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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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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2일 02시 58분 등록

내 인생의 시집

내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33편의 시와 22명의 시인과 함께 상상하다

 

들어가며

비틀스의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트 클럽> 같은 명반을 만들고 싶었다. 33편의 시를 모은 지금 손수레에서 팔던 해적판 그레이티스트 히트 테이프 정도밖에 안 된 기분이다. 하지만 어쩌랴 언제 들어도 좋은 음악같이 주옥같은 시들이 아니더냐. 그냥 시만 써서 붙이기엔 아쉬워 시인에 관한 이야기, 나에 대한 이야기, 시에서 떠오르는 나만의 상념들을 군데군데 덕지덕지 붙여 놓았다. 보기 좋게 붙여 졌으면 좋으련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올해 들어서 나의 자서전도 쓰고 내 인생의 시집도 엮고 나니 든든한 지팡이를 한 쌍 얻은 기분이 든다.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던 걸 덜컥 저질러 버린 기분이다.
나는 시와 인연이 있다. 시는 나의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에 함께했다. 고등학교 시절 축제에 시를 내고 여학생들에게 내 시를 설명한답시고 뛰어다녔다. 반면 대학 시절 방황할 때 홀로 낙서 같은 시를 끼적였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란 영화에 이런 말이 나온다. ‘매일 정확히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늘 꾸준히 반복한다면, 의식과도 같이 행한다면, 세상은 변할 것이다.’ 시와 함께하는 나만의 의식을 상상해 본다. 이러한 의식은 먼저 나를 변하게 할 것이고 내 가족을 변하게 할 것이며 결국 세상이 변할 것이라 상상해 본다. 나의 꿈은 이렇다. 매일 저녁 10시에 우리 딸과 함께 잠들고 새벽 4시에 벌떡 일어난다. 찬물에 세수하기 전에 먼저 고릴라처럼 가슴을 여러 번 두드려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면 나탈리 골드버그가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얘기했듯이 갑자기 나타나서 행복하게 주름진 큰 눈을 굴리면서 ‘너는 세상을 사랑하니까 글을 쓰는 거야’라고 속삭여 준다. 나는 말똥말똥해진 눈을 크게 뜨고 책상에 앉는다. 책상에 앉아서 맨 처음 해야 할 일은 오늘을 시작하는 나만의 의식으로 시를 한 편 나직하게 나에게 읽어주는 것이다. 오늘의 시가 뭘 의미하는지는 전부 다 이해가 가진 않더라도 나는 내 속의 또 다른 ‘위대한 결정자’가 영감을 줄 것임을 전적으로 믿을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마치고 그 시는 살아 꿈틀대는 잉어같이 싱싱한 상상을 계속 내게 줄 것이다. 나는 나를 풀어주고 아주 쉽게 단순하게 손을 계속 움직여 나갈 것이다.

그렇다. 시는 내 시작의 의식이다.

시와 함께하는 새벽 의식의 실천을 무수한 생명의 흐름에 대고 맹세하면서 서문을 대신한다.

2012. 3. 12 새벽에 이준혁 쓰다

 

목차

나무, 폭포, 그리고 숲 / 박남준 5
적막 / 박남준 7
사철나무 그늘아래 쉴때는 / 장정일 9
석유를 사러 / 장정일 10
오감도 시제12호 / 이상 13
거울 / 이상 14
학교에서 배운 것 / 유하 16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 욕망의 통조림 또는 묘지 / 유하 17
홀로서기 / 서정윤 19
사랑한다는 것으로 / 서정윤 21
슬픈 까페의 노래 / 최영미 23
마지막 섹스의 추억 / 최영미 24
영원 / 아르튀르 랭보 26
나의 방랑 / 아르튀르 랭보 27
진실 / 박노해 29
노동의 새벽/ 박노해 30
폭풍우 / 칼릴 지브란 32
나그네 / 칼릴 지브란 33
님의 침묵 / 한용운 35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36
꽃 / 안도현 38
섬진강 2 / 김용택 40
길 / 윤동주 42
풀꽃 / 나태주 44
목마와 숙녀 / 박인환 46
불국사 / 박목월 48
윤사월 / 박목월 49
모과차 / 박용래 50
청춘 / 사무엘 울만 51
어두워 진다는 것 / 나희덕 52
사무원 / 김기택 53
가뜬한 잠 / 박성우 54
번개 / 바쇼 55

 

외운 시 : 적막 / 박남준, 사랑한다는 것으로 / 서정윤, 나그네 / 칼릴 지브란, 윤사월 / 박목월, 모과차 / 박용래, 풀꽃 / 나태주, 번개 / 바쇼
 
시인 박남준은 1957년 법성포에서 태어나 전주대 영문과 졸업 후 서울의 직장에서 일하다가 좀 쉬려고 모악산 자락 빈집에서 지내다가 거기가 좋아서 아주 정착했다고 한다. 시인을 알려면 그의 시를 보아야 한다. 고독 속에서 자연과 마주하며 단단히 영근 시는 묵직하다. 
그의 시 ‘나무, 폭포, 그리고 숲’을 읽었다. 내가 그리워했던 건 항상 강 건너의 것이었다. 대학에 가기 전에는 학과 공부는 하기 싫고 마냥 컴퓨터 공부가 하고 싶었다. 막상 대학에 가서 컴퓨터를 전공하게 되니 수업은 너무 어렵고 수업 대신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그러다가 영화 관련 일이 하고 싶었다. 나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영화를 할 수는 없어서 내가 선택한 것은 애니메이션 관련된 기술적인 부분인 컴퓨터 그래픽스를 기웃거렸다. 하지만 취업을 하면서 이쪽 길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강 건너의 흔들리는 불빛을 바라본 것은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고자 그리워했을 뿐 징검다리를 건널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시인은 숨을 놓고 수직으로 내려꽂히는 폭포처럼 사느냐고 나에게 물어온다. 내리꽂힌 그 삶이 깊은 물을 이루어 고이지 않고 비워내며 이 모든 것을 담아낼 그릇을 갖고 있느냐고 물어온다. 나는 당당했던가 최선이었던가? 가장 쉬운 길 남들이 미리 다 지나가서 미래가 쉽게 예측되는 길로 따라간 건 아닌지? 모두 나의 선택이었다. 이제 나도 숲에 누워 나무를 쳐다보고 다시 한번 내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바라본다. 저 멀리 나뭇가지가 갈라진 모습을 보면서 그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아갈 자신이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나무, 폭포, 그리고 숲 / 박남준

