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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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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25일 16시 17분 등록
⌈ 일은 “삶의 빛”인가, “삶의 짐”인가?

‘르네상스인’이자 ‘일벌레’ 이기도 했던 윌리엄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의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반면 두 번째의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 조안 B. 시울라 <일의 발견> 중에서

지난 시간동안 많게 혹은 적게 하여온 일을 생각해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나에게 있어 일은 어떤 것이었던가를 더듬어 보려하니 절로 미소가 번지기도하고 한편으로 피식 어이없는 쓴웃음이 나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전공을 마치고 졸업장과 Licence를 쥐고 자연스레 사회생활이란 것을 경험하기에 이르렀을 때, 일이란 나만 잘 하면 되는 단순한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초년생에게 세상은 완벽하며 공명정대한 것이었다. 더러 불미스런 뉴스거리가 있다고 해도 그런 사항들은 전혀 나와는 무관한, 오로지 나만은 이 세상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유익한 혜택을 고스란히 누리며 살 수 있는 양, 어떤 근심도 하지 않았다. 일이란 나를 좀 더 잘 나타내 줄 수 있는 오직 “희망으로서의 빛” 일 뿐이었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나의 전공과 Licence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바람직해 보이는, 세 가지를 목표로 전부 경험해 볼 계획을 세웠다. 그 하나는 일반적으로 병원에 취직하는 것이었고, 주로 예비역 형들이 노리는 당시 창설되기 시작한 프로구단 같은 곳에서 일해 보는 것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장애아동들을 교육하는 특수학교에서 교직을 하는 것이었다.

먼저 국책사업의 하나로 추진되며 88올림픽에도 참여할 수 있는 태릉훈련원의 육상국가대표선수들을 치료하는 팀트레이너로 한시적인 일을 선택했다. 당시 급박하게 결성된 조직위의 상황에 따라 계약직으로나마 정직에 못지않은 대우와 보수를 받으며, 더군다나 여성으로서는 쉽게 접하기도 어려운 기회를 얻는다는 것에 나름 우쭐해 하며 일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 후배와 함께 당시 보수의 2배가량의 비용을 투자해서 남들이 미처 하지 않는 치료를 개인적으로 더 배워 그곳으로 입사를 했다.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었다. 특히 공직에 계셨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명예를 소중히 여기시며 무조건 보람된 일이니 자원봉사로 라도 임할 가치가 있다고 이르셨지만, 그보다도 나는 다른 친구들의 반 정도 일을 하며 보수는 두 배로 받는 다는 것, 그리고 전 세계의 선수들을 직접 보고 그들의 선수관리 상태나 치료 등을 접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것에 무엇보다도 마음이 끌렸다. 일은 나의 선택을 넘어 차별화된 세계로 초대해주었다.

세계적인 선수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며 올림픽대회에 참여하는 것도 좋았고, 선수들만이 아니라 그 나라의 특성이나 문화까지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움과 흥분 그 자체였다. 의욕은 배가 되었고 자부심까지 느낄 수 있어 더욱 긍지를 느끼며 열심히 일했다. 그때 내게 일은 나만이 선택되어진 “당당한 빛”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취직이 쉬었던 나는 늘 취직은 걱정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애시 당초 진득하니 좋은 대학병원 등에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대충 생활에 거리낌 없이 지내온 탓에, 보다 손쉬우며 다소 상황이 열악한 주로 중・소 병원급에서 근무하게 되면서는 이내 그 병원의 특색에 맞추는 만능의 탈랜트가 되어야만 했지만, 그래도 성격이 성격인지라 그런 일은 오히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도전과 의욕이라 여기며 신선한 탐색을 즐겨 나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잘살고 싶었다. 그다지 어려운 환경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늘 살림살이에 빠듯해 하셨다. 박봉 때문인지 평소 절대로 공무원은 하지 말라고 한탄하듯 단단히 이르시는 통에 형제 가운데 누구도 공무원에 지망하지 않았다. 요즘에 와서야 세상이 바뀌어 또 후회를 하시지만. 어머니는 나름대로 경제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내시며 알뜰살뜰 강인하고 씩씩하게 열심히 사셨다. 나는 늘 어머니가 안쓰러웠다. 나도 “언젠가” 어머니처럼, 어머니의 딸로서, 어머니보다 나은 모습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잘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경영에 관심을 가졌고 막연하게나마 “언젠가”를 그리며 준비하는 자세로 임하였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새로 신설하는 병원을 완전히 셋팅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약은 원장이 순진한 나를 시키고는, 앉아서 모든 것을 거저 해결한 것이었지만 그때 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고, 나의 수고는 내 꿈의 실현을 위한 전초전으로, 오히려 내 마음껏 치료실을 꾸며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순간만은 내 병원의 내 치료실이었기에, 식사도 건너뛰어 가며 열정을 다해 성심성의껏 완벽하게 꾸며냈다. 병원은 잘 되었고 뿌듯했고 감격스러웠다.

