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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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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8일 04시 44분 등록

작가에 대하여

1954 115 충남 공주에서 출생, 서강대학교 경영학 석사, 한국 IBM 경영 혁신 담당, IBM  본사 말콤 볼드리지 국제 심사과, 1992 한국 능률협회경영혁신 대상개인 공로자상 수상.  이런 수식어들은 화려하고 거창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력은 책을 표지에 작가소개 정도로만 쓰시는 같다.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습니다라는 소박한 슬로건을 내걸고 변화경영 전문가로서 다른 사람들의 발전과 변화를 진실되게 도우면서 선비다운 삶을 살고 계시는 선생님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과 사람을 사랑하며 어울리는 새로운 인생을 만들고 계시고 있는 분이시다.

 

주관적 관점

나는 그분의 눈빛을 좋아한다 . 특히 119 쪽에 실려 있는  사진에   눈빛이 나와 있다. ( 부분에서 선생님이 책을 찾아 119쪽을 열어 보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선생님께서 글을 보시고 실제로 책을 뒤적여 보실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 속에서는 분명 번쯤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을 뒤져   사진을 찾아 보실 같은, 그런 소녀 같은 상상이 만큼 선생님은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옆에서 항상 같이 우리와 함께 공감하며 지내고 계실 같다는 친근감을 느낄 있는, 나에게는 선생님은  그런 분이시다.

 나는 그분을 벗에서  처음 뵙고 만났다. 긴장하고 들어 그곳에서 야채를 직접 씻어 아침을 만들어 주시고  무릎을 꿇고 앉아 걸레질 하시는 모습은 따뜻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발표 시간에 상대방의 가치와 재능을 발견해  각자의 기질과 재능을 발현하도록 이끌어 내시는 모습은 단호하면서 카리스마가 넘치셨다. 말은 아끼시지만 인간적 애정에는 아낌이 없으신 분이기도 하다.  빙긋이 웃는 웃음 뒤에 묻어 나오는 확실한 자기이해와 스스로에 충실한 모습을 보면  그는 외유내강형 인간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리더는 자신의 크기와 모양을 알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과 어울려 훌륭한 앙상블을 만들어 있는 사람들을 결집한다고 한다. 나는 그가 만들어 내는 앙상블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의 , 문장, 단어들은 깊이 있고 부드럽다. 그의 그런 테크닉을  보고 배워 내걸로 만들고 싶은 마음에서 힘들지만 레이스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는 춤을 추라고 하면  일어나 몸이 시키는대로 춤을 추신다. 그는 죠셉 캠벨처럼 자상하고 따뜻한 인품을 지녔다. 죠지 크루니처럼 나이가 들어 수록 멋이 풍겨져 나온다. 니콜라스케이지의 머리는 이제 이상 그와  비교대상이 없다.  그의 머리카락은 니콜라스케이지에 비해 너무나 풍부하다.

“50대가 되기 전에, 노인의 모든 특성이 나타나는 끔찍한 나이가 오기 전에, 아직 젊음이 늦여름처럼 무더운  40대에 마지막 폭염 같은 사랑으로 성년의 결정을 매듭짓고 싶어한다.” [27]      

이런 마음을 갖고 쓰신 책이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였다. 책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조금은 예민한 여성이 갱년기의 산을 힘들게 넘고 잔잔하게  써내려간 것처럼  아주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같이 늙어가며 받아 들이기 어려운  신체적 변화, 심리에 대해 열을 올리며 친구들과의 수다 보다   위안이 되었고 공감이 갔다.  그의 책을 읽으면 책의 내용을 실천해 보고 싶은 의욕이 불끈 올라온다. 나는 살아보지 못한 50대의 막연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있지만 걱정 하지 않는다. 분명 얼마 있으면 끔찍한 50대에 다시 살아 용기를 주는 책이 나오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오늘도 그는 먼저 경험한 끔찍한 일들을 매일 새벽  시간 정리 하고 계시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제주도 올레 길도 처음 사람은 길을 잃어 당황하고 힘들어 했다. 하지만  분명 미리 걸으며 과정을 겪은 이에 의해 나무마다 길을 알려주는 리본이 메어지고 돌에 화살표가 그려졌다  이후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웃으며 이야기 하고 주위의 풍광을  즐길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는 분명 늙어가는 것에 대한  기쁨과 재미를 알려주는 책이 출판되어 우리로 하여금  10 풍광의 꿈을 실현하며 50대를 즐길 있는 여유를 주실 것이다. 

그를 만났다는 것은 나에게 행운이고, 앞으로 그와 보내게 남은 시간은 나에게 행복으로 남아있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개정판 서문

과거를 기록하며서 미래를 얻었다는 점이 책을 쓰면서 얻어낸 최고의 수확이다. 마흔 10년을 쓰면서 내가 앞으로 10 동안 무엇을 있으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냈다.

 미래는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를 딛고 이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충분히 썩어 비옥해진 과거가 미래의 수확량을 결정한다.

과거를 충분히 썩혀 소화해내지 못하면 과거가 살아서 미래를 지배하게 된다. 과거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관성, 과거의 습관, 과거의 자취와 흔적에서 벗어나지 한다. 그러나 과거의 온갖 흔적, 영욕을 묻어 깊이 썩혀두면 우리는 지혜를 얻게 된다. 그것이 앞길을 밝히는 불빛이 된다.

나는 10년 앞을 달려나가, 그곳에서 거꾸로 10년 동안 펼쳐지게 될 내 인생 최고의 장면들을 되돌아 보았다. 시간적 도치가 주는 장점은 계획을 이미 발생한 실천 결과로 치환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타도, 구본형!’ 이것이 이 책 속에 숨어 있는 정신이다. 나는 나의 문화사, 이 개인의 실록을 통해서 내가 넘어서고 극복해야 할 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는다.’는 나의 베전은 먼저 이렇게 적용되었다. 내가 내 직업의 첫 번째 고객인 것이다.

책을 펴내며

평범한 사람들의 ‘밑으로부터의 이야기’, 이것이 위대한 인물과 힘있는 자들의 역사와 함께 또 다른 역사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

역사는 기록된다. 기록되지 않으면 잊혀진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나의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평범한 개인에게 있어 개인사의 편찬은 본인의 과제다.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는다.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기경영’은 바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자신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고 자신의 세계도 없다. 기록의 형태는 일기여도 좋고, 메모여도 좋고, 홈페이지여도 좋고, 사진첩이어도 좋고, 이 책 같은 자서전이어도 좋다. 무엇이 되었든 개인의 역사는 스스로에 의해 편찬되어야 한다. 이것이 군중 속에서, 군중으로, 흔적 없이 매몰되는 자신을 잊지 않는 길이다.

프롤로그

새로운 날을 다시 시작하며 후회가 있으면 고칠 것이고, 아쉬움이 있으면 챠울 것이며, 해보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해볼 것이다.[15]

나는 모든 것을 털어내되 그 이야기에 책임지지 않는 방법, 즉 화자와 이야기를 분리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의 도움을 받았다. 그것이 소설이다.[16]

이 책은 놀이며 유희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고 욕망에 대한 절제다. 못 가본 삶에 대한 질투다. 그동안 배운 학습의 노트며, 읽었던 책들의 주석이다. 자전적 소설이고, 소설적 자전이다. 지나간 삶에 대한 파괴고, 앞으로 살 삶에 대한 창조다. 나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보려는 실험이다.[16]

과거는 늘 엄격하고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적 감옥이기도 했다. 과거가 날 만들었으니, 과거를 버리고 벗어나는 것이 또한 내 미래의 과제다. 죽어야 할 자리에는 늘 혁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였다. 살면서 나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 번 다시 태어나야 한다.[17]

1장 지난 10

마흔 살은 오래 끓어 걸쭉해지기 시작한 매운탕이다. 바야흐로 인생의 뼛속 진국이 우러나오는 시기다. 마지막 젊음이 펄펄 끓어 오르고, 온갖 양념과 야채들의 진수가 고기 맛에 배고 어울리는 먹기 딱 좋은 시절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절정을 살짝 지나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마흔은 한 웅큼 잡히는 옆구리 살에서 시작한다. 술 취한 다음날 아침이 괴로워지고 숙취가 길어지면 마흔도 익어간다.[21-22]

육체는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힘줄처럼 질기다. 그러나 육체 역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안으로부터 비대해지고 느슨해진다. 모든 것의 궤멸은 늘 내부로부터 온다.[22]

내 마음을 흔들고 불안하게 하며 허무하게 하는 감정들이 있었다.뜬금없이 과거의 진상들로 마음이 분열도다 어떤 장면에 그때의 감상이 되살아난다. 나는 느다없이 잊었던 길을 거기 시작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낮선 길에서 길을 잃고 망연히 서 있기도 한다.[22]

내가 결코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 찾아오면 싸우지 않고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이다.[24]

고독은 비 같은 것이다. 식물을 밤 사이에 자라게 하는 그런 것이다.[25]

마음이 흐르는대로 가볍게 생각을 따라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무겁고 진지한 사고가 나쁠 거야 없지만, 걍쾌하고 가벼운 사고 역시 나쁠 것이 없다.[25]

지식은 지식에 적용됨으로써 증식된다. 그리고 지식을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체험한다.[26]

50대가 되기 전에, 노인의 모든 특성이 나타나는 그 끔찍한 나이가 오기 전에, 아직 젊음이 늦여름처럼 무더운 이 40대에 마지막 폭염 같은 사랑으오 성년의 절정을 매듭짓고 싶어한다.[27]

중년의 금지된 사랑은 평범한 사람들조차 황홀하게 극적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떨쳐버리기 어려운 유혹이다.[27]

자유는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확실한 것, 굳건히 서 있는 것들의 질서 안에서 자유는 끝나고 만다. 절실하게 바라지만 자유가 주어지면 우리는 자유를 두려워 한다. ‘이내 스스로를 함부로 던져 망가뜨리고’ 만다.[30]

그들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 역시 한때의 꿈보다 더 영속적이지 못하다. 인생은 결국 짧은 꿈이었다는 것을 모든 죽어가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31]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현실적으로밖에 살지 못했던 그 초라한 현실을 후회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왜 중요했을까? [31]

