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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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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7일 11시 36분 등록

[북리뷰 14] 백범일지

 

1. 저자에 대하여

 

백범(白凡) 김구

본관은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海州) 출신이다.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젊어서는 동학교도 였고, 잠시 불교에 귀의해서 승려(법명:원종)로도 살았으며, 예수교 신자였던 김구는 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죽기 전에 병자성사를 받았다. 천주교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그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온통 한 가지 뿐이었다. 묻고 또 물어도 그의 대답은, 그의 소원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대한의 자주독립,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다. 그 하나를 선택한 대가로 그는 일본인을 살해하였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며, 다시 고국을 떠나 머나 먼 타국에서 일제의 눈을 피해 떠돌아야만 했다.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고,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시간은 아예 인연이 멀었다.

 

동학의 두령으로, 불교의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살았다가, 개신교의 신자였던 김구는 죽기 전에 천주교의 세례를 받는다. 그가 거쳐 간 종교를 놓고 그의 정체성을 가늠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겠으나, ‘나의 소원’의 한 구절은 그의 이러한 이색적인 경력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는 어는 한 학설이나 종교, 사상으로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결론지어 말한다. 백가지 꽃과 나무가 한데 어울려 피어야만 각자의 사상도, 새로운 문화가 성장할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자이고, 배우는 자이고, 또한 기회만 닿으면 가르치는 일을 했다. 해주 상놈의 자식으로 배우고 싶어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설움이 그를 키웠고, 그렇게 배운 글로 세상의 이치를 보게 되었다. 그 후로 그는 기회가 닿는 대로 배우고 깨우치는 일에 공을 들였으며, 무력이 아닌 문화의 힘으로 세계 속의 우리 민족의 비전을 꿈꾸었다.

 

흔히 구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김구를 민족주의자로 구분하기도 하겠지만, 최소한 4개의 종교를 거쳐 간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그 무슨 ‘주의’에 얽매일 사람이 아니다. 그가 살던 시절은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고 있었던 시절이었고, 1917년 러시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여, 국내를 물론이고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 강한 동기가 부여되고 있었던 때이다. 또한 미국의 패권이 세계 무대로 확대되면서, 정치 시스템으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 확장되어가고 있던 그 한 가운데에 그가 서 있었다. 임정에 대한 지지와 통일과 분열, 사상투쟁과 음모, 배신, 체포, 암살 그 파란의 시절이 그를 키웠고, 그는 우리 민족의 큰 별이 되었다.

 

 

2. 가슴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눈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니

 

영욕에 초연하여 그윽이 뜰 앞을 보니 / 꽃은 피었다 지고

가고 머무름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가 바라보니 /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는구나

맑은 창공 밝은 달 아래 /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어도 / 불나비는 유독 촛불만 쫓는다

맑은 물 푸른 숲에 먹을 것 가득하건만 / 수리는 유난히도 썩은 쥐를 즐긴다

아! 세상에 불나비와 수리 아닌 자 / 그 얼마나 될 것인고?

 

백범출간사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었다. p13

 

끝에 붙인 「나의 소원」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타나내는 것이다. p14

 

이 책에 나오는 동지들 중에 대부분은 생존해서 독립의 일에 헌신하고 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많다. .... 이들은 모두 이제 없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p15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p15

 

상권

인․신 두 아들에게

세상일이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내 나이는 쉰셋이건만 너희들은 겨우 열 살, 일곱 살의 어린 아이니, 너희들의 나이와 지식이 더할수록 나의 정신과 기력은 쇠퇴할 따름이다. p19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 경력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p20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아버님은 네 형제 중 둘째로 가정 형편이 빈한하여 장가들지 못하고 노총각으로 지내다가 스물네 살에 삼각혼이라는 괴이한 혼인제도로 결혼하였다. 삼각혼이란 세 성이 혼기의 자녀를 서로 교환하는 제도로. p23

 

어머니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나의 태몽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p24

 

앞으로 내 일생이 기구할 조짐이었는지 나의 탄생은 유래없는 난산이었다. 산통이 있은 지 근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니는 태어나지 않았고 산모의 생명은 위험하였다. 친척들이 모두 모여 온갖 의술 치료와 미신 처방을 다 하였지만 효력이 없었다. p24

 

나는 서너 살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어머님께서 보통 종기를 치료할 때와 같이 대나무침으로 따고 고름을 파내어서 내 얼굴에 마마자국이 많다. p24

 

그 집 아이들이 “해줏놈 때려주자”고 공모하여 이유 없이 매질하였다. p25

 

나는 다시 그들에게 실컷 얻어맞고 칼까지 빼앗겼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는 칼을 잃어버린 죄로 부모님께 말씀드리지도 못하고 내내 시치미를 떼었다. p25

 

엿을 맛있게 먹고 있을 즈음 아버님께서 들어오셨는데 나는 반동강 난 숟갈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내가 사실 그대로 아뢰자, 아버님께서는 “다시 그런 짓을 하면 엄벌하겠다”고 꾸중하셨다. p26

내 나이 일곱 살, 죽도록 맞은 적이 있었다. 죄는 엿 먹은 죄였다. 나는 진짜로 엿장수가 준 엿을 받아먹은 죄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아끼시던 신발 훔치지 않았고, 그 엿장수가 들고 대문을 나오다 나를 만났을 뿐이었고, 나는 그렇게 받은 엿을 동생들과 착하게 나누어 먹었을 뿐이었는데. 그렇다고 말하였지만, 끝내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믿지 않았고, 길거리까지 끌려나와 엿장수와의 대질신문에서도 그의 말을 믿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고 죽을 만큼 맞았다. 나중에는 잘못했다고 빌지 않는다고 맞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망갈 수도 없었고, 더 이상 믿어주지도 않는 이야기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그냥 때리는 대로 이 악물고 맞았다. 결국 빗자루가 두 동강이 나서야 매타작은 끝이 났다.

이불 뒤집어쓰고 훌쩍이며, 나는 몇 번이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는 이 집 자식이 아니다. 저 분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다. 나는 분명히 주워 왔을 것이다. 내일 아침, 집을 나갈 것이다.”

