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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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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9일 09시 29분 등록

Ⅰ. 저자에 대하여

‘멸망한 제국(중국, 그리스, 페르시아, 터키, 로마 등)에서 핏줄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는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역사와 문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바닷가를 늘 서성이고 있다. 나는 중국의 서예, 과학, 시, 경극, 철학, 자연주의, 유교에 매력을 느끼는데, 그 까닭은 그 모든 것이 어릴 적 내가 겪었던, 제3세계라는 절망적인 중국의 현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제국의 미래 p110 인용)

이것이 내가 ‘제국의 미래’를 집필 하게된 하나의 모티브이다. 나는(에이미 추아 본인)현재 예일 대학교 법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곤한다. 법학교수 신분인 사람이 전공과는 다른 내용의 이슈로서 책을 내는 이유가 있는지? 그럴때면 나는 이렇게 답변을 하곤한다. 나의 화두는 자유인이다. 생명이다. 존재이다. 세계이다. 정체성이다. 그리고 민족과 나라이다 라고.

나는 중국계 미국인 2세이다. 모든 이주민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어릴 때 나의 태생지와 현재의 조국과의 괴리감에서 느끼는 이질감으로 인해 많은 고민을 했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톡특성을 나타내는 개별의 표징과 함께 따돌림을 받는 대상으로서도 인식이 되었으니까. 부모님은 우리들에게 항상 중국인의 혈통과 존재를 인식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을 하셨다. 하지만 외모에서 피부색에서 오는 괴리감과 그로인한 모순감은 나의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마도 이런 가치관 덕분에 오히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상대적 배려와 이곳을 넘어선 또다른 세계상에 대해서 일찍이 눈이 뜨이게 된것 같다. 이런 나자신에게 언제나 공동체를 형성하게 해준 원천은 가족 이었고, 그중 아버지란 역할은 나에게 존재 그자체이자 모델링 이셨다. 아버지는 아메리카라는 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그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염원을 하셨었다. 이런 아버지의 사고방식은 물론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었다. 세계 제일의 나라이자 문명의 첨단을 걷는 나라. 그리고 노력을 통한 신분 상승이 얼마든지 가능해 전문직 역할을 통한 이미지 변신의 꿈을 나에게 심어준 것이다. 오직 근면성과 성실함으로 대학교 교수가된 아버지가 그대상의 표본으로서 나도 또한 그뒤를 잇고있다.

세상은 일장일단이 있는것 같다. 어릴 때의 존재의 정체성으로 고민을 하던 문제들이 성장을 하면서는 오히려 다양한 시각과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니. <불타는 세계>를 출간 하였을 때 세상은 나에게 많은 주목을 하였었다.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책은 단지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를 부르짖을 때 또다른 시각이 있음을 알려주려고 했을 뿐이다. 일률적인 선택적 편견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을까? 그것은 이책에서 소개한 선택적 편견이라는 개념에서 설명이 될것이다. 즉,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논지에 부합되는 사례들은 선택하고 그렇지 못한 사례들은 무시하여 자신의 논지를 증명하는 방식을 말이다.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에 나는 난생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부모님에게서 듣던 책에서 보았던 중국의 위대한 문명을 확인할수 있기를 기대 했었는데, 솔직히 방문을 통한 그때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오랜 역사와 함께 한때 세계의 중심 이었다는 자부심과는 달리 참담한 중국의 현실은 나에게 많은 의문점을 안겨 주었다. 중국과 같은 제국의 성장요인은 과연 무엇인가? 왜 그들은 패망하게 되었을까? 앞으로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것인가? 이런 화두가 결국은 ‘제국의 미래’를 집필하게된 밑바탕의 근간이 된것같다. 그리고 또하나 간과할수 없는 사실은 내가 현재 살고있는 조국인 미국을 위해서도 이것은 필요한 작업이리라 여겼었다. 이제까지도 그랬었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세계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미국은 누릴 것이다. 다만 이책에서 언급한것처럼 변화 되어가는 세계속에서 미국의 또다른 리더로써의 역할상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책에서 주장한대로 나는 다양성 속에서의 ‘관용’을 생활속에서 실천하고 싶었다. 그중에 하나가 유대계이자 미국인인 나의 남편과의 결혼(?) 이었다. 아버지의 경고 -아버지의 살아오신 배경과 사고방식으로서는 당연 하셨겠지만 - 가 있었지만 이같은 결혼의 밑바탕에는 인종적, 종교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나의 내면의 발로의 표현방식이 자리잡고 있었지않나 여겨진다.

제3세계와 이슬람권 또는 일부 다른 나라에서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해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책을 통해 소개된 미국의 초강대국으로의 영속성을 앞으로도 염원하는 나에대한 시각의 우려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할수 없는 당연한 사실중에 하나는 현재 미국의 역할만큼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로인해서 나는 미국의 또다른 역동성과 도덕성의 리더십을 기대하는 것이다.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서문 - 세계 제패의 비결

p5~6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느냐 못하느냐는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 영국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주장대로, 인종 학살과 불량 국가, 그리고 “자유주의 세계 질서를 파괴하는 테러리스트 조직”을 분쇄하기 위해서 21세기는 “미국제국”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초강대국 미국은 세계 평화와 세계 안정을 위협하는 존재일까?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의 쇠퇴는 실업, 생활수준의 하락, 공격 위협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일까?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역할은 역설적으로 세계의 분노와 테러리스트들의 더 가혹한 공격 대상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 미국의 미래를 파멸로 몰아가는 것일까?

제국의 조건

p6~7

1. 투키디데스는 민주주의야말로 아테네가 몰락한 원인

2. 에드워드 기번은 기독교를 로마 쇠퇴의 주요 원인

3. 초강대국이라는 매우 희귀한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책은 아직까지는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초강대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을 축적하여 세계를 지배했던 극소수의 사회들을 이르는 것이다.

4. 한 사회는 어떤 경로를 거쳐서 단순한 대국이 아니라 세계적인 패권을 휘두르는 강국이 되는 걸까? 한 사회가 그런 패권을 손에 넣었다면, 무엇이 그 패권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과거 초강대국들의 성장과 몰락 과정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들이 들어 있다. 이 교훈들은 미국과 과거의 초강대국들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21세기에도 커다란 함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5. 이 책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초강대국들은 절대적인 우위에 오르기까지는 하나같이 대단히 다원적이고 관용적인 나라들이었다. 모든 초강대국들에게 관용은 패권을 장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제국의 쇠퇴는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쇠퇴의 씨앗을 뿌린 것 역시 관용이었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초강대국들의 경우 관용은 결국에는 극적인 변화 지점을 건드려서 반목과 폭력을 유발했다.

p8~9

1. 로마는 ‘자신의’ 세계안에서 패권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안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스텍과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2.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취급할 나라 혹은 제국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① 그 나라의 권력은 동시대의 경쟁국들이 장악한 권력을 분명히 능가해야 한다.

② 그 나라는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경제력, 혹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③ 그 나라는 지구상의 방대한 구역과 방대한 인구에 대해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3. 이 책의 대부분은 초강대국이라는 조건에 부합하는 사회들을 고찰하고 각각의 나라들이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관용이 어떻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밝히는 데 할애될 것이다.

p10~12

1. 내가 이야기하는 관용은 정치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의미. 내가 앞으로 사용하게 될 관용이라는 단어는 아주 이질적인 사람들이 특정한 사회에서 생활하고 일을 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 좀더 명확하게 이야기 하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용은 인종, 종교, 민족, 언어 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개인이나 집단이 그 사회에 참여하고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일컬음

2. 이 책의 핵심적인 개념은 ‘상대적인’ 관용.(경쟁자들과 비교해서 더 관용적이냐 아니야 하는것)

3.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관용이 세계 제패의 ‘필수’조건이라는 것, 그리고 역으로 말하면, 불관용은 초강대국의 쇠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것

미국, 제국을 꿈꾸는가?

P12~17

1. 미국은 관용을 통해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성장한 전형적인 사례

2. 미국은 처음부터 종교적인 자유에 대한 대단히 혁명적인 공약과 다양한 국적을 가진 온갖 계층의 개인들에 대한 유난히 개방적인 시장 제도를 통해서, 수천만에 이르는 이민자들의 활력과 재능을 유인하고 보상하고 활용했다.

3. 어느 평론가에 따르면, 미국의 “21세기형 제왕권은 자유시장과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꾸밈을 내세우고, 이것들을 세계에 존재해온 군사력 가운데 가장 무서운 군사력을 동원해서 집행하는 권력

4. 지금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비록 새로운 형태이긴 하지만, ‘제국’의 연륜만큼이나 오랜 연륜을 가진 문제, 즉 과거의 세계적인 패권 국가들 대부분을 무너뜨린 근본적인 문제이다. 나는 이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 문제를 ‘접착제’라고 부를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의 결정적 실수

P18~21

1. 미국의 정체성을 하나의 고유한 인종 집단 혹은 종교 집단에 묶어놓으려는 시도는 미국의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헌팅턴은 어떤 인종 혹은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도 WASP(앵글로색슨계의 백인 개신교도)의 가치관을 채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의 참된 정체성을 WASP 문화와 WASP의 시민적 가치관이라고 규정하는 헌팅턴의 태도야말로 미국의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언행.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헌팅턴은 미국이 안고 있는 접착제의 문제는 국내가 아니라 국외에 존재한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2. 로마제국은 피정복민들 가운데 핵심적인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세계 패권 국가의 전형적인 사례. 로마는 고대 제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멀리 떨어져 있고 몹시 이질적인 민족들에게 엄청난 흡인력을 발산하는 정치적 동맹과 문화 상품을 제공

3. 미국은 로마보다는 ‘야만적인’ 몽골제국에 훨씬 가깝다.

역사, 제국을 만나다

P21

1. 선택적 편견 개념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논지에 부합되는 사례들은 선택하고 그렇지 못한 사례들은 무시하여 자신의 논지를 ‘증명’하는 방식을 의미

2.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고대의 종교들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불관용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3. 12장. 2,500년간 역사상의 모든 초강대국은 하나같이 똑같은 두 가지 도전에 직면

그 한 가지는 자국의 성장에 연료를 공급했던 관용을 유지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자국의 지배를 받는 민족들에게서 충성심, 아니면 하다못해 묵인이라도 확보할 수 있는 공통의 결속력을 형성하는 문제

4.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것뿐

<1부 고대 제국의 관용>

1장 최초의 패권 국가, 페르시아 - 아케메네스

P33~34

1. 파라다이스paradise는 원래 페르시아어.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실 정원과 유원지를 ‘pairidaeza'라고 불렀고, 그리스 사람들은 이 말을 ’paradeisos'로 옮겼다. 가장 먼저 구약을 번역했던 그리스 번역자들은 에덴동산과 내세를 뜻하는 말로 이 단어를 썼는데, 이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파라다이스가 인간이 지상에 복제해온 천국 가운데 가장 천국에 가까움을 암시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2. 아케메네스 왕조는 대략 기원전 559년부터 330년까지 강력한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했다.