현실은 늘 죽음 앞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오직 삶만이 현실의 위력에 눌려 지낸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현실적으로 밖에 살지 못했던 그 초라한 현실을 후회한다.[31]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속절없이 질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러나 마흔조차 흘러간다. 무엇을 했단 말인가! 무엇을 이루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흔 살은 성취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라는 점이다.[32]

그러다 당황한다. 그리고 어떤 늙은이가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한다.[33]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마흔다운 것은 건망증이다. 40대의 10년을 사는 동안 나도 건망증과의 동행을 시작한다. 무언가를 잊은 것은 분명한데 그게 뭔지 모를 때도 있다.[34]

이 당혹스러움이 바로 40대가 익어가는 증상이다.[34]

과거와의 연결, 심지어 미래와의 연결도 가끔 끊어버리고, 이 돌연한 시간적 격리, 건망증을 휴가로 즐길 수 없다면 바보다. 나와 나의 불일치, 시간적 흐름에 대한 일탈과 소거는 아주 유쾌한 지구 탈출 같은 것이다.[35]

아름다움이란 여러 가지 깊이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긴 인생이 빚깔이 다른 아룸다움을 만들어내기도 한다.[36]

나는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 곧잘 낙관적인 정신적 질환에 성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36]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문제에 끌려 다니는 것을 더욱 싫어한다. 나는 문제를 일상에 던져진 예기치 않은 모험과 도전으로 인식하곤 했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면 새로운 단면과 만날 수 있다. 최선의 해결책에 도달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문제가 던져주는 여러 상징을 해석하고 가능한 여러 해결 방법 가운데서 내게 적합한 방법 하나를 찾아내는 것이니까. 물론 모든 문제가 다 풀리는 것은 아니다. 문제를 안고 살아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안고 살면 되는 거지.[36-37]

40대의 10년은 급격한 감가상각이 이루어지는 시기다. 완숙한 성취의 시기가 아니라 정리의 시기가 된 것이다. 이 때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은 먹고사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것이 우리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마흔이 넘으면 그것이 모든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40대 최대의 위기를 불러온다. 과거가 사라진 상태에서 미래조차 만들어낼 수 없다면 갈 곳이 없다. 이것이 어쩌면 내 불멸의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37]

마흔은 이미 서산에 지는 해가 되었다. 마흔은 사회적으로 아무런 희망도 비전도 던지지 못 하는 황혼의 여생이 되고 말았다.[38]

나의 과거는 거대한 사회적 방망이에 의해 가슴을 강타당했다. 베반 같기도 하고, 비애같기도 하며, 무력감 같기도 하고, 허무 같기도 한 통증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뒷방 노인이 된 마흔이여.[38]

2장 마흔 살

나는 그런 그를 싫어했다. 그러나 내가 혐오하는 그가 나와 동질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44]

가슴속에서 점점 커지는 구멍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 그는 아픔을 이기기 위해 샛소폰을 배워 슬픈 애조 위에 인생을 실어 불고, 또 다른 그는 질주하는 세상을 따라가던 자동차 기어를 낮추고 늦음을 찬양하는 슬로비가 되어슬로 푸드를 먹고 물질에서 도망가 자연을 즐기고 산에 오른다.[44]

일 밖에 없는 일꾼은 성공한 실패자가 되고 부유한 노예가 되고 가족에게 미안한 가장이 되고 늘 바쁜 아이가 되어 무자비한 사다리의 꼭대기를 향해 질주한다.[44]

‘굽이굽이 흘러온 길도 어느 한 굽이에서 끝난다. 폭포, 여기까지 흘러온 것들이 그 질긴 숨의 끈을 한꺼번에 탁 놓아버린다.

다시 네게 묻는다. 너도 이렇게 수직의 정신으로 내리 꽂힐 수 있느냐.

내리 꽂힌 그 삶이 깊은 물을 이루며 흐르므로, 고이지 않고 비워내므로 껴안을 수 있는 것이냐. 그리하여 거기 은빛 비늘의 물고기 떼, 비바람을 몰고 오던 구름과 시린 별과 달과 크고 작은 이끼들 산그늘마저 담아내는 것이냐.

-박남준,<나무, 폭포, 그리고 숲>중에서[46]

마흔이 되었을 때, 내게는 나의 세계가 없었다. 내 삶은 줄거리 잇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창조적 주체가 아니었다. 그저 짜여진 일과 속에 놓여 있었을 뿐이다,[46]

 

지금 있는 곳의 위치를 알고 싶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우선 내가 있는 이곳을 객관화할 수 있는 지도 같은 것을 보고 싶었다.[47]

마흔 살은 늙지도 젊지도 않다. 대부분 결혼을 했으며 살기 위해 일한다. 마흔이 되면사람들은 자신에게 지치게 된다. 일사의 걱정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어 가장 필요한 내적 성찰이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개인적 시도와 실패,직장에서의 갈등,결혼 생활의 무관심, 아이들과의 씨름이 이때 가장 잘 드러나는 문제들이다.아마 조금 더 젊엇더라면 전직을 하거나 이혼을 하거나 다른 모섹을 햇을지 모르겠지만, 마흔 살이 되면 문제를 끼고 살아가는 것이 일상적이다. 그러니까 빼도 박도 못 하는 시기다.[48]

마흔이 되면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사회적 윤리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좀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려고 한다.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을 수용한다. 따라서 개념의 깊이를 희생하는 대신 명료하고 구체적인 일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48]

마흔 살이 되면 인생의 마법을 떠나보낸다. 좀 더 순수하고 자유롭고 장난기 어렸던 젊은 시절을 떠나보내며, 사회적 관습이나 책임, 자의식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일 때문에 놀이를 포기하고, 책임 때문에 순수한 자유를 반환하게 되는 일상적 경험을 통해 마흔 살은 개인을 군중과 대중 속의 이름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넘어, 자유와 전통적 권위 사이의 힘 겨루기를 넘어, 진정한 사회화를 겪게 되면서 보수화 된다.[48]

아니면 아직 해보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을 완성해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일 뿐이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50]

마흔살이 되면 사람들은 밀려드는 피로감 때문에, 자신에 대한 다소의 실망감 대문에, 또는 그동안의 실패의 전력 때문에,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대문에 저만치 물러앉는다. 녀려이란 얼마나 지루한 가시밭길인가![50]

젊은이들이 어느 날 나이를 먹어 성인이 되면서 자신의 가슴 속에 있던 ‘신적인 위대성의 흔적’을 지우고 당나귀가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 슬픔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끝나지 않는다. 슬픔은 어느 날 비탄으로 바뀐다. “이제 마흔이 되었다. 그러나 해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세상에 내가 다녀간 자취는 어디에도 없다. , 나는 조만간 사라질 것이고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저물었다. 우리의 세대로 끝났다.[51]

어쩌면 마흔 살은 여성적인 특성의 수용이기도 하다. 좀 더 감성적이 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여성적인 특성을 받아들인다.[52]

중년이 되면 남자와 여자가 그 성적 역활을 바구는 상징적 이미지다. 여성은 현명해지고 다소 교활해지며 강해진다. 그동안 여성은 억압받고 수동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중년이 되어 남자가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때, 여성들은 숨어 있는 자신의 힘과 재능을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의지하여 일어선다. 남자들이 영웅적인 여행을 포기할 때, 그리하여 자발적이고 공격적인 경쟁심을 상실해갈 때, 여성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이런 르네상스적 힘과 공격력을 회복하게 된다.[53]

 

마흔 살은 남녀 모두에게 운명이나 숙명의 힘을 깨닫게 해 준다. 일어난 일에 대해 속수무책이거나 극히 제한적인 통제력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53]

마흔이 넘으면 불운과 실수에 대하여 스스로를 용서하게 된다.[54]

마흔 살은 융통성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동시에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보는 긍정적 지혜가 위로가 되는 시절이다.[54]

지혜란 숭고하고 철학적인 거이 아니라 삶을 통해, 삶을 위해 필요한 실제적인 통찰력을 의미한다.[55]

마흔의 나이에는 철학조차도 실용적인 것이 된다. 이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삶의 지혜다. 지혜란 ‘숭고하고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삶을 위해 필요한 실제적인 통찰력을 의미한다.[55]

마흔이 되면 악에 대해서조차 관용적이 된다. 이것은 중년의 융통성이고 미덕이 된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더 관용적이 되는 반면 덜 도덕적이 된다.[56]

고귀하고 능숙하게 비껴가는 방법 가운데 최고의 것은 유머다. 유머는 일종의 여유와 휴식이다.[56]

유머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환상적인 속임수다. 진실의 꾸며댐일 수도 있다. 불가피한 것에 대항하는 부드러운 대응이다. 유머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또한 유머는 중년의 고통을 치유해 주는 엔돌핀이다. 그것은 스트레스와 비극을 완화시켜준다.[57]

중년의 과제는 각 개인의 내면에서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치료이며, 재생을 위한 내적인 힘이다. 대체로 이러한 갱생의 힘은 절망과 고통 속에 감추어져 있다.[57]

이상과 현실의 사이, 3의 지점,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자리, 스스로를 놀릴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짐만 지고 가는 당나귀의 진실함이 어찌 사람들이 그리는 마흔의 삶이 될 수 있겠는가? 장난도 치고, 흐드러진 메밀밭을 달밤에 지나기도 하고, 물레방아간의 뒤로 숨기도 하고, 달콤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제3의 지점이 마흔 살의 자리다. 개혁은 마음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마흔 살의 문제는 결국 가슴과 영혼의 문제다.[58]

마흔 살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의 지루한 2막이 아니다. 오히려 연극을 끝내고 진짜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파괴와 창조, 죽음과 재생이라는 이미지와 직결되며, 죽어야 살 수 있다.[59]

 삶을 연극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만약 삶이 연극이 되면, 삶의 개념이 삶을 지배하게 된다. 우리는 극장 밖으로 나와야 한다. 삶을 연극에 비유하는 것을 미워하는 이유는 삶을 극장 안으로 몰아 넣고 짜여진 연극으로 전락시키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진짜를 원한다.[60]

