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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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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5일 11시 56분 등록

1.  저자에 대해서

 

소풍 준비

 

우리반에 소풍날만 되면 동물 캐릭터가 그려진 하늘색 베낭을 매고 나타나는 4학년 아이가 있다. 엄마는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가 1학년 때부터 그 가방에 맛있는 도시락과 아토피인 아이에게 소풍날만 허용되는 과자와 초컬릿을 넣어둔다. 그 가방은 소풍의 즐거움의 상징이다. 나도 소풍 가방을 챙긴다. 뒷조사 같은 저자 조사는 탐정놀이처럼 재미있다. 하지만 나를 흥신소 직원으로는 안뽑아줄 것 같다. 다른 이들이 한 지난 주의 저자 조사를 보니 내가 중요한 객관적 사실을 다 흘렸더라. 이번에는 좀 약게 해 보리라 맘먹는다. 우선 객관적인 걸 모아보자

 

한국한문학자인 정민교수는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1961년생이다. (2012년 현재 한국 나이로 52) 한양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그 대학 국문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처음 한시의 매력에 빠져 교과서와 참고서에 나오는 한시를 다 외웠다. 한문은 이미 쓸모를 잃었지만 그 안의 콘텐츠는 쓸모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두 아이의 아버지이다. 무려 47권의 저서를 써냈다. 이이는 자신이 쓴 책과 키를 재어도 겨드랑이까지는 오겠다. 저서와 부제를 연도별로 모았다  

.  

출간연도

저자 나이

(한국 나이)

저서 제목

1988

28

1

한국역대시화류

1989

29

1

조선후기고문론

1990

30

1

시문학입문

1992

32

1

한국역대화류

1995

35

1

통감절요

1996

36

1

한시미학산책

1997

37

1

마음을 비우는 지혜

2000

40

3

돌 위에 새긴 생각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비슷한 것은 가짜다

2002

42

6

초월의 상상

와당의 표정

한문의 이해

2003

43

3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2004

44

2

미쳐야 미친다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선비의 지혜(3) = 미쳐야 미친다+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내아들 딸에게 아버지가 쓴다

2005

45

6

죽비소리

어린이 살아있는 한자교과서 1,2,3,4,5(만화)

꽃들의 웃음판 (한시로 읽는 사계절의 시정)

2006

46

4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치학 10 50 200)

청소년 살아있는 한자교과서 1,2,3

2007

47

3

다산어록청상

스승의 옥편 (한문학자의 옛글 읽기, 세상 읽기)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조선후기지식패러다임의변화와문화변동)

2008

48

2

아버지의 편지

호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2009

49

1

성대중처세어록 (경박한 세상을 나무라는 처세 어록)

2010

50

2

고전문장론과 연암박지원

2011

51

7

삶을 바꾼 만남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옛사람 맑은 생각

다산의 재발견(다산은 어떻게 조선 최고의 학술그룹을 조직하고 운영했는가)

살아있는 한자교과서(청소년과 함께 살아숨쉬는 21세기 대안교과서, 생활과 한자/문화와 한자)

새로 쓰는 조선 차문화(다산 추사 초의가 빚은 아름다운 차의 시대)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젊은 인문학자 25인의 종횡무진 문화읽기) 

한시미학산책(개정판)

 

 

지금 읽고 있는 한시미학산책이 96년 그가 36세 젊은 학자일 때 쓴 책의 개정판임을 알게된다. 그래서 아빠가 연구실로 가버릴까봐 다섯 살 아들이 퇴근해서 돌아온 아빠의 양말부터 벗겼다는 말이 초판 서문에 나오는구나.

 

2011년에 그는 7권의 책을 생산했다. 여러 화분에 모종을 심어서 물을 주는 것도 아닌데 한 해에 7권의 책을 써내는 것이 가능한가? 그의 저서 <미쳐야 미친다>가 한 군데에 대한 몰입에 대한 책이라면 그도 미쳐서 미친 한 사람일 것 같다. 이 많은 책을 쓰기 위해 그는 학교 연구실에서 많은 시간 공부를 했겠다.

 

제목과 부제를 보면서 악수하고픈 책을 고른다. 초판 <한시미학산책>, <미쳐야 미친다>, <스승의 옥편>, 어린이를 위한 한시 입문서인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청소년 대안 교과서를 지향하는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 1,2,3>, 만화로 된 한자 학습서인 <어린이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 1,2,3,4,5>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이야기인 <삶을 바꾼 만남> 2011,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2011, <선비의 지혜>2004 이다. 어린이를 위한 한시나 한자 책을 먼저 읽고 난 뒤에 개정판 <한시미학산책>을 읽으면 덜 어려울 듯 하다.   

 

 

소풍 1 – 화도진도서관에서 저서와 악수하기

 

인천 화도진도서관은 우리집에서 산책삼아 걸어서 갈 수 있다. 수도국산을 넘어서 송현시장 지나 동인천역에서 인천역으로 가는 철길과 나란히 걷는다. 1층에 어린이 도서관이 있고 3층에 일반도서관이 있었다. 1층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아빠와 같이 와서 책을 읽고 있다. 저자의 책을 찾으러 서가를 다니면서 내가 만나고 싶은 다른 이름들을 만나는 기쁨이 있었다. 1주일 관외대출이 가능해서 5권을 빌려서 짊어졌다. 화도진도서관에 갈 때마다 들르는 중국집에서 짬뽕을 시켜먹었다. 봄비가 내리는 저녁이라 으슬으슬했다.  

 

[스승의 옥편]

이 책을 맛뵈기로 슬쩍 보고서 <한시미학산책> 책의 한자에 대한 부담이 없어졌다. 나는 사실 한자때문에 너무나 힘들어하고 있었다. 몇 번 짬뽕 먹다가 눈물이 났다. 사제간의 정 때문이다. 어린이를 위한 한자 교과서, 청소년을 위한 대안교과서로서의 한자 학습서를 만들어낸 한문학자의 정성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원한 것이 한자를 보라는게 아니라 한자는 참고나 사실을 중시하는 학자의 성의일뿐 나 같은 이는 그냥 한자를 번역해준 시를 즐기면 될 일이었다. 이 책 ,한시미학산책은 제목처럼 한시를 사랑한 한문학자와 대동해서 떠나는 산책이다. 한시에 드러난 미학, 또는 시학에 대해 그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마을은 나에게는 외국의 어느 마을 못지않은 낯선 풍경이다.    

 

초판 [한시미학산책]

24꼭지로 나누고, 24꼭지의 제목이 개정판과 같다. 대신 그림이 없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어려워보이는 책이 되어 버렸다. 나는 개정판을 접한 행운아다.

 

[미쳐야 미친다]

요건 아직 못 읽어봤다. 표지가 나달나달하다.

 

[꽃들의 웃음판]

화가 김점선씨가 그림을 그렸다. 사계절을 나타내는 한시가 그림과 어우러져있다. 직장 내 책상 옆에는 그녀의 그림이 한 개 있다. 예술의 전당 아트샵에서 사왔다. 이이가 그림을 그린 장영희 <영미시 산책>, 법륜스님 <스님의 주례사>도 갖고 있지. 거기서 보던 다리 두꺼운 오리가 여기서도 종횡무진한다.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중학생인 딸 마루와 초등학생인 아들 벼리, 그 중 아들 이름을 부르면서 한시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한시미학산책>에 나온 이야기가 쉬운 말로 고대로 나온다. 이거야 말로 횡재다.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다산선생이 두 딸에게 그려준 매화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니, 다산선생이 강진에 20년간 유배가 있을 때 소실을 두었고 거기서 딸이 났단 말이야? 그런 이야기는 몰랐네. 이런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를 다산으로 이끈다. 다른 한국학자들이 이런 저런 그림과 이야기를 올려놓았다. 숙제에 치여 못본다.   

 

 

소풍 2 – 한양대 교정 어정거리기

       

그가 한양대 국문과에 들어간 스무살 정도부터 그 대학에서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면 스무살 이후 이 학자의 주된 생활근거지는 군대에 갔을 때, 가족이 대만으로 교환교수를 간 때를 빼고는 한양대일 것이다. 나는 한국 드라마 세트장에 가보는 일본아줌마팬처럼 한양대학교에 한 번 가보고 싶어졌다. 그 때는 그 대학을 다닌 둘째올케와 동행할 것이다. 언제일까? 그 근처에 골동품들과 다락방에 있던 것들이 모여있는 황학동 시장이나 광장시장, 또는 마장동 정육점 늘어선 시장이 있으면 거기도 구경가고 싶다. 이건 3월 개학 후 경황이 없어서 아직 못 갔다. 저자를 핑계로 내 볼일보고 놀러다니려는 거다.

 

 

2.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개정판 지은이의 말

 

도판을 여럿 넣어 눈을 즐겁게 한 것이 특별히 자랑스럽다. 보기가 한결 시원하다.

 

묵은 자취를 매만지는 작업은 때로 새로 쓰기보다 힘들다.

 

제 딴엔 한층 업그레이드된 이해로 새 독자와 만나게 되어 설렌다. 몸가짐은 무겁게 말을 더욱 아껴서, 오래 함께 하고 싶다. 초판을 낼 당시 다섯 살 배기 아들은 아빠가 저하고 안 놀아주고 다시 연구실로 갈까 봐 집에 오면 막무가내로 양말부터 벗겼다. 그러던 녀석이 이제 훌쩍 커버려 아비가 올려다보아야 하는 장정이 되었다. 그 세월을 두고도 왜 할 말이 없겠는가

 

초판 지은이의 말

 

한시는 전달의 특수성 때문에 오늘날 그 효용가치를 상실했다. 한시는 전문연구자들의 학술적 관심사가 되고 있을 뿐,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버린 낡은 길이다. 그렇다고 한시가 추구한 정신의 깊이나 미학의 너비마저 덤불 속에 버려둘 수는 없다. 먼지 쌓인 역사의 뒤편에 방치된 채 날로 그 빛이 바래가고 있는 한시에다 신선한 숨결을 불어넣고 막힌 길을 뚫어 현대적 의미를 밝히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진 책무다.

 

우리 전통 한시 작품과 이론 중에는 소중한 깨달음을 던져주는 값진 보석들이 많다. 서양의 경우 미학가들 가운데 실제로 예술가였던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반면 동양에 있어 미학은 시인 에술가들이 삶 속에서 구분됨없이 실천적으로 통합되어 추구되엇다. 그러므로 이들이 던지는 미학적 물음에는 생생한 삶의 체취가 묻어난다. 바야흐로 새롭고 풍성한 담론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작금이다……낯설기까지 한 선인들의 안쓰러운 시 사랑에 한번쯤 귀기울여 볼 여유가 이제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여기에는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전혀 새로운 담론의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시마에 붙들인 듯 다른 일에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근원이 깊지 않고 보니 퍼가기만 한 샘에 고인 물이 얼마 없다….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용기로 채워주신 사백들의 성원을 잊을 수 없다.

 

연구실에만 처 박혀 놀아주지도 못하는 아빠의 미안한 마음을 이 책에 담아본다. 가족에게 작은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말없이 서로 통하는 마음이 있단다. 시를 좋아하는 것은 이런 느낌을 좋아하기 때문이야….옛날에도 우리 말로 된 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한자로 글을 짓고 썼단다. 시도 한자로 지었지. 한자를 가지고 지은 시라서 그것을 한시라고 부른다. 물론 너는 아직 한자를 많이 알지 못하니까 한시는 네게는 조금 어려울 거야. 어른들도 대부분 한시가 골치 아프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든.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단다. 지금 네 앞에 영어로 된 책이 있다면 무슨 뜻인지 알수 있겠니? 영어로 된 동화책을 우리 말로 옮겨서 읽으면 아무 문제 없이 이해할 수가 있지? 이와 마찬가지로 한자로 쓰인 한시도 아빠가 한글로 옮겨서 설명해 줄게. 그러면 네가 읽고 이해하는데 별문제가 없을거야….아빠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네가 전에는 몰랐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과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을 게다. 말을 조금만 하고도 웅변보다 더 큰 울림을 남길 수 있다는 것도 알수 있을 거야. 나무에만 무늬가 있지 않고 우리들 마음 속에도 무늬가 있다. 시 속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정이 녹아들어 있지. 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 13 (머리말에 해당함)  

 

 

에필로그 그 때의 지금인 옛날

 

서문에서 제기했던 물음에 대해 에필로그에서 다루고 있다. 나는 에필로그의 밑줄 그은 부분은 본문보다 먼저 타이핑하고 싶어졌다. 연암의 글로 시작해 연암의 글로 끝이 난다. 서문과 에필로그를 이해하는 게 본문 이해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느낌.

