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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5일 11시 3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저자는 자신에 대해서 “고전의 트랜슬레이터”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대중들이 알아들을정민서재.jpg 수 있는 언어로 맥락을 짚어주고 해설을 하는 게 국학자의 역할’ 이라고 자신의 역할을 설명한다. 핵심은 디코딩(decoding) 이라고도 햇다. 옛날 것이라 지금과 바로 통하지는 않지만 약간만 바꾸고 현대화 시켜주면 통한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는 스승이 2명 있는데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이라고 한다. 그는 “연암은 높고 깊고, 다산은 넓고 크다.”는 말로 스승들에 대해서 평했다. 이 두 분에 관한 이야기는 <한시미학산책>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책과 인터뷰에서 보여준 그의 면에서 두 분 스승님의 영향을 실감할 수 있다.

 이렇게 대중과의 소통을 중시하고 국학자로서의 소명의식이 투철한 그이기에 현재까지 36종 38권의 책을 출판하였고 판매부수도 엄청나다고 한다. 다양한 주제의 책들을 짧은 기간에 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질문에 그는 다산이 사용하였던 ‘측류방통법’(묶어 생각하고 미루어 확장하라), ‘어망득홍법’(동시에 몇작업을 병행하며 진행하라)을 활용한다고 하였다.

P1010585.JPG

 

 또한 그의 연구실에는 묵향이 나고 20년간 모은 자료들로 빼곡이 들어차있다고 한다.

글을 쓴 후 꼭 두 번 내지 세 번은 원고를 소리내어 읽고 마지막으로 가능하면 아내에게 읽어보라고 부탁한다는 그의 습관을 보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열정을 다하여 진심으로 하고 있는 사람의 향기가 느껴진다.


주요저서

<한시미학산책>(2010·휴머니스트)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

<미쳐야 미친다>(2004·푸른역사)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이덕무 등 그들만의 열정과 광기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18세기 지식인들의 마니아적인 내면을 탐구한 책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의미를 담은 강렬한 제목으로 화제를 일으키며 20만부 가까이 팔렸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2000·태학사)는 그가 학문의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연암의 대표 산문 40여 편을 25개의 주제로 나누어 원문과 그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는 책이다.

<고전 문장론과 연암 박지원>(2010·태학사)

<다산선생 지식경영법>(2006·김영사)은 18년 유배생활 중 다양한 분야에서 5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완성한 다산 정약용을 지식경영이라는 시각에서 조명했다.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김영사)는 조선 후기의 차 문화를 일으킨 다산과 초의, 추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차 관련 자료와 사료들을 연구해 쓴 조선 후기의 차 문화사이다.

<다산의 재발견>(2011·휴머니스트)은 강진 유배 시기 다산의 육성을 담은 친필 편지를 발로 뛰며 찾아내 연구·정리하여 다산의 ‘사람냄새’나는 면모를 볼 수 있는 책이다.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은 인간의 삶을 본질적으로 바꾸는 만남에 관한 책이다. 스승 다산을 만나 일생을 학문에 정진한 황상의 삶을 다산과 그의 자제들과의 교류를 통해 살핀다.




2.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1) 첫 번째 이야기 : 허공속으로 난 길 – 한시의 언어미학


푸른하늘과 까마귀의 날개 빛깔


연암은 이렇듯 시인에게 죽은 지식이나 고정된 선입견을 훌훌 털어버리고, 건강한 눈과 열린 가슴으로 세계와 만날 것을 요구한다. [17]


새들의 날갯짓이 주는 터질 듯한 생명력, 조잘대는 울음소리가 들려주는 약동하는 봄날의 흥취를 어떤 언어로 대신할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은 이를 ‘생취’ 또는 ‘생의’라 하였다. 말 그대로 살아 영동하는 운치인 것이다. [18]


생취나 생의가 없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사물의 심장부에 곧장 들어가 핵심을 찌르려면 죽은 정신, 몽롱한 시선으로는 안 된다. 시인은 천지현화으이 나태한 관습을 거부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선입견에 붙박여 간과하고 마는 까마귀의 날개 빛깔을 살피는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 생동하는 물상 속에서 순간순간 포착되는 비의를 날카롭게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시는 언어의 사원이다. 시인은 그 사원의 제사장이다. 시는 촌철살인의 미학이다. [18]


-> 촌철살인 : 작고 날카로운 쇠붙이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뜻으로, 짧은 경구로도 사람을 크게 감동시킬 수 있음을 이르는 말,

영양이 뿔을 걸 듯


시인은 천기를 누설하는 자이다. 시를 쓰는 능력은 누구나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다. 노력하지 않고 절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19]


시에는 별재나 별취가 있다. 사변적 지식이나 논리적 이치만으로는 결코 시의 비밀에 접근할 수가 없다. [19]


엄우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덧붙인다. 언어에 끌려 다니지 말고 언어를 주재하라는 주문이다. [19]


엄우는 시인이 지녀야할 미덕을 ‘흥취’에서 찾는다. [20]


영양이 뿔을 건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는 본래 선가의 비유로, <전등록>에 설봉존자의 말로 전해진다. 영양은 뿔이 둥글게 굽은 양이다. 잠을 짤 때 외적의 해를 피하기 위해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허공에 매달려 잔다고 한다. 그래서 영양의 발자취만 보고 따라가다가는 어느 순간 발자취는 끊어져버리고 영양은 간 곳이 없다는 것이다. 시인이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지 영양의 발자취뿐이다. 발자취가 끝난 곳에서도 영양은 그 실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정작 시인이 전달하려는 의미는 문면에 있지 않고 글자와 글자의 사이, 행과 행의 사이, 혹은 아예 그것을 벗어난 공중에 매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독자 또한 영양의 발자취에 지나치게 현혹되거나 그것만이 전부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20]


흥취를 지닌 시는 어떤 시인가. 그것은 투철하고도 영롱하여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엄우는 이를 다시 몇가지 비유로 제시한다. 공중지음, 상중지색, 수중지월, 경중지상이 그것이다. 허공에 울려퍼지는 소리나 형상 속에 깃들어 있는 미묘한 색채, 물속에 찍힌 달, 거울 속의 형상은 모두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물속의 달은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흔들려 사라지고 만다. 달의 실체는 하늘에 떠있고, 물은 그 실체를 투영할 뿐이다. 공중으로 퍼져가는 소리고 마찬가지다.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은 어떤가. 다만 짠맛으로 소금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을 뿐, 만지거나 직접적으로 볼 수 는 없다. 흥취 또한 이와 같다. 시인의 정신은 저만치 허공에 떠 있고, 언어를 통해 수면 위에 그 정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다. 한 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에게 느껴서 알게 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들지 않는다. [22]


허공속으로 난 길


시에서는 사물이 직접 말을 건넨다. [22]


시는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 시인이 직접 다 말해서는 안 된다.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도록 해야 한다. [23]


위 시에서 서술관계가 생략됨으로써 발생하는 모호성은 일상 언어에서처럼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되는 양자택일의 성격을 띠지는 않는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결과적으로 시의 함축과 내포를 더욱 유장한 것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스무 자에 불과한 짧은 시인데 담긴 함축은 참으로 심장하다. [28]


그 행간에 감춰진 울림, 언어의 발자취를 벗어나 허공에 매달려 있는 떨림이 중요하다. [28]


눈과 귀가 있다 말하지 말라


알아 들을 수 있는 귀, 바라볼 수 있는 눈 앞에서만 예술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눈과 귀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정신의 심층부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을 일러 영각靈覺이라고 한다. [29]


다산 정약용(1762~1836)도 <초의승 의순을 위해 준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뜻이 본시 낮고 더럽고 보면 비록 억지로 맑고 높은 말을 하더라도 알맹이가 없게 된다. 뜻이 좁고 비루하면 비록 툭 터진 말을 한다고 해도 사정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시를 배우면서 그 뜻을 온축하지 않는 것은 거름흙에서 맑은 샘물을 긷고, 고약한 가죽나무에서 기이한 향기를 구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죽을 때까지 하더라도 얻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번드르르한 거죽이 아니다. 속 알맹이다. [31]


-> 내가 시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을 알았다. 말장난이라는 생각, 알맹이는 별로라는 생각. 그렇지만 시도 역시 알맹이가 중요하단다.


