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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5일 11시 23분 등록

한시 미학 산책 

                                                                                                                          정 민 

 1. 저자에 대하여

한시 미학 산책의 저자 정민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다. 1961년 충청북도 영동에서 태어났다. 최근 삶을 바꾼 만남이라는 책을 냈다. 나는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이야기를 정민 교수에게 직접 듣고 싶어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준비한 이벤트에 참여했다. 정민 교수는 18세기 자료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번역해줬다. 나는 강연을 들으면서 역사적인 자료들을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는 정민 교수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고 느꼈다. 옛 사람들이 한자로 주고 받은 편지나, 쓴 책의 내용들을 한 글자 한 글자 짚으면서 쉽게 풀이해주는 강연은 매우 흥미로웠다. 정민 교수는 무궁무진한 한문학 자료를 탐사하며 살아있는 유용한 정보를 발굴하며 현대어로 쉽게 풀어 독자들에게 다가간다. 정민 교수를 처음 안 것은 7기 연구원들의 필독서 중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을 보고 나서였다. 연구원 활동을 따라해 볼 생각으로 책을 사서 읽어봤는데 두꺼운 분량의 책을 소화하기란 힘들었다. 

 정민 교수는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펴냈다.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로 『다산의 재발견』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미쳐야 미친다』 등이 있다. 또 청언소품에 관심을 가져 『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돌 위에 새긴 생각』 『다산어록청상』 『성대중 처세어록』 『죽비소리』 등을 펴냈다. 이 밖에 옛글 속 선인들의 내면을 그린 『책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등의 수필집과 한시 속 신선 세계의 환상을 분석한 『초월의 상상』, 문학과 회화 속에 표상된 새의 의미를 찾아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모든 것을 담은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를 썼다. 아울러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한시 미학 산책』과 어린이들을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사계절에 담긴 한시의 시정을 정리한 『꽃들의 웃음판』등을 썼다.

 작년 여름 정민 교수 인터뷰 기사 내용을 보니 그는 최근 5년여간 집요하게 다산을 쫓아다녔다고 한다. 정약용의 친필이라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갔단다. 새 자료를 수소문해서 찾고, 정리하고, 번역해서 논문을 펴냈단다. 그는 자료 앞에선 비굴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좋았다고 이야기 한다. 다산 친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바로 그곳으로 카메라를 들고 간다고 한다. 또 자료를 얻기 위해 소장자를 일년씩 설득해본 적도 있단다. 끝끝내 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삶을 바꾼 만남』강연회에서도 찾은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정약용의 글을 찾을 때마다 아주 즐거웠다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정약용의 한 권의 책이 여러장으로 나눠져 이곳 저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도 그날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는 다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면서 원래 관심을 뒀던 연암 박지원에 대해서도 연구할 것이라고 했다. 다산이 체계적이고 교과서적인 인물이었다면 연암의 콘텐츠는 파워풀 하다고 이야기 하면서 말이다. 그의 관심사는 ‘18세기 지식인 사회의 변동’이다. 그가 18세기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정보의 홍수 속이었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의 말을 빌려본다. 

 “당시 중국에는 별별 책이 다 나왔어요. 고금도서집성은 한질에 5000권이나 됐지요. 조선의 지식인으로서는 충격일 수밖에요. 요즘 시대의 인터넷 충격과 같았나봐요. 수많은 정보 중 원하는 정보를 뽑아내 편집하는 게 중요했는데 다산이 가장 완벽하게 했던 사람 중 하나였죠.” (2011년 8월 26일 한국경제 신문)

 정민 교수는 대중의 언어로 고전을 해설하는 것이 국학자의 역할이라며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다. 그가 고등학교 때부터 외우고 있다는 소동파의 ‘적벽부’의 일부분을 소개해본다.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신간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에 뜨이면 빛을 이루어서,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는 조물주의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그는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옛 우리 문인들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함이 없는 보물’ 같은 한문한 문헌들을 자기만의 것으로 가두지 않고 공유하려는 노력을 계속 하고 있는 학자이다. 

 그는 700쪽이 넘는 책들을 1년 사이에 세권씩 출간할 정도로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럴 수 있는 비결이 있다. 그는 하나가 끝나면 다음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가지 작업을 병행한다고 한다. 이 방법은 대학원을 다닐 때 조교로 일하면서 교수님께 배운 방법이라고 했다. 그 교수님은 다정다감한 교수님은 아니셨지만 조교에게 자료를 잘 정리할 수 있는 훈련을 많이 시켜주셨다고 했다. 그래서 정민 교수는 지금도 새로운 자료가 발견 되면 논문으로 발표하거나 잡지에 연재하고 그것들을 주제별로 묶어서 책으로 낸다고 한다. 

 인터뷰 기사 중에 인상적인 것이 하나 있었다. 그는 글을 쓴 후 두 번 내지 세 번 원고를 소리내어 읽고 마지막으로 가능하면 아내에게 읽어보라고 부탁한다고 한다. 소리내서 읽다보면 꼭 걸리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좋은 글은 글의 리듬이 읽는 것을 간섭하지 않는다.”며 “소리를 내어 읽을 때 자연스러워야 그 리듬이 살아있고 내용도 전달이 잘 된다.”고 했다. 스스로를 고전의 ‘트랜스레이터’라고 정의내렸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아주 깊이 공감한다. 그는 현재 ‘정민의 세설신어’라는 사설을 조선일보에 기재하고 있다. 

 나는 정민 교수가 계속해서 지금의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를 통해 관심 없었던 18세기 문학을 쉽게 접하게 되고 흥미까지 갖게 됐으니 말이다. 『다산 선생 지식경영법』쓰고 그는 그가 연구하고 책에 쓴대로 지식을 경영하고 있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으니 그가 존경스럽다. 아무래도 내게 저자라면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한문학을 전공한 친구는 내가 『한시 미학 산책』을 읽는다고 했더니 대학을 다니는 4년 동안 읽었던 책이란다. 그러면서 정민 교수의 국문학 강의를 한 번 만이라도 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존경하는 교수님이라면서 한문학에서 해야 하는 많은 역할을 대신 해주고 계신 분이라고 했다. 물론 국문학과 한문학의 어떤 경계가 모호해지는 영역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한문학 전공자로서 부끄러운 부분이라고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삶을 바꾼 만남』강연을 통해 얻은 그의 친필 사인이 괜히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잔잔하면서도 재치있고, 부드러우면서도 열정적인 국학자 정민 교수의 책 한 권을 다 읽게 되서 뿌듯하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 개정판 지은이 말 

 책은 나름의 운명이 있는 법이다. 틀을 그대로 둔 것은 그동안 이 책을 아껴준 독자에 대한 일종의 예의이기도 하다. 개정은 주로 덜어내고 깎아내고, 관점을 교정하는 일에 주안을 두었다. 

 묵은 자취를 매만지는 작업은 때로 새로 쓰기보다 힘들다. 게다가 이런저런 일에 치여 차일피일 많이 늦어졌다. 제 딴엔 한층 업그레이드 된 이해로 새 독자와 만나게 되어 설렌다. 몸가짐은 무겁게 말은 더욱 아껴서, 오래 함께 하고 싶다. 


  • 초판 지은이의 말

 먼지 쌓인 역사의 뒤편에 방치된 채 날로 그 빛이 바래가고 있는 한시에다 신선한 숨결을 불어넣고, 막힌 길을 새로 뚫어 현대적 의미를 밝히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진 책무다. 

 정민 교수의 정체성이 밝혀지는 대목이다. 그는 옛것을 찾아 현대적 의미를 밝혀주어 독자들이 살고 있는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도록 번역해주는 번역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시 전문지 <현대시학>에 1994년 2월부터 1996년 5월에 걸쳐 연재한 글을 보태어 손질하고 차례를 가다듬어 정리한 것이다. 

 방대한 책의 양에 놀랐는데 그 근거를 밝혀준다. 꾸준한 연재가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전 시학의 정수를 오늘의 시인과 독자들이 좀 더 가깝게 느끼고 접근하게 할 수는 없을까? 한시는 정말로 골동적 가치만을 지닌 퇴영적 문화유산에 지나지 않는 걸까? 이런 의문을 품고 정해놓은 틀 없이 선인들의 뜰을 거닐고자 했다. 

 다만 옛말에 “말을 듣기 전에는 그래도 알 만했는데 들을수록 아리송해진다.”더니, 자칫 이짝이나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 첫 번째 이야기 : 허공 속으로 난길 _ 한시의 언어 미학

<푸른 하늘과 까마귀의 날개 빛깔>

p17 저 까마귀를 보라.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하지만 홀연 유금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췻빛이 된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췻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이를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까마귀는 본디 정해진 색깔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린다. 어찌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겠는가.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버린다. / 연암은 이렇듯 시인에게 죽은 지식이나 고정된 선입견을 훌훌 털어버리고, 건강한 눈과 열린 가슴으로 세계와 만날 것을 요구한다. 


p18 생취나 생의가 없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사물의 심장부에 곧장 들어가 핵심을 찌르려면 죽은 정신, 몽롱한 시선으로는 안 된다. 시인은 처지 현황의 나태한 관습을 거부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선입견에 붙박여 간과하고 마는 까마귀의 날개 빛깔을 살피는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 생동하는 물상 속에서 순간순간 포착되는 비의를 날카롭게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시는 언어의 사원이다. 시인은 그 사원의 제사장이다. 시는 촌철살인의 미학이다. 


p19  송나라의 유명한 평론가 엄우의 <<창랑시화>>에서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이 윗길이 된다. /

사변적 지식이나 논리적 이치만으로는 결코 시의 비밀에 접근할 수가 없다. / 

엄우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것이야 말로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덧붙이인다. 언어에 끌려 다니지 말고 언어를 주재하라는 주문이다. 


p20 표현의 기교에 지나치게 빠져도 안 된다. 언어를 매만지며 단어들의 질량을 느끼는 일은 시인의 큰 기쁨이다. /

영양이 뿔을 건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 영양은 뿔이 둥글게 굽은 양이다. 잠을 잘 때 외적의 해를 피하기 위해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허공에 매달려 잔다고 한다. 그래서 영양의 발자취만 보고 따라가다가는 어느 순간 발자취는 끊어져버리고 영양은 간 곳이 없다는 것이다. 시인이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지 영양의 발자취뿐이다. 


p22 허공에 울려 퍼지는 소리나 형상 속에 깃들어 있는 미묘한 색체, 물속에 찍힌 달, 거울 속의 형상은 모두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물속의 달을 잡으려고 손ㅇ르 뻗느 ㄴ순간 흔들려 사라지고 만다. 달의 실체는 하늘에 떠 있고, 물은 그 실체를 투영할 뿐이다. 공중으로 퍼져가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은 어떤가. 다만 짠맛으로 소금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을 뿐, 만지거나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다. 흥취 또한 이와 같다. / 한 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에게 느껴서 알게 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들지 않는다. / 이렇듯이 시는 독자로 하여금 읽는 행위가 끝나는 순간부터 정말로 읽는 행위를 시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허공 속으로 난 길>

p22 시는 시인이 짓는 것이 아니다. 천지만물이 시인으로 하여금 짓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p23 시인은 사물의 몸짓을 언어로 전달하는 매개자일 뿐이다. 따라서 시는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 시인이 직접 다 말해서는 안 된다.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도록 해야 한다. / 

행간에 감춰진 함축, 단어와 단어가 만나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스파크, 그런 충전된 에너지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취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시는 시인이 짓는 것이 아니라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시인에 대한, 시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순간이다. 뒤에 나오겠지만 ‘시마’가 붙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일꺼란 생각이 든다. 


p24 이달이 지은 <대추 따는 노래>

이웃집 꼬맹이가 대추 서리 왔는데/늙은이 문 나서며 꼬맹이를 쫓는구나./꼬맹이는 되돌아서 노인에게 소리친다/ “내년 대추 익을 때까지 살지도 못할걸요”

p26 파란 가을 하늘과 빨갛게 익은 대추의 색체 대비, 커가는 어린세대와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늙은 세대의 낙차,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밎어내는 정감 넘치는 시골의 정경운 풍경이 마치 단원 김홍도의 붓끝에서 생동감 있게 펼쳐지는 듯 하다. 

p28 시인이 글자로 말하고 있는 지시적 사실은 시에서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그 행간에 감춰진 울림, 언어의 발자취를 벗어나 허공에 매달려 있는 떨림이 중요하다. 그런 울림이 아예 없거나 그런 떨림을 외면한 시는 화려한 수사로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교언영색에 지나지 않는다. 천진에서 우러나오는 흥취가 없는 시는 독자를 짜증나게 만든다. 


<눈과 귀가 있다 말하지 말라>

p28 한시는 이미지의 구성이 탄탄하고, 언외의 함축이 유장하다. 그로인해 한시의 감상은 매우 지적이고 감성적인 바탕이 요구된다. 그 비밀은 아무에게나 알려줄 수도 없고, 누구도 알 수 없다. 

한시에 대한 설명이 처음 등장한다. 계속 읽으면서 스케치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한 것이 사실이다 잘 그리지 못하는 솜씨임에도 나무, 꽃, 그네, 사람, 달, 물, 정자등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게 하고 싶게 한 마음에 대한 근거가 된다. 


p28~29 홍양호의 <질뢰>란 글

 총명은 눈과 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조각의 영각(영혼)에 있다. 


p31 다산 정약용도 <초의승 의순을 위해 준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뜻이 본시 낮고 더럽고 보면 비록 억지로 맑고 높은 말을 하더라도 알맹이가 없게 된다. 뜻이 좁고 비루하면 비록 툭 터진 말을 한다고 해도 사정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시를 배우면서 그 뜻을 온축하지 않는 것은 거름흙에서 맑은 샘물을 긷고, 고약한 가죽나무에서 기이한 향기를 구하려는 것과 다름 없다. 죽을 때까지 하더라도 얻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번드르르한 거죽이 아니다. 속 알맹이다.


p32 연암이 난데 없이 이명과 코골기이야기를 한 부분은 다시 읽고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p33 세상의 시인들이여! 그대들의 시는 정령위의 불로장생을 원하는가? 양웅의 기림을 받고 싶은가? 양웅의 성예(세상에 떨치는 이름과 칭송 받는 명예)를 정령위처럼 살아서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 : 그림과 시 - 시의전신론

<그리지 않고 그리기>

p37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란 말도 있다. / ‘사의 전신’ : 말 그대로 경물을 통해 ‘뜻을 묘사하고 정신을 전달’해야 한다는 뜻

p39~41 유성의 <<형서롱설>> : “꽃 밟으며 돌아가니 말밥굽에 향내 나네”라는 화제 -> 달리는 말의 꽁무니로 나비 떼가 뒤쫓는 그림. / “여린 초록 가지 끝에 붉은 빛 한 점, 설레는 봄빛은 굳이 많을 것이 없네” -> 버드나무 그림자 은은한 곳에 자리 잡은 정자 위에 한 소녀가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 1등을 함. 중국 사람들은 흔히 여성을 ‘홍紅’으로 표현한다. 화가는 그 소녀로써 ‘홍일점’을 표현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홍일점이란 말의 연원이다. / “들 물에 건너는 사람이 없고, 외로운 배가 하루 종일 가로 걸렸네.” -> 사공이 뱃머리에 누워 피리를 빗겨 불고 있다. 아예 사공도 없이 텅 빈 배보다는 하루 종일 기다림에 지친 사공이 드러누워 있는 배가 오히려 이 시의 무료하고 적막한 분위기를 드러내기에는 제격일 듯싶다. 

기가막힌 그림들이다. 감탄을 연발했다. 이렇게 표현해 내다니 본받고 싶다. 


p41 시에서 시인이 말하는 법도 이와 같다. ‘성동격서’란 말처럼 소리는 이쪽에서 지르면서 정작은 저편을 치는 수법이다. 나타내려는 본질을 감춰두거나 비워둠으로써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고 말하기>

p43 시 속에서는 “말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구름 위에 솟은 봉우리의 끝뿐이지만, 그것은 결코 전부는 아니다. 시인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구름 아래 감춰져 있다. / 이미지즘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 : 시는 이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의경意境을 전달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의경 : 뜻의, 지경경

p44 시는 언어 그 자체로 살아 숨쉬는 생물체여야 한다. 시인은 외롭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독자를 외로움에 젖어들게 해야 한다. 괴롭다는 말을 해서도 안 된다. 그래도 독자가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시인이 직접 나서서 시시콜콜한 자신의 감정을 죽 늘어놓는다면 넋두리나 푸념일 뿐, 시일 수는 없다. 


p45 흔히 시인이 시를 짓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 가운데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과정이라고 한다. 시인이 200자의 할 말이 있다면, 그는 이것을 어떻게 20자로 줄여 말할것인가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180자를 걷어낼 것인가로 고민한다는 말이다. 반대로 독자는 시인이 하고 싶었지만 절제하고 걷어낸 말, 즉 행간에 감추어둔 뜻을 어떻게 충분히 이해하고 깨닫느냐의 문제가 주된 관심사가 된다. 


p46 유명한 두보의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란 시

기왕의 집에서 늘상 보더니/최구의 집 앞에서 몇 번 들었나./ 강남 땅 풍경이 정히 좋은데/ 꽃 지는 시절에 그댈 만났네. 

p47 당시 두보는 “서남의 천지 사이를 떠돌며” 지내다가 간신히 강남에 다다랐을 때였다. 꽃이 분분히 지는 늦봄에 그는 길에서 우연히 장안 시절 알고 지내던 당대의 유명한 가수, 그러나 이제는 생계를 위해 거리의 악사로 전락해버린 이구년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장안 시절에는 두보나 이구년이나 모두 당대의 귀족이었던 기왕과 최구의 파티에 초대받을 정도로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한꺼번에 변해버려, 이제 두 사람은 지친 피난민의 신세로 하늘가를 떠돌다 낯선 거리에서 서글픈 상봉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 부분이다. 이 시에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니 상상도 못했다. 무식한가. 이제 유식해졌으니 다행이다. 근데 조금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시대를 모르면 이 시를 잘 이해할 수 없으니 말이다. 기왕과 최구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시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때 당시는 보편적이었으려나? 


<장수는 목이 없고, 미인은 어깨가 없다>

p53 그러므로 시를 읽는 독자는 시인이 쳐놓은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행간을 읽을 줄 아는 식견을 길러야 한다. 