 

지금과 옛날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나. 시간의 강물도 여기서는 의미가 없다. 깊은 밤 연구실에 앉아 백광훈의 시를 번역하다가 권필의 시를 소리 내어 읽다가 몇 백 년 전 그들과 어제처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울면 나도 울고, 그가 웃으니 나도 좋다. 회심의 글귀와 쾌재의 문장을 만나면 공연히 마음이 설렌다. 옛 것이 어째서 오늘에 감동을 주는가? …형식의 복고에 앞서 원형질을 찾아나서는 일이 우선해야 할 것 같다. 형식은 변한다. 생각도 변한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이 강산 이 흙을 밟고 살아온 사람들의 가슴 속에 스민 정서는 세월로도 씻을 수 없는 원형질로 남는다. – 655

 

주역에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통하면 오래간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이것과 저것이 다름을 확인함에 있지 않고 그 사이에 숨을 통하게 하여 오래 가게 만드는 일이다. 이른바 통변의 정신이 여기서 나온다. – 659

 

문학에는 정해진 규범과 형식이 있다. 새것을 추구해도 이것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새것이 힘을 얻으려면 옛것을 변화시키는 통변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659

 

저마다 마음으로 깨달을 뿐 누가 일러줄 수가 없다. 목마른 자 스스로 샘을 팔 일이다. 아무리 달고 찬 샘이라도 두레박줄이 짧으면 마실 수가 없다. 의지를 확고히 다잡아도 물집 터진 발로는 먼 길을 못간다. 시인은 깊은 우물에 가닿을 긴 두레박줄을 마련해야 한다. 아무리 먼 길에도 부르트지 않는 튼튼한 다리를 가져야 한다. – 660

 

옛날은 그때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훗날의 옛날이다. 옛것을 맹종치 말라. 그 옛것도 그때에는 하나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세월은 흘러간다. 오늘의 주인공이 내일은 무대 뒤로 사라진다. ‘지금여기가 차곡차곡 쌓여 역사가 된다. 사람은 가도 문학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 되게 하고 오늘이 내일 되게 하는 원형질이 여기 담겨 있다. – 660

 

시인은 자신의 노래로 귀신을 울게 해야 한다. – 662

 

그때의 지금이었던 왕희지의 글씨가 후대 서가의 준이 되듯, 오늘 여기서 부르는 내 노래는 뒷날 시가의 보석이 된다. – 662

 

하나도 같지 않은 그것을 배워야 한다. 그 정신을 본받아야지 그 말을 흉내내면 안된다. 이른반 사기의 불사기사의 정신이다. <답유정부서>에 보인다. 또 그는 옛사람의 정신을 본받되 사필기출, 즉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정신은 본받고 표현은 본받지 말라니…663

 

공명선은 글 한 줄 안 읽었지만, 스승이란 책을 옳게 읽어낸 독서가다. 다른 제자들이 옛 경전에 눈이 팔려 있을 때 그는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 읽었다. – 664

 

제식훈련 한 번 제대로 받지 않은 오합지졸들을 부릴 줄 알았던 한신의 용병술은 일반 병법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겼다. 왜 그랬을까? 통변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신이야말로 정말 멋진 문장가가 아닐 수 없다. 시도 이런 정신으로 써야 한다. - 664

 

같은 배수진이었지만 한신은 이겼고 신립은 졌다. 왜 그랬을까? 배수진을 쳐서는 안될 곳에 쳤기 때문이다. 남의 흉내나 내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여라. 옛것을 따르지 마라.

 

충무공은 명량해전에서 거북선 한 척 없이 단 12척의 배로 기세높던 일본 배 130척을 물리쳤다….중요한 것은 거북선이 아니다. 그 것을 운영하는 장수의 용병술이다. – 666

 

우리에게 고급한 문예이론이 없었던가? 우리에게 깊이있는 미학의 체계가 없었던가? 과거의 시학은 오늘날 시학에 아무런 처방이 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그것은 지금껏 해독되지 않은 파일로 남아 있었을 뿐이다….옛것을 오늘날로 호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발이야말로 정말 요긴한 것이 아닐까? 한유가 말한 정신을 배울 뿐 표현을 본받지 않는다는 원리를 환기한다면 우리가 한시를 통해 퍼 올릴 수 있는 샘물은 무궁무진하다. – 668

 

한시 연구에서 논문을 쓰자는 것인지 위인전을 쓰고 있는지 분간 안 되는 연구들은 얼마나 많은가? – 669

 

문학성이 담보되지 않은 의식이란 대자보나 설교와 무엇이 다른가? 미의식의 부재는 문학성의 검증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가뜩이나 한문 해독이라는 부담을 지고 가는 터에 미학의 잣대마저 흔들리니 결국 인치를 가지고 자척을 재려 드는 격이 되고 만다. - 669

 

이 책의 맨 처음을 연암으로 시작했으니 연암으로 끝을 맺겠다. – 669

 

지팡이를 두드리며 걸음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분수를 지키는 관건이 되고, 집으로 돌아가는 보증이 됩니다. – 670

 

20년 만에 눈이 열린 장님에게 다시 눈을 감으라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내가 나의 주인이 못 되고 내 집을 찾아가지 못할진대 열린 눈은 망상이 될 뿐이다. 소화하지 못하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우리는 눈뜬 장님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다가온 서구의 빛깔과 형상에 망상을 일으켜 어느 골목이 바른 골목인지, 어느 대문이 제 집인지도 모르고 길가에서 망연자실 울고 있는 눈뜬 장님이었다. 연암은 간명하게 알려준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네 집을 찾으리라. 나는 그의 말을 외래의 것을 버려 자신의 소아 속에 안주하라는 말로 듣지 않는다. 주체의 자각이 없는 현상의 투시는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내가 본래 있던 그 자리, 미분화된 원형질의 상태로 돌아가라. 눈에 현혹되지 마라. 네 튼튼한 발을, 네 듬직한 지팡이를 믿어라. 갑자기 눈이 열리기 전 내 앞에 놓여 있던 세계, 익숙해져 있던 세계, 나와 사물 사이에 아무런 간극도 없던 세계로 돌아가라. 그 세계가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래의 제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 차차 새롭게 열리는 빛의 세계를 바라볼 일이다. 문학은 발전해왔는가? 아니다. 다만 변화해왔을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라. 먼저 네가 들어가야할 대문부터 찾아라. - 671

 

국문과 교수이면서 한문학자인 저자는 서구에서 들어온 담론을 가지고 한국인의 여학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낀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전통, 특히 한시 안에 시와 문학에 대한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담론이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듯 하다. 그 알맹이 정신을 찾아(이것이 통변이다) 옛 사람의 정신을 본받되, 자기 목소리를 내라고 한다. 옛날과 지금을 통하는 그 정신을 한시를 재료로 삼아 24가지 면에서 살피고 있다. 

 

장님이 눈을 떳다면 정상인이 된 것인데 그는 정상인이 되자마자 자기 집도 못 찾는 바보가 되고 밀았구나. 이 눈 뜬 장님이 바로 우리들이란다오늘날 과학 문명은 지구촌 한 가족이란 말을 실감하게 할 정도로 빠르게 세계를 하나의 울타리로 묶어주고 있다. 그렇지만 매일 쏟아져 나오는 그 많은 정보들도 내가 판단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 내 집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내 집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면 골목길이 아무리 복잡하고 대문이 비슷해도 아무 염려할 것이 없어지지. 내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저절로 생겨나게 된단다. 길에서 울고 있을 필요가 없게 돼. 우리가 한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되게 만드는 힘이란다. 옛날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그리고 그 생각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겠니? 내가 나를 잘 알 때 비로소 남이 보이기 시작한단다. 남만 알고 나를 모른다면 그것은 안 것이라고 할 수가 없어. 무조건 우리 것이니까 좋다고 해서도 안 된다. 다시 눈을 질끈 감고 내 지팡이를 믿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 벼리야, 아빠가 지팡이가 되어 너를 도와줄게, 아빠랑 이 길을 함께 가보지 않겠니? – 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182

 

 

첫 번째 이야기. 허공으로 난 길 - 한시의 언어미학

 

 

 

이른 아침 나무 그늘에서 노니는 새들의 날갯짓과 지저귐 속에서 연암은 글자로 쓰이지 않고 글로 표현되지 않은 문장을 읽는다. 새들의 날갯짓이 주는 터질 듯한 생명력, 조잘대는 울음소리가 들려주는 약동하는 봄날의 흥취를 어떤 언어로 대신할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은 이를 생취 또는 생의라 하였다. 말 그대로 살아 영동하는 운취인 것이다. 생취나 생의가 없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 사물의 심장부에 곧장 들어가 핵심을 찌르려면 죽은 정신, 몽롱한 시선으로는 안된다. 시인은 천지현황의 나태한 관습을 거부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선입견에 불박혀 간과하고 마는 까마귀의 날개 빛깔을 살피는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 – 18

 

시인은 천기를 누설하는 자이다. 시를 쓰는 능력은 누구나 타고 나는 것이 아니다.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다. 노력하지 않고 절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 19

 

엄우는 시인이 지녀야 할 미덕을 흥취에서 찾는다. 앞에서 말한 생취와 같은 뜻이다.

 

흥취를 지닌 시는 어떤 시인가?...엄우는 이를 다시 몇 가지 비유로 제시한다. 공중지음, 상중지색, 수중지월, 경중지상이 그것이다. 허공에 울려퍼지는 소리나 형상속에 깃들어 있는 미묘한 색채, 물 속에 찍힌 달, 거울 속의 형상은 모두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다….시인의 정신은 저만치 허공에 떠 잇고 언어를 통해 수면 위에 그 정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다. 한 편의 훌륭한 시는 독자에게 느껴서 알게할 뿐, 따져서 납득시키려 하지 않는다. 엄우는 언유진이의무궁이란 말로 위 단란을 맺었다. 종을 치면 종소리는 긴 파장을 내면서 하공으로 퍼져 나간다. 이렇듯이 시는 독자로 하여금 읽는 행위가 끝나는 순간부터 정말로 읽는 행위를 시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시의 언어는 젓가락으로 냄비뚜껑을 두드리듯 해서는 안된다. 범종의 소리와 같은 유장한 여운이 있어야 한다. – 22

 

시는 시인이 짓는 것이 아니다. 천지만물이 시인으로 하여금 짓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시에서는 사물이 직접 말을 건넨다. – 22

 

말하자면 시인은 사물의 몸짓을 언어로 전달하는 매개자일 뿐이다. 따라서 시는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 시인이 직접 다 말해서는 안 된다.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게 해야 한다. – 23

 

행간에 감춰진 함축, 단어와 단어가 만나 부딪히는 순간순간의 스파크, 그런 충전된 에너지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취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 23

 

이상 세 편의 감상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시인이 글자로 말하고 잇는 지시적 사실은 시에서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그 행간에 감춰진 울림, 언어의 발자취를 벗어나 허공에 매달려 잇는 떨림이 중요하다. 그런 울림이 아예 없거나 그런 떨림을 외면한 시는 화려한 수사로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교언영색에 지나지 않는다. 천진에서 우러나오는 흥취가 없는 시는 독자를 짜증나게 만든다. – 28

