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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9일 11시 11분 등록

[북리뷰 7]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 Roman Der Archaologie

 

1. 저자에 대하여

 

그는 자유롭고 실험적인 사람이며, 역사의 전면에 부각된 화려한 인생들을 중심으로 고고학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지만, 그 이면에 자칫 모래더미들과 함께 묻혀 지고, 잊혀진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잊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그는 인생의 가치와 목표가 사람의 꿈과 무의식이 잠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현실 속에서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융이나 조셉 캠벨 같은 심리학자가 아니었기에 이러한 신기한 우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라 했지만, 그는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그러한 경험들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2010년 어느 사전에 고고학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펜 대신 삽을 먼저 들 줄 알았던 사람들. 자신의 직관과 상상력을 확인하고 싶어 미치겠고,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난 사람들”이라고.

 

그는 매우 낭만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며, 그가 이 글을 통해서 그려내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열망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가 각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유난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공통점들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프로메테우스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류역사의 시원을 밝히고, 몇 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서 어둠의 비밀을 밝혀내는 일을 하는 고고학 관계자로서 그러하고, 전문적인 소수에게만 닫혀 있던 세계를 다시 많은 이들에게 열어 보이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또한 균형 잡힌 역사적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는 자신이 속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다양한 문명에 대한 애정에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는 않다. 흔히 강대국에 의해 서구에 의해, 기독교에 의해 몰락한 다른 문명들에 대한 애정은 역으로 가해자가 되었던 문명들에 대하여 분노 섞인 비판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이다. 문장의 곳곳에서 역사와 문명을 대하는 그의 이러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여행에 대한 욕망과 광기어린 독서욕, 방송국 심야프로 담당자 및 출판사의 편집장, 그리고 자료수집가 등 그가 보여주는 경력들은 어찌보면 천상 글쟁이로 살아야 할 팔자로 길을 걸어온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책을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아라. 그리고 책을 써라.”

1972년 4월 12일에 57세의 나이로 함부르크에서 사망했다.

 

2. 가슴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예술과 학문은 애국주의를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다. ... 전 세계 인류의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모든 동시대인들이 과거의 유산을 지속적으로 돌보는 가운데 자유롭고 보편적인 상호작용을 할 때만 발전한다. - 괴테

 

현재를 제대로 보고 싶다면 멀리 떨어져서 봐야 한다. .. 정확히 말해 클레오파트라의 코를 더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야 한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

 

머리말

고고학은 모험과 낭만을 찾아 떠나는 결단력과 정신적인 만족을 위해 책과 씨름하는 성실성이 한데 어우러진 학문이며, 모든 시대에 걸쳐 지구 전역을 활보하며 측량하는 학문이다. p19

 

고고학과 더불어 내가 사명감을 느끼는 또 한 가지 분야가 있는데, 바로 특수한 형식의 문학이다. 나는 이 책으로써 그 문학 형식의 기틀을 세우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탰다고 생각한다. p21

 

Ⅰ 조각상 이야기

1 고대의 땅에 오른 사막

이들 토르소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왕비는 유물을 더 찾아달라고 왕을 졸랐다. 베수비오 화산은 1737년 5월 대폭바 때 산기슭이 뚫리고 봉우리 일부가 날아가버렸는데, 그 후 1년 반이 지나도록 나폴리의 푸른 하늘을 인 채 얌전히 서 있었으므로 왕은 왕비의 청을 들어주었다. p27

 

그때 묻힌 석조 유물들이 1700년이 지난 후 다시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유물에 새긴 글에서는 그 도시를 헤르쿨라네움이라고 일컬었다. p29

 

역사에서나 일상에서나 사람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가장 빠른 길인 줄 알고 선택한 길이 알고 보면 가장 멀리 돌아가는 길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폼페이 발굴의 첫삽을 뜬 때는 이전에 델뵈프 장군이 발굴을 시작한 뒤로 3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였다. p29

 

79년 8월 중순, 베수비오 화산은 폭발의 조짐을 보였다. ... 엄청난 굉음을 내며 사봉우리가 갈라지고 하늘에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천둥소리가 울부짖고 번개가 번쩍이는 가운데 돌멩이와 화산재가 비와 함께 쏟아져 태양을 가렸다. 하늘에서 새들이 죽은 채 떨어졌고,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으며, 짐승들은 몸을 숨겼다. 이내 큰물이 길을 막았다. 하늘에서 내린 물인지, 땅에서 솟은 물인지 알 수 없었다. p32

 

내 수명에서 기꺼이 몇 년은 떼어주었을 텐데! p36

 

2 빙켈만과 새로운 학문의 탄생

 

아르칸젤리는 올가미와 칼을 준비했다. ... 그가 쓴 마지막 글이 적혀 있었다. “인쇄 시에는 반드시......” 새로운 학문의 창시자이자 위대한 학자가 여기까지 썼을 때 살인자는 그의 손에서 펜을 떨어뜨렸다. p44

 

3 역사의 흔적은 찾는 사람들

 

그림에 설명을 붙인 사람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작가이 이름도, 작품이 나타내는 인물의 이름도 없는 조각상을 두고 어떻게 그토록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p45

 

아직 미개했던 그 옛날에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진 언어다. 더는 누구도 말하지 않고, 더는 누구도 쓰지 않는다. 그 문자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얼마나 예리한 통찰력으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도대체 죽은 언어에 어떻게 의미를 불어 넣을 수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p46

 

석관의 덮개를 움직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 그 모습은 한 순간 반짝하고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횃불을 비추자 불빛에 모든 것이 흐트러지는 듯했다. 투구는 오른쪽으로 굴렀고, 둥근 방패는 갑옷과 함께 주저앉아씅며, 정강이받이는 하나는 오른쪽으로, 하나는 왼쪽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백년을 견딘 몸뚱이가 공기와 닿는 순간 가루가 되어 산산이 부서졌던 것이다. 횃불에 비친 허공에 금가루가 떠다니는 듯했다. p47

 

1856년 뒤셀도르프에서 해골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오늘날 네안데르탈인의 뼈로 알고 있는 해골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짐승의 뼈라고 판단했다. p50

 

헤로도토스의 문학작품은 오늘날에도 고대의 미술품과 그 작가와 그 연대를 확인하는 데 유익한 정보가 솟구치는 샘으로 통한다. p55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문학작품을 가리켜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학문적 정확성을 벗어난 문학의 자유를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고대인들도 현대인들 못지않게 거짓말을 많이 했다. 그리고 고고학자는 거짓말로 우거진 고대의 덤불을 힘겹게 헤치며 길을 찾는다. p55

 

4 가난한 소년이 쓰는 보물찾기 동화

 

가난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일곱 살 때 어떤 도시를 찾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로부터 39년이 지난 후 그는 꿈을 찾아 나섰다. p57

 

소년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무덤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가산을 탕진한 가난한 목사였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무덤을 파서 브라덴킬의 발이 얼마만큼 자랐는지 확인해보자고 졸랐다. p58

 

 

그리스 미코노스 섬에서 발굴된 높이 1.34m의 대형 항아리 목 부분에 그린 트로이 목마

이 항아리는 기원전 670년경에 제작되었으며, 트로이 제국의 멸망에 얽힌 전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스 미술의 소재로 이용되었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구멍을 통해 정복자 몇몇이 밖을 내다보고 있다. 다른 그리스 전사들은 이미 목마에 바퀴를 단 후 그곳을 떠난 상태다. p60

 

“그래서 나는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무역 사업에서 손을 뗐다.” p62

 

최상의 경제적 성공을 거둔 인물이 소년 시절에 품은 꿈을 좇기 위해 자신의 업무용 선박을 모두 불태웠다. 머릿속이 호메로스 이야기로 꽉 차 있던 그 사람은 역사성을 의심하던 학계의 견해에 맞서 호메로스 이야기를 절대적으로 믿었다. 그리고 문헌학자들의 펜이 수백 권의 책을 통해 흐려놓은 역사를 삽으로 직접 확인시켜주겠다며 일어섰다. 이것이 동화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p62

 

그날 저녁 마을 광장에서는 돈 많고 기이한 어느 외국인이 3000년 전에 죽은 사람들의 후손들에게 <오디세이>의 스물세 번째 연을 읽어주었다. 감동이 북받쳤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p64

 

그리하여 그들은 물이 멋지게 솟아나는 두 개의 샘에 도달했다.

두 개의 작은 물줄기는 소용돌이치는 스카만드로스 강으로 흘러들었다.