이명과 코골기


사람들이 안목이 없어 나의 이 훌륭한 작품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탄식하고 원망하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이명증에 걸린 꼬마다. 남의 적절한 지적에도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는 사람은 코를 고는 버릇이 있는 시골 사람이다. 정작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명에는 쉽게 도취되면서, 자기의 코 고는 습관만은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32]



2) 두 번째 이야기 : 그림과 시 – 사의전신론


그리기 않고 그리기


시와 그림은 전통적으로 서로 연관이 깊다.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란 말도 있다. 특히 한시는 경물의 묘사를 통한 정의의 포착을 중시한다. 이는 마치 화가가 화폭 위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표현하는 것과 같다. 경물은 객관적 물상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얹을 수 있는가. 화가는 말을 할 수 없으므로 경물이 직접 말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사의전신’이라 한다. 말 그대로 경물을 통해 ‘뜻을 묘사하고 정신을 전달’해야 한다. 그 구체적 방법은 ‘입상진의’이니, 상세한 설명 대신 형상을 세워 뜻을 전달한다. [37]


동양화의 화법 가운데 ‘홍운탁월법’이란 것이 있다. 수묵으로 달을 그릴 때 달은 희므로 색칠할 수 없다. 달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달만 남겨둔 채 그 나머지 부분을 채색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그리는 방법이다. 시에서 시인이 말하는 법도 이와 같다. ‘성동격서’란 말처럼 소리는 이쪽에서 지르면서 정작은 저편을 치는 수법이다. 나타내려는 본질을 감춰두거나 비워둠을써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41]



말하지 않고 말하기


요컨대 한 편의 훌륭한 시는 시인의 진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상을 통한 객관적 상관물의 원리로써 독자와 소통한다.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건네는 대신, 대상 속에 응축시켜 전달한다. [43]


흔히 시인이 시를 짓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 가운데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과정이라고 한다. 시인이 200자의 할 말이 있다면, 그는 이것을 어떻게 20자로 줄여 말할 것인가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180자를 걷어낼 것인가로 고민한다는 말이다. 반대로 독자는 시인이 하고 싶었지만 절제하고 걷어낸 말, 즉 행간에 감추어둔 뜻을 어떻게 충분히 이해하고 깨닫느냐의 문제가 주된 관심사가 된다. [45]


사마광은 윗글에 이어 이렇게 말했다. “옛사람은 시를 지음에 뜻이 말 밖에 있는 것을 귀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여 이를 얻게 하였다.” 시인이 다 말해버려서 독자가 더는 생각할 여지가 없느 것은 시가 아니다. [46]


장수는 목이 없고, 미인은 어깨가 없다


정오의 고양이 눈


<어우야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두 그림 모두 기교로 보아서는 이미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다만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목뒤의 주름과 자기도 모르게 벌어진 입에 대한 관찰을 화가는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화가가 놓친 것이 낙락한 소나무의 기상을 우러르는 선비의 마음과 손자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고자 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고 보니, 그것은 결코 사소한 실수라 할 수 없다. 호리의 차이가 천 리의 현격한 거리를 낳는다. 이 이야기들은 기교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 속에 예리한 관찰과 예술가의 정신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교훈을 전달한다. 유몽인은 다시 이렇게 덧붙인다. “무릇 그림과 문장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번 본의를 벗어나면, 제아무리 화려하게 꾸민 문장이라 해도 식자는 취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화려하게 꾸민 문장이라 해도 식자는 취하지 않는다. 오직 안목 갖춘 자만이 능히 이를 알 것이다.” 예술 작품의 감상은 바로 이 호리의 차이를 변별하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다. [58]


화가가 형상을 핍진하게 묘사하거나, 시인이 대상을 방불하게 묘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거기에 정신을 담는 일이다. 그래서 송나라 진욱은 <설부>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개 형상을 그릴 때는 반드시 정신을 전해야 하고, 정신을 전하려면 마음을 그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군자와 소인이 모습은 같지만 마음은 다른데, 귀하고 천하며 충성스럽고 사악한 것을 어찌 스스로 구별하겠는가? 겉모습이 비록 닮았따 한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을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59]


-> 핍진 : 모조리 다 없어져 바닥이 남.

    방불하게 : 거의 비슷하게


시인이 정을 머금어 이를 펴고, 경물을 대하여 마음을 움직이며, 물상을 그려냄에 그 정신을 얻게 된다면, 저절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정신의 향기 없이 표현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성정의 천진함은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그 결과 생동감도 찾아볼 수 없다. [60]


마음에서 얻어 뜻으로 깨달으니


구양수의 <육일시화>에 매요신과 나눈 시에 대한 토론이 보인다. 매요신이 먼저 말했다. “반드시 능히 묘사하기 어려운 경치를 형상화하여 마치 눈앞에 있는 것같이 하고, 다하지 않는 뜻을 머금어 말 밖에 드러나게 한 뒤라야 시가 지극하게 된다.”  [62]


시인의 진실한 느낌이 없는 시는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해도 독자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66]


그러나 시인의 덤덤한 듯 툭 던지는 한마디가 예리한 비수처럼 독자의 의식을 헤집는다. 좋은 시는 독자에게 방심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허를 찔린 느낌을 준다. [66]


3) 세 번째 이야기 : 언어의 감옥 – 입상진의론


싱거운 편지

왜사냐건 웃지요


내 마음속에서 기심, 즉 분별하고 헤아리는 마음마저 앗아가 버린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이 시는 이렇듯 모든 것이 기화해 버리고 남은 순수한 결정의 세계를 노래한다. 그래서 내가 봄 동산이 되고, 그 동산의 나비가 되어 봄날의 석양 속으로 훨훨 살아가버리는 느낌을 노래하낟. 필설로 옮기려 하는 순간 증발해버리듯 사라져버린 기심, 사물과의 순간적인 만남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생취를 설명적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는 얼마나 허망한가. 그러고 보면 언어는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도구에 불과하다. [74]


언덕에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언어란 이렇게 불완전하다. 이런 불완전한 도구를 가지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오해가 발행하고, 시비가 생겨난다. 장자는 다시 덧붙인다.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글이다. 글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말에는 귀히 여기는 것이 있다. 말이 귀히 여기는 바는 뜻이다. 뜻에는 따르는 바가 있다. 뜻이 따르는 바는 말로는 전할 수가 없다.” [76]


더는 나아갈 수 없는 깨달음은 말로는 가르쳐줄 수가 없다. 마음으로 깨달아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이른바 심수상응이다. 성련은 마지막 단계에서 백아가 강렬한 바람을 가지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함으로써 말로는 도저히 전해줄 수 없었던,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최후의 심법을 전수해주었던 것이다. [77]


언어란 본시 부질없는 것이기에 큰 진리는 언제나 언어를 초월하여 전해지고, 깨달음은 언어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사벌등안’의 법을 말한다. 언덕을 오르려면 뗏못을 버려라. 장자는 ‘득어망전’을 말한다. 고기를 얻었다면 통발을 잊어라. 또 ‘득의망언’, 즉 뜻을 얻었거든 말을 잊으라고 주문한다. “지붕에 올라간 다음에는 누가 쫒아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치워야 한다. 유용한 진리는 언젠가는 버려야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움베르토 에코의 말이다. 그래서 도연명은 시 <음주>에서 “이 가운데 참다운 뜻이 있으나, 말하려 하니 이미 말을 잊었네.”라 했다. [78]


내 혀가 있느냐?