 

한시는 이미지의 구성이 탄탄하고 언외의 함축이 유장하다. 그로 인해 한시의 감상은 매우 지적이고 감성적인 바탕이 요구된다. – 28

 

알아들을 수 있는 귀, 바라볼 수 있는 눈 앞에서만 예술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눈과 구니ㅡㄴ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정신의 심층부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을 일러 영각이라고 한다. – 29

 

머금어 쌓인 뜻이 깊어야지만

씹을수록 그 맛이 순수하다네

 

꽃만 따고 그 열매를 버리게 되면

시 속에 담긴 뜻을 잃게 되느니               이규보 <논시> 일부 – 29

 

중요한 것은 번드르르한 거죽이 아니다. 속 알맹이다. – 31

 

연암은 난데 없이 이명과 코골기를 들고 나왔을까/ 이명은 자기만 알고 남은 켤코 알 수가 없다. 코골기는 남들은 다 아는데 정작 자기만 모른다. 사람들이 안목이 없어 나의 이 훌륭한 작품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탄식하고 원망하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이명증에 걸린 꼬마다. 남의 적절한 지적에도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는 사람은 코를 고는 버릇이 있는 시골사람이다….코골기는 병이 아닌데도 남이 먼저 안 것에 발끈하니 정말 그의 병통을 지적해준다면 그 성내는 꼴을 또 차마 어찌 보겠는가? – 32

 

 

두 번째 이야기. 그림과 시 사의전신론

 

시와 그림은 전통적으로 서로 연관이 깊다.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없는 시란 말도 있다. 특히 한시는 경물의 묘사를 통한 정의의 포착을 중시한다. 이는 마치 화가가 화폭 위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표현하는 것과 같다. 경물은 객관적 물상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얹을 수 있는가. 화가는 말을 할 수 없으므로 경물이 직접 말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사의전신이라 한다. 말그대로 경물을 통해 뜻을 묘사하고 정신을 전달해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입상진의이니 상세한 설명 대신 형상을 세워 뜻을 전달한다. – 37

 

수묵으로 달을 그릴 때 달은 희므로 색칠할 수 없다. 달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달만 남겨둔 채 그 나머지 부분을 채색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그리는 방법이다. 시에서 시인이 말하는 방법도 이와 같다. 성동격서란 말처럼 소리는 이쪽에서 지르면서 정작은 저편을 치는 수법이다. 나타내려는 본질을 감춰두거나 비워둠으로써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 41

 

요컨데 한 편의 훌륭한 시는 시인의 진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상을 통한 객관적 상관물의 원리로써 독자와 소통한다.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건네는 대신, 대상 속에 응축시켜 전달한다. – 43

 

다시 말해 시인은 할 말이 있어도 직접 말하지 않고 사물을 통해 말한다는 것이다. 아니 살무이 제 스스로 말하게 한다. - 44

 

시인은 외롭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서 독자를 외로움에 젖어들게 해야 한다. 괴롭다는 말을 해서도 안된다. 그래도 독자가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시인이 직접 나서서 시시콜콜한 자신의 감정을 죽 늘어놓는다면 넋두리나 푸념일 분, 시일 수는 없다. -44

 

시인이 할 200자의 할 말이 있다면 그는 이것을 어떻게 20자로 줄여 말할 것인가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180자를 걷어낼 것인가로 고민한다는 말이다. 반대로 독자는 시인이 하고 싶었지만 절제하고 걷어낸 말, 즉 행간에 감추어둔 뜻을 어떻게 충분히 이해하고 깨닫느냐의 문제가 주된 관심사가 된다. – 45

 

사마광은 윗글에 이어 이렇게 말했다. “옛사람은 시를 지음에 뜻이 말 밖에 있는 것을 귀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여 이를 얻게 하였다.” 시인이 다 말해버려서 독자가 더는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은 시가 아니다. – 46

 

그가 제목에서 말한 홀로 앉아 있음의 참의미는 하수상한 시절에 때를 기다리는 오롯한 몸가짐과 기다림이었던 것이다. – 49

 

그림을 그릴 때 장수의 기상은 목이 없는 듯 짧게 그리는 데서 드러나고, 미인의 가녀린 모습은 어깨 없이 부드럽게 흘러내린 곡선을 통해 강조된다는 말이다. – 50

 

이러한 예화는 화가가 살아있는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실을 일부 과정하거나 변형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설사 사실을 일부 왜곡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화가는 사실을 무시해도 좋은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러한 과장과 변형은 의경의 함축에 목적이 있다. – 54

 

그러므로 시를 읽는 독자는 시인이 쳐놓은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어서는 안된다. 그 대신 행간을 읽을 줄 아는 식견을 길러야 한다. – 53

 

멀리 떨어져 잇던 흰둥이가 좆아가서는 어느새 어우러져 이보란 듯이 제 주인에게 돌아오듯, 멀리서 조금씩 가까워지면 설레어버린 마음을, 그 아가씨와 다정히 앉아 졍겨운 대화라도 나누고픈 마음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 55

 

그림이 묘하기는 하다. 다만 사람이 고개를 올려보면 목 뒤에 반드시 주름이 잡히는 법이다. 이 그림에는 그것이 없으니 뜻을 크게 잃었다. -56

 

그림은 좋다만,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는 반드시 자기 입이 절로 벌어지는 법이다. 이 그림은 다물고 있으니 크게 실격이다. – 56

 

월계화는 잘 그리기가 어렵다. 대개 사계절 아침저녁의 꽃술과 잎 모양이 모두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봄날 정오의 것이다. 터럭만큼의 차이도 없다. 그래서 후하게 상을 준 것이다. – 58

 

꽃이 활짝 피고 색이 말라 있는 걸 보니 이것은 해가 중천에 있을 때의 모란이다. 고양이 눈의 검은 눈동자가 실낱같이 가느니 이 또한 정오의 고양이 눈이다. 예술작품의 진가는 이렇듯 알아보는 안목 앞에서만 빛나는 법이다. – 58

 

관념화된 그림, 진정을 상실한 그림은 좋은 그림이 아니다. – 59

 

화가가 형상을 핍진하게 묘사하거나 시인이 대상을 방불하게 묘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거기에 정신을 담는 일이다. – 59

 

공의 실제 경물과 만나 먼저 이 구절을 얻었을 것이다. 나머지 구절은 그 다음에 만든 것이다. 시 전편의 참된 뜻이 모두 이 구절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만 비점을 쳤다.” 비록 속인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안목 있는 사람 앞에서 진짜와 가짜는 금세 판별되고 만다. – 61

 

한 편의 훌륭한 시는 겉으로 보기에는 덤덤한 듯 하지만 하나하나 음미해보면 그 행간에 감춰진 함의가 무궁하다. 시인의 진실한 느낌이 없는 시는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해도 독자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 66

 

시인의 덤덤한 듯 툭 던지는 한마디가 예리한 비수처럼 독자의 의식을 헤집는다. 좋은 시는 독자에게 방심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허를 찔린 느낌을 준다. - 66

 

 

세 번째 이야기. 언어의 감옥 - 입상진의론

 

젊은 화가는 말을 따라가는 나비 떼로 꽃향기를 표현했다. 이런 것을 한시에서는 입상진의라 한다. 이 말은 형상을 세워서 나타내려는 뜻을 전달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나비 떼라는 형상으로 말발굽에 묻은 향기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을 시에서는 이미지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러니까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은 바로 이미지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과 같다. (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27)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뛰어난 화가는 그리지 않고서도 다 그린다. 훌륭한 시인은 말하지 않으면서 다 말한다. 좋은 독자는 화가가 감춰 둔 그림과 시인이 숨겨둔 보물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찾아낸다. 그러자면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32)

 

 

봉래 양사언이 서울의 백광훈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반가운 마음에 겉봉을 뜯어보니 딱 열두 자 한 줄의 사연이었다. ‘삼천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소

야릇할 손 봉래의 편지여! 삼천리 밖에서 한조각 구름 사이로 얼굴을 빼곰히 내민 달과 친하다니 말이다. 그리움을, 보고싶단 말을 이리 전하는 마음, 삼천 릴 밖에서 보낸 편지치고는 싱거워서 뭉클한 사연이다. – 69

 

푸른 깁창 아래서 봉함을 뜯어보니

편지지엔 아무것도 써 있질 않더이다.

아하, 우리 임이 이별의 한 품으시고

말없는 가운데 그리는 맘 담으셨네      곽휘원의 아내, 청나라 원매 <수원시화> - 72

 

느슨하지도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제 마음과 손으로 느껴 깨달을 뿐이지요. 그 이치는 제 아들 녀석에게도 가르쳐줄 수가 없고 전하에게도 알려드릴 수가 없지요. – 75

 

언어란 본시 부질없는 것이기에 큰 진리는 언제나 언어를 초월하여 전해지고 깨달음은 언어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사벌등안의 법을 말한다. 언덕을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장자는 득어망전을 말한다. 고기를 얻었으면 통발을 잊어라. 또 득의망언, 즉 뜻을 얻었거든 말을 잊으라고 주문한다. 지붕에 올라간 다음에는 누가 쫒아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치워야 한다. 유용한 진리는 언젠가 버려야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움베르토 에코의 말이다. – 78

 

말하는 이의 입상이 듣는 이에게 진의 되기까지는 이렇듯 몇 차례의 유추와 비약이 감행된다. – 79

 

토정비결이 일어주는 점괘는 모두 입상으로만 되어 있다. 그 안에 담긴 뜻은 그래서 사람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풀이된다. 토정비결이 언제든지 신통력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입상들은 흔히 뒷사람들의 견강부회를 낳게 마련디ㅏ. – 80

 

그러나 이러한 오해의 염려 때문에 입상을 포기할 수는 없다. 직설적 언어의 나열보다 전달 면에서 더욱 훌륭한 효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80

 

겸재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어김없이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림에서의 입상진의다. – 84

 

네 녀석이 뭐하든 말든 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설경만은 꼭 보아야겠노라는 말이다나그네와 어린 사미승 사이의 신경전이 절로 웃음을 자아낸다. – 87

 

이슬 먹은 살구가지가 날 향해 기울었네 – 88

 

봄이 떠나는 옛 절 무덤 앞에서 시인은 봄비에 젖어 숲을 걷는다. – 89

 

가는 범에 져버린 꽃은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꽃이 되고 봄이 되어 벌을 몰고 돌아오는 것이다. – 89

 

둔덕 가득 흰 구름을 갈아도 끝이 없고

못 속의 밝은 달은 낚아도 자취 없네

섬돌 쓰는 대 그림자 먼지는 그대로요

못을 뚫는 달빛에도 물에는 흔적 없네

푸른 바다 배 간 자취 찾기가 어렵고

청산에는 학 난 흔적 보이지 않는 구나    송나라 때 관사복 - 89

 

 

네 번째 이야기. 보여주는 시, 말하는 시 - 당시와 송시

 

내노라하는 역대의 쟁쟁한 시인들이 한자리씩 차지했다. 이 나라에서 지위의 높고 낮음은 단지 시를 쓰는 능력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당대의 쟁쟁하던 선배인 서거정, 성현, 어숙권 등은 지방의 미관말직을 전전하고 있는데 반해, 현세에서 불우를 곱씹던 그는 자신이 꿈속에 세운 시의 왕국에서 천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승승장구한다. – 95

 

천자 최치원이 당시풍만 좋아하여 자기와 같이 송시풍을 즐겼는데 사람들을 박대하여 등용치 않으므로 참을 수 없어 거병했다는 사연이니 – 95

 

이 두가지가 함께 거론될 때면 대부분 당시풍을 더 높이 평가했다. 비평 현장에서 당나라 송시는 왕조 개념이 아닌 시의 취향 혹은 성향을 마하는 풍격 용어로 쓰인다. 달리 말해 당나라 시인의 시에서도 송시풍을 찾아볼 수 있고, 청나라 시인의 시에서도 당시풍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97

 

산은 늘 그자리에 서있지만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면 날마다 그 모습을 바꾼다. – 97

바다를 앞에 두고 산 사람들도 이런 말을 하더라. 나는 산을, 바다를 매일 다른 얼굴을 관찰하고 알아채는 일상을 살게 될까? 