내게 마흔은 각성의 시기였다. 나는 40대의 10년 사이에 이루어지는 위대한 종결과, 똑같이 위대한 새로운 인생에 대해 말하고 싶다. 40대는 사회적 폐기물이 된 자신을 구해내어 빛나는 삶으로 창조하는 시간이다.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반전이 가능한 시기다. 어쩌면 반전만이 이 시기를 사는 교훈일지 모른다. 전환과 변곡, 이 두 단어야말로 40대를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언어다.[61]

마흔 살은 가진 것을 다 걸어서 전환에 성공해야 한다. 이것이 내 지론이다. 다만 내가 거는 것은 돈이 아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나 자신을 건다. 나는 이 길을 택했다. 내가 도박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길 밖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흔이 익어가면서 나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계획했다. 나는 비장했다. 나의 40대는 죽음과 친근해진 10년이었다.[62]

죽어야 할 자리에는 늘 혁명이 있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자리가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라는 점이었다. 한 세상이 어둠에 싸이게 될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은 어둠 속에서 새로운 빛으로 빛난다.[63]

3장 직장생활

사람들이 자신을 평가할 때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지고 평가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를 가지고 평가하게 마련이다.[70]

야망이 있는 똑똑한 사람들이 앞다투어 선택한 그 일을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70]

개선과 혁신, 그것은 혁명이라는 단어의 현실적 대체 용어였다.[73]

평생직장은 사망했고, 평생직업은 끝없는 학습으로만 가능한 움직이는 타깃이 되고 말았다. 임시성과 비정규성은 방법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특성이 되고 있었다. 모든 신뢰의 수명이 단축되고 있었다. 단기적 전망과 사고가 변화와 돌변의 시대를 이해하는 경제적 키워드였다. 우리는 조급한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로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75]

지금의 하기 싫은 일을 버리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 일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 직장 속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어도 80퍼센트는 되어 보였다.[77]

조직에서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 그들은 늘 학습한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와 경쟁한다. 전문성이 자격증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식은 변하고 경험은 늘 다르게 적용된다. 자신의 소질을 이해하고 잠재력을 계발한다. 이들은 대체로 겸손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다. 애정 없이는 자신을 불태울 수 없다. 어떤 분야든 자신을 불사르지 않고서는 핵심에 다가갈 수 없다.[80]

아이러니하게도 필요한 사람들은 떠남을 늘 준비하는 사람들이다.[80]

니체는 가장 위험한 조직원은 ‘그의 이탈로 조직 자체가 파괴되는 조직원’이라 불렀다.[80]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마흔 살이 넘으면 갑자기 경제적 가치가 급락하는 사회로 들어서게 되어 발걸음이 무거울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준비도 없이, 갑자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구렁텅이에 처박히곤 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가장 성숙한 40대 중반에, 아직 활력이 넘치는 중년에, 새로운 세계로 나와야 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도전이기도 했다.[81]

나 역시 앞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굉장한 여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긴 여행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양식을 챙겨 떠난다 하더라도 곧 바닥이 날 것이었다. 결국 나는 여행을 하며 양식을 조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불안은 오히려 나를 흥분시켰다.[83]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전환시키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쉽게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적인 일이 아니다. 유전자는 바뀌지 않는다.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은 괴로운 과정에 비해 지극히 평범한 성과를 돌려줄 뿐이다.[84]

적극적 수동성, 즉 유혹은 늘 설득의 강력한 수단이 되어 왔다는 것을 알아냈다. 경영학은 유혹이라는 싱싱한 단어를 죽은 단어, 즉 마케팅이라고 불러왔다. 마케팅은 유혹이다. 달콤해야 하고 향기로워야 하고 엄청난 새로움에 대한 약속을 흘려야 한다. 유혹은 올가미고 덫이다.[85]

세일즈가 도망치는 고객에게 달려들어 창을 꽂는 것이라면, 마케팅은 짐승이 다니는 길에 온갖 화려한 미끼를 주렁주렁 단 덫과 올가미를 놓아 두는 것이다.[85]

유혹은 설득 이전에 이미 설득당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설득이란 언제나 스스로 이미 설득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설득할 수 있다. 이것이 설득의 제1의 법칙이다. 설득은 늘 미리 이루어진다. 미리 이루어진 설득, 무너진 자기방어를 유혹이라고 부른다.[85]

전문가는 학위와 자격증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다. 전문가는 과거에 의해 전문성을 인정 받는 것이 아니며, 오직 끊임없는 자기학습에 의해 날마다 새로워질 뿐이다.[88]

경영 컨설팅 같은 지식산업은 사기와 진실의 경계를 걷는 것이다. 끝없이 학습하는 사람은 좋은 조언을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계속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사기꾼들처럼 ‘달변의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나는 내가 ‘경계선을 걷는 사람(edge walker)’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89]

내가 믿는 것은 끊임없이 배우고 실험하는 사람뿐이다. 무엇을 하든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는사람들만이 전문가로 존경 받을 자격이 있다.[89]

죽지 않고 새로워지는 것은 없다. 죽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새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91]

나는 제2의 인생 속으로 들어갔다. 조직에게 양도했던 힘과 권리를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평범함과 군중의 품을 떠나면서 외로워졌다. 이제 스스로의 작은 나라를 세워야 했다. 내 안에서 ‘군주적 본능’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나의 나라, 나의 세계, 나의 꽃을 피워야 했다. 그것은 겨울보다 더 추운 봄이었다. 그러나 꽃 터지는 봄은 왔다. 피워야 할 꽃, 만들어야 할 세계가 생긴 것이다.[91,92]

4장 얼굴 페르소나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부담스럽다. 얼굴은 놀라 만큼 유연한 물체다. 교교한 달보다 요염할 수도 있고, 얼음보다 차가울 수도 있다. 그러며서도 뻔뻔하게 우리 신체 가운데 벗고 나타나는 부위다. 햊빛이 너무 강한 날이면 선글라스를 끼기도 하는데, 가린 몸이 성적이듯 더욱 은밀해진다.[98]

초상화의 생명은 정밀묘사보다 그 인물이 풍기는 분위기와 느낌을 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초상화의 매력이다.[99]

감정, 그것은 늘 쉴새 없이 붓질을 하고 있다. 좌우 위아래로 움직이는데, 방향을 바꿀 때마다 붓의 앞뒷 면이 바뀌게 된다. 앞쪽은 사랑이라는 염료가 묻어 있고 뒤쪽에는 증오라는 진흙이 묻어 있다. 혹은 부러움과 질투, 희망과 두려움, 무기력과 열정을 늘 칠하고 덧칠하고 반복된다.[100]

눈은 엄밀히 말하면 두뇌가 밖으로 나온 기관이다. 그러니까 머릿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눈에 표현되게 된다. 눈이 인상을 결정하기도 한다.[100]

사람은 결국 서로에게 길들게 마련이다. 조심해야 할 것은 서로에게라는 말이다. ‘나에게 길들게하면, 그것이 목적이 되면, 함께 살 수 없다. [103]

인간은 권력에 오염되어 있다. 물질적 권력이 아니라 지식을 통한 훈육권력에 매여있다.[112]

욕망이 자신을 충족해가는 것은 개인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욕망은 부숴뜨려 땅에 묻어야 하는 끔찍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힘과 에너지다.[113]

인형의 자유는, 그러므로 아이러니하게도 속박으로부터 온다. 실을 끊으면 인형은 움직일 수 없다.[114]

평범한 사람들의 범상치 않은 이야기. 나는 이것을 인류의 미시적 역사라고 생각한다. 개인은 각자 그 안에 자신의 역사를 안고 산다. 부끄러움도 있고 후회도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도 있고 당당하고 장엄한 순간도 있게 마련이다. 산다는 것은 자신을 재료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115]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115]

생명은 내면에 있다. 우리의 내면은 늘 신과 만나는 장소다.[116]

사회적 기대가 존재하는 곳에는 늘 인형을 움직이는 끈으로 가득하다. ‘어떤 행위가 칭찬 받게 될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생에서 그 무엇이라도 성취해낼 수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기대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렵다.[116]

나는 나답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다운 것에 천착했고 매달렸다. 니체가 말한 ‘거리에 대한 파토스’를 추구했다. 이것은 차이에 대한 열정이었다. 차이는 다름이다. 그것은 다른 것, 다른 사람의 것을 자신의 것과 구별짓는 다름에 대한 열정이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은 어설픔과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스러움과 긍정의 표상이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더 다르게 만들려는 열정이다. 더 많은 차이를 만들기 위해, 차이를 끊임없이 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달라야 한다. 자기경영의 근간이 되는 것은 실천의 철학이다. 바로 자신의 과거와 경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117]

내가 마흔이 되어 한 일은 그런 나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오랜 세월과 수많은 공간’을 지나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도 되고 저런 사람도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여기에 왔다.[118]

5장 가족

잡아야 할 손이 필요할 때, 따뜻한 손을 가진 그녀가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122]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도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이탁오[124]

부모로서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가르침 너머 함께 즐기고 어울리며 공유하는 친구로서의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124]

갈등은 마음이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나침반이 북쪽을 찾고, 그곳을 가리키는 순간 부르르 떨리는 것, 이것을 나는 갈등이라 부른다. 갈등 없는 판단이란 반복하여 익숙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새로운 것에는 갈등이 따라다닌다. 흥분과 두려움 속에서, 세상의 기대와 자신의 기대 사이에서, 이익과 마땅함 사이에서, 꿈과 현실 사이에서, 욕망과 절제 사이에서, 편함과 배려 사이에서 우리는 늘 잠시 망설이게 된다.[125]

함께 먹는 다는 것은--아마 그래서 식구라는 단어가 생겼겠지만--감정을 공유하게 만든다. 쉽게 친해지기 위해서는 밥을 같이 먹는 것이 꽤 중요한 일이다. 먹고 산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도 되고, 먹는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 이완을 위한 휴식이기 때문에 휴식 시간에 만난다는 홀가분함이 있다.[130]

인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쁨을 위해 산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쁨과 나의 기쁨은 늘 섞여 있었다. 작은 수고들은 이런 기쁨을 위해 동반되는 선물의 포장지거나 아름다운 포장 끈이나 리본 같은 것들이다.[130]

나는 어떤 것을 보고 과거의 이미지를 연상하거나 지나간 사건들을 떠올리고 그것이 내게 무엇이었나를 물어보고 즐기는 사람이다. 나는 의미를 찾는 사람이고 나의 세계를 즐기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 조급한 세상에서 가장 먼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는 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멀리 보는 것을 좋아한다.[133]