 

아버님은 한마디 말도 없이 빨래줄로 나를 꽁꽁 도여 들보에 달아매고 매질하기 시작하셨다. 어머님도 들에서 안 돌아오신 때라 말려줄 사람도 없고 나는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p26

 

아버님이 사람을 잘 때리셨던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고 순전히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셨다. p27

 

해마다 세밑이 되면 우리집에서 닭, 계란, 연초 등을 다수 준비하여 어디론가 보냈고, 그러고 나면 감사의 표시로 역서와 해주먹 등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p27

 

결국 준영 삼촌을 결박하여 집에 가두어 놓고, 집안 식구끼리 운구하여 장례를 치르고, 종증조부 주최로 가족회의를 열어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결의하고, 준영 삼촌의 발뒤꿈치를 잘랐다. 홧김에 가족회의에서는 그러한 결정을 내렸지만, 다행히 힘줄이 상하지는 않아 병신이 되지 않았다. p29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 ... 나는 이 말씀을 깊이 새겼다. p29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 자제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며 주저하신다.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p30

 

선생님은 나에게 은밀하게 “네가 늘 우등하였으니 이번에는 일부러 못 외는 것처럼 모른다고 대답하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내가 선생님 부탁대로 하였더니, 그날은 신존위 아들이 일등했다고 닭 잡고 술상 차려 잘 먹었다. 그런데도 결국 그 선생을 해고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소위 ‘상놈의 짓’이다. p31

어머니는 제법 공부 잘 하는 큰 아들을 은근히 자랑스러워 하셨지만, 그러면서도 1등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꼭 2등만 하라고 하셨다. 왜냐고 묻자, 1등하면 선생님이 불러서, 간식 쏘라고 할 터인데, 우리 집 형편이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하니, 왠만하면 1등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님이 전신불수가 되셨다. 그때부터 나는 공부도 못하고 아버님 심부름만 하였다. 워낙 가난한 살림에 의사와 약을 대야 하니 가산은 곧 탕진되었다. p32

우리 아버지도 그러했고, 우리 집도 그러했고, 나도 그러했다. 교통사고, 위암, 반신불수, 인생의 절반은 병원생활, 암투병, 무덤 같은 집. 나는 알아서 포기할 줄 알아야 했다. 그것이 효도이고, 가족을 위하는 일이었다.

 

“밥 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서에나 주력하여라.” ... “왕후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으리오” .. “칼을 뽑아 뱀을 베었다”... “빨래하던 부인에게 밥을 얻어먹었다” p33

 

2. 시련의 사회 진출

내가 시부를 지어 과문6체에 능통하더라도 아무 선생 아무 접장 모양으로 과거장의 대서업자에 불과할 것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 p38

서울의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어이, 김박사”라고 부르면, 최소한 3명 이상이 쳐다본다고 한다. 발에 걸리는 것이 박사란다. 그렇게 흔해 터진 박사공부, 자격증이나 하나 더 붙이는 일이라면, 굳이 돈쓰고, 시간 쏟고, 아쉬운 소리하고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나는 박사과정을 밟지 않기고 맘먹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나는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내 상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도 귀격, 부격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몸에 천격, 빈격, 흉격 밖에 없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 산다면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p39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니 역시 막연하였다. p39

그것은 김구 생각이다. 상도 좋고, 몸도 좋고, 마음도 좋다면야 요즘 세상에 짱이다. 얼짱! 몸짱! 맘짱! 사내라면 누구나 그렇게 이성의 마음을 끌어보고 싶은 욕망 왜 없겠는가. 당췌 그렇게 타고 나지 못한 자기 팔자, 인정하기 전까지는 힘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먹고 살기도 어려운 판에, 성형수술하고, 몸매관리해감서 살 수 없는 것 아니잖은가. 가끔씩 홍명보 같은 남자를 보면, 질투가 난다. 참 괜찮은 남자잖은가. 맘쓰는 것도 훌륭하고. 솔직히 말해,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있는 집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다. 키고 있고, 얼굴도 좀 잘 생기고, 문학과 예술에 안목을 가진 그러면서도 요트나 승마, 패러글라이딩 같은 스포츠도 즐기고 기분 우울하면 자기 비행기 몰고 눈부신 하늘에서 한 나절 쯤을 보내도 멋지지 않겠는가. 그리고 저녁에는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서, 아프리카 아이들의 위한 자선행사를 주관할 줄 아는 사람.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 줄줄 아는... 여유 있는 미소를 가진 젊은 귀족. 나는 그런 사내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솔직히.

 

내 나이 열여덟이 되는 계사년(1893년) 정초, 나는 고기도 먹지 않고 목욕하고 머리 땋고, 푸른 도포에 녹대를 매고 포동 오씨 댁으로 방문하였다. p41

 

“어른이 되어도 당신께 공대를 듣지 못하련만 하물며 저는 아직 아이인데 어찌 공대를 하나이까.”

“천만의 말씀이오.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동학 도인이기 때문에 선생의 교훈을 받들어 빈부귀천에 차별 대우가 없습니다. 조금도 미안해 마시고 찾아오신 뜻이나 말씀하시오.” p41

 

또한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는 작년 과거장에서 품은 비관이 연상되었다. p42

나에게 맑스-레닌주의가 그러했다. 가난이 억울했고, 부모님의 삶을 통해 본 계급적 착취가 분했다. 뒤집을 수만 있다면, 뒤집고 다시 세울 수 만 있다면... 맑스-레닌주의는 너무도 매력적이었고, 선명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나에겐.

 

“동학군이란 한 놈도 쓸 만한 것이 없는데 그대가 좀 낫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보고 싶어 왔노라.” ... “손님과 면담하는데 이렇게 무례한 것은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멸시하는 것이다.” ... “선생들이 이와 같이 먼 길을 오신 것은 저에게 좋은 방책을 가르쳐 주고자 하심이 아닙니까?” ... “요새 동학군 접주라는 자들이 호기충천해서 선배를 무시하는 판국에, 군도 동학접주 아닌가?” ... “먼저 가르쳐 주신 후 제가 실천하는 것을 보신 다음에, 다른 접주와 마찬가지인지 아닌지 판단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p49

패거리가 만들어내는 문화가 있다. 자기 대장한테는 저리 해야 하는 줄 안다. 그게 잘하는 일이고, 그게 충성인 줄로 안다. 패거리는 있어야 하지만, 패거리 속에 갇히면 더 큰 것을,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 그릇만큼 밖에는 모른다.

 

1. 군기정숙 : 병졸에게 서로 절하거나 경어 쓰는 것을 폐지할 것.

