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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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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12일 09시 17분 등록
두 시간

원래 아침 잠이 많은데, 요즘은 기상이 조금 일러졌습니다. 고3인 딸애가 7시 20분까지 등교하기 때문입니다. 6시에 일어나면 충분합니다. 화장실 창문으로 하늘을 내다보았는지, 딸애가 “하늘에 바다가 있네” 합니다. 요즘 아침노을이 그야말로 환상입니다. 신년마다 당진 왜목마을이나, 공주 마곡사로 템플 스테이를 하러 가서도 못본 완벽한 일출입니다.


게다가 내 사는 곳 옥상에서 일출을 볼 수 있습니다. 딸애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면서 옥상으로 직행해서, 황홀한 일출을 보곤 합니다. 요즘 날이 조금 흐렸지 않습니까. 먹구름의 안쪽으로부터 쏘아주는 황금색의 빛살이 장관입니다. 구름이 없이는 저런 장관이 연출되지 않습니다.


학교로 가는 차 안에서 아이가, “ D-5일이야 ”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를 하나 해 줍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잔치를 하려면 꼭 돼지를 잡았습니다. 도끼로 돼지의 정수리를 내려쳐 단번에 숨을 끊어놓지 못하면 일이 몇배로 커집니다. 피칠갑을 한 돼지가 길길이 뛰어다니고, 그걸 잡느라 난리를 친 적도 있습니다. 언제가 애들아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돼지를 내려칠 때, 단숨에 성공하려고 집중하되 너무 힘이 들어가면 오히려 실패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의사가 수술할 때도 그런 심정이겠구나 했었지요.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되, 힘이 너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일이지요.


게다가 인생은 아주 길단다. 고3 때, 대학 졸업 때, 스물아홉 살 때... 금방 어떻게 될 것처럼 세상이 막막하지만, 인생은 계속되고 어느 한 시점으로 무엇이 결정되는건 아니란다. 아이는 알아들은 것같았습니다.


오늘은 연구원 미팅이 있어 서울에 가는 날입니다. 역에 가서 기차표를 예매했습니다. 9시 46분 기차이니, 지금부터 두시간이 남았습니다. 이 두시간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합니다.
염상섭은 원고지 70매 분량의 단편소설에 인생 3대를 그려넣었습니다. 최근의 추세로는, 안방에서 화장실 가는 사이에 있었던 의식의 흐름을 원고지 70매에 그려넣은 작품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두 시간 동안 내가 한 일과 의식의 흐름을 기술하기로 들면 장편소설도 나올 수 있겠습니다.


역에서 돌아나오다 보니 어느새 아침해의 붉은 빛이 가시고 일상적인 은색을 되쏘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정점은 어쩌면 저토록 짧은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몇 번 안되는 정점에서 정점을 연결하는 사이에 우리는 지치도록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 일상을 잘 경영하는 사람은 성공할 것입니다. 근면성실하다는 것은 언제나 제일 안전한 처방이니까요. 저처럼 단순반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몸짓은 큰데, 아주 실속이 없을 우려도 있지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생긴대로 살아야지요. 주욱 황당하게 살아온 사람은, 끝까지 황당한 것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어제 깨달은 것이지요.


어제 오후였지요. 4시경에 책을 보다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 오래된 드라마를 다시 보고 있는데, 전기가 탁 하고 나갔습니다. 4시라고는 해도 방안에는 어둑한 기미마저 있었습니다.
책을 볼수도 없고 낮잠이 올 것같지도 않았습니다. 순간 저는 심리적인 공황에 빠졌지요. 아주 기막힌 필자를 발견해서 낄낄 웃어가며 책을 읽는 중이었고, 묵은 드라마인지라 요것조것 분석해가며 다시 보는 재미도 쏠쏠했는데, 순식간에 제 안에 있던 불안이 고개를 디민 것입니다. 내 안에 이런 불안이 숨어있었구나. 순간 저는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잘 살아내고 있는줄 알았는데, 겨우 요만한 돌발상황으로 이렇게 휘청이다니... 저는 거의 충동적으로 밖으로 나갔지요.


차를 몰아 20분 거리의 가곡저수지에 갔습니다. 워낙 어죽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점심을 걸렀는데 별 식욕이 없는 지금 상태에 어죽이 제격일 것 같았습니다. 처방은 적중했습니다. 점심 때가 지나 한가한 식당에서 어죽을 먹는데, 맛도 있었지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거든요.
나는 진정한 소통을 찾느라, 일상적인 소통을 멀리했다. 그러느라 허위적인 소통은 차단했지만, 진정한 소통도 찾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해는 저물기 시작했는데 나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나만 이런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니리라. 고립을 벗어나 진정한 소통을 찾아가는 과정을 책으로 쓰자. 우선 나를 구원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손 내밀 수 있을거야.


