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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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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15일 11시 53분 등록

신화와 인생

1. 저자 조지프 캠벨

사실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하였다. 먼발치로 유명한 ‘신화학자’이며, 남다른 깊은 성찰과 공부의 시간들로 인생을 살아갔다는 정도. 언젠가 한 번 시간을 내서, 그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정도. 그가 썼다는 책도 이미 몇 권 구입해두었지만, 아직 읽지는 못하였다.

「신화와 인생」을 통해 내가 만나 본 그는 무엇보다 삶의 구체적 현상들을 깊이 있게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울러, 자신이 공부하고 경험한 다양한 분야들에 대한 본질적 이해를 삶의 구체적 장면들에 투영시켜서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려면 몇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는 그는 삶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고, 작은 것 하나에도 호기심을 가질 줄 아는 사람일 것이고, 둘째는 책 속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과 타인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깊은 관심이 함께 갖추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가설과 이론들을 현실에 적용시켜가면서 하나하나에 대한 확신-실로 기적 같은 경험이었을 것이다-을 얻어가기 위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마치 한바탕 홍수가 지나간 뒤 온통 흙탕물이 일고, 다시 천천히 가라앉으면서 차분하게 생각의 편린들이 재조합되는 느낌, 그렇게 만난 사람이 Joseph Campbell이다. 한 장 한 장 그가 삶을 통해 겪어낸 경험들을 통해 이끌어 내는 이야기들은 책을 읽는다고 하기 보다는 벽난로 앞에 앉아 할아버지로부터 인생 상담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였다. ‘신화’라는 매우 추상적인 주제임에도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은 그가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삶 속의 소재들을 통해 투영시켜 내는 깊은 내공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그런 사람들의 이미지는 여유 있는 미소와 낮고 잔잔하면서도 힘이 있는 목소리를 가졌을 것이고 무엇보다 진지한 눈빛을 지녔을 것이다. 박사학위조차도 받지 않은 그가 학회나 기존 교회와의 수많은 논쟁의 과정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감히 상상하기 조차 힘들다.

책을 읽는 내내 그가 살아온 인생의 궤적을 따라 내가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는 말 : 캠벨 사상의 정수, 그 아름다운 내면과의 마주침

융의 말마따나 “인생에 대해 작별을 고하지 못하는 노인은 인생을 포용할 수 없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병약하게 보인다.” p12

어렸을 때 우리는 뭔가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해야 할 때가 있음을, 그렇게 해야만 사람이건 짐승이건 우리가 원하는 대상을 우리 앞으로 불러들일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건 매우 쉬운 일이었고, 그런 마법은 곳곳에 존재했다. 지금은 비록 가면들의 세계에서 그 어린 시절의 마법을 잃어버렸지만.

우리는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야만 한다. 조지프의 말마따나 “자기 발견의 사자(獅子)는 사사건건 ‘너는 할지니’라고 주문하는 그 용을 죽여야만 한다.” p13

“장작을 쪼개면 그곳에 내가 있고, 돌을 들어 올리면 그곳에 내가 있느니라.”

“왜 저 나무들 아래를 걷다 보면 항상 크고 아름다운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돋아나는 것일까?” 월트 휘트먼은 묻는다. “생각건데 겨울과 여름 내내 그 나무들 위에 걸려 있던 생각들이 마침 내가 지나갈 때 과실처럼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p13

스코틀랜드 핀드혼 사람들은 그렇게 굳게 믿었다. 나무의 의식이 ‘제재소 너머까지도’ 이어진다고, 즉 나무들이 자신들의 몸으로 만들어진 집은 물론이고 거기 사는 사람들까지도 알고 있다고 말이다.

이 집과

이 의자와

이 페이지도 마찬가지리라.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p14

도입의 단계 :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In the Field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이든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진정한 의미란 살아 있음 바로 그것이다. p20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라.

우리는 이 세상의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지만,

기쁨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p21

이 세계는 완벽하다. 그것은 혼란의 도가니이다.

이 세계는 항상 그렇게 혼란의 도가니였다.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삶을

바로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p21

낡은 허물을 벗어 던져야만

새로운 껍질이 나오기 때문이다.

예전 것에 집착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어떤 형상에 매달리게 되면

우리는 썩을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 ...

뭔가를 고수하려 하고 붙들어 놓으려고만 하는 우리 안의

그 욕심꾸러기를 반드시 없애 버려야만 한다. p22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서

오믈렛을 만들 수 있겠는가.

파괴가 있은 다음에 창조가 있다. p25

생명이란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생명은 다른 사람들의 희생에 근거한 것이다.

자신이 살 만한 가치를 지녔다면

그 가치를 기꺼이 취하라.

우리의 삶에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삶을 경험하는 것,

고통과 기쁨 모두를 경험하는 것이다. p24-25

여러분이 현재 처한 상황을

희극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여러분은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된다.

결국 유머 감각이 여러분을 구원하리라. p27

신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다.

여러분 자신의 중심에서 살아가라.

여러분의 진정한 의무는

공동체로부터 멀리 떠나

여러분만의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p28

“너는 할지니”라고 하는 용을 죽여라.

그 용을 죽인 사자는 비로소 아이가 된다. ...

뱀이 그 허물을 벗어 버리듯,

여러분은 지난 날을 내팽개쳐라. p29

심연 속으로 내려감으로써

우리는 삶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분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려는 곳,

거기에 여러분의 보물이 묻혀 있다.

여러분이 차마 들어가기 겁내던

바로 그 동굴이, 여러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의 원천임이 밝혀진다.

동굴 속에 숨어 있던, 그 무시무시하던

저주받은 것이 바로 그 중심이 된다. ...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않을 것이다. p33

“깨달음을 찾으려는 자라면

마치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여러분이 모든 것을 원한다면,

신들은 그것을 주리라.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p36

의식의 첫 번째 단계 : 현세에서의 삶 Living in the World

기독교와 유대교는 귀양살이 종교다.

인간은 동산에서 쫓겨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불과 150년 전만 해도 성직자와 철학자, 정부 고관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

주된 서양 종교의 역사는 허구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른 종교들 역시 이 같은 전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느 전설이나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에덴동산이나 뱀, 나무, 대홍수 같은 것은 실제로 없었다. p43

결혼이란 자웅동체를 재건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오로지 사랑 때문에 결혼한다면

그 결혼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우화도 고려해 보라. ...

플라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최초의 인간들은 남성-남성과 남성-여성 그리고 여성-여성의 세 종류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놀라운 힘을 가졌다. 신들은 그들의 위력을 두려워하였다. 따라서 제우스는 그 인간들을 모두 두 동강 내기로 결심했다. ...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먼 옛날부터 그들 속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본래의 몸뚱이 부분을 다시 한데 모아 둘에서 하나가 되게 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즉 서로 분리되어 있는 우리들 각자는 한 인간의 나머지 절반입니다. p45

그것이 바로 아니무스의 방식이다. 여성 자신도 할 수 있지만, 대신 남성에게 위임하는 그 어떤 일을 투사하는 것이다. 존재 가치로는 그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지만, 남자는 특화된 신체를 지닌 기계나 다름없어서, 그런 일을 너끈히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속에 있는 힘을 자각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힘에 의해 가능한 행동이 여성으로서의 여러분보다는 오히려 남성에 의해 더 적절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곧 관계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다. ...

