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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1일 22시 13분 등록

디지털시집은...사진을 넣다보니 용량이 켜져서 부득이하게 사부님께 메일로 보냈습니다.

첨부물은...맛보기 버젼입니다. 서문과 목차 마침글...

 

시집 제목은 "나쁜여자, 행복한 여자"입니다.

           

나쁜 여자...란

나뿐인 여자?  이런의미도 있습니다. 제 생각은 내가 행복해야 주변도 행복하다

내가 홀로 서야 좋은 사람이 내 곁에 있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타인도 나를 사랑한다.

제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입니다.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가 저에게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동안 늘 시를 접하긴 했습니다만, 정리되지 못했던 부분을 정리할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첫페이지에 들어간 솟대는 지난 여름휴가때 찍어온 사진이고 참좋은 당신에 함깨한 저희 어머니는

어머니 칠순기념 중국황산에서 건져온 사진입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카메라와 휴대폰예 찍어두었던 사진을 컴에 대분류만 해 놓았었는데

이번에 참 유용하게 사용했습니다. 이것도 감사합니다.

지난날의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한 작업이 되었으니까요.

 

 외운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내가 백석이 되어/혼자 가는 먼 집/청파동을 기억하는가/눈물은 왜 짠가/한계령을

             위한 연가/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시33편 전문]

 

 ,  는 죽었다.   김용택

콩타작을 하였다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또르르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콩 잡으러 가는데
, , 저 콩 좀 봐라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 너는 죽었다

 

고스톱에 관한 보고서 권혁웅-

 

아버지는 오후가 되면 직장 동료들과 함께

우리 집으로 외근을 나오곤 했다

초여름 녹음이 당구장에서 얻어온 푸른 융처럼

부드럽고 아늑한 거기서

아버지와 직원들은 진지하게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지닌 카탈로그는

아동문학전집, 건강자석 요, 장식용 청자, 알로에

개인용 휴대 헤어컬 등 다양했으나

아버지의 영업방식은 한결 같았다

 

오늘의 운세를 타고난 사람에게

차비와 식비를 몰아주는 것

늘 담배를 입에 물고 패를 뒤집느라

새우 눈을 한 직원, 오른손 검지와 엄지가 없어

왼손으로 패를 섞곤 했던 직원

허리가 아프다며 베개와 이불더미에 기대어

패를 치던 직원 그리고

아버지 가운데 하나가 그날의 일당을 타갔다

 

청단처럼 푸르른 나날

홍단처럼 발그레한 나날

어느 날, 새우 눈을 가진 직원이 판을 엎었다

손가락 없는 직원의 서툰 손재주가 문제였다

허리 아픈 직원은

다친 허리 때문에 엎드려 있었고

말리던 아버지만 소주병에 맞았다

아버지 혼자 피박과 광박을 다 덮어썼다

병을 깬 직원은 청단처럼 서슬이 파랬고

병에 맞은 아버진 홍단처럼 얼굴이 붉었다

마당의 닭들이 고도리처럼 날아올랐다

 

청단처럼 푸르른 나날

홍단처럼 발그레한 나날

 

그 후로 아버진 스쿠알렌만 팔았다

심해 상어의 간에서 만들었다는 신비의 약

상어처럼 늘 움직여야 하는 아버지

재수가 없던 아버지

십 여 년 후 심해로 잠수해서는

다시는 올라오지 않던

 

지금도 재수를 떼는 어머니를 보면

그 시절이 여전하다는 걸

알 것 같다, 이를테면

 

청단처럼 푸르른 나날

홍단처럼 발그레한 나날

 

열심히 산다는 것    -안도현-

 

산서에서 오수까지 어른 군내버스비는

400원입니다

운전사가 모르겠지, 하고

백원짜리 동전 세 개하고

십원짜리 동전 일곱 개만 회수권 함에다 차르륵

슬쩍, 넣은 쭈그렁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걸 알고 귀때기 새파랗게 젊은 운전사가

있는 욕 없는 욕 다 모아

할머니를 향해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무슨 큰 일 난 것 같습니다

30원 때문에

 

미리 타고 있는 손님들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운전사의 훈계 준엄합니다 그러면,

전에는 370원이었다고

할머니의 응수도 만만챦습니다

 

그건 육이오 때 요금이야 할망구야, 하면

육이오 때 나기나 했냐, 소리치고

오수에 도착할 때까지

훈계하면, 응수하고

훈계하면, 응수하고

 

됐습니다.