3. 파라다이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전체의 현황을 드러내는 생생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4.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은 로마제국은 물론이고 고대의 그 어떤 제국보다 큰 영토를 다스렸던 역사상 최초의 패권 국가

아케메네스 왕국은 어디인가?

p36

'이란‘ 이란 이름은 ’아리아의 왕국‘ 이라는 뜻

키루스의 전략적 관용

p38~44

1. 아케메네스 왕조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키루스 대제로부터 시작

2. 키루스가 썼던 전략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참수慙羞’ 전략

:지도력을 잘라내는 전략. 그는 새로운 왕국 정복시 그곳 통치자를 내쫓되 그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장해주고, 그대신 주 혹은 군을 다스리는 총독인 사트라프를 세움. 사트라프는 대부분 페르시아 귀족. 하지만 키루스는 사트라프 치하의 백성들에게는 거의 간섭하지 않고 그들이 고유의 신들과 다양한 문화를 누릴 수 있게 함

3. 가장 놀라운 것은 키루스의 종교적 관용

4. 키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바빌로니아에 입성하자마자, 그곳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마르두크 신 앞에 엎드려 절을함

5. 이사야서는 키루스를 여호와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묘사. 여호와는 신이라는 뜻의 유대어

6.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의 역사학자들 대부분은 키루스가 사용했던 관용 정책은 원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전략과 편법에 의한 것이었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 키루스는 해당 지역의 신을 포용함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고, 해당 지역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함으로써 피정복민의 저항과 반란 가능성을 줄였다.

다리우스, 모든 민족의 왕이 되다

p45~48

1. 아케메네스 왕조는 다리우스 대제 치세에 전성기를 구가

2. 제국의 다언어 문화를 존중, 페르시아의 신들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음, 각 지역의 사회구조를 대부분 그대로둠

3. 피정복민의 지배층은 대부분 페르시아 왕을 이방의 통치자나 압제자로 보지 않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 그리고 사회질서를 지켜줄 인물로 보았다.

4. 다리우스가 이런 관용적인 정책으로 얻은 이득은 엄청난것

:피정복민을 죽이거나 페르시아화 하는데 자원을 낭비하지 않았고, 그들이 가진 다양한 기술과 재능, 자원을 이용. 그것이 다리우스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화려한 제국의 수도들을 건설 할 수 있었던 비결

p49

1. 제국을 이루는 다양한 민족으로부터 최고의 인력을 동원하는 것은 다리우스만이 아닌 아케메네스 왕조의 모든 제왕들이 보여준 특징적인 전략

2. 아케메네스의 왕들은 엄청난 보수를 제시하며 뛰어난 그리스 사상가들을 유혹

3. 주목해야 할 것은 관용이야말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단을 꾸릴 수 있었던 유일한 비결이었다는 점

p50~52

1. 다리우스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사람은 누구든 잡아다 말뚝에 꿰어 죽이는 것을 즐김

2. 아메메네스 왕조의 관용은 현대적인 의미의 평등과는 거리가 먼것

3. 아케메네스 왕조가 200년동안 전례 없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관용 정책 덕분. 해당 지역의 법률과 전통을 포용하고 해당 지역의 언어, 종교, 예식을 용인하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피정복민의 반항과 반란을 최소화. 인종이나 종교에는 개의치 않고 제국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장인들, 사상가들, 노동자들, 전사들을 할용하여 문화적 다양성을 통합력과 국력의 원천으로 변화시켰다.

고대 문화의 축소판, 아케메네스

p53~54

1. 아케메네스 왕조의 문화는 놀라우리만큼 범세계적

2. 정복된 여러 민족의 건축양식이 융합되어 있는 웅장한 아케메네스 왕궁 역시 전체 왕국의 현황을 응축하고 있는 상징

3. 아케메네스 왕조가 권력을 확실하게 과시하기 위해서 썼던 전략은 민족과 문화적인 측면에서 제국이 가진 막대한 다양성을 보존하고 통합하고 개발하는 전략

최초의 패권 국가의 몰락

p54~59

1.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폭군으로 취급. 크세르크세스의 전제적인 통치기. 이때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몰락이 시작

2. 아케메네스 제국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후기로 접어들면서 아케메네스 왕들의 잔혹성과 억압이 강화된 것이 피정복민의 반란과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지지를 유발했다고 설명

3. 아케메네스 왕조 후기가 불관용, 불안, 폭력의 증대라는 특징을 보임

:이 책의 기본 논제와 일치

4. 중요한 사실은, 키루스와 다리우스가 방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관용이 후일에 싹틀 불관용의 씨앗을 뿌려놓았다는 점이다.

5. 제국이 팽창함에 따라 병합되는 민족과 문화의 수는 크게 늘었지만, 이들 민족과 문화는 페르시아의 대군주 밑에서 여전히 별개의 공동체를 유지.

페르시아제국은 군사적으로는 통합되었지만, 현대 국가들과 같은 지배적인 정치적 정체성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급속히 뻗어나가는 제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의 종교나 언어, 또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던것. 아케메네스 제국의 피정복민들은 대부분 제국에 대해 특별한 충성심을 느끼거나 제국에 소속된 것에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케메네스 왕조에는 다양한 민족들의 마음을 움직여 공동의 규범을 옹호하게 할 만한 특성이 없었다.

6. 요컨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중심에는 강력한 분열의 힘이 자리잡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 덕분에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강화해왔던 각각의 민족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반감을 쌓아가다가 결국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이질적인 민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관념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중되어 있던 권력은 결국 지배력을 잃게됨

알렉산드로스가 꽃피운 헬레니즘

p61~66

1.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에 입성했을 때 이방의 정복자로 처신하지 않고, 살해당한 다리우스의 원수를 갚은 복수자이자 아케메네스 왕조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처신

2. 학자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이런 집단 결혼식을 주도한 동기를, 자신을 아케메네스 왕조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부각시키고 지배 계층의 혈통을 섞으려는 의도로 분석

3. 기원전 342년 세계의 패권은 페르시아의 손에서 그리스인의 손으로 넘어감.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혹은 마케도니아의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린 통치자

4.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덕분에 그리스의 언어, 문학, 미술, 건축, 철학은 지중해를 건너 여러 대륙,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5. 야만인의 사상이 그리스어로 옮겨져 제국에 흡수되었고, 이를 통해 혼성문화가 탄생했다. 헬레니즘이라고 알려진 이 문화는 이후 기독교와 서구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페르시아 와들은 결코 이룩하지 못했던, 대륙을 가로질러 형성된 고도의 문화적 통일체

2장 팍스로마나, 세계인의 탄생 - 로마

p68

1.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전쟁 조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로마제국은 하나의 관념idea이었다. 로마제국의 외떨어진 변방에 사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로마인이 되기를 원했고, 실제로도 그들은 로마인이 되었다.

2. 오르비스 테라룸, 즉 ‘세계’ 곳곳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상인들, 군인들, 관리들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3. 로마의 통치자들은 정복 면에서나 잔인성 면에서나 역사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달력 가운데 7월July과 8월August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이름이 붙었고, 칼리굴라의 이름은 전제주의와 악행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코스모폴리탄 로마

p71

1. 로마제국에는 각 지역의 지배층이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상한선이 없었다.

2. 스페인 여성의 몸에서 태어난 트라야누스는 속주 출신으로 로마 황제가 된 최초의 인물인데, 그의 즉위는 제국의 고위직이 ‘인종과 국적을 따지지 않고, 교양을 갖춘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

3. 최고 절정기의 로마는 ‘야만인이나 미개한 민족’ 출신도 정치 과정에 참여하고 제국의 권력과 명성에 한몫할 수 있었던 독특한 문화를 갖추고 있었다.

4. 로마가 관용적인 입장을 택하게 된 데에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큰 영향을 미침. 그리스의 편협한 태도와 인종 분리 정책은 분노를 일으킴

5. 로마제국은 관용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냄. 1790년 미국 헌법의 기초자 중 한 사람인 대법원 판사 제임스 윌슨에 따르면, ‘로마인들이 자국의 힘을 전 세계로 확장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주민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윌슨은 로마가 전략적으로 채택했던 관용이야말로 ‘제국을 확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이다.

p75~78

1. 로마는 정복한 적들의 도시를 파괴하거나 약탈하는 대신 평화조약을 제시했으며, 그 조약이 거부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정복된 도시는 자체의 법률에 따라 자체의 지도자에 의한 통치를 지속할 수 있었으나, 두 가지 조건만은 감수해야 했다. 첫째, 각 도시는 로마와는 자유롭게 교역을 할 수 있으나, 상호 간에는 자유롭게 교역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소규모 도시국가들의 로마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이 급격히 심화되었다. 둘째, 각 도시는 로마에 병력을 공급해야 했다. 이런 평화조약 덕분에 로마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크게 성장했다.

2. 포에니전쟁은 로마의 전략적인 관용 정책이 거둔 개가. 카르타고의 한니발의 예상과는 달리 로마의 동맹국들은 수없이 이어지는 고된 전투 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고, 결국 로마는 승리를 거두었다.

3. 로마 황제들은 직접 통치를 하면서도, 급격한 경제적, 사회적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주민들의 생활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4. 피정복민의 지도자들에게 시민권을 주었으며, 로마 법률에 저항하는 나라는 가혹하게 응징

네 명의 위대한 황제

p78~83

1. 트라야누스부터 시작되는 네 황제의 재위 기간이 전성기에 포함된다는 데에는 대부분 합의하고 있다.

2. 대제국 로마는 현대의 시카고학파가 우쭐대면서 떠벌리고 있는 전지구적인 차원의 경제와 자유무역, 시장 개방을 일찌감치 실현한 본보기

3. 아주 외떨어진 제국의 변두리에서 뛰어난 기술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냈다. 또한 로마는 특별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

p86~90

1. 로마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야만인들을 모조리 제국으로 끌어들임. 그들은 야만인들의 재능을 활용하고 그들이 로마 내에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게 했으며 대부분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

2. 로마는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민족들을 통합하고 그들이 로마제국을 위해 움직이게 만들었을까?

로마제국의 가장 흥미로운 면모는 사람들이 로마제국에 대해 매력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브리타니아에서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피정복민들은 하나같이 로마제국의 성원, 즉 ‘로마인’이 되고 싶어 했다.

로마에 속한 다양한 민족들에게 로마는 ‘코무니스 파트리아’, 즉 공동의 조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실 로마문명은 다른 어떤 문명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정복된 민족의 지도 계층을 멸시하거나 억압하는 대신 로마 문화를 권력과 특권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도록 유혹했다. 각 지역의 지도 계층은 자식들을 로마에 있는 학교에 보냈고, 이 아이들은 자라서 로마 시민이라는 공동체의 충실한 성원이 되었다.

3. 로마인들은 또한 유용하다는 판단이 서기만 하면 서슴없이 다른 민족들의 전통과 지식, 관습을 받아들임. ‘로마인들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모든 민족들과의 싸움에서 이겼을 뿐 아니라, 더 나은 관습이 눈에 띄기만 하면 서슴지 않고 자신의 관습을 버린 덕분이었다.’