 1
 미루나무가 서 있는 강 길을 걷는다 강 건너 마을에 하나둘 흔들리며 내걸리는 불빛들, 흔들리는 것들도 저렇게 반짝일 수 있구나 그래 별빛, 흘러온 길들은 늘 그렇게 아득하다 어제였던가 그제였던가 그토록 나는 저 강 건너의 불빛들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던 것이구나

저 물길의 어디쯤 징검다리가 있을까 한때 나의 삶이 강가에 이르렀을 때 강 건너로 이어지던 길, 산 너머 노을이 피워놓은 강 저쪽 꿈꾸듯 흐르던 금빛 물결의 길을 물어 흘러갔다
 그 강가에 지고 피던 철마다의 꽃들이여 민들레여 쑥부쟁이여 강 저편 푸른 미루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며 손짓하고 그때마다 산 그림자를 따라 새들이 날아올랐다
 새들, 새들의 무덤을 보고 싶었지 나무들이, 바람이, 저 허공중의 모든 길들이 풀어놓은 새떼들이 돌아가 눕는곳 저 산, 저 물길이 다하여 이르는 곳일까 미루나무의 강 길을 따라 걸었다 따뜻한 불빛들이 목이 메어왔다
  
 2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 흔들리며 손짓하는 나무들의 숲에 다가갔다 숲을 건너기에 내 몸은 너무 많은 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지나간 세상의 일을 떠올렸다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들끓게 하였던 것들, 끝없는 벼랑으로 내몰고 갔던 것들, 신성과 욕망과 내달림과 쓰러짐과 그리움의 불면들
 무릎을 꿇었다 꺾어진 것은 내 무릎만이 아니었다 울컥울컥 울컥울컥 너도 어느 산천의 하늘에서 길을 잃었던 것이냐 산비둘기의 울음이 숲을 멀리 가로지른다

3
 굽이굽이 흘러온 길도 어느 한 굽이에서 끝난다 폭포,여기까지 흘러온 것들이 그 질긴 숨의 끈을 한꺼번에 탁 놓아버린다
 다시 내게 묻는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 꽂힐 수 있느냐 내리꽂힌 그 삶이 깊은 물을 이루며 흐르므로, 고이지 않고 비워내므로 껴안을 수 있는 것이냐 그리하여 거기 은빛 비늘의 물고기떼, 비바람을 몰고 오던 구름과 시린 별과 달과 크고 작은 돌이며 이끼들 산그늘마저 담아내는 것이냐

일생을 수직의 삶으로 살아왔던 것들, 나무들이 가만히 그 안을 기웃거린다
물가에 앉아 잠긴다 지나온 시간, 흘러온 내 삶의 길, 그 길의 직립보행에 대해 생각한다 당당했던가 최선이었던가 그 물가에 다가가 얼굴을 비춰본다

4
 내 안의 그대 산다는 것은 가까이 혹은 멀리 마주 보고 있는 것 어깨를 끌어안고 다독여주는 것 말없는 이야기도 가만히 들어주는 것 변함없는 것 나뉘지 않는 것 눈을 감을수록 밀려오는 것 밀려와 따뜻한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주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눈동자에 눈부처를 새기며 오래오래 잊지 않는 것 함께 가는 것

5
 비로소 숲을 이루는 것이다 나무와 나무와 나무와 그대와 그대의 그대와 그대의 모든 것들과 나의 어제와 나의 오늘과 나의 내일과
 그 숲에 눕는다 언제인가 숲이 눕고 숲이 다시 일어났듯이 내 안의 삶들도 다하고 일어나기를, 오래 누웠던 자리에 숲의 고요가 머물렀다 한걸음 한걸음 그대 또한 그 숲에 멀어지거나 가까이 있었다

 



적막 / 박남준

여기까지 왔구나
다시 들녘에 눈 내리고
옛날이었는데
저 눈발처럼 늙어가겠다고
그랬었는데

강을 건넜다는 것을 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길에 눈 내리고 궂은비 뿌리지 않았을까
한해가 저물고 이루는 황혼의 날들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안다
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어라
 

북한산 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다. 창문에서 머리를 빼고 옆을 보면 산자락이 치마폭처럼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산에 관한 관심도 같이 높아져 대학 시절 같은 방을 썼던 친구 녀석과 한 달에 두 번 정도 같이 산에 가게 되었다. 주말에 집을 오래 비우는 건 아내의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그래서 새벽 시간을 선택했다. 보통 새벽 5시쯤 집을 나선다. 아파트와 도시의 풍경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서서히 날이 밝아 오고 우리는 땀을 닦는다. 어느 날 화장실에 들리기 위해 사찰로 연결된 길을 걷게 되었다. 계단은 계속 이어지고 화장실에 가려고 들렸는데 아침까지 먹게 되었다. 알아서 떠먹고 알아서 씻고 알아서 시주하는 자유로움이 맘에 들었다. 반찬은 나물과 호박 무침이었다. 쓱쓱 비벼서 먹었는데 고기가 없어도 너무 맛깔스러웠다. 절 옆으로 난 높은 계단이 있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니 작은 암자가 있었다. 그 그늘에 쉬면서 우리는 땀을 닦았다. 식후 담배를 즐기는 다도 그 순간엔 담배생각보다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공기에 감사했고 산의 숨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조용함을 즐길 수 있었다.
장정일은 소년원 출신, 중졸의 학력, 여호와의 증인 신도 등의 독특한 이력을 지닌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아담이 눈뜰 때’란 영화를 보고 책을 사 본 이후다. 그의 일탈적이며 어두운 작품은 나의 관심을 끌었다. 2000년 그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 에 대해 대법원은 ‘성행위 묘사가 노골적이어서 우리 사회의 보다 개방된 성관념에 비춰보더라도 음란하다’며 그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한 바 있다. 그의 초기작에 속하는 갓 스물 두 살의 나이에 쓴 ‘사찰나무 그늘아래 쉴때는’을 보면 그의 눈물과 그의 나이에 비해 더 알아버린 삶의 고단함을 엿볼 수 있고 그의 문학의 출발점은 이러한 소년다운 순수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철나무 그늘아래 쉴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뭇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 하겠지
 