 

당시를 두고 흔히 중국 고전시가의 꽃이라고 말하여 계절로 치면 봄에 해당한다고들 하고 이에 반해 송시는 가을에 비긴다. – 98

 

말하는 시가 좋은 지 보여주는 시가 좋은 지는 순전히 읽는 이의 기호에 달린 것이다. 둘 사이의 우열을 갈라 말하기가 어렵다. – 98

 

무월은 논송시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시는 작약이나 해당처럼 짙은 꽃과 화려한 색채가 있다. 송시는 한매나 추국처럼 그윽한 운치와 서늘한 향기가 있다. 당시는 여지를 씹는 것처럼 한 알을 입 안에 넣으면 단맛과 향기가 양 볼에 가득 찬다.  송시는 감람을 먹는 것처럼 처음엔 떨떠름한 맛을 느끼지만 뒷맛이 빼어나고 오래 간다. 이것을 산수에 노는 것에 비유하면 당시는 곧 높은 봉우리에서 멀리 바라보매 의기가 드넓어진 것과 같고, 송시는 곧 그윽한 골짜기의 냇물을 찾아가 정경이 서늘한 것과 같다. – 100

 

당시의 묘사적이고 서정적인 경향과 송시의 사변적이고 논리적인 경향을 잘라 대비한 내용이다. – 101

 

신경준은 <시칙>에서 역대로 많은 시가 있어왔지만 시의 작법은 영묘와 포진 두 가지를 벗어날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당인은 광경을 즐겨 서술하였다. 그래서 영묘가 많다. 송인은 의론 세우기를 즐겨하였다. 그래서 그 시에 포진이 많다….송시가 당시만 못한 것은 바로 기격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지 포진이 영묘만 못하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 100

 

 당시의 묘사적이고 서정적인 경향과 송시의 사변적이고 설리적인 경향을 갈라 대비한 내용이다.당시의 특징으로 거론한 영모란 글자 그대로 그림자를 묘사하는 것이다….포진이라 함은 있는 그대로 펼쳐 진술한다는 의미다. 시인이 의론을 세워 자신의 주의주장을 전달하려 할 때 흔히 이 방법을 사용한다. 당시가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취향이라면, 송시는 고전적이고 이성적인 취향이다. – 101

 

전종서사 <담예론>에서 사람의 일생에서 소년 시절에는 재기가 발랄하여 마침내 당시의 기풍을 띠게 되고 노년 시절에 이르면 사려가 깊어져서 송시의 기풍을 띠게 마련니다라고 한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도 이럴 진데 문학 환경의 변화에 따른 시풍의 변모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점은 현대의 시인도 비슷하다. -101

 

당시와 송시의 구분은 실제로는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와 연관되는 것이기도 하다. - 102

 

말하자면 시 속의 경물은 자신의 의논을 펼치기 위해 짐짓 끌어온 차용물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것이 당시와 송시의 차이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 103

 

당시는 가슴으로 쓴 시이다. 여기에는 시인의 웃음과 눈물이 있어, 마음으로 전해오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하다. 이에 반해 송시는 머리로 쓴 시이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깊고 담담한 관조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망이 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위안과 인간의 정신을 고원한 곳으로 이끌어주는 깊이가 있다. – 103

 

시인이 그려 보이고 있는 경물은 그 자체로 합목적적일 뿐 제3의 의도를 지향하지는 않는다. – 105

 

스무자에 불과하지만 갈 가는 나그네의 신고와 벼에 저미는 외로움이 생생하게 마음을 파고 든다. – 106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 해도

흰머리의 어버이 근심할까 저어하여

그늘진 눈 쌓인 눈이 깊이가 천 장인데

올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다 적었다네           이안눌, <집에 편지를 부치며> - 107

 

그가 변방에서 고생하느라 하도 야위어, 아내가 예전 치수대로 지어 보낸 겨울 옷이 커서 입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위 시는 그 편지와 옷을 받고 지은 시이다. – 107

 

당시풍의 시는 이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보다는 감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즐겨 불린다. – 108

 

대체로 송시는 이 시기 발달한 선종과 성리학의 영향으로 인생에 대한 철학적 음미를 내용으로 하는 경향이 짙다. – 109

 

종일 봄을 찾았어도 봄은 보지 못했네

짚신 신고 산머리 구름 위로 가보았지

돌아올 때 우연히 매화 향기 맡았으니

봄은 가지 위에 어느새 와 있었네         송나라 어느 비구니의 오도시-112

 

송시풍의 시는 담담한 가운데 깊이를 지녔다….송시는 시인이 자신의 정의를 대상을 통해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 114

 

마이어 에이브럼스는 <거울과 등불>이란 책에서 문학의 기능을 거울과 등불의 두 가지로 나누었다. 시인은 캄캄한 밤에 어둠 속을 헤매는 영혼들의 길을 등불로 비춰주는 선지자여야 하는가? 아니면 그 시대를 물끄러미 비춰주는 거울일 뿐인가? 보기에 따라서는 당시와 송시도 거울과 등불이라는 문학의 두 기능을 대변하고 있는 듯 하다. 다만 나는 당시풍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송시풍의 시는 시가 아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가 지녀야할 기본저긴 미덕을 갖추지 못한 작품을 두고는 이러한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 114

 

아무리 시의 겉모양을 갖추었다 해도 선동가의 연설이나 삐라를 시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가슴을 저미는 감미로운 유행가의 가사도 시와는 다르다. 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당시와 송시의 구분이나 참여나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좋고 싫음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시인이 시적 언어의 규율을 무시하고 목청만 높이면 한때 대학가에 요란스레 나붙었던 대자보나 근엄한 목회자의 설교와 다를 바 없다. - 115    

 

그러나 어찌하리. 현세에서 시인의 삶이란 곁에 누운 병든 아내의 신음처럼 고달프고 괴로운 것을. 그러고 보면 시란 까맣게 잊고 있던 신선세계, 또는 존재하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향한 회귀의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천상의 백옥루가 준공되었으나 상량문을 지을 사람이 없자 옥황상제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하를 하늘나라로 불렀던 것처럼 티끌세상의 귀양살이가 끝나 천상으로 복귀할 때까지 뱃속의 먹물이 다 마르도록 시인은 다만 깨어 노래할 뿐이다. - 116

 

 

다섯 번째 이야기. 버들을 꺽는다는 뜻은 - 한시의 정운미

 

비 개인 긴 둑에 풀빛이 고운데

남포에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이야 언제나 마르려나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보태나니.         정지상(?~1135) <송인>  - 119

 

중국사신이 오면 모두 떼어내고 정지상의 이 작품만 남겨두었다고 한다. 이것만은 중국에 내놔도 손색이 없겠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 119

 

떠난 이를 그리며 흘리는 눈물로 대동강 물이 마를 날 없다는 엄살은 허풍스럽기는커녕 그 곡진한 마음새가 콧날을 찡하게 한다. – 119

 

그 뒤로 많은 시인들이 실제 헤어지는 포구가 동포이든 서포이든 북포이든 간에 남포라고 말하곤 했다. 굴원의 이 노래가 있은 뒤로 남포란 말은 시인들에게 으레 이별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정운이 담긴 말이 되었다. – 121

 

는 글자 그대로 대상을 보면서 생각을 일으키고, ‘은 이를 이어받아 보충한다. ‘에서는 시상을 틀어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1,2구와 3구 사이에 단절이 온다. 그 단절에 독자들이 의아해할 때 4에 가서 하나로 묶어줌으로써 완결된 구조를 이룬다. – 123

 

우리 옛 시조에 말은 가자 울고 임은 잡고 아니 놓네. 석양은 재를 넘고 갈 길은 천리로다. 저 임아 가는 날 잡지 말고 지는 해를 잡아라란 것이 있다. – 125

 

절류, 즉 버들가지를 꺽는다는 말에서 앞서 본 남포와 마찬가지로 이별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 125

 

류는 중국 음은 머무른다는 의미의 류와 똑같다. 그러니 버들가지에는 가지 말고 머물러달라는 의미도 있다. – 126

 

가을 부채는 한시에서 으레 버림받은 여인을 상징한다….시인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을 부채를 손에 쥐었다는 말만 가지고 이미 그녀가 임에게 버림받은 여인임을 구체적으로 말한다. – 131

 

반딧불이는 황페한 풀덤불에서 날아다니는 곤충이다. 그 반딧불이가 그녀의 창가를 난다고 하여 지금 그녀의 거처가 얼마나 황폐하고 황량한지를 말했다. – 131

 

누각의 난간은 높은 곳에 있어 그곳에서 보면 먼 곳에서 오는 사람을 잘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난간에 왜 기대는가? 기다림에 지친 까닭이다. 그래서 누각에 노르거나 난간에 기댄다는 뜻의 등루, 의루, 의란, 빙란 등의 표현 속에는 그리움의 의미가 담겨있다. – 135

 

이상 몇 수의 시에서 보듯이 자물녘의 피리 소리는 가버린 시절이나 세상을 떠난 벗을 향한 그리움과 맞닿아 있다. – 140

 

한시에는 이런 정운이 풍부한 어휘들이 유난히 많다. 한시의 언어 특성상 이러한 어휘들은 시가 언어의 함축을 더욱 유장하고 깊이 있게 해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한시 감상에서 이러한 어휘를 바로 알지 못하면 시를 전혀 엉뚱하게 곡해할 염려가 크다. – 140

 

특정 어휘가 특수한 정운을 띠게 되면 요즘 식으로 말해 사은유가 된다. 이것이 진부한 표현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시인은 늘 새로운 감성과 참신한 생각으로 이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진부한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익숙한 것을 새롭게 만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시인의 창조적 정신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마술이다. - 143     

 

 

여섯 번째 이야기. 즐거운 오독 - 모호성에 대하여

 

띄어 쓰기가 사람을 잡기도 한다. – 149

 

일상의 언어에서 의미는 어느 하나가 옳으면 나머지는 그른 것이 되지만, 시의 언어에서는 꼭 그렇지가 않다. 이 대목에서 모호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면에서 시인은 이러한 언어의 모호성을 은근히 즐기는 사람들이다. 시 속에서 이러한 의미들은 오히려 풍부와 함축이 된다. – 150

 

시의 어구나 구절들은 대개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포용력과 융통성을 지닌 문맥을 형성한다. 특히 한시 언어에서 이러한 점은 놀라울 정도로 잘 발휘된다. 뛰어난 시는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포용력과 융통성을 극대화한 시라고 말해도 괜찮다. - 151

 

그저 동네 개들은 달빛을 보며 저리 짖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환한 달밤이면 개들은 제 몸을 비비 꼬며 달빛르 보고 컹컹 짖어댄다. – 156

 

한 줄인지 두 줄인지 기러기 날고

만 점인지 천 점인지 산도 많구나.