2. 민심을 얻을 것: 동학당이 총을 가지고 마을을 다니면서 곡식이나 돈을 빼앗는 강도적 행위를 금지할 것.

3. 현자를 초빙하는 글을 발포하여 경륜 있는 인사를 다수 구할 것.

4. 전군을 구월산 안에 모아 군사 훈련을 실시할 것.

5. 재령, 신천 두 군에 왜놈이 무미 수천 석을 쌓아 두었으니, 그것을 몰수하여 패엽사로 옮겨 양식에 충당할 것. p50

 

최고회의는 기회를 보아 나에게 동학 접주의 감투를 벗기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은 나에게서 병권을 박탈하자는 야심이 아니요, 나의 몸을 보전케 하려는 방책이었다. p52

 

“홍역도 치르지 못한 대장이로구려” p53

 

과연 이용선은 총에 맞아 죽었고, 입은 옷이 전부 불타고 있었다. 나는 이용선의 머리를 껴안고 통곡하다 저고리를 벗어 이용선의 머리를 감싸고 동네사람들을 지휘하여 정성껏 묻어주게 했다. 그 저고리는 어머님이 내가 동학 접주로 지도자 노릇한다고 처음으로 지어 보내신 명주저고리였다. p54

 

“아니요, 이용선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복수는 의리에 당연하나 경군과 왜병이 아직 구월산을 소탕하지 못하는 것은 산 밖에 이동엽 부대가 크고, 산속 패엽사의 우리 부대가 험한 산세에 의거하고 또한 정예부대라고 탐문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부대의 싸움 소식을 듣고서 경군과 왜병은 즉각 이동엽 부대를 섬멸하고 즉시 패엽사를 점령할 것이니 복수를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p54

 

새벽 굼벵이는 살고자 흔적 없이 가버리나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 p58

 

선생님! 선생님은 저를 분명히 살펴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불과 스무 살에 일생의 진로에 대하여 스스로를 속이고 그르쳐 허다한 실패를 경험한바 민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선생님이 저의 자격과 품성을 밝히 보시고 종은 점이 있다면 사랑도 하여 주시고 교훈도 하여 주십시오. 그렇지 못하다면 저의 발전은 고사하고 선생님 높으신 덕에 누를 끼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p62

유시민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에게는 박현채라는 스승이 있다. 그리고 고인이 되신 박현채라는 분에게는 다른 많은 제자들도 있다. 그들은 유시민을 일컬어 스승의 뜻을 거스른 자라 말하고, 스스로 제자라고 말하기를 부끄럽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민족경제론을 쓰고, 가르치셨던 선생님의 뜻을 어겼다는 것이다. 유시민은 말한다. 선생님이 살아 계셨다면, 선생님도 다시 쓰셨을 것이라고. 스승과 제자. 타고 넘어야 할 벽.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p62

 

절은 사람이 너무 상심 말고 매일 나와 같이 노세. 갑갑할 때는 우리 원명이와 산 구경도 다니며 놀게. p63

선생님은 늘 즐기라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p63

 

고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의 교법이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 듯하였다.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하였다. 항상 무슨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는 말을 하시면서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p64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 만고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 없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는 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충성하는 일사보국 한 가지 일만 남아 있네. p66

 

3. 질풍노도의 청년기

통탄할 바, 저 왜적은 나와 함께 같은 세상을 살 수 없는 원수이다. p78

 

그 사람들은 단지 청나라 군사들이 오면 그것을 보고 내응하겠다는 것이지, 의리상 내응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에게서 청병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면 정세는 세부득이 반대 방향으로 가고 말 것입니다. p82

 

의병이 오나 군대가 오나 촌사람들에게야 무슨 관계가 있겠소?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이 눈 속에서 밤을 지내다가 무슨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속히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오. p85

 

아비만큼 아들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나 내가 노형보다 아드님에 대해 좀더 알는지 알겠소? 아드님이 못생겼다고 그다지 근심은 마시오. 내가 보건대 창수는 점상입디다. 인중이 짧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라든지 걸음걸이라든지, 장래 두고 보시오.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는지 알겠소? p86

 

모름지기 의리 있는 선비라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저승에서 머리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이승에서 머리 깍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런데 안진사가 단발한 의향까지 보였다는 것은 그에게 의리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88

 

내 나이 네댓 살 때에 아버님이 어떤 술집에서 함경도 정평 사라인 김치경이란 함지박장수를 만나 취중에 말이 오가다가 그에게 8,9세 된 딸아이가 있음을 보고 농담같이 청혼을 하였다. 김치경은 혼사를 승낙하였고, 사주까지 보내었다. .. 동네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나를 놀려대곤 했다. “너는 함지박 장수의 사위다. 너의 집에 데려온 처녀가 곱더냐?”

 

이 혼사를 방해하면 돈푼깨나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짐짓 방해를 놓은 것이었다. 아버님이 분기탱천하셔서 곧 김치경의 집에 가서 싸움을 하였으나 이미 다 지나간 일이었다. 김치경은 그때 벌써 자기 딸을 인근 동네에 돈을 받고 혼약해 놓은 상태였다고 한다. p90

 

평양에 도착하니 관찰사 이하 전부가 단발을 하고, 길목을 막고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들고 머리를 깎고 있었다. 단발령을 피하려고 시골로나 산골로 숨어들어가는 백성들의 원성이 길을 가득 메운 것을 목격하고, 나는 머리끝까지 분기가 가득하였다. p90

 

무작정 소리내어 우는 것이 우리 목숨을 구하는 길이 아니니, 뱃일을 사공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선객 모두가 일제히 힘을 합해서 빙산을 밀어내자고 하였다. 빙산이 순식간에 물러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추위 속에 몸을 움직이면 운동이 될 터이니 유익할 것 같았다. p92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 오르기 시작했다. p94

 

그리고 내게 강권하기를, 본가로는 가지 말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북 할 일이 아니오.” p100

 

“피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시당초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실행한 이상 자연히 법사에서 사법적인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 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할 수 있다면 죽더라도 영광된 일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집에 앉아서 마땅히 당할 일을 당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p100

 

이창매가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 나와 나를 보고, 너는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책망하는 듯싶었다. ... “얘, 네가 이제 가가서는 왜놈 손에 죽을 터이니, 맑고 맑은 이 물에 너와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모자 같이 다니자.” p103

 

숨이 끊어진 잠깐 동안, 나는 고향으로 가서 평소 친애하던 재종동생 창학이와 놀았다. 고시에 “고향이 눈앞에 늘 아른거리니, 굳이 부르지 않아도 혼이 먼저 가 있도다”라 하였는데, 실로 헛말이 아니었다. p106

 

“오늘도 왜놈이 왔으니 기운껏 호령을 하시오.” 한다.