4. 그리스 문명을 본보기로 삼았던 로마제국은 도시, 즉 폴리스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5. 로마 문명은 하나의 문화적인 용광로였으므로, 각 지역의 지도 계층은 엄청난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6. 주목해야 할 점은, 로마는 그리스 로마 문화를 성공적으로 수출하면서도 각 지역의 언어나 전통을 말살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로마는 언어학적인 면에서나 문화적인 면에서 볼 때 대단한 유용성을 아우르고 있었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같은 로마제국의 대도시들은 지금의 뉴욕이나 런던처럼 여러 언어가 통용되는 다원적인 도시였다. 로마 문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로마 시민권이라는 유혹이었다. 시민권 부여 정책을 통해 각지의 지도 계층은 서서히 로마의 체계에 동화되었고 로마 법률에 동조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이익이 제국의 존속에 결부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전 세계 만민이 토가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다’

p91~93

1. 로마가 다른 민족들을 자국 내로 편입시키는 전략을 쓰면서 추구했던 목적은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여 다양성을 고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민족들을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로마의 관습, 생활양식, 풍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인종적인 혈통에 관계없이 어떤 집단이든 완전히 제국에 통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로마는 너그러운 나라였다.

2. 로마의 관리들은 정복한 민족의 지도 계층에게 로마의 규격화된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고, 이에 순응할 경우에는 이를 보상해주는 정치.경제제도를 만들어냈다. 주목해야 할것은 출신 민족과 인종은 로마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국으로 흘러드는 새로운 민족들의 끝없는 대열을 통합시키고 동화시키는 로마의 적극성과 능력, 이것이야말로 로마가 위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종교적 관용과 유일신교의 반격

p93~95

1. 전성기 로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종교에 대한 코스모폴리탄적인 관점이었다.

2. 관용은 상호의 종교적 자유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화합까지 탄생시켰다. 로마가 각 지역의 종교에 대해서 요구한 유일한 조건은 로마 당국과 공식적인 의식을 존중하라는 것이엇다.

3. 로마 사람들은 각 지역의 신들을 제국의 종교 제도 안에 통합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유일신 종교로서 로마의 우상숭배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대교와 기독교의 반란은 매우 격렬했다.

세계 재패의 꿈이 사라지다

p98~102

1. 로마제국 쇠퇴의 원인

첫째, 관용은 로마가 세계적인 대국으로 발전하고 팍스로마나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땅에 뿌려진 궁극적인 붕괴의 씨앗이었다. 그들의 관용정책은 전성기에는 로마에 이롭게 작용했다. 그러나 동쪽과 북쪽의 민족들은 로마의 관용정책 덕분에 예전의 사회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자율성을 누리면서 상대적으로 ‘로마에 동화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차츰 제국의 통치에 반발하여 독립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나친 다양성’은 로마 쇠퇴의 부분적인 원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고약한 문제는 전성기가 지난 로마에서 종교적 박해와 인종적 불관용이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불관용은 로마쇠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지만, 제국의 분열을 재촉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기독교는 새롭게 시작된 불관용 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2. 로마 몰락의 원인은 로마가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치명적인 불관용 정책을 펼침으로써 제국의 다양한 주민들을 성공적으로 통합시켜왔던 동화 및 통합전략을 훼손시킨 데 있다.

p106

1. 다양한 인종, 다양한 종교, 다양한 배경을 가진 민족들을 끌어 모으고, 동화시키고, 보상하고,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때 로마는 번영했다.

2. 로마의 붕괴는 로마가 도저히 동화시킬 수 없는 민족들, 혹은 로마가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문화와 습관을 가지고 있는 민족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동화시키는 데 실패하면서 시작되었다. 종교적인 불관용과 인종적인 불관용이 결합되면서 로마는 전쟁과 내란에 휩싸였고, 전쟁에서도 내란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3장 중국의 황금기 - 당唐

p110

1. 멸망한 제국(중국, 그리스, 페르시아, 터키, 로마 등)에서 핏줄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는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역사와 문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바닷가를 늘 서성이고 있다. 나는 중국의 서예, 과학, 시, 경극, 철학, 자연주의, 유교에 매력을 느끼는데, 그 까닭은 그 모든 것이 어릴 적 내가 겪었던, 제3세계라는 절망적인 중국의 현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2. 당 왕조는 당대의 그 어떤 제국보다, 중국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개방적이고 세계주의적인 나라, 인종적.종교적으로 관용적인 나라였다.

오랜 불관용의 세월

p112~114

1. 시황제의 통치 기간은 짧았지만, 그가 세운 강력한 원칙은 중국사회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등장하게 된다. 그 원칙은 바로 중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다양성에 대한 가혹한 억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후 2,000년 이상 중국의 불관용은 인종 및 종교에 대한 산발적인 억압, 그리고 문화적인 숙청, 외국인과 외국의 사상에 대한 거부,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중화사상과 중국 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단언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2. 만리장성은 중국의 통일성, 영토적 통합, 배타성, 그리고 야만인들로부터 중국의 우월한 문명을 격리시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흔들림 없는 필요성을 상징

‘한 사람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1만 명 위에 서라’

p114~117

1. 618년에 한족과 돌궐족의 피가 섞인 북부 벌족 출신의 이연이 수나라에 대한 추억을 거부한후 군사를 이끌고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당 왕조를 열었다. 당 왕조는 그후 300년동안 중국을 통치하게 된다.

2. 관용적인 태도를 인격적으로 구현했던 인물은 바로 당의 두 번째 황제인 태종. 태종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중국의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현명하고 영웅적인 인물로 존경. 당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로 대접

이세민, 세계 제국을 설계하다

p117~124

1. 당의 군사적 성공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이방 민족의 활용

2. 태종의 꿈은 중국의 황제이자 돌궐족의 칸으로서 중국인과 야만인을 동시에 다스리면서, 중국인과 야만인이 동등한 자격을 가지는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하는것

3. 태종은 뛰어난 군사 전략가. 그의 치세에 방대한 땅이 당 왕조에 편입

4. 태종은 중국 최초로 초원 지대의 패권을 장악한 군주가 됨

5. 태종은 외국인들과 외국인 유력자들에게 대단히 우호적

6. 태종은 외국의 종교에 대해서도 대단히 개방적

7. 태종의 치세는 중국 역사상 종교 다원주의가 매우 융성했던 시대로 손꼽힘

8. 태종의 통치는 중국의 전통적인 신분제도를 뒤흔들어 놓음. 새로운 계보도는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태종의 고위 대신들의 가문을 중국 최강의 벌족보다 높은 지위로 끌어 올렸는데, 이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의미. 첫째, 학자 출신의 관리들이 단순한 귀족 혈통보다 우위에 놓이게됨 둘째, 과거제도들 통해서 행정부에 진출한 지도 계층이 출현. 과거제도는 중국 사회뿐 아니라 대부분의 동아사아 사회에 변화를 몰고 오게됨

중국 최초이자 최후의 여황제

p125~126

1. 측천제는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약삭빠르게 불교를 이용. 자신이 미래에 극락을 다스릴 구세주인 미륵보살의 헌신이라고 공표. 이미 정치적.경제적으로 강력한 세력을 장악하고 있던 중국의 불교계는 측천제의 치세에 더욱 중국화 되었고, 매우 강력한 새로운 분파들로 갈라짐

2. 과거제도를 체계화하고 확대하여, 혈통이 아니라 경쟁에 의해서 관리를 선발

3. 측천제의 개혁은 중국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 새로 확립된 국가시험 제도는 세습적 특권이 아닌 교육과 학문적 재능만을 근거로 정부 관리들을 선발해야 한다는 급진적이며 새로운 원칙을 반영하는 것

세계속의 장안, 장안 속의 세계

p127~128

1. 명황은 태종과 더불어 당 왕조의 위대한 황제로 손꼽힘

2. 특히 시가 그 어느 때보다 융성.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이백, 왕유, 두보 등의 시인들은 모두 이 시대 사람들

3. 장안은 동아시아 전역으로 문명을 전파시키는 중추적인 도시

4. 명황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에게 관대하고 문화적, 종교적 차이에 관대

안녹산의 반란, 외국인 혐오의 확산

p135~141

1. 고대 로마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경우도 그랬지만, 관용은 당 제국의 엄청난 영토 확장과 영향력 강화에 필수적인 요소였던 동시에 제국 쇠퇴의 씨앗. 참으로 모순된 일이지만, 당의 몰락 원인은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부여받은 한 외국인의 반란에서부터 시작. 당제국이 쇠퇴의 길에 접어드는 순간부터 불관용이 시작

2. 당이 채택했던 전략적인 관용 정책은, 당이 중국인이 아닌 피지배민에게 한족의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당제국은 그 덕분에 크게 뻗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당제국이 ‘야만인들’과 중국인들을 한데 묶어줄 공통된 정치적, 언어적, 문화적 ‘접착제’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3. 당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755년에 일어난 안녹산의 난

4. 안녹산의 난은 당의 쇠퇴를 알리는 전환점. 그이전까지 당의 황제들은 중국인과 비중국인 간의 구분을 없애기 위해 혈통과 문화를 혼합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 오랜세월 이 정책은 놀라우리만큼 큰 성공을 거둠. 그러나 안녹산의 난 이후 상황은 완전히 뒤바뀜. 8세기 후반에 이르자, 타민족과 외래 사조에 대한 당의 관용은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할, 불안정, 그리고 폭력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5. 8세기 후반에 이르러 불관용이라는 병이 당에 침투하여 암처럼 퍼져나갔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가릴 것 없이 모든 중국인들이 모든 문제를 외국인 탓으로 돌리기 시작함

6. 당은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 잡은, 수백 년 묵은 야만인에 대한 경멸과 공포를 극복할 수 없었다. 중국은 로마와는 달리, 중국 민족과 비중국 민족에게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고, 똑같이 매력을 끌 수 있는 공민권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중국을 통합시켰던 지배적인 정치적, 사회적 정체성은 중국인 고유의 것으로 야만인들은 배제되어 있었다.

7.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다양한 인종을 감싸 안던 당의 세계주의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8. 9세기에 이르자 당의 불관용 정책은 더욱 강화

9. 더욱 놀라운 사건은 열렬한 도교 신자였던 무종 치세에 시작된 종교 박해

4장 유럽을 삼킨 초원의 지배자 - 몽골

p147

1. 칭기즈칸은 만인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공표. 그는 또한 다양한 인종들을 포용. 부족 간 장벽을 용의주도하게 허물고, 피정복민들 가운데 유능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골라 공직에 임용했다.

2. 몽골족이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고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잔혹함이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관용에 있었다.