그러다 점점 일거리는 많아졌고 우리부서는 일에 치어 인사불성이 될 판으로 적은 인원으로 여타 병원들의 두 배 이상의 일을 감당해 내고 있었지만, 얼마를 지나도 원장은 애초에 약속한 대로 보수를 지급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처조카인 전혀 생판의 치료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사무장인가의 자리에 앉히고는 그에게 일을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나의 자존심과 긍지였던 일은 더 이상 내게 힘을 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짐”으로 전락되어갈 뿐이었으며, 나의 위치와 한계를 분명히 하는 초라하고 “야박한 빛”에 지나지 않았다.

적당한 시기에 나는 평소에 궁금해 하던 특수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서울시에 유일한 공립특수학교였는데 지금도 잊을 수 없이 좋았던 것은, 넓은 잔디 앞마당에 늘 까치들이 모여와서 때지어 노니는 모습을 볼 때면 한가하고 여유로운 인생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이지 웬만큼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된다면, 보수보다도 자신의 감성과 취향을 적극 살릴 수 있는 일을 찾을 수만 있다면, 더 없이 바람직할 것이란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병원생활에 비해 학교는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쉬운 곳이었다. 그리고 처음엔 병원 등이 일하기에 안락하며 좋은 환경이었으나 점차 교사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면서는 괜찮은 직장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고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에 흥미가 있는 내게 안정된 환경에서 평생 공부하면서 배운 것을 시도해보고, 새롭게 접목시켜 나가는 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무렵 그 일을 오래 할 수 없는 개인적 선택을 하게 되었고, 더 좋은 확실한 미래가 나를 기다린다고 위로하며 일보다 여자로서의 삶을 선택했지만, 어쩐 일인지 인생은 마음처럼 꿈처럼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그 후로 한참의 공백기를 거친 후에 이미 중년에 들어선 나이로 새삼스레 다시 일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 일은 이제까지 내가 임했던 자세와는 판이하게 다른 전혀 생소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내게 있어 일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낭만의 일상적 취향이 아닌, 생활의 필수적 절실함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살아있음을 선택하는 한, 하나의 유일한 생명줄이 되어야만 했다.

어떻게 다시 일을 시작해야할지 막막했고, 일을 한다는 것은 개인적 허물을 드러내며 세상의 시선과 잣대와 부딪혀야만 하는, 죽을 각오의 도박이었고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이어야 했다. 필사의 전투적 태세를 갖춘 몰입이었지만 한편으로 일로서 나 자신을 도피시키는 유일한 안전지대였다고 해야 할까? 즉, 내게 있어 일은 “빛” 이기도 하며 “짐” 이기도 한 것이었다.

최근 10년 동안 내 마음에서 일은 단 한시도 떠난 적이 없다. 일을 하지 않고 잠시 쉴 때에도 일은 너무나 당연하게 해야만 하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의무사항이었다. 더군다나 나와 같은 사람이 내 처지에 일을 게을리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천부당만부당한 소리였다.

아니, 나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일을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길 만큼의 삶의 전제조건이었다. 삶이란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어야 하고, 생산적이어야 하며, 잘 관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마치 일을 위해 일하는 사람처럼 일에 매달려 살았다. 일은 그렇게 나를 깊숙이 지배하며 나의 “존재의미”가 되었다.