나는 마음껏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일은 언제고 하면 된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나서 남은 시간에 하면 된다. [137]

나는 아무 곳에서나 어느 때나 일할 수 있다. 내가 있는 곳은 어디고 이내 훌륭한 사무실이 될 수 있다. 온통 일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나게 노는 일에 주력한다. 노는 것은 내게 힘을 주었다. 적어도 내가 내 인생을 마음대로 즐기고 있다는 자부심을 주었다.[138]

나는 시간의 불모지를 내게 불하했다. 그리고 가장 귀중한 나만의 시간대로 만들었다. 마치 모두가 버린 시간의 밭을 일궈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찾아내지 못했다면 영원히 잠 속에 묻혀버릴 뻔한 보물 같은 땅이었다.[138]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길이 있었다. 현실이란 그저 ‘지금의 상황에 대해 남들의 생각’, 즉 다른 사람들의 견해일 뿐이다. 나는 나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에머슨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이 그 사람의 성격임을 종종 잊고 지내는 것’ 같다. 누구의 삶이든 그것은 늘 그 주인을 닮게 마련이다.[140]

집은 좋은 곳이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정겨운 모습으로 늘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우린 유목민에서 다시 정착민으로 돌아온다. 자유롭고 신선한 공기로부터 아늑하고 따뜻한 공기 속으로 되돌아 온다. 그리고 환기를 하듯 다시 그 자유를 찾아나서곤 했다.[145]

친구는 생활의 일탈을 서로 돕기도 한다. 그래서 좋은 것이다. 혼자 하지 못하는 것을 함께 하게 된다. 삶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 친구들이다.[146]

친구들끼리 나눌 수 있는 것은 짐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혼자 그 긴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짐을 각자 지고 함께 가는 것이다. 외로움은 함께 있으면 훨씬 낫다.[147]

즐거움 역시 함께 나눌 사람이 있어야 한다. 즐거움은 그래야 커진다. 즐거움에는 무게가 없다. 그것은 깃털 같아서 하늘을 날 수 있다. 즐거움은 우리가 지고 가는 삶의 무게를 덜어준다.[147]

평생 가고 싶으면 늘 반갑고 그리운 관계가 되도록 애써야 한다.[148]

따질 것도 없고 계산할 것도 없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함께 가는 것이 친구들이다. 친구란 함께 어울림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 없이는 그 어울림이 빛날 수 없다.[148]

6장 자연

곷은 작고 소박하지만 향기는 끝없는 유혹이다. 오죽하면 천리향이라 브르랴. 천리를 흐르는 유혹이라.[155]

홀로 산에 있으면 아름다움에 취하게 마련이다. 홀로 있음에 취하고, 바로 그 때문에 고독 너머에 있는 연결끈을 더듬더듬 찾아내게 된다. 언어의 표현방식을 넘어 교류되는 정신적인 교감은 자연이 우리의 마음을 여는 방식이다.[157]

이 어리석은 것아. 우매한 미망의 어둠에서 나와 가고 싶은 길을 가거라. 마흔이 넘게 살아온 긴 세월이 참으로 잠깐이고 꿈이 아니더냐. 다행히 아직 꿈이 끝난 것은 아니니 살고 싶은 대로 살아라. 죽음이 널 데려갈 때 좋은 꿈이었다고 웃을 수 있도록 하여라.[157]

나는 신과 가까워진다. 나는 잠이 든다. 세상은 잠시 사라지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사라졌다가 이내 되돌아온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렇게 떠나기 전 입었던 옷을 입고 깨어나는 것이다. 언젠가 깨어날 수 없다면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다.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으면 가족들은 우리가 입었던 옷을 바꿔 입혀준다.[158]

우리가 왜 변화해야 하느냐고?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작은 세포가 아이가 되고 젊은이가 되고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고, 그리고 죽는 것이 삶이다. 순수한 아이의 생각이 야망으로 가득한 젊은이의 생각이 되고 이내 세상의 한계에 지쳐버린 장년이 되고 노회한 노인이 되고 이윽고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변화 자체가 우리의 일상이고 삶이다. 생명이 주어진 순간 삶은 시작되고, 삶이 주어진 순간 죽음의 시계도 카운트되기 시작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왜 변화해야 하는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160]

사랑은 가장 극적이고 가장 드라마틱하고 가장 빠져들기 쉽고 가장 상처받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그게 사랑의 매력이다. 사랑의 개념은 불변하는 것이지만, 그 구체적 모습은 천변만화의 격정이다.[161]

왜 변해야 하느냐고? 흐르는 강물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하늘의 구름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바다의 물결에게 물어보라. 그것이 존재의 양식이기 때문이다.[161]

곽박의 시에 “숲에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없고, 냇물에는 멈춰선 물결이 없다.”라고 했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변화에 대한 묘사는 찾기 어렵다. “밖으로 자연의 조화를 본받고, 안으로 마음의 근원을 체득해야 한다.(外師造花 中得心源)”는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둘 충고다.[163]

자연은 내게 내가 그일부라는 것을 늘 일깨워준다. 지연은 훌륭한 조언자였다.[163]

때때로 나는 자연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그때가 가장 마음이 편한 때다. 어떤 조화로움이 나를 밀고 여울처럼 가슴으로 퍼져오는데, 그때 평화를 느끼게 된다. 자연과 하나임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조화롭게 살 수 있다는 노자의 말은 곧 나의 말이다.[164]

G.K.체스터턴의 말대로 참으로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감탄이다. 기쁨은 도처에 있고 ‘늘 활동중’이다.[164]

나는 나무다. 스스로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땅이지만 가야 할 곳은 하늘이다. 나는 땅에서 하늘로 간다. 몸이 땅에서 나와 영혼이 되어 하늘을 날아가듯, 땅을 움켜쥐고 온몸을 던져 하늘을 향해 자란다. 나의 모든 힘은 어두운 내면으로부터 온다. 어두운 곳은 언제나 비옥한 토지였다.

나의 내면은 땅과 같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두렵고 위대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가치가 뒤섞여 있고 뜨거운 용암으로 가득하다.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하고 무궁무진한 자산은 땅이다. 나는 땅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나는 나를 이용하고 활용한다. 가장 먼저 나의 모든 가능성을 탐사하고 이용해야 한다. 내 내면을 뒤지고 곳곳에서 흐르는 에너지의 샘들에 깊고 굵고 튼튼한 뿌리를 견실하게 박아두어야 한다. 이 힘들만이 나를 키울 수 있다. 이것이 첫 번째 교훈이었다.[167]

나무는 또한 해마다 새로운 자신을 분만시킨다. 수없이 자신을 탄생시킨다. 사는 법은 죽는 법에 있다. 자라는 방법은 스스로를 죽이고 다시 탄생하는 과정이다. 죽지 못하면 다시 태어남도 없다. 죽음과 삶을 반복하는 것이다. 파괴와 생성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장이다. 이것이 나이테다. 그 외의 방법은 없다. 늘 자신의 시체를 내다버릴 수 있어야 한다. 나무는 그 일을 아주 아름답게 해내고 있다.[169]

낙엽은 나무의 지혜다. 혹독한 겨울에 살아남기 위한 창조적 해결책이 바로 버리는 것이다. 죽음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이 나무의 멋이다. 가장 장엄한 문명의 단편이 장례이듯이 낙엽은 죽음조차 아름다운 삶의 과정으로 창조해낸다. 나무는 해마다 한 해의 삶을 기록한다. 한 겹의 나이만큼 줄기에 그 흔적을 남기고 두꺼워지고 키가 더 자라게 된다. 나무는 매년 죽는다. 이 상징적 의식이 나무가 자라는 방법이다.[169]

나도 죽어야 한다. 적어도 1년에 번은 죽어야 한다. 나무가 죽을 나도 죽어야 한다. 나에게 낙엽은 책이다. 꽃과 나뭇잎, 그리고 열매는 나무의 1년의 삶이다. 책도 1년의 삶의 기록이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1년도 떨어진다.. 그리고 열매를 남기듯 나도 책을 남긴다. 권이 쓰여지면 1년도 지난다. 나무가 다음해에도 똑같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혹독한 죽음과 재생의 의식을 거친 나무는 이미 해의 나무가 아니다. 나도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영원히 죽는 것이다. 살아 있으나 이미 죽어버린 정신을 나는 수없이 보아왔다.[170]

나는 나무와 같은 사람이다. 나는 날마다 내게 귀화한 생각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과육에 담아 수천 개씩, 수만 개씩, 수백만 개씩 퍼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사람들은 그 씨앗을 마음 속에서 키우면서 ‘자신의 생각으로 귀화한 생각’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도처에서 번영할 수 있는 전략이다.[173]

 로댕의 말을 잊지 마라. ‘사랑하고 감동하고 전율하면’ 그 삶은 매혹적인 것이다. 날마다 그렇게 살아라.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좋은 인생이다. 그러므로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변화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174]

따라서 적어도 1년에 한 권은 책을 써라. 이것이 열심히 일을 한 기준이다. 세상을 향해 많은 시그널을 보내야 누군가 대답하게 된다.[175]

그러나 세상의 유행에 따르지 말라. 자연의 맛은 독특하고 차별적이다. 자신만의 맛과 향기를 가진 품종을 만들어 내라.[175]

7장 건강

‘의학기술이란 자연이 질병을 치료해주는 동안 환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볼테르-[180]

영원히 스승의 빛에 가려진 제자는 결국 스승을 욕보이게 한다. 뒷물이 앞물을 뛰어넘으려고 해야 비로소 강물이 힘차게 흐를 수 있다. 제자가 잘 나야 스승이 위대해진다.[183]

죽음은 생명과 함께 시작된다. 또한 생명은 죽음과 함께 다시 시작한다. 이것이 생명의 순환이다.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다. 마치 변하지 않는 것 없이는 변하는 것도 없고, 어두움 없이는 밝음도 없는 것과 같다. 어두움은 늘 생명이 자신을 준비하는 참으로 비옥한 토양이다. 초라하고 아무 것도 아니고 썩는 것들만이 자신을 땅에 버릴 수 있다. 땅에 버려져야 ‘무엇’이 될 수 있다.[184]