오수까지 다 왔으니

운전사도, 할머니도, 나도, 다 왔으니

모두 열심히 살았으니!

 

 

산을 오르며 도종환-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 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 쉬다 주저 앉지 않고  

 

내리막 길에서

자만의 잰 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개 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 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있지 않고

오르는 일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되며

올라온 곳에서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히 받아들여

산 내려와서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새해 아침   -송수권-

 

새해 아침은 불을 껐다 다시 켜듯이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답답하고 화나고 두렵고

또 얼마나 허전하고 가난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지난밤 제야의 종소리에 묻어둔 꿈도

아직 소원을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외로웠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억울했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슬펐습니까? 그 위에 하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얼마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까?

그 위에 우레와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그 위에 침묵과 같은 눈을 내리게 하십시오

 

낡은 수첩을 새 수첩으로 갈며

떨리는 손으로 잊어야 할

슬픈 이름을 두 줄로 금 긋듯

그렇게 당신은 아픈 추억을 지우십시오

 

새해 아침은 찬란한 태양을 왕관처럼 쓰고

끓어오르는 핏덩이를 쏟으십시오

 

새해 아침은 첫날밤 시집온 신부가 아침나절에는

저 혼자서도 말문이 터져 콧노래를 부르듯

그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오십시오

 

겨울 풍경    -박남준-

 

겨울 햇볕 좋은 날 놀러가고

사람들 찾아오고

겨우 해가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꽁지만하다

소한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랫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버쩍 뼈를 곧추세운다

 

세상에 뼈 없는 것들 어디 있으랴

얼었다 녹았다 겨울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

언젠가는 저 겨울빨래처럼 뼈를 세우기도

풀리어 날리며 언 몸의 세상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안이 되기도 하리라

처마 끝 양철지붕 골마다 고드름이 반짝인다

지난 늦가을 잘 여물고 그 중 실하게 생긴

늙은 호박들 이 집 저 집 드리고 나머지

 

자투리들 슬슬 유통기한을 알린다

여기저기 짓물러간다

 

내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호박을 자른다

보글보글 호박죽 익어간다

 

늙은 사내 하나 산골에 앉아 호박죽 끓인다

문밖은 여전히 또 눈보라

 

처마 끝 풍경소리 나 여기 바람 부는 문밖 매달려 있다고,

징징거린다

 

길 잃은 날의 지혜   -박노해-

 

큰 것을 잃어 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 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 주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 주십시오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그리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작은 것 속에 큰 길로 나가는 빛이 있고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

 

현실 속에 생활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 

 

가을날    -김광규-

 

누가 부는지 뒷산에서

서투른 나팔 소리 들려온다

견딜 수 없는 피로 때문에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그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여름내 햇볕 즐기며

윤나는 잎사귀 반짝이던 감나무에

지금은 까치밥 몇 개

높다랗게 매달려 있고

땅에는 떨어진 열매들

아무도 줍지 않았다

나는 어디쯤 떨어질 것인가

 

낯익은 골목길 모퉁이

어느 공원 벤치에도 이제는

기다릴 사람 없다

차라리 늦가을 벌레 소리에 묻혀

지난날의 꿈을 꾸고

꿈속에서 깨어나

손짓하는 코스모스에게 묻고 싶다

 

봄에는 너를 보지 못했다

여름에는 어디 있었니

때늦게 길가에 피어난 꽃들

함초롬히 입 가리고 웃을 것이다

아직도 누군가 만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

굳게 입 다물고

두꺼운 안경으로 눈 가리고

 