한 줄기에서는 더운 물만 흘렀고, 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듯

증기가 물결치며 피어올랐다.

다른 줄기에서는 여름에도 우박같이 찬 물만 흘렀다.

겨울에는 눈이나 얼어붙은 땅처럼 차가웠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운데 스물두 번째 연 147행에서 152행 p65

 

호메로스는 차가운 샘과 따뜻한 샘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성서의 글귀를 있는 그대로 믿었던 과거의 신학자들처럼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시를 글자 그대로 믿었다. 그는 휴대용 온도계로 샘의 수온을 쟀다. 마흔 개 모두 똑같이 17.5도였다. p66

 

고고학자들이 발굴해낸 유물을 보면, 고대의 사람들은 토기를 빚는 일 말고는 한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이 멸망하기 직전에는 모든 토기를 파괴했고, 가장 아름다운 것들만 퍼즐 조각 형태로 남겼다. p67

 

5 아가멤논의 마스크

현실 세계에서 신화의 제국으로 밀려나 있던 사람들의 해골. 그 얼굴은 트로이 성 앞에서 싸운 영웅들다웠다. 비록 세월이 갉아 먹었지만 그래도 영웅의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눈에는 구멍만 휑하고 코는 사라졌지만, 끔찍한 표정으로 일그러진 입은 최후의 순간에 당한 치욕을 말해주고 있었다. p81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다시피 슐리만의 이론은 맞지 않는다. ... 이러한 사실은 그다지 큰 의미를 띠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슐리만이 잃어버린 과거를 향해 또 한 번 큰 걸음을 내디뎠다는 사실이다. p82

 

6 슐리만과 학문

반면, 이른바 ‘정통파 학자들’은 그를 ‘고고학 애호가’일 뿐이라고 깎아내리며 등을 돌렸다. p87

 

저돌적인 작업 방법과 빠른 속도, 거듭된 성공, 학자도 아니고 사업가도 아닌 모호한 신분, 그러면서도 양쪽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 ‘광고와도 같은 성격’의 책 출판.... 전 세계 학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p88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부터 들어보자.

아마추어! 아마추어! 이 말은 학문이나 예술을 애정과 즐거움 때문에, 그 분야에 대해 알고 싶은 열정 때문에 추구하는 사람들을 생업으로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얕잡아 일컫는 말이다. ... 학문이나 예술을 가장 진지한 열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그 일 자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는 사람, 그래서 순수한 애정으로 그 일에 매진하는 사람이다. 최고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은 언제나 이런 아마추어들이었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p89

 

슐리만의 초기 해석과 연대 확인이 거의 다 틀렸다는 사실은 비극적인 실수였다. 그러나 아메리카를 발견했던 콜럼버스도 처음에는 인도를 발견한 줄 알았다. 그렇다고 그의 업적이 작아지는가? p92

 

7 미케네, 티린스 그리고 수수께끼의 섬

그의 시신은 아테네로 옮겨졌다.... 호메로스의 흉상 앞에서 그들은 그리스를 사랑했던,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 관한 지식을 1000년이나 확장시킨 한 남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 아들의 이름은 안드로마케와 아가멤논이었다. p100

 

8 아드리아네의 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가? 크레타의 풍요로웠던 민족의 근원과 종말을 둘러 싼 문제는 고고학을 비롯해 역사 초기를 연구하는 모든 학문에서 여전히 풀지 못한 수수께끼다. p110

 

Ⅱ 피라미드 이야기

오! 어머니 누트여! 영원불멸의 별과도 같은 당신의 날개를 내 몸 위에 펼쳐주소서!

-투탄가멘 왕의 관 뚜껑에 새긴 글 p115

 

9 승리가 된 패배

빛은 네가 입고 있는 옷이구나..... p129

 

영원토록 태양빛을 받는 이 사막은 ‘날씨’를 모른다. 비도 없고, 눈도 없고, 안개도 우박도 없다.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도, 번쩍이는 번개도 없다. 바람이 건조시킨 이 사막은 씨앗을 품지 않는다. 모든 경작지의 흙은 부스러지고 으스러져 알갱이가 되고, 땅은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 이런 사막에 나일 강이 범람한다. ‘강의 아버지, 만물의 창조주 나일강’은 땅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 여러 호수의 물을 먹고, 어둡고 축축한 열대의 나라 수단에 내리는 빗물을 삼키고 부풀어 오른다. 강둑을 모두 넘고, 모래를 덮치고, 사막을 삼키고 진흙을 뱉어낸다. p129

 

한때 제국을 통치했던 사람들의 끝없는 행렬이 이어졌다. 뻣뻣한 자세로, 모든 동작에서 위풍당당하게, 항상 옆얼굴만 보이며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집트 사람의 삶은 죽음을 향한 여로였다.” p131

 

<이집트 기록>은 유럽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유럽에서는 이제 막 과거로 가는 여행이 시작되어 연구에 불이 붙었고,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롤린의 주도로 폼페이를 다시 발굴했다. 학자들은 빙켈만에게서 고고학의 연구와 고찰 방법을 배웠으며, 배운 바를 실제로 써보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다. p131

 

10 샹폴리옹과 세 가지 언어로 쓴 새김글의 비밀

“제가 읽을 거예요! 몇 년 후 제가 크면요!” ... “제가 트로이를 찾겠어요”라고 말했던 그 소년과 마찬가지로 샹폴리옹 또한 확신에 차서 신들린 듯이 목표만을 좇았다. p137

 

신기하게도 샹폴리옹이 배우는 모든 것, 그가 하는 모든 일, 그에게 흘러드는 모든 영향은 이집트 마법의 손아귀에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은 ‘이집트’로 통했다. 고대 중국어를 공부한 이유도 오직 고대 이집트어롸의 연결고리를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p138

 

문제 해결을 위한 열쇠: 세 가지 언어로 글이 새겨진 로제타석 - 각 언어는 상형문자로 쓴 이집트어, 민중문자로 쓴 이집트어, 그리스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돌이 결국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1822년 상형문자 해독에 성공한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은 로제타석과 따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다. p141

 

그들은 예외 없이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했다. 예외 없이 상형문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고집했다. 그 오류는 부분적으로 헤로도토스의 분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ㄹ류의 정신사에서 수많은 오류를 만들어낸 그 경직성이 이번에도 학자들의 뇌를 마비시켰다. 상형문자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와도 같은 획기적인 생각의 전환이 필요했다.

 

11 국가반역 죄인이 해독한 상형문자

네 밭은 개간하라! 젠드아베스타(조로아스터교 경전)에서는 24번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일보다 황무지 24제곱미터를 개간하는 일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합니다. p151

 

1816년 12월에 쓴 글에서 그는 “내 콥트어 사전은 매일 두꺼워져 가는데 그 저자는 야위어간다”고 말했다. 사전이 1069쪽에 이르렀는데도 일이 여전히 끝나지 않자 내뱉은 신음이었다. p153

 

3월 7일 나폴레옹은 수도로 가는 길에 그르노블 성 앞에 섰다. 그는 담뱃갑으로 성문을 두드렸다. 어두운 밤, 횃불이 그의 주위에서 활활 타올랐다. 오페라의 한 장면 같은 세계사의 한 순간이었다. 보루 위에 늘어선 대포에 맞서 나폴레옹은 혼자 서 있었다. 소름끼치는 1분이었다. 포병들이 서둘러 대포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나폴레옹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의 신분으로 그르노블을 떠났던 모험가가 다시 입성했다. p153

 

엘바 섬은 피신처였지만, 세인트헬레나는 형장이었다. 부르봉 왕가가 다시 파리에 입성했다. 그들은 힘이 없었다. 복수를 위해 이를 갈지도 않았다. 그러나 수백 건이 유죄선고가 내려지고 유대인에게 만나가 내리듯 쏟아지는 형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p155

 

위대한 정신적 발견은 한 가지 문제에 대해 끝없이 사고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정신을 훈련한 끝에 얻은 결과다. 따라서 그 발견의 시간이 정확히 언제인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 순간은 의식과 무의식, 뚜렷한 집중력과 흐릿한 몽상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번개처럼 스치는 착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p160

 

12 4000년의 역사가 그대들을 굽어보고 있다!