그때는 김윤정에게 약간의 양심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오늘까지 소위 경성부의 참여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 내가 신문받던 자리를 연극장으로 삼고 나를 배우의 하나로 많은 사람들 앞에 구경시킨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심지가 곧지 못한 삶의 행위로 그 역시 그때는 의협심이 좀 생겼다가 날이 오라지는 대로 마음도 따라 변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p111

 

이때부터의 옥중생활을 대략 들어 쓴다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독서...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p115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15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임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 한때 구차스럽게 사는 것을 위하여 생명보다 중한 광명을 버릴 수 없으니 과히 우려치 말라는 내용으로 과히 우려치 말라는 내용으로 회답을 보냈다. 그대로 옥중생활을 계속하며 구서적보다 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p126

 

“그대가 오늘 밤 당번이니 50전어치 아편을 사 가지고 밤에 실컷 먹으라.” p131

 

“그렇지 않다.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인이 되어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부그러운 마음 견디기 어렵거든, 하물며 저와 같이 더러운 죄인의 죄인이 되고서야 죽을 때까지 그 부끄러움을 어찌 견디랴?” p131

 

그때는 최후 결심을 한 때였으므로 누구든지 내 갈 길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결단을 내버릴 마음으로 쇠창을 손에 들고 정문인 삼문으로 바로 나갔다. 삼문을 지키던 파수 순검도 비상소집에 갔는지 인적이 없었다. p132

 

4. 방랑과 모색

선생은 내 나이가 어린 것과 의관을 못 갖추어 입은 것을 보고는 초면에 경어를 사용치 않고 낮춤말을 사용하였다. 나는 정색하고 선생을 나무랐다. “남의 사표가 되어야 할 사람의 마음이 그처럼 교만하니, 어찌 아동들을 잘 가르칠 수 있겠소? 내가 일시 운수 불길하여 길에서 도적을 만나 이 모양으로 선생을 대하게는 되었으나, 결코 선생에게 하대를 받을 사람은 아니오.” p137

 

역시 모른다고 말을 하는 눈치가, 조덕근과 상의한 후 나는 조덕근보다 중죄인이니 이미 출옥한 바에는 다시 보아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고 잡아떼는 수작이었다. p139

 

오늘 살인을 하고 가는 길이로구나. 그 자가 밤에 내 얼굴을 대하면서 심히 무서워하더니, 공종열의 말을 곧 내 명령으로 생각하고 제 자식을 안아다가 강변에 버리고 도주한 것 아닌가? 가뜩이나 가슴 속이 울적한데다가, 세상에 아무 죄 없는 어린 아이를 죽이게 하였으니 얼마나 큰 죄악인가. 일생을 위하여 심히 비관된다. p142

 

화담 서경덕 선생이 동지하례에 차례하여 크게 웃으니, 임금이 물었다.

“경은 무슨 일로 무리 가운데서 혼자 웃느냐?”

“오늘 밤 마곡사 상좌승이 밤중에 죽을 끓이려고 불을 때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죽솥에 빠져 익사하였는데 다른 중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죽을 퍼먹으며 희희낙락하는 것을 생각하니 우습습니다.” p146

 

나는 열 살 남짓 될 때까지 대나무가 1년에 한 마디씩 자라는 줄 알았고, 실제로 대나무를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장흥, 보성 등 각 군에서는 여름철에 콩잎을 따서 바로 국도 끓여 먹고 또 뜯어 말려서 그것을 삼동에 먹기도 하고, 소나 말에 실어서 내다 팔아 장터의 주요 상품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p147

 

주인은 그래도 할 말이 있다. “... 그러니 품삯을 많이 지불하여 상놈 집에 의식주가 풍족하게 되면 자연히 양반에게 공손치 못하게 될 것 아니오? 그래서 그같이 품삯을 작정하여 주는 것이오.” p148

 

대개의 노동자들에게 조직이 있어, 논 주인이 일꾼을 고용할 때는 그 지방조직의 우두머리와 교섭하여 일꾼을 결정하게 된다. 일꾼을 결정할 때, 미리 의복, 품삯, 휴식, 질병 등에 대한 조건을 정하고, 실제 감독은 그 우두머리가 맡아 한다. 만일 일꾼이 태만하여도 논 주인이 마음대로 책벌하지 못하고 우두머리에게 고발하여 징계한다. p149

 

전주에서 본 것은 이런 것이다. 전주에서는 관리와 사령이 서로 원수지간이기 때문에 당시 진위대 병정을 모집하는데 사령이 입영될까 두려워하여 영리의 자식과 조카들을 전부 병정으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머리에는 상투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군모를 높직하게 만들어 쓰고 있었다. p151

 

“노형, 어찌 하시려오? 세상사를 다 잊고 중이 되십시다.”

“이 자리에서 노형과 결정하면 무슨 필요가 있겠소? 일단 절에 들어가 봐서 중이 되려는 자와 중을 만들 자 사이에 의견이 맞아야 할 것 아니오? ”

곧 몸을 일으켜서 마곡사를 향해 안개를 헤치고 걸음걸음 들어갔다. p152

 

하룻밤 사이 청정법계에서 만 가지 생각이 다 재로 돌아가버린 듯한 터였다. 나는 중이 되기로 승낙하였다. p153

 

내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p154

 

나는 깜짝 놀랐다.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다니던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평생의 한이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평범한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 문중에서는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 장작도 패고 물도 길었다. 하루는 앞내에 가서 물을 지고 오다가 물통 한 개를 깨뜨렸다. p155

 

견월망지(見月忘指) 달을 보되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생각지 말라. 어떤 목적을 세웠으면 그 목적을 이루는 동안 생겨나기 마련인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 p156

 

그러나 나는 풍진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망명객의 임시 은신책으로든 어떻든 간에, 오직 청정적멸의 도법에만 일생을 희생할 마음은 생기지 아니하였다. p156

 

봉(鳳)자를 파자하면 ‘범조’(凡鳥)가 된다. 범조는 ‘못난 사람’이란 뜻이다. 존경하는 사람을 찾아가 만나지 못하면 못난 사람이 다녀갔다는 의미로 봉자를 쓴다. p159

 

나는 매일 푸줏간에 가서 고기를 한 짐씩 져 올랐다. 승복을 입은 채 드러내 놓고 고기를 먹었고, 염불을 하는 대신 시(詩)를 외웠다. .... 처음에는 주점 주인이 주는 대로 소면ㅇ르 먹다가 나중에는 육면을 그대로 먹었다. 불가에서 소위 말하는, “손에는 돼지머리를 들고, 입으로는 거룩하게 경전을 왼다”는 구절과 가깝게 되었으니, 평양성에서는 시쳇말로 걸시승이라 하였다. p161

 

이제는 창수가 장성하였으니 스스로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은 아버지는 계속 부모님께 말씀하셨다.