죽음은 성장을 보호한다. 죽음은 무분별하고 과다한 욕망을 제거해줌으로써 생명체의 조화로운 성장을 도와준다. 이런 생물학적인 자연의 비밀은 인류의 역사를 움직여온 원칙이기도 하다.[186]

제퍼슨이 존 애덤스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무르익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또 다른 성장을 이루어야 할 바로 그때가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쓴 후에 남의 것을 탐할 수는 없겠지요.[186,187]

문명은 인류가 여성화되는 과정이었다. 문명의 역사 대부분의 주인공은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화려하고 빛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따지면 윌 듀랜트의 지적대로 남성은 ‘자궁, 즉 인간이라는 종족의 주류인 여성에게 조공을 바치는 존재’였다. 여자들은 가축을 길들였고, 마지막으로 남자를 길들였다. 남자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 절제, 협동, 공동체 활동이라는 사회적 특질을 배우고 익히도록 했다. 문명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즉 아무 때나 짝짓기를 하고, 음식을 탐내고, 싸움질을 해서는 안 된다. 문명의 본질은 오랫동안 뿌리깊게 자리잡은 사냥꾼의 습성과 겨우 최근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사회적 본능 사이의 갈등인 것이다.[188]

역사가 인류의 시간적 기록이듯이 개인의 역사 역시 그 삶의 시간적 기록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개인적 역사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의 삶은 다양하지만 개인의 역사는 늘 자연과 문명의 갈등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때때로 한쪽에 치우치고 때때로 반전하고 이윽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적절한 융합과 균형을 잡아가기도 한다. 문명은 욕망이 과도한 탐욕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복제를 시도할 때 제동을 걸어준다. 부모의 이름으로, 학교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법과 여론의 이름으로 말이다.[189]

 

그대가 사모하는 그 어진 옛날 사람들은 뼈까지 삭아 흙이 되고 말았다. 오직 그 말만 전해져 내려온다. … 그대의 교만과 끊임없는 욕망을 버려라. 자부심과 야망을 버려라.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190]

우리는 결국 노령 때문에 죽는다. 우리의 몸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마모되고, 결국은 함몰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다. 우리를 구성하는 세포가 마모되어 궤멸하든, 세포 속의 생체시계가 마지막 초점을 멈추기 때문이든, 결국 시작한 생명은 그 시작부터 끝을 포함하고 있다. 죽음은 모든 생명이 시작과 더불어 반드시 치러야 할 빚이다. 이것은 어떠한 예외도 없었다.[191]

그러므로 여전히 욕심스러운 ‘나이 듦’은 과다한 욕망에 차 여전히 ‘두 개’가 되고 싶은 세포, 즉 암과 같다. 생명을 길게 연장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순간 순간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191]

마흔은 죽음이 삶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영적인 나이의 시작이다.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 또 다른 방식의 이해력이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게 되는 시기라는 뜻이다.[199]

'죽음이 명함을 남겨놓고‘ 간 다음 적절한 때,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에서, 참을 수 있을 만한 짧은 통증 속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 것이 좋은 일이다. 삶은 죽음을 향해 달리는 시계의 초침을 뒤로 돌리려는 부질없는 노력이 아니다.[200]

나이가 든다는 것은 천천히 삶의 두루마리를 펼치는 것이다. 두루마리의 앞부분, 즉 젊은 시절의 그림이 더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것이 싱싱하고 발랄하고 모범적인 것이라면, 나이가 들면서 짜놓은 인생의 직물은 은은하고 통찰력에 차 있고 완숙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연의 부름에 따라 모두 놓아두고 낡은 껍데기만 남기고 떠날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기도한다.[200]

아름다운 봄날은 빨리 지나간다. 모두 그리워하고 섭섭해 한다. 그러나 가을 또한 곱게 온다. 나이 먹음은 가을을 즐기는 것이다.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릴케처럼 말한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신이여, 우리 각자에게 합당한 삶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 삶에 걸맞은 ‘합당한 죽음’을 주소서.[201]

8장 길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이기에,

비 내리는 오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불멸을 꿈꾸니,

이 오후 시간을 즐겨라. 어차피 가져갈 수도 없는 시간이니,

하루의 질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예술.[205]

마흔아홉이 되어 지난온 삶을 되새겨보니 실제로 일어난 것과 상상 속에 존재했던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모두 한 줌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206]

30년 혹은 40년을 더 산들 그때 돌아보면 역시 인생은 한 줌의 꿈에 불과할 것이다. 때로는 즐거움으로, 때로는 막막한 슬픔으로 남았던 그 사건들이 다 지나가 흩어진 꽃잎 같은 꿈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직 살 시간이 남아 있을 때는 과거의 일들이 추억으로, 현실과 이어지는 원인으로 남아 있다고 인식하겠지만, 마지막 숨은 이런 모든 것들 역시  한 순간에 일어난 찰나의 것들임을 증명해 줄 것이다. 원인도 결과도 없이, 느닷없는 장면들의 중첩으로 떠오를 것이다.[206,207]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모든 일들 역시 과거만큼 분명한 꿈이다.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비현실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일 뿐이다. 나는 꿈을 또 다른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207]

내 말은 미래의 꿈 그 자체가 믿음을 통해 추억만큼 분명한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갇히는 것만큼 미래에 갇힌다. 추억으로서의 역사와 꿈이라는 소설은 둘 다 인생에 중요한 것이다.[207]

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과거시제로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일을 과거시제로 쓰는 순간 내게 이미 일어난 일이 된다. 미래를 과거로 인식하는 것은 정신적 작업의 하나다.[208]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간 것 같았는데 많은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의 아늑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209]

나에게는 꿈에 대한 믿음이 있다. 다만 훌륭한 상상과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지금의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 해야 할 일을 놓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내게 지금 무엇인가를 하게 한다.[210]

추억과 꿈은 같은 것이다. 하나는 일어났다고 믿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꿈이다. 하나는 이미 깨어난 꿈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꿀 꿈이다. 둘 다 지금이라는 현실을 속박한다. 혹은 지금을 구원해준다. 때때로 그 역할을 바꾸기도 한다.[210]

꿈은 시간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역사적이다. 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욕망이다. 욕망을 버리는 것이 꿈이기도 하지만, ‘욕망을 버리는 것’ 역시 욕망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욕망의 특별한 모습이라 부를 수 있다.[211]

욕망이 꿈을 만들고 꿈은 믿음에 의해 현실적 개념이 된다. 미래를 현실로 인식하는 능력은 정신적 여행자들이 가지는 힘이다. 그들은 상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상상과 더불어 그 속에서 산다. 그것이 생활의 일부이기도 하다.[211]

글쓰기는 꿈을 현실로 데리고 오는 나의 방식이다. 나에게 책이란 꿈과 현실을 잇는 통로다.[212]

꿈은 또한 목적지다. ‘지금’이란 늘 그곳에 가는 길 위의 어느 지점이다. 정신적 여행자에게 현재란 과거(추억)를 떠나 미래()로 가는 길 위의 어느 곳이다. ‘구도라는 말이 생각났다. 길을 찾는다는 말이다. 나 역시 길을 찾고 있다. 한 현실에서 또 다른 현실로 이어지는 길, 지금의 나에서 미래의 나로 가는 길, 추억에서 꿈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다. 그 길은 시간의 통로다.[212]

그러나 나는 그곳에 도착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정 자체로 훌륭한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 위에서 끝나는 여행도 위대한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 위에서 죽은 여행자처럼 완벽한 여행자가 어디 있겠는가![215]

40대의 10년을 보내며 나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되고 싶었다. 그 곡선의 변곡점 몇 개를 찾아내었으니 만족스럽다. 나는 갈수록 산다는 것이 꿈처럼 여겨진다. 꿈의 물결을 따라 넘실대며 흘러간다. 깨고 나면 아무런 기억도 없듯이, 지나간 세월은 시들어 사라진다. 간혹 무너진 건물의 특별한 부분이 잔해로 남아 쓸쓸함을 더하는 것처럼 앞뒤 연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영상들이 지나간 삶의 유물들이다. 나는 그것들을 본다. 과거 역시 그 잔해 속에서 새로 복원되어야 비로소 원형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미래처럼 모호한 것이기도 하다.[215]

항해 자체가 인생이다. 그것이야 말로 비옥한 정신적 토양이다. 사는 동안 생명을 모두 소모하므로 죽음이 찾아왔을 때 완전히 비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죽음은 나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아갈 수 없으리라.[216]

지나간 것들 속에 내 인생이 담겨 있다. 나는 그 위대한 순간들의 주인이며, 또한 그 초라한 순간들의 책임자였다. 이것이 정말 하루하루의 진짜 인생이었다.[217]

손님이 돌아간 만찬처럼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잔치를 준비하는 것은 늘 마음 설레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쁨은 그 잔치의 기름냄새와 솥에서 뿜어져 나오는 김과 웃음과 섞인 식기 부딪치는 소음들 사이에 있었다.[218]

깨달음의 내용은 없고 그저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깨달음 정도가 50년을 산 나의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없으면 인생의 반전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219]

우리는 불행을 만들며 산다. 누가 불행을 원할까마는 결국 우리의 불행은 우리가 만든 것일 뿐이다.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듣지도 못한 헬렌 켈러가 “난 너무나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라고 말할 때, 모든 것이 멀쩡한 우리는 돈을 벌지 못해 불행하고, 약간의 손해를 보아 불행하고,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행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 불행하다.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찾지 못하고, 그리하여 세상을 원망한다.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건만 행복한 사람이 드문 것은 행복해지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220]

무엇인가를 할 때 다른 것을 계획하지 않고, 어떤 것을 계획할 때 다른 행위를 하지 않으면 순간에 몰입할 수 있다. 그리고 몰입된 순간 순간을 살 수 있으면 행복하다.[221]

1년에 한번쯤 흔들의자에 앉아 마치 다 산 것처럼 인생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다. ‘나는 어떤 일을 이루고 싶었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가? 이 질문의 답이 찾아지면 인생은 목표를 가지게 될 것이고, 결국 그 길을 갈 것이니 행복해 질 수밖에 없다.[221]