하워드 카터는 “벨초니가 발굴과 작업에 사용한 방법에 대해 우리는 정당성을 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지면을 통해 밝혔다. p175

 

벨초니는 처음으로 고고학 연구의 고리를 꿰었으며, 그 사슬은 아직도 이어져 있다. p175

 

오스발트 슈펭글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대 사람들에게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180

 

고고학이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고대에 관한 학문을 총칭한다. 유물과 새김글 등 이집트 관련 자료가 대단히 풍부했기에 이집트만을 집중 연구하는 특수 분야가 탄생했고, 이 분야의 학문을 렙시우스 이후 ‘이집트학’이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메소포타미아의 고대에 관한 학문은 ‘아시리아학’이라고 한다. p181

 

명확한 연대 확인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것은 ‘통치기간의 최소 값’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이집트보다 오래되고 인간의 역사보다 오래된 것, 인류보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바로 천체의 운행이다. p183

 

아피스 황소의 무덤은 이집트의 특정한 숭배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우리에게는 낯선, 조금은 섬뜩한 종교 의식이었다. p187

 

이집트의 신들은 후대에 와서야 인간의 모습을 띠었다. 고대인들은 부호, 식물, 동물을 통해 신의 존재를 의식했다. ... 동물의 모습을 띤 신들과 더불어 동물 자체를 숭배하기도 했다. 가장 잘 알려진, 지구상의 동물 가운데 가장 장엄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동물은 바로 멤피스의 신성한 황소 아피스였다. p187

 

혹시 이런 숭배 의식이 너무 괴이쩍다거나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기독교 문화권에서 처녀 임신을 한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하는 종교의식은 어떤가? 다른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숭배를 얼마나 기이하게 여길지 한 번 상상해보라. p188

 

이집트의 유물이니 응당 이집트에 보존해야 했다. p193

 

13 피트리와 아메넴헤트의 무덤

 

오직 명성을 얻기 위한 일이었을까? 단지 영원히 잊혀지지 않으려는 굳은 의지를 돌로써 표명한 것인가? 아니면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인간의 주제를 망각한 권력자의 지독한 오만이었을까? 피라미드 축조의 의미는 이집트의 ‘특별한 종교적 믿음’을 이해해야만 알 수 있다. p201-202

 

이집트인들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인간의 삶은 영원히 계속된다고 믿었다. ‘저승’은 곧 하늘과 땅을 넘은 곳에 있는 세상이며, 죽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저승에서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죽을 때에도 생존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 특히 육신을 보존하는 일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육신을 부패시키는 모든 요인에 대비한 완벽한 보호가 필요했다. 그래야만 육신의 죽음 후 자유로이 떠도는 ‘영혼’이 한때 깃들었던 육체를 다시 찾을 수 있다. 이 영혼을 이집에서는 ‘바’라고 한다. ‘바’와 더불어 수호정령인 ‘카’도 망자의 육신에 찾아든다. ‘카’는 인간이 타고나는 생명력의 화신을 일컫는데, 육신이 죽더라도 ‘카’는 죽지 않고 계속 살아서 망자가 ‘저승’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힘을 보존한다. p202

 

그의 ‘카’는 끊임없이 제물을 요구했고, 따라서 끊임없이 제사를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p203

 

이러한 믿음의 힘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모든 이성의 목소리를 눌렀다. 파라오들의 피라미드는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 끝도 없이 치달은 이기주의의 산물이었다. ... 피라미드는 기독교의 거대 건축물과는 그 기능이 다르다. 성당이나 예배당은 일차적으로 공동체를 위한 신성한 장소였다. ... 피라미는 본질적으로 파라오만을 위해 지은 건축물이다. 오직 그의 육신과 그의 ‘바’와 그의 ‘카’를 위해. p203

 

억측과 가설은 구별해야 하다. 가설은 모든 학문의 연구방법 가운데 하나다. 가설은 확실한 결과를 바탕으로 가능성을 열어주며, 그 가능성 nel에는 언제나 두렷한 물음표가 붙어 있다. 반면 억측에는 제재가 없다. 대부분은 출발점마저도 ‘확인된’ 것이 아니라 그냥 ‘멋대로’

정한 것이다. 결과라고 내놓은 것은 상상의 결과일 뿐이다. 억측은 꿈의 신을 신고 형이상학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외진 길, 가장 어두운 신비의 숲, 잘못 해석한 피타고라스 철학과 유대교 신비주의의 비밀이 우거진 어지러운 들판을 헤맨다. 이런 억측이 논리와 결합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대단히 위험하다.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은 논리에 대해서만 기립박수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p207

 

도둑들은 건축가의 발자취를 더듬었고, 피트리는 도둑의 발자취를 추적했다. p212

 

도둑들의 활약은 암울한 시대에 시작되어 ‘왕가의 계곡’에서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었으며,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현대적 스타일의 형사사건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p214

 

14 왕가의 계곡을 누비는 도둑들

선왕들의 운명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바로 깨달았다. 그것은 비밀유지였다. .. 이네니의 허영심 덕분이다. ... “페하의 암굴묘 축조 사업은 오직 나 혼자 감독했다. 본 사람도 들은 사람도 없다.” ... 아마도 그 작업에는 전쟁포로들을 투입했고, 완공 후 죽였을 것이다. p219

 

왕은 자신의 미라를 위신에 걸맞게 값비싼 장식품으로 치장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위엄을 훼손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유혹은 너무도 컸다. p224

 

그럴 때마다 사제들의 밤 외출은 반복된다. 죽은 왕들은, 영면에 들어야 할 미라들은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가 된다. ... 경찰이 ‘계곡’을 차단한다. 인부들과 짐 끄는 짐승들이 줄을 지어, 안전을 위협받은 묘실에서 대형 관을 꺼내 새로운 은신처로 옮긴다. 군대가 밀착보호를 한다. 그리고 새로운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시 수많은 목격자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p226

 

15 미라

 

1000년 후 기독교 발생 초기에는 은둔자들이 그곳 빈 묘실에 둥지를 틀었다. “왕을 위한 ‘호화저택’은 은둔자들의 좁은 방이 되었다. 영화로운 왕족의 사치 대신 겸허한 은둔자들의 빈곤이 지배했다.” p228

 

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위대한 유적은 슐리만이 트로이를 발굴한 이후 다시 한 번 전 유럽을 긴장과 흥분으로 들뜨게 만들었다. p230

 

카이로 박물관의 가스통 마스페로 교수는 유럽에서 온 편지를 받고는 두 가지 점에서 충격을 받았다. 첫째, 또 다시 값진 유물이 자신의 박물관을 피해갔다는 사실이다. ... 두 번째 사실은 방금 보고 받은 새로운 물건이 제21왕조 시대의 고분에서 나온 부장품이라는 것이다. p231

 

다우드 파사는 거대한 도기 욕조 안에 몸을 쭉 뻗고 시원한 물로 몸을 식히고 있었다. 다우드 파샤는 그를 쳐다보았다.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순간의 인상은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도 늙은 인부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 그의 눈이 나를 뚫고 들어올 때는 나는 뼈가 녹아 물이 되는 것 같았어요. 한참 후 그는 조용히 말했지요. ‘너는 오늘 처음으로 내 앞에 왔다. 이번에는 가도 좋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와서는 안된다. 명심, 또 명심하라.’ p234

 

보물은 3000년을 지킨 자리에 그대로 둘 것이고, 무덤은 오직 아브드 알 라슬 가문을 위해 방부처리된 은행구좌로 생각할 것이며, 집안에서 꼭 필요할 때만 보물을 인출하겠노라고 맹세했던 것이다. p235

 

위대한 두 통치자의 미라를 발견했던 것이다. ...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기원전 1425)와 람세스 2세(기원전 1279~ 기원전 1213), 바로 람세스 대왕의 시신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모세가 투트모세 3세의 궁정에서 성장했다고 믿었다. 모세는 유대 민족의 율법을 전한 사람이며, 그 율법은 서구의 율법이 되었다. 이 두 통치자는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제국을 오래 지킬 줄도 알았다. p238

 

잘한 일일까? 울음을 토하며 자신의 가슴을 치던 그 사람들의 눈에는 브룩시 또한 도둑이 아니었을까? 3000년 동안이나 왕들의 무덤을 훼손한 무도한 사람들과 같지 않았을까? 학문을 위한 일이라는 명분이 충분했을까? p245

 

16 하워드 카터, 투탕카멘을 발견하다

 

불타는 열정이 거둔 극적인 성공 가운데 최고봉은 트로이를 발견한 슐리만과 크노소스를 발견한 에반스가 제일 먼저 차지했고, 그 다음으로는 바빌론과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를 발굴한 콜데바이와 울리를 꼽을 수 있다. 슐리만은 몸소 삽을 들어 땅을 판 최후의 위대한 아마추어였으며, 독자적으로 활동한 천재였다. p247

