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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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과 입학사이
저희 집은 주로 남자들이 집을 지킵니다. 방학 내내 막내인 딸은 10시만 되면 외출준비에 바쁩니다. 어제는 친구 집에, 오늘은 학교 도서관에, 내일은 봉사활동에 뭐가 그리 바쁜지 나갔다 하면 점심은 바깥에서 해결하고 오기가 일쑤입니다. 엄마가 일을 나가고 나면 아빠와 아들 녀석 둘이서 점심을 차려 먹을 때가 부지기수였거든요. 아마 저희 집은 남녀의 구별이 거꾸로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다 올 겨울이 다 지나가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큰 애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을 며칠 앞두고 있습니다. 벌써 제가 중학생의 학부모가 되다니 ······. 마음은 언제나 20대 청춘이었는데.
큰 애는 몇 달 사이 마음이 성장한 듯 보인답니다.
신발이 벌써 아빠 사이즈와 비슷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몇 년 안 되어 신체적으론 아빠를 넘어설 것 같아 보이구요. 아빠가 작아서 별 문제없어 보입니다.
대략 두 달 전쯤 이젠 중학생이 되니까 휴대폰을 사 주겠다고 했습니다. 갖고 싶은 휴대폰이 있으면 봐두라고 일러두었죠. 그러기를 보름 정도 지나서 하는 말이,
“아빠, 아빠 휴대폰이 제일 좋아 보여. 아빠 꺼 내가 가질래.”
“왜? 다른 좋은 휴대폰이 얼마나 좋은데.”
“싫어. 성능이 아빠께 제일 좋아 보여. 그냥 그거 줘.”
제 휴대폰은 작년 8월에 그전 휴대폰을 보상받은 돈에다 조금 더 보태서 산 당시 최신형 모델이었습니다. 500만 화소이긴 하지만 슬립형이거나 폴더형이 아닌 노키아식 모델이어서 갖고 다니기가 조금 불편할 정도로 큽니다. 제 또래 친구들이 보기에는 왠 무전기? 같은 느낌일 것 같아서,
“친구들이 흉보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그걸로 해줘.”
할 수 없이 제가 가지고 있던 휴대폰을 아들 녀석에게 주었습니다.
저한테 있을 땐 전화 주고받는 것 외에는 전혀 쓸모없었던 휴대폰이 갑자기 변신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최신곡을 다운받아 노래듣는 아주 훌륭한 MP3도 되기도 하고, 500만 화소라는 말만 요란했던 것이 몇 분할(용어도 잘 모름)하는 아주 쓸만한 디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한테 있을 때는 말만 휴대폰이었지 별 쓸모가 없었던 거 였더라구요.
우리 집 컴퓨터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문제나 고민거리는 이 아들 녀석이 다 해결합니다. 엄마 싸이에 사진 올리는 아주 간단한 것에서부터 동생 인터넷 공부까지 뭐든지 척척박사입니다. 벌써 정보처리기능사, 워드 2급, 컴퓨터 활용능력 3급, ITQ(한글, 파워포인트) A급 등의 국가 및 민간 공인자격증을 따 놓았습니다. 수학과 과학에 관심도 많고 실제로 공부도 잘 하는 녀석이죠. 동생하고 시비 붙었을 때 물불 안 가리는 전투사가 되는 것만 빼면 나이답지 않게 듬직한 녀석입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때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아 있을 때였습니다.
아들 녀석이, “오늘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제가, “왜? 아! 빨리 입학하고 싶어서 그러는 구나.”
그러니까, “아니, 내일이 빨리 왔으면 ······.”
그래서, “그럼 모레는?” 그러니까
“모레도 빨리 오고 그 모레도 빨리 오고, ······(중얼중얼)”
“왜 그러는 건데?” 하니깐
“그래야 일요일이 오잖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입학 안 하면 안 될까?” 하더라구요.
이 녀석은 졸업과 입학 사이에서 그냥 살고 싶은 거였습니다.
학교 가지 않고 집에서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태권도 학원도 다니면서 엄마, 아빠랑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인 것 같습니다.
학생인 녀석이 학생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 저도 어릴 때 얼마나 소원했는지 모릅니다.
사회인이면서 정상적 사회인이기를 바라지 않는 저랑 비슷해 보입니다.
우리는 이를 경계인이라고 불렀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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