<정오의 고양이 눈>

p56 호리(毫釐)의 차이가 천 리의 현격한 거리를 낳는다. / “무릇 그림과 문장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번 본의를 벗어나면, 제아무리 화려하게 꾸민 문장이라 해도 식자는 취하지 않는다. 오직 안목 갖춘 자만이 능히 이를 알 것이다.” 예술 작품의 감상은 바로 이 호리의 차이를 변별하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다. 

p59 가짜와 진짜는 종이 한 장의 차이도 없다. 가짜가 오히려 더 진짜 같아 보인다. 관념화된 그림, 진정을 상실한 그림은 좋은 그림이 아니다. 정신은 간데없이 손끝의 기교만으로 그리려 드니, 난초를 그린다는 것이 파가 되고, 대나무를 그렸는데 갈대가 되고 만다. / 시인이 정을 머금어 이를 펴고, 경물을 대하여 마음을 움직이며, 물상을 그려냄에 그 정신을 얻게 된다면, 저절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얻을 수 있다. 


<마음에서 얻어 뜻으로 깨달으니>

p62 구양수의 <<육일시화>>에 매요신과 나눈 시에 대한 토론이 보인다. 매요신이 먼저 말했다. “반드시 능히 묘사하기 어려운 경치를 형상화하여 마치 눈앞에 있는 것같이 하고, 다하지 않는 뜻을 머금어 말 밖에 드러나게 한 뒤라야 시가 지극하게 된다.” 

p66 한편의 훌륭한 시는 겉으로는 덤덤한 듯하지만 하나하나 음미 해보면 그 행간에 감춰진 함의가 무궁하다. 시인의 진실한 느낌이 없는 시는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해도 독자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맹자는 아무리 서시와 같은 미인이라도 오물을 뒤집어쓰면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고 지나간다고 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훌륭한 뜻을 담고 있어도 올바른 표현을 얻지 못하면 읽는 이들은 외면하여 돌아보지 않는다. 또한 시는 본바탕의 부족함을 감추려고 덕지덕지 화장한 여인의 분내를 경멸한다. / 시인의 덤덤한 듯 툭 던지는 한마디가 예리한 비수처럼 독자의 의식을 헤집는다.좋은 시는  독자에게 방심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허를 찔린 느낌을 준다. 


  • 세 번째 이야기 : 언어의 감옥 _ 입상진의론

<싱거운 편지>

p69 봉래 양사언이 서울의 백광훈에게 보낸 편지 : 삼천 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히 지내고 있소. (딱 열두자 한 줄의 사연) 

근데 이게 음미할수록 새록새록 정감이 넘쳐나는 뭉클한 사연이라니. 더 읽어볼 일이다. 

한조각 구름 속에 밝은 달이라 했으니, 달은 달이로되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달이다. ‘심친’이라 하여 그 밖에 다른 것에는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음을 보였다. ‘월인천강’이랬거니, 달은 나 있는 안변이나 너 있는 한양이나 가뭇없이 비칠 것이 아니냐. 그래서 널 보듯이 달을 보고, 달 보듯이 너를 생각한다는 사연이다. 그나마다 그 모습은 모일 듯 구름 사이로 숨기 일쑤이니 이 아니 안타까운가. 단지 열두 자의 편지가 심금을 울린다. 

과연 그러할 만하다. 특히 널 보듯이 달을 보고, 달 보듯이 너를 생각한다는 말에서 그리움이 밀려온다.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나도 따라 사랑하는 님에게 보내고 싶다. 


p70 앞 편지에 대한 백광훈의 답시 

 뜬 인생 백 년간을 홀로 괴로워하며/ 서로 좋은 얼굴로 처자식을 달래었지./ 금릉성 아래 와서 문득 올려다보니/ 흰 구름은 여태도 구봉산에 걸렸구나. / 

p71 백광훈은 다정다감한 시인이다. 이런 그이고 보니 앞서 봉래의 편지가 있었음 직도 했겠다. 그의 시를 읽노라면 필자는 늘 그 잔잔한 슬픔에 감염되어 가슴이 뻐근해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왜 사냐건 웃지요>

p71 옛 글에는 야단스러움이 없다. 간결하게 할 말만 하고, 때로 아무 말 않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은 글자 사이로 흘러, 행간에 고여 넘친다. 

이 경지는 참으로 아름답다. 마음이 글자 사이로 흘러, 행간에 고여 넘치다니 도무지 따라할래야 따라할 수 없겠다. 내 글에 야단스러움이 많을까 군더더기기 많을까 걱정이 앞선다. 


p72 본래 동양의 예술 정신은 다변과 요설을 싫어한다. 긴장을 머금은 함축을 소중히 여긴다. / 예전 토머스 칼라일과 랠프 에머슨이 처음 만나 30분가량을 아무 말 않고 앉았다가는 오늘은 퍽 재미나게 놀았다며 악수하고 헤어졌다는 싱겁고도 이상한 이야기도 있다. 실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어는 부질없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p73 최유청의 시 <잡흥>

봄풀이 어느덧 저리 푸르러/ 동산 가득 나비가 날아다닌다. / 봄바람 잠든 나를 속여 깨우려/ 침상 위 옷깃을 불어 흔드네./ 개고 보면 고요히 아무 일 없고/ 숲 밖엔 저녁 해만 비치고 있다./ 난간에 기대어 탄식하려다 / 고요히 어느새 기심 잊었네. 

밖의 날씨보다도 더 봄을 느끼게 해준 시. 

p74 이 시는 모든 것이 기화해 버리고 남은 순수한 결정의 세계를 노래한다. 그래서 내가 봄 동산이 되고, 그 동산의 나비가 되어 봄날의 석양 속으로 훨후러 날아가 버리는 느낌을 노래한다. 필설로 옮기려 하는 순간 증발해버리듯 사라져버린 기심, 사물과의 순간적인 만남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생취를 설명적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는 얼마나 허망한가. 그러고 보면 언어는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도구에 불과하다. 


<언덕에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p75 윤편이 수레바퀴를 깎는 미묘한 기술을 어떻게 언어로 전달할수 있겠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수레바퀴를 깎는 기술을 익힐 수 있었을 것이다. 언어란 이렇게 불완전하다. 이런 불완전한 도구를 가지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하고, 시비가 생겨난다. 장자는 다시 덧붙인다.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글이다. 글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말에는 귀히 여기는 것이 있다. 말이 귀히 여기는 바는 뜻이다. 뜻에는 따르는 바가 있다. 뜻이 따르는 바는 말로는 전할 수가 없다.”


p76 깨달음은 말로는 가르쳐줄 수가 없다. 마음으로 깨달아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이른바 심수상응이다. / 언어란 본시 부질없는 것이기에 큰 진리는 언제나 언어를 초월하여 전해지고, 깨달음은 언어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내 혀가 있느냐?>

p78 그렇다면 옛 성인의 뜻은 어떻게 전달되는가? <계사>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성인은 상을 세워서 그 뜻을 다하고, 괘를 세워서 참과 거짓을 다하며, 문사를 이어서 그 말을 다한다.” 여기에서 ‘입상진의’의 말이 나왔다. 말로 뜻을 다할 수 없다면 형상으로써 뜻을 전달하라는 것이다. 


p79 말하는 이의 ‘입상’이 듣는 이에게 ‘진의’되기까지는 이렇듯 몇 차례의 유추와 비약이 감행된다. / 생략된 이 여러 단계를 복원시켜야만 의미가 비로서 파악된다. 

p80 허균의 <<한정록>>의 이야기 : 입상진의

상용이 노자에게 준 가르침은 자신의 본바탕을 잊지 말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이기라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당연하고 싱겁기 짝이 없는 주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비유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니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되어 생동하는 깨달음이 되었다. 큰 가르침은 사람마다 일깨워 가르칠 수 없다. 본래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말해도 알아듣고, 모를 사람에게는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해준댔자 더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비유에 대한 생각과 들을 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글을 쓸 때 비유를 잘 안한다. 사실이나 경험을 쓰기는 해도 비유들어 설명하거나 표현해 내지 못하는 나를 잘 발견하곤 한다. 비유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책을 많이 읽는 수밖에 없다는데 문학작품들을 많이 읽어야겠다. 뿐만 아니라 역사책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새는 두 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아버지가 말씀하신 두 날개는 남과 북을 이야기 하신 것이었다. 그 새의 두 날개를 내게 적용시켜 보면 나는 풍부한 문학, 역사, 사회문화에 대한 지식을 한쪽 날개로 갖고 다른 쪽은 문장력, 글쓴기의 기본소양을 갖춰 날아야겠다. 새의 두 날개는 좋은 비유인 것 같다. 

 들을 귀에 대한 부분은 ‘본래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나는 어떤 귀를 가졌는지 테스트해보고 싶다. 노력하면 들을 귀도 생길거란 믿음을 가져본다.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p86 이제현의 <산중설야>

홑이불 한기 들고 불등은 희미한데/ 사미는 밤새도록 종조차 울리잖네./ 나그네 일찍 문 엶 투덜대고 있겠지만/ 암자 앞 눈 소나무를 누른 모습 보리라. 

p87 이 시의 흥취는 속세의 시간이 멈춰 선 눈 온 아침 겨울 산사의 고즈넉한 정경과 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약간 들뜬 시선 사이에서 내밀하게 독자에게 다가온다. 


p88 권근의 <봄날 성남에서> : 가을날의 근심이 덧없이 스러진 청춘의 꿈을 애상하는 허탈한 독백이라면, 봄날의 근심은 무언가 알 수 없는꼼지락대는 설렘을 동반한다. 


<청산 위로 학이 날아간 자취>

p90 시란 이와 같은 ‘진공묘유’의 세계와 닿아 있다. 무언가 꼬집어 말하려 하면 사라져버리는 느낌,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노래한다. 효용가치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그  저편에서 울려오는 떨림,그  떨림의 미묘함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인간에게는 단지 입상을 통해서만 진의할 수 있는 묘오의 세계가 있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 네 번째 이야기 : 보여주는 시, 말하는 시 _ 당시와 송시

<꿈에 세운 시의 나라>

아. 제목이 감동적이다. 

p95 심의가 지은 <기몽> 안의 내용 : 이색의 천거로 토벌의 임무를 맡게 된 심의는 몇만의 군대를 주겠다는 천자의 제의를 거절하고, 소영비술만으로 대적하겠다면 첨두노 몇을 데리고 혼자서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소영비술이란 천지의 풍운조화를 일으키는 피리 부는 비술로 다름 아닌 시를 말함이요, 첨두노란 머리가 뾰족한 하인이니 붓의 다른 말이다. 


<작약의 화려함과 국화의 은은함>

당시와 송시 내용정리 (p97~103)

  1. 당시 : 봄 (고궁의 봄뜰을 친구와 어울려 산책하는 정취), 호탕한 기개를 지닌 장부가 높은 산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노래하는 것, 보여주기, 작약, 해당(짙은 꽃, 화려한 색채), 묘사적이고 서정적인 경향,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취향, 사람의 일생에서 소년 시절(재기 발랄함)

  2. 송시 : 가을 (들국화 가득히 핀 가을 들판을 홀로 걸으며 사색에 잠기는 것), 달밤에 호수에 배를 띄우고 선비가 마주 앉아 학문을 논함, 말하기, 한매, 추국(그윽한 운치와 서늘한 향기), 사변적이고 설리적, 고전적이고 이성적인 취향, 사람의 일생에서 노년 시절(사려가 깊어짐)


<당음, 가슴으로 쓴 시>

p103 당시는 가슴으로 쓴 시이다. 여기에는 시인의 웃음과 눈물이 있어 마음으로 전해오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하다. 이에 반해 송시는 머리로 쓴 시이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깊고 담담한 관조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망이 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위안과 인간의 정신을 고원한 곳으로 이끌어주는 깊이가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시에서 서정함축을 중시하고 의흥이 뛰어난 시를 ‘당음’이라 하고, 생각에 잠기고 이치를 따지며 유현한 맛을 풍기는 시를 ‘송조’라고 일컬어 왔다. 

p106~107 권필의 <도중> : 저물어 외로운 객점에 드니/ 산 깊어 사립도 닫지를 않네/ 닭 울어 앞길을 물으려는데 / 누런 잎 날 향해 날려 오누나. 

인생이란 결국 길을 찾아 헤매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 아니겠는가. 길을 가로막고 달려드는 낙엽은 시인에게 인생은 이와 같이 덧없는 것이라고, 은 길어디에도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송조, 머리로 쓴 시>

p112 김시습의 시 : 종일 봄을 찾았어도 봄은 보지 못했네/ 짚신 신고 산머리 구름 위로 가보았지./ 돌아올 때 우연히 매화 향기 맡으니/ 봄은 가지 위에 어느새 와 있었네. 

앞서와 마찬가지로 봄을 찾으려고 온 산을 헤매는 것은 도를 깨닫고자 구도의 행각에 나섬을 뜻한다. 그녀는 온갖 고행을 무릅쓰며 일념으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온 산 어디에도 없는 봄처럼, 도의 실체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집착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위의 시는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파랑새>를 떠올리게 한다. 틸틸과 미틸은 파랑새를 찾기 위해 온 세상을 헤맨다. 그들은 결국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파랑새는 자기 집 새장 안에서 울고 있었는데 말이다. 깨달음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욕망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시의 묘미란 말인가. 나를 돌아 보게 된다. 반성하게 된다. ‘도대체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게 깨달음이라면 나는 어쩌란 말인가?’ 라고 앞 부부을 읽으면서 저자에게 따지려다 참고 여기까지 읽었는데 깨달음은 먼 데 있지 않다고 이야기 해준다. 그러면서 내가 해온 지난 행적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내게 됐다. 너무 새로운 것만 주어 담으려고 하다보니 그동안 해온 나의 노력들은 배수구를 찾아 알아서 나가버렸다. 사실 그것도 다 새롭다고 받아들이고 쌓아놨던 것들일텐데 말이다. 쌓고, 버무리고, 재창조하는 작업을 해야겠다. 이제까지 밑 빠진 독에 계속 물을 붓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우선 독을 먼저 정비해야겠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차곡차곡 해 나가야겠다. 


<뱃속에 넣은 먹물>

p115 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 시는 결코 관념의 퇴적장이어서는 안 된다. 또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몽환적 어휘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혹세무민의 연금술사에 지나지 않는다. 시는 결코 독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이거나 암호문일 수가 없다. 


p116 현세에서 시인의 삶이란 곁에 누운 병든 아내의 신음처럼 고달프고 괴로운 것을. 그러고 보면 시란 까맣게 잊고 있던 신선세계, 또는 존재하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향한 회귀의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천상의 백옥루가 준공되었으나 상량문을 지을 사람이 없자 옥황상제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하를 하늘나라로 불렀던 것처럼, 티끌세상의 귀양살이가 끝나 천상으로 복귀할 때까지 뱃속의 먹물이 다 마르도록 시인은 다만 깨어 노래할 뿐이다


  • 다섯 번째 이야기 : 버들을 꺾는 뜻은 _ 한시의 정운미 

<남포의 비밀>

p119 비 개인 긴 둑에 풀빛이 고운데/ 남포에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이야 언제나 마르려나/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보태나니./ 

중국 사신들이 결정적으로 무릎을 치며 가만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2구의 ‘송군남포’라는 표현에 있었다. 이 구절은 흔히 임을 남포로 떠나보내며 슬픈 노래를 부른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현재 두 사람이 헤어지는 장소를 말한다. 

p120 남포란 단어는 유장한 연원이 있다. 굴원은 일찍이 <구가> 중 <하백>에서 “그대의 손을 잡고 동으로 가서, 고운 임을 남포에서 떠나보내네.”라고 노래한 바 있다. 그 뒤 많은 시인들이 실제 헤어지는 포구가 동포이든 서포이든 북포이든 간에 남포라고 말하곤 했다. 굴원의 이 노래가 있은 뒤로 ‘남포’란 말은 시인들에게 으레 ‘이별’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정운이 담긴 말이 되었다. 


<버들을 꺾는 마음>

p125 당나라 때는 벗과 헤어지며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정표로 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절류’, 즉 ‘버들가지를 꺾는다’는 말에는 앞서 본 ‘남포’와 마찬가지로 ‘이별’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버들가지가 이별의 신표가 된 사정은 이러하다. 버드나무는 꺾꽂이가 가능하다. 신표로 받은 버들가지를 가져다 심어두면 뿌리를 내려 새 잎을 돋운다. 보내는 사람은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하는 심정으로 버들가지를 꺾어주었고, 또 꺾이어 가지에서 떨어졌어도 다시 뿌리를 내려 생명을 구가하는 버들가지처럼, 우리의 우정도 사랑도 그와 같이 ㅣ들지 말자는 다짐의 의미도 담겼다. 

p126 또 ‘류柳’의 중국 음은 머무른다는 의미의 ‘류留’와 똑같다. 그러니 버들가지에는 가지 말고 머물러달라는 의미도 있다. 


p129 임제의 시 <패강곡>

이별하는 사람들 날마다 버들 꺾어/ 천 가지 다 꺾어도 가시는 임 못 잡았네./ 어여쁜 아가씨들 하많은 눈물 탓에/ 부연 물결 지는 해도 수심에 겨워 있네.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

p131 ‘가을 부채’는 한시에서 으레 ‘버림받은 여인’을 상징한다. 부채는 더운 여름날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물건이다. 하지만 더위가 물러가고 가을이 오면, 여름내 애지중지하던 부채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잊힌다. 마찬가지로 한때 내게 그토록 다정하던 임은 어느덧 나를 까맣게 잊고 돌아보지 않으신다. 시인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을 부채’를 손에 쥐었다는 말만 가지고 이미 그녀가 ‘임에게 버림받은 여인’임을 구체적으로 말한다. 

‘가을 부채’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니 재미있다. 써먹을 데가 많은 단어이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들려주면 좋은 이야깃 거리 하나를 얻었다. 


<난간에 기대어>

p135 한시에서 자주 보이는 표현 중 하나가 누각 또는 난간에 기댄다는 말이다. 누각 위에는 왜 오르는가? 누가긔 난간은 높은 곳에 있어, 그곳에서 보면 먼 곳에서 오는 사람을 잘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난간에는 왜 기대는가? 기다림에 지친 까닭이다. 그래서 누각에 오르거나 난간에 기댄다는 뜻의 ‘등루’, ‘의루’, ‘의란’, 혹은 ‘빙란’ 등의 표현 소겡는 ‘그리움’의 의미가 담긴다. 

p137 최경창의 <무제>. 한시에서 ‘무제’를 표제로 내거는 것은 마땅히 붙일 만한 제목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목을 붙이지 않은 채 오히려 독자의 적극적인 독시를 요구하기도 한다. 또한 무제시는 이상은 이래로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루는 염정풍의 분위기를 띠는 것이 보통이다. 