서진의 구양건은 <언진의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금에 이름을 바로잡으려 힘쓰고, 성현이 말을 능히 떠나지 못한 것은 그 까닭이 무엇인가? 진실로 이치를 마음에서 얻어도 말이 아니면 펼 수가 없고, 사물을 말에 고정시켜도 이름이 아니면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가 제아무리 불완전한 존재라 해도,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는 결코 살 수가 없다. [78]


<계사>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성인은 상을 세워서 그 뜻을 다하고, 괘를 세워서 참과 거짓을 다하며, 문사를 이어서 그 말을 다한다.” 여기에서 ‘입상진의’의 말이 나왔다. 말로 뜻을 다할 수 없다면 형상으로써 뜻을 전달하라는 것이다. [78]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청산 위로 학이 날아간 자취


시란 이와 같은 ‘진공묘유’의 세계와 닿아 있다. 무언가 꼬집어 말하려 하면 사라져버리는 느낌,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노래한다. 효용가치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저편에서 울려오는 떨림, 그 떨림의 미묘함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인간에게는 단지 입상을 통해서만 진의할 수 있는 묘오의 세계가 있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90]


4) 네 번째 이야기 : 보여주는 시, 말하는 시 – 당시와 송시


꿈에 세운 시의 나라


작약의 화려함과 국화의 은은함


당시를 두고 흔히 중국 고전시가의 꽃이라고 말하여 계절로 치면 봄에 해당한다고들 하고, 이에 반해 송시는 가을에 비긴다. [98]


한편으로 당시와 송시의 차이는 보여주기와 말하기의 차이로도 설명한다. 어떤 시인은 시 속에서 자꾸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고, 또 어떤 시인은 가급적 말하는 것을 절제하는 대신 보여주기를 좋아한다. 이때 말한다는 것의 의미는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인 메시지의 전달을 뜻한다. [98]


당시의 특징으로 거론한 ‘영묘’란 글자 그대로 그림자를 묘사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다. 실체가 아닌 것을 어떻게 묘사해낸다는 말인가. 대상과 마주하여 일어나는 시인의 감정은 실로 그림자와 같아서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시는 그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느낌을 언어로 옮겨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반면 ‘포진’이라 함은 있는 그대로 펼쳐 진술한다는 의미이다. 시인이 의론을 세워 자신의 주의 주장을 전달하려 할 때 흔히 이 방법을 사용한다. [101]


당음, 가슴으로 쓴 시


당시는 가슴으로 쓴 시이다. 여기에는 시인의 웃음과 눈물이 있어, 마음으로 전해오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하다. 이에 반해 송시는 머리로 쓴 시이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깊고 담담한 관조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망이 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위안과 인간의 정신을 고원한 곳으로 이끌어주는 깊이가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시에서 서정 함축을 중시하고 의흥이 뛰어난 시를 ‘당음’이라 하고, 생각에 잠기고 이치를 따지며 유현한 맛을 풍기는 시를 ‘송조’라고 일컬어왔다. [103]


저물어 외로운 객점에 드니

산 깊어 사림도 닫지를 않네.

닭 울어 앞길을 물으려는데

누런 잎 날 향해 날려 오누나.


깊은 산속에는 주막이 있고, 지친 걸음을 쉬어가는 나그네가 있다. ‘황엽’이라 했으니 늦가을이다. 종일 걷기에 지친 나그네는 해가 서산을 넘어간 뒤에야 산속 주막에 들었다. 밤중에도 열린 사립문이 시인의 시선을 끌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불안과 초조의 심리가 엿보인다. 깊은 밤까지 도둑 걱정없이 문을 열어둘 수 있는 평온함을 그는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닭이 우는 가을 새벽, 먼동이 트기도 전에 나그네는 다시 쫓기듯 길을 재촉한다. 뼈를 저미는 추위. 어디로 가야 할까. 길을 묻는 나그네 앞에 들여오는 대답은 공허한 바람 소리와 자신을 향해 날려오는 누렇게 시든 낙엽뿐이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갈 길을 있지도 않았다. 인생이란 결국 길을 찾아 헤매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 아니겠는가. 길을 가로막고 달려드는 낙엽은 시인에게 인생은 이와 같이 덧없는 것이라고, 길은 어디에도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스무 자에 불과하지만 길 가는 나그네의 신고와 뼈에 저미는 외로움이 생생하게 마음을 파고든다. [107]


송조, 머리로 쓴시


무엇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집착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위의 시는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파랑새>를 떠올리게 한다. 틸틸과 미틸은 파랑새를 찾기 위해 온 세상을 헤맨다. 그들은 결국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파랑새는 자기 집 새장 안에서 울고 있었는데 말이다. 깨달음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욕망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112]


-> 나는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잠깐의 휴식기를 갖고 있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다. 마음속에 설레임과 기대만큼 불편함이 가득하다. 뭔가를 이루고 성취해야한다는 부담감과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 파랑새는 내 안에 있는데... 마음을 조금 편하게 먹는 것이 좋겠다.


사람의 마음은 본디 순선하여 맑고 깨끗하기가 이슬 머금은 풀잎이나 일렁임 없는 수면과도 같다. 그러나 자꾸만 인욕이 끼어들어 순수를 잃게 만든다. 지금 시인은 제비가 물결을 차서 평정을 깰까 염려하듯 혹 자신의 삶에 인욕이 개입되어 본성을 잃는 일은 없어야겠따고 다짐하고 있는 셈이다. [114]


일반적으로 당시가 대상 그 자체에 몰입함으로써 자연스레 시인의 정의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는 데 반해, 송시는 시인이 자신의 정의를 대상을 통해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114]


뱃속에 넣은 먹물


마이어 에이브럼스는 <거울과 등불>이란 책에서 문학의 기능을 거울과 등불의 두 가지로 나누었다. 시인은 캄캄한 밤에 어둠 속을 헤매는 영혼들의 길을 등불로 비취주는 선지자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시대를 물끄러미 비쳐주는 거울일 뿐인가? [114]


현세에서 시인의 삶이란 곁에 누운 병든 아내의 신음처럼 고달프고 괴로운 것을. 그러고 보면 시란 까맣게 잊고 있던 신선세계, 또는 존재하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향한 회귀의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천상의 백옥루가 준공되었으나 상량문을 지을 사람이 없자 옥황상제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하를 하늘나라로 불렀던 것처럼, 티끌세상의 귀양살이가 끝나 천상으로 복귀할 때까지 뱃속의 먹물이 다 마르도록 시인은 다만 깨어 노래할 뿐이다. [116]


5) 다섯 번째 이야기 : 버들을 꺾는 뜻은 – 한시의 정운미


남포의 비밀


버들을 꺾는 마음


2구에서 시인은 파릇파릇한 버들 빛을 헤아리며 이별을 예감한다. 당나라 때는 벗과 헤어지며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정표로 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절류’, 즉 ‘버들가지를 꺾는다’는 말에는 앞서 본 ‘남포’와 마찬가지로 ‘이별’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버들가지가 이별의 신표가 된 사정은 이러하다. 버드나무는 꺾꽂이가 가능하다. 신표로 받은 버들가지를 가져다 심어두면 뿌리를 내려 새 잎을 돋운다. 보내는 사람은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는 심정으로 버들가지를 꺾어주었고, 또 꺾이어 가지에서 떨어졌어도 다시 뿌리를 내려 생명을 구가하는 버들 가지처럼, 우리의 우정도 사랑도 그와 같이 시들지 말자는 다짐의 의미도 담겼다. [126]


그는 버드나무가 봄날의 서정을 촉진시키는 환기물인 동시에 ‘이별과 재회에의 염원’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29]


가을 부채에 담긴 사연


‘가을 부채’는 한시에서 으레 ‘버림받은 여인’을 상징한다. 부채는 더운 여름날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물건이다. 하지만 더위가 물러가고 가을이 오면, 여름내 애지중지하던 부채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잊힌다. 마찬가지로 한때 내게 그토록 다정하던 임은 어느덧 나를 까맣게 잊고 돌아보지 않으신다. 시인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을 부채’를 손에 쥐었다는 말만 가지고 이미 그녀가 ‘임에게 버림받은 여인’임을 구체적으로 말한다. [131]


옛사람은 풀이 썩어서 반딧불이가 된다고 믿었다. 반딧불이는 황폐한 풀덤불에서 날아다니는 곤충이다. 그 반딧불이가 그녀의 창가를 난다고 하여 지금 그녀의 거처가 얼마나 황폐하고 황량한지를 말했다. 임이 찾지 않는 꽃밭엔 잡초만 우거졌다. 그녀는 반딧불이를 부채로 후려침으로써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드는 처량함과 황량함을 “저리가!”하며 몰아내려 안간힘을 쓴다. [131]


