯째, 목욕을 싫어하고 머리 빗기를 게을리 하며, 공연히 끙끙대고 인상을 써서 갖은 근심을 불러들이는 죄다. 271

배부르고 따뜻함 속으로 시마는 깃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충족된 넉넉함을 시마는 혐오한다. 무언가 결핍된 상태, 그 결핍을 채우려는 시인의 정신이 죽창처럼 곤두서 있는 지점에서 시마는 슬그머니 시인에게 스며든다. 그래서 시인은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 겠다." 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283

11. 시인과 궁핍 - 시궁이후공론

시는 왜 쓰는가? 말로는 풀리지 않을 시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름도 노래 앞에서는 눈 녹듯 사라진다. 287
# 그렇다. 시로 쓰면 시름이 사라진다.

문학은 득의가 아닌 실의에서 나온다. 288

낙척한 떠돌이와 불우한 재야의 문인에게 문학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수단이다. 288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 입을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속에 이른바 정서란 것이 생겨난다. 그것이 슬픔과 분노, 격정과 눈물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이 바로 시이다. 289

시인은 코앞에서 나비를 놓쳐버린 소년의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좌절 앞에서 주저앉지 않는 발분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발분하는 서정 없이 어찌 남을 감동시키겠는가. 294

단순한 경제적 결핍은 시인의 발분 욕구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정신적 측면이 배제된 궁을 궁이 아니라 빈이다. 297
# 단순히 경제적으로 빈한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궁해야 시가 나온다.

궁한 뒤에 시가 더 좋게 된다는 말은 예외를 인정치 않는 사실 명제도 아니고, 의당 그래야만 할 당위 명제도 아니다. 306

아이덴티티, 즉 동일성은 '자신을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는 감정'이다. 즉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상적, 관념적 자아와 실제의 자아 사이에 어떤 편차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307

아이텐티티의 문제는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할 규범으로서의 자아와 그렇지 못한 현실의 자아 사이에 발생한 괴리감에 대한 인식이다. 307
# 실의나 좌절감은 이러한 괴리감을 증폭 시킨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 활동을 인간 내부의 두 자아를 일치시켜나가려는 몸짓으로 볼 수 있다면, 궁의 상황은 더 나는 예술작품의 창조를 위한 충분조건이 된다. 307

시인은 탄탈로스와도 같은 존재다. 맛있는 음식과 샘물을 앞에 두고도 영원한 갈증과 갈망 속에서 헤맨다는 탄탈로스! 시인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308

12. 시는 그 사람이다. - 기상론

한시 비평에서 말하는 기상론이란 바로 시인의 기질과 삶의 자세가 그의 싱에 거울처럼 비쳐진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만나보지 않고도 그 사람을 알게 된다. 319

높은 산 꼭대기에 지팡이를 놓고 쉬니
구름 안개 겹겹이 하계를 가로막네.
느지막이 서풍이 백일을 불어가자
만학과 천봉이 일시에 드러난다.
또한 통쾌치 아니한가.
327

내 나이 일흔에 궁곡에 누웠자니
남들이야 부족타 해도 나는야 족하다네.
아침 산에 흰 구름이 피어남 보노라면
절로 갔다 절로 오는 높은 운치 족하고,
저물녘엔 푸른 바다 밝은 달 토함 보면
가없는 금물결에 안계가 족하도다.
책상 가득 경서엔 도의 맛이 깊으니
천고를 벗 삼으매 스승과 벗 족하다네. 331
# 조선 중기 학자 구봉 송익필의 <족부족>이란 작품

시인은 모름지기 가슴속에 호연한 기상을 품을 일이다. 떳떳함을 길러야 한다. 332

13. 씨가 되는 말 - 시참론

시화에는 시를 보고 그 사람의 출처궁달을 예견하는 삽화들이 뜻밖에 많다. 특히 앞서 무심히 한 말이 뒷날의 예언이 되는 경우를 따로 '시참'이라고 한다. 언어의 주술적 힘을 믿어 말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을 경계한 것이다. 335