삼강칠택 그 너머 어딘가 싶고

동정호와 소상강의 사이 같기도 하고     - 159

 

집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시인은 고향이 어디라고 말하는 대신 대숲 길에 엷은 안개가 피어나고 보랏빛 등꽃 위로 보슬비가 보슬보슬 내린다고 말한다. 동문서답 같지만 시인은 제 고향은바로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알고 대답하고 있는 중이다. – 160

 

시인은 제목으로 분위기를 잡아놓고, 정작 시 속에서는 독자의 예상을 외면하고 딴 청을 부렸다. – 162

 

백발삼천장이란 표현은 달빛 어린 흰 강물을 백발에 견준 그 발상의 참신함을 높이 살 일이지 삼천장의 과장에 역시 중국사람은 못 말려하고 혀를 내두를 일은 아닌듯 싶다. – 165

 

뱃속의 그 아이가 아버지의 겨울옷을 가져다주러 변방으로 떠날 만큼 자랐다는 말이다. – 170

 

때론 무정견, 몰안목으로 인한 오독은 읽는 이를 민망하게 한다. 요즘 시집에 혹처럼 붙어다니는 해설에서도 이런 오독과 만난 때가 종종 있다. 그런 해설일수록 주례사에 가까운 덕담이나 개인적 친분관계를 치레나 선입견에 의한 오독으로 일관하는 이런 해설은 오히려 독자의 바른 이해를 방해한다. – 172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이 언어의 미로 위에 숨겨놓은 코드를 독자가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진진한 지적, 감성적 여정이어서 때로는 오독도 즐겁다. 시인은 부러 말꼬리를 흐려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독자는 잠시 멍해 있다가 다시 코드를 찾아나선다. 설사 가다가 길을 잠시 잃은들 어떠랴, 아니, 애초부터 길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 172   

 

 

일곱 번째 이야기. 사물과 자아의 접속 - 정경론

 

마음에 일어나는 정을 건네듯 사물에 보내면, 사물은 답이라는 듯이 흥을 불러일으킨다. 경물은 이렇듯 시인의 눈 속에서 어는 순간 정으로 착색된다. 숲과 구름이 한데 합쳐지듯 하나로 결합되어 불리할 수가 없다. 명나라 때 사진은 <시명사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은 시의 매개이고, 정은 시의 배아다. 이 둘이 합하여 시가 된다. 몇 마디말로 만 가지 형상을 부려서 원기가 혼성하니 그 넓이가 가없다.’ 무심히 경물과 마주하여 마음속에 정이 일어난다. 경이 정의 매개가 되는 까닭이다. 가슴에 자욱한 정을 품고 경을 바라보면 무심한 경물이 내 마음의 빛깔로 물든다. 정은 경에 의미를 불어넣는 배아인 셈이다. 정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 경만 가지고 시가 되는 법도 없다. - 176

 

정과 경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미묘한 줄다리기는 시 감상의 즐거움이다. 시인은 가장자리를 굳이 감추려 들고, 읽는 이는 경물 안에 감춘 시인의 정을 자꾸 들춘다. – 177

 

정과 경이 만나 이루는 조합에는 여러 경우가 있다. 정경의 선후로 보아

경을 보고 정을 일으키는 정수경생, 촉경생정의 방식과

정을 머금어 경에 투사하는 이정입경, 경종정출의 방식으로 나눈다.

둘 사이의 선휴를 구분할 수 없는 정경교융, 물아위일의 경우와

경만 묘사하면서도 글 속에 절로 정의를 드러내는 지수술경, 정의자출의 방식

또 정만을 말하여 경을 보이지 않았으나 곡진함을 다한 즉정견경, 정의핍진의 방식이 있다. - 179

 

양재가 <시법기수>에서 한 말이다. “경을 묘사함은 경 가운데 뜻을 머금고, 일 가운데 경을 보여주어야 한다. 섬세하며 맑고 담백해야지, 진부하거나 교묘하면 못 쓴다. 뜻을 묘사할 때도 뜻 가운데 경을 담아 의론을 분명히 해야한다.” - 179

 

위 시를 지은 송희갑은 일찍이 권필의 명성을 사모하여 강화까지 찾아갔다. 10년을 기약하고 시 공부를 시작했다. 뒤에 스승이 장티푸스에 걸려 수십일간 사경을 헤맬 때 한시도 떠나지 않고 곁에서 시주을 들었다. 땔나무와 집안일도 그가 도맡아 했다. 충직한 그를 권필은 각별히 아꼈다. 권필이 그에게 말했다. “사람이 천하를 널리 보지 못하면 시가 국한되고 만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이미 할 수가 없지만 네 근골로는 능히 이 일을 할 수가 있다너는 모름지기 중국말을 배우고 수영을 익히도록 해라”…순진한 제자는 허구한 날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익히다가 마침내 바다의 짠기운에 기혈이 삭아서 일찍 죽고 말았다….그깟 기가 무어라고 불법 월경도 마다 않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애를 썼더란 말인가? 시키는 스승이나 하란다고 하는 제자나 다 딱하다. 한편 그토록 도탑던 사제의 정과 시를 향한 맹목적인 열의가 그립니다. – 181

 

시에서 정은 경을 앞지른다. 준엄한 나무람을 앞세운 후 뒤를 경으로 받쳤다. 한식 지난 골목길, 묵은 담장 너머로 노란 수유꽃이 버짐 피듯 피었다. 다 부질없다고 흩어지고 남은 것은 천추에 더러운 이름 뿐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 185

 

벽옥 됫박은 다름 아닌 푸른 연잎이다. 무수한 빗방울이 많은 구슬로 넓고 푸른 연잎 위를 덱데굴 구른다. – 186

 

시무룩할 새들은 신이 났고, 덤덤해야할 바람이 슬프다. 바람이야 슬프고 말고 할 것이 없으니, 이를 슬프게 듣는 것은 시인일밖에. 시인의 정이 경에 녹아들어 가장자리를 찾을 수 없다. - 190

 

아내는 소리 내서 읽으려면 목이 컬컬하겠다고 술을 걸러 내온다. 한 잔 마시고 시 한 수 읽고, 시 한 수 읽다가 또 한 잔 마신다. 술이 자못 거나해졌다. 이불을 깔아 활개를 뻗고 눕자 이 몸이 구름 위로 둥실 떠간다자 어디까지가 정이고 어디까지가 경인가? – 191

 

청평사 찾아든 길손이 있어

봄 산을 제멋대로 노니는도다.

외론 탑 고요한데 새는 우짖고

흐르는 작은 시내 꽃잎이 진다.

산나물 때를 알아 우쩍 자라고

이끼는 비 온 뒤라 보드랍구나

신선의 골짝에서 거닐면 읊어

백년의 내 시름을 풀어보리라.          김시습 <유객> - 192

 

나그네의 여유가 봄 산을 품어 안고, 산도 따듯하게 시인을 감싸안는다경물과 정이 어울러져 서로 자기편으로 당기로 이끌릴 뿐, 먼저와 나중이 없다. – 192

 

이어는 <한정우기>에서 정을 버려두고 경을 말하는 것은 노력을 줄이려는 시도인 셈이라고 말했다. 하상이 <추수헌사전>에서 말했다. ‘시는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 곧장 말해 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시인은 그저 경상을 묘사하면서 정의가 절로 드러나게 해야한다.’ -195

 

반쯤 닫은 사립문에 울타리 촘촘한데

석양에 말 세우고 앞길을 묻는다.

푸른 안개 밖으로는 보슬리 흩뿌리고

때마침 농부가 소를 몰고 오는구나          성간  <도중> - 196

 

이상 몇 수의 시에서 보듯 시인이 아무리 경만 말해도 그 속에 어느새 정이 녹아 있다. 시인은 눈앞의 여러 대상 중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춘다. 렌즈야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초점을 맞추는 시인의 선택에 감정이 스민다. 시 속에서는 어떤 경물도 포착과 동시에 주관의 색채로 물들고 만다. – 197

 

시언지, 즉 시가 뜻을 말한다는 말은 <시경>이래 가장 친숙한 시의 정의다. 시란 무엇인가? 품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 198

 

서거정은 <동인시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란 마음이 가는 바이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198

 

자장자장 우리 아가 울지 말아라

울타리 바로 옆에 살구꽃 폈다.

꽃 지고 살구가 곱게 익으면

너랑 나랑 둘이서 같이 따먹자   이양연 <아가야 울지마라> - 198

 

여덟 살에 일곱 해를 병 앓았으니

돌아가 누움이 외려 편하겠구나

흰 눈이 펄펄 오는 오늘 이 밤에

어밀 떠나 추위 모름 가슴 아프다     이필운 부인 남씨가 죽은 손녀를 애도해 지은 시다 – 199

 

평생의 성벽이 헤강과 비슷하여

육십 평생 남의 초상 위문함 게을렀지

공을 알지 못하거늘 어이하여 곡을 하나

나라 어지럽던 그 때 강상을 지켜설세   오억령의 장례에서 이정귀가 쓴 시 – 200

 

폭군의 서슬에 모두 입 다물고 있을 때 강상으로 제자리를 굳게 지켰던 그 정신을 사모해서라는 거이다. 선비의 늠름한 기대가 장하다. – 200

 

형님의 모습이 누구와 닮았던가

아버님 생각나면 형님을 뵈었었네  

오늘 형님 보고파도 어데 가 만나볼까

의관을 정제하고 시냇가로 나가본다.    박지원 <연암협에서 세상을 뜬 형님을 생각하며> - 201

 

덤덤한 듯 별 말하지 않았으되 그리움이 메아리 쳐 긴 울림을 남긴다. – 201

 

이상 다섯 범주로 나누어 한시에서의 정과 경의 어울림을 살펴보았다. 이들 사이에 우열은 없다. 시인의 그때 감정 상태나 놓인 환경에 따른 선택이 있을 뿐이다. – 201

 

시는 찬 샘물이다. 시를 잘 쓰려면 물의 선변을 배워야 한다. 굴원의 시와 장자의 산문에는 강개의 비분이 담겨있다. 그러나 그 강개는 어디까지나 돌에 부딪혀 난 여울의 소리였지 악악대며 떠드는 왜가리 소리가 아니었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시의 법은 점차 시끄럽고 번다해져 옛사람의 정신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수다스럽게 말하고 아프다고 끙끙대는 소리가 시의 내용이 되고 말았다. 심상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마라. 그러나 진정한 시법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최후의 현관이 있다. 그 현관 앞에 서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 문을 여는 법은 아무도 일러 줄 수가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제 손으로 직접 열고 들어가야 한다. - 202

 

 

여덟 번째 이야기. 일자사 이야기 - 시안론

 

말에는 느낌이 있다. 시인은 이 느낌을 잘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다. ‘철수는 공부를 잘한다철수는 공부도 잘한다로 한 글자를 바꿔 보자. 앞의 문장은 그냥 철수가 공부를 잘한다는 의미가 되지만, 뒤의 문장은 철수가 공부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다 잘한다는 뜻이 된다. ‘철수는 공부만 잘한다고 고쳐 놓으면, 다른 것은 잘 못한다는 의미가 되고 만다. 말에는 묘한 느낌이 있다. - 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150

 

서거정이 <동인시회>에서 말했단. “시는 묘함이 한 글자에 달려있다. 옛 사람은 한 글자를 가지고 스승으로 삼았다” – 205

 

명나라의 사진은 시인이 한 글자의 선택을 위해 심혈을 쏟는 것을 모자 고르기에 비유했다.

