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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d: 문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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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2일 07시 27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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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alzeung.tistory.com/attachment/cfile8.uf@1537B3444F5D2E1E0137C2.pdf

 

 

 

상처, 치유를 위한 시집

 

 

 

제 1 부- 생에 사랑을 숨쉬게 하라

 

不醉不歸

허수경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던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어느 사랑의 기록

남진우

 

사랑하고 싶을 때

내 몸엔 가시가 돋아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은빛 가시가 돋아나

나를 찌르고 내가 껴안는 사람을 찌른다

 

가시 돋친 혀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홡고

가시 돋친 손으로 부드럽게 가슴을 쓰다듬는 것은

그녀의 온 몸에 피의 문신을 새기는 일

가시에 들러싸인 나는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이

다만 죽이며 죽어간다

 

이 참혹한 사랑 속에서

사랑의 외침 속에서 내 몸의 가시는 단련되고

가시 끝에 맺힌 핏방울은 더욱 선연해진다

무성하게 자라나는 저 반란의 가시들

 

목마른 입을 기울여 샘을 찾을 때

가시는 더욱 예리해진다 가시가 사랑하는 이의

살갗을 찢고 끝내 그녀의 심장을 꿰뚫을 때

거세게 폭발하는 태양의 흑점들

 

사랑이 끝나갈 무렵

가시는 조금씩 시들어 간다 저무는 몸

저무는 의식 속에 아스라한 흔적만 남긴 채

가시는 사라져 없어진다

 

가시 하나 없는 몸을 걸치고

나는 어둠에 감긴 사원을 향해 떠난다

이제 가시 돋친 말들이

몸대신 밤거리를 휩쓸 것이다.

 

 

 

푸른 밤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이제는 돌아가 기도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재무

 

해종일 강둑에 앉아 분홍빛 노을이 강물에,

이제는 어제가 되어 버린 여인의 속살 같은 고운 무늬를

드리우는 저물녘 활짝 피는 꽃처럼 울음을 터뜨립니다

흐르는 강물이 문득 걸음 세워 그런 나를 우두커니 바라봅니다

물고기 몇 마리 불쑥 고개 내밀었다가

별 것 아니라는 듯 물살 가르며 쏜살같이 달아납니다

내가 그 저녁 끝내 울음 참지 못한 건, 그날의 하늘이

 

청색 도화지처럼 내내 맑고 푸르렀기 때문입니다

강안 하얗게 나부끼는 억새꽃 때문이었습니다

이별은 언제나 도둑처럼 찾아와 나를 소년으로 돌려놓고

저만큼 성큼 큰걸음으로 달아납니다

이내 밤이 오고 강 건너 마을에 하나 둘씩

쌀밥 같은 등불 서럽게 반짝입니다

이제 돌아가, 또다른 새로운 이별을 위해 살아가야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쥡니다 그러라고,

그렇게 하라고 강물이 손 뻗어

가슴의 먼지 씻어줍니다

강물이 저렇듯 푸르고 깊은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랑의 이별 때문입니다 하늘의 별이

이만큼 가차이 크게 빛나는 것도 다 이별 때문입니다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천양희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산 넘어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강 넘어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집까지 갔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걸 위해 다른 것 다 버렸지요

그땐 슬픔도 힘이 되었지요

그 시간은 저 혼자 가버렸지요.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었지요.

 

 

 

사랑굿 32

 

김초혜

 

이제 마음을 얘기하지 않으리

사랑으로 사랑을 벗어나고

미움으로 미움을 벗어나리

죽어 묻히는 날까지

그대 떠난다 해도

마음 속에 살게 하리

끝없는 불꽃되어

재까지 태우며

던졌던 생명을 거두어

천천히 빛나게 하리

갈망하지 않고 꿈꾸면서

혼자서 가져보는 그대

고운 병 만들어 앓으며

짖궂은 그대 허위

벗기지 않으리.