사소한 일이 주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면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 인생의 대부분은 아주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자신을 용서하고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증오로부터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많이 얻으면 그만큼 더 행복한 것이 아니라 베풀 수 있는 만큼 행복하다. 베풂은 씨앗 같은 것이라 주위에 뿌리면 수많은 결실과 함께 되돌아온다. 더 많은 씨앗을 얻게 된다.[222]

, 내가 세상에 남기고 가는 것은 세월이 지나면 희미해질 내 삶의 발자국이고,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은 꿈과 추억이다.[222]

길은 없다. 이것이 길이다. 하루가 길이다. 하루가 늘 새로운 여정이다. 오늘 새롭게 주어진 하루가 또 하나의 멋진 세상이 되지 못한다면 어디에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변화란 불행한 자의 행복 찾기 아니겠는가.[223]

9장 집, 공간

나는 늘 책이 가득한 서가가 있는 서재 속에 앉아 있는 나를 그리워했다. 나는 또한 서가를 읽고 쓰는 장소 외에도 가끔은 졸기도 하는 공간, 그러다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으면 그대로 뜰로 나갈 수 있는 공간으로 그리워했다.[229]

내게 독서와 꿈과 쓰기는 책 속의 경험을 배워 원래 내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던 근본을 이해하는 학습이다.[231]

내가 배운 최고의 교훈은 집은 다시 지을 수 있지만 터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터를 잘 잡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233]

정원을 즐기려면 부지런해야 한다.[239]

밭을 재배한다는 것은 자신이 심고 싶은 것을 심는 것이다. 심고 싶은 것, 즉 욕망을 따른다는 점에서 자연스럽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서 자라난 또 다른 욕망들을 뽑아낸다는 점에서 반자연적이다.[241]

공간이 인간을 만든다는 말은 맞다.[243]

멀리 두고 그리는 마음은 그리움이고 가까이 두고 만질 수 있는 것은 행복이다. 그리워하고 또 볼 수 있으니 이처럼 다행일 수 없다. 모든 사물의 이치가 그럴 것이다. [244]

우리는 증거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일을 하면 한 티가 나야 그 기쁨이 배가 된다. 정원 일을 하는 것은 즐거운 노동이다.[249]

명상은 나를 즐기는 것이다. 스트레스와 괴로움으로 가득 찬 현실에 갇힌 내가 아니라, 원래 있었던 아름다운 나를 찾아내는 것이다. 명상은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 평화를 건져내는 것이다.[254]

10장 학습

책을 읽다가 ‘두려움은 곧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고 무엇이랴.’라는 칼릴 지브란의 글을 발견했다. ‘시팔.’ 어쩌면 말을 이렇게 잘한단 말인가? ! 그거 참 좋은 것이다. 속에 콱 박혀 있다가 가래처럼 올라오는데 뱉고 나면 후련하다.[260]

두려움은 서서히 옥죄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또한 강렬한 힘으로 작동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금 열심히 일하도록 했다 계속 책을 쓰도록 했고, 계속 읽게 했으며, 그저 빈둥거리며 사는 것을 불편하게 했다.[261]

성공은 채찍이다. 쉬지 못하게 날카롭게 살을 파고들어 찢어 놓는 주마가편의 바로 그 채찍이다. 채찍을 잊은 성공은 반복과 진부함 속에서 쇠퇴하게 된다.[263]

학습은 성공을 오랫동안 빛나게 해준다.[263]

의무란 재미없는 것이다. 의무감이란 일상화되는 것이고, 지겨운 것이고, 반복되는 것이고, 아무런 생명도 살 수 없는 무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읽고 쓰는 것이 의무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했으며, 이것이 가장 재미있는 놀이가 되도록 방법을 강구했다.[263]

 나는 한 가지 종류의 책을 읽는 것을 자제했다. 읽기 싫으면 읽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썼다. 매일 쓰는 것은 다행히 아주 즐거운 놀이였다. 나는 어느 책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와 느낌과 생각을 내 일상 속에서 매일 조금씩 찾아내고 표현해보려고 했다. 그것은 늘 살아 있다는 느낌을 선사했다. 나는 놀이가 가진 위대한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논다는 것은 순수하며 아무런 이해를 따지지 않는다. 경제적 계산을 넘어 빠져들게 한다.[264]

싸움조차도 즐기려 하는 경우가 있다. 적과 논다는 것이 싸움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264]

심심함이야말로 모든 창조적 발상의 원천이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해주었고, 달리 해석하게 해주었고, 속세에 물들지 않게 해주었고, 다시 속세를 그리워하게 해주었고, 사람을 찾아 나서게 해주기도 했고, 다시 나로 돌아오게 해주기도 했다. 심심하면 친구가 그립고, 그래서 그를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문화는 한가한 사람들의 작품이다.[265]

바쁘다는 것은 지우개와 같다. 모든 기억을 지우고 그리움을 지우고 의미를 지우고 생각을 지운다. 바쁘다는 것은 사람을 그저 움직이게 한다. 먹이를 나르는 개미처럼 한없이 움직이게 한다. 경제라는 본능에 따라 프로그램이 된 것처럼 낮도 밤도 없이 움직이기만 한다. 똑같이, 이 지겨운 반복적 소모를 ‘일한다’라고 부른다. 니체는 ‘노동은 최고의 경찰’이라고 말했다. 노동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억제하고, 열망을 줄이고, 독립의 욕망을 피하는 현명한 자제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사회는 노동을 통해 안전해지곤 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일하고 일하다가 죽는다. 한 번도 살기 위해 일을 버린 적이 없다. 놀기 위해 산 적도 없다. 그래서 살기 위해 산 적이 없는 것이다.[265]

다소 목적지가 불분명한 여정, 가다가 언제고 목적지가 바뀔 수도 있는 유연하고 자유로운 여행 난 이런 여행이 좋다.[269]

미래는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은 세계다. 그저 내적으로 감응하는 나침반 하나 달랑 들고 떠난다. 이때는 내 발자국이 곧 지도다. 완성될 수 없는 지도, 때때로 잘못된 지도, 방황과 위험이 도처에 숨어 있는 지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내가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269]

책을 쓰는 일은 내가 가장 잘 배우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269]

나는 내가 읽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의 지식은 나라는 특별한 여과기를 거쳐 새로운 표현법을 얻게 된다.[269]

나 역시 내가 읽은 책이고 그들이 생각한 생각이고 그들이 겪은 경험이다. 내 속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과 경험이 살아 숨쉬고 있다. 내가 그들이고 그들이 나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고 있다. 책과 학습은 우리를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로 만든다. [270]

교육이란 ‘어떻게 배우는지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지적은 옳다.[271]

학습의 핵심은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 답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 내는 것이다. 답은 이 탐험의 끝에 나타나는 보물이다.[271]

나는 살고 싶다. 삶만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 역시 내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건강한 변모의 예술이다. 학습은 지식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획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늘 버리고 늘 떠나는 것이기도 하다.[273]

 학습은 어느 순간 이질적인 삶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배움은 학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이든 음악이든 역사든 혹은 과학이든, 배움은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고 가슴에 안는 것이다. 낯선 소리, 낯선 얼굴, 낯선 삶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학습의 즐거움이다.[274]

누구의 이야기가 되었든, ‘우리가 결국 한 작품 속에서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은 한 인간의 삶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가능성’이라는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지적은 그래서 인상적이다.[274,275]

깨달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야(aletheia)’의 어원은 ‘촛불을 끈다’라는 뜻이다.[275]

이성의 작은 촛불을 끄지 않고는 대우주의 별빛을 볼 수 없다. 가까운 작은 산이 먼 큰 산을 가리고 있듯이 작은 지식은 늘 큰 지혜를 가리고 있다.[276]

“어둠이 가장 짙을 때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玄之又去 衆妙之門) -노자- [276]

스승은 등불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 불을 끄고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보게 되길 바란다. 제자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별빛을 보게 하는 스승만이 위대한 스승이다. ‘스승을 욕보이는 제자는 바로 영원히 스승을 빛나게 하는 자’다.[276]

전기작가로 유명한 스테판 츠바이크의 표현을 빌리면 니체는 ‘불꽃처럼 게걸스럽게 스스로를 불사르고 스러지고’ 싶어했다. 불꽃이야말로 바로 그였다. 그의 본질은 넘실대는 불꽃 같은 변화였다. 그에게 있어 완성에 이르는 길은 살인적인 자기파괴와 가지고 있던 믿음의 상실, 자기해체로부터 생겨났다. ‘자기처형’ 없이는 새로운 자기가 있을 수 없다. 단순한 자기변화로부터 스스로에게 반대하고 자신의 적이 되려는 데서 그의 기쁨이 생겨났다.[277]

들뢰즈가 가장 영향을 받은 것은 니체라고 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니체의 뒤를 덮쳐 사생아를 만들어내려고 하니까, 어느새 니체가 자신을 덮치드라.’고 했다. 그는 철학이란 ‘개념을 만들어내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사유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다. 아마 새로운 ‘배치’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기 위한 모색과 실험이 될 것이다.[279]

나는 그가 이질적인 것들, 다른 삶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뒤에서 덮친 모든 사람들의 삶을 자신 속에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사생아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들 속으로 확장해가고, 동시에 자신 속에 그들을 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 속에 여러 명이 있는 것이고, 그들 속에 내가 있는 것이다. 삶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접속되고 연결되고 내재화되고 확장되는 것이다. 이것이 학습의 즐거움 아닐까?[279]

그는 ‘다이너마이트’였으며, ‘광대’였으며, ‘모든 금지된 곳을 찾아나서는’ 유목민이었으며, 외부인이었고, 방랑자였다. 늘 ‘떠나는 사람이었으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을 잃어버리고 부정함으로써 자신에게 돌아 오는 것’이었다.[248]

배움은 결국 삶의 실천에 의해 가장 잘 얻어진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281]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혁명도 없다.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없다. 만일 하루를 춤추듯 보낼 수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매일 그럴 수 있으면 자신의 행복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이다.[283]

‘새로운 장르의 일상적 삶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약속한 실천적 개혁이고 혁명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의미 있는 신호를 보낼 수 있으려면, 내가 새로운 일상을 하나 만들어냈다는 사실 때문이어야 한다. 그 새로운 일상이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대안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때, 내 삶은 그들에게 의미 있는 사례가 될 수 있다.[283-284]

