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一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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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중학교 이후 내게 크리스마스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조금 설레고,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면 다른 날보다 좀 더 즐거울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언제나 크리스마스보다 이브가 더 좋았다. 마음에 여유가 있고 다음 날 쉬니까.
올해 가을과 겨울은 내게 지독했다. 답답하고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다. 얼마 전, 향인 누나와 이런 약속을 했었다. “2007년 12월 24일 오후 5시까지 애인이 안 생기면 우리끼리 파티하자. 싱글 몇 명 더 불러도 좋고.” 재미삼아 한 말이었다.
그리고 24일 저녁 우리는 모였다. 옹박, 모모, 호정, 일귀 그리고 향인. 옹박과 모모 누나가 먼저 도착했고, 나와 호정이는 8시가 넘어 도착했다. 우리가 도착할 동안 향인 누나는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했을 것이다. 누나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누나는 부담을 느꼈으리라. 이 쓸쓸한 싱글들을 심심치 않게, 허전하지 않게 채워주겠다는 그 부담, 허나 즐거운 부담이었으리라.
향인 누나는 곧잘 자신의 요리 솜씨에 대해 가벼운 자랑을 하곤 했지만, 누나의 요리는 기대 이상이었다. 보쌈은 내가 먹어본 최고의 보쌈 베스트 쓰리에 들어갈 만했고, 김치찌개는 우리 엄마 맛이었다. 이어 나온 닭 요리도 일품이었다. 백미는 밥이었다. 이런 걸 잡곡밥이라고 하나, 어쨌든 근래 내가 먹어본 밥 중 최고였다.
우리는 음식과 함께 복분자와 와인을 즐겼다. 향인만이 구할 수 있다는 전설의 그 복분자와 사부님께서 협찬해주신 칠레 와인, 그리고 아무나 먹을 수 없다는 아주 비싼 와인을 향인 누나는 ‘크리스마스니까’라는 한 마디와 함께 내놓았다. 술을 많이 마셨지만 답답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저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먹고도 우리는 계속 먹었다. 보쌈과 밥에서는 옹박이 절대지존이더니, 아이스크림과 과일에서는 모모 누나와 호정이가 말이 없다. 난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 배불렀다. 큰 식탁에 다 터진 지뢰밭처럼 가득찬 그릇들을 보며 이상하게 미소 지었다. 호정이가 사온 케익에 초 다섯 개를 붙였다. 가는 2007년과 오는 2008년에 인사하며 각자 하나씩만 끄기로 했다. 서로 붙어 있는 초에서 하나만 끄는 것은 재밌는 일이었다. 의외로 옹박, 모모 누나, 향인 누나 모두 능숙하게 불을 껐다. 그런데 아뿔싸, 호정이가 남은 2개의 초를 모두 꺼버렸다. 그녀는 대범하게도 ‘후우~’하고 불어 버렸다. 끌 초가 없어진 것은 생각도 못한 채 나는 크게 웃었다.
폴 포츠의 음악을 배경 삼아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침대에 눕고 싶은 사람은 눕고,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은 보고, 인터넷을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둘이서 대화를 나누다가 셋이 되고 넷이 되고, 연구원 생활 이야기하다가 정치 이야기하고.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자유롭게 즐길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향인 누나는 우리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 했다. 그 마음 안다. 나도 그랬는데, 오랜 만에 느껴본다. 누나는 호정과 모모 누나에게 립클로스와 목폴라T, 그리고 예쁘고 작은 접시를 선물했다. 내게는 책과 케익을 주었다. 물론 옹박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농담이다. 남은 음식은 옹박의 차지였다.
200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이날은 지난 3개월 동안 내가 보낸 날 중 최고였다. 가장 즐거웠고 행복했다. 그 장면 속에 있는 내가 좋았고, 마음에 들었다. 이런 느낌 오랜 만이었다. 올해 크리스마스 내 최고의 산타는 향인 누나였다. 누나의 따뜻함과 배려에 감사한다.
다시 한 번 음미하며 즐기고 싶다.
이날 밤, 배경과 전경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먼저, 우리를 편안케 해주는 음악, 사연을 알아 더 특별하게 들리는 폴 포츠의 음악, 재치 있는 요요마의 클래식, 관객과 함께하는 대가의 모습이 느껴지는 에릭 크립튼의 기타 연주, 과거의 로망을 부드럽게 끄집어내는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 연주. 두 번째로 술, 향인만이 구할 수 있는 복분자, 사부님과 함께 자주 즐겼던 칠레 와인 포르토(Porto), 매우 비싸지만 누군가에게는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이름 모를 와인 한 병. 다음으로 음식, 향인 누나가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 호두와 초코렛이 함께 담긴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없었으면 서운했을 부드러운 케익, 씹는 맛이 일품인 과자들. 그리고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조명과 은은하게 흔들리는 초의 불빛. 이 모든 것과 함께 했던 우리들, 오고간 눈빛과 미소, 마음. 사랑하는 사람들, 향인, 옹박, 모모, 호정, 일귀.