순간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래서 갈 때와는 딴판인 마음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진노랑색 은행나무가 고운 길이었습니다. 이렇게 엎지락 뒤치락하며 인생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 서둘러 기차역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군요. 무슨 맘이 들어 세수해가며, 설거지해가며, 이걸 썼는지 모르겠네요. 모임 있는 주말이 나쁘지 않군요. 다음에 뵈요.
IP *.81.17.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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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6.11.11 20:07:58 *.152.82.31
언제고 불쑥 어죽 먹으로 찾아가 뵈야겠습니다.
홀대하시진 않으실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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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희
2006.11.12 00:00:17 *.105.62.171
일상을 풀어내시는 글솜씨가 소시민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좋은 글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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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탄
2006.11.12 15:32:03 *.81.16.23
자로님, 물론이지요. 어죽을 좋아하신다니, 반갑네요.

종희님, 아마 예닮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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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6.11.13 15:17:48 *.55.54.201
평범한 하루에서 건져 낸 비범한 의미..
저도 하루를 한 단위로 이렇게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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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탄
2006.11.13 18:33:07 *.81.21.18
꿈벗 프로그램 들어가면서, 10대 풍광을 미리 올려놓은 옹박의 에너지라면, 하루단위가 아니라 초단위로 성장할 것 같은데요. ^^

옹박의 파워풀한 글도 좋았고, 친구 광영의 온화한 부끄러움이 살짝 내비치는 글도 아주 좋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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暻山경빈
2006.11.15 10:10:11 *.217.147.199
이곳의 글을 찬찬히 보지 못할 정도로 요새 마음이 바빴는데,
오늘 뒤늦게 이글을 보니, 한선생님의 글에서 예전과 다른, 어떤 '담백함'이 느껴집니다. 史하지도 않고..
저는 이런글이 참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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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탄
2006.11.15 12:21:39 *.81.16.140
원래 '삿됨'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몸매 아니우?
근디, 그 '사'자가 아닌 것 같은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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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뎀뵤
2006.11.15 19:32:02 *.41.24.85
잠시 유급생 티를 내자면. ;;; (작년 수업시간에 한번 언급된 내용인지라 ^-^ 아는척~ ㅋㅋ)
경빈마마의 史는 '史 野 '의 '史'인듯 하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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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옹야(雍也)' 편에 다음의 유명한 구절이 있다."바탕이 문체보다 승하면 거칠고(野) 문체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史)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뒤라야 군자다"
신영복은 이 구절의 앞부분(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을 이렇게 해석한다. "내용이 형식보다 튀면 거칠어 보이고, 형식이 내용보다 튀면 사치스럽다." 예를 들어보자. 사회운동 단체들의 플랜카드는 그 주장의 정당성을 강조하다 보니 사용하는 언어가 적절한 절제를 지나쳐 과격해 보이기 십상이다. 이것은 내용이 형식을 넘어선 상태며 ’거친(野)' 것이다. 반대로 광고의 카피들은 표현의 형식이 너무 매끄러워서 내용의 견실함을 압도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것을 '사치스럽다(史)'고 하는 것이다.
- 본문 내용은 <코리아니티경영(구본형)>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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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탄
2006.11.15 20:38:54 *.81.17.159

아하~~ 나는 '思無邪' 생각만 했지요.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시 삼백 편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 고 한 부분.

이렇게 학구적인 우리 2기를 오합지졸이라고 한 사람이 누구야!
아카데믹한 2기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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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6.11.16 22:35:32 *.70.72.121
다른 두 분을 보는 듯 하네요. 열정적 일 때에는 30대 초반의 맹렬여성인 줄 알았어요. 오직 한 곳에 집중하는 집념의 여성... 이 번 글은 소장님 말씀 같아요. 시나브로 닮아가는 늦가을 저녁인가요? 한세대를 자유롭게 넘나드시면서 편안하네요. 70매에 3대, 미탄님께서는 5~6매로 한세대를 넘나드시는 데요? 좋은 글 자주 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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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탄
2006.11.17 09:26:58 *.81.18.164
써니님, 관심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만 자주 속내를 드러내서 민망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많이 쓰고, 공유함으로써, 깊어지고 편안해지고 희열에 차고, 나아가는 , 커뮤니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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