바벨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석유를 사러 / 장정일
싸늘한 지폐 한 장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초단파 수신기를 타고 칼립소 뱃노래가 들린다.
그러나 여기는 추워
타오르지 않을 때는 난로마저 손과 발을 얼린다.
그럴수록 눈을 냉정히 닦고 바라보기로 해
책상 위에 하얀 타자기
키판은 고른 옥수수알 같이 박혀 있고
그것들보다 더 단정한 모습으로 지폐는 누워 있다.
아침에 나는 저것으로 라면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어떡하지 이 밤은 겨울도 참지 못해
큰 바람 소리로 신음하고
눈물만큼의 기름이 저 난로에는 없다.

점점 한기는 예리한 창을 갈아 내 허리께를 찌른다.
예수의 죽음 확인하던 로마의 병정처럼
두번...세...번......나는 빨리 결정해야 한다
석유를 사기 위해 아침을 굶기로 할 것인가
굶어죽기보다 먼저 동사할 것인가에 대하여.
원래 선택이란 좋은 잔을 마련하고 결정을 요구하지 않는 것
네 앞에 놓여진 잔 가운데 최선의 것을 택하면 되리라
그렇다면, 그래. 석유를 사서 갈등이 끝난다면
당장 사버리는 게 좋지 않은가
약간의 석유가 겨울을 유예하고
따뜻함이 이 저녁의 동사를 몰아낸다면
만사 그것으로 즐겁지 않겠는가

석유를 사기로 한다. 그러자 신의 둥근 후광인 듯
열었던 방은 생각만으로 더워지고
될수록이면 상상이 식기 전에 양말 하나를 더 신고
때묻은 목도리를 한다.
기름통은 신발장 근처에 버려져 있었고
거미줄이 쳤다. 손잡이에 묻은 먼지를 닦고 들어올릴 때
가득 채워지기 위해 한층 가볍게 들리는 기름통의 무게
여간 즐겁지가 않다.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별들과 가로등 사이로 난 희미한 길을 더듬어
서두를 필요가 없다. 나는 주유소가 바라보이는 신작로 앞에서
지나가는 차들을 천천히 보내 주었다.

좀더 오래 기다리며
가슴속에서부터 더워지는 공기를 느끼고 싶기에
느릿느릿 걸어 유리로 만들어진 집
붉다란 입간판이 주인집 문패보다 큰 주유소 마당에 서서
여보세요, 여보세요 부른다
그러면 유리에 묻은 성에보다 두터운 외투를 입은
소년이 나오지. 졸면서 기름 호스를 잡지
나는 기름이 통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얼마나 빨리 소년의 작업은 끝나는 것일까
계기는 오백원이 가리키는 숫자쯤 해서 멈추고
돈을 치른다. 하지만 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유다가 스승을 팔기 위해 고심한 만큼
또한 내게 결정하기 어려웠던 몫
등을 돌리고 성에를 풀어 놓은 거대한 누에 속으로
재빨리 소년이 사라지면
나는 올 때보다 천천히 걷는다
난관을 모면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시도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내일 굶주린다 해도, 겨울에 따뜻해지는 일은
꿈꾸는 일보다 중요하다
처음보다 질긴 채찍으로 바람은 내 등을 후려치지만
난로가 있어 기름통을 가지고
밤 늦게 걸을 수 있는 자는 또 얼마나 행복한가?
어느 틈에서인지 한 방울씩의 석유가 새고
몇 개 전주 너머의 너의 방이 별보다 밝게 반짝일 때
그때인가. 나는 끝없이 걷고 싶어졌다.
끝없이 걸어,

동쪽에서 떠오르고 싶었다.
대지를 무르게 녹이는 붉은 해로 솟아나고 싶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복숭아씨 같은 입을 딱딱 벌리며
무서운 대머리다. 불타는 기름통이다.
아아 매일 아침 내 가슴에 새겨지는 희망의 시간들을
무어라고 부를까.  

시 모음집인 <한국의 명시 - 김희보 평저>를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에 친구의 추천으로 샀다. 이 책을 산 것은 입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 책에는 시인 183명의 시가 755편이 들어있었다. 1900년대의 최남선 시인에서 1970년대의 천상병 시인까지 수록되어 있다. 물론 이 책을 정독하거나 지금 목표로 삼은 것처럼 하루에 한편씩 시를 읽지도 않았다. 공부하기 싫을 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책을 꺼내 쓱 훑어보는 정도였다. 그날도 평소처럼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날이었다. 그날도 책을 꺼내 이리저리 들춰 보는데 시에 숫자가 막 쓰인 시가 보이는 것이었다. 이상의 오감도였다. 그게 나와 이상의 첫 만남이었다.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쉬리얼리즘, 자동기술법 등등 그런 말이 나에겐 너무 매력적이었다. 어린 시절 좋아한 청소년 잡지 '어깨동무'에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보는 것 같이 신기했다. 그의 시 대부분은 이해를 못 했지만 오감도와 거울 같은 시를 좋아했다. 나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이상문학상이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란 갈 알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제야 그가 우리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당시에 서울대에 준하는 경성공고를 수석 졸업하였다. 그의 시 오감도는 1934년 7월 23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15회까지 연재되었다. 원래 30회로 예정하였으나 독자들의 과격한 항의에 따라 제명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상은 이러한 반응에 대해 2천 점의 작품 중에서 30점을 골랐다고 했다. 그의 시에서 보이는 불안함과 공포감이 그 당시에 시험과 등수의 압박에 힘들어하던 나의 정서와 맞지 않았을까? 현실을 초월하고 싶은 욕구가 컸던 나날들이었다.