<저물녘의 피리 소리>

p138 석양 무렵의 피리 소리는 옛날을 그리워 함, 또는 가고 없는 벗을 향한 그리움의 정운을 띠게 되었다. 

<이해 못할 <국화 옆에서>>

p140 어떤 시인이 부른 노래가 사람들의 정서를 파고 들어 깊은 공감을 일으키면, 이것이 자주 여러 시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특정 단어 위에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정운이 얹힌다. 지금까지 살펴본 ‘남포’나 ‘절류’, 그리고 ‘추선’과 ‘의루’, ‘문적’ 등이 다 그런 예들이다. 한시에는 이런 정운이 풍부한 어휘들이 유난히 많다. 한시의 언어 특성상 이러한 어휘들은 시가 언어의 함축을 더욱 유장하고 깊이 있게 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한시 감상에서 이러한 어휘를 바로 알지 못하면 시를 전혀 엉뚱하게 곡해할 염려가 크다. 

p141 이러한 어휘들은 시가 속에 감춰둔 암호와도 같아, 이것을 해독하지 않고는 그 시에 접근하는 통로를 열 수가 없다. / 우리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국화하면 “도리야 곶이온 양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나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처럼 추위를 아랑곳 않는 매운 절개를 상징하는 꽃으로 배워왔다. / 반면 프랑스에서 국화는 장례식 때나 쓰는 ‘죽음’을 의미하는 꽃이다. / 무궁화도 우리나라와 중국이 바라보는 관점이 다름


p143 한시에는 이렇듯 한시 문화권에서만 통용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어휘들이 많다. / 특정 어휘가 특수한 정운을 띠게 되면 요즘 식으로 말해 사은유가 된다. 이것이 진부한 표현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시인은 늘 새로운 감성과 참신한 생각으로 이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진부한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익숙한 것을 새롭게 만나도록 하는 것, 이것은 시인의 창조적 정신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마술이다. 


* 여섯 번째 이야기 : 즐거운 오독 _ 모호성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을 그리다>

p148 신문의 신간 소개를 보니 ‘그리고 사람을 그리다’라는 제목을 단 수필집이 보인다. 여기서 ‘그리고’는 ‘그림을 그린다’인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인가. 아니면 단순히 ‘and’의 뜻인가. 또는 사람을 그려놓고 그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인가,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그림으로 그렸다는 것인가? 이 경우 언어는 어느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기를 즐기지 않는다. 


<오랑캐 땅의 화초>

p150 일상의 언어에서 의미는 어느 하나가 옳으면 나머지는 그른 것이 되지만, 시의 언어에서는 꼭 그렇지가 않다. 이 대목에서 모호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면에서 시인은 이러한 언어의 모호성을 은근히 즐기는 사람들이다.시  속에서 이러한 의미들은 오히려 풍부와 함축이 된다. / 시의 어휘나 구절들은 대개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포용력과 융통성을 지닌 문맥을 형상한다. 특히 한시 언어에서 이러한 점은 놀라울 정도로 잘 발휘된다. 뛰어난 시는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포용력과 융통성을 극대화한 시라고 말해도 괜찮다. 


<개가 짖는 이유>

p156 시인은 결코 똑 부러지게 말하지 않는다. 여운을 즐기려는 까닭이다. 

p158 이식의 <새로온 제비> : 온갖 일 유유하게 한 웃음에 부쳐두고/ 초당의 봄비 속에 사립을 닫아거네./ 얄미워라 주렴 밖 강남 갔던 제비야/ 한가한 사람더러 시비를 말하는 듯./

염결을 향한 자의식도 이쯤 되면 지나치다 하겠지만, 새소리의 음사로 뜬세상의 작태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주제를 담아내는 재치는 대가란 기림이 아깝지 않다. 

<<논어>> <위정>에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니라.”라고 한 구절이 있다. 원문을 소리내어 읽으면 꼭 제비가 지지배배 우는 소리와 비슷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제비가 <<논어>>를 안다고 하는 말도 있었다. 이렇듯 모호성은 문화적 교양이나 문학 관습을 공유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즉각 손뼉이 터져 나왔을 대목도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무지개가 뜬 까닭>

<백발삼천장>

p165 권필은 그의 시 <술회>의 서두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건덕이 어찌 내 살 땅이리/ 병주도 또한 고향 아닐세. 

건덕과 병주는 땅 이름이다. 그 속에는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건덕은 <<장자>> <산목>에 나오는 도가적 이상향의 이름이다. 그 나라 백성은 어리석고 소박하며 욕심이 적다고 했다. 남에게 베풀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고, 예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천지를 마음껏 다니면서 즐겁게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고대인의 유토피아다. 

 병주는 당나라 때 시인 가도에 얽힌 고사가 있다. 그는 본래 함양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병주에 살면서 늘 고향 함양을 그려왔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강을 건너 함양에 오고 보니, 이제는 도리어 병주가 그리워지더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면 병주는 흔히 ‘제2의 고향’이란 의미로 나와 있다. 


<뱃속 아이의 정체>

p168 정몽주의 <정부원>

한 번 떠난 뒤로 여러 해 소식 없어/ 수자리의 삶과 죽음 그 누가 알랴. / 오늘 처음 솜옷을 지어서 보내나니/ 울며 보내고 돌아올 때 뱃속에 아기 있었네. 

p170 4구는 “울며 보내고 돌아올 때 뱃속에 있던 아이 편에요.”라고 옮겨야 한다. 뱃속에 아이가 있던 시점은 여러 해 전 남편이 수자리 살러 떠나던 당시다. 그러니까 그때 뱃속에 있던 그 아이가 아버지의 겨울옷을 가져다주러 변방으로 떠날 만큼 자랐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제 4구는 이 시의 처절한 애원을 극도로 농축시킨 표현이다. 뱃속에 있던 아이가 변방으로 아버지를 찾아 심부름을 떠날 수 있을 만큼 자라도록 아버지는 생사조차 모른 채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p172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이 언어의 미로 위에 숨겨놓은 코드를 독자가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진지한 지적, 감성적 여정이어서 때로는 오독도 즐겁다. 시인은 부러 말꼬리를 흐려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독자는 잠시 멍해 있다가 다시 코드를 찾아 나선다. 설사 가다가 길을 잠시 잃은들 어떠랴. 아니, 애초부터 길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 일곱 번째 이야기 : 사물과 자아의 접속 _ 정경론

<묘합무은, 가장자리가 없다>

p175 유협 <<문심조룡>> <물색>의 한 대목을 읽고 난 후

눈길이 사물에 한번 갔다가 돌아오는 사이에 어느새 마음에는 느낌이 자리 잡는다. / 경물은 이렇듯 시인의 눈 속에서 어느 순간 정으로 착색된다. 숲과 구름이 한데 합쳐지듯이 경과 정은 하나로 결합되어 분리할 수가 없다. 

 p176 ‘묘합무은’의 주장 : 선녀의 옷은 꿰맨 자취를 찾을 수 없어 천의무봉이다. 정과 경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도 이와 같다. 어디까지가 경이고 어디부터가 정인지 그 가장자리를 찾기 어렵다. 

p177 정과 경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미묘한 줄다리기는 시 감상의 즐거움이다. 시인은 가장자리를 굳이 감추려 들고, 읽는 이는 경물 안에 감춘 시인의 정을 자꾸 들춘다. 한데 합쳐졌던 정과 경이 독자의 의경 속에서 어느 순간 분리되면서 새로운 미감이 발생한다.


<정수경생, 촉경생정>

p181 홍귀달의 <광나루 배 안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녘 배 위서 일어나서는/ 푸르른 등불 보며 마주앉는다./ 닭 울음에 개 짖으니 마을 가깝고/ 은하수로 물 맑음을 알 수 있겠네. / 늙음과 질병만이 이 몸 따르고/ 손꼽아도 친구는 몇이 안 된다./ 세상일 내 마음 또 돋우는데/ 동녘에 붉은 해가 솟아오른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군가. 가물거리는 등불을 보다가 시인은 험아한 느낌이 일었다. 2구의 ‘상대’란 말에 그 허전함을 담았다./ 

p182 허균은 <<국조시산>>에서 처음 네 구를 두고 ‘가을 경치 묘사가 기가 막힌다’는 평어를 남겼다. 가을 새벽의 해맑은 경은 자연스레 자신을 돌아보는 시인의 정을 일으켰다. 


<이정입경, 경종정출>

p187 연잎 (김경녀) 사진. 빗방울이 연잎을 치면 데굴데굴 굴러 잎 가운데로 모인다. 이따금 무거워 고개를 숙이면 말 구술이 연못 위로 쏟아진다. 연못은 온통 구슬 천지다. 



<정경교융, 물아위일> :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느낌으로 정말 시 같은 시를 읽은 느낌이었다. 

 p189 육시옹 <<시경총론>> : 정을 잘 말하는 자는 말이 깊은 듯 얕고 드러날 듯 감추어져서 그 마음의 무한함을 깨닫게 한다. 경을 잘 말하는 자는 형용함을 생략한 채 약간만 봬도 참모습이 또렷하고 생기가 넘쳐난다. 드러낼 듯 감추는 데서 정의 맛이 깊어 진다. 시시콜콜한 묘사를 버리자 경이 한층 살아난다. 사실 녹아든 정과 경의 경계를 갈라 구분해내기는 쉽지가 않다. 


p190 박은의 시 

베개 베고 시를 얻어 계속 읊조리자리/ 마구간의 마른 말도 더욱 길게 우는구나./ 밤 갚어 초승달은 그림자를 만들고/ 고요한 산 찬 솔은 절로 소릴 내누나./ 늙은 종이 재를 털자 등불은 밝아지고/ 아내는 술을 퍼와 내게 권해 따라주네. / 얼큰해져 이불 덮고 다시 높이 누웠자니/ 가슴 속에 불평 있음 깨닫지 못하겠네. 

자! 여기서 어디까지가 정이고 어디까지가 경인가. 무엇이 물物이고 무엇이 아我인가. 


p193 서헌순의 <우연히 읊다> : 제목이 아주 맘에 든다. 

 산창서 하루 내내 책 안고 잠을 자니/ 돌솥엔 상기도 차 달인 내 남았구나./ 주렴 밖 보슬보슬 빗소리 들리더니/ 못 가득 연잎은 동글동글 푸르도다. 

종일 누워 책을 읽는다. 꼭 어디까지 읽을 작정은 없다. 심심하면 차 마시고, 곤하면 가슴에 책 얹고 잔다. 돌솥에 여태 남은 차 향기가 잠 덜 깬 내 후각을 자극한다. 창밖에 사분사분 빗소리. 흐리멍하던 정신이 돌아온다. 누운 몸을 일으켜 주렴을 걷는다. 비에 씻긴 이들이들한 연잎들이 연못에 가득하다. 마음조차 푸르다. 


<지수술경, 정의자출>

p195 이진의 <산속 집에서 우연히 짓다> : 그림을 보는 것 같다.

허공 가득 푸른 이내 옷 위로 방울지고/ 초록의 연못에는 백조가 날아간다./ 밤 지새운 묵은 안개 깊은 숲에 남았다가/ 낮 바람 불어오지 부슬부슬 비 뿌리네.

 시인은 이러고 저러고 말하지 않았다. 새가 날고 옷이 젖고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고만 했다. 하지만 허공 가득한 안개, 초록 연못 위로 나는 흰 새,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 절로 쇄락(기분이나 몸이 상쾌하고 깨끗함)하고 청신한 기운이 깃들었다. 

색감이 정말 싱그럽다. 초록과 푸르름이 아주 잘 어울린다. 청량하다. 


p196 성간의 <도중> : 반쯤 닫은 사립문에 울타리 촘촘한데/ 석양에 말 세우고 앞길을 묻는다./ 푸른 안개 밖으로는 보슬비 흩뿌리고/ 때마침 농부가 소를 몰고 오는구나.

엉거주춤 말 위에 앉아 문간에 선 나그네.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 들판 가득 번져가는 푸른 안개,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 광경도 아름답지만 나그네의 표정 위로 번져가는 안도감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즉정견경, 정의핍진> 

p199 이필운의 부인 남씨가 죽은 손녀를 애도하여 지은 시 

여덟 살에 일곱 해를 병 앓았으니/ 돌아가 누움이 외려 편하겠구나./ 흰 눈이 펄펄 오는 오늘 이 밤에/ 어밀 떠나 추위 모름 가슴 아프다. 

임청상은 <<시필>>에서 이 시를 이렇게 평했다. “시는 정에서 나오고, 정은 시에서 생겨난다. 경과 함께 이르러 글자마다 눈물을 흘릴 만하다. 참으로 죽음ㅇ르 애도하는 시의 가작이라 하겠다. 그러나 평일에 비록 친척조차도 부인이 시에 능한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또한 규방에 모범이 될 만하다.” 슬픔이 지극하면 외물을 끌어들일 여유도 없다. 네 구  모두 정의 술회임에도 그 감정의 절절함이 비탄에 빠지지 않은 ‘애이불비’의 경계를 얻었다. 


p201 이상 크게 다섯 범주로 나누어 하시에서의 정과 경의 어울림을 살펴보았다. 이들 사이에 우열은 없다. 시인의 그때 감정 상태나 놓인 환경에 따른 선택이 있을 뿐이다. 


p202 시는 찬 샘물이다. 시를 잘 쓰려면 선변을 배워야 한다. / 그러나 진정한 시법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최후의 ‘현관’이 있다. 그 현관 앞에 서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 문을 여는 법은 아무도 일러줄 수가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제 손으로 직접 열고 들어가야 한다. 


  • 여덟 번째 이야기 : 일자사 이야기 _ 시안론

<한 글자를 찾아서>

p205 서거정이 <<동인시화>>에서 말했다. “시는 묘함이 한 글자에 달려 있다. 옛사람은 한 글자를 가지고 스승으로 삼았다” / 원매가 <<수원시화>>에서 “시는 한 글자만 고쳐도 경계가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진다.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한 것도 다 같은 뜻이다. / 한 글자가 시를 죽이고 살린다.

한 글자가 시를 죽이고 살린다는 무서운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한 글자는 한자의 한 글자를 말한다. 한자는 뜻을 가지고 있기에 글자가 변하면 시의 뜻,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효과가 있다. 또 음도 달라져서 독음을 읽어내려갈 때도 사뭇 달라진 한시를 느껴볼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한 노릇이다. 한 글자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하다니 말이다. 


왕안석이 고향을 그리며 지은 시를 예를 들어 설명해 준 부분이다. 3구의 ‘춘풍우록강남안’이 처음엔 ‘춘풍우도강남안’으로 되어 있었다. 완안석은 ‘도到’자 위에 ‘불호’라고 쓰고 ‘과過’자로 고쳤다. 다시 ‘입入’자로 고쳤다가 ‘만滿’자로 되고쳤다. 이같이 하기를 10여차례 되풀이해서 겨우 ‘록綠’자로 결정하였다. 봄바람을 공감각적으로 초록이라 표현하자,그저  봄바람이 강남 언덕에 이르렀다거나, 지난다거나,가 하다득는 등의 표현은 밋밋하기 짝이 없다. 봄바람이 강남 언덕 위로 불어 지나가자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 순식간에 초록빛으로 변해버리는 경쾌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한 글자를 10여차례 되풀이해서 바꾸려는 시인의 노력이 한 글자의 위력을 더 잘 알려준다. 원래 글을 수정이나 퇴고하는 이유는 이렇게 깨알같이 작은 부분을 바꾸면서 글을 살리기 위함인 것 같다. 


p206 옛사람이 시구의 연마에 들인 노력을 알겠다. 


p208 각 표현의 질량을 저울질하고 정서를 감별해낼 수 있다는 그는 이미 상승의 시인이다. 

p209 비유하자면 사람이 급하게 모자를 사려고 시장에 들어가 여러 개를 꺼내놓고 하나하나 써보면 반드시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자를 고르는 법을 쓸 수만 있다면 시안詩眼은 공교롭지 않음이 없다. 

하나하나 골라 써보고 거울에 비춰 비교하듯, 글자를 바궈 넣었을 때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음미할 수 있어야 시안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뼈대와 힘줄>

p209 정말이지 시에도 눈이 있다. 시의 빗장을 옳게 열려면 시의 눈, 즉 시안을 찾아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p210 시안은 글자 그대로 시의 눈알이다. 시안은 시에서 가장 정채롭고 시인의 정신이 집약된 지점, 하나만 건드려도 나머지가 따라 움직이는 일동만수의 경락이다. 시안은 단순히 수사적으로 자구를 단련하는 기교의 문제가 아니다. 시가 예술의 의경미를 형성하는 핵심처인 것이다. /

화가 고개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곱고 추함은 솜씨와 무관하다. 그림으로 정신을 전달하는 것은 바로 눈동자에 달려 있다.” 눈동자로 정신을 전달된다는 ‘아도전신’의 유명한 주장이다.


p211 청나라 오대수는 그의 <<시벌>>에서 도 이렇게 말했다. “...... 한 글자의 빼어남이 시 전체를 기이하게 할 수 있다.”  시안이란 바로 한 편의 시의 눈동자에 해당하는 자리다. 시의 힘줄과 뼈대가 바로 이곳에 모여 있다. 이로 인해 전체 시는 갑자기 생동하는 활기를 띤다./ 

시는 한 글자에 죽고 산다. 


p213 냇물 소리를 나눈다고 한 제2구의 ‘분’자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자가 아니다. 

한 편의 시에서 시안은 어디에 있는가? <<여씨동몽혼>>에서 반빈로는 7언시는 제5자가 울려야 하고, 5언시는 제3자가 울려야 한다고 했다. / 그렇다고 시안의 위치가 늘 일정한 것은 아니다. 