“형님 내외분은 창수놈 글공부시킨 죄로 온갖 고생을 하셨으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시오?”

작은 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 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p165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줄 수 있다.”는 말과 같이 내가 이만치 알고도 끝까지 피하거나 종적을 감춘다면 그 역시 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p171

 

세상에는 아주 조그마한 일도 크게 부풀려 전하는 경우가 허다허니 소문과 실물이 용두사미인 때가 많고, 저 역시 소문과 달리 졸렬하기 짝이 없으니 매우 낙심될 것입니다. p173

세상의 말이란 것이 제 편할 대로 보고 싶은 것만 더 크게 보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더 크게 듣는 법인가 보다.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결국 다시 돌아 내 귀로 들어올 때면, 없던 이야기도 붙여져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어 돌아온다. 황당한 경우가 한 번씩 있다. 가끔 대학시절의 이야기를 선배들에게서 전해 들었다는 후배들을 만나는 경우가 그렇다.

 

창수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 지어주었다. 이름은 김구(金龜)라 하고, 호는 연하(蓮下), 자는 연상(蓮上이)라 고쳐서 행세하기로 하였다. p174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먼저 그 나라 사람들의 경국대강을 보고 오랑캐의 행실이 있으면 오랑캐로, 사람의 행실이 있으면 사람으로 대우함이 옳을 것입니다. p178

 

아!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p180

 

우리 할머님이 임종하실 때 아버님께서 손가락을 자른 것도 이런 절박한 지경에서 하신 일이었는데, ...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작 어찌 효자가 되랴. p181

 

나는 상놈의 딸은 고사하고 정승의 딸이라도 재물을 따지는 결혼은 죽어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p182

 

할머니 말씀에 결혼 후 공부를 시키든 무엇을 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지만 지금 세상에는 여자라도 무식해서는 사회에 용납될 수 없고, 여자 공부는 20세 이내가 적당한데 1년이라도 허송하는 것은 안 된다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 처녀의 말소리가 내 귀에는 들이지 않았지만, 할머니와 그 모친은 처녀가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p184

 

장의택은 장련의 선비 집안으로 구학문에도 조예가 있고 신학문에 대한 포부도 해서지방에서 제일이었다. 그는 큰아들 응진을 경성과 일본, 미주로 유학시키고 자신도 신교육에 노력하는 지사이므로, 구식 양반들에게는 더없는 비난을 받았다. 장씨는 국민에게 신학문 지식을 보급하는 것이 자기의 급무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p185

 

나는 깜짝 놀라 즉시 처가에 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낭자는 병세가 위중한 중에도 매우 반가워했다. 병은 만성감기인데 약을 쉽게 구하기 어려운 산중이라, 2,3일 후에 마침내 죽고 말았다. 내 손으로 직접 염습하여 남산에 안장하고 묘 앞에서 영별하였다. p186

 

처음에는 교회의 권고를 듣지 않는다 하여 교회가 책벌을 선언하였으나, 끝내 불복할 뿐 아니라 구식 조혼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은 교회로서 잘못이고 사회악풍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항의하였더니, 군예빈이 혼례서를 작성하여 주고 책벌을 해제하였다. p192

 

5. 식민의 시련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p196

 

“그대의 지금 말은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칠십 노구로 며칠 뒤 왜놈의 노예문적에 편입될 나쁜 운명을 가진 나 같은 놈을 가리켜, 팔자 좋다는 것이 무엇이냐?” p201

 

작은 아버지는 의아해 했다.

“너 같은 난봉꾼을 누가 도와주어서 그렇게 사느냐?”

“작은 아버지 보시기에 저의 난봉은 위험하지만, 난봉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게지요.” p202

 

나는 깜짝 놀랐다. 이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p214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 p220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세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p221

 

그러고 보니 국가는 망하였으나 인민은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평소 우리 한인의 정탐을 몹시 미워해서 여지없이 공격하곤 했는데, 나에게 공격을 받은 정탐배까지도 자기가 잘 아는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밀고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준 것이 아닌가. p225

 

“나의 생명은 빼앗을 수 있거니와 내 정신은 빼앗지 못하리라” p223

 

그런 때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p228

참 솔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 더럽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자기 자신의 밑바닥까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대로 적어내고 있다. 그의 자서전이 위인전으로 읽혀지지 않는 이유다.

 

손의관은 눈물이 비오듯하며 분이 머리끝까지 났으나, 더없이 사랑하는 두환을 심하게 꾸중하기는 싫고 나에게 분풀이를 할 참이었다. 그런데 두환이가 내가 온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서는 분한 마음이 갑자기 다 어디로 갔는지,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해지는 것이었다. “선생님, 이것이 웬일이에요? 내가 죽거든 머리를 깍아주시지 않고.” p233

 

하나하나 일마다 양심을 본위로 삼아서, 삿된 마음이 생길 때마다 먼저 자기를 자책하지 않고는 감히 다른 사람의 그릇됨을 탓하지 못하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학생들과 친우들 간에 충실하다는 신망을 받고 지냈고, 매사에 자기로부터 실천하여 남에 미치는 것이 습관이 되었건만, p238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p238

 

“관리로서 법률을 무시하는 아니냐?”