말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쓴 한편의 시가 어느 날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 말 한 마디, 시 한 구절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어이 붓을 함루노 놀리랴! 355

14. 놀이하는 인간 - 잡체시의 세계 1

누구나 전생의 업을 받고 태어난다. 현세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전생 선악의 업보일 뿐이다. 한때의 덧없는 부귀에 얽매여 바른 길에서 벗어나기보다는,무봉탑에 등불이 환하고 무근수에 꽃이 피듯 광명대도의 세계에서 마음을 노닐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ㅐ용이다. 무봉탐과 무근수는 자아를 일컫는다. 362

시를 회화적 형상으로 나타내려는 시도는 독일 등 외국의 경우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367

15.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 잡체시의 세계 2

잡체시 중에는 일정한 위치에 정해진 글자를 넣는 형태가 특별히 많다. 389

팔음가는 <주역> 팔괘에 맞춘 금, 석, 사, 죽, 포, 토, 혁, 목 등의 여덟 가지 악기를 매 홀수 구 첫 자에 순서대로 얹는 형식의 잡체시다. 392

고대 중국에는 이렇듯 글자를 떼었다가 다시 붙이는 파자나 합자의 방식을 활용한 은어나 수수께끼가 많다. 403

천리초는 어찌 저리 푸른가. 千里草何青青(천리초하청청)
열흘 동안 점을 치니 살지를 못한다네  十日卜不得生(십일복불득생)
403

<논어>에서는 "궁해도 의로움을 잃지 않고, 현달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인간은 어떤가. 공연한 허욕에 사로잡혀 속만 태우고 있지 않은가. 고요히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담담한 시선이 독자를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는 힘이 있다. 408

장난은 장난이되 격조를 잃는 법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습작의 과정을 거쳤으면 언어를 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을까. 언어를 매만지는 장인의 근성이 이런 잡채시를 낳았다. 409

오늘날 잡체시가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언어의 부단한 실험 정신, 질곡을 만들어놓고 그 질곡에서 벗어나기, 언어의 절묘한 직조가 보여주는 즐거움 외에도 잡체시는 오늘의 시단에 의미 있는 시사를 준다. 젊은 시인들이 실험하고 있는 각종의 형태시들은 기실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전통의 재현일 뿐이다. 세상은 돌고 돈다. 이 모든 현상들 앞에서 우리는 수없는 상호 텍스트화를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409
# 그렇다. 세상은 돌고 돈다. 우리는 수많은 상호 텍스트화를 되풀이 하고 있다.

16. 말장난의 행간 - 한시의 쌍관의

네 나이 이제 열아홉인데 爾年十九齡 이년십구령
벌써 비파 잡고 다룰 줄 아네. 乃操持瑟瑟 내조지슬슬
빠를 젠 빠르고 높고도 낮게 速速許高低 속속허고저
지음에게 알리기 어렵지 않네. 勿難報知音 물난보지음
417

시와 말장난은 엄격히 다르지만, 언어를 주된 질료로 삼는 시는 본질적으로 얼마간 유희적 기분을 띄기 마련이다. 특히 음이 같은 말이나 뜻이 여럿인 표현을 활용한 쌍관, 즉 말장난pun은 현대시에서도 흔히 보는 기교다. 423

이렇듯 '허리띠에 차는 패옥 결 玦'로 '결단할 결 決'을 나타내고,  '칼의 고리 환 環'으로 '돌아올 환 還'을 전달하는 것은 한자의 동음사를 활용하여 쌍관의를 나타낸 예이다. 예전 한시에서 이러한 쌍관의의 활용은 시적 함축을 높이는 기법으로 애용되었다. 424