비유하자면 사람이 급하게 모자를 사려고 시장에 들어가 여러 개를 꺼내놓고 하나하나 써보면서 반드시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자 고르는 법을 쓸 수만 있다면 시안은 공교롭지 않음이 없다. – 209

 

정말이지 시에도 눈이 있다. 시의 빗장을 옳게 열려면 시의 눈, 즉 시안을 찾아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 209

 

청나라의 유희재는 시안이란 시의 어느 글자가 좋고 어느 구절이 뛰어나다는 식의 개념이 아니라 전체 시의 핵심이 집중되어 신묘한 빛이 엉겨 붙은 지점을 말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시안은 글자 그대로 시의 눈알이다. 시안은 시에서 가장 정채롭고 시인의 정신이 집약된 지점, 하나만 건드려도 나머지가 따라 움직이는 일동만수의 경락이다. 시안은 단순히 수사적으로 자구를 단련하는 기교의 문제가 아니다. 시가예술의 의경미를 형성하는 핵심이다. – 210

 

시안이란 바로 한 편 시의 눈동자에 해당하는 자리다. 시의 힘줄과 뼈대가 바로 이곳에 모여 있다. 이로 인해 전체 시는 갑자기 생동하는 활기를 띤다. – 211

 

일자사의 예화는 한 글자를 놓고 무게를 되는 미묘한 저울질이 있다. 한 글자만 바꿔도 미감의 차이가 확연하다. 그 차이를 범주화 할 수 있다면 한시의 미감 원리를 찾을 수도 있다. 세 범주로 구분하여 살펴본다. 일사사의 첫번째 미감 원리는 의미의 중복을 피하라는 것이다. – 221

 

두번째 미감원리는 여운을 남기고 호응을 중시하라는 것이다. 여운은 추상의 여백에서 생긴다. 시는 단정적 언사를 꺼린다. 사물과 시인이 만나 빚는 의경은 카메라 렌즈처럼 또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러 초점을 흐리는 데 묘한 맛이 있다. 그래도 의경의 호흡이 흐트러지면 안된다. – 223

 

세번째 미감 원리는 시상의 온유돈후를 중시하라는 것이다. 감각적 직설보다는 에둘러 말하는 데서 온건한 맛이 깊이진다. 모난 말보다는 각지지 않은 표현에서 중후한 체취가 풍겨난다. – 227

 

일자사는 한 글자를 놓고도 무게를 달아보고 섬세한 말결을 음미할 줄 알았던 옛사람들의 시정신이 빚어낸 생각의 보석들이다. – 229

 

청나라의 유희재는 <시개>에서 자구의 단련은 활처의 단련이라야지 사처의 단련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활처를 포착하는 관건은 시안을 찾아내는데 달려있다. – 230

 

시안론은 자칫 수사적 기교에 탐니케 하기 쉽다. 이때 유희재의 지적은 시안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통쾌함이 있다. – 230

 

시인은 시안을 연마할 때 집착을 버려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시안은 시안을 감추는 장안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혜안과 통찰력없이 그저 남의 눈이나 놀라게 만드는 수사적 기교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 231

 

     

 

아홉 번째 이야기. 작시, 즐거운 괴로움 - 고음론

 

위대한 예술은 자기를 잊는 이런 아름다운 몰두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훌륭한 시인은 독자가 뭐라 하든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 우리가 쉽게 읽고 잊어버리는 작품 뒤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고통과 노력이 담겨있다. 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 98

 

대상을 향한 미칠 듯한 몰두 없이 위대한 예술은 이룩되지 않는다. 불광불급이라 했다. 미쳐야 미미친다. 비록 하찮은 기예라 해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가 있어야 비로소 성취를 말할 수 있다. 예술의 천재들에게는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광기가 있다. 그들 안에서는 열정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과 다른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느껴진다. – 235

 

한유는 <정요선생묘지명>에서 맹교의 시를 두고 시를 지을 때는 눈을 상처내고 가슴을 찌르듯 하였다고 했다. – 243

 

한 글자를 알맞게 읊조리려고

수염을 몇 개나 비벼 끊었나

시 읊는 괴로움을 알고 싶은가

가슴속에 가을 서리 서린 듯 하네    노연양 – 250

 

한 글자의 온당함을 구하느라고

긴긴 밤 추위를 참아 견뎠네      고문위 – 251

 

강개한 기운 부족함이 스스로 안타까워

얼어붙은 하늘 향해 일부러 말 달렸네    황충칙 – 251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줄 잘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표현 욕구를 옛 사람들은 기양이란 말로 표현했다. 양은 가려움을 나타낸다. 아무리 긁어도 긁어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다. 이런 가려움은 어떤 연고나 내복약으로도 못 괸다. 이와 마찬가지로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표현욕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기양이다. – 253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만드는 마물이 있으니, 옛사람들은 이를 일러 시마라 했다. – 253

 

날이면 날마다 심간 도려내

몇 편의 시를 쥐어짠다네

내 몸의 기름기와 진액일랑은

살에는 조금도 안 남았다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린니     이규보 <시벽> - 254

 

당나라 때의 시의 융성은 약간은 미친 듯한 열기와 목숨을 건 집착 속에서 이룩되었다.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두 눈을 바늘로 찌르며, 심장을 다 토해낼 듯,  속에 찬 서리가 든 듯한 고통을 감내하며 이들은 오직 시를 위해 살았고, 시를 위해 일생의 심력을 쏟아부었다. – 258

 

그 고심참담의 결과를 앞에 놓고 독자들은 마음의 위로를 얻고 삶의 깊은 의미를 읽는다. …금강석이 될 지 독약이 될 지는 오로지 시인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린 일이다. - 259

 

 

열 번째 이야기. 미워할 수 없는 손님 - 시마론

 

시마는 시 귀신이다. 시마는 어느 순간 시인에게 들어와 살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를 생각하고 시만 짓게 하는 귀신이다. 시마가 한번 붙으면 다른 일에는 하등 관심이 없고, 오로지 시에만 몰두하게 된다. 더욱이 짓는 시마다 절창아닌 것이 없다. 시마는 시인에게 즐거운 괴로움을 선사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 263

 

한 마디로 시마의 증세는 시 외에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증상이다. – 269

 

,<구시마문>에서 이규보가 제시한 시마의 다섯 가지 죄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세상에서 알아주지도 않는데 붓만 믿고 찧고 까불게 만드는 죄다….둘째 천기를 누설하면서도 당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죄다….셋째, 삼라만상의 온갖 형상을 닥치는 대로 옮겨내서 겸손할 줄 모르는 죄다….넷째 ,제멋대로 상 주고 벌 주며 정치를 평론하고 만물을 조롱하여 봄내며 거들먹거리는 죄다….다섯째 목욕을 싫어하고 머리 빗기를 게을리 하며 공연히 끙끙대고 인상을 써서 갖은 근심을 불러들이는 죄다. – 271

 

시마가 시인에게 들어붙어 있는 것이라면 시귀는 일회적으로 시인의 입을 빌려 대신 노래하게 하거나 스스로 직접 나타나 시를 읋기도 하는 귀신이다. 이 시귀가 지은 시 귀시다. – 273

 

시 귀신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은 모두 시를 향한 시인들의 끝없는 몰두와 집착이 빚어낸 환영일 뿐이다. 꿈 속에서 귀신이 들려준 시는 실상 귀신이 들려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귀신의 입장이 되어 노래한 것일 따름이다. 시와 관련된 귀신들은 한결같이 무섭지 않고 인간에게 해코지를 하는 법이 없다. 이들 귀신이 바로 시인 자신의 분신이니 그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 279

시마는 한 마디로 옛사람들의 시를 향한 열정의 다른 표현이다. 시귀는 사물의 비밀을 끝까지 꿰뚫으려는 시인의 집착이다. – 282

 

배부르고 따뜻함 속으로 시마는 깃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충족된 넉넉함을 시마는 혐오한다. 무언가 결핍된 상태, 그 결핍을 채우려는 시인의 정신이 죽창처럼 곤두서 있는 지점에서 시마는 슬그머니 시인에게 스며든다. - 283

 

열한 번째 이야기. 시인과 궁풉 - 시궁이후공론

 

사물이 우는 것은 부득이한 데서 말미암은 불평이 있기 때문이다. 불평은 마음이 평정을 잃은 상태, 달리 말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상태다. – 287

 

다들 비난하는 그를 외로이 변호하다가 무제를 격노를 불러 궁형에 처해졌던 사마천은 오로지 사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치욕과 모멸의 시간을 견뎌냈다. 사기를 완성한 후 서문을 쓰면서 그는 좌절 속에서 불멸의 저술을 꽃피운 발분의 저작들을 떠올렸다. – 292

 

견디기 힘든 시련과 좌절 앞에서 주저않지 않는 발분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발분하는 서정 없이 어찌 남을 감동시키겠는가? – 294

 

시궁이후공은 궁핍한 환경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잘 쓰게 한다는 말이고, 시능궁인은 시를 쓰는 행위가 시인의 궁핍을 가속화한다는 말이다. – 294

 

일반적인 경우로 보더라도 시는 역시 궁한 뒤에 더 좋아진다. 어디 시뿐이랴? 모든 예술, 학문이 다 그렇다. – 298

 

성정을 질곡하는 것에 부귀보다 심한 것은 없다. 성정이 얽매이고 보면 재주가 아무리 높고 언어가 뛰어나도 말단일 뿐이다. 어찌 다시 시가 있겠는가. 이것이 고금에 시로 이름난 사람이 궁하고 낮은 지위에서 많이 나오는 까닭이다. – 300

 

불평불만, 발분서정, 시궁이후공 등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아아덴티티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아이덴티티 즉 동일성은 자신을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는 감정이다. 즉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상적 관념적 자아와 실제의 자아 사이에 어떤 편차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 307

 

문학을 포함한모든 예술활동은 인간 내부의 두 자아를 일치시켜 나가려는 몸짓으로 볼 수 있다. 궁의 상황은 더 나은 예술작품의 창조를 위한 충분조건이 된다. – 307

 

도잠과 두보는 해학적 풍취가 있는 사람들로 궁하고 쓰라린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코 풍취를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우스운 소리도 하고 통속적인 자유시도 쓰는 풍취를 지녔기에 궁핍하고 배고픈 중에도 미쳐버리지 않았고 타락하지도 않았다. - 307

 

 

열두 번째 이야기. 시는 그 사람이다 - 기상론

 

비슷한 형편에서 같은 의도로 쓴작품이 어찌 이리 다를까? 그 사람의 그릇이 같지 않은 까닭이다….한시 비평에서 말하는 기상론이란 바로 시인의 기질과 삶의 자세가 그의 시에 거울처럼 비쳐진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만나보지 않고도 그 사람을 알게 된다. – 319

 

시 속에 경쾌한 절주와 낙관적 인생관이 잘 드러나 있다. 앞서 최해의 곤돈한 기상과 견주면 얼마나 경쾌하고 밝은가? – 322

 

정약용의 이 연작을 읽노라면 갈증 끝에 청량음료를 마신 듯 체증이 후련하게 내려간다. 이러한 경계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가슴 속에 독만권서의 온축과 행만리로의 가상을 담고서야 가능하다. – 328

 

시는 곧 그 사람이다. 알려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언어가 제 스스로 말해주는 사실이다. 언어가 그 사람의 기상을 대변한다는 것은 연원이 깊다. 무심히 뱉은 말이 씨가 되고,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시화에 자주 보이는 시참이 바로 이를 말한다. 시인은 모름지기 가슴 속에 호연한 기상을 품을 일이다. 떳떳함으 길러야 한다. - 332

 

 

열세 번째 이야기. 씨가 되는 말 - 시참론

 

시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정습명과 최해의 시를 보면 이 말을 더 실감할 수가 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한자로는 농가성진이라고 하는데 뜻 없이 한 말이 말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말 속에 정령이 살아 숨쉰다고 믿어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항상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가려서 할 줄 아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내가 오늘 무심히 하는 말투와 행동 속에 내가 품은 생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 106

 

시화에는 시를 보고 그 사람의 출처궁달을 예견하는 삽화들이 뜻 밖에 많다. 특히 앞서 무심히 한 말이 뒷날의 예언이 되는 경우를 따로 시참이라고 한다. 언어의 주술적 힘을 믿어 말을 함부로 하지 말것을 경계한 것이다. – 335

 

시에는 그 사람의 기상이 절로 스며든다. 한 구절의 시만 봐도 그 사람의 궁달을 점칠 수가 있다. – 339

 

바른 말을 했다 하여 임금이 매질로 한 시인의 목숨을 앗아갔던 이 일은 포학한 권력에 대한 증오를 불러 인조반정의 한 빌미를 주었다. – 350

 

말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생각없이 되는 대로 쓴 한편의 시가 어느 날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 말 한 마디, 시 한 구절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어이 붓을 함부로 놀리랴. - 355

 

 

열네 번째 이야기. 놀이하는 인간 - 잡체시의 세계 1

 

일종의 말장난이다. 한시 중에는 이런 말놀이가 유난히 많다. 잡체시로 불리기도 하는 다양한 형식들을 소개하겠다. 먼저 앞에서 본 것처럼 글자가 차례로 늘어나는 형식의 시다. – 360

 

한시 가운데 회문시라는 것이 있다. 내리 읽으나 치읽으나 의미가 통하는 형식의 시체를 말한다. 그러면서도 평측이나 압운이 흐트러져서는 안되믄로 그 제한이 몹시 까다롭다. – 368

 

 

열다섯 번째 이야기.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잡체시의 세계 2

 

 

열여섯 번째 이야기. 말장난의 행간. 한시의 쌍관의

 

이런 시들은 자꾸 비슷하게 가지치기를 해서 변종과 아종을 만들어 낸다. – 417

 

한시에서 쌍관의란 이렇듯 하나의 글자가 동음이나 다의에 의해 한가지 이상의 뜻을 함축하게 된는 경우를 이른다. 이러한 쌍관의의 활용은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상 한시에서 매우 빈번하게 활용된다. – 427

 

가을의 긴 호수에 옥 같은 물 흐르는데

연꽃 깊은 곳에 목란배를 매어뒀지

임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

남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했네     허난설헌 <채련곡> - 428

 

한시에는 새 울음소리를 음차하여 훈독함으로써 이중 의미를 담는 금언체시라는 것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 433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고 나비는 여든 살 늙은이를 나타낸다. – 436

 

고양이는 일흔 살 노인을 의미한다. – 438

 

바위는 장수의 상징이다. 패랭이꽃은 한자 이름이 석죽화이다. 줄기에 대나무처럼 마디가 잇어서다….석죽에 바위를 더하면 장수를 축원한다는 의미가 된다.

