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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6일 14시 37분 등록
<변화학 칼럼 20>

분열의 시대
-자기(self)와 멀어지는 사람들-


문 요한 (변화경영 연구소 연구원, 정신과 전문의)



‘자기(self)는 본래 거기에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뿐이다. 내(ego)가 멀어져갈 뿐이다.’

스트레스라는 말을 새삼 꺼낼 필요도 없이 우리의 심신은 지쳐가고 있다. 현대인들의 다양한 정신적, 신체적 증상들은 정신과적 진단체계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적응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등의 진단이 쓰일 수는 있으나 이는 현대인들의 내면적 갈등과 공허감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표피적이며 평면적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만성적인 권태’를 호소한다.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삶은 재미도 없을뿐더러 의미도 없다고 여긴다. 각종 자극의 과잉 속에 장기 노출되어 더 높은 자극만이 감각을 깨울 뿐이다. 9.11 테러처럼 때로는 현실이 상상력을 앞서간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현실이 되는 세상에서 현실과 상상간의 경계는 더욱 불확실해지고 있다. 내가 소설과 게임속의 주인공이 되어 가상세계에서 새로운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일상이 되고 있다. 다양한 팬픽(Fan-fic)처럼 단지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고치고 참여하는 쌍방향의 소통이 확대되어지고 있다.

그 새로운 정체성은 현실의 나를 위무하고 확장하는 긍정적 기능도 있지만 현실감의 약화로 자기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고 자아를 병적으로 팽창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시대에서 하나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인생의 이모작, 삼모작이 가능하고 다직업의 삶을 살아가야 할 사회에서 고정된 가치와 단일한 정체성의 고집은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정체성(다중 정체성)을 가져야 하지만 그럴수록 이들을 조절하고 통합할 수 있는 핵심적 자기(core self)가 더욱 굳건해져야 한다. 마치 하늘과 땅을 잇고 영령을 불러내고 빙의되는 샤먼이 자기를 상실하지 않고 통제할 수 있듯이 현대인의 자아는 더욱 강해져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샤먼이 광인이 되듯 다중 정체성은 해리상태로 길을 잃고 만다.

디지털 시대에서 관계의 범위는 무한정 넓어졌지만 그 연결의 실체는 모호하고 온기는 흐르지 않는다. 그 광범위한 네트워크 속에 개인의 무게는 더욱 미미하게 여겨지고 개인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자아는 숨을 참는 개구리처럼 위태롭게 크기만을 부풀리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이라도 닿으면 터질 기세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비교 당함으로써 욕망은 더욱더 커져만 간다. ‘치유와 성장’의 힘을 갖춘 관계와 공동체는 점차 찾기 힘들어졌으며 아예 공동체의 숫자부터 급감하고 있다. 혼자 살아가는 가구는 전체 가구의 15.5%(2002년 통계청 자료)인 220여만 가구를 상회하고 있다. 가족이 사용하는 <가전(家電)>이라는 의미에서 이제 개인이 사용하기 때문에 <개전(個電)>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올 지경이다. 독신들이야 그렇다치고 가정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삶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 있는가! 그들 사이에 흐르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는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된다는 기대감마저 없어진지 오래일지도 모르겠다.

‘나홀로 세상!’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공동체가 약화되었다면 그럼 그만큼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증대되었는가?