난간에 기대어


한시에서 자주 보이는 표현 중 하나가 누각 또는 난간에 기댄다는 말이다. 누각 위에는 왜 오르는가? 누각의 난간은 높은 곳에 있어. 그곳에서 보면 먼 곳에서 오는 사람을 잘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난간에는 왜 기대는가? 기다림에 지친 까닭이다. 그래서 누각에 오르거나 난간에 기댄다는 뜻의 ‘등루’,‘의루’,‘의란’ 혹은 ‘빙란’등의 표현 속에는 ‘그리움’의 의미가 담긴다. [135]


한시에서 ‘무제’를 표제로 내거는 것은 마땅히 붙일 만한 제목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목을 붙이지 않은 채 오히려 독자의 적극적인 독시를 요구하기도 한다. 또한 무제시는 이상은 이래로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루는 염정풍의 분위기를 띠는 것이 보통이다. [137]


저물녁의 피리소리


이해 못할(국화 옆에서)


특정 어휘가 특수한 정운을 띠게 되면 요즘 식으로 말해 사은유가 된다. 이것이 진부한 표현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시인은 늘 새로운 감성과 참신한 생각으로 이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진부한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익숙한 것을 새롭게 만나도록 하는 것, 이것은 시인의 창조적 정신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마술이다. [143]


6) 여섯 번째 이야기 : 즐거운 오독 – 모호성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을 그리다

오랑캐 땅의 화초

개가 짖는 이유

무지개가 뜬 까닭

백발삼천장

뱃속 아이의 정체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이 언어의 미로 위에 숨겨놓은 코드를 독자가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진진한 지적, 감성적 여정이어서 때로는 오독도 즐겁다. 시인은 부러 말꼬리를 흐려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독자는 잠시 멍해 있다가 다시 코드를 찾아 나선다. 설사 가다가 길을 잠시 잃은들 어떠랴. 아니, 애초부터 길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172]


7) 일곱 번째 이야기 : 사물과 자아의 접속 – 정경론


묘합무은, 가장자리가 없다


정수경생, 촉경생정


세상의 근심이란 것이 평탄한가 싶다가 갑자기 가팔라지는 비탈길과 진배없다. 시간의 강물은 쉴 새 없이 흐른다. 느닷없이 찾아드는 근심 걱정 앞에 조바심하는 인간이나 예고없이 지나가는 행인을 보고 움츠러드는 물새는 다를 게 없다.  [181]


꽃을 피운 것은 간밤의 비인데, 꽃을 떨어뜨린 것은 오늘 아침 바람이다. 참 얄궂다. 겨우내 씨눈을 아끼고 망울을 부풀려 어렵사리 꽃 피운 보람이 무색하다. 시인은 이를 ‘가련’으로 압축했다. 한 봄의 일이 비바람 가운데 오간다. 우리네 인생도 풍파 속에 덧없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겨를도 없이 허망하게 진 꽃잎이 세상에 어디 한둘이겠는가? 바람은 언제나 딴 데서 불어온다. 그 심술을 탓하기엔 꽃잎의 힘이 너무 여리다. [183]


이정입경, 경종정출

정경교융, 물아위일

지수술경, 정의자출

즉정견경, 정의핍진


‘시언지’, 즉 시가 뜻을 할한다는 말은 <시경>이래 가장 친숙한 시의 정의다. 시란 무엇인가? 품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뜻은? 나아가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말하는가? 문제가 여기까지 미치면 다소 복잡해지지만 위진이전의 고시들은 영물보다는 영회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서거정은 <동인시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란 마음이 가는 바이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198]


시는 찬 샘물이다. 시를 잘 쓰려면 물의 선변을 배워야 한다. 굴원의 시와 장자의 산문에는 강개의 비분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강개는 어디까지나 돌에 부딪혀 난 여울의 소리였지, 악악대며 떠드는 왜가리 소리가 아니었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시의 법은 점차 시끄럽고 번다해져 옛사람의 정신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수다스럽게 말하고 아프다고 끙끙대는 소리가 시의 내용이 되고 말았다. 심상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말라. 그러나 진정한 시법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최후의 ‘현관’이 있다. 그 현관 앞에 서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 문을 여는 법은 아무도 일러줄 수가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제 손으로 직접 열고 들어가야 한다. [202]


8) 여덟 번째 이야기 : 일자사 이야기 – 시안론


한 글자를 찾아서


뼈대와 힘줄


시안은 글자 그대로 시의 눈알이다. 시안은 시에서 가장 정채롭고 시인의 정신이 집약된 지점, 하나만 건드려도 나머지가 따라 움직이는 일동만수의 경락이다. 시안은 단순히 수사적으로 자구를 단련하는 기교의 문제가 아니다. 시가 예술의 의경미를 형성하는 핵심처인 것이다. [210]


한 글자의 스승

일자사의 미감원리


일자사의 첫 번째 미감 원리는 ‘의미의 중복을 피하라.’는 것이다. [221]

두 번째 미감 원리는 ‘여운을 남기고 호응을 중시하라.’는 것이다. [223]

세 번째 미감 원리는 ‘시상의 온유돈후를 중시하라.’는 것이다. 감각적 직설보다는 에둘러 말하는 데서 온건한 맛이 깊어진다. [227]


시안과 티눈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말했다. “글을 일러 조화라고 말한다. 마음속에서는 틀림없이 예쑬적인데, 막상 손끝에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예술적이지 못하다.” 체험에서 나온 까닭이 있는 말이다. [229]


9) 아홉 번째 이야기 : 작시, 즐거운 괴로움 – 고음론


예술과 광기


대상을 향한 미친 듯한 몰두없이 위대한 예술은 이룩되지 않는다. 불광불급이라 했다. 미쳐야 미친다. 비록 하찮은 기예라 해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가 있어야 비로소 성취를 말할 수 있다. 예술의 천재들에게는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광기가 있다. 그들안에서는 열정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과 다른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느껴진다. [235]


추사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초서에 능했던 명필 이삼만(1770~1847)은 일생에 먹을 갈아 구멍을 낸 벼루가 여러 개였다.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더니, 벼루 여러 개가 밑창 나도록 그는 열심히 먹을 갈고 또 썼다. 사광은 전국시대의 유명한 악사였다. 그는 소리를 듣는 데 방해가 된다며 자신의 눈을 찔러 소경이 되었다. 예술도 이쯤 되면 이르러 간 경지를 측량할 길이 없데 된다.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잗다란 기교쯤은 까맣게 잊어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영욕도 득실도 생사까지도 마음에 두어서는 안된다. [237]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고


당나라의 천재 시인 이하는 매일 아침 파리한 나귀를 타고 집을 나섰다. 나귀 등에는 낡아 해진 비단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길가다 시상이 떠오르면 즉시 써서 주머니 속에 넣곤 했다. 저물어 돌아오면 그 어머니가 계집종을 시켜 주머니를 꺼내보았다. 써놓은 것이 많으면 “이 애가 심장을 다 토해야만 그만두겠구나.”하며 한숨 쉬었다. 이하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그 쪽지를 가져다가 정성스레 먹을 갈아 또박또박 옮겨 썼다. 그러고는 다른 주머니에 담아 보관하였다. 술에 크게 취하거나 초상이 있는 날이 아니면 언제나 이같이 했다. 예전 원고는 다시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렇듯 작시에 골몰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그는 스물일곱 살의 아까운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241]


눈을 상처내고 가슴을 찌르듯


가도는 매년 그믐날이 되면 반드시 그 한 해 동안에 지은 작품을 책상 위에 모아놓고, 향을 살라 두 번 절하고는 술을 부으며 빌었다. “이것이 내가 한 해 동안 고심한 자취다.” 그러고는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249]


가슴속에 서리가 든 듯


참을 수 없는 가려움, 기양


아무짝에 쓸모없는 줄 잘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표현 욕구를 옛사람들은 ‘기양’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양’은 가려움증을 말한다. 아무리 긁어도 긁어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다. 이런 가려움은 어떤 연고나 냅고약으로도 못 고친다. 이와 마찬가지로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표현욕’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기양이다.