 

발굴의 초기 선두 주자였던 나폴리의 기사 알쿠비에르도 이와 유사한 행운으로 1748년 4월 6일에 폼페이의 한 가운데 첫 삽을 꽂았지만, 조바심을 누르지 못하고 그것을 다시 메운 후 다른 곳을 파지 않았던가? 그리고 수년이 흐른 후에야 첫 삽을 꽂은 장소가 정확한 지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p252

 

이제 ‘계곡’의 모래알은 문자 그대로 세 번씩 체로 거르고 세 번씩 뒤집은 상태였다. p253

 

카터가 확보한 네 가지 ‘증거’란 소형 금판 몇 점, 파이앙스 잔 한 점, 토기 몇 저과 인장 몇 점이 전부였다. 이 정도의 자료를 근거로 투탕카멘 용의 고분ㅇ르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다니! 아니, 직관에 근거한 확신을 얻다니! 이는 자신의 성공에 대한 투철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p255

 

달빛을 받으며 ‘왕가의 계곡’을 내려왔다. 나귀 등에 몸을 싣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그는 내내 어떤 결정을 내리느라 자신과 싸워야 했다. “모든 것이, 말 그대로 모든 것이 틀림없이 그 통로 뒤에 있었다. 그러니 당장 문을 부수고 발굴을 계속하고 싶었고, 그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극기가 필요했다.” ... 6년에 걸친 노력 끝에 위대한 발견을 눈앞에 둔 고고학자가 고분을 다시 메우고 후원자이자 친구인 카르나본 경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한 일은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이다. p257

 

도둑은 무엇을 찾으려 했기에 전실에 쌓인 금덩이들 사이를 그저 뚫고 지나가기만 했을까? p263

 

17 황금의 벽

 

퍼시 뉴베리는 고분에 있던 꽃다발을 분석해 3300년 전에 피었던 꽃의 종류를 밝혔으며, 꽃과 열매를 바탕으로 투탕카멘 왕이 매장된 계절을 알아냈다. 수레국화와 작은 쇠서나물 꽃이 피고, 구약성서 아가서에서 ‘사랑의 사과’라고 일컬은 맨드레이크와 까마중이 열매를 맺는 시기였으므로 투탕카멘 왕은 3월 중순에서 4월 말 사이에 매장되었다는 것이다. p268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미라 가운데 3300년 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유일한 미라였다. ... “운명은 얄궂은 아이러니로 나타났다. 미라를 가장 훌륭하게 보존한 사람은 금을 훔친 도둑들과 약탈당한 미라를 숨긴 사제들이었다.” 약탈당한 미라와 처음에 매장된 무덤에서 끌려나온 미라들은 일찌감치 기름이 제거되어 손상을 피할 수 있었다. p282

 

가장 오래된 이집트의 철기 유물을 발견한 것이었다. 금이 넘치는 무덤에서 발견한 작은 철 조각 하나,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화사적 자료였다. p282

 

“황금마스크는 투탕카멘을 상냥하고 기품있는 젊은이로 표현하고 있다. 운 좋게도 미라의 드러난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은 제18왕조의 예술가가 얼마나 노련한 솜씨를 발휘했는지, 왕의 얼굴을 얼마나 사실적이고도 정확하게 표현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젊은 왕이 멋진 초상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금속에 새겨 우리에게 선사했다.” p283

 

이 유치한 수다에서 현명한 이성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선사시대 이후 생각만큼 많이 진화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는 말로 씁쓸하게 끝을 맺었다. p288

 

나폴레옹이 원정에 실패하고 샹폴리옹이 처음으로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괴팅겐에서는 어느 학교 선생님이 기이한 새김글 사본 앞에 앉아 있었다. 이 선생님이 사본에 나온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냈을 때는 또 다른 고대 제국에 대한 학문적 정복이 시작되었다. 그 제국은 이집트보다 더 오래된 제국,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던, 바벨탑이 솟았고 니네베(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가 융성하고 또 멸망한 나라였다. p289

 

Ⅲ 탑 이야기

 

아랍인들이...... 거대한 사람 머리를 보여주었다. 그 거상은 그 땅에서 난 설화석고 한 덩이를 깎아서 만든 것이었다...... 나는 그 머리에 붙은 몸통이 날개 달린 사자 혹은 황소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

 

18 성서구절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대에 성서 구절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었으며, 그 구절을 쓴 글자조차 신성했다. 그러나 계몽주의와 더불어 비판이 시작되면서 모든 유물철학이 성서를 비판했고, 그 결과 성서의 구절은 늘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성서의 핵심에 얼마나 많은 사실이 담겨 있는지 밝혀주는 증거도 나타났으며, 후대의 기록자들이 많은 부분을 멋대로 과장했을 가능성도 인정하게 되었다. p293

 

바빌로니와와 아시리아의 제왕들

대중을 상대로 이름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을 풍부한 색채로 물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색채를 구하기 위해서는 전승된 자료가 필요하다. p295

 

“100년 남짓 되는 과거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아시리아 고고학은 자물쇠를 채운 책이었다. 그리고 몇십 년 전까지도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통치자들은 이름만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짧은 기간에 어떻게 2000년도 넘는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쓰고 또 통치자들의 실제 모습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겠는가?” p295

 

19 보타의 니네베 발견

 

구약성서에서 두 강 사이 땅의 북부 지방을 아람 나하라임, 즉 강 사이의 시리아라고 부른다. 그 땅에 신의 분노가 쏟아졌다. 아람 나하라임의 니네베와 니네베 남쪽의 대도시 바빌론을 통치했던 잔혹한 왕들이 하느님 외에 다른 신들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 땅에서 쫓겨났다. 여기가 바로 메소포타미아다. p298

 

거듭 허탕을 치면서도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확실한 정보 하나 없이, 단지 이 언덕을 파면 가치 있는 유물이 나오리라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날이 가고 달이 가도록 파고 또 파도 나오는 것이라고는 아무도 읽을 수 없는 기호로 덮인 금간 벽돌 몇 점과 엉망으로 파손되어 도저히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조각품 파편 또는 너무도 유치해서 아무런 상상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토르소 몇 점뿐이건만, 그럼에도 여전히 삽을 놓지 않는 일이 어떤 일인지 상상할 수 있는가? p301

 

이 소규모 탐사대를 보낸 일로 보타의 이름은 영원히 고고학 역사에 남게 되었지만, 그 아랍인의 이름은 잊혀졌다. 영원히 사라졌다. 보타는 2000년 가까이 꽃피우고 2500년 이상 땅속에 묻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문화 유적에 최초로 세상의 빛을 비춘 사람이다. p302

 

19세기의 학자들에게 성서는 단지 ‘전설모음집’일 뿐이었다. 성서보다는 고대 작가들이 쓴 희귀한 기록을 더 믿었다. 그 기록들은 허황되지는 않았지만 모순적인 진술이 적지 않았고, 성서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보타의 발견은 메소포타미아에 적어도 고대 작가들이 쓴 만큼은 오래된 문명이 실존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서를 더 믿기로 한다면, 그보다 더 오래된 옛날에 문명의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p303

 

20 설형문자 해독

믿기지 않겠지만 이 학자들의 손에는 이미 어떤 제국의 문자를 읽어낼 열쇠가 있었으며, 보타는 그들에게 이 제국의 존재를 증명해줄 충분한 근거를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었다. 문자 해독의 열쇠는 이미 수 년 전에, 보타의 책이 출판된 시점부터 따지자면 정확히 47년 전부터 이미 확보되어 있었다. p307

 

설형문자 체계를 해독하는 데 필요한 기본 지식은 사르곤 왕의 궁전 성벽이 발굴되기 이전부터, 니네베에 대해 성서에 나온 이야기 말고는 알려진 바가 없던 시절부터 이미 갖춰져 있었다. p308

 

재미있게도 설형문자 해독을 위한 결정적인 계기는 학문적 호기심 또는 학문적 욕망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었다. 그 첫걸음을 내디딘 사라은 패기만만한 스물일곱살의 독일 청년이었다. 그는 1802년 괴팅겐의 시립학교 보조교사이던 시절에 설형문자의 첫 자모 10개를 읽을 거라고 내기를 걸었다. 그리고 시대를 통틀어 마땅히 천재적이라 할만한 방법으로 내기에서 이겼다. 재미있지 않은가? p308