오감도 시제12호 / 이상
烏瞰圖 詩第十二號

때묻은빨래조각이한뭉텅이空中으로날너떠러진다. 그것은흰
비닭이의떼다. 이손바닥만한한조각하늘저편에戰爭이끗나고平
和가왓다는宣傳이다. 한무덕이비닭이의떼가깃에무든때를씻는
다. 이손바닥만한하늘이편에방맹이로흰비닭이의떼를따려죽이
는不潔한戰爭이始作된다. 空氣에숯검정이가지저분하게무드면
흰비닭이의떼는또한번이손바닥만한하늘저편으로날아간다.

거울 / 이상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요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유하 그는 시인이며, 영화감독이다. 내가 꿈꾸는 직업을 다 가졌다. 그의 ‘말죽거리 잔혹사’는 나의 학장 시절보다 앞선 시대였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공감을 불러일으킨 성장 영화다. 진추하와 아비의 듀엣곡 one summer night이 들리면 이 영화의 장면이 생각난다. 버스에서 훔쳐보던 여학생의 옆모습과 학원이 끝나길 기다리며 여학생에게 편지를 주려고 기다리던 풋풋한 내 옆모습이 겹친다.
학교라는 공간은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특별한 곳이다. 특히 초등학교 5학년에서 중학교 3학년까지의 5년 정도의 시간 동안 나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도망가기도 했지만,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 시절에 나는 잘사는 동네와 못사는 동네의 차이점을 알았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싸움을 잘하는 것의 권력관계를 알았다. 교실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싸움이 벌어졌고 싸움이 난 후엔 학생주임이 싸운 애들을 보란 듯이 때리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화장실에 가면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뒷산에 가면 본드 냄새가 지독했다.
나는 그때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까?


학교에서 배운 것 / 유하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 욕망의 통조림 또는 묘지 / 유하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
국화빵 기계다 지하철 자동 개찰구다 어디 한번 그 투입구에
당신을 넣어보라 당신의 와꾸를 디밀어보라 예컨대 나를 포함한 소설가 박상우나
시인 함민복 같은 와꾸로는 당장은 곤란하다 넣자마자 띠--소리와 함께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그 투입구에 와꾸를 맞추고  싶으면 우선 일년간 하루 십 킬로의
로드웍과 섀도우 복싱 등의  피눈물 나는  하드 트레이닝으로 실버스타 스탤론이나
리차드 기어 같은  샤프한 이미지를  만들 것 일단 기본 자세가 갖추어지면
세 겹 주름바지와, 니트, 주윤발 코트, 장군의 아들 중절모, 목걸이 등의 의류 액세서리 등을 구비할 것
그 다음 미장원과  강력 무쓰를 이용한  소방차나 맥가이버 헤어스타일로 무장할 것
그걸로 끝나냐 ?  천만에, 스쿠프나 엑셀  GLSi의  핸들을 잡아야 그때 화룡점정이 이루어진다
그 국화빵 통과 제의를 거쳐야만  비로소  압구정동 통조림 통 속으로 풍덩 편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곳 어디를 둘러보라 차림새의 빈부 격차가 있는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욕망의 평등 사회이다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이다 가는 곳마다 모델 탤런트 아닌 사람 없고 가는 곳마다 술과 고기가 넘쳐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
미국서  똥구루마 끌다 온 놈들도 여기선 재미 많이 보는 재미 동포라 지화자. 봄날은 간다-해서,
세속도시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싶은 자들 압구정동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는구나
투입구의  좁은 문으로  몸을 막 우겨넣는구나  글쟁이들과 관능적으로 쫙 빠진 무용수들과의  심리적 거리는,
인사동과 압구정동과의 실제 거리에 비례한다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오,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이여
자, 오관으로 느껴보라,  안락하게 푹 절여진 만화방창 각종 쾌락의 묘지, 체제의 꽁치통조림 공장,
그 거대한 피스톤이, 톱니바퀴가  검은 기름의 몸체를 번득이며 손짓하는 현장을
왕성하게 숨막히게 숨가쁘게
그러나 갈수록 섹시하게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이곳에 오라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이 표현이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던 나에게 날아와 꽂혔다. 나에게 사춘기란 어떤 것이었을까? 그 당시에 혼자 눈물을 많이 흘렸다. 왜 눈물을 많이 흘렸을까? 나 자신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아마도 중학교 일이 학년 때쯤이었다.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하루하루가 너무 버거웠다.
Campus Life란 글자가 들어가 있던 스프링 연습장이 기억난다. 그때 Campus가 뭘 의미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 당시 연습장 겉장에도, 공책 겉장에도, 책받침에도, 심지어 껌 종이에도 홀로서기 시구와 청순한 소녀 그림은 너무나 흔했다. 이 그림이 어느 학교 누구랑 닮았다던가 뭐 그런 얘기들이 떠돌았다. 스프링 연습장을 이용해서 야구게임도 했고 연습장을 채워오는 빡빡이 숙제도 열심히 했다.
그 시절엔 시집을 사서 선물하는 게 유행이었다. 서정윤의 시집이 어떻게 나에게 왔는지 모르겠다. 그의 시를 읽으며 나는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을 하려면 먼저 홀로 서야 한다는 걸 배웠다. 인생이 참으로 힘겹게 느껴졌던 그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죽음과 신에 대해 진지하게 친구와 토론을 벌였으며 홀로서기의 삽화에 나오는 순수한 소녀와 짝사랑을 했다.
지금 알아보니 그 소녀 그림은 일본의 일러스트 작가인 오오타케이분의 작품이었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그 시절의 내가 그립기도 하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게 다행이기도 한 이중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홀로서기 / 서정윤
-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1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2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

        3

지우고 싶다
이 표정 없는 얼굴을
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렁 속으로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내 손엔 아무것도 없으니
미소를 지으며
체념할 수밖에......
위태위태하게 부여잡고 있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어느날, 나는
허전한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서고 있었다.