무궁화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져서 ‘일일영一日榮'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덧없는 소인배의 작태에 견주곤 한다. 시인의 해석은 사뭇 다르다. 오늘 아침에 핀 꽃이 내일 아침까지 빛나지 않은 것은 두 아침의 햇살과 마주 서기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니 날이면 날마다 태양만을 향해 하염없이 고개를 숙이는 접시꽃의 줏대 없는 일편단심도 기릴것은 없겠다. 430

쌍관의는 이처럼 시의 함축미를 효과적으로 높여주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430

한시에는 이렇듯 새 울음소리를 음차하여 훈독함으로써 이중 의미를 담는 금언체시라는 것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위의 노고지리는 다른 시에서는 ‘노고질老姑疾'로 표기하여 늙어 병든 시어머니의 병환을 안타까워하는 며느리의 효성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바뀌기도 한다. 433

예전부터 모란꽃을 그릴 때에는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았다.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고 나비는 여든 살 늙은이를 나타낸다. 모란에 나비를 함께 그리면 여든 살이 되도록 부귀를 누린다는 것으로 의미가 제한되어버린다. 나비는 왜 여든 살 늙은이가 되는가? 나비 ‘접'자의 중국 음은 ‘디에die’인데, 여든 살 늙은이 ‘질'자의 발음이 또한 같아 서로 쌍관된 것이다. 436

고양이와 나비가 70세와 80세를 나타낸다면, 패랭이꽃과 바위는 축수의 뜻이 된다. 바위는 장수의 상징이다. 패랭이꽃은 한자 이름이 석죽화다. 줄기에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어서다. 대나무 죽과 축원한다는 축은 중국음이 ‘쥬zhu’로 같다. 석죽 또는 석죽에 바위를 더하면 장수를 축원한다는 의미가 된다. 438

그림에 제비꽃을 그려 넣은 것은 여의, 즉 ‘뜻대로 이루시라'는 의미를 담았다. 438
#제비꽃은 한자로는 여의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호랑이와 까치를 친근하게 여겨왔고 운운 하는 설명이 친절하게 붙어 있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표범과 소나무와 까치는 상황을 상징하는 하나의 코드일 뿐이다. 표범을 나타내는 한자 ‘표'는 ‘빠오bao’로 읽히니, 알린다는 뜻의 ‘보'와 발음이 같다. 까치는 ‘희작'이라 하여 ‘기쁜 소식'을 상징한다. 까치와 표범을 합쳐야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문장을 이룬다. 440

바닷가에 선 소나무 위에 앉아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학은 연하장에 단골로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로 학은 절대로 소나무 위에 앉는 법이 없다. 학인 진창에서 미꾸라지 등을 잡아 먹고 사는 새다. 학은 새 중에 가장 으뜸이 되는 일품조다. 442

소나무는 장수를 상징하는 나무다. 442

17. 해체의 시학 - 파격시의 세계

희작시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시정신은 탈중심주의, 탈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현대 해체시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비시적 대상을 시 속에 끌어들여 용도 폐기된 공허한 언어의 일상성을 파괴하고, 현실의 삶에 뿌리내림으로써 이들은 구체성과 정직성을 획득한다. 449

희작시의 특징은 파격과 해학, 민중성과 익명성으로 대표된다. 특정 작가가 없을 뿐 아니라, 있다 해도 별 의미가 없다. 희작시는 기존 한시의 문법을 과감히 깨뜨린다. 소재도 사설시조가 평시조에 대해 그랬듯이 비시적 대상을 시의 소재로 적극 글어들인다. 또한 그럴 듯한 표면 진술로 사탕발림을 해놓고, 이면에서 풍자와 해학을 겨냥하는 언문풍원도 다양하게 발달했다. 452

김준오는 자신의 저서 <도시시와 해체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적 진리도, 선도 없다는 해체주의는 세상일에 집착하지 않는 일종의 허무주의다. 왜곡된 현실을 왜곡되게 표현하는 해체시에서 온갖 비속어, 욕설 등이 서슴없이 구사되는 언어의 테러리즘을 보게된다. 해체시의 어조는 진지하지 않고 너무나 유희적이고 거칠다." 458

