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박노진
  • 조회 수 243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5년 9월 20일 17시 14분 등록
1. 석묵서루石墨書樓

올 해 여름 내가 사는 근처에 추사고택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니 부지불식간 알고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그토록 위대한 한국인이 내 곁에서 숨 쉬고 살았다는 것을 지금까지 모르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1786년(정조 10년) 충청도 예산 용궁리에서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 봉사손으로 태어난 추사 김정희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조선시대 서예가로 흔히 우리나라 4대 명필 중 한 분으로 꼽히고 있다. 그래서인지 추사라는 호는 쉽게 기억나지만 완당이라는 호는 귀에 익지 않았고 왜 완당이라는 중국식 사대의 느낌이 나는 호인가 하는 나름대로의 반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완당평전을 읽고 나서는 오히려 추사보다는 완당이 더 멋있게 들렸고 그의 한 생이 더없이 위대해 보였다.

추사고택을 방문할 당시의 느낌은 속으로는 세계속의 한국을 빛낸 위인을 대하는 몹시 흥분된 상태를 상상했었으나 의외의 담담한 상태였다. 추사 묘와 월성위 묘, 화순옹주 열려문, 백송 등을 둘러볼 때만 하더라도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같이 간 연구원들이 연구내용을 발표하는 시간 중 소낙비가 와서 고택 안으로 들어가 마루에 앉아 그의 삶과 당시 세계의 중심이던 중국과의 접속, 제주 유배 시절의 세한도, 사야 등에 관한 공부를 계속하던 와중에 처마를 타고 흐르는 빗물소리가 고택을 울리는 그 느낌이 내가 완당과 같이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와서 그의 숨결을 느껴야 그 공부가 제대로 느껴진다는 스승의 말씀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올해 여름 추사는 내게 그렇게 다가 왔다.

24살 되던 해 추사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생원生員이 되었다. 소위 출세를 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스스로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그해 호조참판으로 승진한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선임되어 연경에 가게 되었는데 추사는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연경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자제군관이란 외교관의 아들이나 동생이 개인적으로 따라가서 외국 견물을 익히게 하는 제도이니 공식수행이 아닌 만큼 자유롭게 그곳 문물을 접할 수 있다. 김창업, 홍대용, 박지원 등이 모두 이런 연유로 연경을 다녀올 수 있었다.) 추사는 연경에 머무른 60일동안 평생의 두 경사經師(스승)인 담계 옹방강과 운대 완원을 만나게 된다.

완원은 “청조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절대적 공로자이자 당시 제일인자”라는 평을 받고 있던 사람으로 일찍부터 조선 학자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던터라, 당시 47세의 완원은 25세에 불과한 약관의 추사를 보고 대번에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반가워서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왔다고 한다. 완원은 추사에게 여러 금석문을 보여주었다. 그중에는 서예사의 빛나는 명작으로 꼽히는 당나라 저수량의 글씨체로 쒸어진 <당 정관 조성 동비> 탁본도 있었다. 또한 6권으로 된 자신의 시문집 ‘연경실집’, 245권으로 된 ‘13경 주소 교감기’ 한 질 등을 선물하며 실사구시와 평실정상平實精詳의 자세로 학문을 닦고 경전을 연마하라는 가르침을 내렸고, 추사는 완원의 뛰어난 이론을 많이 필사하여 평생 외우고 또 외우며 평생 간직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완원은 추사에게 완당阮堂이란 호를 내려 사제의 인증을 확실히 하였으며 30대로 들어서면서 추사는 완당으로 더 널리 불리게 된다.

옹방강은 당대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이며 스스로 경학의 대가로 자부하는 연경학계의 원로였다. 78세의 옹방강은 이제 약관의 추사와 마주앉아 필담을 나누면서 그의 박식과 총명함에 놀라 “경술문장 해동제일經術文章 海東第一”이라고 칭찬하였다. 이렇게 옹방강은 늙음을 잊고 추사는 젊음을 잊으며 마음과 마음이 통하였으니 청조학 연구가인 후지츠카는 이 만남이야말로 한중 문화 교류사에서 역사적으로 특별히 기록할 만한 일이라고 할 정도였다. 옹방강은 자신의 유명한 석묵서루를 두루 보여주고 가르침을 주었으니 추사로서는 참으로 감격스럽고 복에 겨운 혜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석묵서루는 희귀 금석문과 진적眞蹟으로 가득하여 그 수장품이 8만 점이라고 했다. 구양순 글씨의 정수라는 화도사비化度寺碑의 진본, 소동파의 ‘천제오운天際烏雲’첩 속칭 숭양첩崇陽帖의 진본, 3본의 소동파 초상 등을 보았고 많은 책과 글씨 그리고 귀중한 탁본을 선물로 주었다.

