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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14일 11시 53분 등록
E.T. 할아버지 세상을 뜨다

“…저기가 어디야, 아름답구먼. 나 이제 급히 감세.”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E.T. 할아버지 채규철씨가 운명했다는 보도다. 이 보도를 접한 나는 불현듯 그 분이 생각이 났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 분은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국가유공자 자녀 교육프로그램에 강사로 초빙되었던 분이었다. 지금은 이름이 분명히 기억나지 않지만 보도 내용을 읽어본 순간 그 분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의 장에 들어선 그 분의 모습은 처연했다. 그 분의 얼굴을 본 순간 수강생 전원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얼굴 형체는 그저 둥근 원일뿐이었다. 굴곡이 없었다. 입도 코도 눈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쪽 눈만 어렴프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남은 한쪽 눈은 의안(義眼)이었다.

그 분은 의사로서 남들과 같은 부귀영화를 던지고 풀무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장 기려 박사와 함께 복지운동 중 1968년 31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이 사고로 3도 화상을 입고 30차례가 넘는 성형수술 끝에 한쪽 눈을 잃고 손가락까지 오그라든 몸으로 살아남는다. 여기서 그의 인생은 끝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분은 그렇지 않았다. 육체적 위축이 그의 정신마저 주눅 들게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병석에서 일어나자마자 청십자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간질환자들의 복지 향상을 위한 모임인 ‘장미회’를 만들어 의료 복지운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사회공헌활동 중 강의장에서 그 분을 만났던 것이다.

아마 그 분의 강의 제목은 삶의 희망에 대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지금은 너무나 먼 날의 강의였기에 자세한 내용을 알지는 못하지만 나의 가슴에 와 닿는 사항은 세 가지쯤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정신이 육체보다 고결하다는 점이다. 육체의 불구(不具)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의 높은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비범함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명강의였다.

둘째는 배움의 중요성이다. 그 분은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나 6.25 때 홀몸으로 서울에 왔으며 수많은 어려움에도 대학졸업과 유학을 거쳐 의사의 몸으로 교편을 잡은 분이다. 이 과정에서 배움의 소중함을 느꼈단다. 만일 배움이 없었다면 이 같은 대형사고에 자신을 추스리지 못했을 것이다. 배움을 남들에게 전수코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기에 그 분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셋째는 바로 깨달음이다. 남들이 바라는 영화(榮華)를 뒤로하고 복지운동에 임했음에도 그에게 닥친 불행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분은 이를 깨달음으로 극복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생각한 것이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다른 역할이 나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라는 깨달음이 오늘의 그 분을 있게 한 것이다.

언젠가 그 분의 높은 뜻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장소에서 한번 뵙기를 원했다. 일상의 굴레에 젖어 그 분을 망각하고 지냈던 평범한 시절이 아쉽다. 이제 그 분은 이름만을 남긴 채 우리들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한 순간의 짧은 강의가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은 그 분에게도 통했다. 그 분은 “우리 사는 데 ‘F’가 두 개 필요해. ‘Forget(잊어버려라), Forgive(용서하라).’ 사고 난 뒤 그 고통 잊지 않았으면 나 지금처럼 못 살았어. 잊어야 그 자리에 또 새 걸채우지. 또 이미 지나간 일 누구 잘못이 어디 있어. 내가 용서해야 나도 용서 받는 거야.”라는 아름다운 말도 우리에게 남겼다.

길지 않은 인생을 활활 태우다가 훨훨 하늘로 날아가신 그 분. 그는 아이들에게 그래서 E.T.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다. 이미 타버린 할아버지라고.

흔적을 남기는 것이 무엇인지, 삶의 진정한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주신 고인께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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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6.12.14 15:39:04 *.70.72.121
저도 기사 보고 놀랐습니다. 감히 아름다운 분이라고 해도 될 지...
도저히 그렇게까지는 자신이 서지 않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훌륭하고 또 훌륭하신 참으로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부디 어려움일랑
다 떨쳐버리시고 아름다운 왕자님으로 또 우리 곁에 와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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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수
2006.12.14 15:54:40 *.57.36.34
분명히 그러실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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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2006.12.14 16:41:10 *.244.218.8
Forget, Forgive. 저한테도 진짜 필요한 두 F네요.
가시는 말씀도 아름답네요. 좋은 글 감사드려요 도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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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수
2006.12.14 17:44:46 *.57.36.34
소정씨 나는 여기에 Forever를 넣고 싶어
영원히 그 분을 잊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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