언문풍월은 쉽게 말해 기존 한시의 작법을 패러디하여 만든 국문시가이다. 470

의식의 변화는 내용의 변모를 부른다. 내용만으로 의식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할 때 형식이 변한다. 472

새로운 말하기가 강렬한 실험적 의도를 가졌음에도 시대정신이나 시정신에 의해 안받침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잡체시나 파격시가 오늘의 시단에 던지는 의미는 여전히 생생하다. 472

18. 바라봄의 시학 - 관물론

꽃은 누가 알아주고 말고를 개의치 않고 향기를 낼 뿐이다. 인간이 한세상을 살다 가는 것도 이와 다를 게 없다. 귀인의 정원에서 정원사의 사람을 듬뿍 받으며 피어나는 꽃이 있고, 깊은 산속에서 저만치 혼자서 피었다 지는 곷도 있다. 476

개구리의 빠름이 해를 멀리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도 마침내 다른 놈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뜻이 게을러서다. 재앙과 근심이 닥치는 것은 흔히 이만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477

<관물편>은 이익이 안산에 살면서 생활 주변에서 사물을 관찰하며 느낀 단상을 77항목에 걸쳐 그때그때 기록한 것이다. 주변 사물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그 사물들에 담겨 있는 이치를 캐어 이를 현실의 삶과 연관 짓는 실학적 사고가 담겨 있다. 사물을 살펴 지혜를 언는 격물치지 정신의 실천이었다. 479

매화를 아끼는 퇴계의 마음은 마치 하나의 인격체를 대하는 듯하다. 임종하던 날 그는 매화분에 물 줄 것을 명했고, 불결한 냄새가 매화분에 닿는 것조차 미안해 했다. 사물에 자아를 얹고, 관물을 통해 천기를 읽었던 선인들의 삶의 체취가 그대로 느껴진다. 480

산안개 말끔히 비 씻어가니
그림같이 드러나는 뾰족 멧부리.
저물녘 널구름은 낮게 깔리어
그 모습 저절로 한가롭구나.

산은 늘 그자리에 그렇게 서있다. 산의 이내와 안개나 구름, 이런 변화하는 것을 따라 일렁이지 않고 시인은 깊은 편안함에 잠겨든다. 유유자적하다. 481

지팡이 짚고 서서 물을 바라본다. 쉼 없이 흘러가는 저 물처럼 내 삶도 정체되지 않기를 482

결국 마음 공부는 언뜻 보아 다른 듯이 보이는 현상 속에 내재된 한가지 이치를 수시로 자가 점검함으로써 외물에 현혹되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488
# 조상의 한시에 숨어 있는 철학을 배울 수 있는 시간  

만물 속에 답이 있다. 고요히 바라보라. 마음이 늘 문제다. 외물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 가만히 응시하면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 하나도 모를 것 없다. 명징하고 투명하다. 491
# 그렇다. 이치는 단순하다. 삶도 단순하다. 외물에 끌려다녀 칠정으로 가득찬 마음만이 문제일 뿐이다.

유아지경은 아로써 사물을 보는 까닭에 사물과 내가 모두 나의 색채로 물들고, 무아지경은 물로써 사물을 보므로 어느 것이 나이고 어느 것이 사물인지 알 수가 없다.491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듯고 있다.
495
# 박목월의 윤사월 - 윤사월의 애절한 느낌이 문설주에 귀를 댄 그녀의 몸짓 속에 잊히지 않는 영상으로 다가온다. 무아지경이다.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마주치면서도 그저 지나치는 일상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한 살물과 낯설게 만나, 그 낯섦으로 그 사물을 새롭게 만나는 것, 이것이 관물론이 시학과 만나는 접점이다. 499
# 견물이아니라 관물이다.

시인은 반란자다. 그의 눈이 포착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다. 500
# 아기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자.

