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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17일 12시 00분 등록

가슴이 뜨끔했다.  다짜고짜 심장을 찔러대는, 니들이 끝내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다는 듯 한 이 건방진 태도에, 기분 나쁘지만 딱히 뭐라 대들 말이 없다.

그래, 나, 외롭다.  외로워서 미칠 지경이다.  도무지 내 맘, 내 생각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 외롭고 슬프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노란색 책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대놓고 ‘무규칙이종카운슬러’라니, 잘난 예의나 배려 따위를 바란다면, 그거야 말로 ‘규칙위반’이다.  우선 인정하자.  인정하면 쉽다.  어렵지 않다.  조금은 가벼운, 넉넉한 마음으로 그의 무규칙이종카운슬링을 쫓아가 보는 거다. 


지금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중학교 때만 해도 <십대들의 쪽지>라는 작은 책자가 정기물로 간행되고 있었다.  부모님과의 크고 작은 갈등, 학교에의 부적응 문제, 친구와의 절교, 이성 교제의 선과 경계 등등 십대라면 으레 한 번쯤은 고민해 볼 문제들을 ‘맘씨 좋은 아저씨’에게 ‘털어 놓고’ 조언을 듣는 형식이었던 것 같다.(재미가 없어 자세히 읽어 본 적이 없다.  학교 교실 책장에 아무렇게나 끼워져 있거나, 도서관에 가면 무료로 나누어 주는 것을 흘깃거렸다.)  여하튼 그 ‘맘씨 좋은 아저씨’가 십대들의 친절하고 착한 카운슬러였다면, <너, 외롭구나> 의 김형태는 불친절하고 냉소적인 그래서 ‘대충 까칠한 아저씨’라 불리어도 좋겠다. 


그에 대한 소개가 표지 날개에 짤막히 기재되어 있었다.  화가를 꿈꾸던 아이, 그래서 그림을 그렸고 홍대 앞 퍼포먼스 까페를 운영했다.  황당하고 신기한 황신혜 밴드 결성으로 독집 앨범을 발표하고 영화, 연극을 만들었다.

또 <햄릿 프로젝트>의 햄릿 역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의 남자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거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의 기이한 발자취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2003년에는 <김형태의 도시락 1집 : 곰 아줌마 이야기>를 출간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2003년 겨울, 드디어 자신의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구국결사의 의지로 청춘 카운슬링을 시작했다.  ‘오지랖이 넓다’는 식상한 표현으로는 이 사람의 기이한 행보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이렇게 ‘무규칙이종카운슬러’라 스스로를 정의내리는 게 속 편할 것이다.  누구도 딴지를 걸 수 없다.  어쨌든 그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한 마디로 나를 비롯한 이 땅의 샛노란 청춘들에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있었다. 

책 속에는 참 익숙한, 참 낯익은 사연들이 구구절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이 땅에서 도무지 해 먹을 게 없다.  꿈? 비전? 그런 건 잊은 지 오래다.  졸업이 무섭다.  아르바이트 3개로 연명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외로워서 슬프고, 슬퍼서 화가 나고, 화가 나서 죽고 싶다. 


이 땅의 청춘들이었다.  봄볕처럼 따사롭고 푸르러야 할 우리의 청춘들이었다.  그러나 그래야 마땅할 이 땅의 청춘들은 너무나도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다.  나 또한 이 땅의 젊은이, 청춘이 아니던가.  지금은 그 막막하고 컴컴한 지하 터널을 지나 빛이 들어오는 조그마한 입구가 보이기 시작한 나.  죽을 것만 같던, 도저히 아무 것도, 아무 희망도 없을 것만 같던 그 컴컴한 지하에서 한 줄기 희미한 광선을 발견했을 때, 나는 숨이 멎었었다.

역겨운 오물의 냄새와 기분 나쁘고 축축한 공기,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을 것만 같던 미궁의 그 곳에 빛줄기가, 빛줄기가 있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무슨 커다란 인심이라도 쓰는 양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 땐 다 그런 거야.  우리 때도 별 수 없었어.  시간이 약이야.  쓸데없이 버둥대지 말고 눈 딱 감고 버텨. 


그러나 그런 무책임하고 무가치한 말들은 공기 속의 먼지처럼 산란되어 뿔뿔이 흩어질 뿐이다.  우리는 같은 병을 앓고 있다.  증상만 있고 병명은 확실치 않다.  심지어 치료제가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 병은 지독히도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 땅의 청춘들이 빗물에 녹슨 쇳덩이처럼 하나둘 붉게 부식되어 간다.  아찔하다.  이것이 끝일까?


저자는 그 옛날의 ‘맘씨 좋은 아저씨’처럼 교과서 속 모범답안을 말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아파할 까봐 듣기 좋은 감언이설로 돌려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이라도 결국은 니들이 문제라며, 아프고 따가운 상처에 소독약을 인정사정없이 뿌려댄다.  부글부글부글, 알코올이 닿은 상처는 하얀 세균 거품을 쏟아내며 죽어라 아우성친다.


참을 수 없는 고통 후엔, 깨끗해진 상처가 남는다.  불순물이 씻겨 져 나가 상처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어디가 찢어졌던 건지, 어떤 더러운 세균이 묻어 있었던 건지 그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는 상처에 맞는 연고를 바르고 통풍이 잘 되는 반창고를 붙이는 일이 남았다.  연고와 반창고도 슬그머니 들이민다.  우리 눈에 찔끔 눈물이 맺혔지만 원망하진 않는다.  이제 우리의 병이, 상처가 잘 아물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이 땅의 청춘들은 참 외롭다.  참 힘들다.  그런데 세상은 자꾸만 외롭지 않을 수 있는, 힘들지 않을 수 있는 ‘방법’만을 가르치려 한다.  어디가 찢어지고 아픈지, 왜 그런지 캐묻지 않는다.  더 외롭더라도 더 아프더라도 소독약을 뿌려야 한다.  그래서 그 상처를 제대로 자세히 볼 수 있어야 한다.  결국엔 내 몸이고 내 마음이니까, 그러니까 그래야 한다.  아프면 상처에 후후 바람을 불어주자.  자신의 상처를 씻고 소독하고 매만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이며 그 위로조차도 스스로 바람을 불어 일으켜야 한다.

저자는 그 사실을 일러 주었다.  조금은 까칠하고 재수 없는 방식으로, 조금은 건방지고 얄미운 태도로.  나는 그의 진심이 느껴진다.  우리 눈에 찔끔 눈물이 맺혔을 때,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을, 그의 목젖이 꿀꺽 심하게 오르내렸음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용서하려 한다.  인정하기로 한다.  그가 ‘맘씨 좋은 아저씨’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오늘밤에도 전국의 수많은 PC방에서는 수많은 외로운 청춘들이 온라인 게임으로 외로움을 탕진하고 있다.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저그는 외로움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벌레들이다.  점수가 올라가고 포인트가 쌓이고 전적이 늘어가지만, 그것은 고귀한 젊음의 열망과 에너지를 바치고 얻은 댓가치고는 청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다. 

시도 때도 없이 날리는 문자 메시지도, 인터넷 게시판의 리플 대행진도,

모두 외로움을 탕진하느라 뱉어 내는 토악질이다. 

외로움을 기피하고 외면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이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꿈도, 희망도 없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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