        4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면
나는 <움찔>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그가
나에게서 떨어져 갈 땐
발을 동동 구르며 손짓을 한다.

만날 때 이미
헤어질 준비를 하는 우리는,
아주 냉담하게 돌아설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파오는 가슴 한 구석의 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떠날 사람을 잡는 것만큼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지라도
 
        5

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차지하려 해도
그 허전한 아픔을
또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마음의 창을 꼭꼭 닫아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이 절실한 결론을
<이번에는>
<이번에는> 하며 여겨보아도
결국 인간에게서는
더이상 바랄 수 없음을 깨달은 날
나는 비록 공허한 웃음이지만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아무도 대신 죽어주지 않는
나의 삶,
좀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6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

그 끝없는 고독과의 투쟁을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야 한다.
부리에,
발톱에 피가 맺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홀로 서기>를 익혀야 한다.

           7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에
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살아 있다.
나의 얼굴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홀로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홀러 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들자.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는 없지만
<이것이다> 하며
살아가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을 하자.

 
사랑한다는 것으로 / 서정윤

사랑한다는 것으로
새의 날개를 꺾어
너의 곁에 두려하지 말고
마음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줄 수 있어야 하리라.
 

 

 
 

프리다 칼로는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되고 열 아홉 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척추가 으스러지고 평생 수십 번의 수술과 세 번의 유산의 고통 속에 살았다. 그러면서도 멕시코 벽화 예술의 거장인 디에고와 함께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그녀의 그림은 정물화에도 그녀만의 강인함과 고통이 배어 나온다. 최영미의 시도 그렇다. 숨김없이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오히려 시를 읽는 사람을 숨고 싶게 만든다.
나의 젊은 시절 나는 나의 욕망에 솔직했던가? 나는 오히려 핑계를 댈 어둠이나 시대의 요구가 없어서 방황했던 게 아닌가? 대학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테니스 동호회에 가입했지만, 새벽의 테니스 훈련에는 참가하지 않고 밤에 술 마시는 모임만 열심히 참여했으며 기본적인 테니스 규칙조차 몰랐다. 여자 후배에게 관심이 있었으면서도 자신이 없었던 나, 도망가기만 했던 나는 돌아보면 얼마나 미숙하고 어리석었는지 너무 부끄럽다. 나의 알몸을 확 드러나게 하는 그녀의 시를 오늘 다시 읽어 보고 싶다.

슬픈 까페의 노래 / 최영미

언젠가 한번 와본 듯하다.
언젠가 한번 마신 듯하다.
이 까페 이 자리 이 불빛 아래
가만있자 저 눈웃음치는 마담
살짝 보조개도 낯익구나.
어느 놈하고였드라
시대를 핑계로 어둠을 구실로
객쩍은 욕망에 꽃을 달아줬던 건
아프지도 않고도 아픈 척
가렵지 않고도 가려운 척
밤 새워 날 세워 핥고 할퀴던
아직 피가 뜨겁던 때인가
있는 과거 없는 과거 들쑤시어
있는 놈 없는 년 모다 모아
도마 위에 씹고 또 십었었지
호호탕탕 홀홀쩝쩝
마시고 두드리고 불러제꼈지
그러다 한두 번 눈빛이 엉켰겠지
어쩌면.....
부끄럽다 두렵다 이 까페 이 자리는
내 간음의 목격자
 
 

마지막 섹스의 추억 / 최영미

아침상 오른 굴비 한 마리
발르다 나는 보았네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
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
진실이란 이런 것인가
한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
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
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더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

그런 사랑 여러번 했네
찬란한 비늘, 겹겹이 구름 걷히자
우수수 쏟아지던 아침햇살
그 투명함에 놀라 껍질째 오그라들던 너와 나
누가 먼저 없이, 주섬주섬 온몸에
차가운 비늘을 꽂았지

살아서 팔딱이던 말들
살아서 고프던 몸짓
모두 잃고 나는 씹었네
입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


 

번역 시는 번역마다 느낌이 다르다.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무라카미 류의 69란 성장 소설에서다.

 

나는 보았다
무엇을 영원을
그것은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란 표현이 아주 좋았다. 다른 번역을 찾아보면 ‘그것은 태양과 섞인 바다’, ‘그것은 태양와 어울린 바다라오’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사진을 처음 배울 때 해가 뜰 때와 해가 질 때 가장 풍경 사진이 잘 나온다는 것을 배웠다. 해가 기울면서 자신의 빛을 옆으로 비추어 주니 지구 위의 모든 사물이 빛을 받아 빛난다. 특히 여행 중에 보았던 미국 서부의 브라이스 캐니언이 해 질 녘 빛을 받아 그늘져 있는 모습이 기억난다.
하지만 일부러 멀리 바다나 협곡을 향해 멀리 떠날 필요는 없다. 해가 뜨고 지는 순간 하늘과 닿아 있는 지평선이라도 바라보는 여유를 갖고 싶다.