칭기즈칸, 초원 지대를 통일하다

p148

1. 장성한 뒤에 테무친은 혈통에 기초한 초원 지대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완전한 혈족 체제 대신 공적과 충성도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체제를 도입

2. 테무친은 승리를 거둘 때마다 늘 똑같은 기본 전략을 사용. 그는 패배한 부족의 지도자와 대부분의 남자 귀족들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가 아니라 동등한 성원으로 자신의 수하에 편입시킴

3. 테무친은 몽골군대를 재조직. 여러 민족 출신의 병사들을 섞어 열 명으로 이루어진 분대를 만든 다음, 그들에게 출신 부족에 관계없이 형제가 되어 함께 살고 서로를 지키라고 명령. 그는 분대 열 개를 모아 중대를 만들고, 중대 열 개를 모아 대대를 만들고, 대대 열개를 모아 ‘투멘’을 만들었다. 1만 명의 병사가 소속된 투멘의 지휘관은 테무친이 직접 임명. 부족을 초월한 십진제는 군대뿐 아니라 몽골의 모든 사회조직의 구성 원칙이 됨

4. 테무친은 재능과 충성도를 기준으로 부관과 자문관을 선발

5. 주목해야 할 점은 칭기즈칸이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정령신앙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절대적인 자유를 선포했다는 사실이다.

6. 칭기즈칸은 민족 간의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른 부족의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배치하고 자신의 자식들을 피정복 부족장의 자식들과 결혼시킴. 그는 또한 다른 부족의 재능 있는 자들을 데려다가 몽골족이 지니고 있지 못한 재능과 기술을 전파하게 했다. 몽골족이 문자를 가지게 된 것도 이런 경로를 통해서였다.

동방 원정:학자와 장인을 채용하다.

p158~161

1. 몽골 군대는 보병이 없고 전원이 기마병으로 이루어져 있슴

2. 몽골 군대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포로들을 꼼꼼히 조사하여 기술을 가진 사람을 찾아냈고, 자진해서 투항한 기술자들에게는 후한 보상을 내림. 칭기즈칸은 이런 방법으로 수많은 중국인 기술자들을 확보하여 성벽을 두른 난공불락의 도시들을 함락하는데 필요한 강력한 공성 장비를 만들 수 있었다. 승리를 거듭할 때마다, 몽골의 무기는 점점 정교해지고 치명적인 위력을 갖추게 되었다.

3. 칭기즈칸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으면서도 여러 민족 출신의 학자들을 등용했다.

4. 칭기즈칸의 종교적인 관용 정책은 계속 유지되어, 제국 건설의 강력한 수단으로 기능

서방 원정:성직자와 수도자를 얻다

p163~165

1. 칭기즈칸 군대의 중앙아시아 횡단은 오늘날까지도 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단한 군사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2. 몽골의 기마대는 전통적인 군대와는 달리 이동을 지체시키는 무거운 장비를 가지고 잇지 않음. 그들은 대신 필요한 공격 장비가 있으면 당장에 만들어낼 수 있는 외국인 기술자 부대를 데리고 다님

3. 포위전을 펼 때 칭기즈칸은 늘 똑같은 기본 전략을 구사했다. 먼저 방어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성 주변 농촌 마을을 공격하고 불을 지른 후 포로를 잡아들이고 수많은 주민을 학살했다. 그리하여 공포에 질린 피난민들이 물밀듯이 도시로 몰려들어 혼란, 기아, 그리고 두려운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는 포위된 도시의 주민들에게 단 한번의 기회를 주었다. 투항한 주민들은 관대한 처분을 받고, 투항을 거부한 주민들은 니샤푸르의 주민들처럼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유럽의 비애’

p167~171

1. 그는 아들들에게 ‘마음속에 목표를 새겨두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생은 물론이고 자기 인생도 제대로 경영할 수 없다’고 말했다.

2. 주목해야할 점은 몽골 군대에는 선진적인 이슬람권과 중국의 기술을 흡수하여 제작한, 유럽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가공할 무기가 있었다.

3. 몽골 군대의 승리는 유럽 봉건제도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

4. 몽골의 공격을 받자, 기독교권인 유럽에서는 극심한 불관용의ㅣ 회오리가 몰아쳤다.

-->유럽 내부에 있는 유대교도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림

5. 13세기에 기독권인 유럽은 십자군 전쟁, 종파 대립, 반유대주의로 산산조각 난 채 이교도 박해에 열중하고 있었다. 유럽의 분열과 불관용은 몽골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6. 민족이나 종교를 따지지 않았던 몽골인들은 자유롭게 피정복민들로부터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팍스몽골리카의 관용

p174~177

1.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단순한 유목민 무리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 ‘중국, 중앙아시아, 러시아, 카프카스, 그리고 이란의 통합된 인적, 재정적, 물질적, 기술적 자원’에 굴복한것이었다.

2. 야만적인 몽골인들은 다른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점에서 몹시 세계주의적이었다.

쿠빌라이의 ‘위대한 시작’

p179~187

1. 쿠빌라이의 송나라 정복은 군사적인 정복이라기보다는 중국인들의 마음을 정복한것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점차적으로 이루어짐

2. 쿠빌라이는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군사적인 승리를 거둘 때마다 천명이 자신에게 지워졌다는 생각을 퍼뜨렸다.

3. 쿠빌라이는 몽골인들에 비해서 수적으로나 교양 면에서 훨씬 우월한 중국의 피지배민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기이한 인종 혼합 정책을 채택(예:몽골인들과 중국인들 간의 결혼 금지)

4. 쿠빌라이는 최고의 인종적 관용을 베풀었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몽골의 관습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나 조정, 그리고 지배 계층과 관련된 사안에서도 중국 문화를 채택.

5. 주목해야 할 것은, 쿠빌라이는 중국인들을 행정부의 고위직에서 추방한 뒤 이 직위들을 몽골인들로 채우지 않고 다른 외국인들로 채웠다는 사실이다. 쿠빌라이는 몽골인들은 경험의 면에서나 수적인 면에서나 중국 같은 복잡한 사회를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재능있는 위구르인, 거란인, 페르시아인, 중앙아시아인, 그리고 유럽인들을 중국의 지방관과 재상으로 삼았다.

6. 쿠빌라이의 통치 원칙은 불관용이 아니라 세계주의였다. 중국인들이 몽골인들과 결혼하거나, 몽골어를 배우거나, 정부 고위직을 담당하는 것을 금지한 쿠빌라이의 조치는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그것은 맹목적인 배외주의가 아니라, 소수에 불과한 몽골의 통치 계급이 어머어마한 중국 인구에 흡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고안한 정치적 방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찌 되었든, 쿠빌라이의 이런 정책 덕분에 다양한 문화, 다양한 민족, 다양한 종교가 멋지게 통합되었다.

7. ‘팍스몽골리카’ 시대에는 다양한 종교를 신봉하는 다양한 민족 출신의 상인들이 큰 재산을 모았다.

8. 웨더퍼드에 따르면, 몽골인들은 ‘비할 데 없는 문명의 전달자’였다. ‘그들은 피지배민들에게 억지로 떠안길 만한 고유의 제도가 없었으므로, 각지의 제도들을 거리낌 없이 채용하고 결합했다.’

9. 쿠빌라이는 피지배민족들의 지식과 재능, 그리고 문화적 업적을 거리낌 없이 칭찬하고 현명하게 이용

10. 쿠빌라이의 할아버지는 마음속으로는 늘 초원의 유목민이었지만, 쿠빌라이는 단일한 세계를 추구하며 세계화를 추진

대제국의 붕괴

p187

1. 대몽골제국의 몰락은 지도층의 무능함과 부패, 반란, 퇴폐, 파벌싸움, 암살, 외국의 공격, 그리고 불운을 비롯한 여러 요인에 의해서 촉진

2. 몽골의 평범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불관용, 특히 종교적 불관용이 전면적으로 나타났다

3. 명의 황제들은 주변의 야만인들을 정복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중국을 봉인하기 위해서 튼튼한 성벽을 쌓았다. 외국의 상인들은 쫓겨났고, 나라밖 여행은 금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고유의 것이 아닌 관습, 종교, 사상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4. 칭기즈칸은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대몽골 민족 혹은 ‘펠트 천막에 사는 민족’)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정체성은 초원의 유목 민족들만을 포용할 뿐 비 몽골 민족들과 국가들을 포용할 수는 없었다.

5. 그 지역에 거주하던 민족들은 결코 스스로를 몽골인이나 ‘펠트 천막에 사는 민족’, 혹은 대몽골제국의 자랑스러운 피지배민이라고 여긴 적이 없었다. 반대로 뜻밖의 일이 전개 되었다.

몽골의 통치자들은 광대한 제국에 몽골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대신 ‘문명화된’ 피지배민들의 문화를 점점 대폭적으로 받아들였다. 날이 갈수록 뿔뿔이 갈라지는 이들 왕국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접착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2부 계몽화된 관용>

5장 신세계를 향한 최초의 탐험자 - 스페인

p196

종교 공동체들이 이렇게 특이하게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비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좀더 세계화된 태도를 보였다.

중세 비기독교의 보금자리

p199

1. 상대적인 관용 덕분에 스페인이 거둔 수확은 영토 팽창과 제국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페인은 비기독교도 주민들 덕분에 문화적, 지적인 영역에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노동력과 돈이라는 중요한 이득도 손에 넣었다.

2. 이슬람교도들을 내쫓거나 학살하기보다는 그곳에 이미 살고 있는 이슬람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풂으로써 정복 지역들을 확고히 장악. 스페인 남부의 비옥한 농지를 경작하는 데 필용한 노동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농업 노동력에 대한 수요야말로 스페인 왕들이 피정복 이슬람교도의 공동체들과 협정을 맺고 이슬람교를 허용한 주된 이유

3. 중세의 스페인은 마지못한 것이기는 했지만 유대교도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덕분에 엄청난 재정적 수익을 거둠

기독교도의 공격

p201

1. 1492년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유대교도들에게 가톨릭교로 개종을 하거나, 4개월 안에 스페인을 떠나라는 칙령을 발표

2. 스페인 왕실은 공식적으로 불관용 정책으로 선회했는데, 이것은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성장할 꿈을 품고 있던 제국으로서는 대단히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3. 콘베르소스들과 유대교도들의 대거 탈출은 스페인의 막대한 재정적 공백을 초래

제국 대신 영혼을 구원하다

p205~206

1. 이단 심문소, 추방, 순수한 혈통을 옹호하는 법령 등이 빚어낸 불관용은 스페인에 파멸적인 결과를 안겨줌. 스페인의 종교 박해는 엄청난 자원 낭비를 수반하는 것

2. 스페인의 ‘정화’ 활동은 농민과 장인, 의사와 과학자, 상인과 금융업자, 그리고 심지어는 가톨릭을 믿는 귀족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계층을 파괴

3. 나의 논지를 되풀이해서 말한다면, 관용은 세계 제패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렇지만 스페인 왕국의 불관용이 번영을 가로막고 스페인의 깊은 쇠락을 재촉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6장 자본주의 경제를 제패한 최초의 제국 - 네덜란드

바다의 경계를 긋는 사람들

p212

영국의 풍자작가 오언 팰덤

:네덜란드 사람들은 ‘어찌보면 신이다. 그들은 바다의 경계를 정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바닷물이 들고 나게 한다.’