앓고 싶지 않은 병

온몸에 간직한 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고 있다

아득한 젊은 날을 되풀이하는

서투른 나팔 소리

참을 수 없는 졸음 때문에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그의 말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사랑은 아픔을 위해 존재합니다  -칼릴 지브란-

 

사랑이 그대를 손짓하여 부르거든 따르십시오

비록 그 길이 어렵고 험하다 해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품을 때에는 몸을 맡기십시오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아픔이

그대에게 상처를 준다 해도

사랑이 그대에게 말하거든 그를 믿으십시오

비록 사랑의 목소리가 그대의 꿈을

모조리 깨뜨려 놓을지라도

 

왜냐하면 사랑은 그대에게

영광의 왕관을 씌워주지만 또한

그대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도

주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대의 성숙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대를 아프게 하기 위해서도 존재한답니다

사랑은 햇빛에 떨고 있는

그대의 가장 연한 가지들을 어루만져주지만

또한 그대의 뿌리를 흔들어대기도 한답니다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질 나쁜 연애    -문혜진-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

 

낡은 오토바이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제니스 조플린의 머리카락 같은

 

구름의 일요일을 베고

 

그의 검고 단단한 등에 얼굴을 묻을 거야

 

어린 시절 왜 엄마는 나에게

 

바람도 안 통하는 긴 플레어스커트만 입혔을까?

 

난 다리가 못생긴 것도 아닌데

 

회오리 바람 속으로

 

비틀거리며 오토바이를 몰아가는

 

불량한 남자가 좋아

 

머리 아픈 책을

 

지루한 음악을 알아야 한다고

 

지껄이지도 않지

 

오토바이를 태워줘

 

바다가 펄럭이는 바람 부는 길로

 

태풍이 이곳을 버리기 전에

 

검은 구름을 몰고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지 않겠어? 

 

청파동을 기억하는 가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내가 백석이 되어    -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싸릿꽃 그대    -서정윤-

                                  

지난 달 얼핏 지나가며 눈을 맞추었던

꽃을 찾으러 그 언덕에 왔다

흰 면사포 빛의 화려했던 싸리꽃은

나를 기다려 주지도 않고

시간의 큰 바람 속으로 자신의 길을 가 버렸다

원망과 아쉬움에 맥이 풀려 주저앉으니

옆에서 패랭이꽃이 너무 늦게 왔다고 말한다

싸리꽃은 나를 기다리다가

마지막 눈을 감지 못한 채

바람에 떠밀려 가 버렸다고

가면서도 아쉬워 수 없이 뒤돌아 보았다고

고개를 숙이며 패랭이꽃은 말한다

자신도 곧 그렇게 될 것 같다고...

 

나의 눈에 하늘이 가득 고여 출렁였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급한 일로 나는

그를 만나는 일 미루었나

손에 닿기만 해도 녹아 버리는 눈처럼

연약한 꽃인 줄 알면서도

늘 거기 있다고 생각하던 방심

그대 속의 재가 바람에 다 날려가고

오직 내 마음 속에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내 발 앞에 민들레가

꽃망울을 준비해 놓고 기다린다

그 고통이 너무 크니까 피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그냥 바라보며

나처럼 방심하다가 후회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면 하고

빌어 줄 수밖에 없다

 

건너편의 여자  -김정란-

 

오늘 저녁엔 한번 찬찬히 살펴 보시길

봄비 스스로 내리는 저녁무렵

혹시 당신 양복 뒷단을

희고 찬 낯선 손이 몰래 다가와

살며시 잡아당기지는 않는지

혹시 당신 아파트 문 위에

손톱자욱이 나 있지는 않은지

자동 응답기에 숨죽인 흐느낌이

녹음되어 있지는 않은지

당신이 시내로 들어가는 전철을 기다리면서

일간지에 코를 박고 있는 동안, 그리곤

불밝은 전동차 안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들어가는 동안,

혹시, 건너편, 시외로 빠져나가는 플랫폼

어두운 한 구석에 숨어서 한 여자가 당신을

막막히 애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그녀가 가슴을 불어가는 바람을 견디느라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고 있지는 않은지

당신이, 문밖으로 쫓아버린 여자

당신이,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 잊어버린 여자

그 여자, 당신의 일상이 잊어버린, 그러나

어쩌면 당신의 영혼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

건너편의 여자

 

고도孤島를 위하여    -임영조-

 

면벽 100!