시인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기에 정신을 피폐케하고 진기를 소모해가면서 허구한 날 시구의 조탁에만 힘 쏟게 만드는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마물이 있으니, 옛사람들은 이를 일러 시마라 했다. [253]

개미와 이


시인은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자이다. 그러면서 산 아래에서 헐고 뜯고 싸우는 인간의 작태를 비웃고, 때로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는 존재다. 박지원이 벗에게 본내 엽서에는 이런 내용도 보인다. [257]


그러고 보면 산꼭대기 시인의 산 아래를 향한 연민과 탄식, 조소와 비아냥거림도 아래쪽 사람들이 보기에는 같잖기 그지없는 일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한 사람은 위에서 아래를 보면 개미 같다고 하고, 훅 불면 날려가 버릴 것 같다고 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한다. 아래서는 또 위를 보며 머리카락에 붙은 이 같다고 하고, 저 혼자만 공연히 고상한 체 한다 하고, 꼴 같지 않게 논다고 눈을 흘기니 말이다.

사실 실용으로 말하면 시처럼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도 없고, 시인처럼 무능한 인간들도 없다. 세상 고민을 혼자 다 짊어진 듯 끙끙대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257]


-> 시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생각중에 ‘실용성’이라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갖고 있는 거부감중에 하나도 뭔가 실용적이고 효율적이고 금전적인 풍요와 거리가 있는 것 같은 생각. 현실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나를 몰두하지 못하게 한다. 한발빼게 만들고 현실적인 무엇인가를 붙들게 한다. 빠져들지 못하게 한다.


사실 세상에는 쓸모만으로 따지면 맥 빠지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이른바 예쑬도 쓸모없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사람을 배부르게 해주지도 못한다. 마라톤 주자가 42.195 킬로미터를 달린들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이봉주, 황영조의 우승에 마음 설렌다. [258]


시가 인간 언어의 정채로운 금강석이든, 아무 짝에 쓸모없는 해독이든 시는 시다. 금강석이 될지 독약이 될지는 오로지 시인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린 일이다. [259]


10) 열 번째 이야기 : 미워할 수 없는 손님 – 시마론


즐거운 손님, 시마


시마는 어느 순간 시인에게 들어와 살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를 생각하고 시만 짓게 하는 귀신이다. 시마가 한 번 붙으면 다른 일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시에만 몰두하게 된다. 더욱이 짓는 시마다 절창 아닌 것이 없다. 시마는 시인에게 즐거운 괴로움을 선사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263]


시마와의 논쟁과 시마 증후군


지금 자신에게 시마가 들어와 있는지 아닌지 알고 싶으면 위에서 제시한 여러 증상을 스스로에게 비추어보면 된다. 길을 가면서도 시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시 생각, 심지어 꿈에서까지 시 생각뿐, 그밖에 다른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지는 증세, 예의와 염치, 체모조차 우습게 보는 태도, 눈에 띄는 사물마다 허투루 보지 않고 거기에 담긴 비밀을 찾아내겠다고 달려드는 증상이 이른바 시마 증후군이다. [269]


시마의 죄상


이규보와 최연이 제시한 시마의 죄상을 뒤집어 읽어보면 바로 시인 예찬론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남이 알아주든 말든 시로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날카로운 예지로 드러나지 않은 사물의 깊은 의미를 파헤쳐 사람들의 인식을 높은 곳으로 이끌어준다. 그뿐인가? 사물을 관찰하여 감춰진 의미를 찾아내고, 세속의 질서나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시를 통해 마음껏 비판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 겉모양의 꾸밈을 우습게 보고 한 편의 훌륭한 시를 창작하기 위한 고초를 더욱 소중히 여긴다. 한마디로 이규보와 최연 등이 꼽은 ‘시마의 죄상’은 오로지 시만 생각하고 시에 죽고 시에 사는 전업 시인으로 누리는 특권에 대한 ‘즐거운 비명’일 뿐이다. [272]


시귀와 귀시


귀신의 조화와 시인의 궁달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배부르고 따뜻한 속으로 시마는 깃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충족된 넉넉함을 시마는 혐오한다. 무언가 결핍된 상태, 그 결핍을 채우려는 시인의 정신이 죽창처럼 곤두서 있는 지점에서 시마는 슬그머니 시인에게 스며든다. 그래서 시인은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283]


11) 열한 번째 이야기 : 시인과 궁핍 – 시궁이후공론


불평즉명, 불평이 있어야 운다


이인로가 말했다.


천지는 만물이 다 좋게만 하는 법이 없다. 뿔 있는 놈은 이빨이 없고, 날개가 있으면 다리가 두 개뿐이다. 이름난 꽃은 열매가 없고, 채색 구름은 쉬 흩어진다. 사람에 이르러서도 그러하다. 기특한 재주와 화려한 기예가 뛰어나면 공명이 떠나가서 함께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치가 그러하다.


문장도 훌륭하고 공명도 함께 누리는 이치는 없다. 뿔을 가지려면 이빨을 포기하든지, 꽃이 아름답거든 열매의 내실을 기대할 수 없다. 날개를 단 채로 다리도 네 개이기를 바라거나, 채색 구름의 영롱한 자태가 길이 변치 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

라이오넬 트릴링은 “현대의 문화인은 정치적으로는 부와 쾌락을 원하면서 예술적, 실존적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쾌락을 거부하고 프로이트식으로 말해 반쾌락에서 만족을 찾는 본능적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충동은 시대를 떠나 늘 존재해왔다. 모든 것이 갖춰진 넉넉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입을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속에 이른바 정서란 것이 생겨난다. 그것이 슬픔과 분노, 격정과 눈물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이 바로 시이다. [289]


-> 내가 너무 욕심이 많나? 나의 딜레마. 모두다 가질 수 없는데 욕심내나? 그래서 괴롭다. 편치를 않고. 마음이 긴장되고 불편하다.


나비를 놓친 소년, 발분서정의 정신


연암은 그 참신한 붓을 들어 사마천의 마음을 나비를 잡으려다 놓친 소년에 견주어 설며한다. 소년은 꽃잎에 않은 예쁜 호랑나비를 보았다. 정신을 손가락 끝에 온통 집중시켜 살금살금 나비에게 다가간다. 잡았다 싶었는데 나비는 손가락 끝에 감촉만 남긴 채 훨훨 날아가 버린다. 뻗었던 손이 부끄럽고, 전심전력의 몰두가 허망해지는 순간이다. 이거다 싶었는데 결국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잡았으리라는 자책감, 혹시 누가 내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부끄러움, 바로 이런 모종의 안타까우면서도 착찹한 마음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때의 마음이라고 했다. [290]


시인은 코앞에서 나비를 놓쳐버린 소년이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좌절 앞에서 주저앉지 않는 발분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발분하는 서정 없이 어찌 남을 감동시키겠는가. [294]


시궁이후공과 시능궁인


궁한 사람의 시가 좋은 이유


한 편의 시가 뛰어난 작품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상성을 뛰어넘는 인식의 갱신이 필요하다. 이는 현실과 밀착되어 있을 때에는 알기 어렵다. ‘그 무엇’밖에 놓여 있다는 느낌이 시인의 내부에 유감을 머금게 해서, 그 겨과가 다시 예술 위로 퍼부어진다는 것이 시궁이후공의 기본 생각이다. 다시 말해 궁의 상황이 가져다 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극단의 괴리감, 여기서 벗어나려는 자아의 노력이 덧붙여져 시에서 공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298]


대체로 문학은 충족에서 나오지 않고 상실과 일탈에서 나온다. [301]


시와 궁달의 관계


“문장은 하나의 재주이다. 반드시 오로지한 뒤에야 공교해진다. 번화하고 부귀하여 명성과 이욕을 좇는 자들은 오로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까닭에 예로부터 시에 공한 자는 대개 궁하고 근심하고 떠돌며 괴로워함을 함께하여 때와 만나지 못한다. 공교로움이 능히 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궁함이 오로지하게 만든다. 오로지하게 되면 저절로 공교해진다.” [303]


탄탈로스의 갈증


궁하다고 그 궁함속에 가라앉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결코 풍취를 포기하지 않는 독립불구의 정신, 시의 공교로움은 이러한 정신 안에서만 보장될 수 있다. 시인은 탄탈로스와도 같은 존재다. 맛있는 음식과 샘물을 앞에 두고도 영원한 갈증과 갈망 속에서 헤맨다는 탄탈로스! 시인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308]


12) 열두 번째 이야기 : 시는 그 사람이다 – 기상론


이런 맛을 아는가?