 

“술자리에서 이성을 잃고”

아테네 출신 무희 타이스가 광란의 춤을 추는 가운데 제단에서 불덩이를 집어 궁전의 목재 기둥 사이에 던지자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측근들은 술기운에 함께 무희의 행동을 따라 했다는 것이다. “비범한 재능으로 역사를 희생시켜 역사를 만든 일” p310

 

2000년 전 점토판에 새긴 페르세폴리스의 설형문자는 이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골짜기에서 나온 다른 모든 새김글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되었다. p311

 

그로테펜트는 쐐기들이 주로 네 방향으로 나 있는데, 주된 방향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 “세로 쐐기는 항상 뾰족한 끝이 아래를 향하고, 가로 쐐기는 항상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부등호 쐐기도 마찬가지로 항상 오른쪽으로 열려있다. 이러한 점들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설형문자는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모두 수평으로 쓰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보석이나 원통에 새긴 글 옆에 나타나 있는 도형이 문자의 방향을 알려주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 유럽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실이지만, 이는 유럽에서만 당연한 사실이었다. ... 천재란 무엇보다도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볼 수 있고, 복합구조에서 원리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p315

 

반면 그로테펜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한 위대한 유물에 그 역사적 의미를 조명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가장 중요한 발견을 꼽자면 단연 그로테펜트의 설형문자 해독이며, 최초라는 수식어는 오직 그에게만 해당된다. ... 즉, 문자해독이 순차적으로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던 것이다. 어느 영국인이 그로테펜트와는 아무 상관없이 설형문자를 해독했는데, 기이하게도 그로테펜트보다 더 늦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론을 보완한 뷔르누프와 라센보다도 더 늦었다. p320

 

그러나 이 영국인은 선학들이 앞서 이룩한 업적을 능가하는 일을 해냈다. ... 해독의 학문에서 가르칠 수 있는 학문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새김글 자료를 처리해야 하는 많은 사람이 큰 도움을 받았다. p320

 

21 베히스툰 바위의 새김글

 

1837년 페르시아에서 복무 중이던 영국의 육군 소령 헨리 크레스위크 롤린슨(Henry Creswicke Rawlinson)은 베히스툰 산에서 도르래를 타고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단지 바위에 새긴 글을 배끼겠다는 한 가지 목적으로 감행한 모험이었다. p321

 

추락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찔하게 높은 곳에 매달린 채 고대 페르시아어로 쓴 새김글을 베꼈으며, 몇 년 후에는 바빌로니아어로 쓴 글도 베꼈다. ... 1846년 롤린슨은 런던 왕실 아이아학회에 이 유명한 새김글의 정확한 사본을 최초로 제출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번역까지 첨부했다. 설형문자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해독한 사람은 롤린슨이 최초였다. 위대한 승리였다. p324

 

아시아학회의 정도를 벗어난 이 시도로 많은 학자가 가슴 깊이 상처를 입었다. 학문의 존엄성을 무시한 채 대중의 박수만으로 노려, ‘검토’라는 방법을 택한 학회에 기만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1857년에 런던에서 출판된 <아시리아의 키글라트 필레세르 왕의 새김글> (번역:롤린슨, 탈보트, 힝크스 박사, 오페르트)은 각자의 방법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완전히 일치하는 학문적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가장 빛나고 확실한 증거였다. p328-329

 

22 님루드 언덕에 묻힌 궁전

 

사람의 머리를 하고 날개가 달린 이상하게 생긴 짐승이 서 있고, ‘나라의 주인’ 갈가메시의 대형 초상들도 전시되었는데, 그림 속의 길가메시는 사자의 목을 조르는 ‘승리의 영웅’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p330

 

사막 한가운데 널린 폐허의 거석들은 너무도 황량한데, 이곳을 둘러본 여행객들은 어찌 한마디 묘사의 말도 없었을까? 지금 그 땅을, 그 평야를 방랑하는 사람들은 예언자의 말대로 위대한 종족의 후손들일까? 유대인들도 이슬람교도들도 자신의 뿌리는 그 땅에 있다고 믿고 있다. p333

 

2200년 전 이 그리스의 장군이 보았던 폐허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때도 이미 폐허가 되어 있던 곳이었다. 낯선 종족이 부르는 그 도시의 이름은 크세노폰의 귀에서 그리스 사람에게 익숙한 이름과 혼동되어 라리사로 변해버렸지만, 그 도시의 기원을 암시하는 전통은 아직 남아 있다. 그 도시는 님로드 왕(성서에 나오는 사냥영웅으로 고대 아시리아 초기의 왕)이 건설했다 하고, 아직도 그 이름을 보존하고 있는 유적지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주거지였다. p334

 

끝으로 레이어드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 거대한 아시리아의 흙더미들은 내게 발베크 신전(시리아의 로마 유적지)이나 이오니아의 극장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더 진지하고 골똘한 생각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 폐허의 잔해들이 발 끝에 차이는 마을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가 아는 이름이었다. ‘인류의 발상지’와 직접 연관시켜도 될 듯한 이름. 성서에 나오는 이름. 그 마을의 이름은 님루드였다.

(창세기 10장에 쿠시는 함의 아들이고, 함은 노아의 아들이라고 나와 있다. 대홍수 이후 노아의 세 아들과 며느리는 모든 길짐승, 날짐승과 살아남아 자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쿠시는 님로드를 낳았다.) p335

 

1845년 11월 8일 레이어드는 님루드 언덕에서 발굴을 시작하기 위해 뗏목을 타고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내려갔다. p336

 

이와 같은 양가 부조는 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모든 나라, 모든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관람객들은 대부분 잠시 흘끗 보고 지나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부조는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부조에 표현된 내용은 극도로 세밀한 부분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므로, 몇 십 점만 자세히 관찰하면 성서에서 전하는 극악무도한 사람들의 삶, 특히 그 통치자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p341

 

그런데 새로 입수한 정보를 제대로 이용하기도 전에 문제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예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얼마 후 레이어드는 감옥에 갇힌 파샤를 면회했다. 파샤가 감옥에 갇힌 레이어드를 면회한 것이 아니다. ... 자비로운 운명의 여신은 폭군의 횡포를 오래 참아주지 않는다. p345

 

이성과 지혜를 상징하는 데 인간의 머리보다 더 좋은 모델이 있을까? 힘의 상징으로 사자의 몸통보다 더 적합한 게 있을까? 새의 날개만큼 신의 편재를 잘 나타내주는 것이 어디 있는가? 사람머리에 날개가 달린 사자는 결코 아무 뜻 없이 만든 작품이 아니다. p348

 

동방의 지혜가 그리스로 전파되기도 전에 왕과 사제와 전사들이 그 조각상이 지키던 문을 지나 공물을 제단에 바쳤다. 그리스 사람들은 아시리아의 신전에서 알게 된 상징들로 자기네 신화를 꾸몄다. 그 신전들은 불멸의 도시 로마가 건설되기도 전에 땅속에 묻혀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p348

 

스바냐 서 2장 13절에서 15절에 걸쳐 그 무서운 예언은 이렇게 끝난다.

주께서 한밤중에 손을 뻗으시어

아수르를 멸하며

니베베를 황무지로 만들 것이니,

사막처럼 메마른 곳이 되리라.

골짜기에 사는 온갖 들짐승이 그 가운데 진을 칠 것이며,

일락해오라기와 고슴도치도

기둥머리에 깃들 것이며,

창문턱에 낮아서 지저귈 것이다.

문간에는 돌조각이 너저분하고

백향목 들보는 삭아버릴 것이다.

본래는 한껏 으스대던 성, 안전하게 살 수 있다던 성,

‘세상에는 나밖에 없다’고

속으로 뽐내던 성이거늘,

어찌하여 이처럼 황폐하게 되어

들짐승이나 깃드는 곳이 되었느냐?

지나가는 사람마다

비웃으며

꾸짖을 것이다.

 

누가 무엇을 꾸짖는단 말인가? 실로 무서운 예언이다.