남성의 경우, 한 남성이 한 여성을 보았을 때 오로지 함께 침대에 누울 사람으로만 바라본다면, 그는 그녀를 오로지 자신의 어떤 결여의 충족과 연관시켜만 바라 볼 뿐,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소를 보았을 때, 머릿속으로는 오로지 스테이크만 생각하는 격이랄까. p50

사랑에 눈을 뜨는 순간, 어떤 것이 명백히 외부로부터 “영원히 그의 영혼 속으로 옮겨 갔고, 그의 영혼은 그 부름을 받고 뛰었다. 살며, 과오를 범하며, 타락해 보고, 승리하고, 삶에서 삶을 재창조하는 거다!” p52

영혼은 상처의 치유법을 알지만, 그 치유법은 아픔을 준다. 때로는 애초의 상처보다도 그것의 치유가 더 많은 아픔을 주지만, 만약 그걸 견딜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더 강해질 것이다. ... 전념한다는 것은 범위를 좁히는 것이며, 그런 전념이 실패로 끝나면 여러분은 보다 넓은 기반으로 물러나, 그걸 부여잡기 위한 힘을 얻는 것이다.

니체는 내게 그와 같은 일을 해 준 사람이었다. 그의 삶 가운데 어떤 순간에 이르러 ‘운명적 사랑’이라는 생각이 그에게 떠올랐다. 여러분의 운명이 무엇이건 간에, 그 어떤 곤란을 겪건 간에,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필요로 하던 것이다.” 파멸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기회인 양, 도전인 양 다가가라. 여러분이 그 순간에 사랑을 가져온다면, 여러분은 힘이 거기에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

여러분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마치 어마어마한 실패인 양 보였던 파멸 직후의 순간들이 사실은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만들어 준 사건들이었음을, 그것이 명백한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p55

신화학이란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에서 인간 영혼의

경험, 행동, 성취에 관한 은유를

간직한 이미지들이 조합된 것이다. p57

사랑의 첫 번째 단계는 주인에 대한 하인의 사랑으로, 가장 낮은 단계의 사랑이다. 이것은 율법의 종교가 하는 방식이며, 그런 종교에는 수많은 계율들이 있다. 이것은 두려움의 종교다. 여러분은 신의 존재에 대해 아직 자각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사고에 대해서나 사랑에 대해서 스스로를 허실할 만한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방법이다.

두 번째 단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 친구 대 친구, 가령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이라든지, 또는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

예배가 단순히 율법과 명령의 계율을 이행하는 것에 불과할 때 종교적 체험은 크게 저하되고, 여러분은 시키는 대로 기꺼이 행동하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세 번째의 사랑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이것은 친구 대 친구의 사랑에 비해 훨씬 친밀하고 강력한 사랑이다. 기독교 체계에서 이 사랑의 이미지는 성탄구유.

사랑의 네 번째 단계는 배우자 대 배우자의 관계로, 여기서는 자웅동체의 또는 ‘다른 한쪽’의 발견이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 이러한 종류의 경험을 갖게 되는 기회는 단 한 번이다.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인 다섯 번째에 이르는데, 이것은 강박감에 사로 잡힌, 억제하기 어려운 금지된 사랑으로, 여기에서는 사랑뿐이어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게 된다. 즉 사랑에 몰두한 까닭에 결국 미쳐 버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 ... 다섯 번째 단계의 사랑에 도달하면 사랑 이외의 것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상대방에 대한 일방적인 집착만 있을 뿐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잊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마 여러분 중 일부는 이런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매우 아쉬운 일이다. p60-64

우리는 순수한 사랑의 경험을 과대평가할 위험을 항상 지니고 있다. 그 경험을 완화시키면 마치 뭔가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그걸 완화시켜야 한다. 여러분에게는 실제로 가능한 관계가 무엇일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

순수한 사랑의 경험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지금 여러분이 수립하고 있는 관계의 구체적인 측면 속에 있는 어떤 깊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순수한 열광은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인생에는 또한 가치 있는 관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들을 배양하기 시작하면, 이런 순수한 열광을 완화시키면서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을 반드시 잃어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결혼에 있어서의 비결이다. p65

왜냐하면 가사의 문제는 여러분이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바로 여러분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멋지고 작은 의식으로 바꿀 수 있고, 인생은 그런 크고 작은 행사들 위에서 아름답게 흘러갈 수 있다. 내 생각에는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삶의 실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결혼을 깨는 요인인 것 같다.

결혼은 연애가 아니라, 시련이다.

그것은 종교적 훈련, 성찬식,

또 다른 삶에 참여하는 은총이다. p66

책임이 사랑의 구성요소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책임감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건 단지 소유물을 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러분은 과연 누군가를 소유하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관계를 구축하려 하는 것인가? p68

혼외에도 사랑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여러분이 혼외로부터 오는 사랑을 차단하게 되면,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일부를 결혼생활에 가두게 되는 셈이다. ...

여러분은 사람드로가 관계하는 방법을 단 하나만이 아니라 다양하게 계발해야만 한다. 만약 그 관계의 본질과 그 가치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가 있다면 뭔가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무슨 일이 있건 간에, 반드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이 최우선이다. ...

만약 결혼이 오히려 해독을 끼친다면, 여러분은 그 상황을 전환시킬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해야만 한다. 변화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상대방을 변화시키기 위한 시련을 감내해야 한다. 여러분은 필요한 에너지를 상대방에게 가해 변화를 유도할 수가 있다. ... 반면, 여러분의 삶이나 심지어, 여러분의 삶에 대한 사랑이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며, 그 상황이 변화될 수 없는 것이거나, 그렇게 헌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p70-71

결혼은 여자가 주도하고 남자가 따라가는 것이다.

아내는 나를 위해 삶을 구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나는 마음 속에 깊이 새겼고, 그것은 정말 훌륭한 생각이었다. 여자는 삶의 사크티, 즉 에너지이다. 남자는 그 에너지에 올라타 달리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삶을 향해 직접 지시해서는 안 된다. 남자는 여자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그것이 그의 본래 모습이다. p72

결혼이란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그 관계됨에 희생시키는 것이다. p73

성배, 그 무조건적인 사랑은 만물에까지 미치며, 그것은 영적인 삶에서도 획기적인 단계다. 하지만 그것을 여러분의 바깥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그것을 찾아야 할 유일한 장소는 여러분의 내부다. 만약 내부에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다면, 바깥에는 무엇이 있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p75

생존은 삶의 두 번째 법칙이다.

첫 번째 법칙은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p77

신화는 우리의 깨어나는 의식과 우주의 신비 사이를 연결시켜 준다. 신화는 우주의 지도 또는 그림을 우리에게 선사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자연에 대한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p79

자신이 행복해하는 것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항상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돈이 있건 없건 간에.

