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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11일 10시 39분 등록
하류를 향해

제가 지난 토요일 강론에서 호시노 토미히로라는 일본 화가가 쓴 [내 꿈은 언젠가 바람이 되어]라는 책에서 ‘민들레’라는 글을 인용했었지요. 못 들은 분들을 위해 호시노 토미히로를 다시 소개하면,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선생님이 된 지 불과 두 달 만에 방과 후 체육 동아리를 지도하다가 경추손상을 입어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되는 사고를 당한 불운의 사나이입니다. 그러나 그는 불운을 행운으로 바꾼 놀라운 사람이지요. 그는 장애의 몸으로 붓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수많은 저서를 펴냈고, 특히 [내 꿈은 언젠가 바람이 되어]라는 시화집은 200만부나 팔렸고, 그는 일본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지요.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토미히로 미술관에는 매해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저도 언젠가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입니다. 오늘 다시 그가 쓴 글 토막을 나누겠습니다.

나는 어릴 때, 집 근처에 흐르는 와타라세 강에서 소중한 것을 배웠다.

내가 겨우 헤엄을 칠 수 있게 되었을 무렵이니까, 초등학생 때였을 게다. 개구쟁이들과 어울려 와타라세 강으로 헤엄을 치러 갔다. 그날은 물이 불어 흙탕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살도 빨라서, 큰애들은 건너편 강기슭에 있는 바위까지 헤엄쳐 갈 수 있었으나, 나는 겨우 개헤엄이나 치는 정도였기 때문에 얕은 곳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새 강 한가운데로 너무 들어가 버렸는데 ,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있던 강기슭으로 되돌아가려고 했지만 물살이 점점 더 빨라지고 친구들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빠른 물살에 휩쓸려 버둥거리다가 얼마나 물을 들이켰는지 모른다. 물에 빠져 죽은 아이들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동시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언제나 바라보던 와타라세 강의 모습이었다. 군데군데 푸르스름하게 보일 정도로 수심이 깊은 곳도 있지만 흰 거품을 일으키며 흐르는 얕은 여울이 많았다. 아마 지금 내가 휩쓸러 가고 있는 곳은 내 키보다 깊지만, 물살을 타고 흘러가다 보면 반드시 얕은 여울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래. 굳이 되돌아가려 하지 않아도 되잖아.”

나는 몸의 방향을 180도 틀어서 이번에는 하류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렇게 빠르게 흐르던 물살도 어느새 날마다 바라보던 와타라세 강으로 되돌아 가 있었다. 하류를 향해 얼마 동안 흘러가다가 발로 강바닥을 짚어 보았더니 그곳의 깊이는 이미 내 허벅지에도 차지 않았다.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때의 무서움보다는 그 무시무시한 물살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는 기쁨에 나는 가슴이 벅찼다.

부상을 입고 전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앞날에 대해서나 지난날에 대해서 생각하며 괴로워하다가, 문득 급류에 떠내려가면서도 본래 있던 강기슭으로 헤엄쳐 가려고 발버둥치던 내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굳이 거기로 되돌아가지 않아도 되잖아.... 쓸려 내려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그 무렵부터, 나를 지배하던 투병이라는 의식이 조금씩 옅어져 간 듯하다. 걷지 못하는 다리와 움직이지 않는 팔만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부터 뭔가를 배우면서 살아가자고 마음먹게 된 것이다.

그 때, 별 생각 없이 읽어 넘기던 성서 구절이 마음속에 울려 퍼졌답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여러분이 시련을 당하도록 묵인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시련과 함께 그것을 견디어 낼 방도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1 고린10, 13)

저는 호시노씨가 쓴 ‘하류를 향해 흘러가다가’라는 표현을 들으며 문득 악성골육증이라는 아주 고통스러운 암과 싸우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맑은 웃음을 잃지 않았던 성원근 시인이 쓴 ‘하류에서’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쓰고 있지요.

너의 아름다움을 찾아주기 위해서
내가 더 낮아지고
더러워지는 거다.

(중략)
이렇게 흘러 흘러
바다에서나 함께 될 수밖에 없는가.

찬란히 피어나거라.
네가 지면
바다가 거두어갈 것이다.

기다리겠다.

저에게 성원근 시인의 모습과 함께 이 시의 마지막 행, ‘기다리겠다.’가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그 사람의 아름다움을 위해, 그 사람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혼자 고통을 감내하고자 했던 시인의 마음이 느껴지고, 결국 물이 흘러 바다로 나아가듯이, 거기서 하나가 되듯이 다시 만남을 생각하며 기다리겠다는 고통을 뛰어넘어 담담함을 지니려했던 그의 맡겨드림의 자세가 눈물겹게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들려주시는 말씀이지요. 주님이 우리에게 “나는 너희가 나를 믿으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용기를 낼 때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어떤 시련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삶에서 우리에게 닥쳐온 고난이나 시련이 있기 전의 자리로 우리가 되돌아 갈 수는 없습니다. 마치 급류를 거슬러 헤엄을 쳐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것처럼. 다만 우리는 하류를 향해 흘러가면서 앝은 여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호시노 토미히로가 이미 어린 시절 깨달았던 것을 우리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련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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