 

제비꽃은 한자로는 여의초이다. 그러니까 그림에 제비꽃을 그려넣는 것은 여의, 즉 뜻대로 이루시라는 의미를 담았다. – 438

 

버드나무 밑에 그린 두 마리 오리는 소과와 대과에 잇달아 급제하는 행운을 기원하는 뜻이다. 

 

 

열일곱 번째 이야기. 해체의 시학- 파격시의 세계

 

육담풍월은 한시처럼 다섯 자 또는 일곱 자의 시를 짓되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짓는 문자 유희의 한 종류다. – 445

 

화작시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시정신은 탈중심주의, 탈이데올리기를 표방하는 현대 해체시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 449

 

희작시의 특징은 파격과 해학, 민중성과 익명성으로 대표된다. 특정 작가가 없을 뿐더러 있다 해도 별 의미가 없다. – 452

 

대체로 김삿갓의 장난 시를 읽을 때마다 필자가 느끼는 감정은 서글픔과 씁쓸함이다. 경국제세의 포부를 품고 배우고 익힌 학문과 지식을 고작 이깟 희학질에 썼더란 말이냐? – 465

 

의식의 변화는 내용의 변화를 부른다. 내용만으로 의식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할 대 형식이 변한다새로운 말하기가 강렬한 실험적 의도를 가졌음에도 시대정신이나 시정신에 안받침되지 않은다면 이 또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 472

 

열여덟번째 이야기. 바라봄의 시학 - 관물론

 

문인 이덕홍이 쓴 <퇴계선생고종기>이다. 묘한 느낌을 주는 글이다. 스승의 죽음을 지켜본 제자의 기록으로는 투명하리만치 담담하다. – 479

 

사물로 향하는 아의 삼투압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서로 팽팽한 표면장력을 유지하다가 어느 슨간 그 균형이 깨지면서 한꺼번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서서히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 진다. 시인은 이제 없다. – 493

 

 

열아홉 번째 이야기. 깨달음의 바다 선시

 

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행주좌와 어느 것 하나 걸림없이 원만하다. 숨 쉬고 밥 먹듯 자연스럽다. 이것이 선의 극치다. 시도 다를 것이 없다. 스스로를 괴롭혀 쥐어짜는 시, 안 알아준다고 닦달하는 시, 알맹이 없이 허세만 남은 시는 가짜다. - 522

 

선의 화두가 그렇듯 좋은 시는 타성에 젖은 뒤통수를 후려친다. – 528

 

 

스무 번째 이야기. 산과 물의 깊은 뜻 - 산수시

 

공자가 <논어>에서 말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 이후로 산수에서 노니는 것은 자못 철학적 의미를 담게 되었다. – 538

 

자공이 물었다.

선생님 군자는 어째서 큰 강물과 만나면 반드시 바라보곤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물을 덕에 비유한다. 두루 베풀어 사사로움이 없으니 덕과 같고, 물과 닿으면 살아나니 인과 같다. 낮은 데로 흘러가고 굽이치는 것이 모두 순리에 따르니 의와 같고, 얕은 것은 흘러가고 깊은 것은 헤아릴 수 없으니 지와 같다. 백 길이나 되는 계곡에 다다라도 의심치 아니함은 용과 같고, 가늘게 흘러 보이지 않게 다다르니 살핌과 같으며, 더러운 것을 받아도 사양치 아니하니 포용함과 같다. 혼탁한 것을 받아들여 깨끗하게 하여 내보내니 사람을 착하게 변화시킴과 같다. 그릇에 부르면 반드시 평평하니 정과 같고, 넘쳐도 깎기를 기다리지 않으니 법도와 같고, 만 갈래로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꺽이니 의지와 같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큰 물을 보면 반드시 바라볼 뿐이다                한나라 유향의 <설원> -539

 

산이 나오고 물이 나온다고 다 산수시가 아니다. 산수와 인간이 만나 나누는 교감이 있어야 한다. 산수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산수 족으로 향해 가서 어느덧 물아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는 동화가 있어야 한다. -541

 

날마다 산기슭 정자에 앉아 산을 보면 나는 산을 닮아간다. – 543

 

옛사람의 문집을 뒤적이다 보면 뜻밖에 많은 산수유기와 만나게 된다. 유기는 산수를 향한 고인의 진지한 열정의 산물이다. – 550

 

구도자의 심정이 되어 산수 간을 노닐던 고인들의 그 시원스런 정신의 경계도 다시 만날 길이 없어 안타깝다. - 551

 

 

스물한 번째 이야기. 실낙원의 비가 - 유선시

 

유선시는 고대인이 꿈꾼 상상의 세계를 노래한다. 그것은 아득한 은하수 저편 아홉 층의 하늘을 지나 있는 옥황상제가 거처하는 황금궁전이거나, 동해 너머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 거대한 여섯 마리 거북이가 등에 업고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상상의 섬 삼신산으로 나타난다. 아니면 서쪽 하늘 저편 아득한 그곳, 하늘에 맞닿을 듯 솟아있는 옥으로 된 곤륜산도 있다. 곤륜산의 둘레에는 새의 깃털조차 가라앉아버린다는 약수란 강물이 300리에 걸쳐 흐른다. 날개가 아니고는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곤륜산 정상에는 요지란 연못이 있어 밤에 천상에서 신선들이 용이나 기린, 또는 봉황을 타고 내려온다. 그곳의 주인은 서왕모다. 그녀가 주재하는 파티가 밤마다 열린다. 안주는 한 알을 먹으면 3000년을 살 수 있다는 반도나 1000년쯤 너끈한 안기생의 대추이다. 술은 옥을 녹여 고은 경장 또는 안개의 수분을 빚어 걸러낸 유하주다. 입는 옷은 어떤가. 동행의 일곱 빛깔 무지개 실을 자아 지은 옷이다. 천의무봉이라 바느질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 560

 

허난설헌 또한 선계인 광상산에서 노니는 꿈을 깬 뒤 그곳 광경을 묘사했다. - 562

 

선계의 형상은 현실에서의 억압이 역으로 투사되어 열린 세계로의 비상을 꿈꾼 결과다. 꿈은 무의식의 세계다. 인간의 의식이 한계에 도달할 때 무의식이 열린다. 무의식의 세계는 원초적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상징은 좌절되었던 꿈을 통해 신비한 세계를 열어 보임으로써 현실에서 상처받고 왜소해진 자아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소생시켜준다. – 566

 

자신을 귀양 온 신선으로 내세우는 심리의 이면에는 고통뿐인 현재를 합리화하는 심리기제가 작용한다. - 568

 

초월의 소망을 담은 유선의 행위가 현실의 새로운 비전과 연결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선계를 향한 꿈 자체를 배격할 수는 없다. 실현될 수 없다 해서 더 나은 삶을 향한 열망이 배격되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절망이요 공포가 아닐 수 없다. – 576

 

유선시는 중세적 꿈꾸기의 산물이다. 이러한 꿈꾸기는 허망한 몽상이나 환상이 아니다.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는 꿈을 꿀 수가 있다. 문학이 다만 실천의 도구일 때 사회는 꿈을 꿀 자리를 잃어버린다. 꿈이 없을 때 사회개조는 있을 수 없다는 김현의 이 말은 바로 유선시에서 중세적 꿈꾸기가 갖는 의미를 매우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의 혈관 속에 내재한 원초적 상징들을 까맣게 잊고 있던 그 기호들을 유선시는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 576

 

 

스물두 번째 이야기. 시와 역사 - 시사와 사시

 

시인이 시 속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얼까?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전쟁이 가져다 준 뜻하지 않은 죽음과 그 죽음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긴 상처였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려고 했던 이런 의미는 꼼꼼히 따져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물론 처음부터 이런 의미가 다 보이지는 않는다. 많은 훈련과 연습을 해야 한다. 한편의 시를 제대로 읽는 과정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나 소풍날 하곤 했던 보물찾기와 같다. 시인은 한 편의 시 속에 여기저기 숨은 그림이나 보물을 감춰둔다. 독자들은 그 시를 읽으면서 그 속에 감춰둔 그림이나 보물을 열심히 찾는다. 서툰 독자들은 한두 개 밖에 찾지 못하고 말지만, 익숙한 독자들은 금세 숨은 그림을 다 찾아내고 만다그러나 시에서 쓰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 번 더 생각해보아야 한다이것이 시를 읽는 재미다. 좋은 시 속에는 감춰진 그림이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각하는 힘을 살찌워준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치던 사람을 찬찬히 살피게 해준다. – 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24 

 

흰둥이 앞서가고 누렁이 따라가니

들밭 풀 주변에는 무덤들 늘어섰네

제사 마친 늙은이는 밭 사이로 난 길에서

손자의 부축 받고 취하여 돌아오네          이달 <제총요> -579

 

아들의 무덤에 제사지내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심정, 할아버지가 왜 저러시나 싶어 말동말똥 올려다보는 어린 손자의 천진한 눈빛,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슬픈 영상이다. 짧은 시 속에 함축이 매우 깊다. 시인은 임진왜란으로 이 땅에서 벌어진 죽음의 참상을 남의 애기 하듯 장면으로 포착한다. – 580

 

권벽은 임진왜란 당시 73세의 노구를 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고통스런 피난의 와중에도 시고를 담은 상자만은 내려놓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아내가 도망다니며 죽을 겨를도 없는데 그깟 시 상자는 어디에다 쓰려냐고 타박했다. 그는 결코 시 뭉치가 든 상자만은 버리지 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노령의 피난길에서도 128수에 달하는 시를 일기 쓰듯 남겨 당시 피난길의 고초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황을 세밀하게 기록했다는 점이다. 도적 떼가 횡행하는 중에 길을 전전하다가 막히면 되돌아왔다. 피난길의 박절한 인심과 산에 올라 적을 피하던 일, 조복을 팔아 쌀을 산 일이며, 저마다 달리 말하는 뜬소문에 일희일비하던 일을 죄다 시로 썼다. 평양성의 화전 소리에 낙담하던 일과 피난민을 보자 지레 겁을 먹는 시골 늙은이의 표정도 담았다. 이들 시는 임진왜란 당시 한양성을 빠져나간 피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럴 때 시는 당당히 역사가 된다. -583

 