<한 글자의 스승>

p217 시를 짓고 나서 그는 천태산을 내려와 전당강에 이르렀다. 그런데 늦은 밤 강물에 비친 달을 보니, 강물이 조수를 따라 물러나자 달빛이 단지 ‘반강’에만 남는 것이었다. 그는 문득 앞서 지은 시에서 ‘일강수’라 한 것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그는 마음이 불안해져서 길을 되짚어 절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웬걸, ‘일’자 위에 이미 누가 한 획을 가로 긋고, 다시 세로로 한 줄을 그은 뒤 점 두 개를 찍어 ‘반’자로 고쳐놓은 것이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든 그는 절의 스님들에게 누가 그랬는지 수소문했다. 그가 시를 써놓고 간 얼마 후 한 관리가 지나다가 이렇게 고쳐놓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는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해 안타까워하며 돌아갔다. 

잘못임을 깨닫고 되짚어 돌아간 시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p219 시승 교연에게 한 승려가 찾아왔다. “이 물결 제택을 머금고 있어, 티끌 묻은 갓끈을 씻을 곳 없네.”라 한 <어구>란 시를 보여주었다. 교연이 ‘파’자가 좋지 않으니 다른 글자로 고치라고 했다. 그 승려는 불복하여 시를 가지고 떠나버렸다. 교연은 그가 곧 돌아올 거라며 자기 손바닥 가운데 한 글자를 써놓았다. 얼마 뒤 그 승려가 허겁지겁 되돌아왔다. 조금 들뜬 어조로 말했다. “스님 말씀이 과연 옳습니다. ‘파’자를 ‘중’자로 고치면 어떻겠습니까? 교연이 빙그레 웃으며 손바닥을 펴 보였다. 거기에는 이미 ‘중’자가 써 있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 인생에도 이 한글자와 같은 중요한 무엇인가가 바뀌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다. 승려가 떠났다가 다시 허겁지겁 되돌아와 들뜰 수밖에 없는 한 글자와 같은 것이 내게도 있을 것이다. 곰곰히 생각하고, 음미해봐야겠다. 


p220 소리의 울림면에서도 차이가 있지만, ‘하상한’이라 하면 ‘여름인데도 아직까지 춥다’는 뜻이어서 지속적으로 추웠다는 뜻이 된다. 반면 ‘하역한’이라 하면 ‘여름이지만 또한 춥다’가 되어 지속의 의미보다 현재 상태를 강조하게 된다. 


<일자사의 미감 원리>

p220 한 글자만 바꿔도 미감의 차이가 확연하다. 

p221 일자사의 첫 번째 미감 원리는 ‘의미의 중복을 피하라.’는 것이다. 

시는 중복을 꺼린다. 한 글자도 넘치거나 부족해서는 안 된다. 이 절제된 경지를 한유는 이렇게 말했다. “풍부하되 한 글자도 남지 않고, 간략하되 한 마디도 빼먹지 않는다.” 한 글자만 더하거나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글, 그런 시를 쓰라는 주문이다. 

p222 한 글자가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의경의 맛이 참으로 미묘하다. /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지나친 것은 문제다. 


p223 두 번째 미감 원리는 ‘여운은 남기고 호응을 중시하라.’는 것이다. 여운은 추상의 여백에서 생긴다. 시는 단정적 언사를 꺼린다. 사물과 시인이 만나 빚는 의경은 카메라 렌즈처럼 도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러 초점을 흐리는 데 묘한 맛이 있다. 그래도 의경의 호흡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p 225 정시상과 김부식의 일자사에 얽힌 일화. 

“천사와 만점이라니, 네가 세어보았는가? 어찌 ‘버들은 실실이 푸르고, 복사꽃은 점점이 붉도다’라 하지 않는가? 과연 ‘천’과 ‘만’으로 한정짓는 것보다 ‘사사’와 ‘점점’으로 모호가 한결 넉넉하다. 실실이 푸른 버들가지와 온 산을 붉게 물들인 복사꽃의 정취를 어찌 숫자로 한정지을 수 있겠는가. 


p227 세 번째 미감 원리는 ‘시상의 온유돈후를 중시하라.’는 것이다. 감각적 직설보다는 에둘러 말하는 데서 온건한 맛이 깊어진다. 모난 말보다는 각지지 않은 표현에서 증후한 채취가 풍겨난다. 


<시안과 티눈>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말했다. “글을 일러 조화라고 말한다. 마음속에서는 틀림없이 예술적인데, 막상 손끝에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예술적이지 못하다.” 체험에서 나온 까닭이 있는 말이다. 최자는 <<보한집>>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시 조탁을 두보처럼 한다면 묘하기는 하다. 다만 솜씨가 거친 자는 조탁하려 애 쓸수록 점점 더 졸렬하고 껄끄럽게 되어 공연히 애만 태우다 만다. 각기 타고난 재주에 따라 있는 그대로를 토해내어 조탁의 흔적이 없는 것만 못하다.” 

  • 아홉 번째 이야기 : 작시, 즐거운 괴로움 _ 고음론

<예술과 광기>

p235 대상을 향한 미친 듯한 몰두 없이 위대한 예술은 이룩되지 않는다. / 

불광불급이라 했다. 미쳐야 미친다. 비록 하찮은 기예라 해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가 있어야 비로소 성취를 말할 수 있다. 예술의 천재들에게는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광기가 있다. 그들 안에서는 열정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과 다른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느껴진다. /

이징은 조선 중기의 이름난 화가다. 천대 받는 화공이 되는 것을 싫어해 집안에서 그림을 못 그리게 했다. 그는 다락에 올라가 그림을 그렸다. 아이가 없어지자 집에서 난리가 났다. 사흘만에 다락에서 내려왔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볼기를 쳤다. 이징은 매를 맞으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찍어 새를 그렸다. 이를 본 아버지가 그에게 그림 공부를 정식으로 허락했다. (몰입과 열정의 좋은 예다.)


 p237 예술도 이쯤 되면 이르러 간 경지를 측량할 길이 없게 된다.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잗다란 기교쯤은 까맣게 잊어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영욕도 득실도 생사까지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고>

p239 고려 때 강일용은 백로를 가지고 남이 생각지 못한 시를 지으려고 비만 오면 짧은 도롱이를 걸치고 성문 밖 천수사 남쪽 시내로 가서 황소 등에 걸터앉아 관찰하곤 했다. 근 100일이나 날마다 수염을 꼬며 고심하다 마침내 단 한 구절을 얻었다. 

 푸른 산 허리를 날며 가르네. 

“오늘에야 옛사람이 말하지 못한 것을 비로소 얻었다. 뒤에 마땅히 이를 잇는 자가 있을 것이다.” 


p240 권필은 평생 벼슬길에 몸담지 않았다. 이를 안타까이 여겨 벼슬을 권하는 벗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내게는 고서 여러 권이 있어 홀로 즐기기에 족하고, 시는 비록 졸렬하지만 마음을 풀기에 족하며, 집이 비록 가난해도 또한 막걸리를 댈 만하다네. 매번 술잔 잡고 시를 읊조릴 때면 유연히 스스로 얻어 장차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니, 저 이러쿵저러쿵하는 자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말인가? 

p243 창작은 이같이 피를 말리는 일이다. 


<눈을 상처내고 가슴을 찌르듯>

p243 실제 맹교는 한 편의 좋은 시를 지을 수만 있다면 칼로 자기 눈을 찌르고 가슴을 도려내는 것 이상의 고통을 달게 여겼을 시인이다. 

p244 <가을날 거처에서 선달에게 부치다>

백년 인생 뜻 맞는 일 없어도 괜찮지만/ 하루라도 시 안 짓곤 견디기가 어렵다네.

<괴로이 읊음>

살아서 한가한 날 결코 없으리/ 죽어야만 시를 읊조리지 않겠네. 

맹교는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시를 위해 살았던 시인이다. 시를 빼면 그의 삶에서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목숨을 걸고 시를 썼다. 

p245 <<당재자전>>은 가도가 골똘히 작시에 빠져들 때면 앞에 왕공귀인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은 아득한 하늘 위에서 놀고, 생각은 끝없는 속으로 들어갔다고 적었다. 

p247 김홍도, <월하고문>, 간송미술관. 

“연못가 나무에서 새는 잠들고, 스님은 달빛 아래 문 두드리네.” 달빛 아래 스님이 사립문을 두드린다. 아래쪽 나뭇가지에 자다 깬 새 서너 마리가 보이는가, 아스라하다. 

p249 가도는 매년 그믐날이 되면 반드시 그 한 해 동안에 지은 작품을 책상 위에 모아농ㅎ고, 향을 살라 두 번 절하고는 술을 부으며 빌었다. “이것이 내가 한 해 동안 고심한 자취다.” 그러고는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나는 나의 작품을 두고 어떤 의식을 치르게 될까?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함께 해준 동기들과 깊은 밤 수다 장을 열어야 할까나? 상상해본다. 


<가슴속에 서리가 든 듯>

p250 두목은 시작의 괴로움을 이렇게 노래했다. 시 읊는 괴로움을 알고 싶은가/ 가슴속에 가을 서리 서린 듯하네. 

p252 미친 듯한 몰두 끝에 얻어진 시이고 보니, 시에 대한 애착이 유난스러울 것은 당연하다. 


<참을 수 없는 가려움, 기양>

p252 소동파가 <적벽부>를 짓자, 사람들은 그가 고치지 않고 단숨에 지은 줄 알았다. 막상 이를 짓느라 버린 초고가 수레 석 대 가득하였다. 

송자경이 매요신에게 말했다. “나는 예전 지은 글을 볼 때 마다 보기 싫어 불태워버리고 싶어진다네.” 매요신이 기뻐하며 말했다. “자네의 글이 진보하는 것일세. 나의 시도 그렇다네.”

p253 일상의 모든 행동이 시와 무관한 것이 없다. 시를 쓰는 ㅇ리은 이들에게 있어 매 순간을 살아 숨쉬게 만드는 원동력인 셈이다. /

아무 짝에 쓸모없는 줄 잘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표현 욕구를 옛사람들은 ‘기양’이란 말로 표현했다. /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마물이 있으니, 옛사람들은 이를 일러 시마라 했다. 


p254 이규보의 <시벽> 중에서 : 어찌해 그만두지 못하는 건지./ 그렇다고 놀랄만한 시를 지어서/ 천 년 뒤에 남길 만한 것도 없다네. / 살고 죽음 반드시 이 때문이리/ 이 병은 의원도 못 고치리라. 


<개미와 이>

p256 시인은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자이다. 그러면서 산 아래에서 헐고 뜯고 싸우는 인간의 작태를 비웃고, 때로 그들를 위해 눈물 흘리는 존재다. 

p257 한 사람은 위에서 아래를 보며 개미 같다고 하고, 훅 불면 날려가 버릴 것 같다고 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한다. 아래서는 또 위를 보며 머리카락에 붙은 이 같다고 하고, 저 혼자만 공연히 고상한 체한다 하고, 꼴 같지 않게 논다고 눈을 흘기니 말이다. /

사실 실용으로 말하면 시처럼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도 없고, 시인처럼 무능한 인간들도 없다. 세상 고민을 혼자 다 짊어진 듯 끙끙대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p258 지금도 날마다 시집이 쏟아져 나오고 잡지마다 시가 넘쳐난다. 하지만 낙루의 감격은 고사하고 수염을 꼬는 고심의 흔적조차 찾지 못할 시가 수두룩하다. 정신은 간데없이 껍데기만 남은 시가 너무도 많다. 

p259 그 고심참담의 결과를 앞에 놓고 독자들은 마음의 위로를 얻고 삶의 깊은 의미를 읽는다. 시가 인간의 언어의 정채로운 금강석이든, 암우 짝에 쓸모 없는 해독이든 시는 시다. 금강석이 될지 독약이 될지는 오로지 시인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린일이다. 

  • 열 번째 이야기 : 미워할 수 없는 손님 _ 시마론

<즐거운 손님, 시마>

p263  시마는 ‘시 귀신’이다. 시마는 어느 순간 시인에게 들어와 살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를 생각하고 시만 짓게 하는 귀신이다. / 

시마는 시인에게 즐거운 괴로움을 선사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 

시 중에 소리 없이 찾아온 설레는 봄빛을 노래한 구절이 있었다. (밑줄 친 문구는 시와 같다.)

p265 자신의 문학 인생과 삶의 불우를 되새기는 서글픈 어조의 긴 편지다. <원구에게 주는 편지> 현세가 불우한데도 시에만 몰두하는 자신을 두고 남들은 시마에 붙들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은 신선의 경지와 견주더라도 조금의 손색이 없노라며 창작의 길에서 느끼는 깊은 희열을 예찬했다. 


<시마와의 논쟁과 시마 증후군>

p267 “사람이 한세상을 산다는 것은 잠깐일 뿐이다. 내가 그대의 이름을 세워 백세토록 닳아 없어지지 않도록 했으니 그 공이 어찌 작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를 쫓아내려 하다니 참을 수 없다.”고 하였다. (지궁, 학궁, 문궁, 명궁, 교궁)

p268 한마디로 시마의 증세는 시 외에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현상이다. 

p269 눈에 띄는 사물마다 허투루 보지 않고 거기에 담긴 비밀을 찾아내겠다고 달려드는 ㅈ으상이 이른바 시마 증후군이다. 

자신의 분야에 몰두하는 사람, 그 이름을 넓히는 많은 사람들은 ‘시마 증후군’에 빠졌을 것이다. 이때 ‘시’만 자신의 분야로 바꾸면 된다. 예술가, 혁명가, 사업가 등 자신의 분야게 빠진 사람들은 모두 ‘0마 증후군’에 사로 잡혀 있을 것이다. 


<시마의 죄상> 

p272 시인은 남이 알아주든 말든 시로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날카로운 예지로 드러나지 않은 사물의 깊은 의미를 파헤쳐 사람들의 인식을 높은 곳으로 이끌어준다. 그뿐인가? 사물을 관찰하여 감춰진 의미를 찾아내고, 세속의 질서나 사람들의 해우이에 대해 시를 통해 마음껏 비판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 겉모양의 꾸밈을 우습게 보고 한 편의 훌륭한 시를 창작하기 위한 고초를 더욱 소중히 여긴다. 한마디로 이규보와 최연등이 꼽은 ‘시마의 죄상’은 오로지 시만 생각하고 시에 죽고 시에 사는 전업 시인으로 누리는 특권에 대한 ‘즐거운 비명’일 뿐이다. 

<시귀와 귀시>

p278 그러고 보면 시 귀신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은 모두 시를 향한 시인들의 끝없는 몰두와 집착이 빚어낸 환영일 뿐이다. 꿈속에서 귀신이 들려준 시는 실상 귀신이 들려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귀신의 입장이 되어 노래한 것일 따름이다. 시와 관련된 귀신들은 한결같이 무섭지 않고 인간에게 해코지를 하는 법이 없다. 이들 귀신이 바로 시인 자신의 분신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귀신의 조화와 시인의 궁달>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제목이 마음에 든다. 

p282 시마는 한마디로 옛사람의 시를 향한 열정의 다른 표현이다. 

시마가 떠난 시인들은 시 짓기를 그만두는 것이 옳다. 젊은 시절 날카로운 표현과 치열한 시정신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던 시인들이 어느 순간 침묵의 나락 속으로 빠져드는 경우를 지금도 흔히 본다. 

p283 침묵은 그래도 보기에 아름답다. 이미 시마가 떠나버린 현실을 인정치 못하고, 이전에 벌어놓은 점수까지 죄 까먹는 조악한 시를 발표하는 모습은 보기에 민망하다. 시마가 떠나가면 시와 넋두리조차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

배부르고 따뜻함 속으로 시마는 깃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충족된 넉넉함을 시마는 혐오한다. 무언가 결핍된 상태, 그 결핍을 채우려는 시인의 정신이 죽장처럼 곤두서 있는 지점에서 시마는 슬그머니 시인에게 스며든다. 그래서 시인은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좀, 있어야겠다”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 열한 번째 이야기: 시인과 궁핍 _ 시궁이후공론

<불평즉명, 불평이 있어야 운다>

p287 시는 왜 쓰는가? 말로는 풀리지 않을 시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름도 노래 앞에서는 눈 녹듯 사라진다. 

한유 <형담창화시서>

화평한 소리는 담박하고, 근심이 담긴 소리는 아름답다. 떠들썩 즐거운 말은 공교하기 어렵고, 곤궁한 말은 쉬이 좋다. 이런 까닭에 문장을 짓는 것은 늘 길 위의 나그네나 초야에 묻혀 사는 인사에게 있었다. 왕공이나 귀한 신분의 사람에 이르러서는 기운이 가득차고 득의 한지라, 타고난 성품이 원래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힘쓸 겨를이 없다. 


p288 문학은 득의가 아닌 실의에서 나온다. / 

문장도 훌륭하고 공명도 함께 누리는 이치는 없다. 뿔을 가지려면 이빨을 포기하든지, 꽃이 아름답거든 열매의 내실을 기대할 수 없다. 날개를 단 채로 다리도 네 개이기를 바라거나, 채색 구름의 영롱한 자태가 길이 변치 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 


<나비를 놓친 소년, 발분서정의 정신>

p289 글만 읽고 그 마음은 제대로 읽지 못했구려. 

p290 마치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을 하나 주워놓고 무슨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이 “숟가락 주웠다!”라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잘라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사마천의 글솜씨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그 글을 지을 때 품었던 마음자리를 얻는 것이다. 

문학을 대하는 중요한 자세에 대해 배운다.

p293 요코야마 다이칸 <굴원도>, 19세, 일본 이쓰쿠시마 신사. 

상수 물가를 초췌한 모습으로 방황하는 굴원의 모습이다. 현실은 모순투성이다. 정의는 불의 앞에 힘을 못 쓰고 진심은 외면당하고 조롱받는다. 어쩌겠는가! 

p294 시인은 코앞에서 나비를 놓쳐버린 소년의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좌절 앞에서 주저앉지 않는 발분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발분하는 서정 없이 어찌 남을 감동시키겠는가


<시궁이후공과 시능궁인>

p294 시궁이후공 : 시가 궁해진 뒤에 더 좋아진다는 논의, 시능궁인 :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한다는 관념

p295 선비가 마음속에 지식과 경륜을 쌓아두고도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없을 때 마음속에 근심과 울분이 쌓인다. 이것을 글로 표현하니 보통 사람이 ㅁ라하기 어려운 것을 그려낼 수 있다. 구양수는 궁하면 궁할수록 시가 더욱 좋아진다고 해서 ‘궁’이 ‘공’을 위한 전제임을 밝혔다. 


p296 이들은 궁했기 때문에 좋은 시를 남길 수 있었다. 한편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시를 씀으로 해서 곤궁을 더욱 가중시키거나 지속시켰다는 사실이다. / 이때 시를 창작하는 해우이는 삶에 대한 올곧음을 견지함과 같고, 시를 포기함은 현실과 타협하거나 타성에 야합하는 것을 뜻한다. 