 

그대의 발명

박정대

 

느티나무 잎사귀 속으로 노오랗게 가을이 밀려와 우리 집 마

당은 옆구리가 화안합니다

그 환함 속으로 밀려왔다 또 밀려나가는 이 가을은 바라보

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한 장의 음악입니다

 

누가 고독을 발명했습니까 지금 보이는 것들이 다 음악입니다

나는 지금 느티나무 잎사귀가 되어 고독처럼 알뜰한 음악을 연주합니다

 

누가 저녁을 발명했습니까 누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사다리 삼아서 저 밤하늘에 있는 초저녁 별들을 발명했습니까

 

그대를 꿈꾸어도 그대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마음이 여러

곡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저녁입니다

음악이 있어 그대는 행복합니까 세상의 아주 사소한 움직임도

음악이 되는 저녁,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누워서

그대를 발명합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농담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제 2부 생의 기미를 알아채다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이탈한 자가 문득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

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 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

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

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옥탑방

                                             함민복

 

눈이 내렸다

건물 옥상을 쓸었다

아파트 벼랑에 몸 던진 어느 실직 가장이 떠올랐다

 

결국

도시에서의 삶이란 벼랑을 쌓아올리는 일

24평 벼랑의 집에 살기 위해

42층 벼랑의 직장으로 출근하고

좀더 튼튼한 벼랑에 취직하기 위해

새벽부터 도서관에 가고 가다가

속도의 벼랑인 길 위에서 굴러 떨어져 죽기도 하며

입지적으로 벼랑을 일으켜 세운

몇몇 사람들이 희망이 되기조 하는

 

이 도시의 건물들은 지붕이 없다

사각 단면으로 잘려 나간 것 같은

머리가 없는

벼랑으로 완성된

옥상에서

초혼하듯 귀

흔들리는 언 빨래소리

덜그럭 덜그럭

들린다

 

 

증발

                                       최승호

 

사막

눈부시게 거대한 증발접시

 

그동안 무엇이 증발했는지 모르지만 모든 것이 증발 할 수 있다.

사막에서는 호수와 강은 물론 한때 번성했던 왕국도 증발한다.

수많은 이슬 같은 백성들, 없는 북어같은 미라. 사막에서

는 길도 증발한다. 어제 있었던 길이 오늘은 없다. 그 길은 어디

로 증발한 것일까. 증발접시의 무수한 균열처럼 사막의 길들은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진다. 그것을 지우는 것은 모래바람이

다. 길이 어디로 갔지? 앞차가 어디로 사라진 거야? 우리는 달

리던 차에서 황급히 내려 사방을 둘러본다. 난처할 때 나는 담

배를 태우던 버릇이 있다. 우리는 거대한 증발접시 안에서 속이

타는 물방울 같은 존재들인지 모른다.

 

 

 

저울의 귀환

 

유홍준

쇠고기 한 근을 샀다

하얀 목장갑 낀 정육점 여자의 손이

손에 익은 한 근의 무게를 베어 저울 위에 얹었다

주검의 一部를 받아 안은

저울바늘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저울이

내게 물었다 인간들의 약속이란 고작

이 한 근의 무게가 모자란다고 보태거나 넘친다고 떼어내는 것?

맞아, 저쪽 봉우리에서 더 먼 저쪽 봉우리로

주먹만한 고깃덩어리들이 고단한 날개를 저어 날아가는 황혼녘

국거리 쇠고기 한 근 담아 들고

부스럭대는 비닐봉지 흔들며 늙은 어머니를 찾아가면

저울을 떨게 만든 이 한 뭉텅이 주검의 무게가

왜 이렇게 가벼운가 문득

저울대가 된 나의 팔이여

모든 것을 들어냈을 때 비로소 평안을 얻는

빈 저울의 침묵이여 나는 제로에서 출발한 커다란 고깃덩어리

주검을 다는 저울 위에 올라가 보고서야 겨우

제 몸뚱어리 무게를 아는 백 열근짜리

四肢 덜렁거리는 人肉

 

 

 

눈덮인 새벽

 

도종환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놓고 새벽은

산허리로 물러나 앉은 채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헐벗은 나뭇가지도 텅 빈 들판도

감히 손대기 어려운 고운 풍경으로 바꾸어놓고

고요히 호흡을 가다듬는 초겨울 새벽에는

나도 조건 없이 남을 덮어주고 싶습니다

용서하고 싶습니다

내 마음 눈 덮인 들판처럼 넓고 깨끗해져

그러는 건 아니고 지난 날

용서받고 싶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틀거리며 걸어온 발자국을

함박눈이 밤새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끄럽게 돌아선 골목길

있어야 할 어려운 자리를 지키지 않고

내내 마음 무겁던 나날들과

지키지 못한 언약들도

눈처럼 다 덮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것 까지 많이 용서해 준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었습니다

