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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31일 17시 16분 등록

더나은 자본주의를 촉구한다

  『그들이 말하지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ㆍ안세민 옮김, 부키, 2010

  스탈린이 루스벨트에게 미국 근로자의 평균 임금이 얼마냐고 물었다. "아마 한 달에 300달러쯤 될 겁니다." "그럼 생활비는 얼마나 필요합니까?" "대충 200달러쯤 들겠지요." "그럼 100달러가 남는데 어디 사용합니까?" "그건 그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알 바가 아닙니다." 이번엔 루스벨트가 물었다. "러시아 근로자들의 평균 임금은 얼마입니까?" "한 달에 한 800루블이 될 겁니다." "그럼 생활비로 나가는 돈은 얼마가 됩니까?" "1000루블입니다." "그럼 한 달에 200루블이 더 있어야 살아가겠군요. 그 돈은 어떻게 마련합니까?" "그건 그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알 바가 아닙니다." 이 책에도 비슷한 유머가 등장한다. 1980년대 공산주의 체제가 와해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중앙 계획 시스템에 대한 냉소주의가 만연해서, "우리는 일을 하는 척하고 그들은 보수를 주는 척한다."라는 우스개가 공산주의 국가들에 유행할 정도였다.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이야기로 봐도 무방할 듯 하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의 신화가 대공황과 금융위기를 겪으며 깨지기 시작했다. 세계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여기저기서 자본주의가 삐끄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1929년 대공황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 경제 위기라 할 수 있는 2008년 금융 위기는 자칫 세계 경제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질뻔 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이 재앙은 정확히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문제가 아니고, 지난 30여년간 자본주의 세계를 지배해 온 신자유주의로 통칭돼온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그 이데올로기에 그 원인이 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에 대해 승리한 것이지 그 자체가 완전한 체제가 아니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그들이 말하지않는 23가지』는 자유 시장주의자들이 말해 주지 않는 자본주의에 관한 여러 가지 중요한 진실들을 이야기한다. 23가지 키워드로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자본주의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하면 더 잘 돌아가게 할 수 있을지를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쓴 책이다. 저자인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박사 학위도 받기 전인 1990년, 27세 나이에 한국인 최초의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3년에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뮈르달 상을, 2005년에는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예프 상을 최연소로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기존의 좌파, 우파 이념에 교조적으로 얽매이지 않는다. 좌파와 우파 양쪽으로부터 골고루 지지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쪽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동안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주류 경제학의 통설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로 내는 책마다 국내외의 주목을 받아왔다. 영국의 가디언紙가 최근 사설을 통해 "노동당은 장하준 교수에게 배워라"고 썼을 정도로 이번 책 역시 영국 언론에서 먼저 화제가 됐다. 가디언이 전통적으로 좌파 경향을 띤다는 점을 감안해도, 주류 경제학의 진원지인 영국에서 비주류 경제학파 교수에게 큰 관심을 보인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저자는 그동안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의 이전 책들을 통해 신 자유주의를 집요하게 비판해 왔다. 이 책에서도 '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없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을 첫 번째로 내세우며 신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자유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거의 없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계획경제 속에서 살고 있다"라는 다양한 테제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와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라는 항목을 대비시키는 방식을 통해 '워싱턴 컨센서스'가 상징하는 미국식 신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그의 부정은 '다른 자본주의' '더 나은 세상'의 가능성을 설파하기 위한 것으로 '시장 자유주의가 최선'이라는 경제학의 오랜 믿음속에 감춰진 이면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또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금융 시장은 보다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 등의 흥미로운 주장을 통해 지금까지 대부분 사람들이 친숙하게 품고 있던 통념과 상식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저자의 이런 주장들은 그의 전작들을 읽어온 독자들에겐 그리 낯설지 않다. 그렇다고 동어반복은 아니다. 주장은 더 단호해졌고 논리는 한층 정교해 졌다. 거기다 다양하고 풍부한 비유와 사례가 설득력을 높인다. 경제학자를 넘어서 '문장가 장하준'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저자는 이 책 말고도 여러 지면을 통해 기회 있을때마다 제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한다. 지난 10월 서울에서 열린 이 책의 출판 관련 기자 간담회에서도 어김없이 제조업 문제를 거론하며 "현 정권이나 지난 정권이나 마찬가지인데, 제조업 버리고 금융업 쪽으로 가서 쉽게 돈벌려는 생각을 자꾸 하는 것이 제일 걱정된다"며 제조업을 제발 소홀히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전자나 조선 등에서 1등 하니까 대단한 것 같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제조업 생산성이 구미의 40〜50%에 불과한 현실이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이나 금융쪽에만 마음이 팔려 이제는 '구닥다리' 제조업은 필요 없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정책당국자가 있다면 귀담아 들어야 할 고언이다. (실제로 지난 금융위기 직전에 리먼브라더스가 봉 잡으려고 망하는 회사를 한국에 팔려고 했다. 그 때 만약 산업은행이 샀으면 나라가 거덜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는 세계 경제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며 경제 시스템을 재설계하면서 명심해야 할 8가지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문제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이지 모든 종류의 자본주의가 나쁜 경제시스템은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를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 2.인간의 합리성엔 한계가 있다는 걸 인정하라. 3.이기심이 인간행동의 유일한 동기는 아니다. 인간의 좋은 면을 발휘하게 하는 경제 시스템을 건설해야 한다. 4.기회의 평등만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도 어느 정도까지는 보장해야 한다. 5.제조업은 여전히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걸 잊지마라. 6.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7.더 크고 더 적극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8.개발도상국들을 '불공평'하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우대하라.

저자는 결론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상 언급한 여덟 가지 원칙은 모두 지난 30년 동안의 경제적 통념들과 직접적으로 배치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독자들 중에는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세계를 퇴보시키고 재앙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던 원칙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예전과 비슷한 대참사들을 반복하게 될 지 모른다. 이제 불편해질 때가 왔다." 마치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중병에 걸렸음을 통보받는 당혹스런 느낌이다. 그러나 그 병을 치료할 능력을 갖고있는 유능한 의사를 앞에 둔 일말의 안도감도 함께 들어 다행이다. -끝- (2010.12)

* 기획회의 285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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