돈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돈을 잃을뿐더러,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p83

결국 이까짓 것 개나 줘 버리자고 생각했다. 나는 숲속으로 들어가 5년 동안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나는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자유로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p87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완벽한 삶을 산 것 같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내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맞춰 나타나 주었다. 내가 그 당시에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5년 동안 직업도 없이 지낼 수 있는 삶이었다. p89

쇼펜하우어의 말마따나,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마치 그 삶 자체가 어떤 줄거리를 이룬 듯 여겨질지 몰라도, 실제로 여러분이 그 과정을 겪어 온 과정은 그야말로 혼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뜻밖의 일 뒤에 또 뜻밖의 일이 뒤를 따르는 식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돌아보면, 여러분은 비로소 그것이야말로 완벽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면 만사가 여러분에게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길이고, 어느 누구도 그 길을 앞서 지나가기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례도 없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것이 그야말로 뜻밖이며, 그야말로 적시인 것이다. p90

아, 정말로 좋은 시절이었다. 나는 그저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다녔다. 나는 오로지 내적으로 이치에 닿는다고 느껴지는 일만을 하고 싶었다. ... 여러분도 방랑을 하게 되면, 당장 ‘그날 하루’ 무엇을 할 것인지는 생각하되, ‘내일은 뭘 해야지’하고 미리 생각해 둔 것에 매달리지는 말아야 한다. ...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진짜다. 이건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다. 여러분을 옥죄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싹 지워버리면, 여러분은 마치 룰렛 바퀴 위의 공처럼, 자신이 어디에 안착할 것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치워 버려야 희열이 온다. p99

궁극적으로, 파르치팔의 경우처럼, 내부의 안내자는 자신의 고귀한 마음뿐일 것이며, 외부의 안내자는 그의 마음에서 아모르를 깨어나게 하는 아름다움의 이미지, 신성의 광채가 될 것이다. ‘만유’의 과정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 그의 본성의 가장 깊은 곳, 가장 내적인 곳에 있는 씨앗은 “그렇게 생겨난다.” ... 세상을 향해서 죽고 내부로부터 태어나는 용기가 될 것이다. p103

무엇이 여러분을 영적 성취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가? 나는 내 삶이 언제 중심에서 멀어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바로 내 삶의 진정한 중심잡기로부터 나를 탈선시키는 어떤 업적이나 시스템과의 관계에 내가 과도하게 집착할 때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언제 정도를 걷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내 속에 가진 것 중에서도 최고로 여겨지는 것들과 만사가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때이다. p104

융의 표현대로, 개성화를 위해서는, 즉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다양한 역할의 가면을 언제, 어떻게 쓰고 벗을지 알아야 한다. (......) 개성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중심을 찾아야 하고, 그에 따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해로운 것을 통제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고정된 역할의 일반적인 가면무도회에 따라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p106

“결국 모든 삶은 전체의 실현, 즉 자아의 실현이다. 때문에 그 현실을 ‘개성화’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삶은 그것을 실현하는 각각의 운반자에 매여 있으며, 운반자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운반자는 개별적인 운명과 목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했을 때에야 비로소 삶을 이해할 수 있다.” - 융 p107

동양과 서양을 막론한 모든 종교 체계에서 공인된 신화의 형태는 의식을 통해 제시되며, 개인은 헌신과 믿음의 경험을 통해 이에 반응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그렇지 못한다면 어떨까? ... 반면 진정으로 창의적인 방법이 하나 있으니, 나는 이를 종교와 반대되는 예술의 방법, 다시 말해 이러한 권위 있는 질서를 전복시키는 방법이라고 지칭한다. p108

천국이란 여러분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그것은 영원히 여러분 자신의 근본적인 측면이다. 그것이 바로 환희이다. 그 다음 현세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 지식과 사랑과 봉사’를, 즉 여러분과 만물 내에 존재하는 삶의 에너지를 생성할 것을 요구한다. p109

또 이미 거기 도달했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거기서 내쳐지기가 쉽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여러분이 뭔가를 하도록 원하고 있는 반면, 여러분은 이 세상이 원하는 바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러분에게 내적 만족을 제공함으로써 여러분을 내쫓기지 않게 만들어 주는 행동의 분야를 발견하는 것이다. p110

부름은 곧 어떤 사회적 지위로부터 떠나라는, 즉 여러분 자신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 보석을 찾으라는, 즉 여러분이 사회적으로 속박되어 있을 때에는 찾기가 불가능한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중심을 잃은 상태가 되며, 스스로가 그렇게 중심을 잃은 상태라고 느낄 경우, 여러분은 떠날 때를 맞이한 것이다. 영웅이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걸 찾으러 갈 대, 그게 바로 출발인 것이다. 여러분은 문턱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위험한 모험이니, 이는 여러분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관한 지식의 영역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p111

여러분이 떠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종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름을 거부할 경우, 일종의 말라붙음, 즉 삶의 감각이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여러분 속의 모든 것은 요구되는 모험이 끝내 거부되었음을 안다. 그로 인해 분노가 형성된다. 여러분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기를 거부하면, 결국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p112

여러분의 모험은 여러분 자신의 내부에서 곧바로 솟아나야만 한다. 여러분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전까지는 문이라곤 없었던 곳에서, 그리고 다른 누구도 겪어 보지 못했던 곳에서 여러분을 위한 문이 열릴 것이다. p113

영웅은 이곳에 이르러서 자신의 초인적인 여정 내내 자신을 도와준 자비로운 힘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그런 뒤에 여러분은 자신이 출발했던 바로 그 장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고 또 만드는 마지막 경험에 도달한다. 이 경험은 네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성스러운 결혼’ 즉 여러분 자신의 영적 삶을 탄생시킨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또는 여러분이 관계하고 있는 어떤 삶-가령 남자/여자, 나/너, 이것/저것-에서 신부가 되는 존재와의 만남이다.

두 번째는 ‘아버지와의 화해’다. ... 여러분은 자신의 본성을, 즉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찾으려 노력한다. 화해는 자신의 개인적이고 현세적인 계획을 여러분이 떨어져 나온 삶의 방향에 맞게 조화시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신격화, 즉 “나는 만물을 있게 하는 존재다”라는 깨달음이다. 영웅은 자기가 바로 그것, 즉 붓다의 이미지, 진리를 아는 자임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나라는 지상에 펼쳐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불사약 빼앗기’로, 앞에 열거한 것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깨달음이다. 권능자의 선한 의지에 힘입어 수수께끼를 헤쳐 나가는 느린 과정 대신에, 여기서는 격렬한 강제와 박탈이 있으며 - 가령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친 것이라든지, .... -여러분은 그 과정에서 권능자와 불화를 빚고 도망치게 된다. ... 자신이 차지한 물건을 최대한 빨리 빛의 세계로 가져와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정신분열적 파탄을 겪고 거기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p115

영웅의 귀환은 그 저승에서의 귀환을 말한다. 이승과 저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하나의 세계다. 신화나 상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p116

가장 큰 문제는 생명을 황무지로 도로 가져오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정성 없이 살아가는 곳이로. p116

세 번째 가능성은 여러분이 되돌아온 그 영역 중에서, 여러분이 주려는 것을 최소한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국면을 일부나마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 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 맞추거나 그것에 비례해, 자신이 발견한 것을 이른바 삶의 은혜로 가공하고 전달할 수단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공감과 인내가 필요하다. 벽에 금 간 곳을 찾아낸 다음, 오로지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여러분의 보석을 주는 것이다. p117

전형적으로 중년은 달성의 기간이 아니라 깨달음의 기간이며, 또한 성취의 기간이 되어야 마땅하다. 니체가 구분한 단계에 따르면, 낙타는 짐을 가득 싣고 나면 제 발로 일어나 사막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사자로 변신한다. 사자의 임무는 “너는 할지니”라는 이름의 용을 죽이는 것이다. 이 자기발견의 사자가 용을 죽이고 나면, 용 속에 묶여 있던 모든 에너지는 이제 여러분의 것이 된다. 중년이 되어서까지도 여전히 착하게 굴면 이득을 얻고, 나쁘게 굴면 벌을 받게 된다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뒤처진 것이다.