이 절대적 지령은 공산주의 보다 덜 하지 않다. 빨갱이보다 약하지 않다. 내게 있어 내 일은 이데올로기이며 나를 지키는 한 가닥 최후의 방어벽과도 같은 마지노선 일 수 있었다.
일은 생명연장의 수단이고 죽는 날까지 끌고 가야만할 유일한 동행의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나는 나도 모르는 이방인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껏 하고 있는, 그동안 해왔던 일이 더는 내게 안정을 보장해 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감지하면서도 나는 속수무책이 되어갔다. 여전히 막연함 속에 방치해 버린 채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난 초가을 나는 미친 듯 준비 없는 순 생얼을 하고는 꿈 찾기 프로그램에 달려들었다.
꿈을 잃어버린,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고 살아가는, 떠도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 프로그램 과정이후 나는 변화경영연구소 주변을 떠도는 요괴가 되었고 사람이 되고 싶다고 부르짖게 되었다.

그러나 난 몰입되지 않았다. 빠져들지 않았다. 좀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철통같이 지켜온 나를 해체한다는 것, 그것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 버릴 것도 없는 나를 아직도 더 버려야 한다는 것, 내가 쓸 만한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어려웠다. 차라리 이대로 덮고 아무 일이나 하며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 훨씬 쉬운.......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왜 나는 이곳에 있게 되었는가? 어떻게 살고 싶다는 것인가? 나는, 내 희망은, 나의 정체성은, 내 생활은, 내 운명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요즘에 나는 내 인생을 걸고 해야만 하며,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헤매고 있다. 연구원지원 막판까지 학교도 배회했고 그밖에 다른 일거리에도 서성거렸다. 당장에 빵보다 불안감이 더 컸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마치 연구원을 지원하는 자체가 또 다른 도피가 되는 것은 아닌지도 충분히 의심해 볼만했다. 마지막으로 연구원에 지원하면서 나는 두 군데의 일자리를 캔슬해버렸다.

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더는 적당하게 타협하며 나 자신을 방치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내면의 울림을 받아드리려 마음먹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해서 내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보게 되었다.

여태의 삶을 되돌아, 성에 차지도 않으면서, 체념한 채, 어떤 구실을 붙여 위안을 삼아보려는 얄팍함과, 빈충처럼 기댈 곳을 찾는 힘없는 나와 타협하며, 더 이상 혹은 벌써부터 살아가고 싶지 않다. 아직 건강한 육체와 쓸 만한 양심과 일말의 의지가 남아있다면 나는 나를 다해 제대로 힘껏 살아보고 싶다.

결국에 설령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다해 제대로 한껏 살아보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리며, 마지막으로 한 달간 더 나를 시험해 보기로 작정하기에 이르렀다.
생각보다 연구원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더군다나 나에게는 그러하다. 나는 이 과정에 임하는 동안 완전하게 일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무슨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냐고 물으시지만 정작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 한 줄도 쓰지 못해 꼬박 날을 새우며 울기만 한 적도 있고, 밤새도록 쓴 것을 지워버린 적도 있다. 나는 연구원이라는 과정을 통해 책을 낼만한 사람이 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 보다 먼저 나는 나를 알고 싶고, 내 삶의 방향을 찾고 싶으며, 어떻게 살아야할지 분명하고 명료하게 정하고 싶다.

이 과정은 좋았다. 3권의 선정도서에서부터, 변화경영연구소의 방향, 소장님의 사상에 대해 더듬어 보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가늠해 보게도 되었으며, 현재 나는 무언가를 생각하며 찾고 나아가려 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돈이 되는 것도 빵이 되는 것도 아닌 이 과정에 나는 기꺼이 응했다는 것 외에 달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없다. 후회하면 어떠리. 언젠가 죽을 목숨이고 실컷 살아낸 후에야 웃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후련히 살고 홀연히 사라지고 싶다.

나는 나에게 다시 물어본다.

1. 나는 이 과정을 “내 인생의 또 하나의 일”로서 성실히 수행할 수 있는가?
내가 만난 평생의 시간들 중에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임을 확신하고 의심치 않는다.
해야 할 공부,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을 것 같다. 쩔쩔매겠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
사람과 삶이 어우러지는 COREANITY를 핵심 주제로 탐구하게 될 것이다.