나이가 들면 잊는 게 더 많다. 자주 잊기 때문에, 어제를 잊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는 듯한 기분이 든다.[284]

하루는 실험장이다. 실험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실험장. 실험이 목적 그 자체가 되어버린 실험…… 내겐 이것이 하루다.[285]

학습은 뜨거운 무엇이고,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것이며, 인문학적인 감수성을 건드려야 하는 것이다. 목욕탕의 온탕이나 열탕과 같다. 나는 경영학과 인문학을 하나의 공간에 배치시킴으로써 훌륭한 휴식과 에너지를 제공하는 목욕탕을 만들고 싶다. 냉정하고 가혹한 경영 속으로 뜨거운 김이 솟구치는 인문학적 유산을 배치시킴으로써 돈으로 피폐한 영혼과 벌거벗은 몸을 돌아볼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나의 학문적 관심사다. 그것은 ‘현실세계 속으로 꿈을 침투’시키는 작업이었다.[286]

‘선비처럼 섬세하고 무사처럼 선이 굵을 것.[286]

자신을 닦는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나를 닦아 선비와 같고 무사와 같아진다면 아름다운 일이다. [288]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아경영 철학.’ 이것이 바로 내 학습의 중요한 테마 가운데 한 줄기를 이룬다. 또 하나의 줄기는 ‘변화의 기술’이다. 나는 이 테마 속에 조직의 진단부터 조직의 변화 모델로 이어지는 기술을 담으려고 한다. 변화와 철학과 기술, 이 두 개의 축을 나에게 적용해 봄으로써 변화경영을 하나의 예술로 만들어보려 한다. 아마 내 50대는 변화경영의 예술가가 되기 위한 수련과정이 될 것 같다.[288]

도전이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번 다른 실패를 딛고 나일 수밖에 없는 길로 운명적으로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첫 번째 도전은 실패를 이기는 것이다. 두 번째 도전은 실패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 도전은 매일 실험을 즐기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실패도 성공도 사라진다. 여행을 즐기는 자는 끝없는 호기심으로 새로운 세계에 탐닉한다. 그들은 춤추듯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288,289]

11장 일

모든 일에는 고객이 있다. 이것이 경영의 관점이다. 누가 내 일의 첫 번째 고객인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의 첫 번째 고객은 나다. 내가 내 일의 가장 최우선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내 일은 반드시 나를 만족시켜야 한다.[294]

하루가 내 연구의 기본단위다. 나는 날마다 무수한 반복보다 무수한 변화를 원한다. 그러므로 내 일은 반복을 거부하는 것이다. 수 없는 반복을 통한 훈련이 아니라 수 없는 변화를 통한 훈련이 내 방식이다. 나는 물결에게서 이 방식을 배웠다. 물결은 무수한 반복이 아니라 무수한 변화다.[295]

 일은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일이 품삯이어서도 안 되고, 삶의 다른 요소들을 희생시켜서도 안 된다.[296]

인생을 파괴하지 않는 직업, 삶을 빛내는 직업만이 훌륭한 직업이다.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인가는 무의미한 질문이다. 눈부신 삶을 살게 하는 일, 그 일 때문에 삶을 즐길 수 있는 일, 그것이 위대한 직업이다.[297]

어떤 이론도 어떤 조언도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설득하기는 어렵다. 변화는 오직 스스로 시작할 때만 효과적이며 그때에만 비로소 행복한 전환이 이루어진다.[297]

먼저 나에게 적용할 것. 반드시 성공할 것. 그 다음 상이한 조건에서 다른 사람이나 조직에 활용할 수 있는지 실험할 것. 내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을 나누어주려는 잘못을 범하지 말 것.[298]

나를 변화시켰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내 하루가 바뀌었는지를 물으면 확실해진다. 오늘을 놓치면 삶을 놓치는 것이다. 하루를 즐길 수 있으면 훌륭한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하나의 물결로서,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내가 나에게 바라는 목적이다.[298]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299]

글쓰기는 우선 모방이다. 많은 글을 읽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고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사업을 어떻게 하는지 두루두루 알아보는 것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사업가들은 그것을 정보를 얻는다고 표현하고 글 쓰는 사람들은 그것을 책 읽기라고 부를 뿐이다.[299]

얼마나 많이 모방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감동하느냐가 중요하다. 사업이든 글쓰기든 가슴이 설득당하지 않고는 자신의 철학이나 깨달음으로 전환하기 어렵다.[300]

열정과 가슴의 힘 없이는 현장의 바람에 대응할 수 없다. 설득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설득은 감정의 폭우를 필요로 한다. 감정을 담지 못하면 설득에 성공하기 어렵다. 열정을 가진 사람처럼 믿어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300]

모방의 또 하나의 요령은 ‘한 작품을 모방하면 표절이고, 여러 작품을 모방하면 연구다.’라는 노회한 충고를 기억하는 것이다. 많이 보고 많이 감동하는 것은 사업이든 글쓰기든 훌륭한 성과를 내기 위한 근면한 배움의 요결이다.[300]

글쓰기는 또한 혁명이다. 모방만 가지고는 좋은 글씨기로 완성되지 않는다.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연결해야 한다.[300]

죽어 있는 정신을 깨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흥미가 살아나고 열정이 살아나고 삶이 살아난다. 그리고 끊임없이 실험하게 된다. 실험이 곧 창의성이다. 글쓰기에서의 실험이나 사업에서의 새로운 시도와 모색은 다를 바가 없다.[301]

처음 해본다는 것은 기회를 선점한다는 것이다. 기회의 선점만큼 강력한 브랜드 전략은 없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글쓰기라는 재능과 변화경영이라는 전문경력을 결합시켜 이 분야에서의 경쟁력을 만들었다.[303]

 글을 쓰기 위해서는 늘 읽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정리해야 한다. 정리된 강력한 핵심 개념들을 연결함으로써 미래를 헌신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304]

강점은 꿈을 이루는 도구와 같은 것이다. 어떤 꿈이든 그것을 현실의 세계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적절한 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사나운 괴물을 퇴치해야 하는 영웅들이 신으로부터 빌린 날개 달린 신발이며, 뚫리지 않는 방패이며, 잘 드는 칼과 같은 것이다. 신화 속의 영웅들은 그것의 도움을 받아 결국 꿈을 이루고 죽은 후에 하늘의 별이 되어 빛나게 된다.[304]

나는 개인에게 있어 ‘변화라는 것은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본래의 자기란 무엇일까?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과 기질을 이해하고 그 강점을 계발하여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자기다움으로 돌아가는 좋은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306]

나를 깨우는 일에 능숙해지면 다른 사람들이 깨어나는 것을 도울 있다. 자기를 깨우고 다른 사람들을 도울 있다. 수신이 이윽고 가정과 공동체를 스스로 확장하게 된다.[306]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비결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싶어한다. 그 비밀은 니체가 ‘아곤(agon)적 행동’이라고 말한 경쟁의 행동에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선조들과 경쟁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 경쟁한다. 그리스인들은 이 경쟁의 힘을 ‘덕(virtus)’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기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금지의 미덕’이 아니라 ‘남성다움’, 혹은 정력적 힘‘을 상징했다.[309]

성공에는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받은 쪽지에 적힌 대로 끊임없이 익히는 것일 뿐이다. 손에 익고 머리와 가슴 사이에 어떤 괴리도 없이 자연스러운 강줄기가 흘러갈 때 우리의 것이 된다. 그때 성공은 우리의 특징이 된다.[310]

“유일한 사람이 되어라. 이것은 최고가 된다는 뜻이다. 유일한 자만이 최고로서 칭송 받을 자격이 있다. 최고가 된다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생을 모두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만이 성공할 수 있다. 이것저것 다 잘하는 매력적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성공은 늘 한 길로 간 사람들의 것이다. 적어도 나는 한 길을 가기에도 숨이 차다. 다른 것들을 넘볼 시간도 여유도 없다. 나는 그저 내 일만 해도 저녁에 이미 탈진한다.[311]

이것저것  다 잘하는 매력적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성공은 늘 한 길로 간 사람들의 것이다. [312]

유일한 사람이 되는 길은 신의 쪽지, 즉 ‘자신에 대한 기록’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다. 자신만이 유일함의 원천이다. 자신을 활용하지 않고는 유일함에 도달할 수 없다.[312]

유일함을 수련하는 방식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깊숙한 곳에서 잠에 취해 있는 자신을 깨워내는 것이다. 그것은 대개 아주 깊은 산중에서 잠에 빠져 있기 십상이다. 게으르고 잠을 즐기고 눈치를 보고 비겁하고 교활하지만, 아직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견하지도 못하고 발휘할 줄도 모르는 미숙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이 내면의 영웅이 스스로 일어나 초려에서 나오도록 설득해야 한다.[312]

누구든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인물을 얻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 자신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살려내지 않고는 내면에 숨어 있는 영웅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는 것, 이것이 가장 처음 해야 할 일이다.[313]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는 것. 이거이 가장 처음 해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내면에 숨은 자신의 영웅을 얻어야 한다.[314]

세일즈와는 달리 마케팅은 아주 적극적인 수동성이다. 사람들이 찾아낼 수 있도록 곳곳에 꽃을 피우고 향기와 매력을 뿌려두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은은함이며, 숨겨져 있음이며, 힌트며, 감각적 포착이며, 눈빛이다. 아주 작은 나라는 소우주로부터 또 다른 세계로 쉬지 않고 시그널을 보냈다.[315]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가슴이 뛰지 않으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일이 사랑이 되지 않으면 그 일은 내 일이 아니다.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다른 여자를 향해 달아나는 애인처럼 한대 사랑했던 그 일은 이제 벗어나고 싶은 지루함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늘 새롭게 사랑하는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317]

내가 쓰는 글은 짧고 감동적이어야 한다. 감동이라는 껍질에 싸여 있는 씨앗이다. 그것은 적대감이라는 위액과 소화액에 녹아 없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발아할 수 있는 장소까지 이동해야 한다. 피와 영혼과 정신의 어느 부분을 건드려 그들 역시 알 수 없는 환상과 내면의 열정 속에 빠져들게 해야 한다. 열정이란 심장과 감정과 창자로부터 생겨난다. 참다운 자신이 되는 자유는 ‘자유로운 공기를 들이켠 허파의 외침’이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감동이며 환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 속에서 위대한 힘을 감지하게 만들어야 한다.[317]