여러분이 만약 융이 말한 두 번째 단계, 즉 삶의 후반부에 들어섰다면, 여러분의 목표는 여러분이 심장 차크라에서 들은 ‘옴(OM)'을 불러오는 것이고, 그러면 그것은 성취에도 관심이 없고 위신에도 관심이 없는 여러분의 삶을 형성하고 구조화하는 에너지가 될 것이다. p122

“씨앗이 죽지 않는다면, 식물이 생길 수 없다.” 씨앗으로서 죽어야만 새싹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영혼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 이 두 가지 실체는 우리 안에 사는 것이다. ... 우리는 또한 우리의 영적인 부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영적 음식을 먹어야만 한다. 그리고 성찬, 즉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행위는 그런 영적 영양분의 흡수를 상징하는 것이며, 또한 명성의 관념을 구체화한 것이다. p130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죽는 것은 반드시 태어난다.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 (......) 모든 사람의 육체 사는 절대자아는 결코 죽지 않는다. (......) 그것은 무기로도 베어내지 못한다. 그것은 불로도 태우지 못한다. 그것은 물로도 적시지 못한다. 그것은 바람으로도 말리지 못한다.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자아는 영원히 한결같다. (......) 모든 육체 안에 사는 절대자아는 죽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떤 피조물을 위해 슬퍼하지 말라. - 『바가바드 기타』p142

내가 보기에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생각은 나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여기, 즉 여러분이 살아 있는 이 유일무이한 순간을 음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모든 순간들은 그야말로 유일하며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삶은 특유의 통렬함을 지니는 것이며, 여러분은 지금 경험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집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 여러분으로선 차라리 지금, 바로 여기서 행복한 편이 더 낫다. 여러분으로선 영원한 지금, 바로 여기를 경험하는 것이 더 낫다. p149

영원한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지금, 여러분 안에, 여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지주의, 붓다 의식의, 그리고 기타 등등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p150

죽음에 대한 저항은

여러분이 죽고 나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p150

불교의 중심사상은 집착 없는 공감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공감을 느끼고 있는 누군가의 죽음을 고통으로 느껴서는 안 된다. ... 그것은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이며, 여러분이 알 수 있는 최대한이다. 그 나머지는 모든 의식적 지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p151

의식의 두 번째 단계 : 깨달음을 향한 길 Coming into Awareness

깨달음 직전에 도달하면

예전 방식이 오히려 더 유혹적이어서

여러분을 뒤로 잡아끌게 마련이다. p162

그것은 어찌나 달콤한지, 우리는 그걸 선뜻 포기하려 들지 않지만, 궁극적인 포기는 바로 여러분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여러분의 영혼에 매달린다면, 여러분은 신과 함께 있는 자가 될 수 없다. ... 나는 옴(OM)을 듣는다. 나는 신이 도처에 있음을 안다. 성스러운 에너지는 여전히 내 주위에 있다. 바로 여기 있다. 바로 여기 있다. p163

잔잔한 연못이란 인도에서 흔히 요가라는 관념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된다. 요가의 첫 번째 잠언은 다음과 같다. “요가는 마음의 자발적인 활동을 의도적으로 중지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지속적인 유동체로서,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연못의 수면과도 유사하다. p168

예수가 이 문제에 관해 한마디 하지 않았나 싶다. 「마태오복음서」7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이른바 정통파 공동체의 기능이란 곧 신비주의자를 고문해 죽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들의 목표다. p170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 여러분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손상이나 성취조차도 초월하는 장소를 발견했음을 알고 있다. 여러분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p171

깨어난 의식의 상태에 있는 세계는 아움이라는 철자 가운데 아(A)와 동일시된다. 꿈의 의식상태(즉 천국과 지옥)는 철자 가운데 우(U)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깊은 잠의 의식 상태(아는 자와 아는 것 간의, 하나님과 그의 세계 간의 신비적인 합일 상태이며, 창조의 씨앗과 에너지를 배태하는 상태)는 음(M)과 동일시 된다. ..... 그 철자를 발음할 때면, 그 침묵 속으로부터 비롯되어 나오고 그 침묵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느리면서도 리드미커랗게 (......) 아움- 아움- 아움. p174

“꿈은 영혼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곳에 숨어 있는 작은 문이며, 이 문은 우주의 밤을 향해 열려 있다. 그 밤은 자아의식이 생겨나기 오랜전부터 정신으로 존재했고, 또한 우리의 자아의식이 얼마나 멀리 확장되건 간에 정신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모든 자아의식은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독립적이고, 구별이 되며, 개별적인 것들만 알고, 자아에 관계될 수 있는 것들만 본다. ..... 꿈은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된 깊은 곳으로부터 생겨나며, 너무나도 유치하고 기괴하며 비도덕적이다. 꽃처럼 피어나는 그 솔직함과 진실함 앞에서 우리는 기만에 찬 우리 삶에 대해 얼굴을 붉히게 된다.” - 융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 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 p176

“(무의식의 장에서) 사람은 더 이상 별개의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그의 정신은 넓어지고, 인류의 정신으로 융합된다.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통적인 인류의 무의식으로 융합되는 것이다.” p178

여러분이 환생을 거듭하는 한, 여러분은 불완전하다. 따라서 여러분은 스스로의 불완전에 대해 충실해야만 한다. ...

여러분이 오만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오만을 없애지 마라.

그것을 여러분의 영적 탐구에 활용하라. p192

우리가 필연적으로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저곳, 바로 저 우주에서도 타당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곳, 바로 이 우주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칸트의 답변은, 우주의 법칙이 [인간의] 정신에 알려져 있는 까닭은 그것들이 정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 내부에 지니고 있던 지식, 즉 ‘선험적’지식이며, 다만 명백히 외적인 상황에 의해 상기되어 나타날 뿐이라는 것이다. p200

심리학의 한계는 신학의 한계와 똑같다. 그것들은 초월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화와 관계가 있으며, 이 두 가지의 한계도 똑같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단순히 심리적 기능 또는 요인으로 환언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까지만 가고 더 이상은 가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갖고 있는 한, 여러분은 머물러 있는 것이다. ... “버리고 취하기의 궁극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취하는 것이다.” p202

‘하나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단 하나의 단어이며, 이는 사실상 부적적한 단어다. 이 단어는 항상 인격화를 내포하고 있으며, 누군가가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한 오로지 남성 인격화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제한된 어휘가 우리를 옭아매고, 우리를 묶어 두고 있는 것이다. p202

불교와 기독교는 똑같은 것을 두 가지 어휘로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두려움과 욕망의 세계 속에서, 다시 말해 마야, 즉 환영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도상학에서는 이것이 바로 ‘타락’이다. 구원은 이러한 두려움을 없애고 생명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의 행위를 통해 이 세상을 긍정함으로써, 이 세상에 기쁘게 참여함으로써 그것을 경험한다. p206

“시간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단 한 번의 삶을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서 에덴동산의 비밀을 찾아내야 한다.” -로렌 아이슬리

레반트(동 지중해 연안지역,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등)에서는 강조점이 복종,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제 아무리 변덕스럽다 하더라도-에 대한 인간의 복종에 있다. 여기서의 주된 관념은 하나님이 계시를 만들었으며, 그 계시는 인간이 읽어야 하고 숭앙해야 하는 책 속에 기록되어 잇으며, 인간은 그 계시를 결코 비판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받아들이고 순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반면 이 성스러운 책을 알지 못하는 또는 거부하는 자들은 그 창조주로부터 추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종교는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가? 신성과의 일치를 경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이먀말로 첫째가는 이단이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의 종교는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립하고 유지하는 방법과 수단을 가르친다. 그렇다면 이런 관계는 어떻게 해서 성취될 수 있는가? 오로지 초자연적으로 부여된, 특별히 선호되는 특정 사회 집단의 일원이 됨으로써만 가능하다. p207

