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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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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1일 18시 56분 등록
어제는 큰 딸 아이와 시내 여기 저기를 종일 쏘다녔습니다.
요즘 마음이 클려고 사춘기의 방황과 자유에 대한 열정이 많아진 아이입니다.
저 역시 봄의 정취를 잊고 숙제에만 마음을 잡아두다가 어제는 무작정 나섰습니다.

엄마, 아빠가 결혼 야외 사진을 찍은 덕수궁을 첫 행선지로 잡았습니다.
아이에게 포즈를 잡았던 장소들을 이야기 해주며 정원들을 감상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몇 번이나 소풍을 왔던 곳인데 아이하고 손 잡고 둘러보았습니다.

덕수궁 돌담길 뒤에는 운동장이 없는 초등학교 하나가 있습니다. 덕수초등학교입니다. 제가 나온 학교입니다. 아이가 초등학생 아빠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초등학교 학생이었기에 별로 해 줄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기억 속에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등하교 길을 따라 재잘거리고 있었습니다.

교보문고를 거쳐 외국인 노동자 합법화 시위를 가두에서 아이와 함께 응원했습니다. '차별 반대, 추방 반대, 취업비자'
이런 장면을 보면 언제나 표정도 말도 없어집니다. 아이가 이것 저것 물어옵니다. 마지 못해 대답들을 해 주었습니다. 엉성한 짧은 답변들로는 아이의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이가 아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제 나름대로 궁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인사동으로 가는 길에 뜻하지 행운을 만났습니다.
부처님 오신날 봉축 축제가 종각 노상에서부터 풍성하게 신이 나 있었습니다.
조그만 연등도 만들고 이런 저런 체험에도 참여했습니다. 소원을 담은 한지도 새끼에 매달았습니다. 조계사에 들러 아이와 함께 향도 피웠습니다. 그리고 모든 잘못과 업을 소멸시켜준다는 관불의식을 아이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이가 하겠다고 해서 아이 먼저 그리고 저도 하였습니다.
언제가 읽은 신부님의 책에 의하면 저는 '하나님을 믿는 독실한 불교도'입니다.

인사동 지리산에 가서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많은 지인들과 함께 밥을 먹은 음식점입니다. 그 중에는 고인이 된 제게는 스승인 선배도 있고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보고 싶은 이들도 꽤 있습니다. 인사동은 30대 날들의 저의 주된 약속 무대였습니다. 아내하고도 연애할 때 참 많이 걸었던 익숙한 발길들입니다. 이제 지리산에서 함께 밥 먹은 소중한 이가 한 명 더 생겼습니다.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인 큰 딸 슬지입니다.

연년생의 두 딸 아이를 맞벌이하면서 키우느라 슬지의 육아는 전적으로 제가 전담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슬지는 지금도 아빠와 같이 자고 싶다고 슬그머니 베개를 가지고 저 한테 오는 아이입니다.

배를 불리고 나니 한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우리는 거리 무대에서 진행 중인 비보이 댄스공연을 신나게 보았습니다. 젊은 친구들의 문화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내친 김에 기다렸다가 연등행렬도 보기로 했습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에 대한 신심이 우러나오는 축제였습니다. 아이는 행진 중인 스님이 악수해줬다고 집에 와서 엄마한테 자랑합니다.

집에 오니 이번 주 책이 책상 위에서 기다리다 지쳐서 졸고 있습니다.
다음 번에는 오늘 둘러보지 못한 사직공원, 삼청공원 등을 아이와 함께 둘러볼 작정입니다. 아이를 통해서 다시 그 아이의 눈높이로 돌아갈 보려고 합니다.

아이는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피곤에 지쳐 제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습니다. 낮의 답답해 하던 아이의 마음이 뻥 뚫린 듯해서 잔잔한 미소가 제 얼굴을 감싸옵니다. 평화롭게 잠들기에 좋은 밤입니다.
IP *.44.15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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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6.05.01 12:02:19 *.118.67.206
참 좋은 날이었겠군.
난 주말에 선생님과 함께 부산에 다녀 왔다네.
초량동을 거쳐 광복동까지 걸으며 IMF 이후 부산의 뒷골목길을 천천히 음미하였지. 그리고 50년 전통의 할매 국시집에서 아주 매운 회국수를 먹고 자갈치시장 이쁜 아줌마가 막무가내 손을 잡아 끈 어느 포장횟집에서 곰장어를 구워먹었다네. 소주가 C1하더군.
덕분에 주말 잠을 부산에서 보내고 집사람에게 눈치 많이 받았지.
우리 아이들은 아빠, 엄마랑 잘 나다니러 하지 않는다네.
지들도 컸다 이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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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6.05.01 13:15:15 *.199.134.172

마침 '아빠의 자리가 없다'는 기사를 읽은 뒤라 종승님의 글이 더 애틋하게 다가오네요. 슬지는 참 좋겠어요. 사랑받은 기억은 정말 오래가고 자기존중감의 뿌리가 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는 것같아요. 저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면서 컸지요. 지금은 아버지 생각 한 번 못하고 바삐 사는 생활인이 되었지만요. 8년 전에 돌아가셨구요. 명수님 표현처럼 정말 싱그러운 오월 첫 날입니다.
좋은 오후 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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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승
2006.05.02 12:21:09 *.109.152.197
한선생님...오랜만이네요.
저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인 우리집 아이들의 지나온 삶과 앞으로 전개될 삶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인간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관계입니다. 슬지는 어제 저녁에 묻데요.
"아빠 사춘기가 얼마나 가?"
"한 2,3년 정도."
"그럼 다행이네, 난 10년 정도는 가는 줄 알았지. 괜히 짜증나고 친구들하고 돌아다니고 싶고, 나도 이런게 싫은데"
"누구나 다 그러면서 마음이 크는거야, 아빠도 그랬거든"
아이는 지금 '아빠의 자리'보다는 '자기의 인생을 나누고 싶은 친구의 자리'를 저한테서 찾고 싶어하는 것 같네요.

한선생님, 봄이 아주 예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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