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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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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28일 16시 33분 등록

몇 일째 온 몸을 싸고 도는 무기력입니다. 좀처럼 이런 일이 없다 보니 왜 이런지 궁금했습니다만 미처 깊게 파헤쳐 볼 짬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게 뭔지 알아 봐야겠는데 좀처럼 기력이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늦은 퇴근 길에 갑작스레 그 해답이 들이닥쳤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간혹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계시를 아실 겁니다. 어이없지만 성인군자들의 깨달음이 나에게도 잠깐 왔다간 느낌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실 겁니다.

아무래도 제 주변에 시차가 생긴 모양입니다. 나의 안에서 돌아가는 시계와 나의 밖에서 돌아가는 시계가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문제는 내 안에 있는 시계입니다. 밖에 있는 시계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속도로 가고 있으니까요. 내 안의 놈이 성급해 진 겁니다. 그게 문젭니다. 저는 지금 그 두 개의 시간 속에서 적응을 하는데 애를 먹고 있나 봅니다.

제 얘기를 좀 해볼까요. 저는 작은 생명보험회사에서 5년째 설계사 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교육 프로그램도 만들고 교재도 만들고 직접 진행도 합니다. 간혹 교육용 동영상을 촬영하여 만들기도 하는데 이것도 재미가 쏠쏠합니다. 대기업 계열사다 보니 신나지 않는 보고자료도 많이 만듭니다. 분명 좋은 의도로 시작한 것일 터인데 왜 내려오기만 하면 이 모양인지…… 중간에 아주 기가 막힌 변압기가 있나 봅니다. 어쨌든 저는 이런 일을 합니다.

교육은 아주 보람 있는 업입니다. 눈빛이 변해서 현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뿌듯해 하지 않기란 여간 어렵지 않지요. 아직 누군가를 가르칠 만큼 농익지 않아서 배우는 시간이 더 많기는 하지만, 교육이란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이라 인정 어린 냄새가 많이 납니다. 그게 좋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나를 따지기 시작하면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습니다. 저는 영업을 잘 하도록 하는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잘 파는 사람을 키우는 일을 하고 있는데 사실 이건 저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어떻게든 내가 좋아하는 분야와 연결 지어 보려 하고는 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육의 흥과 열의가 잘 커지지 않나 봅니다. 이게 제 밖에서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아침에 보내는 두 시간은 저의 또 다른 세상입니다. 이 시간 동안에 저는 좋은 책을 읽거나 가끔 글을 쓰기도 합니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해 이것 저것 잡히는 대로 잡식을 하곤 있지만 이 시간에 만나는 책을 통해 동서고금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세상을 쥐락펴락 하기도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 나를 만나고 내가 아닌 것을 고르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하루 두 시간으로 끝날 수가 없습니다. 출퇴근길 시간에도 업무 중간의 자투리 시간에도 내 안의 시계는 멋대로 돌아갑니다. 혼자서 신이 나, 앞뒤 없이 덤벼드는 시간이다 보니 얼마나 급하게 돌아가는지 아실 겁니다들.

이 두 개의 시간 사이에서 시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변해서 좋습니다. 하루하루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 힘들어도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아직 현실을 떠날 수 없는 나를 때려 아프게 합니다. 당장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없는데 그저 성급하게 보채기만 합니다. 변해서 행복한데 변해서 아픕니다. 그 둘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지치면 이렇게 잠깐 동안의 무기력이 찾아오나 봅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일년 전에도 찾아왔었습니다. 한적한 양평의 어느 쉼터에서 처음으로 선생님과 꿈벗들을 만나고 현실로 돌아 왔을 때 한동안 적응하기 힘들었었지요. 그래도 꾸준함은 어느덧 현실의 시간을 부지런히 끌어 올려 주었고 그 덕에 나는 조금 업그레이드 되어 시차적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성공이었죠. 이번에는 시차가 조금 더 늘어 났습니다. 아무래도 앞으로는 계속 늘어날 것 같습니다. 내 안의 시간이 점점 더 빨라질 테니까요. 하지만 어떻게든 난 또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런 시차적응의 연속을 겪어내야 나의 변화는 계속 성장할 수 있습니다.

2001년 여름, 짧은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던 길이었습니다. 간절히 바라던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계획한 연수였는데 오히려 원서접수기간을 놓쳐 기회조차 잃어버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귀국한지 하루도 되지 않아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고 싶었고 집밖으로 나가면 아직도 토론토 거리일 것 같은 환상에 시달렸습니다. 그 때엔 내 안의 시계가 현실의 시계보다 터무니 없이 느렸고, 따라가기가 너무 숨찼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시차 부적응이라도 지금과 그 때는 많이 달라져 있군요. 이제는 내 안의 시계가 더 빠르답니다.
내일 아침엔 또 다시 힘을 불어 넣어 보렵니다. 빠지면 또 넣지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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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6.03.28 18:26:25 *.199.135.134

개인적인 이야기를 글감으로 잡아도 되는가 보다고 어디선가 썼지요? 아마 찰스 핸디에 대한 이야기 중이었을꺼예요. 금방 '개인적인 이야기'로 훌륭한 글을 써냈네요. '시차'라는 개념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의미전달이며, 모양새가 아주 깔끔한 글이 되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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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gie
2006.04.06 16:52:39 *.72.66.253
...중간에 아주 기가 막힌 변압기가 있나 봅니다.... 이 문장을 몇 번 읽다가 웃는 나.. 변압기의 새로운 용도를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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