그렇다면 기독교 관점에서는 어떤 수단을 통해 그런 자격을 얻을 수 있을까? 바로 참된 하나님이요 참된 인간인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의 덕택으로 그렇게 된다. (참된 하느님이요 참된 인간이라는 것이 기독교 관점에서는 일종의 기적으로 여겨지는 반면, 동양에서는 모든 사람이 참된 하나님이요 참된 인간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비록 그 경이로운 힘을 자신 속에서 일깨우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이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p208

토템, 종족, 인종에 대한 숭배, 그리고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종교는 미움을 사랑으로 억제하는 것의 심리학적 문제에 대해 오로지 부분적인 해결책만을 표상한다. ... 즉 광신자는 자기 마음을 청결히 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오히려 세상을 청결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과 자신의 전통에 집착하여 여러분 혼자만 ‘그것’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인류의 나머지로부터 스스로를 제거한 셈이 된다. p209

공산주의가 어느새 종교가 되어 버린 것이다. p210

이슬람교, 기독교, 공산주의는 전도를 지상과제로 삼는 전통이 아닐 수 없다. 그 각각은 완벽한 세계 정복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쇼가 아닐 수 없다. 이 세계를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다. p210

삶의 목표는 여러분의 심장의 박동을 우주의 박동에 맞추는 것이며, 여러분의 본성을 자연에 맞추는 것이다.

불교에서 삶의 목표란 니르바나(열반)적인 삶의 경험을 유지하는 것이다. ... 즉 ‘이슬람’이란 바로 ‘순종’,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과 숭배이다. ... 역사적 행위의 측면에서 보자면,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똑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 둘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위해 이 세상을 새로 만들려고 한다. p211

하지만 루시퍼는 거절했다. 우리는 그 이유가 그의 오만함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무슬림식의 해석에 따르면, 그 이유는 오히려 그가 하나님을 어찌나 깊고도 사랑하고 사모했던지, 차마 다른 어떤 것을 향해 절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국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그는 지옥으로 떨어졌고,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그곳에 영원히 있도록 처분 받은 것이었다. p214

사탄은 뭔가를 범할 수 있는 자아의 축도다. p214

지옥이란 여러분의 삶의 경험의 구체화이며 여러분이 집착하는 곳, 바로 황무지다. 지옥에 있으면 여러분은 어찌나 스스로에게 매여 있는지, 은혜가 들어올 수 없다. ... 만약 지옥이 황무지라면, 연옥은 여러분이 고통의 장소를 떠나는 여정이 될 것이다. ... 내 생각에 성령에 반대하는 죄는 바로 절망이다. 성령은 여러분이 깨닫도록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며, 절망은 아무것도 나올 수 없도록 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지옥이다. p216

다른 사람이 하는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p219

여러분이 자신의 어린 시절로부터 차단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어떤 구체화된 상징에 있다고 여겨질 경우, 명상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체계적인 훈련이 된다. 이상적인 명상의 기능은 구체화된 답변을 초월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된다. p223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여전히 나를 이런 식으로 건드리는 상징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 상징은 무엇인가? 이 세계에는 매우 다양한 맥락의 상징들이 있다. ... 여러분을 가로막는 상징을 발견하고 나면, 이번에는 그 상징이 여러분에게 의미하는 바의 중요성에 부합되는 사고와 경험의 양태를 찾아내도록 하라. 그 상징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를 알아내지 못하는 한, 여러분은 그 상징을 제거할 수 없다. ...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경험의 중심-일찍이 그 상징으로 인해 대체된-을 발견한다면, 그 상징은 용해될 것이다. “이것은 과연 무엇의 은유일까?”하고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그것을 발견하면 그 상징은 그 가로막는 힘을 잃거나 아니면 오히려 길잡이가 될 것이다. ... 즉 여러분은 그것을 장애물로 여기는 대신에, 오히려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으로 여러분을 안내하는 무언가로 여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핵심이다. p224

가톨릭 신자로서 여러분은 어떤 죄가 대죄가 되려면, ... 대죄란, 본인이 충분히 숙고한 다음에 저지르는 죄이며, 완전한 본인의 의지로 저지르는 죄다. 따라서 이는 은혜의 선물을 고의로 배제하는 것이며, 악마로 상징되는 바 그 자체이다. 초자연적인 은혜, 즉 하나님의 음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p225

상징이 구체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것으로 해석될 때,

그것들은 계시를 낳게 된다. p225

그는 간통을 뉘우칠 수도 없었고, 간통을 그만 두겠다고 결심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성배를 목격할 만한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 결국 이 기사는 대죄를 저지른 셈이다. 랜슬롯은 그 작품에서도 가장 인간적이며, 가장 감동적인 인물이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막판에 가서 그 수도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용서를 해야 하리라.”

하나님의 진노건, 영원한 저주건,

무슨 대가를 치르건 간에, 나는 이 사랑을 지키리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p228-229

내가 열여섯 살 때, 나는 이미 어린 시절의 신앙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만 다녀야 할 이유를 깨닫기 전까지는 가톨릭교회 출석을 그만두지 않기로, 다시말해서 내가 그 상징을 풀어헤치고 그 상징들이 무엇을 지칭하며 의미하는지를 알기 전까지는 그만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p229

인간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 혼자만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들은 숭배자들을 얻기 위해 매우 열심인 것이다.

신을 선택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신들은 무수히 많다.

여러분의 신을 선택하라.

열분이 숭배하는 신이

여러분에게 어울리는 신이다. p231

이 세계의 모든 신들은 힘이 아니라 은유다. p232

융은 『욥에의 회답』에서 무려 수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하나님의 이미지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미지는 야훼, 즉 율법의 제정자이며, 매우 강력한 독재자이며, 성난 아버지이다. 그리고 「욥기」에서 여러분은 그 이미지의 전형을 볼 수 있다. ...

“이건 마치 어떤 사람이 ‘우리 개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날 물지 않는다네’하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 ‘그럼 어디 나랑 같이 가 보세. 자네는 어디 한번 개를 무지막지하게 학대해 보게. 그럼 그 녀석이 자네를 무는지 안 무는지 알 수 있겠지’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p233

하지만 「욥기」가 지금껏 이해되어 온 방식은 전혀 그와는 달랐다. 그 내용은 이른바 한 ‘인격체’에 대한 복종의 방식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그 인격체로 말하자면, 누군가를 놓고 그런 내기를 거는 정말이지 밥맛 떨어지는 타입이 아닐 수 없다. p235

하지만 우리 친구 융은 이것 또한 답변은 아니라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처녀에게서 태어난 성육신이므로, 그는 사실 진정으로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인간이 되고 싶어 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고 싶어 한다”는 것이 융의 주장이다. 이처럼 영속하는 성육신을 위해, 하나님은 이른바 성령-삼위일체 가운데 제3위격-이 사람 안에 거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만약 세상 속에 거하는 하나님을 보고 싶다면, 바로 인간 속에서 찾으면 된다. 이것이 융이 내놓은 욥에게 보내는 회답의 핵심이다. p236

저 하늘 위의 늙은 놈팡이에게 내가 멋지게 한방 날린 셈이었다. p236

즉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상상의 존재의 이미지에 투사된 것은 사실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는 사실상 그때그때 인간이 처한 조건이 반영된 거울 속 이미지라는 것이다. p237

사람들은 이러한 영적 계발이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교회는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돕지 않는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은유적인 사건들을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 과연 누가 처녀수태를 믿겠는가? 처녀수태란 은유적인 것이며, 승천도 마찬가지다. 물론 나는 예수의 승천을 믿을 수도 있지만, ... 그의 승천은 내부로 향한, 신화적 여정을 표상한다. 그리고 처녀수태는 인간에게 있어서 영적 삶의 탄생을 지칭한다. p239

하나님은 존재로서, 활동으로서, 힘으로서 만물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영혼 속에서만 자식을 낳는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흔적이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자연스러운 형상이다. ... 다름 아닌 이 탄생을 통해서만 영혼에 들어와야 한다. 당신 안에서 탄생을 촉진하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선과 모든 위로와 모든 행복과 모든 존재와 모든 진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당신에게 오는 것은 진정한 존재와 안정성을 줄 것이다. 탄생없이 당신이 무엇을 구하거나 파악한다면, 어떤 식으로 하든 그것은 소멸해 버릴 것이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p239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신들이 ‘저 바깥’에서 활동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p240

여러분이 부활을 원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p241

왜 구세주가 그냥 이 세상에 올 수 없었던 걸까? 왜 그는 굳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던 것일까? ... 이것은 세계의 고통에 관한 기쁜 긍정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이 세계의 고통과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 와중에 신성한 존재의 광휘를 간파하는 것이다. p242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할 일이었다.

