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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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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30일 00시 07분 등록
어떤 풍경의 아름다움과 관련된 침묵은 자아에로 인도하는 길이다. 문득 시간이 정지하는 그 순간에 하나의 통로가 열리면서 인간에게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그 기회에 우리는 세상의 소란과 일상의 근심걱정으로 되돌아가기에 앞서 감각과 내적 힘을 축적한다.
- 다비드 르 브르통 지음, <걷기예찬> 중에서


위 내용에 이어 사부님이 쓴 <떠남과 만남>의 다음 부분을 읽어보세요.

“새로 닦고 있는 큰 길을 따라 100미터쯤 내려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천관산 자락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둥글게 낮아졌다가 다시 다른 산줄기로 검게 이어지는 그곳에 아직 푸른기가 남아 있는 하늘이 걸려 있는 데, 그 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유별나 아직도 가슴에 역력하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장환의 일몰이 감동이었다면 천관산의 초야(初夜)는 평화로움이었다.”

다른 사람이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 쓴 글임에도 멋지게 공명하지 않나요? 하나만 더 뽑아 볼게요. 아래 글은 브르통의 같은 책에 있는 내용이고, 그 아래 것은 <떠남과 만남>의 한 구절입니다.

“침묵을 만들어내는 것은 소리의 사라짐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는 자질, 공간에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의 가벼운 맥박이다. (...) 침묵은 개인이 귀로 드는 것의 해석 방식이며 또한 세계와의 재접촉을 위하여 자아로 되돌아오는 길이다.”

“가만히 편한 바위에 앉아 있으니 황홀한 게 낙원 같다. 오후 2시의 아주 강한 햇빛이 머무는 잔잔한 물결은 바람에 실려 반짝인다. 나는 그 잔잔한 일렁임이 좋다. 푸르고 환하고 잔잔한 반짝임. 수평선의 끝에 커다란 배가 지나는 데 참으로 천천히 고요히 움직인다. 반면에 육지에서 바다로 나가는 작은 배는 훨씬 더 빨리 흰 물결을 만들며 커다란 소리를 질러댄다. 그러나 경박하지 않다. 고요함이 너무 커 소음은 오히려 고요함을 가중시킨다. 시간이 멎은 듯하다. 호흡도 멎은 듯하다. 일체의 미동도 없는 대낫. 내가 완벽히 쉬고 있는 듯했다.”

좋은 책들은 의도라는 무형의 선을 타고 본질로 공명합니다. 이런 공명에 독자인 내가 참여할 때, 저는 참 좋습니다. 이런 경험은 독서의 진미 중 하나라고 봐도 과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행을 하며 부르통이 전하는 느낌과 사부님의 경험과 비슷한 경우가 두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다산초당의 천일각에 앉아 있을 때였습니다. 천일각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나무 바닥의 촉감이 시원하고, 구름 사이로 구강포가 아련하게 보였습니다. 홀로 있으니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침묵하니 새 소리가 피리처럼, 바람 소리가 파도처럼 들렸습니다.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되어 바람에 실린 침묵의 음악을 듣는 듯했습니다. 또 한 번은 대흥사 앞 유선여관의 마루에 앉아 있을 때 였습니다. 조용한 심야(深夜), 계곡에서 들리는 물소리와 바람이 나무 가지 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눈을 감고 들으니 이 소리가 내 몸과 귀를 깨끗이 청소해주는 듯했습니다. 나란 존재가 맑아지는 듯했습니다. 맑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일렁였습니다.

이 두 장면 속에 흘렀던 소리는 특별했습니다. 자연의 소리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전에도 바람과 새와 물은 있었습니다. 특별함의 핵심은 홀로 침묵했기 때문입니다. 부르통의 말을 빌리면 “그때의 침묵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실감케 한다. 그 침묵은 지금이 껍질을 벗는 한순간임을 말해준다. 그 껍질 벗음을 통해서 우리는 현상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게 되고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되며 내적 통일을 기하여 결단의 한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게” 됩니다.
IP *.255.18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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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9.07.30 10:22:27 *.251.224.83

의례적이고 사교적인 대화, 지껄임, 헛소리, 잔소리,
가만히 있으면 못나 보일까봐 서둘러 말을 보태는 그 많은 자기주장에서 벗어나
침묵 속에 있으니 그런 축복이 가능하군요.
나야 그 맛을 알 연배가 되었지만
승완씨의 '글과 사람이 다른다는 그 유명한 불일치'는 요즘 들어
절정에 달한 것 같네요. ^^
보기 좋아요. 5년 후가 기대됩니다.

오늘 출간기념회 꼭 가서 축하해주려고 했는데
경미한 사고가 생겨 못 갈 것 같아요.
행복하고 충만한 시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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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완
2009.07.31 14:09:31 *.255.183.217
네, 한 선생님 감사합니다.
여러 동료 연구원들 덕분에 잊지 못할 출판 기념회를 경험했습니다.
한 선생님 늘 건강하시고, 첫 책 작업 잘 마무리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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