종교적 망명객이 줄을 잇다

p218~222

1. 1625년경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패권을 장악한 강국’,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제패했던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작은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쫓겨난 진취적인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덕분에 17세기에 이르러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 되었다.

2.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엄청난 경제성장에 있었다. 여기에다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특별한 종교적 관용 정책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3. 네덜란드 주연합에는 국교가 없었다.

4. 네덜란드 사람들의 관용에는 예리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공화국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던 정치인들 가운데 대다수는 경제적인 이익을 기대하여 공개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옹호

5.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유럽 전역으로부터 종교적인 망명객들을 줄지어 끌어들이는 자석이었다.

6.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이 5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경제 각 분야에서 패권을 장악하는 데에는 이 이주민들이 엔진 역할을 했다.

세계의 상인, 유럽의 중개인

p222~227

1. 네덜란드의 경제성장에 기름을 부은 것은 대부분 합스부르크 왕조의 스페인에서 박해를 피해 빠져나온 유대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이었다. 이들은 네덜란드에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을 세계적인 무역, 산업, 금융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2. 품위있고 박식하고 귀족적인 이들 세파르디 유대교도들은 은행 적금을 증가시키고, 국채를 늘리고, 네덜란드의 식민주의에 연료를 공급하고, 암스테르담 주식시장이 설립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등 네덜란드연방공화국에 자금을 쏟아 부었다.

3. 16세기말 막스 베버가 말했던 ‘자본주의 정신’을 네덜란드에 들여오는 데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대거 유입된 개신교 상인들과 숙련 노동자들, 그리고 생산업자들

4. 1598년 스페인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식민지의 생산품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네덜란드 선박의 입항을 금지

-->네덜란드의 유력한 상인들은 아예 스페인과 포르투칼을 제쳐놓고 동인도제도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직접 자신들의 선박을 보내기로 결정.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연합 동인도회사와 후일의 서인도회사. 이 두 회사가 세워지면서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세계적인 식민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성경과 코란보다는 돈!

p229~232

1. 네덜란드의 제국주의에 연료를 공급한 것은 칼뱅주의가 아니라 이윤 추구

2. 네덜란드는 경제적 성장에 고무되어 군대에 대한 여러 가지 개혁 조치를 단행

3.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설립자들은 동인도회사의 설립자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상대적인 종교적 관용 때문에 네덜란드연방공화국으로 이주한 부유한 개신교도들

‘철학자들의 은신처’

p234~239

1. 17세기에 황금기를 맞은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유럽 전역에 기회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알려져 있었다.

2.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의 종교적 관용과 높은 임금은 독일,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심지어는 터키와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유럽전역으로부터 숙련된 기술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3. 황금기의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17세기의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비할 데 없는 문화적, 예술적, 지적 독창성을 분출(예:렘브란트, 17세기 사상계의 위대한 3인방(데카르트, 바루흐스피노자, 존 로크))등)

영토의 팽창보다는 상업의 확장을

p241~243

1. 주목해야 할 사실은, 중세 초기의 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끼고 있던 네덜란드는 영토의 팽창이 아니라 상업의 팽창을 꿈꾸었다는점

2.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잔인한 종교 박해 때문에 1492년부처 1715년 사이에 숙련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이주를 감행. 200년후에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네덜란드는 관용 정책을 통해 유럽에서 박해를 받아 추방된, 재능 있는 사람들을 유인. 이런 관용 정책은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활동적인 집단 가운데 일부를 좁은 네덜란드로 끌어들여, 네덜란드영방공화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어내고, 부의 측면에서 대륙의 경쟁자들을 크게 앞지르게 만들었다. 네더란드는 이 부를 이용해서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성장

3. 세계 지배와 관련된 새로운 현대적 전략은 군사력에 의한 영토 정복이 아니라 군사력을 토대로 한 자본주의였다.

네덜란드의 영국 ‘정복’

p244~245

1. 네덜란드와 영국의 힘이 합쳐지면서 영국이 막대한 이득을 얻게 되는, 참으로 모순이라 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2. 네덜란드의 관용 정책은 사실상 ‘국내’ 정책이었다. 네덜란드가 국경 내에서 펼쳤던 주목할 만한 종교적 관용 정책은 해외 식민지에서의 인종적 혹은 민족적 관용으로 변형되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수리남에서 자바, 그리고 아프리카 남부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토착민들을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열등하게 여겼으며, 노예제, 인종 격리, 그리고 문화 파괴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 편협한 식민정책을 실시. 다시 말해서 네덜란드 국내에서의 관용 정책과 해외 식민지에 대한 관용 정책 사이에는 모순이 있었다.

7장 불관용의 덫 - 오스만, 명明, 무굴

오스만제국의 으뜸 황제, 술래이만

p247~250

1. 이슬람교는 인종적.민족적으로는 피부색이 어떠하든 어떤 사회계층에 속하든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면서도, 종교적으로는 편협했다. 신은 오직 하나, 진리 역시 오직 하나뿐이었다.

2. 오스만제국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종교적 관용

3. 철저히 계산된 관용 정책을 토대로 인종적, 종교적 구성 이매우 다양한 지역을 다스림

4. 오스만의 통치자들은 상대적인 관용정책으로 당시 불관용에 치우쳐 있던 기독교 경쟁자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안겨줄수 있음을 간파

5. 술래이만은 유대교도들과 기독교도들에게 원하는 종교를 신봉하면서 자율적인 공동체를 운영할 수 있는 폭넓은 자유를 허용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들은 특별한 세금을 내야 했다.

기회의 땅

p252~255

1. 오스만의 관용 정책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슬람교 개종자들에 대한 포용 정책

2. 오스만 사람들은 전략적인 관용 정책 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첫째, 그들은 전략적 관용 덕분에 트란실바니아에서 예멘과 이란 고원에 이르는 피정복민족들로부터 협조, 아니면 하다못해 묵인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오스만 사람들은 전략적인 개종 정책으로 충성스러운 ‘하인들’을 길러낼 수 있었다.

3. 오스만제국의 상대적인 종교적 관용은 개종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큰 혜택을 주었다.

무능한 열세 명의 술탄들

p258~259

1. 오스만제국의 상업 활동 대부분이 유대교도를 비롯한 여러 비이슬람교도들의 손에 넘어가게 된 배경에는, 교역을 혐오하는 이슬람식의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2. 내란의 확산과 민족주의의 고조가 오스만제국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스만 제국의 최후에는 험악한 불관용적 행태가 발잘적으로 벌어졌다. 오스만제국은 1922년 완전히 붕괴하기 직전까지 격심한 인종적.종교적 편협성, 분파주의, 폭력에 시달렸다.

월등한 기술력을 보유한 명 왕조

p260

명대의 중국은 인쇄술, 화약, 나침반을 발명하는 등 기술적인 면에서 후진적인 유럽을 훨씬 앞서 있었다.

쇄국 정책의 최후

p264

명이 ‘쇄국’으로 돌아서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락제가 죽은 뒤, 몽골이 다시 군대를 모아 중국을 침입한 데 있었다.

인도의 막강한 제국, 무굴

p266~267

1. 영국에 앞서 인도를 통치하던 무굴제국은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

2. 관용 정책으로 선회하지 않았다면, 무굴제국은 그러럼 오랫동안 지속될 수도 없었고 눈부신 문화 발전을 이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무굴제국이 쇠퇴했던 시기에는 인도 역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잔혹한 인종적, 종교적 박해가 만연했다.

악바르와 두 아들의 관용

p272~273

1. 50년동안 통치한 악바르는 오늘날까지 무굴제국 최고의 통치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가장 큰 실패는 이슬람교와 힌두교, 조로아스터교의 여러 요소들을 통합하여 ‘신성종교’라는 새로운 ‘신앙 체계’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2. 자항기르의 후계자인 샤자한은 아름다운 타지마할을 건축한 것으로 유명

아우랑제브의 끔직한 유산

p275~277

1. 아우랑제브는 이전에 시행되던 종교적인 관용 정책들을 뒤집고 제국 전역에 샤리아(이슬람 법률)를 강요

2. 아우랑제브의 불관용은 제국에 재앙을 몰고 왔다.

3. 아우랑제브의 이슬람교에 대한 광신은 무굴제국의 허약한 종교적, 정치적 통일성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4. 인도는 아우랑제브가 뿌려놓은 증오심과 갈등 때문에 영국의 분열정복 전략의 희생양이 됨

8장 세계 최대의 해상국가 - 영국

p280~281

1. 영국의 부상은 이 책의 논제를 생생하게 입증하는 사례이다. 1689년에 영국이 채택한 특별한 관용 정책 덕분에, 유대교도, 위그노교도,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스코틀랜드인, 이 세 개 집단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영국 사회로 진입. 이들은 금융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 영국은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비상.

그러나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은 영국은 극심한 자기모순에 부딪히게 됨. 영국이 국내적으로 다원주의와 관용이라는 가치를 훌륭하게 포용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인도, 로디지아, 자메이카를 비롯한 모든 해외 지배령에서는 영국인 총독이 서양의 폭군으로서 통치궈을 휘둘렀다. 흔히 기독교를 우선시하는 백인 식민지 총독은 인종적, 종교적 차별을 공공하게 자행.

다시 말해 영국은 세계 제패를 향해 달리는 도중에 엉뚱한 복병을 만났다. 그것은 바로 계몽주의였다. 대영제국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세계적인 패권 국가와는 달리, 자유, 평등, 민주라는 되돌아나갈 수 없는 근대성의 문턱을 넘어서고 나서야 세계적인 권력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2. 영국의 역사는 중요한 의문을 제기. 세계의 패권 국가가 현대의 ‘계몽주의적인’ 의미에서 참된 관용을 베푸는 것이 가능할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미합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세계 제패의 비결

p282~288

1. 유대교도들이 영국에 정착한후 군수품과 필요한 자금을 공급

2. 유대교도들은 국제적인 친족 연락망에 의지하여 전 세계로부터 엄청난 자금을 끌어들임

3. 영국은 유대교도들에게 우호적

4. 위그노교도인 시계 제조공들 덕분에 런던은 세계적인 시계 제조 중심지로 변모

5. 위그노교도들이 영국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은 금융과 관련한 것

6. 유대교도들과 위그노교도들은 영국의 성장을 촉진한 일종의 효모 역할을함

‘지구의 시궁창’에서 솟아난 제국의 건설자들

p289~295

1. 윌리엄 패터슨이 설립한 잉글랜드 은행은 영국의 세계 제패를 가능하게 하는 요체가됨

2. 다리엔의 참극은 스코틀랜드를 파산으로 몰아넣음. 1707년 스코클랜드가 잉글랜드와의 합병조약에 서명하면서, 대영제국이 탄생

3. 합병 조약 이후 영국인들은 스코틀랜드인들을 안아 일으켜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4. 스코틀랜드인들은 대영제국에 인력을 공급했을 뿐 아니라. 18세기와 19세기 영국의 주도적인 사상가, 저술가, 발명가로도 활동.(예: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등)

5. 주목해야 할 사실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추진한 원동력이기도 하다는점(예:증기 엔진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와트에 의해서 완성)

계몽주의의 승리

p295~300

1.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영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경쟁 상대가 없는 해군력과 상업력, 그리고 금융력에 있었다.