2. 나는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는가?
넋두리라면 자신 있었다. 365권쯤도 가능하리라. 아니, 적어도 3.65권은 가능하리라. 하지만 쓰레기 같은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할 수가 없다.
어제보다 나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내가 되는 혁신이 필요하다.

첫 번째 과제 <미완의 시대>를 읽으면서 내 삶도 못지않게 두꺼울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고, 한 번 써볼만 하겠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나는 내 안에 갇혀 겨우 나를 소모한 삶 외에 공익을 위해 살아온 아무러한 흔적이 없다는 무섭고 두려운 사실을 인식해야 했으며, 지금 이 순간조차 역사가 되고 있다는 전율과 책임의식을 갖게 되었다. 나는 역사 속에 묻어가는 개인이 아니라 역사를 만들어 가는 현재라는 이름의 깨어있는 사람이어야 함을 인식했다.

두 번째 과제 <코리아니티>를 읽으면서는 한 번 더 읽고 과제를 수행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느린 독서 속도와 서툰 능력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COREANITY는 결국 나를 찾고, 알아가며, 나아갈 방향이 되는 것임을 절감했다.
나는 써니의 코리아니티를 생각해 보며 연구소의 방향과 연구원들의 생각과 나의 관점을 정립해 볼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가져 보았다.

세 번째 과제 <일의 발견>은 나에게 너무나도 요긴한 꺼리가 될 것이었다. 그보다 먼저, 과정이 진행 될수록 점점 더 무게를 더하여 전체적 맥락 속에 구체적인 행동이 되어야 함을 이해하게 되었다. <일의 발견>은 일의 가치와 관점과 방향과 철학과 생활이요, 삶이었다.
“COREANITY 새로운 일의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하였다.

3. 나는 “언젠가”를 실행하여 써니의 집을 완성할 수 있는가?
언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왜?........

내 삶에 있어 일은 “빛”인가 혹은 “짐”인가? 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실험해 가면서, 내가 바라고 나에게 가장 적합한 일을 찾고 구현해 가기를 소망한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something more)’ 을 원한다. (본문 가운데서)

<한 달 간에 걸쳐 “되고 싶은 일”의 참가를 마치면서>

하나, 맨 처음에는 긴장감과 스릴을 맛보면서 무엇보다 부족한 나 자신을 세상의 평가에 내 보인다는 것에 당혹감과 두려움을 금치 못하였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두울, 중간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결코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관람할 때는 쉬웠던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모습과 과정들이 실제 참가자로 임하게 되자 책임감과 함께 새로이 터득 되는 인식과 자각에 몸서리가 처졌다.
연구원을 지망한 벗 가운데 일부 선배들이 왜 레이스를 완주하지 못하고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연구원생활을 도중하차 할 수밖에 없었던가를 느끼고 이해하게 되었다.

세엣,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자신을 알고 자기다운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생각과 노력이 필요한 일인지 진지하게 반성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새싹이 돋는 좋은 계절에 좋은 벗들과 함께, 좋은 스승과의 즐거운 데이트가 된 이 “일”이 오래 좋은 추억이 되고, 좋은 결실로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하며, 함께 이 과정에 동참해 주신 오천만(?) 꿈 벗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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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3.25 22:06:47 *.145.83.239
써니야!
너와 만난 때도 몇 개월 되질 않했고, 직접 만난 횟수는 세번,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생각해도 괜 찮은 사이인데, 왜 이렇게 맘이 쓰이는 나도 모르겠다. 그게 정일까? 별로 정들 시간도 없었는데 말이다. 만나서 진지한 애기도 별로 나눈적도 없고 우리가 서로 좋아할 나이도 아닌데 말이다. 그건 구선생님 싸이트에서 서로 의 글을 보면서 정이 들었고 난 인생 상담역으로써 누구보다 자네의 불안과 고뇌를 알기 때문일거다.

