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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20일 10시 57분 등록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종로에서 구두를 닦는 진태와 그의 땀에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공부를 잘하는 진석, 그 둘은 형제이다. 진태에게는 사랑하는 영신이 있고, 언어장애를 가진 어머니 그리고, 동생 셋이 그의 전부이다. ‘시대가 그랬으니까’ 라고 쉽게 치환하기에 우리의 현실도 별반 차이는 없다. 8대2 라는 파레토 법칙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가운데서 유효하다. 하지만 그는 가난하지 않다. 늘 희망에 가득찬 젊은이다. 하지만 그의 꿈에는 전쟁이라는 현실이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해야 겠다. 천만 관객이 다 아는 이야기를 또 하는 것 만큼 식상한 것이 또 있으랴! 함께 본 어머니가 그러신다. “이거 또 뻔한 이야기 아니야” 하지만 곧 눈물을 흘리신다. 그러고는 “벌써 끝났냐”고 하신다. 그만큼 괜찮은 내용과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분명하다는 반증이다. 늘 그렇듯 우리는 그 메시지를 쉽게 받고 쉽게 버린다. 나도 모르게 그 메시지를 간직하고 싶다.

[동생이 본 형 진태 - 형 진태는 동생 진석을 위해 전쟁에 참여한다. 하지만 동생은 형을 이해하지 못한다. “집에 갈 사람도 형이고, 치료 받아야 할 사람도 형이다”라고 동생은 말한다.] ‘뜻이 있는 사람은 현실을 모르고 현실을 알만하면 뜻을 저버린다’라고 시인 박노해는 그랬던가… 동생의 눈에는 그렇게 형이 현실을 알면서 뜻을 버리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졸업을 하고 회사를 들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변해갔다. 사회가 원하는 폭발적인 가치 창출과 계속되는 무언의 압력, 그리고 이해관계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구조 속에서 나는 변하는지도 모른체 마치 더워지는 물 속의 실험용 개구리 처럼 되어가는 것 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어른을 이해했다. 그건 마치 아들인 내가 아버지의 고충을 이해하는 과정과도 같았다. 그러면서 기득권이 난무하는 쉽게 말하자면 학창시절 내가 원하지 않은 어른의 모습으로 더욱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게 경쟁이고 신경제가 취해야 하는 덕목으로 나는 해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길이 내가 살고, 경쟁이 주는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러한 마음이 조금도 없다면 그건 거짓이다. 말을 하지 않을 뿐 마음 속에는 늘 가지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 진태가 그랬듯이. 그 변화를 진석이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형이 본 동생 진석 - 전쟁터에서 변해가는 형을 보면서 동생은 ‘무공훈장’을 버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형은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동생을 전쟁터에서 보내고자 하는 목표가 확고하다.] 아무리 도덕적인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가 집단에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종교를 지닌 이들(나도 천주교 신앙을 가짐)의 안과 밖에서의 태도를 보라. 학창시절 사회개혁을 위해 외치던 세대도 그 개혁은 나이든 지금 어디 갔는지를 보라. 집단으로 들어가면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집단을 나올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게 현실에서의 대다수 모습들이다. 유목민(나마드)의 이야기를 너나없이 말하지만, 그런 행동 양식으로 사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되나? 아침형 인간은 또 어떤가? 수없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눈에 보인다. 두 형제처럼… 나는 책을 즐긴다. 그러면 대다수 친구들은 나를 고리타분한 놈으로 여긴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무궁무진한 영상매체를 쉽게 접하는 이 시대에 왠 책 이냐고 그런다. 마치 형 진태가 동생 진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처럼 말이다. 나를 공감하는 친구들도 자신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속과 겉이 다른 것은 어쩌면 자신을 속이는 것 일지도 모른다. 아님 내가 너무 낭만적으로 사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형 진태처럼 살면서 말로는 동생 진석처럼 살고 싶은 그저 욕심쟁이일지도 모른다. 동생이 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처럼 형도 동생이 자신의 생각을 이해못함에 답답하다.

[진태와 진석은 만나지만 영원히 헤어진다 - 깃발부대 선봉인 진태는 진석과의 싸움에서 정신이 돌아온 진태는 먼저 가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그의 목표인 동생을 위해 총알을 받는다] 이 영화를 누구의 입장에서 봐야 하나? 사회는 한쪽의 입장에서 자신의 논리와 근거를 내놓으라고 늘 요구한다. 그래서 답을 내리기 더욱 어렵다. 결국 둘은 만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누구나 상황을 알아버리고서는 어떠한 치료도 효과가 없다”는 군주론의 표현처럼 말이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을 보면서 나와 내 안의 나 사이의 모습이 너무나 닮은 것 같다. 속으로는 기득권, 신자유주의의 사상이 넘실대면서 겉으로는 그러지 않은 척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닌지? 돈보다 행복이라고 말하지만 늘 재테크란 재테크에는 모든 관심을 쏟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들켜버린 것 같다. 나도 영화 속 진태처럼 진석과 멀어져 있다.

그 둘 사이에는 ‘조화와 균형’이 필요한 것 인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예전에 극장에서 보고 텔레비전에서 다시 본 지금 왜 이런 변화가 온 건지~~ 그들처럼 나도 자신과 더욱 멀어진 것은 아닐까?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런 건 아닐텐데… 가족과 형제애를 다룬 이 영화에서 우리가 눈물을 훔치고, 힘을 얻는 이유는 바로 서로의 이해는 다르지만 그 목표는 같다는 것 이다. 그래서 힘겹지만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얻어가는 것 같다. 가족과 형제, 그리고 사랑… 그것은 분명 ‘선택과 집중’이 아닌 ‘조화와 균형’일 것 이다.

영화 이야기와 어울리는 조화에 관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님의 책 [남자vs남자] [사람vs사람]의 내용으로 마무리 하자

▶밥 위에 카레를 끼얹어 먹을 때 카레를 끼얹는 부분이 5, 흰밥이 보이는 부분이 3 일때 카레라이스의 맛이 가장 좋게 느껴진다고 한다. 미술에서도 5대 3의 비율은 황금비라 부른다. 사람은 이 구도에서 가장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일과 삶에 있어서도 이 원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무엇이 5가 되고, 무엇이 3이 되어야 황금비가 되느냐에 관한 선택권은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있다.
▷그림자 없는 물체는 ‘실체’가 아니듯, 완벽한 ‘객관적’ 현실이란 이데아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와 남이 함께 소통하는 장(場)은 그 ‘현실’이란 마당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도 ‘현실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치열한 소통의 노력은 값진 것 이다.
▶’절세미인’의 미모에 대한 끊임없는 결핍감을 ‘아직도 부족하다’는 겸양으로 보기는 어렵다. 쉼없는 회의와 불안과 자조와 두려움을 거치지 않고 어찌 탄탄한 안정감이 만들어질 수 있으랴만, 거기에도 균형은 필요한 법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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