강연은 쏟아내는 작업이다. 쏟아내는 것이 들어오는 것보다 많으면 이내 밑천이 딸리게 마련이다. 이것은 치명적 결함이다. 지적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너무 바쁘면 안 된다.[319]

지식은 늘 새로운 지식으로 전환되며 새로운 체계로 진화한다. 새로운 연합을 모색하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강연은 이런 지적 프로세스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늘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할 수 없다면 강연자는 스스로를 교살하는 셈이다. 자신의 목에 감긴 밧줄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당기는 행위가 바로 쏟아냄이 들어옴을 초과하는 지식 유출을 방관하는 행위다. 1년이 되지 못해 그의 지식은 낡은 것이 된다. 그리고 충전이 불가능한 배터리처럼 폐기된다. 이를 경계해야 한다.[320]

강연은 하나의 지적 퍼포먼스다. 내가 먼저 그 내용에 만족해야 하고, 청중의 개인적 관심사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이 관심을 갖는 주제 속에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많은 사례들을 잘 포진시키는 것이 흡착력 있는 내용을 이루는 기본적 구성이다.[322]

“모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목표여서는 안 된다. 내 목표는 그 이상이다.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표, 그것은 반드시 청중 속의 누군가를 움직여 스스로 자신의 고뇌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욕심을 내서는 안된다. 적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강연장을 떠나 그들이 일상 속에서 변화를 실천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하루 속에서 실천되지 않는 변화는 변화가 아니다.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강연은 실패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좋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331]

나는 그들의 시시한 삶, 평범한 일상에 대한 분노의 불길을 부추기고 타오르게 하는 묘한 입김으로 속삭이는 자여야 한다.[336]

 사랑이야말로 많은 흥분과 미움과 증오와 눈물로 짜여진 옷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변화는 자신에 대한 치열한 사랑이다. 치열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다.[337]

그저 불꽃놀이처럼 들뜨게 하다가 되돌아와 풀이 죽어버리는 작은 위안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강연’이 되지 못한다.[338]

내 강연의 목적은 그들이 자기 자신이 되어 스스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그들이 되어 그들의 마음으로 그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의 속에서 그들만의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것이다.[338]

어제의 진실은 오늘의 진실이 아니다. 늘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는 정신은 죽은 것이다.[340]

내가 하는 일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아직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때 잠시 ‘우연한 쏘시개 불꽃’이 되는 일이다.[342]

자신의 꽃씨를 뿌리게 하는 것,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신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심어주는 것,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나는 조용한 선동가다. 모든 씨앗들에게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 꽃이 무슨 꽃인지는 피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꽃이 다른 꽃들과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을 선동한다. 그리고 그 꽃을 피워내 이 세상에 그 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삶이라고 선동한다. 꽃씨와 불씨가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하는 비즈니스다. 내가 자연으로부터 배운 방식이다.[343]

세 개의 에필로그

나는 세 가지 종류의 시간의 강줄기를 만들어 냈다. 하나는 나를 위해 흐르는 시간의 강이다. 또 하나의 시간의 강줄기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다. 세 번째 시간의 강줄기는 세상과 내가 만나는 시간이다.[349]

나는 새벽을 가장 많이 활용했다. 내 책들은 모두 새벽이 만들어낸 생각의 세계였다. 밤의 생각은 지나치게 자유롭고 낮의 생각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나는 새벽의 생각을 좋아한다.새벽의 생각은 밤의 이상주의가 꿈으로 빚어낸 생각이고, 앞으로 다가올 낮 동안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다. 현실속에서 이루어진 꿈….나는 이 달콤함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350]

끝없는 새로움으로 아침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 내 목적이기 때문이다. 내 하루는 한 개의 꽃이다.[354]

자연은 무수히 쏟아내고 선택한다. 이것이 바로 자연이최선을 골라내는 방식이다. 하루는 그 실험을 하기에 적합한 시간이다. 내 하루들은 바로 그 거북의 새끼들이었다.[354]

시간은 돈이 아니다. 시간 자체가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삶이다. 내게는 팔아야 할 시간이 더 이상 없다. 나는 내 마음대로 내 시간을 쓴다. 하루에 몇 시간은 책을 볼 수 있고 적어도 두 시간은 쓴다. 나는 정신적 여행자이다.[355]

 나는 삶이 일종의 예술이길 바란다. 나의 일상은 안정과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나는 그 일을 아주 잘할 수 있을 때까지 매일 나를 실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356]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준 세계 속에서 그 세계의 끝을 예견하는 참담한 현실주의를 증오한다. 현실이란 결국주어진 상황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불과한 것이다. 나의 의견을 말하라. 나의 의견,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라.[358]

일 년에 한 권씩 책을 쓰는 것은 내 목표가 아니었다. 그건 그저 즐거움의 결과였다. 목적을 가진 야심작이 아니라 내가 하루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하루 자체를 빛냄으로써 인생 전체를 빛나게 하고 싶었다.[361]

하루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생활고나 가난 때문이 아니다. 즐길 수 있는 자신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363]

나는 돈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는 없다. 그러나 내 일을 가지고, 내 일의 특성으로, 다른 사람이 스스로 삶을 불지를 수 있도록 잠시쏘시개 불꽃역할을 할 수 있다. 1인 기업이든 대기업이든 기업은 반드시 먼저 본업으로 고객을 도와야 한다. 돈만 추구하는 기업이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번 돈의 일부를 사회기금으로 내놓았다고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더 큰 범죄를 위한 사소한 속죄의 형식을 뿐이다. 돈이 면죄부 역할을 하는 것을 타락이라 부른다. 본업으로 사회를 도와야 그 일 자체로 의미와 보람이 된다.[363,364]

 아름다운 그날 하루를 내 삶의 국경일로 정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아름다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경영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결국 자신의 주인을 닮게 되어 있다.[364]

내가 저자라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전에 읽은 기억이 없었다. 아마 부분에서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마흔다운 것은 건망증이다.” 라는 책의 귀절을 읽지 않았다면 , 두고 다니는 물건이나 책을 읽고도 남는 부분보다 잊어 버리는 부분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40대가 익어가는 증상으로 받아 들이지 했을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책을 다시 읽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책은 그대로인데 받아 들여지는 내용은 그의 이야기에서 나의 이야기로 전환 느낌이었다.  그렇게 느끼는 가장 이유는 30 때에는 공감하지 했던 부분을 마흔이 넘어선 지금에서는  내가 겪는 현실의 여러 문제들과 맞물리면선 울대가 먹먹할 정도로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독자와 저자가 하나가 되어 공감하고 저자가 주는 메세지를 독자가 받아들여 실천하고 용기를 주는  그와 같은  글을 쓰고싶다.  그래서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책의 구성

1장에서 11장으로 역어진 책은 사고의 범위도, 문장의 형태도, 전체적 구성도 특별한 구속 없이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목차였다.   굳이 나누어 보자면 1지난 10” 2마흔 ’ 3직장생활 세장에서는 40대에서 위협 받는 모든 일에서 자유로와지고 싶어하는 그를 만났다. 처음 날개 짓을 시도하는 어린 처럼 돌연한 출발을 위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개짓이 시작되었다.

4얼굴 5가족 에서는 그의 일상이 눈을 감고도 보일 것만 같았다. 마치 눈이 보이는 사람에게 본인의 초상화와 가족사진을 그려 달라고 부탁을 하듯 풀어 놓은 그의 세밀한 정밀묘사에 친근감으로 가깝게 그에게 다가간 시간이었다.

6자연’ 7건강 자연과 하나가 되어 가장 마음이 편안 상태를 유지하며 건강하게 나무처럼 살다 가고 싶은 그의 소망이 담겨져 있다.  하나의 씨앗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변화를 그는 강물에게,구름에게 바다의 물결에 묻고 있다. 그는 자연에서 답을 찾고 있었다. 그것이 존재의 양식이기 때문이라 그는 말한다.

8길에서’ 9,공간  그는 가장 편하고 익숙한 공간에서 씨앗을 움티워 꽃을 피우며 그만의 하루를 살며 가꾸어 나가고 있었다.

10학습’ 11 장에는 탐험 , 혁명 이런 단어들이 보여진다. 혁명사 연구가 꿈이였던 그의 40 현실을 살아가는 놀이와 , 생각과 삶이 전달되는 장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나니 10년에 걸친 성찰과 사색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책이었음을 다시 느낄 있었다.

 

마음에 닿은 글귀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이 속절없이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러나 마흔조차 흘러간다. 무엇을 했단 말인가! 무엇을 이루는 것이 스렇게 중요한 것이지 없다. 그러나 분명하 것은 마흔 살은 성취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라는 점이다.[32]

>>  연구원을 도전하는 과정도 나의 성취의 조각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열심히 즐기고 있다.

마흔 살이 되면 문제를 끼고 살아가는 것이 일상적이다. 그러니까 빼도 박도 하는 시기다.[48]

>> 100% 공감하는 문장이다.

가슴이 뛰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가슴이 뛰지 않으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일이 사랑이 되지 않으면 일은 일이 아니다.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317]

>> 나는 심장이 뭐든 먼저 말해준다. 내가 기분 좋은 일은 언제나 심장 박동이 힘차게 뛰면서 가슴이 떨린다. 나를 떨리게 하는 일은 주저없이 밀고 나간다.  그것이 일이던, 취미던  아니면  막춤이던……

사소한 나의 일상과 가슴 떨리게 하는 일들을 모아 me- story 엮는 날을  꾸어 본다.  불혹의 나이에 이런 꿈을 꾸며 다시 시작 보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번 기회에 책을 다시 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뻔했나!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다행이다   마음이 들었다.

문득 이적의다행이다가사가 떠오른다.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게 ….  언제나 나의 곁은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라는 . “

평균 수명80 이라는 나이를 향해 뛰는 울트라 마라톤의 코스에서 목마르고 지쳐 주저 앉고 싶을 나에게 건내준 통의 생수 같은 책이었다. 이제 마라톤의  반을 뛰고 반환점을 돌았다. 다시 목이 마를 나에게 힘과 생기를 주는 귀중한 물처럼 책은 나와 함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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