영웅의 죽음과 부활은 오래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기를 위한 모델이다. ...

이제는 오로지 인간 자신만이 중대한 신비다. 인간 자신이 바로 그 낯선 존재, 즉 그를 통해 이기주의 힘이 반드시 종지부를 찍어야 하느 존재이며, 그를 통해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해야 하는 존재이며, 그의 이미지 속에서 사회가 개혁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나’로서가 아니라 ‘너’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종족이나 인종이나 대륙이나 사회 계급이나 세기의 그 어떤 이상이나 일시적 제도조차도, 소진됨이 없고 다방면에 걸친 놀라운 신성한 존재, 즉 우리 모두의 속에 있는 삶의 척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p244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 ...

우주 시대의 개막과 함께 그런 변화의 요구가 대두했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거나, 이에 관해 생각조차 하기를 싫어한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의 진정한 교회로, 흑인 인권운동으로, 노조로, 자본가 계급으로 후퇴한다. p247

반면 「도마의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나이까?” 하고 묻는다. “그것은 기다린다고 오지 아니하되,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님이라. 아버지의 나라는 지상에 펼쳐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p249-250

이는 이른바 ‘광야에서의 시험’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광야에서 40일을 지낸 다음-이는 히브리인들이 40년 동안 광야를 헤맨 것을 축소해서 모방한 것이다-돌아와서 그때부터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 이는 붓다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이 두 사람에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다른 모든 스승들을 뛰어넘는 한 스승의 신화는 표준적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p253

복음서는 재미있는 물건이다. 서로 맞지가 않기 때문이다. 불운하게도 무려 네 명이 썼고, 더군다나 제각기 다르게 썼기 때문이다. ... 예수에 관한 가장 최초의 기록은 바울로가 쓴 것인데, 그 사람은 사실 예수를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다. p254

여러분의 성스러운 공간은

여러분이 자신의 모습을

거듭거듭 찾을 수 있는 장소다. ...

암브로시아-외부로부터 여러분 안에 불어넣는 기쁨이 아니라, 여러분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기쁨-의 샘이 있는 어떤 활동 공간, 즉 여러분이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의도와 자신의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됨으로써, 비록 작더라도 하늘나라가 거기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모든 사람은-본인이야 알건 모르건 간에- 그런 공간을 필요로 한다. p258

우리 모두에게는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과 즐거운 무언가가 필요하다.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마치 놀이를 하듯 하라. p259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p260

사회의 이상을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신비주의자의 길이다. ...

명상을 할 때에는 여러분 자신의 신들에 관해 명상하라. p271

“길에서 붓다를 만나거든 그 붓다를 죽여라.”

여러분은 반드시 여러분의 신을 죽여야 한다.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모든 고정관념들을 없애 버려야 한다. p274

여러분이 뭔가를 욕망하고 뭔가를 두려워할 때, 그것이 바로 유한이다. 붓다가 겪은 세 가지 시험-욕망, 두려움 그리고 의무-은 시간의 장에서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것들이다. 유한과 영원을 판별함으로써, 여러분이 스스로의 주위를 밀폐 봉인하게 되면, 여러분은 스스로의 안에서 변하지 않는 정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니르바나’를 성취한 것이다. 그 정적인 장소는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타오르는 불길이다. p285

“신을 예배하려는 자는 우선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할지니”라는 탄트라 격언은 예배에 앞서 여러분 스스로가 그 신들에 의해 요약되고 상징되는 의식과 사랑의 층위를 자기 속에서 발견해야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p294

한때 시인을 지망했던 사람이었다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여러분이 만약 영적 체험을 하고 나면 말로는 차마 그것을 묘사할 수가 없다. 다만 그 체험에 대한 실마리만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말로 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선 체험이기 때문이다. p296

그러한 요구를 강제된 사회적 의무로 여기고 대처한다는 것은, 결국 여러분이 현상 세계에 주어진 삶의 질서에 연결되고, 또 거기 붙들려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거기 관여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참여해야만 한다는 강제는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반드시 인류의 궁극적인 선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교훈적 차원에서 그러할 뿐이다. p301

세상을 변화시킬 필요 없이 단지 관점을 바꿈으로써 슬픔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삶이란 항상 슬픔이 가득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p304

남성의 주된 기능은 그 안에서 여성이 출산을 할 수 있는 환경적 상황을 수립하는 것이며, 또한 여성이 미래를 가져올 수 있도록 그 장(場)을 조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이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전체다. 남성은 보호하는 인자이며, 여성의 힘의 대행자이다. p319

“남성은 역사를 만든다. 여성은 역사 자체다.” 여성은 그것 자체이고, 남성은 여성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 그 자체인 곳 안의 장을 꾸며 줄 뿐이다. p320

신화의 그림 언어에서 여성은 알려질 수 있는 것의 전체성을 표상한다. 영웅은 그것을 결국 알게 된 자이다. 여신의 형상은 그를 위해 일련의 변모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여신은 결코 영웅만큼 위대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항상 영웅이 지금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약속한다. 여신은 영웅을 유혹하고, 영웅을 인도하며, 영웅이 차고 있는 차꼬를 부숴 버리도록 명령한다. 영웅이 여신의 취지에 부응할 수 있으면, 두 가지, 그러니까 아는 자와 알려진 것은 모든 한계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 불완전한 눈으로 인해 여성은 진부함과 추악함에 얽매여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해는 눈으로 인해 여성은 구제된다. 그 여성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웅, 즉 지나친 동요를 지닌 것이 아니라 그녀가 요구하는 친절과 확신을 지닌 영웅은 장차 왕, 육화된 신, 그 여성이 창조한 세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p322

이것은 바로 내가 ‘모험에의 부름’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만약 어떤 여성이 성취의 장에 들어서는 남성의 과업을 수행한다면, 그녀의 신화는 본질적으로 그 남성 영웅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p327

의식의 세 번째 단계 :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 Living In the Sacred

마야(maya) - 측정하다; 재어서 나눠주다; 형성하다; 창조하다; 짓다; 드러내 보이다; 전시하다라는 뜻의 동사 어근 ‘마(ma)’에서 유래한다.-는 환영을 창조하는 힘과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가상 둘 다와 관련된다. ... 마야는 매혹이자 매력, 특히 여성적 매력으로 경험된다.

p345

우주 기원의 본질이자 여성성과 개인성의 본질인 마야는 다음의 세 가지 힘을 갖는다.

