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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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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21일 11시 20분 등록
3. 불계공졸 不計工拙

완당의 작품세계를 보면 제주도 유배를 기준으로 나눠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일화가 ‘무량수각無量壽閣’이다. 제주도 유배를 가면서 해남 대둔사에 들러 평생지기인 초의스님을 만났다. 당시 대둔사에는 침계루枕溪樓, 대웅보전大雄寶殿 등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뒤덮여 있었다. 완당은 당장 원교의 현판을 내리게 하고 예의 힘지고 윤기나며 멋스런 <대웅보전>을 써주며 나무에 새겨 걸게 했다. 내쳐 차를 나누던 선방에 무량수각이라는 현판 횡액을 하나 더 써주었다. 완당은 구양순을 글씨의 규범으로 알았고 또 그를 통하여 추사체의 골격을 확립했다. 그러나 법첩의 원조격인 왕희지 글씨를 바탕으로 국풍화한 서체를 개발하여 마침내 공재 윤두서, 백하 윤순으로 이어지는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원교의 글씨에 대한 혹평은 완당 자신만이 최고라는 자부심에 다름아니었다 할 수 있겠다. 그런 일화가 있은지 불과 7년이 지난 1846년 고향 예산에서 경주 김씨 원당사찰인 화암사 중건때 상랑문과 본당에 걸 ‘무량수각’, 그리고 요사체 누마루에 걸 시경루 현판을 같이 써서 보내주었다. 이 때 쓴 무량수각은 대둔사 무량수각이 대단히 기름지고 부富티와 자신감이 넘치는 윤기가 있는데 비하여 기름기가 다 빠지고 메마른 듯 순진무구한 원형질이 드러나며 대단히 명상적이다. 완당 중년 글씨의 병폐라던 ‘쓸데없이 기름진’것이 귀양살이 7년만에 완당만의 개성이 느껴지는 추사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완당의 작품세계는 제주도 유배를 거치면서 ‘괴怪’하면서도 전한시대의 ‘고졸古拙’한 자기틀과 형식을 갖추어 갔다.

완당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歲寒圖’는 제주 유배 5년차에 그의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주려고 그려진 것이다. 이상적은 스승이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 드렸고, 이 고마움에 대한 마음의 표시로 세한도를 그려 주었다. ‘세한도’는 구도와 묘사력 따위를 따지는 화법만이 아니라 필법과 묵법의 서법까지 보아야 제 멋과 제 가치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그림 그 자체보다도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 있다. 그리고 이 ‘세한도’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서화 자체의 순수한 조형미보다도 그 제작과정에 서린 완당의 처연한 심경이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림과 글씨 모두에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했던 완당의 예술 세계가 이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흥건히 배여 있음이 이 그림의 본질이라고 한다. (유홍준님의 완당평전 중에서)
추사고택에 가서야 세한도가 국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정도이니 세한도에 대한 평이 있을 수 없다. 아니 나에게는 그런 안목과 감상력이 있지 않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세한도가 그려진 배경과 유배 시절의 완당의 세상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고찰, 예술에 대한 집착, 세한도 소장자의 이동과정에 대한 전설 같은 얘기들이 이 작품에 대한 나름의 소회를 갖게 한다.

9년간의 제주도 유배가 끝나고 완당은 강상(지금의 마포 어디쯤)에 자리잡는다. 그 당시 대표적인 작품중의 하나가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이다. 나는 이 작품을 완당의 3대 작품의 하나로 내심 정하고 있는데, “낡은 책, 무뚝뚝한 돌이 있는 집” 정도로 해석되는 이 작품에 대해 임창순 선생은 “이 글씨에는 전서·예서·해서·행서의 필법이 다 갖추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쾌한 운필이 아니라 오히려 중후한 맛을 풍긴다. 글씨 전체의 구도를 보면 위쪽은 가로획을 살려 가지런함을 나타냈고, 하부는 여러 가지 형태의 세로획을 들쭉날쭉하게 써서, 고르지 않지만 전체의 조화는 잘 이루어져 있다. 이런 구도는 일찍이 다른 서예가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다.”라고 평할 정도로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구성미도 구성미이지만 글씨 자체가 내게는 대단히 멋스러워 보인다. 유홍준님은 이를 두고 “마치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들이 축축 늘어진 듯한 분방한 리듬이 있다.”고 한다. 어떤 분은 완당 서예의 최고봉으로까지 평가하는 명작중의 명작인 이 작품은 보면 볼수록 중후하면서도 호쾌하고, 멋스러우면서도 기발한 구상에 그저 감탄을 금치 못할 뿐이다.