석묵서루와 완원의 서재인 태화쌍비지관泰華雙碑之館(태산과 화산의 유명한 비문 탁본을 하나씩 갖고 있어서 붙인 서재 이름)에서 꿈같이 보낸 이 행운의 진본·진적 배관은 이후 추사가 금석학과 고증학에 전념하는 큰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그 학식의 정확한 토대가 되었다. 그보다 더 귀한 것은 귀국후에도 끊임없이 자료와 편지로 주고받은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추사는 귀국 후 무슨 논거를 댈 때면 “내가 연경의 석묵서루에서 이 진본을 보았는데 그 진본에 의하면 이렇지 않았다.”는 등 혼자만의 경험과 감동으로 재단비평을 일삼아 남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고 간혹 그것이 심하여 미움도 받았다. 어쨌던 귀국 후 완당은 열정적으로 학예의 연찬에 들어가게 할 정도로 그의 가슴벅찬 북경(연경)에서의 60일을 보내면서 이처럼 연경 학자들과의 감격스런 만남, 방대한 문헌자료의 수집까지는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족히 수레로 하나쯤 되는 책과 서화작품과 탁본과 진귀한 선물, 그리고 수많은 벗들과 친교를 맺고 완원·옹방강이라는 대학자를 만나 사제를 맺으며, 활짝 만개한 청조 고증학의 성과를 직접 보고 배우고 익혀 돌아온 완당은 그만큼 많은 자극을 받았고 또 그만큼 자신의 학예에 새로운 의욕과 자신감을 얻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이 앞으로 추구할 학예의 길이 경학과 고증학과 금석학의 연찬에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는데 연경에서의 교류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진실로 뜻한바가 있게 되면 사람의 의지라는 것이 일순간 어느 계기를 통하여 변한다고 볼 때, 완당의 연경 방문과 청조 학자들과의 학예의 교류야 말로 당시 세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조선이라는 한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켜 ‘완당바람’이라는 확연한 사조를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조 경학과 고증학, 금석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우리나라의 옛 비문을 조사해 조선의 옛 금석문을 연구하여 우리의 고증학을 발전시키며 토착화하는데 노력하였다. 완당으로서는 매우 당연하면서도 현명한 학문적 정체성의 확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한 대표적인 성과로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였으며 이를 황초령비와 삼국사기의 기록과 검토하여 장문의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이것이 완당의 대표적인 글인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이다. 또한 1817년 32세의 나이로 경주로 가 왕희지체 연구에서 필수불가결의 명비로 알려진 무장사비 파편을 고증하였으며 진흥왕릉도 고증하였다. 비록 오늘날에 와서 진흥왕릉의 고증이 잘못 판단되었다고 결론지어졌지만 당시의 자료에 비추어 검토하는 모습을 보면 그 자체가 충실한 문화재 지표조사였으며 그는 근대적인 의미의 고고학자이자 미술사가였다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완당은 연경 60일의 교류에 기초하여 평생 학예의 연찬과 수련을 통하여 후지츠카가 평생 연구한 “청조문화 동전의 연구”라는 논문에서 완당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일인자는 김정희이다.”

2. 마천십연磨穿十硏 독진천호禿盡千毫

완당은 서한시대 예서를 무척 좋아하였다고 한다. 후한 시대의 예서보다 순박하고 고졸함이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완당은 이런 서한 시대 예서를 임모하면서 졸박하면서도 힘있는 글씨체를 익혔다. 완당은 고전 중의 고전을 무수히 임모하면서 마침내 추사체를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한나라 때 예서를 집대성한 한예자원漢隸字源에 수록된 308개의 비문 글씨를 임모하고 또 임모하고 해서 팔뚝아래 다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그 꾸준한 노력과 참을성을 완당은 그 유명한 말로 남겼다.

완하삼백구비 腕下三百九碑 팔뚝 아래 309비를 갖추다.