1.차단하는 힘 : 사물의 실재적, 내적, 본질적인 성격을 감추거나 은폐하는 힘이다. 어느 산스크리트 경전에서는 “그는 모든 생물체에 들어 있으며, 각각의 아트만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2.투사하는 힘 : 환영으로서의 인상과 생각을, 그와 결합되는 욕망이나 혐오와 함께 방출되는 힘이다. 무지(차단하는 힘)가 실재를 은폐한다면, 상상력(투사하는 힘)은 현상을 전개한다. “이 투영하는 힘은 모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들을 창조한다. 그것이 신의 모습이건,우주의 모습이건.

3.드러내 보이는 힘:미술과 조각 그리고 의례와 명상의 기능이며, 곧 뭔가를 알게 하는 기능이다. 마술의 기능이란 마양의 드러내 보이는 힘에 봉사하는 것이다. p346-347

“어떠한 물건이든 세심하게 관찰해 보면 신들의 불멸의 영겁에로 접근하는 문이 될 수 있지.” p348

“이게 무엇일까?” (....) 그 용도에서 떨어져 나오고, 그 명명에서 벗어나면, 곧이어 경이의 차원이 열린다. 왜냐하면 그 물건의 존재에 관한 신비는 곧 우주의 존재에 관한 신비와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여러분 자신의 신비와도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p349

삶의 목표는 환희다.

예술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이다. p351

여러분은 더 이상 이 사물들이 어떻게 이름 붙여지는지, 또는 이 사물들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 필요가 없다. 이것이 미학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p356

예술의 기능이란 유형적이고 가시적인 세계의 소진 가능한 것을 열어 젖힘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광휘-여러분의 안에 있는 것과 똑같은 광휘-가 환히 비치게 하는 것이다. p358

그리고 이런 조화로운 리듬을 막는 두 가지 운동은 붓다의 두 가지 시험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나는 욕망으로 여러분이 대상을 소유하게 만들며, 또 하나는 혐오 또는 두려움으로 여러분이 그 대상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든다. ... 그리고 심미적 도취, 즉 마음이나 영이나 또는 그 무엇-욕망이나 두려움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의 상태는 나무 아래의 부동지점에서 붓다가 경험한 바에 정확히 상응한다. 그것은 ‘실제로’ 부동지점이다. p359

그러한 충격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어떤 거에 비추어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의 마음은 우리 자신을 옭아매는 신경망에서 생겨나는 온갖 걱정으로부터, 즉 즐기고 싶고 이기고 싶고 예의범절을 지키고 싶은 온갖 걱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 신경망에는 오로지 생명, 어디에나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만이 남게 된다. 중국과 일본의 선사들은 이 상태를 ‘무심(無心)’의 경지라고 불렀다. p360

이처럼 조이스가 말한 심미적 이론을 마야의 관념과 결합시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놀라운 깨달음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세상에, 무려 80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었군.” 나는 심미적 도취의 함의 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알고있었지만, 이것을 마야의 관념과 연관시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러분이 [마야의] 투사하는 힘을 경험하는지, 또는 드러내 보이는 힘을 경험하는지 여부는 여러분의 정신적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p361

그 양쪽의 양상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여러분의 의식이 변화할 뿐이다. p362

이런 내적 깊이를 달성하면 온 세상이 열리고, 여러분이 삶에서 하던 놀이는 이 광휘로 가득 차게 된다. 성배의 성은 장(場)-심미적 도취를 경험하는 방법에 의해 탐험되는-속에 있는 것이다. 성배는 여러분이 이런 밀폐 봉인된 장을 경험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완전한 환희와 영적 성취의 감각이다. p362

정지에서 운동으로의 의식의 변화는 곧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이다. 붓다가 벗어난 그 구속들-욕망, 두려움 그리고 사회적 의무-은 그저 일시적인 문제들이다. 여러분은 자발적으로 거기 속박될 수 있지만, 강제적 속박은 마야와 연관된다. 여러분이 이걸 깨닫는다면, 여러분은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깨달은 셈이다. p363

미술이란 동정녀의 매개다. 미술은 마야의 드러내 보이는 힘의 수단이며, 우리가 지상에서 초월로 나아가는 수단이다. 미술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항상 여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368

예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오랜 속담이 있다. “우선 모든 규칙을 배운 다음, 그 규칙을 모두 잊어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규칙들이 순수한 행동 속으로 녹아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p372

책을 한 권 쓰는 데 있어서 여러분은 우선 자신의 영감과 직관에서 출발한 다음, 곧이어 어려운 과정을, 즉 여러분이 여기서 저기까지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지역을 맞닥뜨리게 되고, 바로 거기서 멈춰 버리게 된다. 바로 그 때가 여러분이 규칙을 끌어내야 할 때이다. p372

예술가가 되려고 시도하면서도, 그 기예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결코 예술가가 될 수 없다. ... 하지만 예술은 조화로운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 “예술은 자연과 평행한 조화다.” 그리고 만약 그 사람이 아직 자연에 평행하지 못한다면, 예술은 그 사람을 그 지점까지 데려가기 위한 치료요법에 불과하다. ‘치료요법으로서의 예술’은 이른바 ‘회복’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그것을 실시하는 사람 본인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예술이 아니다. p375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춤추는 것이다.

성스러운 춤은 신들을 위한 것이지 관객을 위한 것이 아니다. ...

여러분이 혼자이고 자기 장소에 있을 경우, 여러분은 신을 위해 춤추고 스스로를 신과 동일시한다. 이 모든 관념은 탄트라에 있어 기초적인 것이다. 즉 신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바로 그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신을 뭐라고 부르고, 신을 무엇이라 생각하건 간에, 여러분이 예배하는 신은 생성이 가능한 신이다.

신들의 힘은 자연 속에 있는, 그리고 여러분의 본성 속에 있는 힘이 의인화된 것이다. 여럽누이 그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놀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작품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사실 예배이기 때문이다. p379

직업을 선택할 때 ... “나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거야”라고 말하고, 그 신념을 고수한다면, 뭔가가 일어날 것이다. 여러분은 혹시 직업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삶을 얻기는 할 것이며, 그것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p380

승진을 받아들이지 마라. 기본 수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위에 더 많은 무더기를 얹어 놓지는 마라. 왜냐하면 여러분은 자신의 직업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작업에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p381

여러분의 책임과 여러분의 건강 모두를 유지하면서 여러분이 창조적 측면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밀폐 봉인된 은신처를 만들어, 매일 몇 시간가량은 아무것도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여러분이 성실하게 지킬 수 있는 시간만큼-그 시간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몇 시간씩 더 자신에게 허락하되, 단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을 할 시간과 에너지는 반드시 남겨 두어야 한다. ... 즉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큼은 여러분의 예술에 바치고, 그것을 시종일관 지켜야 한다. 그러면 뭔가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간에 그 시간 동안은 거기 앉아 있어야 한다. 이것은 소통과 표현, 즉 예술 작업의 두 가지 요소에 관한 명상이다. ... 내가 지적하고 싶은 바는 여러분의 직업-즉 여러분의 예술-과 여러분의 직업이 서로 물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p382

창조적 모험은 항상 무모하다.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단 나오는 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둬라.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

하는 비판적 요소는 그냥 놓아 버려라. p383

작가의 슬럼프를 돌파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은 내가 보기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째는 우선 여러분이 말을 걸고 싶은 상대를 하나 찾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루에 두 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시간을 떼어 두라는 것이다.

작가의 슬럼프는 너무 머리가 많아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여러분의 머리를 자르라.

페가수스, 곧 시(詩)는 메두사의 머리가

잘린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에는 무모해야만 한다.

