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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6일 20시 11분 등록
얼마 전 한 중요 요직의 공직자와, 그와 부적절한 관계의 여인의 누드가 세인들의 가십이 된 적이 있다.
이때 여성계와 여성운동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힘차게? 터져나왔다고 한다. 그 여인의 사생활과 누드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식의 대리 항변에 가까운 성명이었다. 여성의 누드사진을 전면에 내걸어 보도함으로 해서 그녀의 죄목과 상관없이, 개인으로서의 인권을 무시하고 그로써 전체 여성과 여성의 몸을 비하시켰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기사를 예로 들어서는 한 여성을 남성의 시각에 따라 편파적으로 오도한 것이 아니냐는 반발과, 이 사회 우리 문화의 가부장적 단면이 사회 전반에 산재해 있다는식의 푸념과 함께, 남성 사회 중심의 언론의 일방적 횡포가 아니겠느냐고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 마치 전 여성들의 마음을 대표하는 투사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연일 한 여성 발레리나가 웃통을 벗어졌혔다하여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다. 마침 오늘 일자 조간 신문은 그녀가 몸 담고 있는 국립발래단에 의해 '감봉 1개월'의 행정 처분을 받게 되었다고 보도는 전하고 있다. 기사를 보며 어쩐지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아직 여성계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문득 여성의 몸, 몸 값과 여성, 여성 예술인, 모든이의 몸, 모든 이들의 예술, 예술의 순수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전자의 여성은 왜 옷을 벗었는가?

후자의 여성을 같은 값으로 매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기의 부적절함 인가? 가치관의 문제일까?

둘 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더불어 어떤 경우의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가?



그제는 우연히 이스라엘 바체바 무용단의 <쓰리(THREE)>라는 춤 공연을 보았다.

안무가 오하드 나하린은 우리의 몸과 신체의 언어를 춤이라는 동작으로 표현해 내고자 하며 몸의 움직임 그 자체에 집중하는 공연을 하고자 한다. 그는 22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무용을 시작했으며 바체바 무용단에서 무용수로서 트레이닝을 시작한지 1년 만에 미국 현대 무용의 대모 마사 그레이엄에게 발탁되어 뉴욕으로 향했다.
안무가 나하린은 한때 허리 부상으로 인해 신경과 척추에 영구적인 손상- 다리에 마비가 오는 -을 입고 수술까지 받았으나, 그 후 맹렬한 매일의 꾸준한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육체의 기능, 즉 몸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되찾았다.

그런데 그날 공연에서 공연 종반 쯤에 이르러 남녀 무용수 네명이 한 명씩 차례로 아랫도리를 벗어 내렸다.
여자의 것, 남자의 것이 그대로 노출 되었다.
음부, 치모까지 확실하고 또렷하게 먼 내 좌석3층까지 보였다. 아무도 고개를 돌리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몸의 진실함 그 적나라함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대로 노출 되었다.
순간 몸의 열림, 몸의 화합, 몸과 마음의 소통이 느껴졌다.
공평함과 자유, 그리고 질서를 동반하여 있는 그대로의 몸을 위한 춤, 단정한 예술...
깔끔함이 정갈하다.

그의 공연을 보자마자 개인적으로 춤테라피를 떠올릴 수 있었고 치유로서의 춤과 몸의 자연스러움 혹은 필요한 움직임의 역동성에 대해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공연이 진행되는 60분간 타 공연에 비해 특히 엄숙히 진행되었던 오하드 나하린의 춤 공연은 그야말로 관중 모두의 숨소리조차 흡인하였다. 아울러 우리의 신체의 리듬에 귀 기울이고 치유로서의 춤과 몸에 대해 탐구를 집중하는 그의 모색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춤과 몸의 공연이 되었다.


우리의 몸 어떻게 사랑하여야 할까?

우리의 몸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나체, 누드사진, 예술이 다른 것은 무엇인가?

그 간결한 차이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까?

우리의 혼과 이념, 가치와 사상을 몸은 각자의 움직임과 처세로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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