<궁한 사람의 시가 좋은 이유>

p297 일반적인 경우로 보더라도 시는 역시 궁한 뒤에 더 좋아진다. 어디 시뿐인가? 모든 예술, 학문이 다 그렇다. 

p298 궁이라는 상황이 개입되어 인식에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이 시궁이후공 논의의 핵심이다. / 한편의 시가 뛰어난 작품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상성을 뛰어넘는 인식의 갱신이 필요하다. 


<시와 궁달의 관계>

p301 궁의 상태는 예민한 감각을 길러준다. 가슴속의 불평이나 울분이 촉수가 되어 시를 더욱 우수하게 만들어준다. 그렇다면 궁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궁한 이의 시가 모두 좋은 것도 아니다. 현달하고도 시가 좋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탄탈로스의 갈증>

p307 아이덴티티, 즉 동일성은 ‘자신을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는 감정’이다. 즉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상적, 관념적 자아와 실제의 자아 사이에 어떤 편차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 활동을 인간 내부의 두 자아를 일치시켜나가려는 몸짓으로 볼 수 있다면, 궁의 상황은 더 나은 예술작품의 창조를 위한 충분조건이 된다. /

화재불우, 즉 재주를 품고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니 여기에서 갈등이 생긴다. 자신의힘으로는 어쩔 수 없기에 대상에 투사하여 해결하려 든다. 그 결과가 독자의 입장에서는 공이라는 평가요, 자신의 입장에서는 동일성의 상태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다는 위안이다. 상실감이 강하면 회복에의 갈망도 커진다. 동일성의 추구란 현실과 자아, 혹은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에 형성된 파국적 관계를 청산하려는 노력인 셈이다. 


p308 시인은 탄탈로스와도 같은 존재다. 맛있는 음식과 샘물을 앞에 두고도 영원한 갈증과 갈망 속에서 헤맨다는 탄탈로스! 시인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열두 번째 이야기 : 시는 그 사람이다. _ 기상론

<이런 맛을 아는가?>

<시로 쓴 자기소개서>

p314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 

p318 패랭이꽃! 달빛이 밴 듯한 고운 빛깔, 언덕 너머 바람은 그 은은한 향기를 불어간다. 눈길 주는 이 하나 없는 황량한 벌판에서 바람에 혼자 하늘대는 패랭이꽃. 이 고운 자태를 보기만 하면 공자님네도 다투어 제 동산 가운데 심어놓자 하련만, 이 황량한 벌판을 그들이 왜 찾겠는가. 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길 가는 농부의 무심한 눈길에 답할 뿐이다./

비슷한 형편에서 같은 의도로 쓴 작품이 어찌 이리 다를까? 그 사람의 그릇이 같지 않은 까닭이다. 인간은 삶의 외형적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곤궁에 찌들어 본연의 기상마저 허물어서는 안 된다. 한시 비평에서 말하는 기상론이란 바로 시인의 기질과 삶의 자세가 그의 시에 거울처럼 비쳐진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만나보지 않고도 그 사람을 알게 된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p319 세상에서 완전히 잊힌 느낌, 아무 쓸모없이 버려진 듯한 생각에 그는 잠을 못 이룬다. 육신의 병이야 약으로 고친다지만 마음의 병은 그렇지가 못하다. 

p320 서거정 <<동인시화>>, 어딘가 위축되고 초라하고 곧 허물어지고 말 것 같은 허망감이 시 전체를 감싼다. 그는 결국 일생을 곤궁과 불우 속에 살다가 세상을 떴다. 사람의 기상이 이렇듯 언어에 그대로 떠오르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강아지만 반기고>

p324 아내가 두고에게 보낸 시 : 낭군께선 뜻을 얻고 나이 한창 젊으신데/ 오늘 밤 어느 술집서 취해 주무시나요. / 그러니 평소에 잘해주라는 말씀이다. 

슬픈데 재밌다.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p328 정약용의 이 연작을 읽노라면 갈증 끝에 청량음료를 마신 듯 체증이 후련하게 내려간다. 이러한 경계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가슴 속에 독만권서의 온축과 행만리로의 기상을 담고서야 가능하다. 


p329 오로봉 묏부리를 붓으로 삼고/ 삼상의 강물을 연지로 삼아/ 푸른 하늘 한 장의 종이 위에다/ 내 마음에 품은 시를 옮겨 쓰리라. : 뾰족한 오로봉을 붓으로 삼고, 그 아래를 넘실대며 흘러가는 삼상의 깊은 강물을 연지 삼아 푸른 하늘이라는 거대한 종이 위에 가슴속에 품은 뜻을 휘갈기고 싶다는 것이다. 스케일이 자못 웅장하다. 


p332 시는 곧 그 사람이다. / 무심히 밷은 말이 씨가 되고,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시화에 자주 보이는 ‘시참’이 바로 이 말을 말한다. 시인은 모름지기 가슴속에 호연한 기상을 품을 일이다. 떳떳함을 길러야 한다. 


  • 열세 번째 이야기 : 씨가 되는 말 _ 시참론

<머피의 법칙, 되는 일이 없다>

p335 특히 앞서 무심히 한 말이 뒷날의 예언이 되는 경우를 따로 ‘시참’이라고 한다. 언어의 주술적 힘을 믿어 말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을 경계한 것이다.


<형님! 그자 갔습니까?>

p339 관서 땅 늙은 수령 한가해 일 없는데/ 봄바람에 취해 눕자 분홍 꽃잎 점을 찍네. 

늙은 수령이 일이 없어 한가로우니 태평시절이 아니고 무엇인가?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취흥이 도도하다. 슬쩍 기대 눕자 꽃입이 날려와 옷깃 위에 분홍 수를 놓는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이시는 무한히 좋은 기상이 있으니, 정태화가 40년 동안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부귀를 누리는 것이 모두 이 한 연 가운데 있다고 했다. 


<대궐 버들 푸른데>

p344 우습다 벗님네들 마음 너무 조급해/ 단번에 최고봉에 오르려 하는도다.

멀리서 보려 하면 근심 더욱 멀어지니/ 올라도 최고봉에 ㄴ오르지 말지니라. 

앞의 것은 진화의 시이고 뒤의 것은 정도전의 시다. 

정상에 닿으려고 기를 쓰고 산을 오른다. 그렇게 정성에 오르면 다시 내려와야 할 것이 아닌가. 왜들 저리 조급한가. 이것이 진화의 시가 말하고 있는 뜻이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했던가. 그러나 높이 올라 멀리 볼 수록 자신의 왜소를 더 깨달을 뿐이니, 굳이 끝장을 보려 하지 말라. 최고봉은 아껴두라. 이것은 정도전의 말이다. 


<하늘은 재주 있는 자를 시기한다>

p351 나식이 지은 시의 4구 

나라 안의 한 귀신을 제거함 있었던가. 

;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바가 있어 읽는 이들이 두려워하였다. 말뜻이 너무 드러나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p352 곧아 먼저 베임을 싫어해선가/ 그 가지 일부러 구부렸구나./ 곧은 성품 그래도 그 속에 있어/ 도끼질 면하기 어려웠도다. 

p353 곧은 나무는 금세 도끼에 찍혀 재목이 된다. 그 가지를 일부러 구부림은 베임의 화를 면키 위해서였다. 그래도 곧은 성품은 감추지 못해 끝내 지팡이감이 되어 도끼질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대체로 그에게 화를 피할 것을 경계한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 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면하지 못했다. 


p355 이상 역대 시화에 보이는 시참과 관련된 예화를 중심으로 옛사람들의 언령 의식을 살펴보았다. 말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쓴 한 편의 시가 어느 날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 말 한마디, 시 한구절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어이 붓을 함부로 놀리랴!


  • 열네 번째 이야기 : 놀이하는 인가 _ 잡체시의 세계 1

<글자로 쌓은 탑, 층시 또는 보탑시>

p360 한시 중에는 이런 말놀이가 유난히 많다. 잡체시로 불리기도 하는 다양한 형식들을 소개하겠다. 글자가 차례로 늘어나는 형식의 시. 글자가 층을 이뤄 늘어나므로 층시라고 한다. 탑을 쌓은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보탑시라고도 한다. 

탑 모양, 마름모꼴, 역 삼각형 등 시를 도형 틀안에 적어 놓은 것이 인상적인다. 형식에 맞춰 뜻도 살려낼려고 했으니 놀이이지만 이 얼마나 어려운 놀이였을까? 

<회문시, 바로 읽고 돌려 읽고>

p367 나그네 천연거에 올라거더니/ 느긋이 천상의 객이 되었네. 

두 구절의 글자 배열을 보면 둘째 구는 첫 구를 뒤집어 읽은 것이다. 말하자면 바로 읽고 거꾸로 읽어 두 구를 만들었다. 

신기해 하며 시를 읽었다. 참 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기도 어려운 재미난 놀이다.ㅣ 


p370 회문시 중에서 글자를 하나씩 밀려서 읽는 것도 있다. 찻 주전자에 흔시 써넣는 <다호시>도 있다. 

p371 둥근 찻주전자에 돌려가며 쓴 글이라 사실 어느 글자부터 읽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아무 글자부터 읽더라도 뜻이 통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것을 ‘자자회문시’라고 한다. /

직금이라 한 것은 남편을 멀리 떠나보낸 아낙이 비단에 한 글자씩 수를 놓아 편지 대신 부치곤 했던 전통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p376 중앙의 ‘영’자에서 출발해서 아래로 내려와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7자씩 끊어 읽는다. 그리고 다음 구의 첫 자는 전 구의 끝 글자를 반으로 갈라 따온 것이다. (시를 읽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줬다. 그림을 보며서 따라가보니 정말 풀어 써놓은 한시와 같아졌다. 재밌다.)


p380 현대까지도 이런 회문시는 창작된다. 


<그림으로 읽기, 신제체>

p384 대게 신지체는 한 글자가 두 글자 또는 세 글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p385 나머지도 이와 같은 독법으로 읽을 수 있다. 별 희한한 짓도 다 했다. 그래도 재미있지 않은가? 근엄하기만 해서야 무슨 맛이 있겠는가? 우스개에 불과해도 운치가 있다. / 이 모두 한자가 아니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려운 창작들이다. 물론 장난기가 다분히 서려 있지만, 적어도 내용 면에서는 진중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마치 겉으로는 그럴 듯한 그림을 그려놓고 그 속에 물건들을 숨겨둔 숨은 그림 찾기와 유사하다. 언어로 유희하는 퍼즐 놀이인 것이다. 이 밖에도 절로 무릎을 치게 하는 절묘한 잡체시가 수없이 많다. 


*열다섯 번재 이야기 :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_ 잡체시의 세계2

<빈칸 채우기, 수시, 팔음가, 약명체>

p389 자체시 중에는 일정한 위치에 정해진 글자를 넣는 형태가 특별히 많다. 

p390 숫자가 1에서 10에 그치지 않고, 백,천,만,억,조까지 확대되었다. 당시 친일단체 일진회의 매국 행태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숫자가 하나씩 늘어나면서 시상의 전개도 고조된다. 창작상 장난기를 수반해도 문면은 서슬 푸르다. / 한시에 소양이 깊었던 개화기 시인들은 한시의 형태를 응용하여 당시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구슬로 꿴 고리, 장두체와 첩자체>

p395 장두체란 글자 그대로 각 구절 첫 글자에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형식이다. 달리 옥련환이라고도 한다. 옥은 글자니 옥련환은 글자가 고리처럼 이어지는 꼬리따기 노래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한시와 다를 것이 없다. 감춰진 규칙을 고려하면 각 구의 끝 글자가 놓이는 순간 다음 구절의 첫 글자가 제한되니, 창작상 고도의 기교와 언어 구사력이 요구된다. 


<파자놀음과 탁자시>

p399 김삿갓의 시

신선은 산 사람이나 부처는 사람이 아니요/ 기러기는 강 새지만 닭이 어찌 새이리오. / 얼음이 한 점 녹자 다시금 물이 되고 / 두 나무 마주서니 어느새 숲이 되네. 

해설을 보니 재미있는 문자유희를 하고 했다. 그냥 봐서는 모르는 시를 하나씩 풀어주니 그 재미를 더해줬다.


p401 이러한 장난이 더 진전되면 다음과 같은 창작으로 발전된다. 

이 부분은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언어 유희 장난을 잘 치는 선배가 있는데 이제 그 선배의 장난을 나무라지 말고 웃으며 나도 한 번 따라해 볼란다. 


p403 하늘이 모자 벗고 한 점을 얻으며 / ‘내乃’가 지팡이를 잃고 띠를 하나 둘렀네. 

무슨 소리 일까? ‘천’이 모자를 벗으면 ‘대’가 된다. 여기에 다시 한 점을 얹으니 ‘견’이다. ‘내’가 지팡이를 잃으면 ‘료’만 남고, 여기에 다시 띠를 하나 둘러주면 ‘자’가 된다. ‘견자’ 쉽게 말해 ‘개새끼’이다. 문전박대를 당하고 나서 부아가 치밀어 비꼰 시다. 


p404 당나라 말 어떤 나그네가 청룡사란 절로 스님을 찾아왔다. 스님이 만나주지 않고 물리치자 절 문에다 시를 적어 놓고 갔다. 

감실에 생긴 용은 동해로 가고/ 서산에 기운 해는 숨어버렸네/ 글을 숭상하는 이 이제는 없고/ 돌멩이는 부서져 모래 되었네

(다시 한 번 읽어보고 그 뜻을 헤아려보고 싶다. 나그네가 쓴 시라니 거절감이 낳은 창조라고 하기엔 거절당함이 부러울 정도다.)

p405 파자를 활용한 비교적 단순한 탁자시가 이에 이르러 다시 한 단계 더 복잡하게 변했다. 

 

<이합체와 문자 퍼즐>

p406 이합체란 이처럼 각 구절의 첫 자에서 반 토막씩 잘라 둘을 합쳐 한 글자로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글자의 조합으로 제목을 삼는 형식의 시체를 말한다. 글자가 일단 떨어졌다가 뒤에 다시 합쳐지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합체는 장두체보다 더 고도의 숙련이 요구되느 까다로운 형식이다. 여기에도 변이형태가 대단히 많다. 후대로 갈수록 제한이 까다로워진다. 

p409 이 밖에도 기묘한 잡체시는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시들 속에는 그 어려운 한자를 마치 떡 주무르듯 제멋대로 가지고 놀았던 옛 시인들의 풍류가 거나하다. 장난은 장난이되 격조를 잃는 법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습작의 과정을 거쳤으면 언어를 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을까. 언어를 매만지는 장인의 근성이 이런 잡체시를 낳았다. 


  • 열여섯 번째 이야기: 말장난의 행가 _ 한시의 쌍관의

<초록 저고리, 국수 한 사발>

p413 “문왕이 돌아가시자 무왕이 나오셨네. 주공이여, 주공이여! 소공이여, 소공이여! 태공이여, 태공이여!” 

-> p414 창昌이 닳아 발發이 나왔으니, 아침마다 저녁마다 바라고 바랍니다. 

쉽게 말해 “장인어른, 신발 한 켤레만!” / 퀴즈의 수준이 꽤 높다. 

이것을 풀어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근데 나 혼자 하라면 죽어도 못하겠다. 참 어렵게도 말했다. 


<장님의 단청 구경>

p422 겉으로 드러난 진술은 의도를 감추기 위한 사탕발림이다. 표면적 의미에만 집착해서는 이 시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 표면 진술과 실질 의미 사이에 의도적인 괴리가 조성되어 있어 언어적 아이러니가 발생한다.독자의 연상능력을 자극하여 말장난을 깨닫게 유도함으로써 지적 쾌감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견우와 소도둑>

p423 앞서 본 예화들은 모두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언어를 구사하는 재치와 기지가 반짝인다. 시와 말장난은 엄격히 다르지만, 언어를 주된 질료로 삼는 시는 본질적으로 얼마간 유희적 기분을 띠게 마련이다. 특히 음이 같은 말이나 뜻이 여럿인 표현을 활용한 쌍관, 즉 말장난pun은 현대시에서도 흔히 보는 기교다. 말장난은 한신에도 빈번하게 애용되었다. 

말장난이라니. 시인이 재치와 유머까지 겸비했다니 더 매력적이다. 하긴 글자, 단어로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표현했으니 말장난이 뭐 어려웠겠는가. 


p424 범증이 앞서 옥결을 세 번씩이나 들어 보인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결抉’은 ‘결決’과 음이 같다. 어서 결단을 내려 유방을 죽이라고 신호한 것이다. 뒷날 항우는 유방의 사면초가 포위에 걸려 제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고 말았다. 


p425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니옵거늘 / 낭군이 어이해 견우시리오. 

견우牽牛는 글자 그대로 풀면 ‘소를 끌다’, 즉 소를 끌고 간 도둑이란 말이다. 자신이 직녀가 아닌데 어떻게 낭군이 견우가 될 수 있느냐고 말해, 남편이 결코 소를 훔치지 않았다는 뜻을 대신했다. 그 재치가 놀랍고 뛰어나다. 이 시를 본 태수가 기특하게 여겨 그 사람을 즉시 풀어주었다. 


p427 수양버들 파릇파릇/ 강물은 넘실넘실/ 강 위에선 그 임의 노랫소리 들리네./ 동족엔 해가 나고 서쪽에는 비 오니/ 흐렷나 하고 보면 어느새 개었구나. 