여러분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미쳐야 한다. p386

이 세상에는 무엇이 예술인지 아닌지를 인식하기 위한 기예와 태도와 의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특정한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보내고, 아예 죽여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2년 뒤에

진작 그래야 했다며 후회하리라. p388

그의 여정은 영웅의 여정이었지만, 그로 인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는 그야말로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여러분은 그가 한 인간으로서 완전히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는 예술가로서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 다음에는 여러분이 보석을 갖고 돌아왔지만 아무도 그 보석을 원치 않는 경험이 생긴다. 이른바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마라’는 종류의 일이니, 혹시나 사람들이 여러분을 적대시할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대개는 기다리는 군중이 하나도 없게 마련이다. 여러분은 이른바 ‘자기 시대를 앞서 나간’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즉 한 세대하고도 절반이 지난 다음에야 격찬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으리라. p389

“나는 그걸 드러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p390

하지만 간혹 예술가는 창조적으로 뛰어듦으로 매우 환희를 느끼게 되는데, 이를 여러분은 ‘삶에서 유리됨’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은 또한 요가에서 문제 되는 것 가운데 하나다. 깨달음이 찾아오면, 삶에서 유리되고, 여러분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이것은 예술가이지만 아직 자신의 삶에 그 깨달음을 적용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영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은 세속적인 것도 얕보지 못할 것이다. p390

그들은 인간이나 개인이 될 수가 없으며, 그저 일부분으로만 남는다. 즉 그들은 보다 더 큰 구조의 구성요소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 동양에서는 인간은 전사이거나 상인이거나 또는 다른 무엇이라는 역할일 뿐이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인간이 곧 개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완전한 개인이라는 과념을 지녔고, 이를 고수함으로써 이른바 사회의 필요와 조화되는 삶의 패턴으로 훈련되는 사람에 관한 동양의 관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p399

“머리에 불붙은 사람이 연못을 찾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없다면, 그걸 추구하지 마라.” p400

‘감응 이미지’는 감정 체계에 직접 호소하고, 곧바로 답변을 이끌어 내며, 그것이 끝난 이후에 두뇌가 거기에 대해 흥미로운 주석을 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내부적 공명의 진동이 있으며, 그것이 외부에서 보이는 이미지에 반응하는 것이다. 마치 똑같이 조율된 악기의 현들이 서로 화답하듯 말이다. 어떤 주어진 사회 집단의 생생한 상징이 그 모든 구성원에게 이와 같은 종류의 반응을 이끌어 낼 경우, 일종의 마술적인 일치가 그들을 하나의 영적 유기체로 연합시키고, 비록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존재와 믿음에 있어 하나인 이들 구성원들을 통해서 기능하는 것이다. ... p404

경이로운 사실은 깊은 창조의 중심을 어루만지고 거기에 영감을 제공하는 특유의 효력이 가장 하찮은 어린이 동화 속에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 그것들은 영혼의 자발적인 산물이며, 그 각각의 속에는 그 원천의 배아적 힘이 전혀 손상되지 않고 들어 있다.

신들의 현시는 편재하고 있건만,

우리의 눈이 열리지 않아 못 볼 뿐이다.

상징은 우리의 눈을 열어 준다.

“진정한 상징은 우리를 원의 중심으로 데려가며, 원주의 다른 지점으로 데려가지는 않는다. 상징을 통해서 인간은 효과적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 다른 사람들, 하나님과 접촉하게 된다. ” - 토마스 머튼 p405

우주적 알의 이미지는 여러 신화에 나타나 있다.

“처음에 이 모든 것은 드러나지 않은 실체로 있었다.” 힌두교의 성전에는 이렇게 나온다. “그런데 그것이 드러났으며, 밖으로 나타나 알과 같은 모습이 되었고,그 상태로 한 해 동안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것이 갈라져 절반은 은, 절반은 금이 되었다. 은은 곧 땅이요, 그은 곧 하늘이 되었다. ... 그 알에서 태어난 것이 태양이었다.” p406

이슬은 달에서 떨어진 암브로시아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달의 신을 신(Sin)이라고 했다. 모세가 오른 산의 이름은 시나이(Sinai)산이었다. 결국 그곳은 아마도 달의 연신의 산이었을 것이다. p408

신화의 신들은 우리 주위의 자연 속에 있는 에너지들을 의인화한 것이다. p409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 ‘보라, 하늘나라는 하늘에 있다’고 하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를 앞설 것이고, 그들이 바다에 있다고 하면 물고기들이 너희를 앞설 것이다.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으니, 너희 자신을 알게 되면 너희는 알려질 것이며, 너희가 살아계신 아버지의 자식들임을 알게 될 것이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모르면 곤중 속에 살 것이며, 너희가 곤궁일 것이니라.”-예수 그리스도 p414

하늘나라는 언제 오나이까.

“대답하시되, 그것은 기다린다고 오지 아니하니,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님이라. 아버지의 나라는 지상에 펼쳐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라. ” p415

워싱턴의 대통령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말을 전해왔다. 하지만 당신들은 어떻게 하늘을 사고 팔 수 있는가? 어떻게 땅을 그럴 수 있는가? 우리가 보기에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상쾌함과 물의 부글거림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그걸 우리에게서 사겠다는 것인가? p415

신화는, 또는 달리 말해서, 신화와 종교는 위대한 시이며, 그와 같이 인식할 경우에는 십중팔구 사물과 사건을 관통해서 서로 완전하며 전체인 어떤 존재 또는 영원의 편재를 가리킨다. 이런 기능에 있어서 모든 신화, 모든 위대한 시, 모든 신비주의적 전통은 합치된다. 그리고 한 문명 내에서 이런 영감을 주는 환상이 효과적으로 남아 있는 곳이 있다면, 그 영역 내의 모든 것과 모든 피조물은 살아 있다. p426

뛰어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p426

3. 내가 저자라면

목차보다 앞서 ‘들어가는 말’을 구성한 것은 효과적이었다.

목차의 구성이 현세의 삶에 대한 관조와 이해로부터 깨달음을 향한 길을 통해 성스러운 삶과의 조우로 이어지도록 구성한 것도 내용 흐름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런데, 각 장의 세부 주제들의 짜임새 있게 구성되지 못하였다. 세부 주제들의 핵심 제목이나 키워드들을 살려서 구성한다면, 목차를 통해 다소 추상적인 각 장의 흐름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이해하기도 쉬울 것이고, 다시 책의 내용을 찾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 장의 시(詩)적구성이 인상적이다. 본문 내용의 주제가 되는 글귀들을 요약하여 구성한 것인데, 아마도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워밍업을 하게 할 목적으로 이해된다. 덕분에 본문에서 말하려는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왠지 덜 자연스럽다.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힌두교, 기독교, 카톨릭, 불교, 이슬람교 사이를 자유롭게 다니면서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언어와 개념을 동원하여 설명하는 내용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소통장치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예로, 해당 개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는 본문의 내용을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은유적 표현이나 상징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 개인적 삶의 경험에 대한 공감만으로 충분할 것인가. 만약 사진이나 삽화 또는 구체적 상징에 대한 해설 등을 본문 내용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어떨까.

또한, 각 종교들에서 사용하는 비슷한 개념이나 용어를 적극적으로 상호 비교하여 그 공통점과 차이를 설명한다면 어떨까.

4. 다시 읽을 때 같이 볼 책들

C. G. 융 <심리학과 연금술>, <욥에의 회답>

제이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피네간의 경야>

슈펭글러 <서구의 몰락>

단테의 신곡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의 힘>

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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