명성황후의 시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은 난초그림에서 스승을 뛰어넘어 단군갑자 이래 최고가는 난초그림의 대가가 되었다고 평한다. 비록 경복궁 중건을 위하여 난화를 대량 생산(?)하여 그 가치가 떨어졌다고는 하나 그의 난초그림에 대한 연찬과 수련은 완당의 추사체 완성에 들인 공에 비하여 그리 많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석파의 난화의 스승이 완당이었다. 완당은 강상시절에 그를 만나 난에 대한 지도를 했으니 완당의 시·서·화에 대한 지식의 폭과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 알 수 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 완당의 난화가 거의 입신의 경지로, 아니 거의 극단적인 파격으로 추구된 작품이 ‘부작란不作蘭’이라고도 불리는 ‘불이선란不二禪蘭’이라고 유홍준님은 말한다. 유마거사의 불이선에서 나온 화작으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난초그림이라는 완당의 자화자찬은 題詩(그림옆에 쓴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불이선란을 보고 있노라면 달포 전 천안에 한 수묵화전이 있어 찾아가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본 난 그림과는 여러모로 다르다는 느낌뿐이다. 현대의 난은 맵씨와 화려함을 앞세우는 것이 그 한 특징으로 여겨지는데 반해 불이선란은 난이라기보다는 시골 동네 어귀를 갓 벗어난 산 초입쯤에 우거진 풀들과 함께 몇 포기 잡초처럼 바람 불면 흔들리고 비오면 쓰러질 듯한, 난 이파리만 없으면 그냥 여름철 무성한 들풀 이상 그 이하도 아닐듯한 것이 아주 기묘한 느낌을 단지 먹의 힘(농묵이라는 표현으로도 쓴다)으로만 표현했다는 사실에 “오직 거친 풀포기 같은 조야한 멋과 그로 인한 스산한 분위기”를 느낄 뿐이다. 완당은 이 그림에서 자신이 추구했던 난초그림의 이상을 구현한 대만족을 느꼈다고 한다. 완당의 먹을 간 먹동이라는 달준이에게 주려고 한 것을 소산 오규열(전각가로 완당 도장의 상당수가 그의 소작, 완당이 북청 유배시 그의 하수인으로 지목되어 귀양살이를 갔을 정도로 긴밀했던 제자)이 빼앗아 간다는 화제까지 쓴 강상시절의 또 하나의 명작이다.


이렇듯 많은 완당의 작품을 일일이 거론한다는 것이 벅찬 일이기도 하지만 단 몇 점의 유작으로 그를 평한다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완당의 작품 세계 중 몇 가지 특징이 있어 완당평전을 쓴 유홍준님의 평을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추사의 글씨는 오래 전부터 난해의 상징으로 불리울 만큼 개성적이기는 하지만 평범하고 교과서적인 미감에 익숙한 사람들은 괴이함과 당혹감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라고 할 만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바로 이 점을 후세에서는 ‘괴怪’하다고 하는 것이다. 화인열전을 읽을 때 ‘졸拙’이라는 글자에 의문을 느껴 옥편을 찾아본 적이 있는데 졸렬할 졸자로 스스로를 낮추거나 겸양의 의미로 많이 쓰여 지는 한자인데 완당의 글씨에서는 ‘고졸古拙’하다는 평가가 많이 나온다. 고졸이란 뜻은 ‘옛스럽고 솜씨가 서투름’이라는 말로 고전을 따라 배우는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상을 떠나기 3일전에 쓴 ‘판전板殿’이라는 봉은사 대자 현판이 대표적으로 ‘고졸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쨌던 괴하다는 완당의 글씨는 고졸이 바탕이 되어 ‘입고출신入古出新’한 것이라고 보면 어떠한가 싶다.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출한다는 이 말은 고증학의 기본정신이기고 하고 완당에게는 전한 예서로 거슬러 올라가는 ‘입고출신’의 소신과 탁견으로 완성되는 추사체의 특징인 ‘괴’로 가는 터미널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홍준님은 추사체의 괴가 갖는 본질은 형태의 괴가 아니라 필획과 글씨 구성의 힘에 있다고 했다. ‘괴’는 ‘괴’로되 그것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추사체 곳곳에 서려 있다는 뜻일게다.

“요구해온 서체는 본시 처음부터 일정한 법칙이 없고 팔목을 따라 변하여 괴怪와 기氣가 섞여 나와서 이것이 금체今體인지 고체古體인지 나 역시 알지 못하며 보는 사람들이 비웃건 꾸지람하건 그것은 그들에게 달린 것이외다. 해명해서 조롱을 면할 수도 없거니와 괴怪하지 않으면 글씨가 되지 않는 걸 어떡하나요.”(전집 권5, 어떤 이에게)

초기 완당은 이런 정도로 곤혹스러워 했으나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괴라는 점을 자신의 특징으로 살려나가고 종국에는 구양순체를 잇는 자신의 글이 괴하다는 점에서 동류하다고 까지 당당하게 말한다. 추사체의 특질을 가장 정확하게 논리적으로 설파했다는 동시대 인물인 초산 유최진의 완당론을 대신하며 추사체의 최대 특징 ‘괴怪’를 설명하는 것으로 한다.