2. 유대교도들과 위그노교도들, 그리고 스코틀랜드인들의 공헌은 압도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중추적인 수준(예:‘세계 최강국이 가진 최강의 금융 기구’이자 영국이 프랑스를 앞지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잉글랜드 은행을 들수 있다. 잉글랜드 은행을 입안한 것은 스코틀랜드인이었고, 그 은행의 창립 자금을 댄 것은 위그노교도들이었으며, 그 은행의 대부금을 중개한 것은 유대교도들이었다)

3. 요컨대 스코틀랜드인, 유대교도, 위그노교도와 같은 비잉글랜드인 집단의 재능과 자본을 이용하여 대영제국이 손에 넣은 이득은 어마어마한 규모

4. 19세기 대영제국의 관용은 단순한 전략적인 계산을 넘어선 것이었다. 영국은 매우 놀라운 수준으로 계몽주의적인 관용의 개념을 채택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그들은 만민 평등의 원칙을 채택하고, 다양한 인종 집단과 종교 집단에게 본토박이 잉글랜드인들과 똑같은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가진 대영제국의 정식 국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줌

뿐만 아니라 ‘브리톤Britain'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민족적, 인종적 경계를 뛰어넘는 개념이 되었다. 대영제국은 고유의 권리를 가진 하나의 국가였지만, 각기 고유의 국가적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세 개 이상의 다른 민족들, 즉 잉글랜드인, 웨일스인, 스코틀랜드인을 통합시킴으로써 탄생. 귀족 간의 결혼은 오래 묵은 장벽이 무너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유력한 증거

5.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침으로써 영국은 주요 경쟁국인 프랑스뿐 아니라, 과거 식민지였던 미국에 대해서까지 도덕적인 우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

6. 그러나 방해물은 남아 있었다. 초기 영국의 정체성은 개신교라는 토대 위에 세워짐. 영국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적인 종교적 특성은 불관용의 씨앗을 키웠고, 영국은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영국의 개신교는 연합 왕국의 심장에서 제국의 운명을 가르는 심각한 문제를 빚어냈다. 그것은 바로 가톨릭교를 신봉하는 아일랜드의 문제였다.

아일랜드와의 결별

p300

아일랜드 사람들은 가톨릭교를 완강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여러 측면에서 볼 대 대영제국이 아일랜드를 상실하게 된 것은 관용이 너무 부족해서, 그리고 적절한 대응이 너무 늦어서였다.

혼란에 휩싸인 인도 통치

p306~323

1. 영국은 인도에 대해 가혹한 통치 지속. 여왕의 백성인 인도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정치적 대표권도 부여하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인도뿐만 아니라 유색인들이 사는 모든 영토에서 스스로 공언했던 계몽적인 관용에 따라 행동하지 못했다.

2. 사티(죽은 남편을 화장할 때 그 아내도 함께 화장하는 전통적인 힌두교 관습)금지법은 영국이 인도의 중요한 종교적 관습에 강경하게 대입한 최초의 사건

3. 1883년 자유주의적인 총독이, 인도인 판사가 백인 피고인들을 재판할 수 있게 하는 일버트법을 통과 시키자, 인도 전역에서 영국 출신의 이주민들이 항거

4. 한마디로 영국이 인도를 상실하게 된 것은, 아일랜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관용이 부족했기 때문

5. 1920년 간디는 영국 정부에 대해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펼치자는 혁명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6. 공격적인 불관용 전략은 자멸적인 결과를 초래. 영국 출신 이주민들의 극심한 인종주의는 인도 엘리트층의 분노를 격화시켰고 인도 엘리트층은 차츰 대중적인 민족주의 운동과 영국 기업의 민족 기업화 또는 추방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7. 인도를 통치했던 90년 동안 영국이 인도인들을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일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번번이 무시되었다.

p325~327

1. 만일 빅토리아 시대의 대영제국이 인종적, 민족적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다면...

2. 과거의 패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요인은 파괴적인 인종적, 종교적 난투로부터 강력한 개방과 관용의 정책으로의 극적인 전환, 바로 그것이었다.

3. 영국이 쇠퇴한 것은 해외에서 관용을 베풀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4. 1931년 영국이 인도와 대등한 파트너 관계를 맺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기업 내 인종차별을 폐지하고 인도 기업들과 합병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3부 세계 제패의 미래>

9장 최첨단 과학 기술의 개척자 - 미국

p331~333

1. 미국이 경제적.군사적으로 남다른 성공을 거둔 까닭은 무엇일까?

-->비옥한 농경지, 풍부한 자원, 외국의 위협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지정학적 특징, 그리고 사유재산제, 자유시장제,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의 제도들이 한몫을 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그러나 과거의 초강대국들이 그랬듯이 미국이 강한 국력을 유지하고 있는 참된 비결은 인적 자원에 있다.

2. 상대적인 관용 정책이 세계 제패의 열쇠라고 가정한다면, 미국은 늘 유럽 국가들에 비해 대단히 유리한 지점에 서 있었다. 미국은 이민자들에게 매력적인 나라일 뿐 아니라, 이민자들의 나라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민자이거나 이민자의 아들, 혹은 손자였다. 현재 미국 인구의 95퍼센트 이상이 바다를 건너온 이민자들의 후손

3. 미국은 온갖 종교에 대해서 동시대의 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4.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 동안 특정한 인종 혹은 민족 집단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불관용의 태도를 보였다.

5. 미국의 지위가 이렇게 상승하게 된 것은 미국이 끊임없이 다양한 집단들의 활력과 재능을 유인하고, 보상하고, 흡입해왔기 때문

미합중국은 국교가 없다

p335~340

1. 상업은 종교적 관용을 촉진하는 강력한 기폭제였다. 유력한 상인들은 배척하는 풍조는 사업에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 종교의 자유를 옹호

2. 건국의 아버지들은 종교와 관련된 자유로운 선택이야말로 다원주의 사회에서 분파 간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매디슨을 비롯해서 그들 중 많은 수가 애덤 스미스의 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은 사람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규제가 없는 상품 시장의 경우처럼 ‘종교 교파가 무수히 많으면’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건전한 경쟁이 이루어져서, 광신적인 태도는 줄어들고 절제하는 태도가 늘어날 터였다.

3. 한마디로 미국은 애초부터 종교적 관용이라는 계몽주의적 원칙 위에 건설

구세계에서 기회의 땅으로

p346~347

1. 이주민 대부분이 유럽의 공장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습득한 경험과 기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19세기의 미국 산업은 폭팔적으로 발전. 미국의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로는 미국 산업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새뮤얼 슬레이터. 슬레이터는 기억을 되살려서 세계 최고 수준의 영국 직조 기술을 미국으로 이전

2.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만든 주요한 요인은 상대적인 개방성과 다원주의였다. 유럽의 국가들은 미국과 같은 ‘이민자의 나라’가 아니었다.

3. 초기 미국 사회에서는 이주민들이 정치적.경제적인 측면에서 최고가 될 수 있었고, 실제로도 최고가 되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이주

p349

1. 19세기 내내, 미국은 농지를 경작하고, 철도를 놓고, 오지에 정착하고, 국경을 확장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

2. 이주민의 꾸준한 유입이 없었다면, 미국은 19세기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농업 및 산업 국가가 될 수 없었을것

3.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정당의 영수들과 이주민들 가의 공생 관계가 이전까지는 배척당하고 있던 인종 집단들, 특히 아일랜드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을 통합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

4. 선택적인 전략적 관용의 냉혹한 본성

:미국은 유럽 출신의 다양한 대중들은 환영했지만, 아메리카의 토착 원주민들은 학살하고, 차단하고, 내쫓았다.

5. 19세기의 미국 사회는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나라로서 세 가지 중요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① 미국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매우 자유분방하여 이주민들은 원하는 종교를 믿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종교의 불씨를 피워낼 수도 있었다

② 민주적인 정부 제도는 부패하기는 했어도 새로운 이주민들의 손에 현실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쥐어주었다

③ 활발한 자유 시장은 노동력을 흡수하고 기술에 보상을 해주었으며 기업심이 왕성한 사람들에게 예상 밖의 기회를 제공

지역 강국에서 세계 강국으로

p356~359

1.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기왕의 이민 공동체들은 이 시기를 이용하여 미국 사회에 흡수되고 동화될 수 있었다.

2. 전쟁은 여러 면에서 미국의 유례없는 경제 발전에 엄청난 연료를 공급. 대공황에서 벗어난 미국 산업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급격히 성장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팽창

3. 관용은 여러 측면에서 미국이 초강국으로서의 지위를 갖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0년 이전의 개방적인 이민정책 덕분에 미국은 인력 면에서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이민자들이 이루었던 혁명적인 기술적 약진이었다. 이것은 미국을 군사적으로 월등한 지위로 끌어올렸다.

4. 대부분 유대인이었던 과학자들의 미국 이주는 인재들이 가장 대규모로 유입된 사례

5. 중요한 것은 ‘상대적인’ 관용이었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볼 때, 미국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뛰어난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예루살렘이었다. 그들의 연구를 통해 미국은 세계 최초로 핵무기를 갖게 되었다.

미국, 세계를 지배하다

p365~367

1. 1991년 1월 걸프전:미국 공군의 앞선 위력

2. 21세기가 시작되자, 미국의 국내총생산액은 현재 가치로 따져서 세계 총생산고의 3분의1, 일본과 중국 경제를 합친 규모의 두 배, 제국주의 전성기 당시 영국이 세계 총생산고에서 차지했던 비율의 세 배를 넘어섰다.

3. 미국은 세계화를 통해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나라

-->조지 소르소:'세계화란 곧 잉여 자본이 주변 국가에서 중심 국가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중심은 바로 미국이다.‘

4. 달러는 세계의 지배적인 화폐였고, 영어는 지배적인 언어였으며, 미국의 문화는 가장많이 모방되는 문화였다.

5. 미국이 세계적인 패권국으로 상승한 데에는 소련의 붕괴가 가장 결정적

6.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누렸던 경제 호황에 직접 연료를 공급한 것은 바로 두 가지 혁명적인 발전이었다. 하나는 마이크로칩의 발견이라는 기술 분야의 혁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벤처 자본주의라는 금융 분야의 혁명이었다. 전자는 컴퓨터 시대를 낳았고, 후자는 실리콘밸리를 낳았으며, 이 둘은 다시 새로운 정보 기술이 눈부신 속도로 활용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다. 이 두 가지 혁명적 발전의 근원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것은 모두 미국이 이민자들의 능력과 진취성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덕분에 얻어진 결과였다.