맹계가 본사시에서 말했다. “두보가 안녹산의 난리를 만나 농촉지방을 떠돌며 시 속에 이때 일을 모두 진술하였다. 본 것에 미루어 감춰진 것까지 남김없이 서술하였으므로 당시에 이를 일러 시

사라 하였다.” 이것이 시사란 말의 첫 용례였다. – 583

 

시사는 시로 쓴 역사란 뜻이다. 역사를 소재를 시를 썼다는 말이 아니라, 앞서 본 이안눌의 시처럼 시인이 직접 보고 들은 당시의 일을 시로 기록해둔 것이 뒷날 사료적 가치를 지니게 됨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를 읽으면 그 시대가 눈앞의 일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굳이 역사책을 뒤질 것 없이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이 더 낫다. – 584

 

너스레를 떨며 할멈은 며느리와 손자를 지키려고 아예 자신이 수자리에 나갈 것을 자청하고 나선다.  늙은 몸이지만 병정들을 위해 새벽밥이라도 짓겠다는 것이다. – 585

 

백골징포는 죽은 사람의 사망신고를 받아주지 않고 산사람에게 청구하듯 군포를 계속 받는 것이다. 황구첨정은 출생신고를 갓 마친 아이에게 징집통지서를 보내는 것이다. – 587

 

어쨎건 삼정의 문란을 말할 때 당시 이를 증명하는 어떤 통계수치보다도 우리는 이 애절양 한편을 통해 그 시대 백성의 절규를 실감으로 듣는다. 시는 이럴 때 역사가 된다. – 587

 

사시, 또는 영사시는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쓴 시다. 차고술금, 옛일을 끌어와 지금은 말하는 것은 한시의 오랜 관습이다. 시인은 맥없이 옛일을 들추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 속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우회 통로를 찾고 있다. - 602

 

사시와 시사가 오늘에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치열한 역사의식도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저항정신도 시인이 먼저 흥분하면 한낱 구호로 전락하고 만다. – 602

 

 

스물세 번째 이야기. 사랑이 어떻더냐 - 정시

 

청춘의 감정은 출렁이는 물결 같다. 가둘수록 더 거세진다. 이를 굳이 가라앉히려는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다. 감정을 누르려는 집착이 또 하나의 미망을 낳는다. -611

 

흰 모시 적삼에 눈썹 곱게 그리고서

마음속 정 둔 얘기 재잘재잘 얘기하네

임이여 내 나이를 묻지를 말아주오

50년 전에는 스물셋이었다오    

        

앞의 50년은 둑 떼어 없는 셈 치고 멋진 사랑을 이루어보자고 다짐하는 듯도 싶다.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와 손녀뻘도 더 되는 젊은 아가씨의 사랑노래다. - 612

 

신위(1769~1845)가 소실로 들어오려는 기생에게 애틋한 사양의 뜻을 담아 주었다는 시 - 612

 

봄바람 어느덧 화창해지고

밝은 달 떠오는 황혼 무렵에

끝끝내 안 오실 걸 잘 알면서도

오히려 문을 닫아걸지 못하네           - <정인을 기다리며>

 

시집올 제 해온 옷이 반 넘어 그대로라

상자 열고 살펴보다 더욱 맘을 상하네

평생 좋아하던 것을 함께 담아 보내니

빈 산에 다 맡기어 티끌 되어 스러지라            이계 <부인만> - 622

 

월하노인 통하여 저승에 하소연해

내세에는 우리 부부 처지 바꿔달라 하리

나는 죽고 그대만이 천 리 밖에 살아남아

그대에게 이 마음의 슬픔 알게 하리라        김정희 <유배지에서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623

 

한시에서 사랑의 노래는 기쁨의 구가는 적고 가라앉은 슬픔이 많다. 정서란 애초에 모든 것이 충족된 속에서 터져 나오는 법이 없다. 소중한 무엇 밖에 놓여 있다는 생각, 안겨야 할 어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마음에서 정서는 비로소 움터 나온다. - 625

 

 

스물네 번째 이야기.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 성동구이론

 

그가 말한 동양의 수법이란 한시의 수법이다. 직접 말하지 않는다. 다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지를 세워 대신 말한다. 현대시도 같다. 현대시와 한시는 여러모로 참 닮았다. – 629

 

정지용의 시에는 이렇듯 한시의 구문과 어법이 또렷이 살아 있다. – 637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 639

 

한시도 지을 줄 알았고 예스러운 표현을 즐겨 쓴 조지훈의 시보다 박목월의 시가 한시의 기맥에 더 가닿았다. 사실 청록파 세 사람 중에 한시의 정서에 가장 밀착되어 있는 시인이 박목월이다. <윤사월>이나 <산도화>는 조촐한 왕유풍의 5언 절구에 가깝다. -641

 

너도 밤마다

꿈에 나를 본다 하니

 

오고

가는 길에

만날 법도 하건마는

 

둘이 다 바쁜 마음에

서로 몰라보는가

 

바람아 부지 마라

눈보라 치지 마라

 

어여쁜 우리 딸의

어리고 고운 꿈이

 

날 찾아

이 밤을 타고 이백 리를

온단다.                         조운 <여서를 받고> - 645

 

 

 

 

3. 내가 저자라면

 

나는 이 책의 한문이 대단히 무서웠다. 한문에 겁을 집어 먹은데다, 생몰연대가 표시된, 역사책에서나 들어본 이름에도 주눅이 들었다. 그건 정작 시로 집중하는 걸 방해했다. 끙끙 싸매고 시간을 보냈다.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저자의 다른 책에서 한문공부한 이야기, 나중에 한 권의 책이 된 스승 다산 정약용과 제자의 이야기, 아들과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에피소드를 읽었다. 공저를 내게된 화가 김점선씨가 스파게티가 먹기 싫어 화랑 옆에 서 있다가 정민씨와 만나게 된 사연이 즐겁다. 이웃인 그들은 가끔 만나 점심을 같이 먹는 사이였다. 젊은 시절의 그의 사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사진으로 나이들어 갔는지를 보는 것도 즐거웠다. 이러한 저자와 한시 관련된 생활 주변의 이야기를 조금 더 일찍 읽었다면 나는 이 책 읽기를 좀 더 즐길 수 있었을 거다.

 

스승의 옥편에서는 그가 한문공부를 시작한 게 대학교 4학년 때이고 그 때 스승님이 쓰시던 나달나달한 옥편을 물려받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 옥편은 스승님의 아버님이 쌀독의 바닥을 박박 소리나도록 퍼서 쌀을 내다주고 사준 것이었다. 스승님이 그리울 때, 그리고 옥편이 다 떨어지도록 근면히 연구한 마음에 기대고 싶을 때 책상 아래에 넣어둔 스승의 옥편을 꺼내서 본다는 걸 읽으면서 짬뽕 국물 마시다 손수건을 꺼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열몇 살에 만나 그의 가르침을 평생 실천한 강진 소년 황상의 이야기에도 그랬다. 또 한자도, 어려운 이름도 없는 <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저자의 다른 책이 이 책을 읽는 안내자, 도우미 역할을 해주었다. 고맙다.

 

단순한 것, 쉬운 것을 먼저 낄낄거리면서 읽다가 모래주머니처럼 무겁던 한자에 대한 부담, 불편을 저만치 벗어놓는다. 저자가 준 적 없는 짐을 스스로 낑낑거리며 지고 있었다. 내가 느끼는 어려움이 진입장벽이 된다는 걸 그도 알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가 어린이를 위한 만화책 형태의 한자 교과서를 썼고, 청소년을 위한 대안교과서 형태의 한자 교과서도 집필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어린이를 위한 한시 입문서도 썼다. 이제 한시미학산책을 시험문제를 풀기위해 읽던 참고서나 교과서처럼이 아니라 산책기처럼 읽는다. 모르는 한자는 지나친다. 대부분 모르기 때문에 패스가 많다. 저자도 한시를 가시덤불로 길이 막힌 길같다 했다. 그러면서도 옛날과 지금이 통하는 정신의 핵심을 보길 원했다. 하지만 한시는 고유의 형식,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해 공부하듯 그것을 알 필요가 있다. 한시의 정운 같은 것들이다. 저자의 의도가 그러한데 이걸 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한문과 한시라는 독특함에 대한 부담보다 그가 나를 안내하고 했던 시의 세계’ ‘시인은 모름지기 어떠해야한다는 것을 중심으로- 이게 그가 찾아보고자 했던 통변의 핵심이고 정신이 아닐까?- 읽어간다. 어찌 보면 제목에서 저자는 이 책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의 분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한시를 소재로 해서 우리 선조들의 시와 미학에 대한 관점을 알아가는 산책을 나와 같이 나서자는 초대장이다. 한문학이 좋아 국문과에 갔고, 그 연구가 재미있어서 평생 한문학을 업으로 하는 학자를 동행 삼아 나서는 길은 퍽 든든하고 설레었다. 낯선 곳, 새로운 것을 소개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에 살고 있으면서 그것을 좋아하는 이와 동행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보는 것이다. 산책은 가벼운 말이다. 햇살 좋을 때, 어스름이 깔릴 때, 밥을 먹고 소화시킬 겸 부담없이 나선다. 나는 남산한옥마을이나 전주한옥마을을 상상한다. 그리고 거기 있는 스물 여섯 채의 집을 상상했다. 서두와 24가지 꼭지, 그리고 에필로그는 각각 사는 사람과 사연, 용도가 다른 아름다운 집이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은 만만치 않았다. 노련하고, 이 마을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더불어 긍지를 가지고 있고, 새로 온 방문객에 대한 애정을 지닌 안내자에 의해 마을을 살펴보는 길은 순서가 잘 설계되어 있다. 한두번 거닐었다고 알아지는 동네는 애초부터 아니었다. 책의 제목을 참으로 멋드러지게 지었다.

 

저자의 설명방식은 각 장에서 대부분 서두에 결론을 내리면서 딱 요약을 한다. 그런 다음 그것의 예를 멋진 한시를 몇 편 들어서 보여준다. 그림이 따라 나온다. 이건 초판에는 없었던 것을 개정판에 보충했다. 그림은 시의 장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설명을 부연하기도 한다. 그림을 구해서 적합한 구석에 배치해 둔 배려가 고맙다. 누가 골랐을까? 고른 손이 저자든 출판사 누구이든 감사의 마음에 고개 숙여진다. 또 구조가 상당히 수미쌍관이다. 연암의 글로 시작하고 연암의 글로 맺는다. 이런 설명 방식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그가 번역한 한시는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그 한시 번역에 대한 에피소드를 다른 책에서 들었다. 스승님이 군더더기를 싹 빼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1400장짜리 박사논문을 1200장으로 줄였다 했다. 말을 줄임으로써 읽을 것이 더 많아졌다는 그의 말을 기억하며, 군더더기 없는 시의 번역과 본문을 읽는다.  

 

그런데도 어렵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이것은 어떻게 보완을 할까? 그림이 들어가서 개정판을 내게 된 것도 더 쉽게 친하게 하려는 고심의 결과일 것이다. 현재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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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6 11:59:43 *.51.145.193

저자에 대한 설명이 깔끔하십니다. 저자의 책을 두루 보셨군요. 그 시간을 어찌 내셨는지...부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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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7 07:04:57 *.154.223.199

집 앞 도서관에 한 번 갔던 걸 막 생색 내고 있어요.^^ 

한시미학산책이 어려워서 잡고 있다 꾸벅꾸벅 조는 때가 많았어요. 어린이 책을 읽고 읽으니 좀 이해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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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7 12:19:24 *.233.153.18

윤정님 화이팅하고 계시군요.

좋을 결과 있을 것입니다.

 

끝까지 화이팅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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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1 06:28:10 *.154.223.199

희망빛인희님^^

마지막 과제를 해야할 일요일 새벽, 아직 빈 손인 저에게 제 이름을 부르며 '끝까지 화이팅하시길' 해주시는 말씀에 흑흑 합니다.

용기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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