한시에서 쌍관의란 이렇듯 하나의 글자가 동음이나 다의에 의해 한 가지 이상의 뜻을 함축하게 되는 경우를 이른다. 이러한 쌍관의의 활용은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상 한시에서 매우 빈번하게 활용된다. 


p428 가을의 긴 호수에 옥 같은 물 흐르는데/ 연꽃 깊은 곳에 목란배를 매어뒀지./ 임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 남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했네/ 

3구의 ‘연자’는 연밥 곧 연곷의 열매를 뜻한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 ‘연자’는 ‘련자’ 즉 ‘그대를 사랑한다’는 속뜻을 담아 사랑의 고백이 되었다. 그녀가 물 건너로 던진 것은 그저 심상한 연밥이 아니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랑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p434 까마귀가 ‘고악고악’하고 운다. 고악은 뜻으로 풀면 ‘시어머니 나빠요’가 된다. / 그렇다면 저 새는 왜 ‘부곡부곡’하고 우나요? 부곡은 ‘며느리가 잘못했다’는 의미다. 말장난의 재치가 돋보인다. 모두 쌍관의 묘미를 활용하고 있는 예들이다. 

이 부분에서 새삼 저자가 자료를 어떻게 잘 모아 이렇게 잘 나눴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됐다. 열심히 배워야 할 자세이다. 


p435 둥지를 짓지 않은 까마귀는 북풍한설을 만나고서야 집 귀한 줄 알고 ‘가옥가옥’ 울고, 제가 지은 둥지를 남에게 빼앗긴 까치는 그것이 부끄러워 ‘가치가치’하며 우짖는다. 귀뚜라미는 ‘실실실실’ 울며 국권의 상실을 슬퍼한다. 나라 잃은 슬픔과 치욕에 대한 암유이다. 남산의 부엉이도 다시 일어서자는 다짐으로 ‘부흥부흥’울고, 속독새는 한밤중에도 자지 않고 빨리빨리 잃은 국권을 회복하자고 ‘속속속속’ 운다. 경칩을 만나 몸을 푼 개구리마저 그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개개개개’ 울어대니, 진정 겨레의 독립은 요원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셈이다. 


<선덕여왕의 자격지심>

p436 ‘선덩왕지기삼사’란 항목이 있다. 

당 태종이 붉은빛과 자줏빛, 그리고 흰빛 등 세 가지 빛깔의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 서 되를 신라로 보내왔다. 여왕이 그림을 보고 말했다. “이 꽃은 필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꽃이 피자 과연 향기가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여왕이 대답했다. “꽃만 그리고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음을 알았다. 이는 당나라 황제가 내가 혼자 사는 것을 놀린 것이다.” 


p438 제비꽃은 무슨 뜻일까? 제비꽃은 꽃대가 국자처럼 안쪽으로 굽었다. 한자로는 여의초다. 여의는 중국 사람들이 지금도 흔히 탁자 위에 장식용으로 얹어두곤 하는 물건이다. 여의가 꼭 제비꽃의 꽃대와 같게 생겼다. 그러니까 그림에 제비꽃을 그려 넣는 것은 여의, 즉 ‘뜻대로 이루시라’는 의미를 담았다. 


p440 인사동 거리를 지나다 보면 흔히 표범을 그려놓고 그 배경에 소나무와 까치를 그린 민화를 자주 보게 된다. 일종의 세화로서 정월에 대문 앞에 붙인다. 반드시 표범이라야 하는데, 슬며시 호랑이로 마꿔 그린 것이 많다. 이름마저 작호도라 한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호랑이와 까치를 친근하게 여겨왔고 운운하는 설명이 친절하게 붙어 있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표범과 소나무와 까치는 상황을 상징하는 하나의 코드일 뿐이다. 표범을 나타내는 한자 ‘표’는 ‘빠오’로 읽히니, 알린다는 뜻의 ‘보’와 발음이 같다. 까치는 ‘희작’이라 하여 ‘기쁜 소식’을 상징한다 까치와 표범이 합쳐져야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문장을 이룬다. 


p442 이상 몇 가지 예시는 사물에 언어를 결합하여 쌍관할 줄 알았던 선인들의 예술정신이 낳은 상징의 함축을 잘 보여준다. 

정리해주는 부분이 있어 많은 분량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기억에 잘 머물 수 있어 좋다. 


  • 열일곱 번째 이야기: 해체의 시학 _ 파격시의 세계

<요로원의 두 선비>

p445 육담풍월은 한시처럼 다섯 자 또는 일곱 자의 시를 짓되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짓는 문자 유희의 한 종류다. 


p446  내가 서울 ‘것’을 살피어보니 / 과연 거동이 ‘되’도다/ 대저 인물을 ‘꾸’었다지만/ 의관을 ‘꾸민’ 것에 불과하도다. 

‘시골내기’를 우습게 보다가 ‘서울 것’이 된통 당한 형국이다. 순발력과 재치가 놀랍다. 


p448 <<요로원야화기>>는 갖은 시체를 놓고 두 선비가 각축을 벌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거들먹러리는 서울 것을 압도할 만큼의 시재를 지녔으면서도 정작 시골내기는 청운의 벼슬길에 명함 한번 내밀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전전하는 여관마다 천덕꾸러기 신세였을 뿐이다. 모처럼 서울 것 하나가 제대로 걸려 분풀이는 했지만, 뒷맛은 여전히 씁쓸하다. 

<눈물이 석 줄>

p448~449 희작화의 경향은 이 시기에 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예전에도 말장난을 위주로 한 희작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요로원야화기>>에서부터 김삿갓의 시에 이르는 희작시들이 집단적 양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수신화>>란 책에 실려 있는 17자 시는 그런 예 가운데 하나다. 제목 그대로 이 책에는 졸음을 막아주는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말하자면 당대의 개그 소화집이다. 17자 시는 세 수의 연작이다. 

p450 두 사람이 석 줄의 눈물을 흘렸다 함은 무슨 뜻인가? 선비의 장인이 애꾸였던 것이다. 


<김삿갓은 없다>

p453 원문과 풀이의 첩어 부분을 대조해보면 절묘한 말장난의 정체가 드러난다. ‘웅웅’은 ‘곰곰’, ‘궁궁’은 ‘활활’로 읽는다. ‘봉봉’이 ‘벌벌’로, ‘시시’가 ‘살살’이 된다. 말장난을 이쯤 하려면 전부터 쌓인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 김삿갓의 부고장이 극단에까지 이른 양상이다. 김삿갓은 없다. 세간에 그의 시로 일컬어지는 시는 김삿갓이 아니고 누가 이런 시를 지으랴 싶은 것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 극단적으로 말해 김삿갓의 시는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불특정 다수의 희작시들이 모두 그의 이름 아래 한데 모인 것일 뿐이다. 


p455 사람이 사람 집에 왔는데 사람대접 않으니/ 주인의 인사가 사람 되기 어렵도다.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이다. 사람되야지.

p456 내가 세상의 ‘시옷’을 보니/ 시비가 ‘미음’에 달려 있더라./ 집에 돌아가 ‘리을’을 닦게/ 안 그러면 ‘디귿’에 점 찍으리. 

점점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이다. 다시 보니 시옷은 ‘인人’, 미음은 ‘구口’ 리을은 ‘기己’자다. 디귿 위에 점 찍으면 망할 ‘망亡’자가 된다. 이렇게 풀어놓고 다시 시를 읽으니 이렇게 된다. 

내가 세상 ‘사람’을 보니 / 시비가 ‘입’에 달려 있더라./ 집에 돌아가 ‘몸’을 닭아라/ 그러지 않으면 ‘망’하게 되리.

경망한 선비에게는 살아 있는 교훈이 아닌가. 장난의 수준이 장난이 아니다.


<슬픈 웃음, 해체의 시학>

p459 김삿갓의 시 중 7구 : 온갖 일 내 마음대로 함만 못하니  


p462 우스운 것 앞에서 뜻밖에 진지해지고, 진지한 것을 단번에 희화화해버리는 시인의 희극적 태도는 한마디로 세상을 우습게 보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p465 대체로 김삿갓의 장난 시를 읽을 때마다 필자가 느끼는 감정은 서글픔과 씁쓸함이다. 경국제세의 포부를 품고 배우고 익힌 학문과 지식을 고작 이깟 희학질에 썼더란 말인가? 그인들 이런 시를 짓고 싶었겠는가. 그에게 이런 장난질에 몰두하게끔 강요한 현실이 역으로 희대의 민중시인을 낳았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의 시에 이나 벼룩, 욕설과 섹스 등 비시적 대상의 시화가 지배적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록 조부의 훼절에 말미암은 개인적 연유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하나, 김삿갓의 시정신은 당대 조선 사회가 처했던 제반 역사 환경의 변모에 의해 안받침되어 사회적 성격을 부여받는다. 시는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인 까닭이다. 

p467  과체시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과거에서 요구하는, 형식이 지극히 까다로운 시체이다. 김삿갓이 장난질의 와중에 그많은 과체시를 남겼다면 그 속에 담긴 뜻은 무엇이었을까? 나도 마음만 먹으면 체제가 요구하는 교과서적인 시 쓰기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항의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그의 웃음은 슬프다. 그 슬픈 웃음의 뒤안길은 외면한 채, 자꾸 가십적인 살을 붙여 그를 봉이 김선달류의 ‘비천한 재담가’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악취미다. 


<한시 최후의 광경>

p467 이러한 희작시들은 전통적 미학과 기존 가치의 규범을 과감히 해체한다. 언어가 힘을 잃은 시대의 표정을 맨 얼굴로 전달한다. 욕설과 비아냥거림, 딴전과 엇박자 등 시의 문법을 파괴하는 폭력이 난무한다. 이들은 형식을 파괴하며 가치를 재배치한다. 

p469 육담풍월의 파격시도 어느 순간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집적 속에서 차츰 차츰 이루어졌다. 이러한 한시 양식의 해체는 아예 한글로 한시를 짓는 이른바 ‘언문풍월’로까지 발전한다. 언문풍월은 예전 궁녀들이 한시의 작법을 응용하여 나름의 규칙을 ㅔㅅ워 시를 짓던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다. 

p470 언문풍월이 본격적으로 창작된 것은 개화기에 와서다. 1900년대에는 심지어 시조문학과 경쟁관계를 유지할 만큼 기세를 떨쳤다. 

p472 의식의 변화는 내용의 변모를 부른다. 내용만으로 의식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할 때 형식이 변한다. 기존 한시의 굳건한 문법은 개화기의 발랄한 실험정신 아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체의 양식들을 선보였다. 다만 그것이 치열한 시정신에 의해 안받침되지 못한 결과 새로운 형식들은 일과성의 장난기에 그치고 말았다.하지만 이러한 실 들이 시사하는 의미는 험대단히 심장하다. 오늘의 시단에서도 새로운 담론과 말하기 방식에 대한 모색은 활발히 계속된다. 


*열여덟 번째 이야기 : 바라봄의 시학 _ 관물론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p475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해를 피해 나아가는 쪽이다. 배는 어느 쪽인가? 바닥에 닿는 쪽이다. 성호 이익의 <<관물편>>에 보인다. 성호의 관찰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칠규, 오장을 갖추지 못한 지렁이도 제 몸의 해를 피해 이로움을 향해 나아갈 줄 안다. 그런데 사람 중에는 패망이 뻔히 모이는데도 눈 뜨고 그 길을 가서 제 몸을 망치고 일을 그르치는 이가 있다. 지렁이만도 못하다. 


p476 궁벽한 곳에서 피어난 꽃이 빈 들판 위로 향기를 날려 보낸다. 그 짙은 향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간혹 들늙은이가 산책 길에 그 향기와 만나 기뻐할 뿐이다. 꽃이 향기를 내는 것은 꽃의 본색에 불과하다. 빈 들판에 날려 흩어지는 것도 정해진 운명이 아니겠는가. 꽃은 누가 알아주고 말고를 개의치 않고 향기를 낼 뿐이다. 인간이 한세상을 살다가 가는 것도 이와 다를 게 없다. 


p477 어떤 이가 야생 거위를 길렀다. 불에 익힌 음식을 많이 주자 거위가 뚱뚱해져서 못 날았다. 그 뒤 문득 음식을 먹지 않았다. 사람이 병이 났다고 생각하고 먹을 것을 더 많이 주었다. 그런데도 먹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몸이 가벼워지자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옹이 이를 듣고 말하였다. 지혜롭구나. 스스로를 잘 지켰도다. (와! 탄성이 절로 나오는 부분이다. 건강을 위해서 다이어트 하겠다고 결심해놓고 꾸역꾸역 먹고 있는 나를 반성하게 된다. 거위의 지혜로움에서 배우게 되다니 놀라는 중이다.)

열흘 넘게 굶은 거위는 탐욕을 버리는 대신 자신을 잘 지켰다. 

내가 나를 지키려면 어떤 일은 실천해야하는가? 깊게 생각해 볼 문제다 


p477 개구리의 빠름이 해를 멀리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도 마침내 다른 놈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뜻이 게을러서다. 재앙과 근심이 닥치는 것은 흔히 이만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내마음을 마구마구 무찔른다. ‘이만하면 되겠지.’란 마음으로 살았던 지난날과 만났다. 개굴개굴


p478 나빙, <오서도> 개구리는 벼랑에 매달린 거미를 노리고, 뱀은 개구리를 향해 간다. 거미는 또 제 그물에 걸릴 벌레를 기다린다. 세상 이치가 참 묘하다. 


p479 마치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병통을 맥 짚어 진단하는 말인 것만 같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리는 한국인의 조급성을 개구리의 섣부른 자만에 견주었다. 

<<관물편>>은 사물을 살펴 지혜를 얻는 격물치지 정신의 실천이었다.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p482 이인문 <관수도> 지팡이 짚고 서서 물을 바라본다. 쉼 없이 흘러가는 저 물처럼 내 삶도 정체되지 않기를. 


p483 소동파가 <적벽부>에서 말했다. “장차 변하는 것을 기준으로 본다면 천지는 일찍이 한순간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변치 않는 것을 통해 본다면 물과 아가 모두 다함이 없다.” 젊은 날 성취를 향한 집착과 작위하고 경영하던 마음을 훌훌 던져버리고, 자연의 변화에 몸을 맡겨 다만 일신의 한적을 추구할 뿐이다. 청산을 말이 없으니 그를 보며 묵어의 마음을 배운다. 도학자의 구김 없는 마음자리가 잘 펼쳐져 있다. 낙천지명의 높은 경지다. 활연한 탈속의 경계를 맛보게 한다. 


p485 정민, 이언적의 독락당 별채인 계정 (사진) 

저 계정의 난간에 앉아서 그는 늘 푸른 산비에 눈을 씻고, 맑은 냇물에 마음을 헹궈냈다. 


p486 무릇 관물이라 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지 않고 이치로써 보는 것이다. 천하 사물은 이치를 담지 않은 것이 없고, 성이나 명이 없는 것이 없다. 


<생동하는 봄풀의 뜻>

p487 만물은 일정함 없이 형세에 따라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한다. 덩달아 마음마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 사람이 못 쓰게 된다. 마음의 본바탕을 굳게 지켜 거죽으로 드러나는 형상에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 겠다. 위엄으로 누르고 덕으로 향기를 뿜어 일체의 작위함을 벗어 던진다.말을  잊고 이끼 가득한 작은 뜰을 관찰한다. 누가 심은 것도 아닌데 저절로 마당을 덮은 이끼.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도 다를 게 없다. 

p488 결국 마음 공부는 언뜻 보아 다른 듯이 보이는 현상 속에 내재된 한 가지 이치를 수시로 자기 점검함으로써 외물에 현혹되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p490 고상안의 <관물음> 

오늘 잠시 승진했다 하여 기뻐할 것도 없고, 또 좌천되어 한직으로 밀려났다 해서 실망할 일도 아니다. 이래서 좋으면 저래서 나쁘고, 저래서 미쁘면 이래서 언짢으니, 군자는 의연하게 제자리에 지켜 서서 변화의 기미를 보아 몸을 맡길 뿐이다. 단순히 새옹지마의 자기 위안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유아지경과 무아지경>

p491 유아지경은 시인의 주관 감정이 객관 물태에 스며 강렬한 주관의 색채를 띠는 경우다. 무아지경은 시인의 주관 정서가 전혀 듣러나지 않은 채 물아가 하나가 되어 피아의 구별이 무너진 상태다.


p498 박지원이 <능양시집서>에서 한 말이다. 달사의 관물은 보지 않고도 보는 이물관물, 이리관물인데, 속인의 관물은 직접 눈으로 본 것만 전부로 아는 이아관물에 머문다. 달사와 속인을 가르는 경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이다. 


p499 깨달음은 결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아무렇게나 열리지 않는다. 손끝이 갈라지는 연습 없이, 그저 기타 들고 동해 바닷가에 서 있다고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은 순식간에 변해버린다. 차원이 달라진다. 속인과 달사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상 살펴본 관물론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 된다.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마주치면서도 그저 지나치는 일상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한 사물과 낯설게 만나, 그 낯섦으로 그 사물을 새롭게 만나는 것, 이것이 관물론이 시학과 만나는 접점이다. / 히드라의 예민한 촉수와 같이 안테나를 세워 세계와 교신할 수 있어야 한다. 탄성계수를 유지하지 못하는 관물은 관물이 아니다. 그것은 견물일 뿐이다. 여기에 무슨 생의로움이 있겠는가. 눈앞 사물과의 설레는 만남, 세계와 줄다리기하는 팽팽한 긴장이 없이 좋은 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인은 반란자다. 그의 눈이 포착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다. 


  • 열아홉 번재 이야기 : 깨달음의 바다 _ 선시 

<산은 산, 물은 물>

p504 선은 분별지를 마음에서 걷어내는 것이다. 명상, 즉 생각을 잠재우고, 묵상, 곧 생각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그때 남는 것은 마음뿐이다. 선은 마음을 텅 비워 본래의 나와 만나는 순간이다. 명상이란 뜻을 지닌 범어의 ‘Dhyana’를 선으로 옮겼다. 정려 또는 사유수로도 옮긴다. 다시 말해 선은 생각을 걷어내는 마음 공부다. 근심과 기쁨을 마음에서 걷어내는 것이 바로 선이다. 

p508 이렇듯 말 같지 않은 소리만 골라서 하는 까닭은 단 하나다.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머리로 따져 알려 들지 말고 가슴으로 느껴 직지인심 견성성불 하라는 말이다. 굳이 마롤 하자면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일러주는 중이니 섣불리 사변의 잣대를 들이댈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는 우격다짐이다. 