세상에 혼자만 남기는 자는 인간이든 신이든 필멸할 것이다.라고 스스로 예언하고 있지 않은가? 불과 2천년전 어느 부족의 작은 마을신이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조차 잊어버린 신, 세상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변화하기를 거부하는 신. 그 신의 운명이 어찌될 것인지를 스스로도 말하고 있다. 자신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스로 손을 뻗어 한밤중에 아수를 멸하였으니,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고, 피로 흥한 자 피로 망하는 인간의 역사의 순리를 신조차 거역하지 못하리. 인간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신의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 이제 우리는 알지. 여전히 신의 이름으로 아집과 독선을 고집하는 자와 그들의 신이 어찌될 것인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선생, 이 돌덩이로 무엇을 할 겁니까? 이 돌덩이에 그토록 많은 돈을 쏟아붓지 않았소? 선생의 고국에서는 선생 말대로 이런 돌에서 지혜를 얻습니까? 카디가 설명한 대로 그 돌은 여왕의 궁전으로 가게 되나요? 그리고 여왕은 믿음이 없는 다른 자들과 더불어 이 우상을 섬길겁니까? 지혜라면, 이 조각상들이 더 좋은 칼, 더 좋은 가위, 더 좋은 도구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지는 않을 거요. 그런 물건이야 영국 사람들이 잘 만들지 않소? 하지만 신은 위대합니다! 성스러운 노아의 시대부터 여기 묻혀 있던 돌이 여기 나와 있소. 아마도 대홍수가 일어나기 전부터 묻혀 있었을 겁니다.

 

영국에 있을 적에 대영박물관에 들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 눈을 씻고 볼래야 영국은 없었다. 전 세계 식민지로부터 힘으로부터 얻은 그 모든 것이 영국이라는 그들만의 오만과 허영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그들의 해는 얼마동안이나 더 지지 않을 것인가. 세이크의 말은 실로 정곡을 찌르고 있다.

 

이 땅에는 1200년 전부터 독실한 신자들이 살았소. 알라에게 영광을! 진정한 지혜는 오직 그 사람들에게만 있었지요. 하지만 그 가운데 누구도 땅속 궁전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어요. ... 그런데 어찌 되었소? 며칠을 가야 닿는 먼 곳에서 온 유럽인 청년 한 사람이 곧바로 그곳으로 가더니, 막대기를 집어 이리로 금을 긋고, 저리로 금을 그었소.

우리는 발 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평생을 살아왔지만, 그 청년이 “여기가 궁이다, 저기가 성문이다”라고 말하며 보여주었소.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해요! 그걸 어떻게 알았소? 책에서 배웠소? 마술로 알아낸 거요? 아니면 예언자가 가르쳐주었습니니까? 오, 선생, 그 지혜의 비밀을 제발 말해주시오!

p353-354

 

우리는 지금 막 둘러본 놀라운 유적의 흔적을 그곳 평지에서도 찾을까 하고 둘러보았으나 헛된 행동이었다. 우리는 꿈을 꾼 것도 같았고, 동방의 장편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았으며, 그 느낌은 점점 더 사실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먼 훗날 이 아시리아 궁전의 폐허가 다시금 초목으로 뒤덮였을 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내가 환상을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의심할 것이다. p359

 

23 조지 스미스의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

사람들은 흔히 이토록 크게 성공한 사람이 더 큰 성공을 위해 불확실한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 레이어드는 그 가운데 쿠윤지크 언덕을 새로운 공격대상으로 골랐다. ... 얼핏 보기에 이러한 그의 결단은 황당해 보였다. 그러나 이 결단을 통해 레이어드는 자신이 단지 운이 좋아 발굴에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p360

 

그 도시는 끔찍한 동시에 위대하고 고귀한 도시였다. 성서에서는 이 도시를 칭송하고 비방하고 또 저주했다. 이제 이 도시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더는 몇몇 예언자들이 전하는 말에 국한시킬 필요가 없어졌다. 레이어드가 삽으로 이 도시를 퍼올렸기 때문이다. p362

 

니네베의 이름은 메소포타미아의 위대한 여신 ‘닌’에서 나왔다. 니네베는 태고의 도시이다.... 센나케리브 왕은 부왕의 임지였던 아수르를 피해 니네베를 제국의 수도로 정했다. ... 아슈르바니팔 왕 치하에서 니네베는 빛나는 영화를 누렸다. 니네베는 ‘상인의 수가 하늘의 별보다 더 많은 도시’였다. p362

 

기원전 612년 ... 니네베가 수도로 존립한 기간은 90년 밖에 되지 않는다. 이 90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 명성이 2600년 동안이나 변함없이 유지되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그 도시를 그토록 위대한 도시의 상징으로 만들었을까? 잔혹성과 권력, 향락과 문명, 발전과 돌연한 멸망, 무도한 죄악과 응분의 처벌이 공존했던 도시가 아닌가? p363

 

아시리아의 도시들은 유일신을 섬기지 않았다. 수많은 신들을 섬겼으며, 때로는 아주 먼 옛날의 신들을 모시면서 그 신들이 지닌 창조적인 힘을 거세시켰다. 거짓과 선동의 도시들이었으며, 정치를 영구적인 사기술쯤으로 생각하는 도시들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니네베였다. p364

 

우리 고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빌론의 폐허에서 찾은 작음 점토판에는 “둘러보라. 사람들은 모두 아둔하다”는 간결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말이 후대의 우리들에게 위안이 될까? 이런 현상의 반복은 일부러 찾지 않더라도 여러 민족의 역사를 시대별로 서로 비교해보면 저절로 드러난다. p366

 

이 점토판들 가운데 고대 메소포타미아 세계를 묘사하는 매우 중요한 문학작품이 있었다. 세계사 최초의 장편 서사시인 그 작품은 위대하고 무시무시한 길가메시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길가메시는 3분의 2가 신이고 3분의 1이 사람인 존재였다. p370

 

길가메시 서사시의 발견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과거에 환한 빛을 던지는 대단히 놀라운 이야기였다. 쿠윤지크 언덕에서 그 점토판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길가메시 이야기가 실제로 어디서 나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었다. p370

 

만약 길가메시 서사시를 그가 발견했다면, 그 또한 호르무즈 라삼과 마찬가지로 그 가치를 즉각 알아보지는 못했을지언정 다시금 빼어난 필치로 깊은 감동을 자아냈을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은 발굴 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완성되었다. 오늘날 모든 세계문학사 책에서 이 작품을 맨 처음 인용하지만, 현대의 저자들은 편하게 열 줄 정도 인용하고 문학적인 가치를 평가하고 모든 서사 문학의 원형임을 시사할 뿐, 작품 전체의 내용에는 별다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p372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슈팀을 찾아 갔다. 옛날 신들이 모든 인간 종족을 벌하였으나, 우트나피슈팀만은 가족과 함께 그 벌을 피해 영생을 얻게 되었다. 우트나피슈팀은 오늘날 모든 인류의 시조였던 것이다. .... 그러나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확실한 발견을 하려는 찰나마다 라삼이 발견한 점토판에는 그 부분이 빠져 있었다. p374

 

전체 내용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길가메시 서사시는 스미스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성서만을 믿는 영국 사회가 크게 동요했다. 이때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로이 의견을 발표하는 멋진 사례가 생겼다. 유명 일간지가 조지 스미스를 돕고 나섰던 것이다. 374

 

고고학의 발굴 역사상 또 한 번 믿기 어려운 기적이 일어났다. 조지 스미스가 길가멧 서사시에서 빠진 부분을 찾았던 것이다. p375

 

대홍수에 관한 기록이었다. ... 우트나피슈팀은 노아였던 것이다! ... 인간에게 호의적인 에아 신은 자신이 수호하는 우트나피슈팀의 꿈에 나타난 신들의 처벌 의도를 폭로했다. 이에 우트나피슈팀은 배를 만들었다. p375

 

설형문자로 기록된 이 길가메시 서사시는 조지 스미스의 시대에 충격적인 물음을 던졌다. 성서에 나온 사실이 가장 오래된 사실이 아니지 않은가? p377

 

24 포화 속을 뚫는 콜데바이

25 바벨탑 에테메난키

콜데바이가 발굴한 유적 가운데 특히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탑과 도로 하나가 있었다. 지구상에 두 번 다시 없는 탑, 두 번 다시없는 도로였다.

바벨의 탑! ...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내자. ...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우리의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p397

 

바빌로니아의 지구라트들은 여러차례 무너지고 파괴되었지만, 그때마다 다시 세우고 새롭게 치장되었다. 이곳의 통치자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햇 지구라트를 지었다. 지구라트는 민족의 성전이었다. p399

 

바벨탑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의 오만을 상징한다. ... 그것은 단지 도로였다. p402

 

또 다시 성서에 담긴 사실으 핵심이 전설의 껍질을 벗어 던졌다. 이곳 바벨에서 사자의 골짜기에 들어간 다니엘은 야훼의 기적을 경험했고, 신앞에는 용도무력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 신은 더 위대한 신, 천 년이 지나면 세상이 신이 될 신이었다. p405

 

26 대홍수

스물일곱 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빠뜨린다면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놓치게 된다.

