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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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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5일 10시 48분 등록
{아버지가 마시는 술잔에는 눈물이 반이다.}
-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 중에서

지난 목요일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다. 요새 며칠 말씀하시는 것이 어눌하고 하체가 힘이 빠져 중심을 못 잡으시더니 병원에서 MRI를 촬영한 결과 뇌경색이라고 한다. 다행히 초기라서 약 2주간 약물치료를 받으면 어느 정도 회복이 된다고 한다. '괜찮다'고 하시면서 한사코 병원가시길 거부하시더니 실제 검진 결과가 중풍 초기로 나오자 왠지 의기소침한 표정이다. 이윽고 두 눈을 조용히 감으시더니 눈물이 글썽거린다.

내가 아버지의 눈물을 목격한 적은 이번까지 세 번으로 기억된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우신 것이 더 많으리라. 첫 번째 기억은 내가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강남 고속터미널에 배웅을 나오셨을 때였다. 나는 친한 친구와 함께 같이 논산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순간 나의 뒤쪽이 뜨거워짐을 느꼈고 뒤를 돌아봤을 때 아버지는 희미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당신의 힘든 군 생활을 떠올리며 못난 자식의 군대 생활이 그렇게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두 번째는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 쯤에 집에서 드라마를 보고 눈물을 흘리셨던 것을 우연히 보게 된 기억이다. 정확한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부모의 사랑에 대한 내용이었던 걸로 생각된다. 내가 보기에는 그리 감동적이라고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이미 아버지는 드라마를 좋아할 만큼 감수성이 풍부해지셨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이번에 병원에 입원해서 흘리신 눈물이 세 번째 기억이다. 아버지의 눈물은 어머니의 그것과 비교해서 농도가 열 배쯤은 진할 것이다. 당신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 믿기 어려워서 일까?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일까? 아니면 자식들에게 미안해서 일까? 갈수록 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진정 남자로서 늙어가기는 어려운가 보다.

나에게 아버지는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마치 움직일 수 없는 커다란 바위처럼 느껴졌다. 당신 세대가 그렇듯이 아버지와는 엄격함과 형식에 의해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수줍었고 다정하게 뺨을 비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밖으로는 활동적이신 분이었으나 집에서는 늘 엄한 모습이셨고 권위를 중히 여기셨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 항상 과장을 하셨고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부담스러웠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 받고, 돈 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을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 신해철의 '아버지와 나' 중에서

아버지는 그 동안 살아오시면서 성실과 원칙을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우리들을 위해 무거운 멍에를 묵묵히 감내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는 마음 속의 아스라한 정을 곧이곧대로 말하지 못하시고 항상 반대로 말씀하곤 하셨다. 나와 아버지 사이에는 실제 보여지는 뜨거움이 부족했다. 나의 존재의 근원이면서도 살가움은 없었다. 남자 대 남자, 자식과 부모라는 판에 박힌 관계 설정이 친구 같은 편안한 관계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남자다움이라는 사슬에 스스로를 묶어 놓고 힘들고 지쳐도 내색하지 않고 짐을 나눠 지지도 못한 채 견뎌온 아버지.

이제 나도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의 눈물을 보면서 새삼 아버지다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좋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아버지에게 그토록 원했던 모든 것들을 내 아이에게 제대로 해주고 있는가? 내가 흉보던 모습을 내가 닮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오는 모습, 잠자는 모습, 휴일에도 회사에 출근하는 모습, 말로만 호언장담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지는 않을까?

좋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아버지의 뜨거움과 진실함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친구처럼 편하게 다가올 수 있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자.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적지만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정성을 다하자.

그리고 어색하지만 내일은 아버지 두 손을 살포시 잡고 마음 속으로 한 마디 건내야겠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IP *.51.7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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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이
2005.06.05 10:58:52 *.229.28.127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이 시를 외우고 노트에 시화를 그리던 중2 국어시간
세상 그 누구의 눈동자보다 깊어보이던 아버지의 눈
이 시를 외우게 하신 박미경선생님의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눈동자
내 마음의 정원의 나무들를 비추는 눈동자로
그 얼굴을 돌리시어 나를 향하여 미소 띄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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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2005.06.05 16:05:52 *.229.146.78
얼른 쾌차하시기를. 그리고 오래도록 건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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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일
2005.06.06 00:16:36 *.235.2.57
속히 쾌차하시길 빌겠습니다.
"나의 존재의 근원이면서도 살가움은 없었다." - 저 또한 그렇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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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기원
2005.06.06 04:14:00 *.190.172.31
아버지! 님은 우리의 크나큰 언덕입니다. 그아버지와 지금의 작으마한 이몸의 아버지 너무나 작아만 보입니다. 큰 아버지가 될 수있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병곤님의 아버님께서 빨리 건강회복하심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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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주
2005.06.06 06:02:04 *.209.213.31
아버님 손도 잡아드리시고 다리도 자주 주물러드리세요. 빨리 회복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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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동
2005.06.06 12:31:54 *.111.251.128
다행히 저의 아버지께서는 아직 건강하신 편입니다. 그래도 한해 한해 지날 때마다 세월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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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진
2005.06.07 10:45:30 *.247.38.124
하루 빨리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세대도 이미 아버지가 되버렸지만 왠지 우리들은 우리들의 아버님을 뵈면 아직도 물리적 아버지 밖에 되지 못함을 느낍니다.
님의 마음이 아버님 생각에 눈물젖게 합니다.
힘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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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곤
2005.06.22 07:27:09 *.51.67.138
덕분에 무사히 치료받으시고 퇴원하셨습니다.
아직 말하는 것이 어눌하시지만 많이 좋아지셨고 통원치료 다니고 있습니다. 부모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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