실리콘밸리의 건설자, 클라이너

p369

1.2003년에 사망한 클라이너는 ‘실리콘밸리를 건설’하고 ‘벤처 자금을 사실상 발명’한 사람으로 여겨짐

2. 벤처 자본주의는 전략적인 관용이 20세기 후반에 창출해낸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제국이나 몽골제국이 그랬듯이, 미국의 패권은 세계 최첨단의 재능과 지적인 자본을 끌어들이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가능

20세기 후반을 바꾸어놓은 디지털 혁명

p371~374

1.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앤드루 그로브-->인텔을 움직이는 원동력.사장됨

2. <타임>에 따르면, 디지털 혁명은 산업혁명이 19세기 후반기를 뒤바꾸어놓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20세기 후반기를 바꾸어놓았다.

3.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로브를 포함해서 수많은 이민자 출신의 성공 사례들이 미국에 부를 긁어 들이고 미국을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세계적인 경제 강국, 기술 강국으로 끌어올렸다.

4. 전례를 찾아볼수 없을 정도의 재산 증식은, 본토박이든 이민자이든 관계없이 어떤 배경을 가진 기업과 인재들에게도 보상을 제공하는 미국 경제의 독특한 특성을 드러내는것

5. 미국의 기술적, 경제적 패권은 군사적 우위로 직접 연결되고 있다.

6. 미국이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부상한 데에는 첨단 기술 경쟁에서의 승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0장 추축국의 야욕 - 독일, 일본

p376

추축국樞軸國들의 급속한 부상은 극단적 불관용이 무서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런 불관용을 토대로 한 사회는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

독일:아리아인의 세계 제패의 꿈

p378

잔혹한 불관용은 나치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곤경 속에서 국민들의 힘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 호전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적 배타주의, 종교적 증오심이 효과적으로 혼합되어 있는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굴욕을 당했던 독일 국민들로부터 충성과 희생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

증오의 힘

p380

나치가 내세우는 핵심적인 주장은 아리아인은 우월하며 ‘지배자 민족’으로서 세계의 통치자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확신이었다.

‘동화시킬 필요 없이 내쫓거나 죽여라’

p383~384

나치 외교정책의 핵심은 ‘레벤스라움(즉 독일인의 생활공간을 의미)’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과 수많은 연설을 통해서 ‘또 다른 땅을 정복한 뒤 그곳의 토착 주민은 동화시킬 필요 없이 내쫓거나 죽이는’방식으로 ‘생활공간’을 확보하겠다는 뜻

일본:가장 ‘덕이 높은’ 자의 정복

p387

불관용은 일본이 세계 제패라는 꿈을 키울 수 있었던 토대인 동시에, 제국주의 일본의 파멸을 불러온 촉매제였다.

일본인은 순수하고 피부가 하얗다?

p391

1. 일본인들은 ‘더 높은 수준의 완벽성과 순수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아시아 대륙 전체를 정화하고 그곳의 불결하고 야만적이고 사악한 주민들을 교정하는데 앞장섰다.

2. ‘죄를 정화’하는 역사적인 과정을 앞당기는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수단이 바로 전쟁. 전투에 나가 목숨을 던지는 행위는 그 무엇보다도 순결한 위업

신성한 사명, 추악한 결말

p396~399

1. 일본이 불관용이 아니라 전략적인 관용 정책을 펼쳤던 점령지가 딱 한 곳이 있다.(포르모사)-->일본이 아시아의 피정복민들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도 있었음을 입증하는 유력한 사례가 바로 이것

-->만일 일본인들이 ‘대동아공영권’의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정책을 추구했다면, 제국주의적인 패권을 장악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2. 불관용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하다. 인종주의적 국수주의만큼 강력한 생명력을 제공하고, 정체성을 창조하고, 전쟁을 부채질하는 힘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3. 사람들의 충성심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관용뿐이다.

11장 21세기 새로운 도전자들 - 중국, 유럽연합, 인도

p401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방식의 전략적인 관용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관용의 방식은 미국이 사용하는 관용과는 크게 다르다.

중국:최저 소득에서 외국인 투자 1위국으로

p403~404

1. 주목해야 할 사실은 중국은 이미 국제무역 전쟁에서 현재의 초강대국 미국과 격렬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

2. 중국은 서양이 ‘불량 국가들’과 상대하지 않으려는 점을 이용하여 특별한 이득을 올리고 있다.(예:앙골라, 버마, 콩고, 이란 등)

3. 이 책의 논지에 따르면, 미국이 오늘날 초강대국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관용적인 태도 덕분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 세계적으로 귀중한 인적 자본들을 흡수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

-->중국이 차기에 세계 최강대국으로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전략적인 관용의 측면에서 미국을 앞질러야만 함

중화中華로 뭉친 사람들

p405

1. ‘중국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략적인 관용의 성공적인 결과라는 사실

2. 중국 문명 자체가 다양한 문화의 거대한 융합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

3. 중국 인구의 92퍼센트 이상이 자신의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을 중국 민족, 즉 한족으로 보고 있다.

4. 13억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충성심과 민족적 정체성을 장악

5. 이 책의 논지에 따르면, 어떤 사회가 지역이 아닌, 세계를 제패하려면, ‘세계에서’ 손꼽히는 중요한 인적 자본을 유인하고 그들의 충성심과 동기를 불러 일으켜야만 한다.

과연 중국은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중국은 이민자의 나라가 아니다.

p415

지금 중국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외국인들이 상주하고 있지만, 정부는 그들을 중국 사회에 통합하려 하거나, 그들에게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여기라고 권장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을 고려하면, 중국은 끌어당기는 자석이 될 수 없다.

민족이라는 이름의 카드

p415~418

1. 중국은 이민자 사회로 변신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중국은 여러 나라의 제도, 과학기술 등을 도입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첫째, 중국은 ‘민족이라는 이름의 카드’를 적절히 이용하여 ‘해외 중국인들’의 자부심과 충성심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슴

2. 뿐만 아니라 중국은 비 중국계 대기업으로부터 서양의 노하우를 얻어내고 있다.

예)제너럴 일렉트릭과 기술이전을 조건으로 9억 달러의 터빈엔진 거래 성사

3. 그러나 나의 논지를 따른다면, 중국은 초강대국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은 세계 일류의 인재들을 끌어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의해 세계를 제패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그러나 중국은 민족을 토대로 한 전형적인 비이민자 국가라는 점에서 그럴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유럽연합:다양성 속의 통일

p421~423

1. 로마제국의 전성기 이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대규모의 유럽 통일이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2. 유럽연합의 영토 확장은 군사적 정복에 의지하지 않고 자격 부여와 동의라는 수단에 의지. 이는 매우 새로운 형태의 전략적 관용

3. 인권을 존중하고 ‘다양성 속의 통일’을 지향하려는 유럽연합의 태도는 유럽의 새로운 도덕적 민감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자유 시장의 이윤 추구 논리를 따른것

유럽연합, 그 관용의 한계

p424~433

1. 유럽연합의 관용은 원칙적으로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한 관용이다. 유럽의 관용은 유럽을 통합시키는 전략일 뿐이지, 제3세계의 이민자들을 유럽으로 끌어들이거나 유럽 국가를 미국과 같은 다민족 이민자 사회로 변화시키려는 전략이 아니다.

-->그래서 재능을 가진 전 세계의 인재들은 계속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2. 이슬람교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현재 유럽의 이민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기에는 6,800만 명의 터키 국민이 독실한 이슬람교도라는 점도 원인으로 작용

-->유럽 내부에 있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슬람 공동체들은 격화되는 민족적, 종교적, 인종적 갈등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3. 유럽연합은 외관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가장 귀중한 인적 자본을 세계 전역에서 유인하여 활용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4. 미국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적극적인 동기를 가진 이민자들이 쉽게 성공할 수 있고, 열심히 일하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곳으로 인식. 이런 까닭에 유럽이 미국의 고급 두뇌를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유럽의 고급 두뇌를 끌어가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는것

인도:급격한 경제 성장, ‘어디에나 인도’

p434

인도가 2006년 세계경제포럼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인도가 잠재적인 세계강국이라는 주장이 더욱 확산.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

p436

1. 인도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인도 국민의 생활수준은 세계 주요 나라들의 생활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2. 인도는 미국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민족적, 종교적으로 다양한 나라

3. 인도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도 민주주의 국가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관용의 승리를 의미한다. 현대 인도 건국의 주역인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는 20세기에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관용을 주창

4. 인도는 분파 간 갈등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 안정된 다민족 민주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세계 각국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가장 진취적인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의 역할을 한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5. 중국의 성장 동력은 주로 제조업 부문. 인도에서는 소프트웨어, 정보 기술, 미디어, 광고, 그리고 볼리우드 영화 산업 등 개인의 독창성과 재능에 크게 의존하는 부문이 크게 번창.-->계층 상승의 기회가 널려 있슴

12장 제국의 미래

미국은 제국이 되어야 하는가?

p448~449

미국이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이다. 초강대국의 의미는 수백 년에 걸쳐서 서서히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가장 단순한 관점에서 보면, 정복으로부터 교역으로, 침략으로부터 이주로, 전제정치로부터 민주정치로 변모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변모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강대국들은 반드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 즉 내가 ‘접착제’라고 표현했던 문제에 직면한다. 21세기 미국의 권력에 대해 전망할 수 있는 열쇠는 이런 옛 것과 새 것의 결합에 놓여 있다.

초강대국으로의 진화

p449~454

1. 미국의 세계 제패는 초강대국들의 역사에서 기나긴 진화가 이루어지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2. 미국이 성공을 거둔 결정적인 비결은 재능 있고 의지가 강한 진취적인 개인들을 배경에 관계없이 흡수하여 그들에게 합당한 보수를 제공한 데 있었다. 처음부터 미국은 이민 덕분에 인적 자본 면에서 다른 나라를 앞설 수 있었다. 인적 자본은 미국의 부와 혁신을 급성장시킨 연료였고, 미국이 확보한 우수한 인적자본은 산업 시대와 원자력 시대, 컴퓨터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정복이 아니라 교역을 통해서 패권을 장악

3. 부를 창조하는 가장 큰 동력은 약탈과 몰수가 아니라 교역과 혁신. 또한 한 사회가 세계적으로 우수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정복이 아니라 이민으로 대체되면서, 전략적인 관용의 양상 역시 달라지고 있다.

민주적인 초강대국과 ‘접착제’의 문제

p455~461

1.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로 초강대국이 된 최초의 사례일 뿐 아니라, 보편 선거권을 인정하는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 초강대국이 된 최초의 사례이다.

2. 과거의 초강대국들의 경우 관용이 그러했듯이, 민주주의 역시 미국에게 한계를 지우는 요소이다.

3. 미국의 ‘민주적인 패권’은 반미주의의 만연과 폭팔이라는 기이한 결과를 낳았다.