19. 깨달음의 바다 - 선시

선은 어지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504

이렇듯 말 같지 않은 소리만 골라서 하는 까닭은 단 하나다.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머리로 따져 알려 들지 말고 가슴으로 느껴 직지인심 견성성불하라는 말이다. 굳이 말로 하자면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일러주는 중이니 섣불리 사변의 잣대를 들이댈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는 우격다짐이다. 508

진짜 앞에서 가짜는 오금도 못편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자재원성이다. 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행주좌와 어느 것 하나 걸림 없이 원만하다. 숨 쉬고 밥 먹듯 자연스럽다. 이것이 선의 극치다. 시도 다를 것이 없다. 스스로를 괴롭혀 취어짜는 시, 안 알아준다고 닦달하는 시, 알맹이 없이 허세만 남은 시는 가짜다. 521

연못에 봄풀이 돋아나오고,
정원 버들 우는 새 소리 변했네
괴롭게 끙끙대고 어려운 것만 말하는 자들은 대체로 깨닫지 못한 자들이다. 522

좋은 시는 끊임없는 반란의 산물이어야 한다. 친숙한 관습과의 결별, 익숙해진 접점에서 벗어나기를 쉼 없이 추구해야 한다. 523

선방에 가짜 선객이 많듯이 사단에 가짜 시인이 많은 것도 같다. 대충 비슷하게 흉내 내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진짜 앞에서는 둘다 곰짝 못한다. 숨도 쉴 수 없다. 528

20. 산과 물의 깊은 뜻 - 산수시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박두진의 <도봉> 시작 부 535

그의 말대로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운 뿐"이다. 그래서 산에 서면 청산은  상처 입은 가슴을 어루만진다. 535

빛이 사라진 밤중, 낙엽이 진 가을 산을 번화의 시기를 떠나보낸 뒤 물끄러미 자신을 반추하는 시간이다. 헐벗어 더욱 좋은 산, 어둠 속에 오히려 밝은 강물 빛은 집착과 욕망을 벗어던져 더욱 투명해진 시인의 마음과 똑같다. 텅 빈 충만의 세계다. 536

이렇듯 자연은 우리에게 떳떳한 삶의 모습을 일깨워준다. 일상에 찌들어 생기를 잃고 풀이 죽어 있을 때, 자연은 인간에게 소생의 원기를 불어넣어준다. 537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538
공자의 <논어> 중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에 통달하여 두루 통해 막힘 없는 것이 물과 같으므로 물을 좋아한다. 어진 사람은 의리에 편안하여 중후하여 옮기지 않는 것이 산과 같기에 산을 좋아한다. 538
주자의 풀이

대저 속된 자들은 선방에서 기생을 끼고 시냇가에서 풍악을 베푸니, 꽃 아래서 향을 사르고 차 마시는 데 과일을 두는 격이라 하겠다. 554

21. 실낙원의 비가 - 유선시

인생은 절망과 비탄의 연속일 뿐이다. 믿었던 것들로부터 배반당하고, 사랑하던 사람마저 하나 둘 떠나보낸 후 빈 들녘을 혼자 헤매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뒤돌아보면 뜻대로 된 일은 하나도 없다. 557

사는 해 백 년을 못 채우건만
언제나 천 년 근심 품고 사누나 558

칼 빼어 물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잔 들어 맘 달래도 시름은 더 깊어지네.
인생살이 사는 동안 뜻 같은 일 없었지
내일엔 머리 풀고 쪽배 타고 떠나리 558

인생을 향한 깊은 관조와 달관이 있다. 비분강개 속에 인생의 갖은 신산을 겪으면서 오히려 이들은 인생을 더 깊이 바라보는 중후함을 얻은 듯하다. 559

꿈은 무의식은 세계이다. 인간의 의식이 한계에 도달할 때 무의식이 열린다. 무의식의 세계는 원초적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상징은 좌절되었던 본능적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욕구와 관련된다. 이러한 상징들은 꿈을 통해 신비한 세계를 열어보임으로써 현실에서 상처받고 왜소해진 자아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소생시켜준다. 566