지난 가을 풀벌레들 사랑의 음성은 전해주고

몸은 가려준 풀숲처럼 나도 그들이

감추고 싶은 것들을 덮어주고 싶습니다

이 아침 내가 많이 너그러워져서가 아니라

실아오면서 내겐 강물 같고 남에겐 서릿발같은

날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지워주고 싶습니다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면 저 눈처럼

덮어주는 일이 풍요로운 모습이 되고

용서가 빛나는 풍경이 되는 것처럼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일찍이 나는

                                             최승자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벽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너를모른다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

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

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

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제 3부 생의 얼룩은 거룩하다

 

 

자작나무

 

도종환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커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네. 그 속에서 하늘하늘

한 팬티 한 장 꺼내들고 어머니

볼에 문질러보네. 안감이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한 무늬였음을

오늘은 그 적멸이 내 볼에 어리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순간 이었네.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네.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네.

빨랫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들로

뜬 눈 송이 몇 점 다가와 물드네.

쪼글쪼글한 꽃 속에서 맑은 꽃물이 똑똑

떨어지네.

눈덩이만한 나프탈렌과 함께

서랍 속에서 수줍어하곤 했을

어머니의 오래 된 팬티 한 장

푸르스름한 살 냄새 속으로

그 드물고 정하다는 햇볕이 포근히

엉겨 붙나니.

 

찬란

 

이병률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읆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빈집의 약속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

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켠에 묵은 메주를 메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

는 행복하였다

수십년 혹은 백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 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숲이 들어 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

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

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새벽밥

김승희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 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무르익고 있습니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사람이 사람에게

 

홍신선

 

2월의 덕소 근처에서

보았다 기슭으로 숨은 얼음과

햇볕들이 고픈 배를 껴안고

보는 이 없다고

녹여주며 같이 녹으며

얼다가

하나로 누런 잔등 하나로 잠기어

가라앉는 걸

입 닥치고 강 가운데 빠져

죽는 걸.

 

외돌토리 나뉘인 갈대들이

언저리를 둘러쳐서

그걸

외면하고 막아주는

한가운데서

보았다,

강물이 묵묵히 넓어지는 걸.

 

사람이 사람에게 위안인걸.

 

상처에 대하여                     

                             복효근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 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꽂향기가 난다

 

와온(臥溫)의 저녁

 

유재영

 

어린 물살들이 먼바다에 나가 해종일 숭어 새끼들과 놀다

돌아올 시간이 되자 마을 불빛들은 모두 앞다퉈 몰려나와 물

길을 환히 비춰주었다

 

 

얼룩에 대하여

 

장석남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 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千手千眼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과 꿈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목련

류시화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IP *.197.1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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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3.12 08:16:32 *.197.151.108

안녕하세요? 번거로우시겠지만,  클릭을 꾹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외울 수있는 시  7편

농담-이문재

빈집- 기형도

새벽밥-김승희

와온의 저녁- 유재영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천양희

자작나무-도종환

갈대-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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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2 13:02:21 *.68.172.4

와 멋집니다. 그대로 시집으로 내도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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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3.13 11:17:04 *.85.249.182

칭찬 감사합니다.

갑자기 레몬의 향기가 홈피에 가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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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2 16:53:19 *.51.145.193

선택된 시에서 많은 고심의 흔적이 묻어있음을 느낍니다. 제가 고른 시와 가장 많이 겹치시는 것 같아요. 나 바보 아니구나라고 안심했습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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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3.13 11:14:42 *.85.249.182

감사합니다.

저와 심상이 비슷하다고 봐도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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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2 17:07:08 *.114.49.161

저 사진을 직접 찍으셨군요. 사진이 참 아름답습니다.

우선 깔끔한 사진과 시의 제목을 읽었어요.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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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3.13 11:24:43 *.85.249.182

사진에 대한 과찬의 말씀 들으니

너무 기뻐요.

즐거운 날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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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3 09:16:49 *.30.254.21

문윤정 님...

제가 사랑하는 시도 많이 들어있네요.

정말 멋진 시집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화이팅 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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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문윤정
2012.03.13 11:26:54 *.85.249.182

아! 그래요.

칭찬 감사합니다.

뮌가 우울하고 무거운 듯한

시들이지만

읽고나면 위로받는 느낌이라 좋아요.

화려한 봄날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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