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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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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월 1일 22시 50분 등록
시골냄새

병술년 새 해를 어디에서 맞이할까 이런 저런 고민에 빠져 있는데 때마침 집안 동생이 1월 1일에 결혼식을 한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더군다나 결혼식장이 13년 전 제가 결혼했던 곳이라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31일 시골로 내려가기로 하였습니다. 시골에 가져갈 과일이며, 찬거리며 그리고 혼자 계신 아버님이 덮으실 가벼운 이불도 사서 토요일 아침 일찍 출발하였습니다.

생각보다 고속도로가 뻥 뚫려 있어 대전까지 쉽게 올 수 있었고, 대진고속도로도 눈 구경 겨울 산 구경하면서 재미나게 내려와서 드디어 88고속도로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도로는 88올림픽 때 동서화합을 기원하며 만든 대구에서 광주까지 연결된 중앙분리대가 없는 편도 1차선 고속도로입니다. 10여 년 전쯤인가 차를 처음 사서 밤중에 시골에 내려오면서 편도차로인줄 모르고 건너편 차선으로 한 동안 질주하다가 하마터면 황천길로 갈뻔한 기억에도 생생한 도로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산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거창 방면으로 들어서니 거짓말처럼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소백산맥을 타고 넘어온지라 그런지 경상도 쪽은 눈 흔적도 없네요. 이 좁은 땅덩어리도 이 땅 저 땅 구별하나 싶어 마음이 괜히 떱떠럼합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 점심을 아버님이랑 같이 하였습니다. 밥을 해놓고 기다리고 계셨더라구요. 식사 후 이런 저런 애기가 끝나고 집안을 한 바퀴 둘러봅니다. 초·중학교 시절 누에치던 잠실도 텅 비었구요, 저희 형제들 학자금 역할을 하던 소와 돼지 키우던 축사도 이젠 먼지만 가득 찬 조용한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채는 거취(사람이 사는 것을 말함)를 하지 않아 손님이나 자식들이 와야 불을 땝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6년이 지났습니다. 모시던 형님네도 천안으로 이사 온 게 3년이 되었으니 혼자 사신 것이 벌써 3년이 다 되어 갑니다. 아직도 혼자 사시겠다고 우기시는 걸 저희 형제들이 이기질 못하고 있습니다. 이기지 못하는 게 아니라 저희들이 적당한 핑계에 못이기는 체 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할머님께서 사시던 안방으로 옮겨 사십니다. 대지 200평에 달하는 집이 썰렁합니다. 아버님이 부르십니다. “애비야, 기름 넣으러 가자.” 시골에는 기름을 가끔씩 아주 싸게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마침 게이지가 바닥을 가르키고 있어 가득 넣었습니다.

저녁 무렵 형님네도 도착해 오랜만에 대가족이 함께 모여 웃음꽃 피는 저녁을 먹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이번엔 꿀술을 담었다며 가져오시네요. 꿀을 따고 나면 꿀통에 남아있는 찌꺼기를 깨끗하게 다듬어 소주를 부으면 됩니다. 가을에 담았다니까 한 두 달 되었네요. 맛이 아주 괜찮습니다. 단숨에 몇 잔을 들이켜도 속이 편안합니다. 아버님은 경로당에서 저녁을 드셨다고 술만 조금 드십니다. 왜 경로당에서 드셨냐니까 경로당에서 주는 식사 한 끼가 500원 밖에 하지 않아서 자주 드신답니다. 정말 500원이예요? 그렇다고 하네요. 쌀은 걷어서 가져다주고, 200원은 반찬값으로 하고 300원은 밥하시는 아주머니 수고비로 준다네요. 시골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도회지에서는 불가능한 말이라 그렇구나 합니다. 혼자 사시는지라 동네 여러 집에서 김치며 반찬이며 가끔씩 가져다 줍니다. 냉장고안이 먹다 남은 오래된 반찬이 꽤나 있습니다.

집안 동생네로 놀러 갔습니다. 촌수로 따지면 저랑 10촌간이라 한 집안이라 할 것도 없지만 저희는 4촌 형제들 다음에 제일 가까운 친척이 10촌입니다. 게다가 어릴 적 한 동네에서 자랐으니 사촌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입니다. 결혼할 아가씨 친정이 천안이라네요. 자주 볼 것 같습니다. 새신랑 어머니 되시는 아주머니께서 창호지(한지를 이렇게 말한답니다.)를 실로 꿰메고 있습니다. 뭐하냐고 물으니, 다섯 개 봉지를 만들어 각각 찹쌀, 멥쌀, 수수, 차조, 콩 등을 넣어서 신부한테 준다고 합니다. 아들 딸 잘 낳아서 행복하게 살라는 의미랍니다. 아직도 시골에는 이런 다산에 대한 풍습이 남아 있습니다.

아침을 먹고 집안 정리를 한 다음 결혼식장에 갑니다. 13년 전 제가 결혼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식장에 서서 아내랑 아이들이랑 옛날 기억에 빠져봅니다. 그 때도 그랬던가 하면서 웃기도 하고 결혼식 장면을 되새겨봅니다. 아른한 기억이 새해 아침을 각별하게 만들어 줍니다. 동네 아주머니들, 아저씨들에게 인사하고 참 오랜만에 결혼식 전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신랑신부 입장, 성혼서약서 낭독, 주례사, 혼주인사, 퇴장, 사진촬영 등 새롭게 기억이 한 장면 한 장면 멈춰 그려지는 듯 합니다.

다시 천안으로 올라 오면서 시골에 대한 여러 가지 추억에 빠져 듭니다. 겨울에 축사 거름을 리어커에 싣고 논에다 뿌리는 일, 보리밭 밟는 일, 논두렁 태우는 일, 소 저녁주는 일(시골 용어로 소죽 끓이는 일이라고 합니다.), 추수가 끝난 들에 자치기 하던 기억, 한 겨울 소나무 관솔을 꺽어 깡통에 넣고 후레쉬 대용으로 불을 붙여 온 동네 돌아다녔던 일, 눈이 억수같이 오던 겨울방학 종업식 하던 날 해인사 친구들 만나러 눈길을 세 시간이나 걸어서 간 기억 ······. 그런 많은 추억과 기억들이 하나 하나 생각납니다. 첫사랑 여학생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그녀는 행복할까요?

시골 냄새 가득 품고 다녀온 고향이었습니다. 애들은 시골 냄새가 몸에 배여 싫다고 하지만 저는 이런 냄새가 그리 싫지만은 않습니다. 내 감성의 밑바탕이 되어 준 이런 추억들이 누구에게나 있겠지요. 저에게도 있네요. 이런 모습으로요.
IP *.118.67.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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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2006.01.02 08:20:30 *.76.92.8
ㅍㅍ..새해 첫 출근일에 훈훈함을 느낍니다. 저도 집이 시골이라 어느정도 눈앞에 그림이 그려지네요!! 그냥 무언가 아련히 그리울때 한번쯤 가고픈 고향..아앙~갑자기 엄마 아빠가 보고싶어영..ㅠ.ㅠ
박노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 건강하시구 올해도 훈훈한 논픽션 스토리 많이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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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기원
2006.01.03 04:57:46 *.190.84.149
저도 그 곳옆이 고향입니다.
부럽습니다. 좋은 추억의 시골냄새가
지난해 박노진사장님과 함께했던 날들이 저에게 참 많은 의미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도움 주신 날들 감사드려요.
횡성-안흥-평창을 누비고....
천안, 서울길상사 북한산 그리고 배나뭇골 모임까지 다복한 05년 한해였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원하시는 일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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