하고 내가 반문했더니, 관리를 희롱한다고 미친개 모양으로 분기탱천해서 죽도록 매질하였다. 그러나 왜놈이 나를 뭉우리돌로 인정하는 것은 참 기쁘다.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는 생각을 가슴 깊이 새겼다. 나는 죽는 날까지 왜마의 소위 법률이란 것을 한 푼이라고 파괴할 수만 있다면 계속 행하고, 왜마를 희롱하는 것을 유일한 오락으로 삼고, 보통사람으로 맛보기 어려운 별종생활의 진수를 맛보리라고 결심하였다. p239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

...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옷을 짜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는데,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 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느냐? 명색이야 의병이든 도적이든, 왜놈에 순종하는 백성이 아니라고 인정하여, 종신이니 10년이니 감금하여 두는 것으로도 족히 의병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 않으냐? 남아는 의로 죽을지언정 구구히 살지 않는다고 평일에 어린 학생을 가르치더니, 네가 금일 살아 있는 것이냐, 죽은 것이냐? p244

 

“저는 하는 수 없이 금일부터 음식을 먹습니다. ”

나는 전하여 일러주었다.

“죽이고 살리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부처님이라도, 감옥 안에 들어와서는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자중하시오.” p245

 

다른 동지들의 면회정황을 들어보면, 부모 처자가 와서 서로 대면하면 울기만 하다가 간수의 제지로 말 한마디도 못하였다는 것이 보통인데, 우리 어머님은 참 놀랍다고 생각된다. p246

 

“당신 일본 법전을 보지 못했소? 천황이나 황후가 죽으면 대사면이 내려 각 죄인을 방송하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므로 우리 수인들은 머리를 숙이고 하느님께 ‘메이지란 놈을 즉사시켜 줍소서’하고 기도합니다.” p248

 

표면으로 나도 붉은 옷을 입은 복역수이나, 정신상으로 나는 결코 죄인이 아니다. 왜놈의 이른바 ‘신부민’이 아니고, 나의 정신으로는 죽으나 사나 당당한 대한의 애국자이다. 될 수 있는대로 왜놈의 법률을 복종치 않는 실제 사실이 있어야만, 내가 살아 있는 본뜻이 있는 것이다. p249

 

수인의 표면 감독은 왜놈이 하고, 정신상 지도는 우리 동지들이 하게 되었다. p249

 

장덕준 의사가 『동아일보』 조군기자로 북간도에 출장하여, 왜놈들이 독립군이나 평민이나 잡히는 대로 끌어다 개 패듯 하는 광경을 보고서 의분을 참지 못해 왜놈 대장에게 엄중하게 항의하였는데, 그 대장놈이 사과하고 장의사를 문밖에서 작별한 뒤 비밀리 체포하여 암살하였다는 당시 밀탐이 있었다. p250

 

보통 사회에서는 아무리 막역한 친구들 사이라도 “내가 뉘집에 가서 강도나 살인이나 절도를 하였노라”고 발언할 사람이 없거늘, 하물며 초면 인사 후에도 서슴지 않고 “내가 아무개를 죽였다” “아무개 집에 가서 불한당질 한 것도 나와 아무개가 하였다”고 기탄없이 이야기한다. 세상이 다 알듯이 그 죄로 벌을 받는 중이라면 그럴 수 있겠으나, 스스로 숨겨서 밝혀지지 않았던 사건도 기탄없이 공개한다. p255

 

“평소에 귀 단체의 조직 훈련을 연구하여 보았으나 단서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연구의 목적이 도적을 박멸함이 아니고 후일 나라 일에 참고, 응용하자 함이었으니, 명료하게 설명하여 줄 수 있겠습니까?” p258

 

주로 자격자에 대하여 70여 종의 악형으로 고문을 해서, 자기가 도적이라고 말하면 그 자리에서 흔적 없이 죽여 버리고, 끝끝내 도적이 아니라고 고집하는 자는 포박은 푼 후에 외진 곳에 데리고 가 며칠간 술과 고기를 잘 먹여가지고 입당식을 거행합니다. ... 식을 마친 후에는 입당자까지 영소하여 예정 방침에 의해 정식으로 강도질 한 차례를 하고, 빼앗은 장물을 신입당원까지 고르게 나누어줍니다. p262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p264

 

“일본법에도 신앙 자유가 있고, 감옥 법에도 수인들이 불교만 신앙하라는 조문이 없는데, 어디 근거하여 이같이 무리한가? 일본의 눈에는 도인권이가 죄인이라 하나, 신의 눈에는 일본인이 죄인 될지도 알 수 없다.” ... 급기야는 교화 시간에 불상에 절하는 것 한 가지 일은 수인 자유에 맡기낟는 전옥의 교시가 있었다. p265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 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p267

 

당신도 여기서는 별 꿈을 다 꾸지만 사회에 나가만 보시오. 도적질하다가 징역 산 놈이라고 누가 받자를 하오? 자연 농,공,상에 접촉을 못하지요.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과 같이 도적질 해본 놈은 거기만 눈치가 뚫려서 다른 길은 밤중이구려. p269

 

왼쪽 맞은 편 집도 역시 물상객주인 안호연의 집인데, 안씨 역시 나와 부모님께 극진한 정성을 다하던 노인으로, 그도 그 집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 나는 출입시 종종 마음으로 절하고 지냈다. p271

 

6. 망명의 길

“어린 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 하더라” p273

 

나는 소작인 준수규칙 몇 조를 반포했다.

-도박하는 소작인의 소작권을 허락하지 않음

-학령 아동을 입학시키는 자는 소작지 중 가장 좋은 논 두 마지기씩을 더해 줌.

-학령 아동이 있는데 입학시키지 않는 자는 소작지 중 좋은 논 두마지기를 도로 회수함.

-농업에 근실한 성적이 있는 자는 조사하여 추수시 곡물을 상으로 줌. p279

 

정정화의 녹두꽃에 의하면 최준례 여사는 형편이 어려워 외국인 선교회에서 무료로 시술하는 홍구 폐병원으로 옮겼는데, 그곳은 일본 조계지이므로 백범은 부인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였다. 곽낙원 여사가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최준례 여사는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후였다. p287

 

기미년에 중국으로 건너온 이후 지금까지 10여 년, 그간 지내온 일에 대하여 중요하고도 진기한 사실이 많으나, 독립 이전에는 절대 비밀로 할 것이므로 너희들에게 알려주지 못함이 극히 유감이다. 이해하여 주기를 바라고 이만 그친다. p291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p296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p298

 

자유를 잃으면 자실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p298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첫째, 소위 한일합병의 참된 의미를 그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베트남 인도에서의 영국, 불란서 식민정치를 절충하려는 왜놈의 독계를 꿰뚫어 보는 인사는 100분의 2,3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합병 후 제1착으로 안악 사건을 조작해낸 것과, 제2차로 선천 105인 사건의 참학 무도한 것을 보고 나서는 “언제 망하려나”하는 악감정이 격발될 기분이 농후하였다.

