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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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원칙
김동리선생이 젊어서 문단에 등단했다는 소식을 들은 친지하나가 이렇게 말했단다.
‘굼벵이도 뒹구는 재주는 있다더니...’ 글재주 있는 사람들에 대한 현실적 평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예라고 생각한다. 나역시 커다란 글재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실감각이나 수완이 상당히 부족하다. 한정치산자에 가까운 경제감각, 경미한 조울증과 자폐증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정서를 가지고 ‘저자거리’에서 살았다. 경제나 소시민적인 삶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이 그 바닥에서 성공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자연히 게으르고 산만하고 수완없는 ‘미숙이’ 그 자체일 수밖에.
그런데 요즘 연구원 과제를 이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책읽기와 글쓰기에서는 내가 절대로 게으르지 않더라는 사실이다. 상담전화 한 통 하려면 2박3일을 미루다 그예 하지 않는 내가, 이 홈페이지에서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꼽히는 것이다.
믿을 수 없을만큼 빨리 지나간 세월 앞에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앞에서, 내가 한 번 갖고 놀아봐야 할 유일한 재료가 책과 글이라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어쩌면 이만한 절실함은 세월이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결에 지나간 시간의 무게에 비해 텅 빈 손을 쳐다보는 심정, 누군가 정확하게 짚었듯, ‘더 이상 이렇게 살수는 없다고 중년의 흙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그래서 나는 결단코 연구원 1년차의 목적을 분명히 하려고 한다. 첫째도 연구, 둘째도 연구이다. 나는 오직 독서량과 글로 말하는 사람이다. 동료 연구원들의 글을 매섭게 지적하고, 흥겹게 인정하는 첫번째 독자가 될 것이다. 구소장님이 말하듯, 보통사람이 힘껏 노력하고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최소기간인 3년을 힘차게 시작할 것이다.
두번째 원칙
앞에서 말했듯 재주라고는 도무지 없는 나는, 음치에 기계치에 관계痴이다. 사실 사람을 많이 버렸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거의 현실과 신변에 갇혀 있었다. 나는 현실과 신변의 그 너머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코리아니티 경영’에서 인용된 귀절 하나를 읽으며 잠시 망연자실했다.
알렉시스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에서 ‘조상을 잊고 동료를 무시함으로써 개인을 영원히 홀로 남겨두어 결국 자기 마음의 고독 속에 가둬버리게 될 것이며... 독자적인 삶을 얻을 수는 있으나 그것은 죽음보다 더 나쁜 삶이며... 바로 이 부분이다. 누구를 무시한 적은 없다. 단 무심했다. ‘독자적이라는 미명아래 죽음보다 더 나쁜 삶’이라는 귀절이 뒷덜미를 쳤다. 설상가상으로 요즘 읽고 있는 신영복선생님의 ‘강의’에서도 시종일관 ‘관계’를 강조하신다.
이제 글을 통해서 본 바로는 나와 상당히 기질이 비슷한 연구원들과의 커뮤니티가 시작된다. 할 수 있다면 조심조심 연구원 커뮤니티 안에서 관계맺기 연습을 하고 싶다. 사소한 실수는 용서받고, 큰 목표는 독려하는 평생동지를 얻고 싶다.
세번 째 원칙
바라건대 나를 ‘언니’나 ‘누나’라고 부르지 말고 ‘한선생’으로 불러주었으면 한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고 또 내가 제일 연장자 같으니 ‘先生’ 맞다. ‘언니’나 ‘누나’같은 호칭에서 나는 사회적으로 부과된 여성성 혹은 모성성을 감지한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연장자층에게 기대하는 너그러움과 인내같은 덕목도 느낀다. 하지만 우리 연구원들은 나이와 성별을 떠나 독립된 인격으로 만나는 것이고, 오로지 연구성과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면 너무 살벌하게 들릴까. 한번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인생에 걸쳐 아주 특별한 상대에게만 남성이고 여성인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고용주와 고용인, 고객이나 행인, 국회의원과 출입기자로 만나는 것이지 여성과 남성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멋모르고 살아온 그 세월에 값을 매겨 ‘나잇값’을 할 자신도 없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연구원 커뮤니티 안에서는 나이와 성별을 뛰어넘는 ‘건강한 도발’ 을 표현하고 수용하는 ‘단독자’로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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