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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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평론가인 장석주는 대단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다. 79년 신춘문예에 시(詩)와 평론이 동시에 당선된 이후 시와 소설, 평론을 아우르는 집필활동으로 마흔 권에 가까운 저서를 펴냈다. 딱딱해 보이는 평론이나, 내 마음에 차악 감겨들어오지 않는 시에 비해, 그의 화려한 산문에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빨려들어간다. 그의 수많은 저서 중에서 산문집 두 권-‘추억의 속도’와 ‘마음의 황금정원’-을 읽었을 뿐이지만.
그는 “책이 밥이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독후감을 모아 펴내는, 소문난 독서가이자 장서가이다. 우리 학교체제에서 숨을 쉴 수 없었던 타고난 자유인인 그에게, 책은 유일한 학교였다. 어떠한 억압도 정당화시키지 않는 탁월한 학교.
그의 현란한 사유를 풀어내는 문장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도시생활에 지친 모습이나, 조금은 외롭고 쓸쓸한 시골생활에 대한 묘사조차 아름답다. 그는 2000년에 안성의 한 저수지 변에 집을 짓고 살고 있다. 그의 집 이름도 수졸재(守拙齋)이다.
“12월이 간다. 간밤의 노름판에서 판돈을 몽땅 털리고 터덜거리며 돌아오는 탕자의 빈 가슴에 쌓이는 상심처럼 그렇게 왔던 12월이다. 나는 어두워오는 진흙도시의 한 모퉁이에 서 있다. 언제 추방될 지 모르는 장기 불법체류자처럼 그렇게 막연하게 호주머니에 소중한 전 재산인 양 마른 잎사귀 같은 손을 집어넣고 서 있다. 어깨에 눌어붙어 있는 일상의 찐득한 피로들로 내 어깨는 약간 지상을 향해 처져 있다.”
“나는 오래 불행했었다. 기억하마.
그 불운들마저 없었다면
내 삶은 또 얼마나 텅 비어 있었을까를”
“저녁이 그림자를 차곡차곡 개어 내 호주머니에 넣어줄 때 어떤 완강한 슬픔이 내 척추를 아프게 비튼다.”
“내 전생은 라마승이었으니 마흔 너머부터는 라마승의 삶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큰 불편을 냉큼 받아들였더니 마음의 작은 불편들이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내가 실패에 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슬하의 것들을 데리고 조촐하게 살러 이 곳에 왔습니다. 노루귀, 매발톱, 꿩의 바람, 벌개미취, 노란줄무늬비비추, 노각나무, 이팝나무, 초생달, 물오리 같은 것들이 내 슬하에 새로 호적을 올립니다.”
이런 아름다운 문장들은 분명 탐욕적인 독서력에서 왔겠지만, 그가 살아낸 세월도 무관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산문들을 쓸 때가 40대 후반, “이미 희망은 탕약처럼 졸아들고, 또한 겨우 우둔을 면하고 삶이 쓰디쓰다는 사실을 알아버릴만한 ” 나이이다.
“내가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이 생을 건너가고 있구나” 회한이 들만한 지점이다.
그럼에도 그는 과감하게 도시에서 탈주하여, 평소에 열망하던 ‘자유롭게 살기, 영혼의 점진적인 정화, 삶의 완전한 향유’에 도전한다. “무리여 안녕, 죽은 고양이의 대가리에 지나지 않는 낡은 일상이여, 안녕 ” 사람들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가 지향하는 ‘깊고 고요한 삶’을 방해하기 때문에 혼자 있고 싶어한다. 다음과 같은 표현을 보라!
“강한 자만이 자기만의 시간을 취한다. 인류에게 유익한 그 무언가 경이로운 것은 거의 모두 보석과도 같은 순도 높은 자기만의 시간에서 탄생한다. 순도 높은 자기만의 시간의 그 초인적 인내, 그 몰입, 그 황홀한 자기 연소 없이는 진부한 삶외에 아무 것도 없다.”
“여행 중에 인생은 잠시 유예된다.”
“이 집은 내 삶의 새로운 핵이며 중심이다.”
때로 장황하고 때로 날카롭지만, 언제나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그의 공력이 부럽다. 턱없이 가난한 나의 언어여. 은둔과 명상의 맛을 알지만, 동시에 이글거리는 생(生)에의 욕망을 놓지 않는 그의 복합성도 매력적이다. 그가 속삭인다.
“작은 순간을 다 써버려라, 곧 그것은 사라지고 말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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