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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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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15일 08시 41분 등록
짓궂은 비가 종일 흩뿌리는 하루를 견디고 있는데 친구 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뮤지칼 공연을 보러 가자는 제의였습니다.
친구의 호의는 고마웠지만, 외출하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아 그냥 집에 있겠노라고 사양했습니다. 한데도 친구는 그냥 물러서지 않고 부득부득 나오라는 겁니다. 권하는 장사 밑 안 지더라고... 친구의 애정어린 권유가 기특해 옷을 챙겨 입고 약속 장소인 예술의 전당 앞 팥죽집으로 나갔습니다.

친구는 요 며칠, 전원에 사는 남편의 친구네로 휴가를 다녀왔다며 제게 작은 봉지 하나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쨍쨍한 햇볕을 마음것 쬐며 영글은 풋고추 한 오큼과 친정 어머님이 짜보내신 참기름 한 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친구는 그렇게 절 위로하는 것이었어요.
출출하지도 않은데 죽그릇을 다 비웠습니다.
친구의 따뜻한 우의가 한 없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공연( 댄싱 섀도우)을 보고 돌아 오는 길에 친구는 제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고추는 자기가 다 씻어 온 거니까 그냥 먹으면 된다고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밥 한 공기를 찬 물에 말았습니다.
생 된장 한 숫갈과 풋고추 세 개로 후다닥 식사를 마쳤습니다.
그 어느 진수성찬보다 기분 좋고 맛있는 한 끼였습니다.

하여 저는 다시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미워하던 대상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태업중인 밥순이를 접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했습니다.
IP *.233.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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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8.09 14:10:30 *.75.15.205
와~ 언니야가 글 올리셨네. 경사났네~ 눈팅 졸업. 우후~우~ 추카!!!

그제 신문을 보다가 90세 되신 남도 춤꾼 문장원옹께서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춤을 무대에 올리신다는 기사를 보고 불이나케 예술의 전당 옆에 있는 국립국악원으로 냅다 달려갔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티켓은 모두 예매가 완료되었고 남은 티켓을 공연 한 시간 전부터 예매한다고 하길레 서둘러 향했더랬습니다. 다행이 표를 구할 수 있었고 그날 공연은 완전 만원사례에 감동 그 자체였답니다.

마지막부분에 이르러 사회자의 말, "여러분! 모두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무대를 찍으십시오. 여기 90세의 남도 춤꾼의 춤판, 오늘을 영원히 기억하며 단지 걷기만 해도 춤이 된다는 사실을 여기 모인 여러분께서 증거해 주십시오." 지팡이를 짚고 나오신 춤꾼의 깡마른 살가죽과 앙상한 뼈마디를 도포가 가려주긴 했지만, 참으로 인간승리가 따로 없는 진한 감동의 무대였습니다. 아마도 90에 이르도록 춤의 현장을 이끌어 온 산 증인에 대한 후배 춤꾼들의 조마조마하고 애틋한 사랑과 찬사의 무대를 취지로 마련한 공연이었겠지요. 참 아름다운 공연이었습니다.

공연을 보다가 무대에서 죽기를 작정이라도 한 듯한 노옹의 한 판 춤사위를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더랬습니다. 글쓰기를 하는 내 사부는 어떤 최후를 그리실까도 생각해 보고, 또 나는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최후의 일각까지 혼신을 받쳐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여러 생각들이 오락가락 한데 뒤얽히는 가운데 감동으로 벅참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언니 생각도 했습니다. 표를 꼭 구할 수 있었더라면 게서 멀지 않은 언니야를 불러내서 공연도 보고, 언젠가 디자이너 앙드레김과 마주쳤던 그 앞의 순두부집에서 식사를 나누면 좋았을 것을 하며 돌아왔답니다. 저가 나이를 먹는지 우리 가락 우리 춤사위가 그토록 신명나고 편하며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날 그 공연을 보며 언제 한번 연락드려서 부담없고 신명나는 우리가락과 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답니다. "이제는 우리가락이 편하고 좋아" 하던 언니야 말씀 기억하고 있답니다. 기다리세요,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태업 잘 그치셨습니다. 으하하. 뾰루퉁 귀여우신(?) 모습, 분홍빛 챙모자 속의 여린 눈흘김이 매력 만점이야요. 오리지날 남도 밥순양! 사랑해요. 희주양~~~~ (용서해 주실거죠?)

그리고 지금처럼 글 올려주세요. 이 싸이트의 최대의 장점 어울림의 장 펼쳐 주세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 세상에 둘도 없는 밥순이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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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8.09 14:56:59 *.209.98.251
희주님의 글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
정말 좋은 선물을 받으셨네요.
요즘 음식은 모조리 '음식비슷한 그 무엇'이지,
어려서 외가에서 먹던 자연의 밥상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같은데,
상상만 해도 입에 침이 도는 밥입니다. ^^

앞으로도 '미워하던 대상' 이야기나,
많은 단상들 엿볼 수 있도록 글 많이 올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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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2007.08.09 16:08:24 *.248.64.234
한걸음 다음은 두걸음이지요?
보여주셔요 희주님의 내면의 세상을....
얼마나 기다렸던지 감격했습니다.
지금 막 소낙비가 내래는 이유가 이글 때문인가요.
정성가득한 참기름과 풋고추에 가슴찡했습니다.
참 훌륭한 친구를 두셔서 행복하겠습니다.
밥순이보다는 내무부 장관으로 바꾸시면 더 잘 어울여요.
가까운 시일안에 희주님의 글이 올라오기르 기다려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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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주
2007.08.10 10:26:34 *.233.198.5
명석님, 기원님, 써니님. 격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워낙 단조로운 일상이다보니 얘기도 단순할 수 밖에요.
구름 사이로 언듯언듯 보이는 햇살이 반갑습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나날 이어지시길 빌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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