이제 알겠다, 내가 벽임을

들어올 문 없으니

나갈 문도 없는 벽

기대지 마라!

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이니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마음 속 집도 절도 버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귀양 떠나듯

그 섬에 닿고 싶다

 

간 사람이 없으니

올 사람도 없는 섬

뜬구름 밀고 가는 바람이

혹시나 제 이름 부를까 싶어

가슴 늘 두근대는 절해고도여!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가서 동서남북 십리허에

해골표지 그려진 금표비(禁標碑)꽂고

한 십년 나를 씻어 말리고 싶다

 

옷 벗고 마음 벗고

다시 한 십년

볕으로 소금으로 절이고 나면

나도 사람 냄새 싹 가신 등신(等神)

눈으로 말하고

귀로 웃는 달마(達磨)가 될까?

 

그 뒤 어느 해일 높은 밤

슬쩍 체위(體位)바꾸듯 그 섬 내쫓고

내가 대신 엎드려 용서를 빌고 나면

나도 세상과 먼 절벽 섬 될까?

한평생 모로 서서

웃음 참 묘하게 짓는 마애불(磨崖佛)같은

 

바다 책, 다시 채석강   -문인수-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바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이다.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책,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심순덕-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끄떡없는 어머니의 모습.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시다고,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시다고,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줄만 알았던 나.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

어머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눈물의 왜 짠가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로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화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맹인부부가수   -호승-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초경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 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혼자 흐린 주점酒店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눈으로 술잔의 수위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post-아현동    -안현미-

 

오늘은 아현동 산동네에 갔다

오래 전 월세 들어 살던 방,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하던 방,

연탄불을 넣던 방,

이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울먹이던 방,

외롭던 방, 고맙던 방,

아주 아주 춥던 방,

그 시절

내 마음에 전세 들어 살던

첫 애인을 생각하는 밤,

 

나의 아름다운 남동생의

흐려진 얼굴빛을 걱정하는 밤,

고단한 토끼에게

아무 약효도 없는 안약을 건네던 밤,

 

가난한 추억과 함체하던 밤,

 

아현동 산동네를 내려와 찾아간 ‘BAR다’

 

어둡고 낡은 나무계단 끝에서

화장실이 어딘지 모르고 서 있는

머리 긴 외국 남자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Why?”라고 물으며

괜스레 친절하고 싶던 밤,

함께 여기를 뜨자고 말하면 주저 없이

따라가고 싶던 밤,

국적도 모국어도 잃어버리고 싶던 밤,

나 스스로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라고

자꾸 되묻던 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열정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니?

?

 

가난한 사랑의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호수1-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 밖에

 

애월        -이수익-

 

제주에 가면 꼭 한번 가보라던

애월, 그 바닷가 마을은

결국 가보질 못했다.

 

파란 바다빛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던

네 말이 무슨 비망록처럼 자주 떠오르곤 했지만

제주가 초행인 아내를 위해서는

성산 일출봉과 민속촌, 정방폭포, 산굼부리 등속의

관광명소를 먼저 보아야 했으므로

결국 그 곳은 가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잘된 일,

애월은 이제 ‘다음에….’하고 내 가슴 깊이 묻어둘

애틋한 그리움의 한 대상이 되었으므로

미지의, 선연한 푸른 바다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오랜 날들을 나는 즐겁게 시달리리라.

 

애월, 가슴에 품고 싶은

작은 기생(妓生)같은,

그 이름 떠올릴 적마다.

