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다뎀뵤
  • 조회 수 2448
  • 댓글 수 5
  • 추천 수 0
2007년 6월 27일 08시 02분 등록
어제 저녁 지하철에서 겪은 황당 사건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친구와 쇼핑을 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12시가 되어가는 시각. 혼잡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가까스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쇼핑으로 피곤한 다리를 두드리고 있는데.
내 앞으로 만취 상태의 아가씨가 섰다.
전철의 흔들림과 상관 없이. 좌우로 몸을 흔들어 댔다.
곧 내 앞에서 털썩 주저앉을 기세였다.
왜 하필 내 앞에 섰냐며 약간의 궁시렁거림이 일었지만.
내 위로 쓰러졌을 때의 난감함과 막연한 안쓰러움, 그리고 내가 젊었을 때의 비슷한 경험이 겹쳐져 피식 웃으며 자리를 양보했다.
내가 앉았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두 자리 빗겨난 자리에 자리잡고 섰다.

그때 갑자기 옆쪽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 어깨를 두번 치고선. 왜 자리를 양보해요?
당황해서. 힘들어보여서요. (특유의 친절한 웃음을 보였다.)
아가씨를 째려보듯이 내려보며. 자리 양보해 주면 안 돼요. 그럼 버릇나요.
적절한 답변을 찾아 내지 못해. 아 예에. (또 다시 웃음을 보였다.)
거기서부터 내가 내릴 때까지 왜 자리를 양보하냐며. 도대체 왜 저러고 다니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한번 자리 양보하면 버릇 난다며. 그 아가씨를 향한 끊임없는 훈계가 나를 통해 전달됐다.

아직 젊고 싱싱해서 무엇이든 해 볼만한 20대의 아가씨와
어린 나이에 술에 잔뜩 취해 다니는 상황이 절대 이해될 수 없는 40대의 아주머니의 입장 차이에 내가 서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나에게로 모아져 있었고.
지은 죄 없이 아주머니의 훈계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내야 했다.
다소 황당하고 짜증나는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내 마음은 아주머니 쪽으로 옮겨갔다.
젊은 아가씨를 이해하기에 이미 너무 나이가 들어 버린 아주머니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리다면 언젠가는 이해할 때가 온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아주 아주 슬픈 일이다.

젊은 아가씨도 나도 조금 더 나이가 들면 그 아주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는 앞으로도 절대로 젊은 아가씨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 졌다.
이미 객기도 낭만도 아닌 그런 일들을 벌이기에 아주머니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
한번도 그것을 경험해 보지도. 이해해 보지 못한채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일들. 빼놓지 말고 누려봐야겠다.
30대가 되어서는 주책이라는 흉이 따를 일들. 결혼해서는 해 볼수 없는 일들. 가족과 함께한 시간 동안에는 눈치가 보일 일들. 애인이 생기면 누릴 수 없는 것들.
혼자 여행하기, 친구와 밤 늦게까지 마음 나누는 수다, 소개팅, 미니스커트 입기, 아는 오빠와 영화보기, 새벽 2시 귀가, 비싼 화장품 나에게 선물하기...

머지않아.
모든것들을 하기에 나이가 너무 들어버렸다는 생각이 앞서는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러고 나면.
이런 일들은 내가 평생동안 경험해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들로 남아있을 테니까.


여러가지 생각으로 분주하고 짠한 아침이다.

IP *.133.220.189

프로필 이미지
한희주
2007.06.27 08:11:20 *.233.199.93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그렇지요?
젊다는 건, 열려있고 유연하고 새로운 것에 쉽게 도전할 수 있고.....
미영님, 그래요.
지금이 아니면 안 될 일들, 두루 경험해보세요.
프로필 이미지
오리쌤
2007.06.27 08:48:31 *.207.221.12
아는 오빠 목록에 좀 껴주시면 ...^^;; 안... 될까여?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7.06.27 09:49:25 *.75.15.205
그대... 찡긋하는 웃음 생각난다.
정말 그러한 것들에 나이가 있을까?
미영이가 생각하는 너무 늦어버린 나이에 내가 걸려 있다는 것에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힐 뻔~했지만, 뻔순이의 길에 나이란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그렇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고 그렇게만 알고 산다면 도무지 세상을 살 수 없을 지도 모르지.
아주머니의 엄격성과 20대의 낭만(?) 사이의 이중적 시선과 균형감, 오늘은 이 생각을 하며 아침을 열게 되네요.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데 있는 것이다.(다산문선 p173)
프로필 이미지
귀귀
2007.06.27 13:05:39 *.244.221.3
함박눈이 올때, 우산을 펼치고, 도로 막힐 것을 걱정하면, 어린시절이 끝이 난 것이라 누가 말하더군요.
또, 부모님이 하루에 7시뉴스, 9시 뉴스, 11시뉴스를 보시는 것을 보면 (같은 뉴스를 몇번을 보시는것이) 이해가 안되더라구요. 이제는 저도 동일한 기사의 뉴스를 봐도 재미를 느낍니다.
어린시절, 만화의 주제가를 하나도 빠짐없이 외우며 보다가 지금은 tv만화를 보면 하품이 날 정도로 재미가 없더라구요.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는것 같아요, 그 시기에 즐기지 못하면, 지나고서는 그 상황이 이해가 안되는 것이 아닐지.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겪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쯧쯧" 하시며, 이해를 못하시겠죠.

저도 다뎀뵤님 말씀처럼, 지금의 30대를 제대로 즐겨봐야겠네요. 놀때는 정말 후회없이 놀고, 노력 할때는 정말 제대로다가...^^

ㅋㅋ 좋은 글 감사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명석
2007.06.28 10:19:57 *.209.121.29
나이들면서, 아기들이 왜 이렇게 이쁜지, 음식점 같은 데서 부딪치는 아기들과 눈 마주치느라 정신이 없네요. 나는.
고 앙증맞고 조밀조밀한 얼굴과 빤한 꾀, 작은 몸매가 그대로 작은 천사에 다름아니네요.

말년의 동리선생이 하루는 버스를 탔는데, 묘령의 아가씨가 탔더래요. 그 아가씨의 아름다움에 취한 선생은 숨이 막힐듯하여, 목적지까지 못 가고 버스를 내리고야 말았다는 잡문을 본 적이 있어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에 더욱 절박하고 예민해지는 감각이, 아름다움을 향해 활짝 열리는 기분이에요.

결론인즉, 모든 나이에는 그에 걸맞는 논리와 통과의례가 있다는 데 동의해요. 제대로 그 나이를 통과해야 그 다음 단계에서 결핍감없이, 제대로 성숙하는 것같아요. 그러니 미영씨의 느낌이 맞아요.

특정부류 중에는 그 단계를 넘기지 못하고, 평생 가져가는 사람들도 있기는 한듯, 보통 말하는 아티스트라는 부류, 문제는 자기만의 성취도 도구도 없이, 감각만 발달한 나 같은 사람일듯 ^^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