영원 / 아르튀르 랭보

그것을 되찾았다!
무엇을? 
영원을
그것은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
 
영혼, 나의 파수꾼
그토록 무가치한 밤과
불길 속 낮의
고백을 속삭이자
 
인간다운 기도와
평범한 충동
거기서 그대는 벗어나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사탄의 숯덩이여
그대의 유일한 열정에서
"결국"이란  말도 없이
의무는 다 타버린다
 
거기엔 희망도,
영광도 없는데
인내력 강한 면학
그러나 형벌은 틀림없다

그것을 되찾았다
무엇을?
영원을
그것은 태양과 함께 가는 바다

나의 방랑 / 아르튀르 랭보
 
쏘다녔다. 터진 주머니에 두 주먹을 쑤셔넣고,
짤막한 외투도 이상적으로 헐었고,
하늘 아래 걸어가던 나, 시의 여신이여, 나는 그대의 충복이었다오.
오, 랄라! 내가 꿈꾸었던 찬란한 사랑들이여!
 
내 단벌 바지에 커다란 구멍 하나.
-꿈꾸는 엄지동이. 이 몸은 발걸음마다
시를 뿌렸노라, 내 여인숙은 큰곰자리에 있었다오.
-하늘에선 내 별들이 부드럽게 살랑대고,
 
길가에 앉아 내 별들의 몸짓에 귀기울이곤 했다오.
9월의 이 멋진 밤, 나는 이마에 떨어지는
이슬방울들 속에서 정력의 포도주를 느끼곤 했다오.
 
환상적인 그림자들 사이에서 운을 맞추고,
내 가슴 가까이 한쪽 발을 치켜들어.
상처난 내 구두의 고무끈을 나는 리라처럼 잡아당겼노라!


 

내 가슴 속은 분노로 뒤덮였다. 계속되는 야근과 주말 근무. 내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였다. 석 달만 열심히 하자는 프로젝트는 연기에 연기를 거듭해서 벌써 7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팀원들은 다 지쳐서 삼삼오오 모이면 이 지옥을 어떻게 도망쳐 나갈까 하는 이야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연휴에 뭘 할지 고민하는데 우리는 연휴 중 하루를 쉴 것이나 말 것이냐는 걸로 한 시간 째 미팅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는 평소보다 일찍 저녁 때쯤 퇴근을 하고 일요일 정오에 다시 출근하곤 했다. 토요일 저녁에 퇴근할 때 해가 아직 떠 있으면 가슴이 막 뛰곤 했다. 밖이 밝을 때 퇴근하는 게 너무 어색하고 가슴이 불안했다. 저녁 시간에 간만에 여자 친구를 만나서 닭발에 소주를 마시면 그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 토요일 저녁의 기분은 매일 술을 마실 수 있는 지금은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러한 시절도 지나고 나니 가끔 그때가 그립다.


진실 / 박노해

큰 사람이 되고자 까치발 서지 않았지
키 큰 나무숲을 걷다 보니 내 키가 커졌지

행복을 찾아서 길을 걷지 않았지
옳은 길을 걷다 보니 행복이 깃들었지

사랑을 구하려고 두리번거리지 않았지
사랑으로 살다 보니 사랑이 찾아왔지

좋은 시를 쓰려고 고뇌하지 않았지
시대를 고뇌하다 보니 시가 울려나왔지

가슴 뛰는 삶을 찾아 헤매지 않았지
가슴 아픈 이들과 함께하니 가슴이 떨려왔지

노동의 새벽/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칼릴 지브란의 시는 쉬워서 좋다. 꼭 어렵고 심오해야 좋은 시는 아니다. 쉽게 다가오는 시는 나에게 정말 친구처럼 내 마음을 위로 해 줄 때가 있다. 나는 위로가 되고 쉽게 공감이 가는 편안한 시가 좋다.
그의 시 나그네를 읽으면 내가 여행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난다.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서 낯선 곳에서 식사하고 잠을 자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처음으로 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은 병역을 마치고 유학을 가기 전에 나 혼자 배낭 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도착지는 프랑크푸르트였는데 오사카에서 하루를 묵고 가는 일정이었다. 대부분 여행자는 오사카의 간사이공항에서 잠을 잤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외국에서 첫 번째 밤을 공항에서 보내는 건 너무 우울했다. 마지막 전철을 타고 오사카 시내로 갔다. 가장 번화한 오사카의 난바 역에 내렸을 때의 그 낯선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영화 속 세트 같기도 하고 나와 같은 듯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물결과 낯선 네온사인들… 예약한 한국인 민박집에서 잠이 안 와서 이름 모를 거리를 배회하던 기억이 난다. 그의 시 속에서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간다.


폭풍우 / 칼릴 지브란

그대여,
당신은 아십니까?
폭풍우 속에 그토록
나를 감동시키는 그 무엇이 있는가를.

폭풍우가 휩쓸고 지날 때,
어찌하여, 나는
더욱 강해지고
삶에 대한 확신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폭풍우를 사랑합니다.
자연 속의
그 어떤 물상보다도
몇 배나 더 사랑합니다.

때로 마음 속에
어느 산꼭대기
세상에서 가장 거센
폭풍우 휘몰아 치는 마을에
사는 모습을 그려 보곤 합니다.

과연
그러한 곳이
지상에 있을까?

만약 그러한 곳이 존재한다면,
언젠가 돌아가
시와 그림 속에
온통 내 영혼을
쏟아 부으련만.

 

나그네 / 칼릴 지브란

어느 거대한 낯선 도시에
들어서게 되면,
나는 낯선 방에서의 잠,
낯선 곳에서의 식사를
사랑합니다.

이름모를 거리를
거닐며,
스쳐가는
모르는 이들을
바라보는 것을 사랑합니다.

나는,
즐겨
외로운 나그네이고자 합니다.