자신을 귀양 온 신선으로 내세우는 심리의 이면에는 고통뿐인 현세를 합리화하려는 심리 기제가 작용한다. 568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는 꿈을 꿀 수가 있다. 문학이 다만 실천의 도구일 때, 사회는 꿈을 꿀 자리를 잃어 버린다. 꿈이 없을 때 사회 개조는 있을 수없다. 576

22. 시와 역사 - 시사와 사시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의 거울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바람과 애환이 그대로 떠오른다. 한 편의 시는 방대한 사료로 재구성한 어떤 역사보다 더 생생하다. 사람들은 이를 일러 시사라 한다. 583

치열한 역사의식도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저항정신도 시인이 먼저 흥분하면 한낱 구호로 전락하고 만다. 흥분을 가라앉힐 때 역사와 현실은 더욱 심각하게 독자의 뇌리에 각인된다. 1980년대 대자보에 가까운 그 숱한 민중시는 이제 아무도 읽지 않는다. 시의 정서는 이념과는 상관없다. 602

역사란 무엇인가? 현재의 퇴적일 뿐이다. 지금 시대의 자취를 일러 후세는 옛날이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지나간 옛날에 얽매일 필요가 없겠다.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것이 곧 옛날이다. 시사는 시인의 충실한 증언이 뒷날의 역사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사시는 시인이 과거의 거울에 비춰 현재를 읽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603

23. 사랑이 어떻더냐 - 정시

슬하에 아이는 말을 갓 배우겠고
부엌의 늙은 종은 양식이 없다겠지.
정원엔 황량하게 가을 풀이 돋았겠고
날로 여윌 그 모습이 눈에 선히 본 듯하오. 621

한시에서 사랑의 노래는 기쁨의 구가는 적고 가라앉은 슬픔이 ㅁ낳다. 정서란 애초에 모든 것이 충족된 속에서 터져 나오는 법이 없다. 소중한 '무엇'밖에 놓여 있다는 생각, 안겨야 할 '어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마음에서 정서는 비로소 움터 나온다. 625

24.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상동구이론(尙同求異論)
#옛것을 그대로 따라해도 안되고 옛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도 안된다. 상동구이론이란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다는 뜻이다. 같아야 하는 것은 정신이고 알맹이며 달라져야 하는 것은 형식이며 기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전의 현대화는 꼭 필요하다.

직접 말하지 않는다. 다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지를 세워 대신 말한다. 현대시도 같다. 현대시와 한시는 여러모로 참 닮았다. 629

같음을 숭상하되 다름을 추구한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기에 같다는 말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렇게 만난다. 한시와 현대시도 그렇다.
# 상동구이(尙同求異)

에필로그. 그때의 지금인 옛날 - 통변론

긁어모은 낙엽에 불을 붙이면 외줄리고 타오르는 하얀 가을 653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654

한시와 현대시가 무던히도 잘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별개의 미학으로 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654

형식의 복고에 앞서 이 원형질을 찾아나서는 일이 우선해야 할 것 같다. 형식은 변한다. 생각도 변한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이 강산, 이 흙 밟고 살아온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민 정서는 세월로도 씻을 수 없는 원형질로 남는다. 655

'정신을 배울 뿐 표현은 본받지 않는다'는 원리를 환기한다면 우리가 한시를 통해 퍼 올릴 수 있는 샘물은 무궁무진하다. 668

내가 나의 주인이 못 되고, 내 집을 찾아가지 못할진대 열린 눈은 망상이 될 뿐이다. 소화하지 못하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670