<선기와 시취>

p511  말로 일러주면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고, 이치로 설명하면 이로에서 길 잃고 헤맨다. 그러니 언어로 설명하기를 포기하겠다는 것이 불립문자요, 알아들을 놈만 알아들으래서 교외별전이다. 선의 사유와 시의 방법은 이 지점에서 서로 만난다. 

p515 인생의 목숨이란 물거품과 같거니/ 여든 몇 해 생애가 봄 꿈속과 한가질세. / 지금에 죽음 임해 가죽자루 내던지니/ 한 덩이 붉은 해가 서산에 지는구나/ 

인생은 물거품이요 한바탕 봄꿈이다. 성가신 가죽 부대를 벗어던 지니 속이 다 후련하다. 그 뒤엔 무엇이 남는가. 붉은 해가 서산에 진다. 슬프고 안타까울 일이 하나도 없다. 이렇듯 선시의 세계는 칼끝 같은 깨달음을 노래한다. 언어가 무력화되고 의미가 힘을 잃는다. 


p517 상추꽃 핀/ 아침/ 자벌레가/ 기어가는/ 지구 안쪽이/ 자꾸만/ 간지럽다

말 없이 가운데 마음을 흐르게 하는 일, 선은 시인에게 이러한 심법을 일깨워준다. 

<설선작시, 본무차별>

p520 이것을 묻는데 저것을 대답한다. 알듯 말듯 묘한 말씀이다. 따져서 알려 들지 말라. 그냥 그대로 숨 쉬듯 느껴라. 무슨 말이냐고 묻지 말라. / 

학시와 학선은 원리가 같다. 누가 오래 시를 썼고, 누가 더 도를 닦았느냐는 조금도 중요하지가 않다. 시쳇말로 짬밥수를 따지지 말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자가의 요득, 즉 한 소식을 깨쳤느냐 깨치지 못했느냐에 달렸다. 깨닫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거칠 것이 없다. 그냥 되는 대로 읊조려도 절창 아닌 것이 없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부처님의 설법 아닌 것이 없다. 


p523 옛사람의 길을 따르지 말라. 너는 너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선에 도달하고 시를 깨달을 뿐이다. 남의 흉내로는 안 된다. 안목 없는 세상은 자꾸만 옛길을 따라오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요한다. 좋은 시는 끊임없는 반란의 산물이어야 한다. 친숙한 관습과의 결별, 익숙해진 접점에서 벗어나기를 쉼 없이 추구해야 한다. 


<거문고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p524 숲속에 천 년 묵은 나무가 있다. 나무꾼의 도끼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옹이가 많이 져서 재목으로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여관집의 울지 않는 거위는 쓸모가 없다 하여 목숨을 잃었다. 둘 다 쓸모없기는 매일반인데 하나는 그로 인해 수명을 연장하였고, 하나는 그 때문에 명을 재촉하였다. 자! 그대는 어디에 처하겠는가? <<장자>>에 나오는 얘기다. 장자는 망설임 없이 그 중간에 처하겠다고 한다. 중간은 어디인가? 


p528 선의 화두가 그러하듯이, 좋은 시는 타성에 젖은 뒤통수를 후려친다. 그러고 보면 문자로도 세울 수 없는 깨달음은 큰 깨달음이랄수도 없겠다. 고려 때 혜심의 설날 법어에 이런 것이 있다. “아이는 한 살 더 먹기를 바라고, 늙은이는 한 살 더 줄기를 바랄 것이다. 누가 한 해라는 시간을 정해놓았더냐. 차라리 한 해라는 시간을 없애버림은 어떨고?” 통쾌하지 않은가. 


  • 스무 번째 이야기 : 산과 물의 깊은 뜻 _ 산수시

<가짜 어옹과 뻐꾸기 은사>

p532 이명욱 <어옹한유도>, 대숲 우거진 물가에 배를 댄다. 지나고 보니 참 험한 세월이었다. 이 조찰한 물가에서 내 잠시 몸을 뉘었다 가리라. 


p533 어지러운 세상을 더러벡 보고 강호로 숨으려는 열망은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들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구두선이다. 오죽하면 예 시조에서 실천 없는 귀거래에 대한 열망을 이렇게 비꼬았겠는가 

귀거래 귀거래 한들 물러간 이 그 누구며/ 공명이 부운인 줄 사람마다 알건마는/ 세상에 꿈 깬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청산에 살으리랏다>

p537 이렇듯 자연은 우리에게 떳떳한 삶의 모습을 일깨워준다. 일상에 찌들어 생기를 잃고 풀이 죽어 있을 때, 자연은 인간에게 소생의 원기를 불어넣어준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대의 고금을 떠나서 자연이 예술의 변함 없는 경배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연이 아무나 자신의 품에 끌어안는 것은 아니다. 


<요산요수의 변>

p538 공자가 <<논어>>에서 말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 / 주자의 풀이 :  “지헤로운 사람은 사리에 통달하여 두루 통해 막힘 없는 것이 물과 같으므로 물을 좋아한다. 어진 사람은 의리에 편안하여 중후하여 옮기지 않는 것이 산과 같기에 산을 좋아한다. 


p540 정선 <대좌관폭> 고려대 박물관

여보게! 저 폭포 좀 보아. 겁도 없이 제 몸을 내던지네그려. 우리는 너무 비겁하게 살았어. 아등바등 전전긍긍 설설 기며 살았어. 

p541 산이 나오고 물이 나온다고 다 산수시가 아니다. 산수와 인간이 만나 나누는 교감이 있어야 한다. 산수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산수 쪽으로 향해 가서 어느덧 물아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는 동화가 있어야 한다. 


<들늙은이의 말>

p546 집구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시에서 한 구절씩 따와서 조립해 만든 시다. 

p547 십 년을 더 늙어도 담백히 지내리니/ 벗의 손을 잡고서 시를 퇴고하리라 


<가을 구름이 내 정수리를 어루만지네>

p550 옛사람의 문집을 뒤적이다 보면 뜻밖에 많은 산수유기와 만나게 된다. 유기는 산수를 향한 고인의 진지한 열정의 산물이다. 여기에는 자연 앞에 선 외경이 있고, 인간의 왜소를 돌아보는 겸허가 있다. 이제 산수유기는 고작 수필의 대접밖에 못 받아 설 자리를 잃고, 연구자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구도자의 심경이 되어 산수 간을 노닐던 고인들의 그 시원스런 정신의 경계도 다시 만날 길이 없어 안타깝다. 


p553 달빛 아래 담소의 광경이 꿈속같이 아련하다. 

p554 꽃 아래서 향을 사르고 차 마시는 데 과일을 두는 격이라 하겠다. 


  •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실낙원의 박 _ 유선시

<풀잎 끝에 맺힌 이슬> 

 p557 인간에 낙원은 있는가? 낙원은 없다. 따지고 보면 인생은 절망과 비탄의 연속일 뿐이다. 믿었던 것들로부터 배반당하고, 사랑하던 사람마저 하나 둘 떠나보낸 후 빈 들녘을 혼자 헤매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뒤돌아보면 뜻대로 된 일은 하나도 없다. 


사는 해 백 년을 못 채우건만/ 언제나 천 년 근심 품고 사누나. 

이 구절은 메모해 놓고 봐야겠다. 근심 걱정 한다고 해결될 일 없건마는, 천 년 근심을 품고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왠지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일생 동안 살얼음을 밟는 듯했지/ 속 타는 맘 그 누가 알아주겠나. 


p559 전날의 고인은 볼 수가 없고/ 장차 올 뒷사람도 보지 못하네. / 천지의 아득함 생각노라니/ 나 홀로 구슬퍼 눈물 흐른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눈앞의 상황에 매여 일희일비하는 가벼운 슬픔이 아니다. ‘위대한 고독감’이라는 헌사를 바친 이런 시들에는 인생을 향한 깊은 과조와 달관이 있다. 


<닫힌 세계 속의 열린 꿈> 제목에서 감탄을 먼저 하고 읽었다. 

p559 현실의 억압은 개체의 삶을 질식시킨다. 인간은 닫힌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반란을 꿈꾼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어떤 갈등도 없으며 모든 것이 조화롭고 충만한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인생은 그렇듯이 슬프고, 인간은 그렇듯이 나약한 존재인가? 삶의 짙은 회의 속에서 시인들은 무의식의 저편에 저장된 언젠가 떠나온 곳, 잃어버린 낙원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모든 것이 완벽한 꿈의 세계이다. 

p560 유선시는 고대인이 꿈꾼 상상의 세계를 노래한다. 


<구운몽, 적선의 노래>

p567 <<구운몽>>은 ‘신선 세계를 향한 꿈’을 노래한 작품이다. 유선적 상상력이 빚어낸 도교적 깨달음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 


<아카로스의 날개>

p574 그러나 꿈은 깨게 마련이고, 자아는 결국 변한 것 없는 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자아는 몽중 유선의 과정에서 더욱 확대된 세계와의 괴리 앞에 다시 직면한다. 탈출은 좌절의 새삼스런 확인일 뿐이어서 현시로가의 불화나 첨예한 긴장 상태를 해결할 어떤 대안도 마련해주지 못한다. 

p576 인간에 낙원은 있는가? 낙원은 없다. 

선계로의 비상은 이카로스의 날개를 연상시킨다.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는 꿈을 꿀 수가 있다. 문학이 다만 실천의 도구일 때, 사회는 꿈을 꿀 자리를 잃어버린다. 꿈이 없을 때 사회 개조는 있을 수 없다.” 


  • 스물두 번재 이야기 : 시와 역사 _ 시사와 사시

<할아버지와 손자>

p579 희둥이 앞서가고 누렁이 따라가니/ 들밭 풀 주변에는 무덤들 늘어섰네/ 제사 마친 늙은이는 밭 사이로 난 길에서/ 손자의 부축 받고 취하여 돌아오네. 

시인은 시치미를 뚝 뗐지만 소년의 아버지야 말로 바로 두 사람이 제사지낸 무덤의 주인공이었다.

p580 짦은 시 속에 함축이 매우 깊다. 시인은 임진왜란으로 이 땅에서 벌어진 죽음의 참상을 남의 애기 하듯 장면으로 포착한다. 슬픔은 간접화되고 전쟁의 체험도 배경으로 숨는다.오히려  인생무상의 주제를 떠올리기 십상인 이 시는 그럼에도 깊은 아픔을 내재한다. 


p582 “곡할 이나 있다면 덜 슬픕지요. / 칼날 아래 온 집안이 죄다 죽어서/ 곡할 이도 없는 집이 얼마인뎁쇼.” 

그나마 곡할 이라도 있는 집은 다행이라는 늙은 아전의 넋두리는 당시 전장의 참혹상을 바로 눈앞의 일처럼 그려 보인다. 

권벽은 임진왜란 당시 73세의 노구를 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그는 결코 시 원고 뭉치가 든 상자만은 버리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노령의 피난길에서도 128수에 달하는 시를 일기 쓰듯 남겨 당시 피난길의 고초와 시시각가으로 변하는 전황을 세밀하게 기록했다는 점이다. 

p583 이럴 때 시는 당당히 역사가 된다. 


<시로 쓴 역사, 시사>

p583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p587 “다 같은 백성인데 어찌 이리 불공평한가”

백골징포는 죽은 사람의 사망신고를 받아주지 않고, 산사람에게 청구하듯 군포를 계속 받는 것이다. 황구첨정은 출생신고를 갓 마친 아이에게 징집통지서를 보내는 것이다. 눈도 뜨지 못한 핏덩이더러 빨리 입대하든지 군포를 내라고 아료를 부린다. 집안에 장정이라곤 남편 하나뿐인데 돌아가신 아버지와 난 지 사흘밖에 안 된 핏덩이의 군포를 독촉하다 이정은 목숨보다 중한 소를 끌고 가버렸다. 눈이 뒤집힌 가장은 칼을 뽑아 이정을 찌르지도 못하고 애꿏은 자신의 남근을 자르고 말았던 것이다. 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애가 끓고 분노가 일어난다. 내가 만약 그 상황이라면 난 어떻게 했을까. 그냥 가만히 울분을 참고 있었을까. 답답하다. 


<변새의 풍광>

p591 일손이 없어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세금은 더욱 가혹해진다.이  끝도 없는 악순환 속에 청해의 찬 호숫가에는 거두는 손길 없는 해골만 늘어간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눈물이 난다.)


<궁사, 한숨으로 짠 역사>

p593 제량 시기 이래로 시인들은 궁녀의 생활과 정감을 제재로 한 궁사를 많이 창작했다. 군왕에게 총애를 잃은 후궁들의 원망과 하소연이 주된 내용이다. 

p599 전송암 <맹강녀묘> 20세기. 산해관 맹강녀묘에서 바라몬 만리장성의 풍경이다. 가파른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인간의 탐욕이 슬프다. 


p600 멀리서 쿵쿵대며 수레가 달려온다. 그녀들은 혹시 ‘오늘은’ 하는 마음에 가슴이 콩콩 뛴다. 수레 소리를 그저 멀이지고 ‘오늘도’ 하는 탄식에 날이 저문다. 그런 세월이 36년이다. 그녀들의 꽃다움은 이제 찾을 길이 없다. 

p601 역사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돈다. 누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할 수 있으랴. 시인들이 지나간 역사의 거울에 현재를 비춰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p602 시인은 맥없이 옛일을 들추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 속에서 현재를 바랄보는 우회 통로를 찾고 있다. / 시의 정서는 이념과는 상관없다. 

p603 역사란 무엇인가? 현재의 퇴적일 뿐이다. 지금 시대의 자취를 일러 후세는 옛날이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지나간 엣날에 얽매일 필요가 없겠다.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것이 곧 옛날이다. 시사는 시인의 충실한 증언이 뒷날의 역사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사시는 시인이 과거의 거울에 비춰 현재를 읽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어제의 태양은 오늘도 그대로 뜬다. 지나간 역사가 오늘을 비추는 등불인 까닭이다. 


  • 스물세 번째 이야기 : 사랑이 어떻더냐 _ 정시 

<담장 가의 발자국>

p607 사랑은 아름답다. 슬퍼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슬프다. 평소 하시를 고리타분하게만 생각하던 이도 사랑을 노래한 정시를 읽고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곤한다. 

p608 꽃 지는 뒤뜰에 봄잠이 달콤한데

규방 아가씨의 구김 없는 봄 마음을 담았다. / 비단 이불을 다시 덮자 다시 잠이 쏟아진다. 꽃 지는 뒤뜰, 아무 간섭 없는 봄잠이 참 달다. 


<야릇한 마음>

p611 청춘의 감정은 출렁이는 물결 같다. 가둘수록 더 거세진다. 이를 굳이 가라앉히려는 노력은 부질없는 짓이다. 감정을 누르려는 집착이 또 하나의 미망을 낳는다. 

p612 흰 모시 적삼에 눈썹 곱게 그리고서 / 마음속 정 둔 얘기 재잘재잘 얘기하네. /임이여 내 나이를 묻지 말아주오/ 50년 전에는 스물셋이었다오.

반전 드라마다. 웃음이 풉 나왔다. 이런 감상을 써도 될까? 크크큭 웃음이 난다. 


p614 모란꽃 진주 같은 이슬을 머금으니/ 미인이 그 꽃 꺾어 창가를 지나간다. / 방긋이 웃으면서 임께 하는 말/ “꽃이 어여쁜가요. 제가 어여쁜가요? / 신랑은 일부러 장난치느라/ “당신보다 꽃이 훨씬 어여쁘구려.”/ 그 말에 미인은 뾰로통해서/ 꽃가지 내던져 짓뭉개더니, / “꽃이 진정 저보다 좋으시거든/ 오늘 밤은 꽃과 함께 주무시구려.” 

괜히 내 얼굴이 붉어진다. “꽃이 어여쁜가요. 제가 어여쁜가요?” 하는 거 보면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뾰로통한 미인이 꽃가지를 짓뭉갰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으면서 웃음도 자아내고 진심이 묻어난다. 마구 밟으며 톡 쏘는 그 모습이 괜시리 내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p615  제 마음 일편단심 대나무 같고/ 임의 마음 둥그런 달과 같아요./ 둥근 달은 찼다가도 기운다지만/ 대 뿌리는 얼키설키 서려 있지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임의 마음을 잡아두려는 여인의 마음을 애교 있게 펼쳤다. 


<진 꽃잎 볼 적마다>

 p619 만날 길 없어 밤마다 꿈길로 찾아 나선다. 이것이 사랑이다. 어렵사리 임을 만나 놀랍고 두근거려 꿈을 깬다. 이것은 그리움이다. 


<까치가 우는 아침>

p621 슬하에 아이는 말을 갓 배우겠고/ 부엌의 늙은 종은 양식이 없다겠지./ 정원엔 황량하게 가을 풀이 돋았겠고/ 날로 여윌 그 모습이 눈에 선히 본 듯하오. 

눈물 나는 시다. 가슴이 시리다. 야윈 아내의 가냘픈 모습이 겹쳐 견딜 수 없을 시인의 마음이 애처롭다. 


p625 한시에서 사랑의 노래는 기쁨의 구가는 적고 가라앉은 슬픔이 많다. 정서란 애초에 모든 것이 충족된 속에서 터져 나오는 법이 없다. 소중한 ‘무엇’ 밖에 놓여 있다는 생각, 안겨야 할 ‘어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마음에서 정서는 비로소 움터 나온다. 


  • 스물네 번째 이야기 :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_ 상동구이론

<동서양의 수법 차이>

p629 직접 말하지 않는다. 다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지를 세워 대신 말한다. 현대시도 같다. 현대시와 한시는 여러 모로 참 닮았다. 

p630 이백은 <산중문답>의 1,2구에서 “날더러 무슨 일로 산에 사냐 묻기에, 웃고 대답아니해도 마음 절로 한가하다.”고 노래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밋하다. 


<한시와 모더니즘>

<지훈과 목월의 거리>

p640 한시도 지을 줄 알았고 에스러운 표현을 즐겨 쓴 조지훈의 시보다 박목월의 시가 한시의 기맥에 더 가닿았다. 사실 청록파 세 사람 중에 하시의 정서에 가장 밀착되어 있는 시인이 박목월이다. 


<밤비와 아내 생각>

p643 조운의 시조 <아내에게> 새로 바른 창을 닫고 수수들을 까는 저녁/ 요 빗소리를 철장에서 또 듣나니/ 언제나 등잔불 돋우면서 이런 이약 할까요. 