시로 쓴 자기소개서


비슷한 형편에서 같은 의도로 쓴 작품이 어찌 이리 다를까? 그 사람의 그릇이 같지 않은 까닭이다. 인간의 삶의 외형적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곤궁에 찌들어 본연의 기상마저 허물어서는 안 된다. 한시 비평에서 말하는 기상론이란 바로 시인의 기질과 삶의 자세가 그의 시에 거울처럼 비쳐진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만나보지 않고도 그 사람을 알게 된다. [319]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돋우지 않으면 꺼지고 말 심지, 끝만 남은 심지는 마치 버틸 힘조차 없는 자신의 투영이다. 굳이 곧추앉아 그는 심지를 돋운다. 잠 못 이루는 것은 온 산 가득 내린 눈 때문이 아니다. 바람소리 때문이 아니다. 온 산을 뒤덮을 만큼의 무게로 두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근심, 잊힘에의 절망 때문이다. 가물거리는 등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함은 혹 누군가 이 밤에라도 찾아올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놓지 못해서였을까? [320]


강아지만 반기고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자족의 경계, 탈속의 경지


시는 곧 그 사람이다. 알려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언어가 제 스스로 말해주는 사실이다. 언어가 그 사람의 기상을 대변한다는 것은 그 연원이 깊다. 무심히 뱉은 말이 씨가 되고,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시화에 자주 보이는 ‘시참’이 바로 이를 말한다. 시인은 모름지기 가슴속에 호연한 기상을 품을 일이다. 떳떳함을 길러야 한다. [332]


13) 열세 번째 이야기 : 씨가 되는 말 – 시침론


머피의 법칙, 되는 일이 없다


특히 앞서 무심히 한 말이 뒷날의 예언이 되는 경우를 따로 ‘시참’이라고 한다. 언어의 주술적 힘을 믿어 말을 함부로 하지 말 것을 경계한 것이다. [335]


형님! 그자 갔습니까?

대궐 버들 푸른데

하늘은 재주 있는 자를 시기한다


14) 열네 번째 이야기 : 놀이하는 인간 – 잡체시의 세계 1

글자로 쌓은 탑, 층시 또는 보탑시

회문시, 바로 읽고 돌려 읽고

그림으로 읽기, 신지체


15) 열다섯 번째 이야기 :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 잡체시의 세계 2

빈칸 채우기, 수시.팔음가.약명체

구슬로 꿴 고리, 장두체와 첩자체

파자놀음과 탁자시

이합체와 문자 퍼즐


오늘날 잡체시가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언어의 부단한 실험정신, 질곡을 만들어놓고 그 질곡에서 벗어나기, 언어의 절묘한 직조가 보여주는 즐거운 외에도 잡체시는 오늘의 시단에 의미있는 시사를 준다. 젊은 시인들이 실험하고 있는 각종의 형태시들은 기실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전통의 재현일 뿐이다. 세상은 돌고 돈다. 이 모든 현상들 앞에서 우리는 수없는 상호 텍스트화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409]


16) 열여섯 번째 이야기 : 말장난의 행간 – 한시의 쌍관의

초록 저고리, 국수 한 사발

장님의 단청 구경

견우와 소도둑


시와 말장난은 엄격히 다르지만, 언어를 주된 질료로 삼는 시는 본질적으로 얼마간 유희적 기분을 띠게 마련이다. 특히 음이 같은 말이나 뜻이 여럿인 표현을 활용한 쌍관, 즉 말장난은 현대시에서도 흔히 보는 기교다. [423]


새울음속에 담긴 사회학


선덕여왕의 자격지심


예전부터 모란꽃을 그릴 때에는 나비를 함께 그리지 않았다.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고 나비는 여든 살 늙은이를 나타낸다. 모란에 나비를 함께 그리면 여든 살이 되도록 부귀를 누린다는 것을 의미가 제한되어버린다. 나비는 왜 여든 살 늙은이가 되는가? 나비 “접”자의 중국 음은 ‘디에’인데, 여든 살 늙은이 ‘질’자의 발음이 또한 같아 서로 쌍관된 것이다. [436]


이제 이 소재들을 합쳐 읽으면 이렇다. “뜻 두신 일 뜻대로(제비꽃) 모두 이루시고, 나이 70(고양이), 80(나비)세까지 건강하게 오래 오래(바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패랭이꽃).” 이 그림은 틀림없이 생일 선물이나 회갑기념 선물로 그려준 것이다. [440]


17) 열일곱 번째 이야기 : 해체의 시학 – 파격시의 세계

요로원의 두 선비

눈물이 석 줄

김삿갓은 없다

슬픈 웃음, 해체의 시학

한시 취후의 광경

의식의 변화는 내용의 변모를 부른다. 내용만으로 의식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할 때 형식이 변한다. 기존 한시의 굳건한 문법은 개화기의 발랄한 실험정신 아래 헤어릴 수 없이 많은 해체의 양식들을 선보였다. 다만 그것이 치열한 시정신에 의해 안받침되지 못한 결과 새로운 형식들은 일과성의 장난기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들이 시사하는 의미는 대단히 심장하다. 오늘의 시단에서도 새로운 담론과 말하기 방식에 대한 모색은 활발히 계속된다. 기존 언어에 대한 회의와 불신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시의 문법을 찾아나서려는 노력도 힘차다. 그러나 새로운 말하기가 강렬한 실험적 의도를 가졌음에도 시대정신이나 시정신에 의해 안받침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잡체시나 파격시가 오늘의 시단에 던지는 의는 여전히 생생하다. [472]


18) 열여덟 번째 이야기 : 바라봄의 시학 – 관물론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꽃은 누가 알아주고 말고를 개의치 않고 향기를 낼 뿐이다. 인간이 한 세상을 살다가는 것도 이와 다를 게 없다. 귀인의 정원에서 정원사이 사랑을 듬뿍 받으며 피어나는 꽃도 있고, 깊은 산속에서 저만치 혼자서 피었다 지는 꽃도 있다. 능력 있는 인재와 그를 알아주지 않는 공평치 않은 세상길에 대한 탄식과 자조가 행간에 깔려 있다. [476]


거위에게는 거위의 생리가 있다. 이를 벗어나니 병통이 된다. 그러나 보라. 자연은 자신의 리듬을 잘 알아 억지로 거스르는 법이 없다. 열흘 넘게 굶은 거위는 탐욕을 버리는 대신 자신을 잘 지켰다.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을 많이 먹고 뚱뚱해져 날지도 못하는, 그러고도 그 맛에 길들어 살을 찌우다 마침내 제 몸을 망치는 인간 거위들은 세상에 또 얼마나 많은가. [477]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매화를 아끼는 퇴계의 마음은 마치 하나의 인격체를 대하는 듯하다. 임종하던 날 그는 매화분에 물 줄 것을 명했고, 불결한 냄새가 매화분에 닿는 것조차 미안해했다. 사물에 자아를 얹고, 관물을 통해 천기를 읽었던 선인들의 삶의 체취가 그대로 느껴진다. [480]


관물함으로써 그 속에 구현된 이理를 읽어내고, 그 이치를 본받음으로써 인간의 삶과 연관 짓는 것은 유가 인식론의 기본 바탕이다. [485]


생동하는 봄풀의 뜻



결국 마음공부는 언뜻 보아 다른 듯이 보이는 현상 속에 내재된 한 가지 이치를 수시로 자가 점검함으로써 외물에 현혹되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488]


고상안의 <관물음>이다. 오늘 잠시 승진했다 하여 기뻐할 것이 없고, 또 좌천되어 한직으로 밀려났다 해서 실망할 일도 아니다. 이래서 좋으면 저래서 나쁘고, 저래서 미쁘면 이래서 언짢으니, 군자는 의연하게 제자리에 지켜 서서 변화의 기미를 보아 몸을 맡길 뿐이다. 단순히 새옹지마의 자기 위안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490]