추사의 예서나 해서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진실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 마음을 격동시키고 눈을 놀라게 하여 이치를 따져본다는 게 불가하다. 마치 머리를 산발하고 의복을 함부로 걸쳐서 예법으로는 구속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 감히 비유해서 불가·도가에서 세속을 바로잡고자 훌쩍 세속을 벗어남과 같다고나 할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완당은 과천시절에 와서 그의 예술을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절에 와서야 자신이 스스로 허물을 벗었다고 평생의 지기 이재에게 자신감을 표하였으며, 그 경지를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고 했다. 유홍준님은 이 말이야말로 ‘추사체의 본령을 말해주는’ 한마디라고 했다. 원래 불계공졸은 완당의 200여개의 인장 중 하나로 쓰여 왔으나 완당은 스스로 이를 자신의 경계로 삼아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만년의 성취를 “글씨의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허화한 곳에 있으니 이는 인력으로 이르러 갈 바가 아니요, 반드시 일종의 천품을 갖추어야만 능한 것이며, 기가 이르러 가면 한 경지가 조금 부족하다 해도 점차로 정진되어, 스스로 가고자 아니해도 곧장 뼈를 뚫고 밑바닥을 통하는” 기氣와 흥興이 넉넉하고 고르게 가라앉는 비움(虛)으로 보았던 것이다. 인생의 세파를 다 겪고 감히 스스로의 글씨에 자신감을 표했을 정도의 완당이니 이미 그에게는 잘되고 못되고의 허물이 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만년의 삶을 예술과 더불어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 했을 듯 하다.

4. 좌소치 우상적

완당은 그 빼어난 재주와 명문의 후손으로 젊은 시절 누구 못지 않은 부귀와 명성을 누리며 ‘완당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청조와 조선 후기 서·화 시대를 이끌어 왔다. 영조의 사위인 월성위 김한신의 후손으로 약관의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군관자제의 신분으로 연경을 방문하여 평생의 스승 완원과 옹방강, 그리고 섭지선 등을 만나 당시 세계와의 교류를 하여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갈 밑그림을 그렸으며, 제주도·북청 유배시에도 변치 않는 우정으로 평생을 함께한 초의스님과 이재 권돈인 같은 평생지기도 사귀었다. 그리고 양반·중인 가리지 않고 수많은 제자를 두었다. 완당의 삶과 인적 네트워트는 그의 예술적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배려한 유배에까지 이르렀으며, 그의 예술적 성취를 만들기 위한 가없는 과정을 제자들과 지인 그리고 국왕(헌종과 철종)에까지 곁들였으니 당사자로서는 서운하다 할 것이나 그의 고고한 작품을 즐기는 후세에게는 역설적인 완당의 복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수많은 사람들 중 소치 허련과 우선 이상적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의 스승인 구본형님께서는 얼마 전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라고 하셨다. 소치와 우선은 완당에게 제자이면서 친구 이상의 역할을 하면서 그의 인생에 큰 힘이 되었다. 이들을 말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소치 허련은 완당이 가장 아낀 제자였다. 그리고 완당을 가장 극진히 모신 제자도 소치였다. 소치라는 호는 원말 사대가 중 한사람인 황공망의 호가 대치大癡인 것에서 따서 소치小癡라 붙여 주었다. 이 호 역시 완당이 소치의 그림 그리는 재주를 아껴 공재, 겸재, 현재 등으로부터 벗어나 청나라 화풍을 따라 배우라는 뜻이었을 게다. 완당이 제주도에 유배갔을 때 전후 세 번이나 찾아가서 몇 개월씩 함께 지내곤 했다. 당시 제주도로 가는 뱃길이 얼마나 험한지는 완당이 해배되어 제주도를 떠나는 과정에 잘 나타나 있다. 오로지 뱃사람의 동물적 감각에 의해서만 배를 뛰우는 당시의 바다를 건너는 습성에 비추어 보면 소치로서는 스승에 대한 일편단심이 없고서야 죽음을 무릅쓰고 그것도 세 번씩이나 스승의 유배지를 찾아 간다는 것이 작금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소치는 진도 출신으로 초의선사에게서 서화를 배우면서 입문하였다. 지금도 소치 가문은 소치 이후 5대째 화가를 배출하면서 진도 일대 명문가로 이름 떨치고 있다. 얼마전 출간된 ‘명문가 교육방법’이라는 책에도 소치 가문이 소개될 정도이다. 제주도에 유배간지 넉 달만에 찾아온 소치를 완당은 어떻게 맞이 하였을까. 조선시대 유배 그것도 천리 밖 제주에서 위리안치라는 형에 처해져 집밖을 나갈 수 없는 완당에게 천리길을 마다않고 찾아준 애제자 소치는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친구이자 동지였을 것이다. 소치는 두 번째 제주 방문에서 이용현이 제주목사로 부임할 때 아예 그의 막하로 있으면서 끊일 새 없이 대정(완당의 제주 유배지)을 왕래하면서 완당의 수발을 들었다. 그는 완당의 벗이 되었고, 심부름을 해주었으며, 필요한 물품을 구해 주었다. 완당은 완당대로 소치에게 스승으로서 온 정성을 다하여 시·서·화를 가르쳤다. 그러기를 한 동한 하다가 전라우수사 신헌에게 가 있던 소치는 다시 제주도로 스승을 뵈러 내려 왔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다. 소치는 완당의 제주 유배 시절 스승의 초상을 몇 폭 그렸다고 한다. 그 중 송나라 소동파를 그린 동파입극도에서 따온 ‘완당선생 해천일립상阮堂先生 海天一立像’도 그렸다. 동파입극도는 소동파가 원우 연간에 혜주로 귀양살이 갔을 때 갓쓰고 나막신신은 평복 차림의 처연한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소치가 이에 착안해 바닷가에서 귀양살이하는 완당을 그려 ‘해천일립상’으로 번안한 것이다. 소치는 완당 사후 22년이나 지난 1878년 스승의 묘소를 찾아가 잊지 않고 제자의 도리를 다했다. 소치실록에 나온 글 일부를 인용해 보면 그의 애절한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 “완당공의 구택 문턱을 들어설 때 나의 서글픈 감정이 어떠했겠습니까? ······ 나는 완당공의 묘소를 물어 찾아가 무덤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6월 초사흘은 스승의 생신이었지요. ······ 제문을 지어 삼가 스승의 영정아래 바치니, 평생토록 마음속에 품고 있던 회포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지요.”