(1) 최초의 학교 (2) 최초의 경미한 수뢰사건 (3) 최초의 미성년 범죄사례 (4) 최초의 신경전 (5) 최초의 정치적 양원제 (6) 최초의 역사가 (7) 최초의 면세 사례 (8) 최초의 법전인 모세 율법 (9) 최초의 관례에 의한 판결 (10) 최초의 처방전 (11) 초초의 농사월력 (12) 최초의 식물 실험 (13) 인류 최초의 우주진화론과 우주론 (14) 최초의 윤리법 (15) 최초의 욥(16) 최초의 속담 (17) 최초의 동무우화 (18) 최초의 현학적 자구해석의 의한 철학연구 (19) 최초의 낙원 (20) 최초의 노아 (21) 최초의 부활이야기 (22) 최초의 성 조지 (23) 길가메시는 수메르의 영웅이었다. (24) 최초의 서사문학 (25) 최초의 연가 (26) 최초의 도서목록 (27) 최초의 태평성대 p409

 

수메르 문명은 바빌로니아 이전으로 멀리, 훨씬 더 멀리 이어졌다. 그 민족의 시원은 실제로 인류의 발생과 거의 일치하는 듯했다. 성서에 나와 있듯이 신이 내린 대홍수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아 시대의 인간들과 일치하는 듯 보였다. p413

 

여기 쓰러진 사람들은 죽은 왕에게 인간으로서 바칠 수 있는 가장 큰 것, 목숨을 바쳤다. 레너드 울리가 서 있는 곳은 의식적으로 자행된 순장의 현장이었다. p417

 

자신이 발견한 점토층이 이론의 여지없이 홍수에 의해 생긴 지층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 그 홍수가 바로 노아의 홍수였다는 사실에 털끝만큼의 의심도 남지 않았다. 물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이 홍수가 신화 속 대홍수의 소재를 제공했지만, 실제로 우트나피슈팀-노아 한 가족만 빼고 모든 인류를 멸족시키지는 않았다. 그 홍수는 드물게 큰 홍수였지만, 분명 유프라테스-티크리스 강의 삼각주가 형성하는 범람지대에서 상습적으로 일어나는 홍수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p419

 

바빌로니아는 문화 전반에 걸쳐 수메르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후대의 여러 문화와 견주어 바빌로니아 문화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데는 수메르인의 공로가 적지 않았다. p419

 

그들은 미신을 통해 매우 사소한 일과 행동을 신비성의 좁은 틀에 가두었다. 미신은 특정 종교의 광신도와 만나면서 소름끼치는 공포와 선동의 도구가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마년 미신이었다. p421

 

인간의 노력을 단지 그 성과만으로 평가한다면, 수메르인들은 뛰어난 지위에 오르지 못할지언정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인간의 노력을 역사의 발전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평가한다면, 수메르인들은 이보다 훨씬 더 높은 지위에 올라 마땅하다. ... 우리가 성장한 때는 모든 예술의 근원이 그리스에 있다고 믿은 시기였으며, ...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피운 문명의 꽃씨를 리디아인, 히타이트인들이 전해주었다는 사실을, 페니키아, 크레타, 바빌론,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 문명의 뿌리는 그보다 더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모든 민족들에 앞서 수메르인이 있었다. p423

 

Ⅳ 층계 이야기

폐허가 된 도시는 바다 한가운데서 난파한 조각배와 같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돛은 날아가고, 이름은 사라지고, 배에 탔던 사람들은 익사했다. 그 배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배인지, 얼마 동안 항해했는지, 왜 침몰했는지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배의 모양으로 미루어 어느 나라의 배인지 짐작할 뿐, 정확한 사실은 어쩌면 결코 알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 존 로이드 스티븐스가 쓴 발견의 첫 인상

 

27 몬테수마 2세의 보물

스페인군의 지휘관은 새벽 어스름에 자리에서 일어나 부대원을 집합시켰다. 바다와 숲으로 울려 퍼진 힘찬 나팔소리가 먼 산의 메아리로 아스라이 사라질 때, 병사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깃발 아래 모였다. 수많은 피라미드 신전 테오칼리의 제단 성화들이 잿빛 아침 안개 속에 희미한 빛을 발하며 그곳이 수도라고 일러주었고, 동쪽 산맥 위로 떠오르는 태양이 아름다운 골짜기에 환한 빛을 던지자 사원과 탑과 궁전들이 완연한 자태를 드러냈다. 1519년 11월 8일,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의 수도에 첫 발을 디딘 역사적인 날이었다. p427

 

그러나 학문은 아니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그의 열망을 지리학에 대한 열정으로 볼 수는 없다. 코르테스가 몬테수마를 처음 만난 후 1년 뒤에 몬테수마 황제가 죽었다. 그리고 1년만에 찬란했던 멕시코는 파괴되었다. 파괴된 것이 도시뿐이었을까? p429

 

이 문화의 소멸은 폭력에 의한 파멸의 유일한 예다. ... 억압당하거나 저지당하지도 않았다. 절정의 화려함을 뽐내던 시기에 목이 잘린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이 꺾어버린 해바라기꽃처럼! p429

 

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의 역사에서 한 시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시대는 정복자의 시대로 규정되는데, 사제복으로 가린 채 불과 피로 붉게 물들이고 마침내 칼로써 끝을 맺은 시대였다. p430

 

탐험가와 정복자들이 모험을 시작한 목적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페르디난트 왕과 이사벨라 왕비를 위한 길이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를 위한 길이었으며, 교황 알렉산더 6세를 위한 길이기도 했다. p431

 

우리는 몰락한 문명을 연구하는 학문의 역사에 결정적인 족적으로 남긴 아웃사이더들에 대해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다. p432

 

이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디언이 희생되었는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신다. 하느님은 이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드 라스 카사스 추기경은 신대륙 인디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몇 안되는 서구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p433

 

검은 벨벳에 금으로 붉은 십자가를 수놓은 깃발에는 다음과 같은 라틴어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친구들이여, 십자가를 따르자. 십자가 아래 모인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므로 반드시 승리하리라!” p434

 

이제 어쩔 수 없이 스페인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될 날이 다가왔다. 1519년 11월 8일. p435

 

28 목이 잘린 문명

그들의 종교는 문명종교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다신교였지만, 우이칠로포크틀리와 케트살코아틀 두 주신을 중심으로 일신교의 경향을 보이고 있었으며, 역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특징이 매우 뚜렷했다. p443

 

교회를 떠나서는 어떤 예술도 없었고, 교회 없이는 학문도, 삶도 없었다. 서구의 세계관은 기독교였다. 이와 같이 폐쇄적인 세계관에서는, 정당성과 영원성, 구원의 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 어쩔 수 없이 배타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독교가 아니면 무조건 사교였고, 그들과 같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살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야만인이었다. p444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있었는데, 믿을 수 없을만큼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산 사람의 몸에서 심장을 도려내는 의식이었다. 이에 대해 스페인 사람들은 미친 듯이 분노했다. 그들이 그럴 자격이 있었을까? 그들도 같은 시대에 종교재판을 통해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았던가? 산 채로 화형대에 세워 불에 태우지 않았던가? p445

 

코르테스가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인간 제물 의식과 순수하고 간결한 가톨릭 미사를 대비시키자, 몬테수마는 신의 살과 피를 직접 먹어치우는 일보다는 사람을 바치는 일이 덜 끔찍하다는 견해를 비쳤다. p446

 

백인 정복자의 손에서 휘날리는 승리의 표시를 본 아스텍군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들 눈에 정복자는 분명 그들이 받드는 신들보다 더 강해 보였으리라. 그 순간, 에르난 코르테스가 깃발을 흔든 그 순간 멕시코는 패배했다. 마지막 몬테수마 제국은 이렇게 사라졌다. p454

 

29 도시를 산 스티븐스

한 군인이 쓴 무미건조한 설명이 스티븐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그는 더 많은 자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과테말라의 사학자 도밍고 후아로스가 쓴 책을 발견했는데... p456

 