 

참 좋은 당신  -김용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 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

생각만 해도

좋은

당신.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곱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인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81편중 1975년 여름에 성산포에서 쓴 1~24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빠져나와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를 본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성산포에서는

끊어도 이어지는

바다 앞에서

칼을 갈 수 없다

 

성산포에서는

지갑을 풀밭에 던지고

바다가 시키는 대로

옷을 벗는다

 

성산포에서는

바람은 바다의 시녀侍女

사람은 바다의 곤충이고

태양은 바다의 화약인데

산만은 제 고집으로

한 천년 더 살리라

 

성산포에서는

언젠가 산이 바다에 항복하고

산도

바다처럼 누우리라

 

성산포에서는 그 육중한 암벽이

바다의 노예임을 시인하고

자기네들의 멸망을 굽어본다

성산포에서는

관광으로 온 젊은

사원 하나가

만년필에

바닷물을 담고 있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가장 죽기도 좋은 곳

성산포에서는

생과 사가 손을 놓지 않아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성산포까지 와서

자살 한 번 못하고 돌아가는 비열

구깃구깃 두었다가

휴지로 쓸 것인가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랑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성산포에서는

온종일 산삼을 먹어도

산만큼 성욕이 일지 않는다

성산포에서는

해삼을 아무리 먹어도

바다만큼 성욕이 일지 않는다

성산포에서는

바다는 한 개의 물

나는 한 개의 물에 항복한다

그 한 개의 물에서

수만 가지 소리가 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하늘 되려다

실패한 증거도 있다

 

성산포에서는

푸른색 이외에는

손대지 않는다

성산포에서는

색맹일지라도

바다를 빨갛게

칠할 순 없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짐승이

짐승보다 산이

산보다 바다가

더 높은 데서

더 깊은 데서

더 여유 있게 산다

 

아침 여섯 시

어는 동쪽에서도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부산필 거야

 

아침 여섯 시

태양은 수만 개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와서 해를 보라

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해 온

해를 보라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 사투리로 말한다

그러다가도 해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더 쉬운

감탄사를 쓴다

손을 대면 화끈 달아오르는

감탄사를 쓴다

 

성산포에서는

돌로 막아놓은 권리를 넘어

바다는 육지를

유지는 바다를

제 것 삼으려 한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를 보고 있는 고립

성산포에서는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 이외의

주인을 모르겠다

성산포에서는

어떤 명목으로도

성산포는 그들의 재산

소라는 그들의 시라기보다

그들의 혈장血漿

해삼은 그들의 장수라기보다

그들의 수당

성산포에서는

일출도 그들의 생활비

 

성산포에서는

살림을 바다가 맡아서 한다

교육도

종교도

판단도

이해도

 

성산포에서는

바다의 횡포를 막는 일

그것으로 둑이 닳는다

 

성산포에서는

그 풍요 속에서도

갈증이 인다

바다 한가운데에

풍덩 생명을 빠뜨린 순 있어도

한 모금 물을 건질 순 없다

성산포에서는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바다가

사방에 흩어져 산다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IP *.39.13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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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2 12:41:12 *.118.21.146

질 나쁜 연애란 시도 있었네요?

역시 길수님도 저랑 겹치는 시가 있구요..ㅎㅎ

제목도 재미납니다 .*^^*

뵙길 희망하며 ...

프로필 이미지
2012.03.12 17:04:33 *.51.145.193

이번 과제를 하면서 '백석'을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길수님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꼽으셨네요. 괜히 혼자 반가워서 웃습니다.ㅋㅋㅋ

프로필 이미지
2012.03.13 15:52:48 *.123.71.120

이정록의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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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7 09:32:03 *.154.223.199

기대했던 이길수님의 시를 오늘에야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올해부터는 주 5일제여서 토요일에도 쉽니다.

밥 뜸을 들이며 컴 앞에 앉아 있어요.

 

저는 이정록 의자, 김용택 참 좋은 당신은 어디다 베껴두고 싶어졌구요.

한계령을 위한 연가,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눈물은 왜 짠가를 이길수님이 외울 때 유심히 듣보고 싶습니다.

어렵고 길지만 정말 외우고 싶은 시들이라 하셨지요.

 

그리고 저는 여전히 이길수님한테서 다른 사람들을 읽고 있나봐요. 시를 읽으면서 누군가가 생각이 나네요. 그 이도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화요일에 뵐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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