만물 속에 답이 있다. 고요히 바라보라. 마음이 늘 문제다. 외물에 끌려다니면 안된다. 가만히 응시하면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 하나도 모를 것 없다. 명징하고 투명하다. [491]


유아지경과 무아지경


유아지경은 시인의 주관 감정이 객관 물태에 스며 강렬한 주관의 색채를 띠는 경우다. 무아지경은 시인의 주관 정서가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물아가 하나가 되어 피아의 구별이 무너진 상태다. [492]


사물로 향하는 아의 삼투압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서로 팽팽한 표면장력을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그 균형이 깨지면서 한꺼번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서서히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시인은 이제 없다. [493]


진정한 의미에서 무아지경의 시는 없다. 무아지경이라고 해서 시인의 주관 정취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학상의 무아지경은 시인의 정신이 사물로 녹아들어 물아의 구분이 사라지고, 마침내 자신을 잠시 잊어버린 것에 불과하다. 이른바 마음이 엉기고 형상이 녹아든 ‘심응형석’의 경계다. [495]


속인과 달사


달사와 속인을 가르는 경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이다. [498]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 모두는 ‘눈뜬 장님’일 뿐이다.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려 한다고 보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깨달음은 결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아무렇게나 열리지 않는다. 손끝이 갈라지는 연습 없이, 그저 기타 들고 동해 바닷가에 서 있다고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은 순식간에 변해버린다. 차원이 달라진다. 속인과 달사의 경계는 종이한 장 차이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 차이다. [499]


이상 살펴본 관물론은 사물을 어떻게 발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마주치면서도 그저 지나치는 일상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한 사물과 낯설제 만나, 그 낯섦으로 그 사물을 새롭게 만나는 것, 이것이 관물론이 시학과 만나는 접점이다. 시인은 격물 또는 관물의 정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주변 사물이 끊임없이 발신하는 의미를 깨어 만날 수 있다. 히드라의 예민한 촉수와 같이 안테나를 세워 세계와 교신할 수 있어야 한다. [499]


시인은 반란자다. 그의 눈이 포착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다. [500]


19) 열아홉 번째 이야기 : 깨달음의 바다 – 선시


산은 산 물은 물


선은 분별지를 마음에서 걷어내는 것이다. 명상, 즉 생각을 잠재우고, 묵상, 곧 생각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그 때 남는 것은 마음뿐이다. 선은 마음을 텅비워 본래의 나와 만나는 순간이다. [504]



선기와 시취


핵심은 마음을 항상 ‘흐르는’ 상태로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510]

항상 ‘흐르는’ 상태로 망므을 유지하라. 흘러가는 상태에 자신의 정신을 얹으라. [510]


설선작시, 본무차별

선객은 깨달음의 미묘한 소식을 시의 형식을 빌어 쓴다. 금상첨화다. 시인은 선의 사고방식을 배워 자신의 생각을 이미지로 전달한다. [519]


선과 시는 애초에 길이 다른다. 선이 시가 아니고, 시도 선은 아니다. 하지만 닮았다. 방법이 흡사하다. 선이면서 선이 없어야 시라는 말은, 선의 방법을 빌려 오되 선에 함몰되지 말라는 말이다. 시이되 시를 벗어나야 선이란 말은, 어쩔 수 dqjt이 시를 빌려도 시가 선일 수는 없음을 명백히 깨달으라는 주문이다 [519]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자재원성이다. 저 하고 싶은대로 해도 행주좌와 어느 것 하나 걸림없이 원만하다. 숨쉬고 밥먹듯 자연스럽다. 이것이 선의 극치다. 시도 다를 것이 없다. 스스로를 괴롭혀 쥐어자는 시, 안 알아준다고 닦달하는 시, 알맹이 없이 허세만 남은 시는 가짜다. [522]


말을 매만져 표현을 가다듬는 것이 시가 아니다. 포단 위에 앉아 독경 소리 가다듬는 것이 참선이 아닌 것과 같다. 마음에 문득 와 닿는 것이 있으면 거침없이 토해내야 한다. 성률이나 계율에 얽매이지 마라. 뜻이 없이는 성률도 없다. 깨달음이 없이는 시도 선도 없다. 하늘에 큰 구멍이 뻥 뚫렸다고 돌멩이 가져다가 막을 생각은 말아라. 교언영색으로 구차미봉 하느니 붓을 꺾고 종이를 찢어, 혀를 물고 죽는 것이 낫다. [523]


너는 너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선에 도달하고 시를 깨달을 뿐이다. 남의 흉내로는 안된다. [523]


좋은 시는 끊임없는 반란의 산물이어야 한다. 친숙한 관습과의 결별, 익숙해진 접점에서 벗어나기를 쉼없이 추구해야 한다. [523]


거문고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선의 화두가 그러하듯이, 좋은 시는 타성에 젖은 뒤통수를 후려친다. [528]


20) 스무 번째 이야기 : 산과 물의 깊은 뜻 – 산수시


가짜 어옹과 뻐꾸기 은사

뜻있는 이들이 모두 저만 좋자고 강호로 들어가 버리면, 정작 현실의 질곡은 누가 감당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은 누가 건진단 말인가. [533]


청산에 살으리랏다


이렇듯 자연은 우리에게 떳떳한 삶의 모습을 일깨워준다. 일상에 찌들어 생기를 잃고 풀이 죽어 있을 때, 자연은 인간에게 소생의 원기를 불어넣어준다. [537]


요산요수의 변

들늙은이의 말

가을 구름이 정수리를 어루만지네



21)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실낙원의 비가 – 유선시

풀잎 끝에 맺힌 이슬

닫힌 세계 속의 열린 꿈


유선시는 고대인이 꿈꾼 상상의 세계를 노래한다. [560]


구운몽, 적선의 노래

이카로스의 날개


초월의 소망을 담은 유선의 행위가 현실의 새로운 비전과 연결되지 못한다 해서 선계를 향한 꿈자체를 배격할 필요는 없다. 실현된 수 없다 해서 더 나은 삶을 향한 열망이 배격되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절망이요 공포가 아닐 수 없다. 유선의 과정에서 만끽한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해방감은 세속적 가치의 무의미함과 인간 존재의 왜소함을 새삼 인식케함으로서 현실의 불우와 모순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해준다. [576]


22) 스물두 번째 이야기 : 시와 역사 – 시사와 사시

할아버지와 소자

시로 쓴 역사, 시사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의 거울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바람과 애환이 그대로 떠오른다. 한 편의 시는 방대한 사료로 재구성한 어떤 역사보다 더 생생하다. 사람들은 이를 일러 시사라 한다. [583]


시사는 시로쓴 역사란 뜻이다. 역사를 소재로 시를 썼다는 말이 아니라, 앞서 본 이안눌의 시처럼 시인이 직접 보고 들은 당시의 일을 시로 기록해둔 것이 뒷날 사료적 가치를 지니게 됨을 두고 하는 말이다. [584]


변새의 풍광

궁사, 한숨으로 짠 역사

사시, 역사로 쓴 시

사시는 시인이 과거의 거울에 비춰 현재를 읽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어제의 태양은 오늘도 그대로 뜬다. 지나간 역사가 오늘을 비추는 등불인 까닭이다. [603]


23) 스물세 번째 이야기 : 사랑이 어떻더냐 – 정시

담장 가의 발자국

야릇한 마음

보름달 같은 임

진 꽃잎 볼 적마다

까치가 우는 아침

내가 죽고 그대가 살았더라면

정서란 애초에 모든 것이 충족된 속에서 터져 나오는 법이 없다. 소중한 ‘무엇’밖에 놓여 있다는 생각, 안겨야할 ‘어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마음에서 정서는 비로소 움터 나온다. [625]