우리는 그런 스승과 제자가 될 수 있을까?

완당의 제자들 중 역관 출신들도 꽤 있다. 우선 이상적, 역매 오경석, 소당 김석준 등. 이 중 중년부터 완당의 제자였던 이는 이상적뿐이며 그는 완당의 지식을 충족시켜주는 도서관리인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적은 대대로 내려오는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그 자신 역관이 되었는데 23살 때 역과에 합격한 뒤 모두 열두 차례나 연경에 다녀온 중국통이었다. 그는 용모가 수려하고 문체도 아름다워 연경에서도 거공명유巨公名儒들과 친교를 맺어 70여 명의 중국 문인들과 교류하였으며 유희해의 ‘해동금석문’에 서문을 써줄 정도로 학식과 시문에 능했다. 이상적은 스승 완당이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정성을 다해 중국에서 계복의 만학집, 운경의 대운산방문고, 하우경의 황조경세문편(총 120권, 79책) 등의 책들을 구해줌으로써 완당이 ‘세한도’를 그려 그의 따뜻한 정에 답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다시 생각을 그 시절로 되돌아 가보자. 자신이 모시던 스승은 이미 죄인이 되어 머나먼 천리땅 제주로 유배를 갔다. 자신은 한낱 역관의 신분에 불과한 초라한 형편에 자칫 잘못해서 고관들의 눈밖에 잘못나면 그나마 애써 지켜온 집안이 몰살될 수도 있는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중국에 한 번 갔다 오면 서너 달이 걸리는 그 길을 갈 때마다 스승을 위해 새로 나온 책을 구하고, 스승의 지인들을 찾아뵈어 안부도 전하고 선물을 주고 받는 모습이 지금의 우리들은 그리 할 수 있을까? 물론 완당이라는 청조와 조선을 아우르는 거물의 후광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매 번 연경을 오갈 때마다 그러한 역할을 자초했다는 것은 물질적 대가보다는 스승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 역시 그러한 역할을 어느 정도 했었겠지만 이상적만큼 완당과 연경학계를 이어준 제자는 없었다. 그는 완당 사후 이렇게 스승을 애도하였다. “무덥고 황량한 남녘에서 10년 귀양살이 마치고 돌아오시더니 북쪽 바닷가에서 풍상을 견디며 더욱 노쇠해지셨네. ······(눈물이) 동이 엎을 원한을 끝내 씻지 못하고 말년에는 마음이 타고 남은 재 같았네. 선생의 은혜 갚지 못함을 통곡하노라. ······ 명망이 높으면 하늘이 시기하고 재주가 크면 세상에 용납되기 어렵다네. 평생 지기의 먹자취만 남았으니 소심란素心蘭과 세한송歲寒松”

소심란과 세한송. 과연 완당의 인생을 대표하는 글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소치보다는 우선이 완당의 진정한 후원자이자 벗이었으며 제자가 아닌가 싶다. 닮고 싶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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