둘째,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이상 두 가지 원인으로 만세운동이 폭발되었다. p300

 

나는 반문하였다.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데 제3국제당의 지휘, 명령을 받지 않고 우리가 독자적으로 공산혁명을 할 수 있습니까?” 이(이동휘)씨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불가능하오” 나는 강경한 어조로 말하였다.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니, 제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p310

 

당시 한인 공산당은 세 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째는 상해에서 설립된 상해파로 그 우두머리는 이동휘이고, 둘재는 이르쿠츠크파로 그 우두머리는 안병찬, 여운형 등이었다. 셋째는 일본에서 공부핟ㄴ 유학생들로서 일본에서 조직된 엠엘파로 일본인 후쿠모토 가즈오와 기준연 등을 우두머리로 한 것인데, 비록 상해에서는 세력이 미약하나 만주에서는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p312

 

공산당들은 상해의 민족운동자들이 자기의 수단에 농락되지 않음을 깨닫도 남북 만주로 진출해서, 상해에서보다 심백 배 더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이상룡의 자손은 살부회까지 조직하고 있었다. 살부회에서도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회원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아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너는 애 아비를 죽이고 나는 네 아비를 죽이는 것이 규칙이라 하였다.p314

 

중국 백성들은 한인 한명의 머리를 베어 왜놈 영사관에 몇십 원에, 심지어 3~4원에 팔아 넘기기도 하였다. 어찌 중국사람들뿐이랴. 그곳 우리 한인들은 비록 중국 경내에 거주하였지만 처음에는 가가호호에서 해마다 독립운동 기관인 정의부나 신민부에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세금을 내었다. p314

 

“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기게 된다. ” p315

 

엄군의 첫 부인 임씨는 구식 부인으로 아이가 없었다. 내가 자기 집에 갔다가 나올 때면, 문 밖까지 따라나와 전송하며 은전 한두 개씩을 내 손에 쥐어주며,

“아기 사탕이나 사 주세요” 하였다. 그것은 자기 남편이 존경하는 노선배를 친절히 대접하기 위함이었다. p317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나는 돈을 준비하는 이외에 폭탄 두 개를 구입하였다. .. 하나는 일본천황을 폭살하는 데, 다른 하나는 자살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사용법을 가르쳐 부고 자살이 실패하여 체포될 때를 대비하여, 신문에 응할 문구까지 지시하였다. p325

 

내 얼굴에 자연 처연한 기색이 있었던지, 이씨가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하고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이에 나 역시 억지로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차에 올라 앉은 이봉창은 머리 숙여 마지막 경례를 하였고, 무정한 차는 한번 경적소리를 내고 홍구 방면으로 질주하였다. p326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인 청도 『민국일보』는 큰 활자로,

한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 p328

 

뜻을 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룬다고 했으니 안심하시오 ... 그런데 지금 신문을 보니 왜놈이 전쟁에 이긴 위세를 업고,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천황의 천장절 경축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며 군사적 위세를 크게 과시할 모양이오. 그러니 군은 일생의 대목적을 이날에 달성해 봄이 어떠하오? p331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p336

 

날마다 왜놈들이 미친개와 같이 사람을 잡으려고 돌아다녀 우리 임시정부와 민단 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부녀단체인 애국부인회까지도 전혀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동포들 사이에서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p338

 

이번 홍구사변의 주모책임자는 따로 있으면서, 자기가 사건을 감추고서 관계가 없는 자들만 잡히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p339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그녀는 주매신이 영귀하게 된 것을 보고 다시 부인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주매신은,

“물 한 동이를 길어다 땅에 쏟은 후, 다시 주워 담아 한 동이가 되면 같이 살자.”고 하였다.

p346

 

우리나라에서 한,당,송,원,명,청, 각 시대에 관개사절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북쪽지방보다 남쪽지방에 사절도 다니던 우리의 선인들은 대부분 눈먼 사람이었던가. 필시 환상으로 국가의 계책이나 민생이 무엇인지를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통탄스런 일이 아니리오. p352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은 유혈사업이니 한 번은 가능하거니와 민족운동 성공 후에 또다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절대 반대”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런데 러시아 국부 레닌이 “식민지 민족은 민족운동을 먼저 하고 사회운동은 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을 하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 없이 민족운동을 한다고 떠들지 않는가. p352

 

사회주의 이념의 도입 초기에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의 연관성에 대해 혼란이 많았다. 초기에는 사회혁명으로 민족문제도 동시에 해결한다는 좌경적 입장이었으나, 점차 민족문제의 선차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백범은 이러한 변화, 즉 사회혁명을 강조하는 1단계 혁명론에서 민족해방을 중시하는 2단계 혁명론으로의 전환이 레닌의 지적에 무조건 따른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p353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특무공작으로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지 않소? 장래 독립하려면 군인을 양성해야 하지 않겠소?” 말하기에 나는,

“감히 부탁할 수 없었으나 그것은 진실로 바라는 바요. 문제는 장소와 재력이오.”라 대답했다. 그리하여 장소는 낙양분교로 하고, 학교 발전에 따라 자금을 지원한다는 약속하에 1기에 군관 100명씩을 양성하기로 결의하였다. p356

 

그로부터 소위 5당 통일회의가 개최되니 의열단, 신한독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미주대한인독립단이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이 탄생하였다. p358

 

5당 통일로 된 민족혁명당은 족족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또 한 개 생기고, 미주대한인독립단은 탈퇴하고,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혁명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같이 분열되는 내용은 겉으로는 민족운동을 표방하고 이면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한다는 것이었다. p360

 

그런데 공근은 자기의 가족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 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하지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 p362

 

어머님은 우리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은 것을 보고, 매일 저녁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p363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그런데 미주, 하와이에서 회답이 오기를, “통일은 찬성하나, 김약산은 공산주의자요. 선생이 공산당과 합작하여 통일하는 날, 우리 미국 교포와는 인연이 끊어지는 줄 알고 통일운동을 하시오.” p378

 

종전에 우리나라는 노복을 사용하였으나, 국가가 병탄된 뒤 경향에서 동포들의 양심 발동으로 “내가 일본인의 노예가 되어 어찌 차마 동포를 종으로 사용하랴” 하고 자연히 노복제를 물리치고 고용제를 사용하였다.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 평생 ‘고용’ 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p379

 

‘군의 불행으로 인하여 우리 사업에 다대한 지장이 생겼으나 그것을 이제 어찌하리오. 그러나 군은 편히 쉬시라! 그대의 부인, 그대의 아들은 내가 안전하게 보호하리라.’

