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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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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17일 20시 25분 등록
몇 달 간 맘먹고 책을 읽으려고 하다보니, 책 하나로 인해 일희일비가 교차한다. 가령 지난 주에는 집어드는 책마다 어려워서, 재미없고 진도 못 나가고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먼저 김 현의 ‘행복한 책읽기’, 여기저기에서 자주 추천되는 명저라서 읽어보려고 시도했지만, 깨알같은 글씨의 내가 읽지않은 작품들에 대한 평론을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E. 쿤즈의 ‘한글세대를 위한 불교’역시 상당한 내공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넘어가 지지가 않았다.


서강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최초의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를 창설해 이끌고 있는 이정우의 ‘탐독’은 또 어땠던가. 천재적인 철학자의 사상편력인 셈인데, 문학 과학 철학을 아우르는 그의 성장기를 따라가기에는 나는 너무 호흡이 짧다.
우연이지만 한꺼번에 어려운 책들에 둘러싸이니 막막하고 기분이 너무 가라앉았다. 그래서 과감하게 주역까지 네 권을 한 쪽으로 밀어내 버렸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지금은 그 책들을 만날 때가 아닌가 보다.


다운되었던 기분을 일시에 끌어올려준 것은 ‘김서령의 家’와 최세진의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이다. 앞의 책은 장안의 멋진 집 22곳의 탐방기이다. 평소에 집 사진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해 왔는데, 집구경이 visualization-시각화, 이미지화-을 도와줘 성공이나 계획에 대한 전체그림을 그리는 데 직빵이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표정이 있고, 철학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게다가 집집마다 이름이 있었다!


“자신이 몸담은 공간에 이름을 만들어두면 거기 걸맞는 삶을 꾸리게끔 스스로를 다스리게 됩니다. 획일적인 아파트 공간에 독특한 당호를 만들어 붙이면 그때부터 집의 기운이 달라지지요.”
연립주택에 한옥의 기품을 서려놓은 우리 차 연구가 이연자씨는 ‘당호 짓기 운동’에도 열심이었다. 거실은 글을 수놓는다는 문수원文繡園, 안방은 차의 맥을 잇는다는 선맥원仙脈原, 아들 방은 백운산방白雲山房, 부엌은 심거요다지실深居樂茶之室이라는 현판을 붙여두었다.


이윤기의 집은 과인재過人齋이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집이라는 뜻이다. 30년간 나무를 심은 화가 박태후는 호에는 감을 넣고 <시원枾園>, 당호에는 대나무를 넣었고 <죽설헌竹雪軒>, 딸의 이름은 소나무고 <송이松伊>, 정작 본인은 은행나무를 편애한다고 한다.


이들에게서는 시간과 공간을 갖고 노는 풍류가 느껴진다. 내 삶이 어우러지는 집, 그 집에 어우러지는 삶을 위해 우선 이름부터 하나 지어놓을까나.


'김서령의 가'에서 당호에 대해 발견했다면, 두 번째 책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에서는 클래식음악과 SF문학에 대해 좀 더 접근할 수 있었다. 음악이 위대한 통합적 언어인 것을 감잡고 있으므로, 좀 들어보려고 박종호의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2’를 샀는데, 전혀 필받을 수 없는 선곡이라 서운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번 최세진의 안내는 그야말로 파워풀하다. 청년 니체를 애증에 휘말리게 했던 바그너, ‘냉전시대 소련에서 천재 음악가로 비참하게 사는 법’을 보여주는 쇼스타코비치를 들어봐야겠다. 쇼스타코비치의 ‘라이터, 새끼 손가락, 왈츠 춤곡’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텔미 썸싱’, ‘아이즈 와이드샷’에 널리 쓰였다니 의외로 들어본 곡일수도 있다.


원래 이 책에서 게임과 SF에 대한 부분은 딱딱해 보여서 밀쳐놓고 2부의 예술파트부터 읽기 시작했다. 2부에서 충분히 저자를 신뢰하게 된 후 SF를 읽어보았는데-게임은 워낙 아는 게 없어 읽지 않을 생각이다- 과연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SF에도 정치적 지향점이 있다. 베트남전에 찬반을 표명한 SF 작가들의 작품에 고스란히 이데올로기가 들어있다. 과학적 엄밀성, 작품 완성도, 대중적 인기 등 완벽한 조건을 갖춘 SF작가 로버트 A. 하인라인, 그의 ‘스타쉽 트루퍼스’는 미국의 제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참전을 찬양한 것이라고. 이에 맞서 조 홀드먼이 그 작품을 패러디하되, 전쟁이 얼마나 무의미하며 반인간적인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전쟁’을 썼는데 그 후에 오히려 최고의 SF로 꼽힌다는 사실.


영화 ‘아이 로봇’의 원작자 아이작 아시모프, 생전에 500여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가공할만한 필력의 소유자. SF뿐만 아니라 역사, 신화, 수필, 생물학 등 각 분야에 걸친 그의 집필력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 밖에도 어슐러 K. 르 귄의 페미니즘에 관한 상상력은 정말 신선했다.


결론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일단 빨려들어 읽을만한 흡입력이 있으면서, 내게 지식의 확장을 시켜주는 책이다. 내 편협한 지식의 영토, 아집의 경계를 확장할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책이다.
IP *.81.2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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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6.09.17 23:03:18 *.118.67.80
많은 책 읽기가 좋은 법이군요.
한 주에 한 권 읽기가 벅찬데,
참 바지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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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수
2006.09.19 17:53:08 *.57.36.18
저도 책읽기가 좋아 책을 놓지 않지만
명석님은 책을 벗삼고 책으로 풍류를
즐기는군요.

좋은 결실이 반드시 곁에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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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라
2006.09.20 16:11:58 *.46.15.12
명석님이 써놓은 독후감을 보고 탄력받아 몇 권을 읽어봤습니다.
책읽는게 몇 안되는 낙중에 하나인데, 고르고 선택하는 시간이 아까워 '검증받은'책을 주로 읽곤 합니다^^;
명성과는 달리 읽기 버거운 책이 종종 있더군요. 말씀하신 흡입력이 관건인것 같습니다.
명석하신 명석님의 글이 어느 귀차니스트의 도서리스트를 작성해 주고 계신다는거 잊지 마세요. 그런 의미에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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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6.09.20 19:53:40 *.105.190.89
읽으려고만 들면, 좋은 책이 쌓여있는줄 알았어요, 그런데 의외로 꽁꽁 숨어있어서, 내 취향과 단계에 맞는 책을 고르는 일이 쉽지 않네요.

마침 주말에 홍대 앞에서 북페스티벌이 있네요. 기사제목이 그럴듯해서 한 번 가볼까 하는데, 얼마나 건져질지 모르겠어요. ^^

"눈밝은 이들 '저주받은 걸작' 건져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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