다시 눈을 감아라. 먼저 네가 들어가야 할 대문부터 찾아라. 671



저자라면

한시를 번역한 한글을 소리내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시가 보여주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그가 뽑은 한시의 미학에 반하고 그의 해석에 맞장구치며 한 주를 보냈다. 시를 읽으며 한 폭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의 상상력과 해석의 내공이 부럽다.
단지 시의 미학 뿐만 아니라 조상의 한시에 숨어 있는 철학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시에 대해 새로운 소개를 해주는 이 저서는 <현대시학>에 '옛 시인들의 한시 쓰기'에 대한 원고를 쓴 것이 계기가 되어 탄생했다. 한시의 미학을 소개한 그는 시인의 폭발적인 성원에 따라 16회에 걸쳐 한시론을 연재했고 이 글이 이 책의 기반이 되었다.
이 책은 중국과 한국 한시를 24개의 장으로 나누어 자세해 설명한다. 어려운 이론에 기대지 않고 거기에 맞는 시를 소개하고 탁월하고 발랄한 문체로 이를 누구나 쉽게 이미지로 다가오게 해설하여 공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군데군데 작가의 시론이 나온다. 작가의 주장은 그만의 주장이 아니라 한시의 역사에서 배운 교훈이 체화되어 나타난 것으로 시인 지망생은 물론이고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미학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을 몇 가지 다시 꼽아 본다.

흥취 또한 이와 같다. 시인의 정신은 저만치 허공에 떠 있고, 언어를 통해 수면 위에 그 정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다. 한 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에게 느껴서 알게 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들지 않는다. 22

달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달만 남겨둔 채 그 나머지 부분을 채색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그리는 방법이다. 41

만물 속에 답이 있다. 고요히 바라보라. 마음이 늘 문제다. 외물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 가만히 응시하면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 하나도 모를 것 없다. 명징하고 투명하다. 491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마주치면서도 그저 지나치는 일상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한 살물과 낯설게 만나, 그 낯섦으로 그 사물을 새롭게 만나는 것, 이것이 관물론이 시학과 만나는 접점이다. 499

시인은 반란자다. 그의 눈이 포착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다. 500

내가 나의 주인이 못 되고, 내 집을 찾아가지 못할진대 열린 눈은 망상이 될 뿐이다. 소화하지 못하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670

그의 비유는 대단히 적절하고 어떨 때는 한시 그 자체보다 그가 해석하면서 그려낸 이미지의 명징함이 더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문체는 유려하다고 사람들이 평한다. 반면에 그가 글을 쓸 때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은 경제성이라고 한다. 형용사나 부사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접속사의 사용을 피해 문장을 나누며 글의 리듬을 중요시해서 글을 쓰고 나면 3번 소리 내 읽으며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거침없이 지운다고 한다. 이러한 단순한 문장이 오히려 더 가슴을 울린다. 리듬감 있는 문장은 독자에게 정말 큰 호소력을 가진다는 것을 깨닫고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든다. 문장력도 빈틈없지만, 저자의 한시미학이란 주제에 대한 자신감과 전문성이야말로 또 하나의 큰 축으로 이 책을 안정적으로 끌고 가는 동력이다. 다만 좀 아쉬운 것은 학술서나 예비 시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책이지만 일반 독자가 편하게 집어들기 어려운 게 좀 아쉽다. 24개의 장을 좀 줄여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버전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번에 읽을 때는 작가가 깔끔하게 차려 놓은 한 상에 숟가락을 놓고서 편하게 읽은 것 같다. 한자에 자신이 없어서 한자 원래의 의미를 고민하기보다는 저자가 옮겨 놓은 번역 위주로 즐겼다. 이 책에 소개된 소중한 한시를 하나씩 꺼내서 한 구절씩 한자를 공부하며 다시 한번 아기의 눈을 갖고 하나하나 큰소리로 읽고 감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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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0 12:13:23 *.154.223.199

이준혁님은 한시 번역해둔 것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책을 읽으셨군요. 저는 눈으로만 읽었어요.

정민교수님의 원통형 자료정리 책꽂이가 궁금했었는데 링크해주신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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