‘브랜드와 개인의 창의적 지식’이라는 무형가치가 기업의 가장 큰 자산이 된 21세기 기업 환경에서 존중받는 개인이란 ‘인재’에 집중되어 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신기술, 짧아지는 제품수명, 미래예측의 불분명함 등은 치열한 경쟁을 낳고 그로인한 팽팽한 긴장감은 기업의 근시경영(myopic management)을 부채질한다. 이러한 상시경쟁의 환경은 바야흐로 블루오션의 현실적 존재를 위협 하는 초경쟁(hyper-competetion)시대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보수는 많아지지만 사람은 줄고 일은 많아지면서 늘어난 업무 스트레스, 상시 구조조정 체제가 강요하는 끝없는 자기개발 압력 속에서 직장인은 ‘휴식의 몰입’, ‘내면의 경청’, ‘자아실현’이라는 말들은 낯선 외국어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잠시도 무엇을 하고 있지 않으면 경영진도 구성원도 불안해지고 만다. 게다가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퇴보라는 인식 속에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 판을 친다. 변화와 혁신의 파도가 쉴 새 없이 몰아친다. 축적과 성장은 없고 혼란과 둔감만 남는다. 직장인들은 제때 돌아가지 못해 탄성을 잃어버린 고무줄 신세가 되어 버린다. ‘과도한 긴장’과 ‘둔감함’이 묘한 조화를 이룬 그 한가운데 그들은 외롭게 서 있다.

‘긴장과 둔감’의 불안한 공존이야말로 우리 시대를 감싸는 묘한 기운이다. 그 기운은 그대로 사회와 가정과 학교로 퍼져간다. 현대인들은 이제 항상 불안함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되돌아볼 작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결국 불안을 떨칠 수가 없다. 그 불안은 ‘자기상실의 위기’와 ‘삶의 근원에 대한 갈증’을 말해주고 있지만 ‘목적 있는 메시지’는 봉해진 채 불안이라는 겉봉투만 전달되고 만다. 많은 현대인들은 이러한 자기실현의 기회를 해독하지 못하고 자신을 되돌아 볼 작은 시간을 박멸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들은 관계 속으로 다시 더 들어가는 것을 시도하지만 목적을 띈 관계는 일시적인 안도감만을 제공할 뿐, 다시 공허감으로 몰고 간다.

결국 그들이 나아가는 것은 관계의 단절과 현실에서의 도피이다. 그들 중에 극단적인 형태는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가 된다. 후천적 자폐상태로 돌아간다. 그들에게 은둔은 태어나기 전의 암흑상태, 즉 자궁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스스로 생존을 위해 노력하거나 고민할 필요도 없는 태아의 상태로 퇴행하는 것이다. 자기를 돌아볼 시간자체가 고통인 그들의 선택은 ‘강력한 중독’이다. 중독만이 불안한 영혼을 잠시라도 잠재울 수 있는 독한 수면제 역할을 한다. ‘존재의 갈증’을 자기대면의 생명수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회피라는 탄산음료만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살면서 늘 높은 곳에 살기를 희망한다. ‘보여지는 나’만 조명을 받고 ‘내면의 자기’는 외면당한다. 그럴수록 ‘보여지는 나’와 ‘내면의 자기’는 더욱 멀어진다. 외로움이란 사람들로부터 내가 멀어졌다고 느낄 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외로움이란 분열된 내가 한없이 멀어져 서로 만날 수 없을 때 느낀다. 정말로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은 자신을 주저앉히고 만다. 배우가 극에 너무 몰입하여 극이 끝났음에도 자신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그 배역에 갇혀 지내는 것처럼 현대인도 욕망으로 빚은 자아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이 서야할 자리와 사명을 알려주는 내면의 외침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외적자기와 내적자기와의 괴리, 의식과 무의식의 단절,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격차 등 좁혀지지 않고 멀어지는 자기의 분열과 상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 불안을 잊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무언가에 탐닉한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를 벗어나기 위한 첫 걸음은 ‘자기와의 대면’일 수밖에 없다.

잠시 혼자 있어라. 두둥실 떠오르는 ‘불안’이라는 봉투가 있다면 집어 들어라. 당신의 내면에서 보내온 편지를 개봉해보라. 어떤 의미와 목적이 있는지를 읽어보라.

시대는 달라지고 있다. 정보에서 지식으로 지식에서 정신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상은 탈중심화(decentering)되어 가지만 현대인의 내면은 중심화가 이루어져야 할 시대이다.

'나를 찾아 우리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갈 우리들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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