못견디게 울컥한 그리움을 ‘또’라는 한글자에 농축했다. 

p644 낯선 땅에서 아내의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내게 언제나 돌아오려는가고 묻는다. 나는 해줄 대답이 없다. 가을 빗소리는 천지를 덮을 듯 밤새 그칠 줄 모른다. 못물은 불어 넘쳐흐를 기세다. 이 밤 나는 머리가 셀 듯한 그리움에 못물 같은 마음을 부여잡고 지붕을 때리는 밤 빗소리를 듣고 있다. / 앞서의 시조를 지은 조운은 이 시를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평소 간절하게 느껴 애송하던 한시 한 수가 철창에서 듣는 밋소리를 타고 흘러 들어와 또 한 편의 아름다운 시 한 수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p647 하늘에 걸린 반달을 천상의 존재가 쓰다 버린 빗으로 연상하여 시상을 풀었다. 상상력의 원친이 같다. 한시와 현대시는 이렇게도 만난다. 


<낯선 마을의 가을비>

p649 이렇게 현대 시 몇 수와 한시 몇 수를 나란히 읽었다. 둘이 만나는 방식은 경우마다 다르다. 한시와 현대시의 만남을 한두 구절의 표현상 유사성만 가지고 논의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윤곤강이 그의 작품 속에서 숱하게 고려가요를 인용했지만 갖다 붙인 것일 뿐 정서적 울림이 없다. 신석초의 <바라춤>과 다른 점이다. 한시와 현대시도 그렇다. 겉모습의 유사함만 가지고 한시와의 유사성을 말한다면,그 것은 껍데기의 비슷함일 뿐이다. 


  • 에필로그 : 그때의 지금인 옛날 _ 통변론

<지팡이 자국마다 고이는 봄비>

p655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이 강산, 이 흙 밟고 살아온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민 정서는 세월로도 씻을 수 없는 원형질로 남는다. 


<거미가 줄을 치듯>

p657 후세에 독서를 부지런히 한다는 자들은 거친 마음과 얕은 식견으로 마른 먹과 썩어 문드러진 종이 사이에 눈을 비비며 그 좀 오줌과 쥐똥을 엮어 토론한다. 이는 술지게미와 물은 술을 배불리 먹고 취해 죽겠다는 꼴이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p658 오늘날의 독서는 어떤가. 천박한 식견으로 이미 용도 폐기된 낡은 지식을 금과옥조인 양 떠받든다. 저 혼자 보기 아깝다고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한다. 취해 죽으려면 독주를 들이켜야지, 왜 술지게미만 배 터지게 먹는가? 세계와 가슴으로 만나려거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 일이지, 왜 좀먹고 쥐 오줌에 지린 옛 책에 코를 박는가?  


<그때의 지금인 옛날>

p659 <<주역>>에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통하면 오래간다.”고 했다. / 중요한 것은 이것과 저것이 다름을 확인함에 있지 않고, 그 사이에 숨을 통하게 하여 오래 가게 만드는 일이다. 

문학에는 정해진 규범과 형식이 있다. 새것을 추구해도 이것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새것이 힘을 얻으려면 엣것을 변화시키는 통변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p660  저마다 마음으로 깨달을 뿐 누가 일러줄 수가 없다. 목마른 자 스스로 샘을 팔 일이다. / 시인은 깊은 우물에 가닿을 긴 두레박줄을 마련해야 한다 .아무리 먼 길에도 부르트지 않는 튼튼한 다리를 가져야 한다. 

연암의 <영처고서> 일절 : 천추만세는 지금으로부터가 옛날이다. 참 무서운 말이다. 옛날은 그때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훗날의 옛날이다. 현재에 충실하라. 그러면 그것이 훗날의 모범이 된다. 옛것을 맹종치 말라. 그 옛것도 그때에는 하나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세월은 흘러간다. 오늘의 주인공이 내일은 무대 뒤로 사라진다.지금’ ‘과 ‘여기’가 차곡차곡 쌓여 역사가 된다. 사람은 가도 문학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 되게 하고 오늘이 내일 되게 하는 원형질이 여기에 담겨 있다. 


<사기의 불사기사>

p662 어떤 지금도 옛것의 구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옛것을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옛것을 어떻게 배울까? 그 껍질을 배우지 말고 정신을 배워야 한다. 

p664 때로 배우지 않고 거꾸로 하는 것이 제대로 배우는 것이 될 때가 있다. 표현은 달라도 알맹이는 같다. 

p665 옛것을 본받아라. 그러나 그 정신과 원리를 본받아야지, 형식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이 경우 원리란 무엇인가? 무뚜막의 숫자를 조작하여 적을 현혹시킨다는 것이다. 형식이란 무엇인가? 부뚜막 숫자를 늘리거나 줄이느 ㄴ것이다. 손빈은 부뚜막 숫자를 줄여서 이겼고, 우승경은 반대로 늘여서 이겼다. 손빈은 적진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고, 우승경은 적진에서 후퇴하는 중이었다. 방법은 반대로 했지만 이긴 것은 같다. 


<도로 눈을 감아라>

p667 더는 한시를 짓는 전문 시인이 나오지 않는 현실에서 한시에 관한 담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리는 고급한 문예이론이 없었던가? 우리에게 깊이 있는 미학의 체계가 없었던가? 과거의 시학은 오늘의 시학에 아무런 처방이 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그것은 지금껏 해독되지 않는 파일로 남아 있었을 뿐이다. 누구를 탓할 겨를도 없다. 옛것을 오늘에 호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발이야말로 정말 요긴한 것이 아닐까? 

p668 문예이론이나 미학 체계의 전달에도 건축과 학생들의 삼각형자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 자척으로 된 선인들의 이야기를 센티미터 자를 들이대어 재려든다. (나를 반성하게 하는 부분)


p670 빛깔과 형상이 전도되고, 슬픔과 기쁨이 작용이 되어 망상이 된 것이지요. 지팡이를 두드리며 걸음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분수를 지키는 관건이 되고, 집으로 돌아가는 보증이 됩니다. / 내가 나의 주인이 못 되고, 내 집을 찾아가지 못할진대 열린 눈은 망상이 될 뿐이다. 소화하지 못하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네 집을 찾으리라. 나는 그의 이 말을 외래의 것을 버려 자신의 소아 속에 안주하라는 말로 듣지 않는다.주체의 자각이 없는 현상의 투사는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내가 본래 있던 그 자리, 미분화된 원형질의 상태로 돌아가라.눈에  현혹되지 말라. 네 튼튼한 발을,네  듬직한 지팡이를 믿어라. 자기 눈이 갑열리기 전 내 앞에 놓여 있던 세계, 익숙해져 있던 세계,나와  사물 사이에 아무런 간극도 없던 세계로 돌아가라. 그 세계가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래의 제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 차차 새로벡 열리는 빛의 세계를 바라볼일이다. 문학은 발전해왔는가. 아니다. 다만 변화해왔을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라. 먼저 네가 들어가야 할 대문부터 찾아라. 

다시 눈을 감아라. 내마음을 울린다. 나는 눈을 감고 주체의 자각을 가져보려고 한다. 눈을 감아도 보일듯 말듯 한 나의 상태. 눈 뜨기 전의 나의 상태도 성찰해볼 일이다. 



3.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와 전체적인 뼈대

       한시 미학 산책』은 동아시아의 한시 이론을 빌려 중국과 한국 한시를 주제, 형식, 작법에 따라 스물 네 개의 테마로 분석하고 해석한 책이다. 우리 시학의 근원을 탐색하는 한시 이야기는 모두 스물네 편이다. 한시의 언어 미학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는 첫 번째, 두 번재, 세 번째 이야기를 비롯하여, 당시와 송시, 정경론, 시안과 시마, 잡체시와 파격시를 거쳐 선시,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에 이르기까지 한시에 대한 완결판을 만들어 냈다. 한시를 왜 읽고 배우는지, 오늘을 사는 사람은 어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숙고하는 에필로그로 기나긴 한시의 여정을 마무리 한다. 

       『한시 미학 산책』을 통해 우리는 수없이 많은 시를 보고 읽고, 그 아름다움과 뜻을 친절하고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다. 전반부에선 주로 한시의 미학을 논했다. 반면 중반부 이후에는 시에 얽힌 시인들의 사연, 문자 유희에 가까운 시들, 그리고 조선후기 한시의 변천과정에서 보여주는 파격과 해체 등을 보여줬다. 

       스물 네 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주 다양하고 풍부한 예를 통해 한시의 특징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해설 또한 아주 꼼꼼하고 저자가 공들여 읽고 깊이 추구한 뒤에 내놓은 것이라는게 드러났다. 책을 읽다보니 나중에는 정민 교수가 해설을 한 것인지 실제 한시를 지은 지은이가 해설을 해주고 있는 것인지 착각이 될 정도였다. 

       스스로 목차를 보며 구분을 지어봤다. 첫 번째 이야기부터 세 번째 이야기까지는 한시의 언어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 이야기부터 열 번째 이야기까지는 한시에 대한 이론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열한 번째부터 열세 번째까지는 시인의 궁함, 시인을 대변하는 시, 시처럼 살게 되는 삶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열네 번째부터 열여덟 번째까지 시의 세계를 논했다. 전통의 한시에서 벗어나 형식의 변형을 이야기하고 파격시의 세계를 이야기 했다. 또 한시에서만 볼 수 있는 쌍관의에 대해서도 보여줬다. 열아홉 번째부터 스물세 번째까지는 한시를 종류로 나눠서 선시, 산수시, 유선시, 시사와 사시, 정시를 소개했다. 주제별로 시를 분류해 보여주니 보는 읽는 입장에서 골라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했다. 관심이 가는 부분을 먼저 읽을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정판에 새로 들어간 부분이라고 하는데 한시와 현대시의 같고도 다름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내가 저자가 되어 한시 미학에 대해 쓴다고 생각해 보면 크게 일곱개의 큰 주제 아래 스물 네개의 소주제로 나눈 셈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저자가 자료 분류를 명확한 기준에 의해 나눠야 함을 배웠다. 책을 쓸 때 많은 자료를 참고할텐데 주제에 맞게 자료를 참고하여 글을 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식으로 대충 가져다 넣는 것이아니라 명확한 기준과 치밀한 분류 작업을 통해 독자가 방대한 양의 지식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뼈대를 잘 세우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스물 네가지나 되는 뼈대를 잘못 세웠다가는 빠지는 부분이 생길 수도 있고 군더더기로 더 첨가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책을 쓸 때 처음 기획 단계가 아주 중요하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더 확실히 알게 됐다. 정리 상자에 인덱스를 붙여 각 상자안에 어떤 내용을 넣을 것인지 체계적으로 구분하고 각 상자에 알맞은 자료를 넣은 후 글을 써내려가야 할 것이다. 

      (참고) 인터넷 교보문고 출판사 서평 


      2. 감동적인 장절 (배울점)

       글을 읽어내려 가다보니 한시와 현대시의 차이점을 알고 싶어졌다. 그런데 저자는 독자의 가려울 것 같은 부분을 예상했는지 내가 궁금해 하기 시작하자 답을 줬다. 101쪽에 보면 ‘사실 이러한 점은 현대의 시인도 비슷하다. 젊은 시절 격동하는 감정의 분출과 화려한 비유로 독자를 사로잡던 시인도 만년에는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담한 언어에 담아 노래하는 것을 흔히 본다.’ 라고 이야기 해줬다. 

       또 한시 이야기로만 계속 전개한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 서구의 시들과 비교해서 분석해준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106쪽에 이달(조선 중기 당시풍의 대가)의 시와 윌릴엄 예이츠의 이니스프리, 박목월의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의 눈에 비친 것 등을 비교하여 설명해줬다. 또 112쪽에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파랑새>, 114쪽의 마이어 에이브럼스의 책 등 서구의 것과 비교하여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이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적절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것이 느껴졌다. 위에서 말한 책의 부분 말고도 많은 부분이 더 있다. 

       그리고 목차만 보면서 국어책 공부하듯 공부하게 될 부분이라고 예상한 일곱 번째 이야기인 정경론에서는 첫 번째 꼭지에서 이어갈 꼭지들의 제목을 설명해줬다. 177쪽에 다음에 나올 꼭지의 제목을 풀이해줬는데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미리 설명해줘서 읽는 내내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190쪽을 보면서 컬럼의 제목을 생각해 냈는데 그것이 바로 ‘시는 창조의 창’이라는 것이다. 190쪽의 박은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 내면에 창조의 샘물이 있어 그 샘물은 계속 새로운 물을 뿜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박은의 시를 보면 시인의 시선이 마구간에서 초승달로 초승달에서 산으로 그리고 늙은 종, 등불, 아내, 이불 속, 결국 시인의 가슴 속으로 움직인다. 그것을 보는 순간 시인이 곁에 있는 사물, 자연, 사람을 보며 시선을 옮기는데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시선의 움직임, 써내려가는 시의 구절구절이 창조의 창을 통해 이야기 계속 해나가는 것 같았다. 어찌 그렇게 주변을 바라보며 하나의 시를 지을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290쪽을 읽으면서는 독서를 통해 너무 뻔한 답이나, 느낌을 내놓는 태도를 버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책의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마치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을 하나 주워놓고 무슨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이 “숟가락 주었다!”라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잘라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사마천의 글솜씨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그 글을 지을 때 품었던 마음자리를 얻는 것이다.’ 

       301쪽에 보면 궁한 사람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 부분이 계속 나온다. ‘시궁이후공’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꼭 그런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저자는 독자의 의문을 알고 바로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궁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궁한 이의 시가 모두 좋은 것도 아니다. 현달하고도 시가 좋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라고 이야기 했다. 균형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언급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 존경스럽다. 

       308쪽에 보면 탄탈로스가 나온다. 한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온 신도 곁들였다. 소금 몇 방울로 싱거웠던 찌개 맛이 아주 맛있어 진 것 같은 효과다. 한시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있게 풀어나가고 있지만 책이 좀 더 맛갈스럽게 느껴졌다. 

       318쪽에 나오는 ‘패랭이 꽃’을 더 조사해 본 후 닉네임으로 쓰고 싶어졌다. 

       384쪽에 보면 자료를 그대로 오려 붙여 준 부분이 나온다. 독자에게 본래 모습을 그대로 전해주려고 한 저자의 마음 씀씀이가 엿보인다. 정감간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 방대한 자료 예시에 압도 당했다. 또 앞에서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설명해준 후 한시의 예를 계속 보여주니 독자가 한시를 읽으면서 이것저것 생각해보고 궁리해 볼 수 있게 도와줬다. 앞에 설명한 것을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으며 뒤로 갈수록 아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니 독자를 유식하게 만들어준 후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웠다. 각 꼭지마다 마지막 부분에서 정리하여 저자의 말을 해주는 부분도 책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됐다. 단순히 한시를 풀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정신이나 철학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책을 읽으면서 봄을 느낄 수 있었다. 꼼짝 달싹 안하고 방 안에서 책만 읽었는데도 왠지 모르게 나는 책 속에서 봄이 느껴졌다. 그래서 밖에 나가 노니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았다. 다행이었다.한시 미학 산책』은 봄내음이 물씬 느껴지는 책이다. 또한 조선시대 속에 온전히 들어갈 수 있게 해줬다. 그때를 지금처럼 읽을 수 있었다. 18세기를 그대로 21세기로 가지고 와 21세기가 18세기가 되게 만들어주었다. 


      3. 보완점 

         감히 보완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296쪽에 시능궁인과 시궁이후공을 역의 명제로 설명한 부분이다. 명제, 역, 필요조건, 충분조건은 수학 집합과 명제에 나오는 수학 용어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더욱 헷갈렸다. 집합의 벤다이어그램으로 시와 궁을 표시해보니 궁 안에 시 있고 시 안에 궁 있게 되어 뭐가 뭔지 알기가 어려웠다. 한시 미학 산책』의 매력은 한시에 대한 이해를 아주 쉽게 대중적으로 잘 풀어줘 많은 사람들에게 한시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이다. 그런데 한시를 이해하는데 다른 도구를 사용하다보니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게 된 것 같다.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 말고 다른 설명도구를 사용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아쉬움이 생겼다. 

         그리고 스물 네가지의 주제를 더 중간 주제로 나눠 묶어주는 작업이 있었다면 더욱 체계적으로 한시에 대해 접근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스물 네개가 병렬적인 구조로 독자에게 소개 되었는데 3층 구조로 나눠 한시 미학 산책』아래 중간 주제 여섯개 내지는 일곱개 그 아래 스물 네개의 분류가 나왔다면 더 잘 정리되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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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3.07 07:26:22 *.154.223.199

        아, 세린님은 2011년에 나온 책의 저자 강연회에서 찾아가 직접 만나보셨군요. 우와!

        7기 연구원의 필독서였던 다산 지식경영법을 미리 읽어보며 발맞춰 보신 적도 있으시군요. 우와2222!!

        세린님의 '내가 저자라면'을 읽다가, 저는 '아, 구본형선생님이 하라는 방식이 있었지.

        목차와 뼈대를 논하고, 감동적인 장절을 쓰고, 보완점을 평설하라고 했었어. 맞아맞아' 합니다. 하라는 대로 하고 계신 세린님 멋지십니다.

        지 맘대로 한 저는 갑자기 끙끙거리게 됩니다. (아, 실격퇴장의 휘슬과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는 영상이 머리 속에서 막 플레이되구요. 후덜덜덜ㅠㅠ)

         

        세린님은 어떤 과목을 가르치시나 궁금해집니다.

        가을부채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할 수 있다면 국어선생님일 것도 같고

        밴다이어그램을 말씀하시는 거 보면 수학선생님일 것 같기도 하구요.^^ 

        일주일이 한 달 같은 3월 화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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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3.07 10:55:47 *.36.72.193

        윤정님 ^^

        늘 이렇게 읽어보시고, 댓글 달아주심에 감동합니다.

        오늘 사부님의 3주차 레이스 평가 방법에 관한 글을 보고

        마음이 철렁하면서도 그 글 마지막이 재밌어 신나게 웃게됐는데..

        글 읽은 후 5분 지나니 초 긴장상태..

        그런 저를 '하라는 대로 하고 계신'이라는 형용사로 꾸며주시니

        힘이 납니다. 감사해요.

         

        전 수학을 가르친답니다. ^^

        교육학을 전공하고 수학교육도 복수전공으로 또 했지요.

        후후. 만날 수 있다면 학생들 이야기, 학교 생활에 대해 나눌 수 있어

        참 좋을 것 같아요.

        일주일이 한 달 같은 3월!! 파이팅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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