써니는 누구보다도 고독했고, 자신의 생활에 대해 불안 했을 것이다. 앞날에 대한 불확실, 여인 혼자서 세상을 헤쳐나가야 된다는 불안감, 직업에 대한 불안정속에서 고민하는 너의 모습을 너의 글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났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이에 걸 맞지 않는 교사가 되어보려고 몇번 응시했으나 이상하리 많큼 취업에서 후퇴하는 고통이 있었고, 몇번이나 내가 연구원이 되어라고 하는 충고 때문인지는 몰라도 연구원에 응시 했으나 떠 큰 회오리를 이르킨 네 자신의 심경은 깊히 이해한다.

써니야!
너나 내나 다 미제자의 일생이다. 너의 모습을 보면서 젊었을 때 내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았다. 황량한 벌판에 그냥 팽개쳐놓은 들짐승 같은 우리의 모습 말이다. 오직 자신이 자기의 길을 가야 하는 외로운이가 미제자의 일생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미제자는 77,5% 기제자는 22,5%이니 그렇게 너혼자 외롭진 않다. 다 들 않그런 척 행복한 척 살아도 깊이 들어다보면 별수없는 것이 우리 네 모두의 인생이다.

써니야!
넌 반성해야 한다. 너에게 그렇게 잘 해준 구선생님에게 먼저 시빌걸었잖느냐? 그것도 지면을 통해서, 그 깊은 뜻은 내가 생각하기에 써니가 선생님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맘의 표시이며, 그리고 아마 저항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라, 자다가 홍두깨맞은 격이 되질 아니했느냐. 그 점은 진심으로 사괄 하여라. 그리고 넌 나와의 약속도 깨뜨릴려 하는 것 같구나. "마지막 레이스"말이다.

써니야!
연구원이 너의 인생에서는 작은 것이다. 꿈벗으로 남아 친구도 사귀고 여행도하고 좋아하는 선생님께 응석도 부리고 하면서 살아야지. 그리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면서 살아야지 그게 우리네 일생 아닌가.

너의 맘은 다 이해한다. 그러나 타인도, 많은 청충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너가 이해하고 겸양하며 살아야지, 그리고 진심으로 존경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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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3.26 01:25:03 *.70.72.121
우선 초아선생님 고정 하십시오. 제가 많이 미흡한 관계로 선생님을 걱정하시게 하고 더군다나 사부님께 심려와 누를 끼쳐드렸나봅니다.

지금이라도 지우는 것이 옳겠습니까? 그냥 넘어가게 놔두려했습니다.
자꾸 가시화 시키는 것 같아서요. 물론 잘못을 인정치 않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의 시각과 초아선생님께서 이르시는 말씀이 차이가 아주 많아서 납득을 못하고 있던 겝니다.

과제한답시고 신경도 쓰지도 못했구요. 일단 초아선생님깨서 그러하시다면 그리 따르려합니다만 제 본의와는 많이 다름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많이 경솔하게 처신한 것 같습니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한 견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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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디테
2007.03.26 02:06:18 *.57.38.231
독자로서 읽은 느낌도 초아선생님께서 말씀하신것처럼 구선생님을 좋아하는 써니님의 마음의 표현으로 모성이 강한 어머니. 여성으로 표현 했으며 진실로 구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엿볼수 있었습니다. 초아선생님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시각으로 보는 독자는 없을겁니다. 써니님 속상해하지 마세요. 진심을 알고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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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3.26 10:24:10 *.180.46.15
써니님은 사눅, 자기다운 일을 분명 찾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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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26 22:46:41 *.140.145.63
마지막 책이 많은걸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싶게 만들었나 보군요.
이 글에서 써니님에 대한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부러워 할 경험을 가지고 있는거 같은데
본인은 아쉽고 부족한 기억들만 도드라지게 느껴지나 봅니다.

스스로에게 좀 더 관대해지세요. 저 이 말만 내내 해주고 싶군요.
연구원 응시부터 2차 레이스까지 가장 고생이 많았을듯 합니다.
이제 고군분투했던 자신에게 많은 격려를 해주세요. 이제부터는
생각은 대폭 줄이고 즐겁게 행동하고 실험하는 일을 자신이 중심에
놓으세요. 그럼 어떤 길이든지 행복하게 갈 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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