 

<님의 침묵>은 교과서에 수록된 시이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여자친구를 못 만나면서 어찌나 이 시가 가슴에 와 닿던지 내가 처음으로 암기한 시가 아닌가 싶다. 정확히는 암기하려고 노력했던 시인가 보다. 다시 외워보려고 했으나 첫 문장만 머릿속에 맴돌다 사라진다.
비록 ‘키쓰’의 추억은 아쉽게도 없었지만 나를 절망에서 벗어나게 도와준 것은 이 시였다. 이별 때문에 괴로워함은 결국 진정한 사랑을 깨우치는 것이며 이러한 슬픔의 힘을 전환해서 새로운 희망을 틔워야 한다는 것이 이 시의 가르침이다. 
고3 시절 어느 날, 나는 머리를 빡빡 깎았다. 물론 머리를 민다고 중이 되거나 만해 한용운 같은 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갑자기 공부가 잘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머리를 감을 필요가 없어서 좋았고 머리가 조금씩 자라면서 수건을 던지면 머리에 착 붙은 것이 신기해선 친구들이 날 놀려대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유쾌하면서도 쓸쓸했던 고교 3년 시절은 지나갔다.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꽃 / 안도현

 

누가 나에게 꽃이 되지 않겠느냐 묻는다면
나는 선뜻 봉숭아꽃 되겠다 말하겠다

꽃이 되려면 그러나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겠지
꽃봉오리가 맺힐 때까지
처음에는 이파리부터 하나씩
하나씩 세상 속으로 내밀어 보는 거야

햇빛이 좋으면 햇빛을 끌어당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흔들어보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도 오겠지
그 밤에는 세상하고 꼭 어깨를 걸어야 해
사랑은
가슴이 시리도록 뜨거운 것이라고
내가 나에게 자꾸 말해주는 거야

그 어느 아침에 누군가
아 봉숭아꽃 피었네 하고 기뼈하면
그이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내 몸뚱아리 짓이겨 불러줄 것이다


 

김용택 시인의 시 ‘섬진강 2’는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의 화장실벽에 붙어 있는 시이다. 섬진강이란 단어에는 뭔가 내가 모르는 사연이 서려 있는 듯하다. 남도여행을 가본 적이 있다. 거문도의 영국군 묘지를 찾아 걸어가던 길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기억난다. 비쩍 마른 강아지 노랑이를 만났고 해는 저만치 걸려있고 날씨는 청명하고 상쾌한 새소리와 향긋한 섬의 냄새, 부드러운 바람이 기억난다. 우거진 너무도 푸른 잎들 언덕 너머 갑자기 나타난 바닷가의 절경들.
다음번엔 섬진강으로 여행을 가보고 싶다. 낮술을 마시고 정처 없이 긴 강을 따라 걸어가고 싶다.

섬진강 2 / 김용택

저렇게도 불빛들은 살아나는구나.
생솔 연기 눈물 글썽이며
검은 치마폭 같은 산자락에
몇 가옥 집들은 어둠 속에서 사라지고
불빛은 살아나며
산은 눈뜨눈구나
어둘수록 눈 비벼 부릅뜬 눈빛만 남아
섬진강물 위에 불송이로 뜨는구나
 
밤마다 산은 어둠을 베어 내리고
누이는 매운 눈 비벼 불빛 살려 내며
치마폭에 싸이는 눈물은
강물에 가져다 버린다.
누이야 시린 물소리는 더욱 시리게
아침에 올 때까지
너의 허리에 두껍게 감기는구나
 
이른 아침 어느새
너는 물동이로 얼음을 깨고
물을 퍼오는구나
아무도 모르게
하나 남은 불송이를
물동이에 띄우고
하얀 서릿발을 밟으며
너는 강물을 길어오는구나
 
참으로 그날이 와
우리 다 모여 굴뚝마다 연기나고
첫날밤 불을 끌 때까지는,
스스로 허리띠를 풀 때까지는
너의 싸움은, 너의 정절은
임을 향해 굳구나

 


나는 항상 멍하니 걷는 걸 좋아했다. 방황이라고도 하고 과학도를 꿈꾸는 대학교 시절 친구들은 브라운 운동이라고도 불렀다. 혼자 다닐 땐 주로 가고자 하는 길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데 탁월한 감각을 발휘하여 의도치 않은 방황을 즐기곤 했다.



길 /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련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에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것은 다만
잃은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교보생명빌딩의 광화문 글판은 1991년부터 시작되었고 1997년부터 시적인 글귀로 바꾸어 현재는 계절마다 마음을 울리는 글귀가 바뀌고 있다. 그 중 인상 깊은 글귀 몇 개를 뽑아 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2011 여름, 정현종의 <방문객>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
- 2010 가을, 괴테의 명언 변용
눈과 얼음의 틈새의 뚫고 가장 먼저 밀어올리는 들꽃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 2010 겨울, 곽효환의 <얼음새 꽃> 중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 2009 겨울, 문정희의 <겨울 사랑> 중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 2009 가을, 장석주의 <대추 한 알> 중
찬 가을 한자락이 은은히 내 안으로 스며든다. 고마운 일이다.
- 2008 가을, 조향미의 <국화차> 중
봄이 속삭인다 꽃 피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 2007 봄, 헤르만 헤세의 <봄의 말> 중
가는 데까지 가거라 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리
- 2005여름, 김규동의 <해는 기울고 ‘당부’>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 2005 봄, 정현종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중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 2004 봄,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
떠난 사람들 모두 돌아와 다 함께 눈을 맞자 눈 맞으며 사랑하자
- 2004 겨울, 고은의 <강설> 중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내가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녀의 문집에서다. 그 당시 여중고교생들은 시가 주인공인 문집을 만들어서 교내 축제에 내는 게 유행이었다. 그녀의 문집에 이 시는 여러 번 반복해서 그림과 함께 나타났고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이 내 머릿속에 남았다. 초등학생 또는 중학생 꼬마였던 나는 잘 이해는 안 갔지만 뭔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크면 이렇게 멋지고 예쁜 문집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문집을 만들었던 누나는 뭘 하고 있을까? 그 문집은 어머니의 동료교사였던 국어선생님께서 제일 잘된 문집 같다고 나에게 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1941년 주머니에 돌을 가득 채워 넣고 강에 투신자살한다. 그녀의 유서엔 그녀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과 그녀에게 헌신적이었던 남편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린다.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 레너드 울프가 청혼했을 때 그녀는 보통 사람 같은 부부 관계를 하지 않을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고 요구했고 그는 출판사를 차려 묵묵히 그녀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져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목월의 <불국사>를 소리 내어 읽어 본다. 그의 시의 단순성과 함축성이 아주 좋다.
시를 느끼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는 적어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여유 있는 아침 시간에 이러한 시를 나직이 나에게 들려주고 싶다.