스티븐스보다 100년 앞서 스페인의 여행가 돈 후안과 우요아는 이 열대의 내륙 기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날씨는 사람의 기운을 갉아먹는다. 산욕을 치르는 여자들은 죽기도 했다. 황소들은 살이 빠지고, 암소들은 젖이 나오지 않았으며, 암탉들은 알을 낳지 않았다...” p461

 

스티븐스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이 녹색의 제국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고 훗날 말한 바 있다. “솔직히 우리 두 사람, 캐서우드와 나는 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적을 발견하리라는 기대는 버린 채, 다만 발견했으면 좋겠다는 소망만 안고 코판을 향해 나아갔다.” p462

 

스티븐스는 인디언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들의 얼굴에서 이 석조 미술품을 완성한 창조적인 힘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 힘은 스티븐스에게는 낯선 힘이었고, 잔혹하고 기괴한 특징이 뚜렷했지만 이토록 훌륭한 걸작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 힘은 정글에서 바로 흘러나오지 않고, 넓은 땅을 차지하며 서서히 커왔다. 그러나 인디언들의 얼굴은 그저 흐리멍덩해 보일 뿐이었다. p468

 

내가 그 땅을 사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는 내 말을 의심했다. 그 땅은 그 정도로 쓸모가 없는 땅이었다. p471

 

예복은 다른 나라에서도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p472

 

<멕시코 정복>은 무엇을 말해주었는가? 아스텍 민족과 마야 민족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 신전과 궁전 등 그들의 건축물은 동일한 정신을 바탕으로 지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언어는 어땠는가? 아스텍의 언어와 마야의 언어는 대략 비교해보아도 뿌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스텍 문화는 가장 찬란하게 꽃피운 상태에서 코르테스에 의해 ‘목이 잘린’ 반면, 스페인 정ㅂㄱ자가 마야제국의 해안에 상륙했던 당시 마야는 문화적, 정치적 절정기가 지난 지 이미 수백 년 뒤였다. 그 민족은 소멸하기 직전 최후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던 상태였다. p477

 

30 막간극

우리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아시아, 소아시아, 그리고 그리스의 고대 민족들에 관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많은 것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매우 많은 것이 글과 말을 통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들은 아주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자신들이 이룩한 일을 남겨놓았다. 또한 그들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문명은 이미 말했듯이 한순간에 목이 잘렸다. ... 그들은 우리에게 지식을 전해줄 수 있었던 그로가 그림을 모조리 불살랐다. p482

 

디에고 데 란다의 책은 누구나 볼 수 있었지만 아무도 빼보지 않은 채 300년 동안 서고에 꽂혀 있었다. 그 책에는 주문이 실려 있었다. 마야에 관한 몇 되지 않는 기록과 유물의 의미를 풀 수 있는 주문이었다. p483

 

31 버려진 도시의 비밀

 

우리는 대부분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이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달력은 앞선 달력들을 수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원전 239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고대 이집트의 시간 계산법을 수정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 역법을 율리우스력이라 하여 1582년까지 사용했으며,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는 율리우스력을 그레고리력을 대체했다.

1년의 길이

율리우스력의 값 : 365.250,000일

그레고리력의 값 : 365.242,500일

마야력의 값 : 365.242,129일

천문학적 절대 값 : 365.242,198일

마야민족은 정확한 천문 관측을 복잡한 수학적 기술과 결합할 줄 알았다. 매우 합리적인 사고력을 지닌 민족이었다. 동시에 병폐가 매우 심한 신비주의에 철저히 예속되어 있었다. 마야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달력을 고안하고는 그 달력의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p489

 

32 우물로 가는 길

33 숲과 용암에 덮인 층계

아메리카의 종족들은 몽골의 후예들이다. ... 그런데 테오티와칸 문명의 창조자들과 톨텍인들은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이 종족들이 이미 창조된 문명을 이어받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p526

 

어떤 전설이 말하는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 전설은 심지어 스페인 사람들의 등장도 신화적인 방식으로 암시하고 있다. 케트살코아틀은, 지금까지는 신으로만 언급해왔는데 ‘해가 뜨는 나라’에서 왔다고 한다. 그는 길고 흰 옷을 입었고, 수염이 나 있었다. p528

 

알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스페인이 멕시코를 침략했을 때, 그 당시 멕시코 사람들은 수염 난 흰 사람의 마지막 약속을 떠올리고 스페인 사람들을 ‘동방에서 온 흰 신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스페인 사람들은, 아니 민족적인 자존심을 접어두고 유럽 사람이라고 일반화해서 말하겠는데, 이 유럽사람들은 풍습과 정의를 설파한 케트살코아틀의 후예는 분명 아니었다. p529

 

Ⅴ 아직은 할 수 없는 이야기

34 고대의 땅에 펼치는 현대의 연구

 

그 가운데 가장 논란이 분분한 유물은 이스터 섬의 신비한 석상들이다. p536

 

캘버트는 1865년에 히사를리크 언덕의 북동쪽 일대를 매입하여 발굴한 바 있다. 그 언덕의 의미를 알려준 캘버트의 공로에 대해 슐리만은 훗날 끝끝내 침묵했다. p541

 

제2차 세계대전 후 고고학 전반에 걸쳐 나타난 중요한 현상은 자연과학과 기술의 대대적인 영향이었다. 가장 먼저 확인된 현상은 이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수중 고고학과 공중 고고학이 발전한 일이었다. ...p546 ... 나이테연대측정법, 동위원소분석, X-선 형광분석, 열중성자 연대측정 등

 

과거에는 밀교와도 같던 고고학이 일반 대중에게도 개방된 것이다. p551

 

3. 내가 저자라면

 

제목이 가지는 힘, - 내용과 주제에 대한 함축적인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대상이 되는 독자들로 하여금 ‘아. 이건 나를 위한 책이구나’ 라고 한 눈에 꽂힐 수 있는 제목을 선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 요즘과 같이 비슷비슷한 류의 책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책책마다 세련된 디자인들로 무장하고 있어, 자신의 책의 가치를 한 눈에 독자들에게 꽂히게 하기 위한 전술적 차원에서 제목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옮긴이의 충고를 무시했다. 제목은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이라고 씌여 있다. 그냥 가볍게 읽으면 될 책이다. 책 내용 자체도 그렇게 고고학이라는 전문적인 분야에 지식을 가지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눈높이를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 무겁게 시작했다. 피라미드 속에서 막 뭔가를 훔쳐내려고 혈안이 된 도둑들처럼.

 

화보를 통해 관련된 시각자료나 발굴 장면을 넣는 효과

특히, 기호와 상징, 또는 문양과 같은 것은 시각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힘을 가진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매우 중요한 장치라고 할 것이다.

 

정말 소설처럼 썼다. 이따금씩 수 천 년 전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은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그렇지만, 그는 논픽션의 소설 같으면서도 사실들에 근거하여 고고학의 역사의 장을 열었던 위인들이 공과를 소중하게 기록하려 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장르의 신선함 뿐만 아니라 저자의 마음 씀씀이까지가 잘 느껴진다. 특히, 그는 몰락한 문명을 연구하는 고고학의 역사에서 잘나가는 사람들보다는 결정적인 족적을 남긴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소홀히 다루어지지 않도록 매우 고심하고 있음이 보인다.

 

책의 구성을 시대별로 구성하기보다는 각 문명권대로 구성하고, 그 복원과정에서 참여하고 기여했던 학자들의 이야기를 릴레이식으로 구성한 것이 재미있다. 소설적인 진행방식과 짧은 문체들이 일반인들에게 부담스럽지 않다. 말 그대로 산책하듯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장점으로 보인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2편에 대한 구상도 가능했을 것이다. 우선은 4대 문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문명 중에 황하와 인더스 문명에 대한 소개가 빠져 있는데, 나름 고고학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지금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동양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최근 추이로 볼 때, 황하와 인더스 문명에 대한 연구가 이어진다면 좋겠다. 뿐만 아니라, 이스터섬의 미스터리나 만리장성 등 세계적 문화유산들을 중심으로 한 접근도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의 글에는 유독 물음표(?)가 많다. 계속 묻는다. 그리고 다음을 이어 간다. 하나의 장안에서도 그렇고, 장에서 장으로 넘어갈 때도 연결고리 장치를 달아 둔다. 화장실 다녀올 틈도 주지 않고, 책장을 넘겨야만 한다. 아마도 34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면서도 흐름이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은 작가의 이러한 새심한 기교 때문일 것이다. 인상 깊다. TV 시리즈 같은 구성에서 가끔 느끼는 구성 특성의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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