24) 스물네 번째 이야기 :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 상동구이론

동서양의 수법 차이

한시와 모더니즘

지훈과 목월의 거리

밤비와 아내 생각

낯선 마을의 가을비


겉보기엔 전혀 다른데 알맹이가 같은 것이 심동모이다. 우리가 말하는 의미 있는 모방은 심동모이의 모방이다. 껍데기만 같으면 못 쓴다. 이것을 다시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 상동구이다. 같음을 숭상하되 다름을 추구한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기에 같다는 말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렇게 만난다. 한시와 현대시도 그렇다. [649]


25) 에필로그 : 그때의 지금인 옛날 – 통변론

지팡이 자국마다 고이는 봄비

거미가 줄을 치듯

그때의 지금인 옛날


목마른 자 스스로 샘을 팔 일이다. 아무리 달고 찬 샘이라도 두레박줄이 짧으면 마실 수가 없다. 의지를 확고히 다잡아도 물집 터진 발로는 먼 길을 못 간다. 시인은 깊은 우물에 가닿을 긴 두레박줄을 마련해야 한다. 아무리 먼 길에도 부르트지 않는 튼튼한 다리를 가져야 한다. [660]


옛날은 그때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훗날의 옛날이다. 현재에 충실하라. 그러면 그것이 훗날의 모범이 된다. 옛것을 맹종치 말라. 그 옛것도 그때에는 하나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세월은 흘러간다. 오늘의 주인공이 내일은 무대뒤로 사라진다. ‘지금’과 ‘여기’가 차곡차곡 쌓여 역사가 된다. 사람은 가도 문학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 되게 하고, 오늘이 내일 되게 하는 원형질이 여기에 담겨 있다. [660]


사기의 불사기사


옛것을 어떻게 배울가? 그 껍질을 배우지 말고 정신을 배워야 한다. [662]


또 그는 옛사람의 정신을 본받되 ‘사필기출’ 즉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662]


도로 눈을 감아라


“너는 왜 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제가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이제 스무 해가 되었습니다. 아침에 나와 길을 가는데 갑자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는지라 기뻐 돌아가려 하니ㅣ, 골목길은 갈림도 많고 대문은 서로 같아 제 집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선생이 말했다. “내가 네게 돌아가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바로 네 집을 찾을 수 있으리라.” 이에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려 걸음을 믿고 도달할 수 있었더랍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빛깔과 형상이 전도되고, 슬픔과 기쁨이 작용이 되어 망상이 된 것이지요. 지팡이를 두드리며 걸음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분술르 지키는 관건이 되고, 집으로 돌아가는 보증이 됩니다.


<답창애2>이다. [670]



3.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와 전체적 뼈대


이 책은 총 24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크게 네 개의 덩어리로 나뉘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부터 열세 번째까지는 시의 여러 가지 특성과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예문들을 통하여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열 네 번째부터 열 일곱 번째까지는 시의 외양적인 형식을 기준으로 하여 잡체시나 쌍관, 파격시 등을 보여주고 있다. 그 뒤에 오는 열 여덟 번째부터 스물 세 번째까지는 시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따른 시의 분류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스물네 번재 이야기에서는 한시와 현대시가 같고도 다르게 계속 연결되고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마무리가 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이야기의 전개가 좋았다. 특히 초반부에서 여러 가지 한시들과 그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통해 한시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매력들을 경험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시라는 것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거리감과 거부감이 하나둘씩 책을 읽어가면서 깨어지고 어느새 나는 한시의 매력에 푹빠져서 나도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면 그리고 나서 등장한 형식의 변화나 파격과 관련된 이야기는 크게 흥미롭지 않았다. 저자도 형식의 파격에 대해서는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기보다는 필요하기에 이야기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놀이하기를 어려워하는(많이 좋아졌지만) 나의 성향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왠지 유희적인 것은 핵심을 비껴간다는 선입견이 있는 것 같다.

또 한가지 ‘한시미학산책’이라는 이 책의 제목이 참 잘 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잘 모르던 한시라는 영역을 여기저기 구석구석 상쾌한 기분으로 돌아다녀보고 호기심이 생기면 더 다가가서 보기도 하는 등 정말 한시의 아름다움과 그 의미들에 대해서 산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재미있고 가벼운 마음으로 한시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였으니 말이다.


2) 감동적이었던 장절


무엇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집착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위의 시는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파랑새>를 떠올리게 한다. 틸틸과 미틸은 파랑새를 찾기 위해 온 세상을 헤맨다. 그들은 결국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파랑새는 자기 집 새장 안에서 울고 있었는데 말이다. 깨달음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욕망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112]


이인로가 말했다.


천지는 만물이 다 좋게만 하는 법이 없다. 뿔 있는 놈은 이빨이 없고, 날개가 있으면 다리가 두 개뿐이다. 이름난 꽃은 열매가 없고, 채색 구름은 쉬 흩어진다. 사람에 이르러서도 그러하다. 기특한 재주와 화려한 기예가 뛰어나면 공명이 떠나가서 함께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치가 그러하다.


문장도 훌륭하고 공명도 함께 누리는 이치는 없다. 뿔을 가지려면 이빨을 포기하든지, 꽃이 아름답거든 열매의 내실을 기대할 수 없다. 날개를 단 채로 다리도 네 개이기를 바라거나, 채색 구름의 영롱한 자태가 길이 변치 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

라이오넬 트릴링은 “현대의 문화인은 정치적으로는 부와 쾌락을 원하면서 예술적, 실존적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쾌락을 거부하고 프로이트식으로 말해 반쾌락에서 만족을 찾는 본능적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충동은 시대를 떠나 늘 존재해왔다. 모든 것이 갖춰진 넉넉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입을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속에 이른바 정서란 것이 생겨난다. 그것이 슬픔과 분노, 격정과 눈물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이 바로 시이다. [289]

고상안의 <관물음>이다. 오늘 잠시 승진했다 하여 기뻐할 것이 없고, 또 좌천되어 한직으로 밀려났다 해서 실망할 일도 아니다. 이래서 좋으면 저래서 나쁘고, 저래서 미쁘면 이래서 언짢으니, 군자는 의연하게 제자리에 지켜 서서 변화의 기미를 보아 몸을 맡길 뿐이다. 단순히 새옹지마의 자기 위안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490]


만물 속에 답이 있다. 고요히 바라보라. 마음이 늘 문제다. 외물에 끌려다니면 안된다. 가만히 응시하면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 하나도 모를 것 없다. 명징하고 투명하다. [491]


3) 보완점

첫째, 개인적으로 한자에 대한 준비가 많이 되어 있지 않아서 한시의 풀이를 위주로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한자에 대한 음설명이 있으면 그래도 좀 더 보기가 편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둘째, 각 이야기의 배열중에 열여덟번째 관물론은 왜 잡체시와 파격시에 대한 이야기 뒤에 배치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내용의 특성상 형태나 형식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열 두세번째 중간이나 그 뒤에 놓여있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맞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관물론 이후에는 선시, 산수시, 유선시, 사시, 정시 등 시의 주제와 관련된 분류에 기반하여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혹 관물론이 시의 대상이 되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에 관련되므로 뒤에 나오는 시의 주제별 분류에 대한 서론겪으로 나온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잘 모르겠다.


셋째. 역시 한자와 관련하여 사자성어에 대한 주석이나 해설이 별도로 있으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한다. 한자나 고어에 익숙치않은 독자에게는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단어와 고사성어가 있어 별도로 찾아보고서야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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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7 07:12:57 *.154.223.199

펄펄님^^

저도 어떻게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써나갈 수가 있을까 궁금하고 기이했어요.

그 비결이 '다산이 사용하였던 ‘측류방통법’(묶어 생각하고 미루어 확장하라), ‘어망득홍법’(동시에 몇작업을 병행하며 진행하라)을 활용한다'고 밝혀주시니 후련합니다.

다산에 대한 책을 저는 전혀 읽어보지 못했는데 점점 그 어른이 궁금해집니다.

정민선생님은 책을 다 쓴 후 두어번 소리내어 읽어보고 아내에게 읽어보라 부탁하셨군요.

참으로 정성을 들여서 책을 쓰셨네요. 감탄스럽습니다.

 

펄펄님이 유희에 익숙하지 않으시다구요?^^

사부작거리며 은근 놀기 좋아하는 저도 집체시부분은 어쩐지 지루했습니다. 옛날 놀이여서 그런게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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