불국사 / 박목월

흰 달빛
자하문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소리


윤사월 / 박목월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듯고 있다.



모과차 / 박용래

앞산에 가을비
뒷산에 가을비
낯이 설은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긴 밤
모과차 마시면
가을 빗소리

청춘 / 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나긋나긋한 무릎이 아니라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정열을 가리킨다.
인생이란 깊은 샘의 신선함을 이르는 말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세 청년보다는 60세 인간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려가지만
열정을 잃으면 영혼이 주름진다.
고뇌, 공포, 실망에 의해서 기력은땅을 기고
정신은 먼지가 돼버린다.
 
60세든 16세든 인간의 가슴속에는
경이에 이끌리는 마음,
어린애와 같은 미지에 대한 탐구심,
인생에 대한 흥미와 환희가 있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 있는 `무선우체국`을 통해
다른 사람과 하느님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격려,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그대는 젊다.
 
영감이 끊기고, 영혼이 비난의 눈으로 덮이며
비탄의 얼은에 갇힐 때
20대라도 인간은 늙지만,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80세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어두워 진다는 것 / 나희덕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서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
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 가만 ,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사무원 / 김기택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가뜬한 잠 / 박성우

곡식 까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그렇게 굽은 몸으로
멍석에 차를 잘도 비비던 할머니가
정지문을 열어놓고 누런 콩을 까부르고 있었다
키 끝 추슬러 잡티를 날려보내놓고는,

가뜬한 잠을 마루에 뉘였다

하도 무섭게 조용한 잠이어서
생일 받숟갈 놓고 눈을 감은 외할매 생각이 차게 다녀갔다
  
 

번개 / 바쇼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 

 

엮고 나서

처음 연구원 레이스를 시작할 때 네 번째 과제인 내 인생의 시가 가장 쉬울 것 같았다. 시를 외우는 것은 자신이 없었지만 33편의 시는 그냥 모으면 될 것이라 생각 했다.
이 과제야말로 가장 자유도가 높으면서도 가장 어려운 과제라 생각한다.
첫 번째 과제에서 세 번째 과제까지 시간 내에 사부님의 말씀대로 분량을 채워서 내긴 했지만 자신을 돌아봐도 탁월하게 한 것은 없었다. 돌아보면 레이스 중간에 8일간의 여행이 끼여 있어서 좀 곤란한 점이 있었고 야근과 휴근이 껴있었지만, 야간에 글 쓸 수 있는 시간이 다행히 좀 나서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학교 졸업 후 처음 해보는 숙제로 신경을 썼더니 계속 소화불량에 걸려서 고생했다. 네 번째 과제를 탁월하게 해서 반드시 연구원으로 뽑히겠다는 각오로 쓰고 또 썼다.
사부님은 2차 합격자를 발표할 때면 자신이 뽑는 게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추천한 것이고 시간을 많이 쓰고 절실히 노력한 사람은 기쁨이 클 것이고 그렇게 하기 어려웠던 사람은 마음속으로 선발되지 않은 것에 안도할 것이라 했다. 나의 마음 한구석에 떨어졌을 때의 우울함 뒤에 안도감이 있진 않았는지 자신을 깊이 반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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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2 10:15:08 *.36.72.193

와, 진짜 시집 같아요. 정말 멋져요. 감탄이 절로 나와 댓글을 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깔끔한 편집과 정리, 사진과 시, 사진과 시인들이 조화를 이루어 '00문고' 책꽂이에 꽂혀도 될 만큼 멋집니다.

다운 받아 저도 간직 해도 되겠지요? ^.^

4주 동안 반가웠습니다. 또 반가울 날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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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2 16:57:33 *.51.145.193

시마다 느낌을 모두 언급하신 것은 엄청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요...그 시간을 어디서 구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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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2 17:23:14 *.114.49.161

감동적입니다. 이준혁님,

시는 예습하듯이 보았어요. 읽어도 알지 못하는 시인과 시들이 태반입니다. 다시 천천히 읽어볼께요. 

아직 사귀지 않은 시들보다 준혁님의 엮고 나서 소감이요. 소화불량에 걸려가며, 없는 시간을 쪼개어서 마지막 과제를 탁월하게 해서 뽑히고 말겠다는 각오로 쓰고 또 썼다는 말씀이 제게 울림이 더 큽니다. 또 자신이 뽑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추천하는 것이고, 시간을 많이 쓰고 절실한 사람은 기쁨이 클 것이고, 그렇게 하기 어려웠던 사람은 선발되지 않은 것에 안도할 것이라는 구본형선생님 말씀이 또 그렇습니다.

준혁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배우는 점이 참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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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7 11:21:35 *.154.223.199

오늘은 놀토 경축 행사로 준혁님 시를 읽으러 왔습니다. ^^

저는 김기택 사무원, 서정윤 사랑한다는 것으로, 박남준 나무 폭포 그리고 숲을 베껴놓고 싶습니다.

유하의 압구정 시는 저런 내용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그 시 속에 나오는 함민복, 박성우시는 또 어떤 사람들일까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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