무정한 차는 비석조차 보여주지 않고 그대로 질주해버렸다. p389

 

괴이한 장례도 겪었다. 조소앙의 부모는 다같이 70여 세의 고령이었는데, 모친이 별세한 뒤 부친이 물에 빠져 자살하고 말았다. 정에 못 이긴 죽음인지 세상을 비관한 죽음인지 모르겠지만 보기 드문 일임에는 분명하다. p390

 

6. 해방 전후의 대륙

“금일 금시로부터 아메리카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은 시작되었다.” p396

 

담화하던 중 홀연 전화소리가 울렸다. 축주석은 놀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중경에서 무슨 소식이 있는 듯하다”며 전화실로 급히 들어가더니, 뒤이어 나오며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p398 “아! 왜적이 항복”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 우리 광복군은 계획하였던 자기 임무를 달성치 못하고 전쟁이 끝나 실망 낙담하는 분위기에 잠기었고, 반면 미국 교관과 군인들은 매우 기뻐하여 질서가 문란한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p399

 

그때 「14개조 원칙」을 결정하였다. 입국하려 할 때에 미국 측은 군정부가 서울에 있으니 임정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라고 통보하였다. 그리하여 입국 문제로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결국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기로 결정되었다.

22) 미국무성에서는 “북위 38도선 이남의 지역이 미군에 의해 군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군정이 끝날 때까지 정부로서 행사하지 않으며 군정 당국의 법과 규칙을 준수할 것에 동의한다.”라는 서약서를 김구, 임정 측에 받아들일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김구와 임정은 이 서약을 받아들인 후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p400

 

비행장에는 내외 친우들이 환영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그 비행장은 바로 홍구 신공원이었다. ... 시내에 들어와서 알고 보니 그 신공원 축대 위에 올라 인사하던 곳이 바로 13년 전 윤봉길 의사가 왜적 시라카와 등을 폭살한 곳이었다. p407

 

7. 조국에 돌아와서

48년 전 무심히 보았던 글귀를 금일 자세히 보니,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p412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열사의 유골을 환국시키게 하고 국내에서 장례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였다”는 기별을 듣고, 영접차 특별열차로 부산을 향하였다. p412

 

눈짐작으로 어머님이 앉으셨던 자리를 찾아보았다. 묘와 산천은 옛모습 그대로 나를 환영하였고, 좌우 추종하는 경관들도 그때 나를 구속해가던 그 경관들과 흡사하였다. 그러나 문득 뒤를 돌아보니 그 옛날 나를 따라오시던 어머님 얼굴만은 뵈올 길이 없으니, 앞이 캄캄하여 쏟아지는 옛 추억의 눈물을 금할 길 없었다. 중경에서 운명하실 때,

“나의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 p421

 

나의 소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p423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p424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날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p424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p425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p425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나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p425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p426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p427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어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어려운 것이다. p427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고,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p427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이 실로 여기에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p428

 

그러므로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p428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 개인 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p429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의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국론, 즉 국민의 의사의 내용은 그때 그때의 국민의 언론전으로 결정되는 것이어서, 어느 개인이나 당파의 특정한 철학적 이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특색이다. p429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p430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 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p430

 

역대의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에 보태는 일이다. p431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p431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사아갈 수 있을 것이다. p431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 투쟁의 정신을 길렀었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p432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p432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낳아서 국토의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p433

 

3. 내가 저자라면

결국 무엇을 제대로 쓴다는 것은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자서전과 같이

쓰려는 내용이 곧 ‘자신의 삶’일 경우 남다르게 살아 온 자신만의 이력은 글 쓰는 입장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글감이기 때문이다. 흔히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명상과 성찰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이유가 바로 글과 삶의 모습이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몇 장의 낡은 흑백사진들과 그가 직접 썼다는 글씨들, 그의 모습이 자서전의 내용과 참 잘 어울린다.

- 최준례 묻엄. 남편 김구 세움. : 엄마를, 아내를, 며느리를 묻고서 사진을 찍는 가족들의 심정은 각각 어떠했을까.

- 태극기 앞에서 선서를 마치고 찍은 윤봉길과의 사진 : 죽으러 가는 길, 또 하나의 젊음을 제단에 바치는 김구... 젊은 시절 자신처럼.. 아니 차라리 자신이 직접 나서도 싶었을 테다.

- 1934년 남경. 9년 만에 뵙는 어머님과 인, 신 : 아무 말도 없고, 웃음도 없이 굳게 다문 얼굴들 속에 그들의 삶을 읽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거처도 없이 떠돌면서 지인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신세지면서 조차, 그는 우는 아이를 달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눈물 감추고 흘리는 사람이었고, 쫓기는 몸이면서도 농기구 하나 소홀히 보지 못하였다. 꼼꼼히 동료들의 이름자를 적어내는 것, 짧게짧게 적은 그의 감성이지만, 깊은 내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글맵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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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saint laurent
2011.05.31 18:18:06 *.111.182.3
Wear your high heels in a sitting position and around the gianmarco lorenzi shoes home first. After a period of gianmarco lorenzi pumps time they will become comfortable and you gianmarco lorenzi boots will probably forget you are even wearing them.If you are giuseppe zanotti shoes planning to wear heels outdoors or at a club on the weekend, wear giuseppe zanotti boots them around the house for a few hours first until they feel nat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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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7 4. 카를융, 기억, 꿈, 사상_저자, 구성 맑은 김인건 2010.03.08 4231
686 [북리뷰 13] 난중일기 [6] 신진철 2010.05.31 4231
685 생각의 탄생 조영재 2009.02.23 4232
684 부끄러움 [1] 차칸양 2009.07.23 4233
683 품격 있는 신화 경영서 “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 [1] 15기 김신웅 2013.10.25 4233
682 [10기 2주차 북리뷰] 죽음의 수용소에서 file [3] 찰나 2014.02.17 4233
681 “그대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 승완 2009.10.15 4234
680 3.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노미선) 별빛 2010.03.01 4234
679 4. 기억 꿈 사상(융) 불가능은 없다. 생각의 차이와 한계... 윤인희 2010.03.07 4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