처음에는 음식과 음악과 술이 전경이었다. 우리가 모이자 그것들은 배경으로 물러났다. 잘랄루딘 루미가 어떤 마음으로 ‘봄의 정원으로 오라’는 시를 썼는지 알게 되었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 잘랄루딘 루미, 봄의 정원으로 오라)
영화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를 보면 크리스마스 때 한 남자가 친구의 와이프에게 귀엽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남자는 고백을 한 후에 말한다. “이걸로 충분해(It's enough).” 내게 이 장면은 다른 영화의 한 장면과 오버랩된다. ‘원스(Once)’에서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을 떠나면서 고백 대신 피아노를 선물한다. 그리고 빠르게 걸어가는 그를 잡은 카메라 앵글, 그 속에서 그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걸로 충분해(It's enough).”
가슴 아픈 이별, 누군가를 향한 거친 마음, 며칠 후면 다시 올 외로움,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 좁히기 어려운 생각의 거리, 그려지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 아직도 나를 찌르고 있는 과거의 상처, 그 어떤 것도 그걸로 충분했다. 아마 다들 충분했을 것이다. 그날 밤, 내 마음이 그랬다.
“이걸로 충분해(It's enough).”
* 오랜 만에 글을 써본다. 모모 소라 누나, 옹박 승오, 호정 민선, 향인 은남 누나, 그리고 폴 포츠의 음악이 아니었다면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내 마음에 감동을 선사한 이들이 나의 산타다. 잘 쓴 글이 아니고 멋진 글도 아니지만 내겐 대단한 글이다. 글을 쓴 거만으로 충분하다는 느낌, 오랜 만에 느껴본다.
“이걸로 충분해(It's en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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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찬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순간만큼은 내가 이미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라네..^^ 매번 느끼는거지만 참 좋은 사람들이고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알고 그 감사로 또 다른 고마움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들이라서 좋다.
다음에는 유부남도 껴주라. 이렇게 글로 그날의 일들을 스케치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 눈과 마음으로 느끼고 싶구나. 니가 글을 써주어서 참 고맙고 대견하다. 향인님한테 솔로전담 산타라는 칭호로 불러 드려야겠구나. 나한테도 니가 힘을 많이 주었는데 너도 알다시피 무심한 사람인지라 너한테 신경을 많이 못썼다.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 주라. 그래도 마음까지 놓아버린 것은 아니니까..^^ 사랑한다.. 이눔아..
다음에는 유부남도 껴주라. 이렇게 글로 그날의 일들을 스케치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 눈과 마음으로 느끼고 싶구나. 니가 글을 써주어서 참 고맙고 대견하다. 향인님한테 솔로전담 산타라는 칭호로 불러 드려야겠구나. 나한테도 니가 힘을 많이 주었는데 너도 알다시피 무심한 사람인지라 너한테 신경을 많이 못썼다.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 주라. 그래도 마음까지 놓아버린 것은 아니니까..^^ 사랑한다.. 이눔아..

향인
급한 대로 궁상 떠는 솔로들을 전담하긴 했는데 그러고 보니 홀로 보냈을 다른 궁상들도 떠오르네.
이브날이래봤자 그냥 하루에 불과한데 청춘들은 그렇지 못했는지 진짜로 5시가 넘어가면서 오겠다고들 했다. 오는 사람 안 막는 나, 그려 오너라, 맛보다 양으로 준비했는데 참 무지하게 먹더군. 무시무시하더라. 그래도 간만에 표정이 밝아보여 보기 좋았구먼.
내년 이브에 우리가 또 다시 만날 일이 제발 없길 바래본다.
참, 냥이들은 왜 빼어놓았느냐? 5라운드까지 가고도 합의가 안된 넘들. 한결이가 테리 4대, 나 2대 때리고도 계속 울어제끼던….녀석 괜찮았나 모르겠다. 테리는 한결이가 남기고 간 통조림을 다 먹어치우곤 깊은 수면을 취하셨다는..
이브날이래봤자 그냥 하루에 불과한데 청춘들은 그렇지 못했는지 진짜로 5시가 넘어가면서 오겠다고들 했다. 오는 사람 안 막는 나, 그려 오너라, 맛보다 양으로 준비했는데 참 무지하게 먹더군. 무시무시하더라. 그래도 간만에 표정이 밝아보여 보기 좋았구먼.
내년 이브에 우리가 또 다시 만날 일이 제발 없길 바래본다.
참, 냥이들은 왜 빼어놓았느냐? 5라운드까지 가고도 합의가 안된 넘들. 한결이가 테리 4대, 나 2대 때리고도 계속 울어제끼던….녀석 괜찮았나 모르겠다. 테리는 한결이가 남기고 간 통조림을 다 먹어치우곤 깊은 수면을 취하셨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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