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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2007년 8월 4일 21시 05분 등록
비가 좋아, 산에 갔다.
비를 제대로 즐겨 보기 위해서다.

입구에서 막아선다. 주의를 주기 위함이다. 뇌우주의보가 2급이라 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등반을 할수 있는지 없는지 물으니 가능은 하단다. 다행이다.

일부러 산에 오르려고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젖으면 안되는 것들은 모두 집에 두고 나왔고, 우산따위는 애초부터 생각도 안했다. 이 좋은 비를 어떻게 그냥 보낸단 말인가.

빗소리가 점점 좋아진다. 집에서는 늘 들리던 소음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때문이다.

중간 경비 초소의 경비병이 또 다시 낙뢰에 대한 주의를 준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는 철제로 된 계단이 2군데 있다.

몸 주위로 흐르는 전기를 느낀다면 얼른 도망치겠다고 생각한다. 전하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피부로 느껴진단다. 전하의 흐름도 느껴지고, 털이 서는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비 속에서 아래쪽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고, 멀리 서울N타워도 보고 서울역쪽으로도 눈을 돌린다. 전망이 꽤 괜찮은 편이다.

점점 더 고도가 높아질수록 소음은 잦아들고 빗소리가 더욱 좋아진다.

정상을 바로 앞둔 초소에서 경비병들이 또 주의를 준다.
정상은 위험하겠다. 피할만한 데가 없으니까. 더이상 오르지 않고 전망을 즐긴다.

아카시 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다.
등산로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다. 다르다.
멀리 시내에서 나는 소음들은 바다의 울음소리처럼 웅웅거린다. 가까운 데서 들리는 파도소리가 빠진, 바람과 파도소리가 뒤썩여서 결국은 웅소리로 합쳐진 그 소리다. 저음의 감싸는 소리다.

되돌아 내려와 철제계단 아래 옆으로 군부대가 있는 곳이 전망이 제일 좋다.
빗소리도 좋다. 어느 시인이 대숲에 싸락눈 내리는 소리에 눈물을 흐렸다는 게 이해가 된다.
'차르르차르르르르르 르르르 '
솔숲과 아카시 나무 위로 내리는 비오는 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울린다. 그 어떤 드럼도 이 잘게 부서지는 소리를 흉내내지 못할 것 같다.
마사토가 깔린 땅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경쾌하다. 몇발짝 옮기니 나무잎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커진다. 상수리 나무잎 손바닥만큼 넓다. 톡 톡 톡. 울림이 약간 있다.

우산을 들고 군부대 사람인 듯한 사람이 지나간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 엄청 크다. 우산 천 넓이만큼 둔탁한 소리다.
그가 멀어져 감을 소리로 안다.

뒤로 물러서 아카시 나무와 소나무가 있는 쪽으로 다가간다. 다른 빗소리다.
좀더 잘잘한 소리다. 튀는 소리가 없다.
'차르르르르 차르르르르'

신디사이저의 이퀄라이져를 조절해가며 듣는 것 같다. 저음부 올리고, 고음부 줄이고, 다시 저음부 크우고 고음 삭제하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약간 씩 다른 음색의 소리가 들린다.

앉으면 땅으로 떨어지는 빗 소리, 나무에 다가서면 거기에 떨어지는 소리가 커지고, 풀에 다가서면 또 다른 소리가 커진다.

불규칙적인 그 평온한 소리가 좋다.
그속에 규칙적인 소리를 넣어볼까 생각도 든다.
이 소리에 가장 어울리는 소리는 어떤 걸까.
폭포 아래서 시조를 읊는 것이 생각난다.

'청산-아아 아 아 -안 리히리이- - -이 벽깨에 에 에 에에 수우우 ㅜ ㅜ 야어 어 어 -'

맑은 소리와 노이즈가 섞인 듯한, 폭포물이 떨어져 튕기고 튕긴 물이 다시 떨어져 내는, 통통통 물 튀기는 듯한 소리. 이 소리가 가장 어울릴 듯 하다.

군부대로 연결된 전선, 전신주에서 흰불빛이 번뜩하더니, 하늘이 그르렁 거린다. 청와대쪽을 보고 섰을 때 왼쪽으로 45도 정도와 오른쪽으로 45도 정도에서 하늘이 그르렁 거린다.

계속 즐기고 싶은데, 경비병의 사정도 봐줘야 할 것 같다.

괜히 자기 근무하는 날 사고라도 나서 골치아파지는 걸 우려하는 경비병을 생각해서라도 일찍 하산해 주는 게 예의를 차리는 게 나중에 산을 찾을 때도 좋을 듯 하다. 좋은 산, 좋은 소리 오래 두고 즐기기 위해서.

산을 내려 올수록 오롯한 비소리는 텅이나 쾅 같은 단발음 소음들에 밀려 약해진다.

산을 내려 오는 동안에 다른 소리가 추가된다.

멀리 공사장의 프랙카 소리가 텅 텅 텅 텅
쇠망치 소리가 덕 덕 덕 덕
변형되어 산위로 올라온다.

풀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비 구름이 하나 큰 거 지나가는 소리

산을 내려 올수록 비소리는 텅이나 쾅 같은 단발음 소음들에 밀려 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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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자주 내려서, 시원한 빗소리를 잘 즐기고 있습니다.
산에서 들었던 빗소리를 다 글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IP *.72.1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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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7.08.05 01:43:40 *.165.174.111
그렇군,,, 빗 소리 속에도 모든게 다들어 있군...
나는 그저
씻어내리는 개운함과 차별없는 일관됨을
즐겼을 뿐인데...
그렇군 ... 가만히 생각해보니...
찔금 찔금 내리는 비나, 비실거리며 내리는 비나
주책없이 퍼부어대는 비를 왜 맘에 안들어 했는지...

나는 한 방에 허천나게 ?P아붓고
말짱해지는 비를 좋아하지...

그런 날에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며 ...
광란의 목소리를 질러도 ...
아무도 모르거덩...

그리고 그건 말여...

광적인 열정, 두려움 없는 돌격. (= 미친 상태) ^^
그래야만 즐길수 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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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8.05 07:14:57 *.72.153.12
백산님, 말투에 '전라도여' 하는 게 느껴져요. ㅋㅋ '허천나게'라는 표현은 그쪽 사람 아니고는 힘들지요.ㅋㅋㅋ

온세상 다 녹여낼 듯이 오는 비를 좋아합니다. 세찬 비, 광풍, 벼락, 천둥가 총출동하는 날이면 저도 미칩니다. 천둥번개치는 날이면 너무 좋아서, 그럴 때는 같이 날뛰어 주는 게 예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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