4. 미국은 미국인들에 대해서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그늘 아래에서 살고 있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과 미국을 단단히 묶어줄 정치적인 접착제는 미국의 국경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5.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초강대국들 가운데, 멀리 떨어진 피지배민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공통의 정체성을 만드는 과업에 가장 성공했던 제국은 바로 로마

6. 세계적인 패권 국가가 미국 시민권을 외국 주민들에게까지 확장하거나 그들과의 공통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 세계의 다른 모든 나라들에게 자국의 관용의 제도를 전파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7. 9.11 이후 미국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마지막 패권국가

p465

1. 페르시아 제국, 대몽골제국, 당 제국, 그리고 역사상의 다른 모든 초강대국들은 중앙 권력과 피지배민들을 결합시켜주는 공통의 정치적 정체성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런 접착제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미국 역시 과거의 초강대국들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던 적의 어린 분열을 극복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2. 현재의 이라크는 곧 미국 제국의 얼굴이다.

3. 내가 반대하는 것은 미국 제국을 건설하는 것, 즉 다른 나라들의 정권을 변화시키고 미국식 제도를 강제하는 일에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쓰는 일이다.

4. 미국으로서는 전 세계를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개조 하려는 무의미한 일을 자청하기보다는, 자국의 역사와 원칙에 더욱 충실한 채 세계를 위한 본보기, 즉 ‘언덕 위의 도시’가 되려고 노력하는 편이 훨씬 낫다.

5. 앞으로 수년, 혹은 수십년 동안 접착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다. 이 접착제 문제는 오늘의 미국 정치에서 손에 꼽히는 몇 가지 논쟁점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결과다. 여기서는 다음 세 가지 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① 이민

공포감을 조성하면서 미국 국경을 폐쇄하는 지나친 대응은 세 가지 측면에서 잘못된것

첫째, 그런 대응은 외국인 혐오라는 반감을 조성할 수 있다.

둘째,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이민정책은 미국과 비미국인 간에 호의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매우 효과적(예:유학 비자 프로그램과 같이 젊은 외국인들을 일시적으로 미국으로 유인하는 프로그램 역시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

셋째, 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것은 세계에서 가장 값진 인적 자본을 끌어들이고 동기를 부여하는 면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앞질렀기 때문

21세기 미국의 이민정책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미국은 적극적인 유인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미국은 모든 계층의 이민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고 선착순 혹은 추첨 방식의 이민 경로를 대폭적으로 열어놓아야 한다.

② 다국적기업과 아웃소싱

아웃소싱의 이유는 순정히 경제적인것. 값싼 외국 노동력을 이용하면 미국 소비자들은 돈을 절약할 수 있고, 미국인 주주들의 배당금은 늘어난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 그리고 미국 기업들의 다국적인 활동은 중요한 비경제적인 이득까지도 제공할 수 있다.

과거에 번영을 누렸던 초강대국들은 하나같이 해당 지역 지도층의 협조를 구하고 그들을 등용하는 등 이들 지도층에게 초강대국의 성공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초강대국에 속해 있다는 귀속감을 제공했다. 이런 접착제가 바로 초강대국의 강성과 장수의 비결이었다.

③ 일방주의와 다자주의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인들은 세계 정치에서 미국의 역할에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여러 나라의 협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세계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예:환경오염, 기근 등). 이를통해 다른 나라들과의 연대감, 즉 결속감과 공동의 목적의식까지 창조할 수 있다.

6. 만일 미국이 건국 이후 성공에 성공을 거듭할 수 있었던 비결을 재발견하고 제국을 건설하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다면, 몇 십년이 지난 후에도 세계의 초강대국, 그것도 강압과 군사력에 의지하는 초강대국이 아니라 기회, 역동성, 도덕성을 갖춘 초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다.


Ⅲ. '내가 저자라면'

작금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부실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닌데 그로인해 새삼 미국의 위상과 영향력을 더욱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런차에 에이미 추아의 ‘제국의 미래’는 기존의 패권 국가들을 통한 초강대국의 발전사와 그중 특히 미국의 역할 및 위상에 대해서 다시금 되짚어보는 시간을 만들게 해주었다.

저자는 과거 초강대국으로 불리웠던 고대 제국(페르시아, 로마, 당, 몽골)을 거쳐 스페인, 네덜란드, 무굴, 영국, 일본, 독일, 중국, 유럽연합, 인도 등의 나라의 성장배경 및 쇠퇴 원인을 재조명 하고 있다. 여기서 일관되게 흐르는 저자의 시각은 예시된 나라들의 성장의 키워드를 ‘관용’으로 보고 있고 반대로 쇠퇴의 원인제공을 불관용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전략적 지배 방법으로 관용을 채택한 나라들은 어김없이 제국의 반열에 올랐었다. 정복된 민족을 멸시하는 대신 시민권 등을 통해 자국의 문화를 권력과 특권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도록 유혹하고 다른 민족의 전통과 지식, 관습을 받아들인 로마. 자국의 관습을 강요하지 않고 최고의 인종적 관용과 세계주의를 통해 팍스몽골리카를 실현한 몽골. 유대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을 받아들여 유럽의 중개인으로 우뚝섰었던 네덜란드. 유대교도, 위그노교도, 스코틀랜드인들을 진입시키고 활용케해 세계적인 패권국가로 비상한 영국 등이 그예이다.

반면 이처럼 관용이 제국 성장의 밑거름이기는 하지만 또한 붕괴의 씨앗으로 작용을 하여 무너진 나라들도 있다. 관용적인 정책에 반해 각나라의 정체성의 인식을 관여치 않아 결국 자국에 동화시키게 하지못해 무너진 최초의 패권 국가인 페르시아와 로마제국. 한족의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았고 많은 권력을 부여함에 반해 한 외국인(안녹산)의 난으로 인해 패망한 당. 국내에서의 관용과 해외 식민지에 대한 관용 정책 사이에서의 모순으로 무너진 네덜란드. 강력한 개방과 계몽주의적 관용 개념의 실천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종적, 민족적 편견을 극복할 수 없었던 대영제국 영국 등이 또한 그예들이다.

제국 또는 초강대국의 위치에 올라 있다가 이처럼 쇠퇴된 나라들에게는 공통의 속성들이 있었다. 그것은 지배된 나라와의 끈을 이어줄 접착제 즉, 공통의 강력한 매개체적인 역할이 제대로 없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중앙권력과 피지배민들을 결합시켜주는 공통의 정치적 정체성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정체성의 부재로 인해 고대의 아케메네스 왕조는 다양한 민족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공동의 규범을 옹호하게 할 만한 특성이 없어 결국은 무너지게 되었고, 로마도 동쪽과 북쪽의 민족들을 동화 시키고 유지할 수 없어 제국 통치에 반발하고 독립을 선동하게 만드는 결과를 파생 시켰다. 또한 몽골도 정치적 정체성(대몽골 민족 혹은 ‘펠트 천막에 사는 민족’)을 확립하는데 성공 하였지만, 비 몽골 민족들과 국가들을 포용할 수 없어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런 공통된 정치적, 언어적, 문화적 ‘접착제’의 필요성은 현재의 패권국가인 미국에게서도 절실히 요구되는 과제들일 것이다.

또한 저자는 독일과 일본의 사례를 통해 극단적 불관용이 무서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런 불관용을 토대로 한 사회는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제시함으로 향후에 일어날수도 있는 또다른 나라들에게 경각심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본인의 조국이기도한 미국의 제국으로의 성장배경과 조건 앞으로의 미결과제 등에 대해서 논한다. 현재의 미국은 관용을 통해서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성장한 전형적인 사례이고 그런 미국의 강한 국력을 유지하고 있는 참된 비결은 인적 자원에 있다. 미국은 19세기 이후 노동력 필요 및 상대적인 개방성과 다원주의로 인해 많은 이주민들을 받아 들였고 이런 이주민들을 통해 미국은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되었다. 이들 이민자들의 노동력과 재능은 서부 개척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이어지는 미국의 성장과 성공을 추진한 원동력 이었다. 이민자들이 이루었던 혁명적인 기술적 약진의 사례로 자국의 산업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새뮤얼 슬레이터는 세계 최고 수준의 영국 직조 기술을 본국으로 이전하였고, 아인슈타인 등 유럽에서 건너온 과학자들로 인해 세계 최초의 핵무기를 미국은 갖게 되었다. 또한 마이크로칩의 발견이라는 기술 분야의 혁명을 통해 컴퓨터 시대를, 벤처 자본주의라는 금융 분야의 혁명을 통해 실리콘밸리를 탄생 시켰다. 이것은 모두 미국이 이민자들의 능력과 진취성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덕분에 얻어진 결과였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모습과는 달리 저자의 언급대로 현재 미국의 그늘 아래에서 살고 있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과 미국을 단단히 묶어줄 정치적인 접착제는 미국의 국경 밖에는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더욱이 9.11 이후 미국의 태도는 자국의 이익에 우선시하는 행동들로 더욱 전환이 되었다. 서두에서 언급한 현재의 글로벌 금융위기속에서 자구책의 수단으로 자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본격적으로 불을 댕기고 있는 곳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이다. 이를통해 미국은 자국의 철강 제품 구입을 의무화하는 내용인 ‘바이 아메리칸’ 규정을 추가하여 미국을 최대수출시장으로 삼아온 캐나다, 유럽연합 등이 즉각 반발하고 나서게끔 하고있다(09년 3월 7일 매일경제 인용). 이는 저자가 우려했던 제국으로서의 위상과 앞으로의 마지막 패권국가로서의 역할에 의문점을 갖게하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즉, 가장 중요한 접착제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미국 역시 과거의 초강대국들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던 적의 어린 분열을 극복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에 저자는 접착제를 해결할 3가지의 단서를 제공한다. 개방적인 이민정책의 지속, 해당 지역의 귀속감을 제공할 수 있는 다국적 기업과 아웃소싱, 다자주의가 그것이다.

한주동안 ‘제국의 미래’ 책을 읽으면서 다양성의 재조명 및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한 관용이라는 주제와 함께 여행을 함께 했었다. 개인의 이익만이 아닌 자국의 이익만이 아닌, 타인을 위한 세계화를 위한 노력이 더욱 필요로 하는 시기이기에 ‘관용’이라는 화두가 더욱 절실하게 와닿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관용을 표방하는 저자의 입장에서도 철저한 객관성의 견지는 유지하기가 조금은 힘들었던 모양이다. 필요 이상으로 동양권인 나라들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사실의 시각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한 세세한 곳을 기술(예:몽골 제국 설명시 그들의 잔인성을 강조하기 위해 적군의 눈과 귀에 은을 녹여 들이부었고, 믿음을 저버린 여자들은 몸에 있는 모든 구멍들을 꿰매어 죽였다 등)함으로써, 상대적인 서양 제국주의의 우월성을 은연중 드러내게 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또한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여러나라들의 흥망성쇄를 통해 제국의 성장 및 몰락 배경에 대해 더욱 알게 되었지만, 저자가 언급 했었던대로 현재의 미국의 성장 원동력과 미래의 제안들에 더욱 많은 비중을 할애한 것 등에 조금은 아쉬워 보이는 점들이 엿보였다. 물론 이점도 어쩔수없는 나의 주관적인 시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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