완당은 그런 정신과 그런 자세로 고전을 읽혔다. 그래서 훗날 완당은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루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33신)
오서수부족언 吾書雖不足言 칠십년 七十年 마천십연 磨穿十硏 독진천호 禿盡千毫

벼루 한 개를 다 닳을때까지 쓴다는 것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공들여야 하는 것인가는 어릴적 기억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골에서 부친이 조그마한 벼루를 가지고 동네 제사 때나 초상이 있을 때 글씨를 쓰면 우리 동네에는 꼭 우리 집만이 벼루가 있는 것으로 알았다. 온 동네에서 우리집으로 글씨를 부탁하러 오기 때문이었다. 벌써 30년이 다 되었지만 아직도 그 벼루는 시골 사랑에 그대로 있는 것을 며칠 전 추석에 가서 보고 왔다. 완당의 지·필·묵을 선별하는 까다로운 성격을 감안한다면 그 벼루 역시 예사로운 것이 아닐진데 평생 십여개의 벼루를 닳게 했다면 대단한 노력이 아니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일것이다.

그런 연찬과 수련 속에서 추사체가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먹을 갈아 붓을 쥐고 쓰는 육체적 수고로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완당은 글자에서 느끼는 향과 책속에서 풍기는 기운을 모두 아우러야만 가능하다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주장했다. 그는 가슴속에 청고한 뜻이 있어야 하고 인품과 학식을 높이는 수양과 학술에의 집념까지 가져야만 능히 팔뚝과 손 끝에 발현된다고 아들 상우에게 쓴 편지에서 밝혔다. 완당의 이런 성취가 노력의 결실임을 누가 부인하겠는가만은 끝까지 노력하라는 뜻으로 그가 강조한 ‘구천구백구십구분의 일’론을 보면 오직 결론은 버킹검이 아니라 노력이라는 말임을 바로 새겨야 한다.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이 마직막 일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전집 권6, 석파 난권에 쓰다)

완당은 이 점을 제자 오경석에게 강조하며 그 뜻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하늘이 총명을 주는 것은 귀천이나 상하나 남북에 한정되어 있지 아니하니 오직 확충하여 모질게 정채를 쏟아나가면 구천구백구십구분은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일분의 공부는 진실로 이루기가 어려우니 끝까지 노력해야만 되는 거라네.(전집 권4, 오경석에게, 제1신)

완당은 이처럼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가 모든 인간에게 최선을 다하라 한 충고는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당시 조선시대라는 신분질서가 평생의 한처럼 옭매여 있을 때 그의 제자들 중 상당수는 역관들이었다고 보면 그의 제자들에 대한 배려가 이렇게 에돌아가고 있지는 않았을까. 완당평전을 쓴 유홍준님의 관련 글이 내게도 와 닿는 것은 아마 그런 평등의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믿어본다.

나는 완당이 이렇게 말한 것이 무척 반갑고 고마웠다. 그것은 특출할 것이 없는 모든 인생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이고 각성제이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 나같이 재주 없는 인생도 노력만 하면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완당평전 2권 584p)

완당과 관계하여 회자되는 이론(?)중에 금강안金剛眼 혹리수酷吏手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미술 감상은 결코 한가한 여흥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평생의 벗 권돈인이 중국의 명품 10여 점을 감정의뢰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서화를 감상하는 데서는 금강역사 같은 눈(金剛眼)과 혹독한 세무관리의 손끝(酷吏手)과 같아야 그 진가를 다 가려낼 수 있습니다.(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33신)

완당은 중국 회화사와 서예사를 완전히 꿰뚫고 있었으며 낱낱 작품의 질을 실수 없이 가려내는 무서운 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옹방강 사후에 석묵서루의 뒷일을 감당했던 제자 동경 섭지선과 함께 감정을 하고 보증한다는 뜻으로 찍었던 감상인으로 ‘동경추사동심정인東卿秋史同審定印’이라는 것이 나올 정도로 그의 미술품 감식력은 국내뿐 아니라 당시 세계 미술사에도 통달한 정도였다. 이러한 평가를 대내외적으로 받으려면 얼마만큼의 수련이 뒷받침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나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완당의 연찬과 수련의 치열함에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가히 청조와 조선을 아우러는 당대의 석학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 글은 완당의 3대 작품으로 바라보는 '세한도', '전서완석루', '불이선란'을 바라보는 느낌과 완당의 인적 네트워크 그리고 완당에 대한 잔상들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IP *.118.67.8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